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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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많은 번역본이 나온, 유명하다는 말조차 고루한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보게 한 책이었다.

[변신]을 단행본으로 빼 출간한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표지부터 내지까지 일러스트가 일품이다.

 

문학동네에서 이제껏 펴내온 분위기와는 사뭇다른 스타일의 판형과 표지때문에 눈길을 끄는 것도 있지만, [변신]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현실적인 느낌을 일러스트에서 십분 살렸다. 덕분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이야기는 더욱 공포스럽고 처참하게 그리고 카프카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다가온다.

일러스트를 그린 루이스 스카파티에 대해 뒤늦게 찾아보니 이 작가의 화풍과 그의 작품 세계 자체가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야기한 세계관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었다. TV를 비롯해 현대 문명에 대한 경계, 날로 무감해지는 정서에 대한 비판 등,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날카롭다. 그의 작품을 찾아보고나서 변신의 일러스트를 다시 보니, 정말 그가 그린 변신의 일러스트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강해진다.

 

베일듯 날렵하고 서늘한 펜선과 흑백의 어지러운 명암이 벌레가 된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의 가정이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강조한다. 거대하지만 비루한 모습의 갑충 그레고르와 표독스러운 얼굴의 인간들(가족들)이 대비되어 벌레가 된 주인공 나아가 벌레같은 (돈벌레, 공부벌레 등등) 현실에 처한 독자의 현실이 강렬한 이미지로 모든 감각을 파고든다. 그레고르의 등에 사과가 박혔을 때, 마치 그 빼도박도 못하는 이물의 아픔이 내 등의 소름끼치는 불편함으로 전해질 정도다.

벌레로서 최후를 맞은 그레고르의 우두둑 끊어진 다리(이건 우리 집에서 죽어나간 벌레들을 연상하게 해서 정말 소름이 돋았다)보다 끔찍한 것은 그레고르의 사체를 처리한 후 자유롭게 살아갈 가족이다. 갑충이 된 그레고르를 벌레(혹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만든 것은 그 가족들이 아닌가. 내 자신이 벌레가 되는 것도 너무나 끔찍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벌레로 전락시키는 것도 미치도록 끔찍한 일이다. '

 

사실, 가장 끔찍한 것은.

살아갈수록, 이 세상은 벌레로 전락하기도 더욱 쉬워지고 남을 벌레로 만드는 것도 너무나 쉬워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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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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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은 작가로서의 전 생애동안,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터키의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왔다. 작품의 빛깔은 매번 달랐지만 그 속에서 그가 담아낸 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터키의 정체성’이었다. 유럽과 동양 사이에서 ‘과연 나(터키)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춘기 소년 터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혼란스럽지만 고풍스럽고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묘한 공간이 되어 독자를 끌어안았다. 그 속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과 유럽이 되려는 자들 사이에 은근하지만 분명한 파열음이 있다. 터키만의 문화에 민족의 존속을 걸면서도 보르포루스 같이 깊고 푸른 그 품으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 무엇이라도 품어버리는 무한의 관용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특징은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 속에 오롯이 그려졌다.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권리(우아한 아내와 야성적인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신이 준 행운이라고 여기는 권리) 사이에서 그는 개방적인 유럽의 가치관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그들 부모 세대의 엄정한 가치관대로 살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순간에 필요에 따라 맞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이 남자는 그 사랑이 영영 떠나버린 후에야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파렴치한 얼굴로, 그것은 한때의 치기였노라, 바람이었고 정욕이었노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노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터키’의 케말은 그러지 않았다.

 

 

보르포루스는 유럽과 동양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동양을 잇는 다리이자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를 하나로 품는 매개다. 케말과 퓌순이라는 두 세계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44일을 마치 깊고 푸른 강처럼 삼아 하나가 되어 흐른다. 오르한 파묵은 이 깊고 푸른, 남자의 강 같은 사랑을 순수라고 불렀다.그의 순수는 그녀를 박물관(책 속에서 주인공은 퓌순의 흔적을 추적해가며 그녀의 물건들 혹은 그녀를 연상시키는 물건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지었다)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실제로 구현해 허상과 현상을 잇는, 또 다른 보르포루스(오르한 파묵은 순수 박물관 원고를 떠올리던 십년 전부터 책에 등장한 박물관을 지을 것을 구상하고 십년 동안 준비해 실제로 올해 책속의 박물관을 건립했다)를 지었다.

 

 

케말과 퓌순의 순수한 사랑이 응축된 [순수박물관](책). 그들의 사랑에 실체를 부여한 작가의 순수한 집념이 세운 [순수박물관](책을 바탕으로 실제로 터키에 지어진 박물관). 사랑의 순수함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스란히 그 생명력을 품고 있는 박물관이다. 책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순수박물관은, 마치 동서양의 옛것과 새것이 공존해 동서양의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터키처럼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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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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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가장 세련된 유행이 흐르는 1970년대의 터키. 서양과 동양이 강 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마를 맞대고 있는 나라 터키는 동양이면서 서양이되, 서양이면서 동양인, 그러나 둘 중 아무것도 아닌 그냥 터키이기도 한, 묘한 나라다.

 

오르한 파묵은 작가로서의 전 생애동안,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터키의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왔다. 작품의 빛깔은 매번 달랐지만 그 속에서 그가 담아낸 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터키의 정체성’이었다. 유럽과 동양 사이에서 ‘과연 나(터키)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춘기 소년 터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혼란스럽지만 고풍스럽고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묘한 공간이 되어 독자를 끌어안았다. 그 속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과 유럽이 되려는 자들 사이에 은근하지만 분명한 파열음이 있다. 터키만의 문화에 민족의 존속을 걸면서도 보르포루스 같이 깊고 푸른 그 품으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 무엇이라도 품어버리는 무한의 관용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특징은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 속에 오롯이 그려졌다.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권리(우아한 아내와 야성적인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신이 준 행운이라고 여기는 권리) 사이에서 그는 개방적인 유럽의 가치관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그들 부모 세대의 엄정한 가치관대로 살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순간에 필요에 따라 맞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이 남자는 그 사랑이 영영 떠나버린 후에야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파렴치한 얼굴로, 그것은 한때의 치기였노라, 바람이었고 정욕이었노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노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터키’의 케말은 그러지 않았다.

 

 

“좋은 칼럼과 사랑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랑도 칼럼도, 물론 우리를 지금 행복하게 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의 아름다음과 힘은 우리 영혼에 얼마나 깊이 인상을 남겼는냐에 따라 평가되지요.”

페227

 

“우리 기술자들은 유럽 제품을 정말 잘 모방하지요. 하지만 당신처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봐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순간 침을 삼키며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녀가 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집에서 꼼꼼하게 준비해 온 듯한 말을 시작했다.

“나한테는 어떤 것이 유럽산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모방한 물건을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싸게 샀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챌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정말 나쁜 것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상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뭐라고 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있잖아요.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오랬동안, 이 가방으로 오늘 밤을 기억할 거예요. 축하합니다, 잊지 못할 밤이었어요.”

페236

 

그녀가 자를 사용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기 위해, 침대에서 자를 가지고 놀면서 두 시간 정도 누워 있었다. 이것은 나를 너무나 편하게 해주었고, 나는 마치 퓌순을 본 것처럼 행복했다.

페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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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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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 중에서 이십 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들을 서술한 책은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경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주 긴 침전의 과정을 통해서만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지요.

시간과 기억과 노스탤지어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무게 말입니다.”

p160

 

책을 펴고 몇 장 읽지 않았는데 나는 기함했다. 가정부와 난교를 가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정도의 성의식을 가진 이 남자는 대체 뭔가? 대체 창녀들과 노느라 결혼도 내팽개치는 이 괴씸하고 난잡한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의 90살 생일에 숫처녀인 미성년자와 하룻밤을 보내야겠다고 의뢰하는 장면에서는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저자를 믿어야 했다. 독자의 미덕은 이것이다. 특히 문학을 읽을 때는 더욱 절대적이어야 한다. 저자에 대한 믿음.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저자가 말한 “경험이 긴 침전의 과정을 거쳐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된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나는 참아야 했다. 그리고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한마디로 나는 창녀들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아흔 살이 되던 날까지, 그러니까 더 이상 운명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로사 카바르카스의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p55

 

90살 생일을 맞은 이 남자는 사랑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가족을 꾸리길 원했지만 그는 그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다 어느새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없이 아흔살 생일을 맞아버렸다. 노인은 이 초라하고 건조한, 남기고 갈 것이 없어 이토록 부담스럽고 텁텁한 삶의 의미를 숫처녀와의 하룻밤을 통해 찾고 싶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16살 소녀 델가디나는 그러나, 그에게 육체적 능력에 대한 확인 대신 열대의 진하고 습한 사랑을 끼얹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흔살 노인에게는 사랑이 되어 버렸다.

 

어쨌거나 당신 나이가 되면 쓸 만한지 아닌지가 늘 관건인데, 당신은 아직 쓸 만하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

하고 말했다.

p93

 

잠시 후 사육장에서 전화를 걸어와서는, 희생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데,

그러려면 내 허락이 필요하다고 했다.

왜 그렇다던가? 내 물음에 다미아나는 너무 늙었대요, 라고 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리라고 할 만큼 냉정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설명서 어디에 나와 있는 것가?

p104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 대신 좌절과 절망을 저도 모르게 꾸역꾸역 그 빈자리에 채워넣는다. 이 좌절과 절망에 빠져 가라앉지 않기 위해 어떤 이는 섹스, 어떤 이는 돈, 어떤 이는 명예, 권력 등등 저마다의 기호에 맞는 어떤 것으로 다시 사랑의 빈자리를 메꾼다.

창녀와 자기 위해 결혼까지도 물린 남자의 90살 생일에서야, 입 한번 맞춰보지 못한 16살 소녀로 말미암아 사랑의 경이롭고 평화로운 그러나 고통스럽고 쓰라린 세계를 발견했다. 이 대단한 발견을 통해 그의 경험은 정제되고 침전해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고 그렇게 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석쇠에 굽는 생선을 뒤집어 다른 면을 익히게 되는 것처럼, 그의 인생을 뒤집어 새로운 국면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녀도 고양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것도 사실임을 깨달았다.

즉, 내 고통의 달콤함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시들을 번역하려고 십오 년 이상을 허비했지만,

그날 오후에야 비로소 그중 한 대목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오, 가련한 나, 이것이 사랑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p112~113

 

“그 불쌍한 아이는 당신을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요.”

햇빛이 환하게 비추는 거리로 나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나의 첫 번째 세기의 희미한 수평선에 이르러 있음을 알았다.

아침 6시 15분경 고요하고 정돈된 나의 집은 행복한 여명의 색깔을 즐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 엔딩.....

 

고통은 삶의 방증이다. 평생에 단 한번도 고통스럽지 않았던 그는 델가디나 때문에 걱정하고 울고 분노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렇게 인생을 완성한 것이다. 평생 느낄 수 없었던 시의 한 대목이 그의 심장을 뚫고 지나는 순간, 그의 인생은 거기서 결정되었다. 남은 그의 삶은 사랑이 주는 행복한 고통 속에서 어느날 미련없이 눈을 감도록. 이 아름다운 마지막을 읽고 나면 마음에는 둥실, 사랑이 날아오른다. 노화의 서글픔, 인생의 허무함.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공유하는 절박한 한계의 무게라는 추를 달고 사랑은 놀이공원의 풍선처럼 찬란하고 평화롭게 날아오른다.

 

인생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진부한 결론이 이토록 명징하게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저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연륜에서 비롯한다. 그의 경험이 정제되고 침전하길 기다린 지혜로운 작가는 섹스에 탐닉해온 노인의 노년을 마치 오래된 소나무의 솔잎처럼 고상하고 향기로운 이야기로 빚어냈다. 90살 노인이 16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 향기롭다고 하면 이상한가? 노인의 불쾌하고 망측한 치정사를 미화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고양이의 안락사를 놓고 당황할 정도로 여전히 인생에 서툰 한 남자가, 마음으로 느끼는 사랑만으로 그의 인생을 완성해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루 지나면 하루만큼, 1년이 지나면 다시 한살을 먹는, 그가 늙어온 시간처럼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기 때문이 한없이 아름답고 평온하다.

 

삶은 길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그 어떤 노인이라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인생을 완성하고, 인생은 사랑이 주는 생명력 안에서 재생된다. 그렇게 삶은 때로 영원까지 바라볼 만큼 길다.

당신의 긴 삶에서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저 노인이 소유한 아침 햇살 같은 황혼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누군가 즉시 떠오른다면 당신의 인생도 이미 완성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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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권하다 -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 더퀘스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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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누구도 철학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거나 성공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땅, 부, 명성, 철학은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약속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이 외적인 부가 아니라 내면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는 했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철학의 한계를 알았다. 그리고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점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이 책에서 첫 번째로 배운 교훈, 즉 우주에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p187

 

 

플라톤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런 책은 왜 읽습니까?’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잘나가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업적이나 (툭 까놓고, 독서가가 남길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위대할 수 있겠나?)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특별한 성과를 위한 것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규명할 방법을 책에서 찾고 있는 것뿐인데, 이런 말을 그 상대에게 건넸을 때 그가 어디까지 내 의견을 존중해줄지 알 수 없었고 굳이 존중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대답할 말도 없었다. (이런 의견을 존중해줄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저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

 

 

‘20대에 반드시 해야 할 00가지’ 따위의 자기계발서보다도 못한 처지에 놓인 지금의 철학서(적어도 저런 자기계발서를 들고 있으면 그런 건 왜 읽니?라는 질문은 받지 않는다)가 딱하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사람이 채소의 생즙을 역겨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쉽고 피상적이고 간단한 텍스트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다. 물론, 철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데에는 철학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 철학은 도서관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다. 유명한 자기계발서들에 실린 메인 아이디어들의 원형도 철학이고 수많은 심리치료사, 상담사들의 이론과 테라피 저변에 깔려 있는 것도 철학이건만 실상 그걸 접하는 대중이나 심지어 저자와 상담사 본인들도 그게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르고 있는 이 현실은 철학이 스스로를 종잇장에만 봉인해 온 결과다.

 

 

분명 그렇다. 철학은 삶은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거나, 불운한 사건을 행운의 사건으로 바꾼다든가, 암환자의 암세포를 궤멸시킨다든가 하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철학은 종이 위에서는 아주 무능력하다. 하지만 이 철학이 거리로 나와 삶으로 스며들면 상황은 반전된다. 돈의 힘, 죽음의 위협까지도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가 철학으로부터 흐른다. 이건 시너지다. 사람이 철학을 살아있게 하는 동시에 철학이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 삶은 삶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떨어져 있다면 결코 나타나지 않는 이 에너지 때문에 [철학을 권하다]의 저자 줄스 에반스는 철학을 권한다. 성공해야만 하고, 돈을 끝도없이 벌어야만 하는 우리 세대를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가들의 가르침을 권한다. 홧병에 시달리고 정신질환을 앓고 잔인한 순간들에 할퀸 트라우마에 잠식된 우리들에게 절실한 삶의 기술을 권한다.

 

 

주목해야할 것은 이 ‘삶의 기술’이다. 학교에서도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는 이 삶의 기술을, 저자는 철학에서 찾았다. ‘철학에서 해법을 찾았어요’라고 하면 먼지 냄새 폴폴나는 오래된 철학서들을 뒤적였을 것 같은 느낌이 나지만, [철학을 권하다]가 권하고 있는 철학은 매우 신선하고 선명한 거리의 공기가 배인 철학이다.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 인문학을 주도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운동가와 학자들을 오가며, 에반스는 철학 이론이 아닌 각 철학가들의 가장 무게 있는 메시지들을 삶에 적용하는 기술을 정리했다. 특히 믿을만한 것은 철학을 마법 주문처럼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각 철학 종파와 계류를 분류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어떤 힘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도 아주 냉철하고 때로는 위트있게 각각의 맹점과 허점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절대적인 철학가도 없고 완전히 효과적인 현대 철학 운동이란 것도 없다. 이 책은 그 제목처럼 다만 ‘철학을 권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이 고민해 온 것이란 대동소이하고 때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가들의 고민과 가르침도 우리 삶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 적용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변화를 삶에 불러오므로 철학을 알기를 권한다. 철학을 알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곧 삶의 기술이 되기 때문에 삶의 여정이 남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철학을 권하고 있다.

 

 

사람들이 철학을 실천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녀온 믿음이 그다지 현명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받아들인 철학에 진정으로 몰두하고, 그것을 정신에 각인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철학은 피상적인 것에 머물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스스로에게 말했듯, “너의 정신은 네가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을 닮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지닌 생각의 색으로 물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혼을 지혜로운 생각들 속에 담그도록 하라.”

p192

 

 

이 책이 다루는 철학의 범위가 서양철학, 고대나 현대나 결국 서구의 학자들로부터 시작해 서구에서 주로 다뤄지고 있는 철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쉽다. 삶을 사랑하는 기술을 가지게 하는 철학은 어쩌면 동양 철학에서 더 깊고 강력한 근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나의 기대일 뿐. 이 책에서 삶을 사랑하는 기술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충분하다. 남겨진 것은 저자인 줄스 에반스가 그러했듯, 이 철학들을 삶에 새기기 위해 내가 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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