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잔해를 줍다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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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침 비가 내렸다. 가을이 비에 젖은 낙엽을 자신의 발자국처럼 남기고 그 위를 달려 사라지는 것이 선명하게 들렸다.

이 선명함은 서글펐다. 가을이 달려, 영영 작별해 버리는 이 소리는 멀리서 걸어오는 겨울의 느릿하지만 단호한 발소리이도 했다.

[바람의 잔해를 줍다]의 주인공인 에쉬는 카타리나의 지독한 잔해 속에서, 비 맞고 더욱 옹골차게 영근 뜨거운 사랑을 주웠다. 나는 이 가을의 잔해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망설인다.

 

'바람의 잔해'라는 어감은 사뭇 파괴적이다. 분명 무엇인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허물어진 느낌을 준다. 비에 잔뜩 젖어 도로 위에 널부러진 흙과 돌, 탁하고 축축한 흙냄새, 허전한 바람냄새가 엉겨 있었다. 그래서 엄마를 잃고 아빠 그리고 2명의 오빠와 어린 남동생을 가족으로 두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에쉬의 일상은 내게 처음부터(책의 첫 장을 편 순간부터) 부서지고 무너지고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에쉬는 (그녀 본인이 화자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그 가엾은 인생의 슬픔을 표출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도 울줄 아는 이 성숙한 아이는 그것이 동시에 얼마나 쓰라린지, 마치 상처 위로 레몬즙이 흘러가는 듯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폐차장에서 풀어 키우는 닭들의 둥지에서 달걀을 찾을 때도, 오빠가 자신의 상처에 침을 발라 닦아주는 것을 보면서도, 홀로 있을 때는 언제든지 엄마를 회상하면서도 아프다, 그립다, 슬프다고 가슴을 치지 않는다.

 

저자는 에쉬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녀의 입에서 흐느낌이 나오게 하는 대신, 이야기 전반에서 끊임없이 피와 살과 상처를 묘사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하고 있는 여신 차이나 (차이나는 그냥 암캐가 아니다. 전쟁의 여신이자 에쉬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여신 메데이아의 현실화된 존재다.)의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개싸움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목마르다 못해 갈라지고 피가 튀고 살이 벌어져 붉은 생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에쉬의 심정을 대변한다. 저자는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차이나, 사랑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배신한 남성을 응징하기 위해 가차없이 가족을 베고 자식마저 죽이는 메데이아, 죽은 뒤에도 이 가족의 일상에 여전히 남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에쉬의 엄마를 정교하게 엮어 바람을 이겨내고 그 잔해에서 뜨거운 사랑을 줍는 에쉬를 완성했다.

 

이 이야기는 곱씹어 볼수록 정말 섬세하고 영민하다.

 

에쉬의 성장과 더불어 가족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동시에 작가는, 경제상황은 궁핍하고 아이들이 성폭력과 도박 등 온갖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이 된 지금의 열악한 흑인사회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여전히 사회에 상존하고 있어 그것은 치명적인 발톱으로 약자들을 할퀴고 있음을 고발한다. 특히 제대로 된 정서적 육체적 울타리가 없이 자라는 아이들의 깊은 상실과 상처를 세심하게 그려 페이지를 무심하게 넘기다가도 어느 순간 그들의 상처에 동화된 독자가 눈물을 터뜨리게 한다.

교미상대이자 자기 새끼의 어미인 차이나에게 달려들어 모성의 상징인 젖가슴을 뜯어버리는 숫캐 킬로와 차이나의 싸움은 현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서로의 약점을 물고 물어뜯는 남성과 여성의 묘한 관계를 비추기도 한다. (여성들에게 듣기 좋은 소식이라면, 결국 차이나가 킬로를 응징한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가치는 여전히 등대의 빛처럼 반짝거리는 따스함으로 살아 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투쟁에서 승리한 여신 차이나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 책의 마지막은, 별빛 하나 없는 적막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희망을 끌어안은 채로 독자들에게 안녕을 전한다.

 

차이나. 차이나는 돌아올 것이다. 길고 곧게 서서, 젖가슴에서 우유 방울을 흘리며,

차이나는 우리가 이곳 웅덩이에 만든 빛의 원을 내려다볼 것이고 내가 잘 지켜보았다는 것을,

잘 싸웠다는 것을 알아줄 것이다.

-p386

 

부아 소바주의 거친 생명들은 그러나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씨를 뿌리며 그렇게 또 한 해를 살아낸다.

- p179

 

가족, 남과 여, 아이와 어른, 자연과 인간, 인간과 동물을 한 이야기 속에서 동시에 살아있고 동시에 이야기하며 동시에 흘러간다. 마치 이 늦은 밤, 나는 글을 쓰고, 옆방에서는 잠을 자고, 고양이는 나른한 걸음으로 창가를 지나고, 나무는 마지막 이파리를 떨구고 바람은 겨울을 준비하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살아있지만 자연스럽게 한데 흘러 같은 메시지로 귀결된다. 살아 내는 것의 치열함. 살아 내는 것의 고독. 그렇게 살아 낸 사람에게 부여되는 영광(사랑). 왜 이 책이 미국 평단의 극찬을 받았는지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책의 뒷 페이지에 실린 그런 극찬이나 수상 기록이 오히려 이 덤덤하면서도 명민한 책의 감동을 가릴 수 있다. 이 책이 궁극적인 메시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에쉬처럼 덤덤하게,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심장을 양팔로 끌어안고 그녀의 12일을 함께 보낸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심장으로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는 그 뒤에 한 문장을 더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더욱 강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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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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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목적은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데이트 상대를 구하거나 잠자리 파트너를 만나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 - 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 -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 이 책의 끝에, 작가 스티븐 킹이

 

 

누군가는, 작가는 신의 부름을 받아 탄생하는 숙명의 존재라고 했다. 누군가는 또, 쓰고 싶은 것 그리고 써야 하는 것을 쓰도록 스스로 택한 사명의 존재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건 관계없다. 중요한 건, 작가로 산다는 것 자체 아닌가.

클로이 모레츠를 주연으로 한 21세기판 캐리 포스터가 공개되었다. 스티븐 킹의 이 오래된 작품은 또 다시 영화화 될 정도로 징그러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 수십개를 꾸준히 완성시킨 작가가 쓴 글쓰기(소설) 안내서는 그가 이제껏 발표한 수많은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흥미롭고 재밌다.

원, 글쓰기를 안내한다고 하면서 자기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불쑥 꺼내놓는 센스라니.

 

이야기로 하여금 남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야 뭐가 그리 어렵겠냐마는, '그 이야기를 꼭 내가 소유하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이야기는 아무나 그리고 언제라도 뽑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아는 걸 쓰면 된다'라는 것들이 모든 선배 작가들의 거의 공통된 조언이지만, 스티븐 킹은 말한다.

 

모르면 어때? 그냥 상상해버려.

 

네, 그런 방법도 있네요.

라고 빈정거려주고 싶지만 물리적인 거리도 거리인데다, 과연 그 사람과 마주하고 이런 대가에게 '아, 예예' 라고 할 정도의 오만함은 나한테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메일이라도 보내볼까.

 

스티븐 킹이 처참한 교통사고를 당했던 때와 이 책의 원고 진행 기간이 겹친다. 때문에 교통사고 이후, 작성한 원고 - 책의 후반부, 그가 그의 교통사고 경험을 적어놓은 부분 이후 - 는 그 이전에 작성한 원고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에너지가 넘치고 중년의 나이지만 여전히 싱싱한 상상력과 정력적인 창조열을 가진 작가는 죽을 뻔했던 사건 이후 왜 글을 써왔는지, 작가로서의 생의 가장 깊은 부분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그러더니 맨 마지막, (원고 교정 예시 페이지 전에) 이런 글을 써 놓고 책을 마감한다.

 

글쓰기는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나는, 신이 택한 자가 작가가 된다는 데에도 동의하고 스스로에게 글쓰기의 사명을 부여한 자가 작가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글이 곧 신인데, 글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아야 하는 작가를 신이 택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이고, 역시 스스로 글을 써야겠다는 소명 의식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어떻게 탄생되든지 간에, 작가는 글을 쓴다. 그것이 작가를 살게 하기 때문에.

 

나는 시종 내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온갖 공상과 망상에 조금 지쳤다.

이 놈들을 어떻게 종이 위에서 살아있게 할 것인가, 고민이 지겨워졌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진심어린 조언은 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행복해지기위해서 쓰는 것이다.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글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그랬다.

"마누라한테 정말 화가 났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봐. 너 그렇다고 마누라 없이 살 수 있냐? 엉? 그러면 답이 나와. 못 살거든."

 

딱 그 심정이다.

행복해질 수 없다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쓰지 않고서도 행복해질 수 없다면 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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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톡 : 초보자를 위한 미술감상 토크쇼
롤프 슐렝커, 지모네 로이터 지음, 정연진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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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고급문화다. 아무리 미술관에 어린아이 장난 같은 추상화나 키치 작품들을 전시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미술관'이라는 단어에 연상해 떠올리는 이미지나 느낌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미술관 혹은 박물관은 여전히 고급문화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놀이터 같은 곳은 절대 될 수 없을 거란 얘기다. 시간과 공간이 정제한 인류 문화의 응집체들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미술이든 뭐든, 세월이라는 숙명의 적을 이겨낸 끝판왕들이 버전별로 시대별로 버티고 있는 장소인데.

 

 

이 도도한 고급문화를 오랜 친구처럼 편안히 대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아는만큼 보인다,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걸 알면서도 이 '알아가기'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미술관에나 박물관을 부지런히 드나들어도, 아무 준비없이 드나들기만 한다면 어느 단계 이상은 이해하고 느끼기가 쉽지 않다. 특히 미술의 경우, 어딜 어떻게 봐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 그냥 전시된 그림 사이를 걸어 산책 하는 것 밖에 하지 못하고 돌아오기 쉽다. (뭐, 이건 내 얘기 ^^) 그림은 종류도 워낙 많고 르네상스니 인상주의니 하는 것들은 무척이나 헷갈리는 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피카소처럼 시대를 가로지른 화가들이 아니면 이름 외우기도 쉽지 않은 것이 서양 미술.

 

 

굉장히 복잡한 듯 보이는 서양미술사를 유유히 가로질러 콧대 높은 서양미술 작품들과 친구맺어주는 기특한 책이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내 하소연이 독일까지 들린 모양이다. 독일의 방송국의 인기 진행자와 두 명의 전문가가 힘을 합쳐 미술 강의 방송을 만들었다. 이 방송 프로그램은 책이 되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단 14점의 작품으로 (서양) 미술사 만 4천년을 보여주겠다는 둥, 미술 감상의 ABC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내용이라는 둥 하는 책 소개에는 귀 기울이지 않아도 좋다. 그냥 주욱 한번 읽어보면 이 책이 미술 감상에 입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데에 주저없이 동감할 것이다. 더 상세한 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돌다리로 삼아도 좋을 책이고 미술시장과 현대 미술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싶을 때 참고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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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벨아미 펭귄클래식 108
기 드 모파상 지음, 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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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이나 반성 혹은 비판은 없다.

처음부터 양심이나 이타심, 선의, 정의 등이 상실된 채로 태어나 일생의 단 한 번도 그러한 가치를 교육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대도 있을 수 있다. 뒤루아-모파상이 호흡했던 19세기 프랑스가 그랬던 것 같다. 정부가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정재계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온갖 불의와 부정이, 마치 원래 그러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지극히 모파상 개인의 시각일 수 있다. 어쨌건 그가 그린 뒤루아의 프랑스는 그랬으니까.

 

모파상은 자신의 분신인 뒤루아에게 어떤 도덕적인 비판이나 반성의 날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뒤루아에게는 그런 것이 옳을 뿐이다. 자신이 가진 남성적인 매력을 십분 활용해 온갖 여자와 부정을 일으키고 그 부정이 주는 힘과 본인의 재빠른 계산을 지지대로 삼아 남작으로까지 신분을 상승해 가는,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고 제일 옳은 것이다. 소설 전반에는 어느 인간에게나 절대적 한계인 '죽음'에 대한 공포만 아스라하게 등장할뿐 뒤루아를 비롯해 참으로 부도덕한 극중 사람들에게 비난을 가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솔직함, 저자 스스로의 뻔뻔하지만 확고한 가치관이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일 수 있겠다. 마차 안에서는 온갖 말로 여자를 위로하고 보듬고 마치 당신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 맹세하던 뒤루아가 방 안으로 여자를 몰아넣는 순간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목적을 달성해버리는 것처럼.

 

누군가 그랬다. 소설을 꼭 계몽적인 목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거야?

동감한다. 쓸쓸할 때, 가슴이 아플 때, 그냥 아무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아 우울할 때 시를 읽는 것처럼.

 

소설도 그렇다. 어떤 교훈이나 인생을 바꿀 커다란 깨달음, 대단한 지식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 아침에 출근하고 밤이 되면 잠이드는 이 익숙한 풍경도 좋은 소설 속에서는 작가의 야무진 시각과 메시지를 덧입고 생전 처음 만나는 세계로 변모하지 않던가.

뒤루아의 세계는, 생전 처음 보는 세계이면서도 이전에 만났던 익숙한 세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비도덕적인 인물, 파렴치한 인물은 절대 파렴치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극중 인물들로부터 파렴치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지언정, 소설 자체는 그를 파렴치한으로 놓아두지 않는 것이다. 마들렌 성당 꽃향기 속에서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린 다음 정부인 드 마렐 부인을 떠올리는 신랑을 그린 엔딩만 보아도, 이 불한당같은 개놈 뒤루아가 살고 있는 벨 아미의 세계에서 그를 얼마나 자연스러운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끝끝내 승승장구하는 이 나쁜 놈 그러나 (뒤루아를 아주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건 또 아니니) 나쁜 놈이라고 그를 욕하지 않는 묘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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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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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그림자와 상존한다. 처음부터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가 없다면 ‘생존’이라는 단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별은 죽어 가는 것(현재는 살아 있는 것), 죽어 있는 것, 죽어 없어진 것이 한데 뒤엉켜 있다. 죽어 가는 것들은 죽어 있는 것을 추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없어지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실제로 ‘죽음’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루에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죽음을 확인하던가.

그러나 죽음의 실체는 고통이다.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나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모두 아프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생존 역시 고통일 수밖에 없다. 내 몸을 죽이는 암세포가 그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암세포 자체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젠장, 먹고 살기 되게 힘드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주인공 헤이즐은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다. 멀어지는 친구들, 답답한 환경, 안쓰러운 부모님, 온갖 임상실험을 들고 덤비는 의사들. 암투병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이 철학자는 죽음을 둘러싼 인생의 모든 과정과 그 본질에 대해 이미 빠삭한 깨달음으로 중무장했다. 암투병을 위대한 용기라고 부추기는 격려에는 코웃음 치고 암환자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댓글들에는 분노를 느낀다. 대부분이 죽은 자들에 의해 지어진 세계에 살면서 어째서 단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안쓰럽고 안되고 불쌍한 것, 특히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지,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혀를 찬다.

 

작가는 그녀를 통해 죽음을 경원시하거나 영웅시하거나 혹은 온갖 의미를 부여해 미화하거나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봐, 죽음도 그저 삶의 한 점이야. 마지막 점 말이야. 책장의 마지막을 넘기고 나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나는 것처럼, 죽음은 삶에서 이어지는 그것, 외면할수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 지은 이 별에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남의 마당에 밀어 놓고 멀리서 구경한다. 마치, 너는 오늘 죽지만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나 무거운 주제, 너무나 처열한 주인공이지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볍게 페이지를 넘어간다. 통통통~ 요즘 말로 '썸'타는 두 남녀의 문자질은 간질간질하고, 재기넘치는 대화들은 유쾌하다. 불치병에 발뒤꿈치를 덥썩 덥썩 물리면서도 이 아이들은,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삶의 신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암과 싸우는 것보다 더 장렬히 분투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슬프지 않다. 고리타분한 소재와 진부한 주인공으로 뻔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그저그런 눈물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슬픔 대신 잔잔한 여운으로 산뜻하게 매듭을 짓는다. 그러나 분명 그 무게를 놓치지 말아야 할, 작가의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전쟁에서 용감히 총알받이가 된 사람들은 박물관에 전시하지만 병으로 죽은 사람들에게서는 명예로운 점을 찾을 수 없다고 개탄하는 어거스터스의 대사는 ‘죽음’ 그 자체에 사실 명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작가의 대언이다. 죽음은 이 별의 순리 중 한 단계일 뿐이라고. 그래서 죽음에 수반하는 고통의 원인도, 그 고통 속에 생존할 수 밖에 이 몹쓸 상황의 잘못도 모두 별에 있다고 작가는 격려인지 책망인지 모를 이야기를 남긴다.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모든 존재여! 이 별에 모든 잘못을 돌린 채 ‘될대로 되라지.’라며 생을 소비할 것인가. 아니다. 이 순간 뜨겁게 뛰고 있는 심장의 생명력 역시 이 별로부터 왔다. 잘못이 별에 있다는 것은 결론일 뿐이다. 우리는 '축복'같은 삶의 과정을 살아가야 한다. 명치 깊숙한 곳으로부터 코 끝으로 다정한 호흡이 들고 나는 것, 부드러운 체온과 향기로운 감정을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이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을 몸살나게 했던 삶과 죽음의 신비가 이것 아닌가. 삶과 죽음. 같지만 같지 않은 것.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것.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가장 신묘한 부분도 이것이다. 삶과 죽음. 이 기이한 별의 원리를 청춘드라마로 풀어내 들려준다는 것. 십대의 꽁냥질 속에 '생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명체 공동의 철학적 의문이 담겨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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