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내면의 풍경
미셸 슈나이더 지음, 김남주 옮김 / 그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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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음악 듣기를 즐겨하지만 연주하기와는 사이가 멀다. 그래서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는 일을 마치 낮고 무거운 어떤 목소리를 내는 일이라고 쓴 책 뒷면의 글은 매우 낯설었다. 나는 곧, 내가 그간 부드럽고 아름답기만 하다고 느꼈던 슈만의 곡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슈만은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의 곡을 들려주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내가 들은 슈만은 정말 진짜 슈만이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런 삶을 산다. 고통은 일종의 감각이다. 음식에 단 맛, 짠 맛, 신 맛, 쓴 맛, 매운 맛이 어우러진 것처럼. 고통은 삶이 본질적으로 동반하는 여러가지 감각 중 하나다. 다만 어떤 이의 혀는 다른 맛보다 단 맛을 더 민감하게 느끼고, 다른 이의 혀는 짠 맛을 느끼는 것처럼, 삶의 수많은 감각 중에 고통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슈만이 그런 음악가가 아니었을까. 글쟁이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글을 통해 일생을 관통하는 고통에 쓸수 밖에 없듯이, 슈만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평생 그의 삶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던 고통과 허무는 슈만의 음악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제목 그대로 슈만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던 그리고 그 노력을 독자와 함께 하기를 원했던 저자의 책 [슈만, 내면의 풍경]은 참 어렵다. 내가 기본적으로 슈만의 음악에 정통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의 화법이 보편적인 흐름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슈만처럼 고통에 천착하고 내면의 허무에 시달리는 인간형이 아니기에, 슈만의 내면에 공감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내용과 주제가 모두 어려운 책이라 2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책이건만, 나는 이 책을 꽤나 오랫동안 씹어먹어야 했다.

 

그러나 만약, 음악가의 생애가 아닌 그 내면의 세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음악가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그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한다. 저자는 슈만의 생애가 아닌, 슈만 자신의 눈으로 그의 시각으로 슈만의 말년을 성찰한다. [슈만, 내면의 풍경]은 엄청난 분석과 연구와 더불어 음악을 통해 고통을 이야기한 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바탕이 된 감성이 동반된 책이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어려운 원고를 유려한 문장으로 번역해준 김남주 님의 말을 먼저 읽고 난 후에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책 제일 뒤에 담긴 김남주 님의 말은, 이 책의 어려운 활자들을 읽기 어려워 질 때 필요한 동기와 에너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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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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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직선과 곡선을 가리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나있다. 온갖 차들이 온갖 방식으로 길을 지난다. 그러나 길 위에서 사람은 두 종류다. 달리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 명예나 돈, 권력, 재미를 위해 누군가는 전속력으로 차를 달린다. 경쟁하던 차들이 뒤엉켜 처참하게 구겨지고 사람이 죽는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고 레이스는 끝나지 않는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레이스가 레이스다워졌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레이스를 구경만 할뿐이다. 마치 전쟁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희생될 때, 멀찍이 서서 그것을 구경하듯이. 전쟁을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 군인의 상처는 외면하듯.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방관하게 될까. 달리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 모두 길 위에 있지만 과연 달리는 사람의 길과 구경하는 사람의 길은 같은 길일까.

 

 

[이런 이야기]는 열여덟 굽이의 길을 전속력으로 레이스한 사람의 이야기다. 아니 사실은 사람들이 달음박질하는 모든 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열여덟 개의 굽이가 있는 레이스 서킷을 구상하고 짓고 그 길을 질주한 주인공은 울티모인데, 울티모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흐르는 부분은 많지 않다. 이야기는 시종 다른 사람의 눈으로 울티모를 보여준다. 저자는 어린 울티모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소 수상하고 불친절하게 안내한다. 울티모를 찾아다니며 독자가 더듬는 것은 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더해서 결국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완벽한 뺄셈이자 노인의 주름처럼 한 굽이 한 굽이 고스란히 생애의 시간들을 담고 있는, . 울티모는 일찍이 길의 이치 곧 생애의 이치를 깨우치고는 자신의 인생을 담아낸 완전한 서킷을 짓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울티모가 인생의 목표인 서킷을 완성하고 그 길을 질주하고 난 후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길이니까. 길은 언제나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되기 마련이고 레이스는 길이 있는 한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길은 구경하는 사람이 아닌 달리는 사람에게만 온전한 길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길은 변덕스럽고 심술궂고 엉망진창으로 꼬여있다. 그러나 길은 진실하다. 길은 오직 그 길을 질주한 사람만을 기억한다. 울티모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엘리자베타에게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시기에만 진정으로 살았다 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은 그래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어달리기의 주자가 바뀌는 바통터치의 순간이었으므로.

 

울티모는 엘리자베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미치광이 같았죠. 하지만 진실했죠. 하나의 길과 같았어요. 생뚱맞은 굽이가 자꾸자꾸 나오는 길, 돌아올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광막한 벌판으로 내닫는 길,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달리고 또 달리는 길이었죠.” 그가 엘리자베타 더러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볼만한 길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책을 덮어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구경꾼이 아니었다. 도전적이었고 당돌했다. 심지어 그녀는 울티모를 그녀가 만든 길 가운데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곡선의 미학에 일찌감치 매혹된 울티모가 온갖 변주로 휘어져있는 서킷 같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의 황혼에서 잠시 마주쳤다 덤덤하게 헤어져 끝내 각자 홀로 죽음을 맞은 연인은 비극적이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진정으로 살아낸 인생이 있는 그들에게 기다림과 추억이라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벌어진 그런 저런, 이런 이야기일 뿐.

 

 

 알렉산드로 바리코가 이야기 속으로 낸 길은 무척 아름답다. 울티모의 여정은 담백하고 그의 소식을 전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온화하다. 돌이켜보면 울티모의 이야기를 전해준 모든 사람들 중 구경꾼은 없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낸 사람들, 진정으로 살았던 순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죽음과 이별, 비극이 벌어지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화자들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다. 엘리자베타가 젊었을 적에 썼던 일기를 중년이 되었을 때 또 노인이 되었을 때 펼쳐보며 그녀가 달려온 길을 회고하듯, 내가 달려갈 길에서도 이따금씩 이 책을 펼쳐보며 과연 내가 해내야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가다가 죽더라도 가볼 만한 길이 되고 있는지 비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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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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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했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렸네요.”

작품 속 296페이지 리노의 말 중에서

 

 

내 길에 확신을 갖는다는 일은 참 어렵다. 나름 열심히 걸어왔고 또 부지런히 길을 간다고 가는데도 목적지는 대체 어디인지 요원하기만 하다.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길인 것 같은데 남들처럼 쉽게 쉽게 살아지지 않는 것도 같고 내가 택해서 걸어온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과연 내 길인지 종종 의문이 든다. 남들 길은 승승장구 레드카펫이라도 깔려 있는 양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데 내 길은 참 비루하다. 애초에 내 길이 아니었는데 어린 날의 호기심과 흥미로 대책 없이 걸어온 것은 아닌가, 지금이라도 돌아서 다른 길을 찾아야 되나. 이 정도 고민까지 들면 그때부터 길은 미로가 된다.

 

 

미로에는 괴물이 산다. 괴물 없는 미로는 앙꼬 없는 팥빙수다. 괴물은 길을 잃은 사람이 우왕좌왕할 때, 사람이 가장 약해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하듯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겠다고 하고 돈에 약한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괴물의 실체는 환상이다. 괴물은 길을 잃은 내가 만들어 낸 허황된 꿈일 뿐, 길을 찾게 해줄 수 없다. 그러나 길을 잃은 사람들은 미로에 독버섯처럼 등장하는 이 괴물 몽환화에 덥썩 손을 뻗고야 만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듯이.

 

 

히가시노 게이고는 신간 <몽환화>에서 미로를 헤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렸다. 유망한 수영선수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트라우마로 수영을 그만둔 리노. 음악적 한계에 부딪힌 밴드 뮤지션, 나오토. 어딘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는 소타. 아내와 별거로 지내며 아들의 신뢰마저 잃은 경찰, 하야세. 소설 속에서 인물들은 길을 잃었다는 자각조차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이 건조한 일상에 변화를 몰고 온 것은 몽환화의 등장이었다. 한 노인을 죽인 범인과 그의 집에서 사라진 몽환화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미스터리 드라마 속에 진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두었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작품 속 420 페이지 소타의 말 중에서

 

 

 

21세기가 되면서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이기적이 되었다. 개인이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논리는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나에게 이익인가 아닌가로 만들어버렸다. ‘에게만 집중하는 세태는 그러나, 행복한 개인도, 행복한 모두도 만들지 못했다. 애초에 인간이란 로서만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나를 잉태한 누군가의 자궁이 없었다면, 나보다 앞서 이 세상을 살아내며 문명을 이룩한 선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내가 영위하는 문화도 없는 것이다. 오늘의 는 생명조차도 이전의 사람들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존재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길인 유산<몽환화>의 무게중심에 두었다.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 혹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길 앞에서 사람은 방황하기 마련이다. 왜 내가 이런 길을 가야 하는가, 억울한 심정마저 든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이 꽃길처럼 보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갈등의 기로에서 나오토와 같은 어떤 이들은 환상을 현실의 돌파구로 착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몽환화의 유혹을 경계하라고 독자에게 일침을 놓는다. 미로를 벗어나는 출구는 빚이라는 유산까지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책임 있는 자세라고 말한다.

 

 

<몽환화>는 탄탄한 복선을 촘촘히 깐 추리극을 통해 꽤 흥미진진한 재미를 주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2012311일 동일본대지진 이후 등장하여 일본 원전에 대한 자국인들의 책임감을 넌지시 일깨우는 이 작품은 추리극 이상의 진솔한 무게를 지닌 소설이다. 엄청난 후유증을 몰고 온, 또한 향후 수백 년에 이르는 동안 더 큰 후유증을 몰고 올 원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존경할만한 작가, 진정성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작품은 내가 처음 만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 이미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로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저자이지만 나는 <몽환화>로 말미암아 그를 추리소설가가 아닌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 작품은 절묘한 밸런스로 추리극 만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개인만을 생각하는 모든 독자가 성찰해야 할 가치를 그린, 깊은 주제의식까지 갖춘 수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오늘날 길을 잃은 일본이 '몽환화'의 유혹에서 벗어나 빚이라는 유산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그리고 나 역시 나의 길에서  아키야마 슈지처럼 언제나 정의롭고 성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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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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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의 역은 지나다, 겪다라는 뜻이 있다. 역사라는 것은 지나온, 겪은 것의 기록이다. 겪은 것을 적자니 누군가는 전투였다고 쓰고 누군가는 학살이었다고 쓴다. 사람은 겪은 만큼만 쓰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역사를 두고 팩트나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래서 참 어렵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전투였다는 게 팩트고 누군가에게는 그게 학살이었다는 게 팩트다. 입장과 시각의 차이에 따른, 상대적인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어떤 시각과 입장의 차이라도 단번에 무효시키는 기준이 있다. ‘희생’. 누가 어떻게 희생을 당했는가? 무엇을 왜 희생당했는가? 흔히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역사가 승자의 편인 것이 아니라 겪은 것의 기록을 대하는 우리들이 희생자가 아닌 승자의 편인 것이다.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납치극의 긴장감, 범인을 추리하는 짜릿함을 주는 소설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말초신경의 자극을 위해 쓰인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 김진명의 소설은 언제나 단호한 목적을 지닌다. 승자의 편을 들어 역사를 입맛대로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에 반기를 든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희생당하였는가를 낱낱이 밝힌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역사의 새로운 일면을 본 당신은 이제 누구의 편에 서겠는가? 십삼 년 전에 출간되었던 작품을 새로 써 다시 세상에 내어놓은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문제의식도 이것이다.

 

 

이야기는 일본의 아름답고 덕망 있는 황태자비가 납치되는 일대 사건으로 시작한다. 수많은 경호원과 검문을 따돌리고 절묘하게 황태자비를 납치한 일당들의 목적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난징대학살과 조선 황후 시해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 그들은 승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처참한 살해의 증거를 은폐한 사람들, 치욕의 역사를 외면한 사람들. 그들 모두가 승자였다. 그리고 그 승자 속에는, 어쩌면 나도 있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역사는 복수로 치유되지 않아.”

선생님, 저는 역사의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중국인들의 비겁함에 복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백 년 전 외국의 군대가 제 나라 백성들을 살육해도 고개조차 못 들던 고관들. 나라의 위신이 깎이고 민족의 정기가 훼손돼도 경제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오늘날의 정치인과 관리들. 댜오위다오가 나와 무슨 관계냐며

오로지 연예인에만 환호하는 한심한 젊은이들.

저는 황태자비를 죽이고 저 역시 죽음으로써 그 비겁함에 참회하고자 하는 겁니다.”

페이지 403 중에서

 

 

 역사 왜곡, 위안부 문제, 독도 일본령 주장 등등 일본과 한국 간 역사 및 외교 문제는 첨예하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내에서 일본과 주변국가와의 (역사에서 기인한) 감정적인 골은 상당히 깊다. 대사관에 위해를 가하거나 특정 국민에 대한 혐오 범죄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유산은 복수 특히, 무력을 사용한 복수로 청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희생을 가져올 뿐이다. 역사와 희생자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의 상속자들은  그것이 치욕의 역사이든 자학의 역사이든 모멸의 역사이든 혹은 엄청난 사죄의 역사든 책임져야 한다.

 

이 책임을 지기 위해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인물들은 목숨을 바치거나 전 생애를 건다. 임선규는 그가 걸어왔던 인생의 길을 뿌리째 흔들어 완전히 새로운 생을 시작했고 펑더화이는 결국에는 그의 죽음으로 역사에 대한 책임을 호소했다. 형사 다나카와 황태자비는 자국 역사의 민낯을 만난 후 나라의 명예보다 인간의 존엄을 택했다.

 

소설 밖, 우리의 현실을 본다. 어떤 이는 책임을 지기 위해  자비를 들여 타국의 심장부에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광고를 내걸었다. 어떤 이는 위안부의 상처를 계승하여 이국 땅에 '지지 않는 꽃'을 피웠다. 어떤 이는 소설을 발표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다. 역사의 상속자 곧 역사의 책임을 계승한 나 혹은 당신 그리고 우리를 본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단순히 과거의 진상을 아는 것으로 역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희생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혹은 외면하느냐. 이것은 내가 상속한 역사를 결정짓는 선택이자 나의 오늘을 역사로 만드는 선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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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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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입 안쪽으로 동그랗게 부드러운 온기가 고인다. 평화. 내뱉는 혀끝에 바닷가 바람 같은 아련한 기운이 일렁인다.

 

 

원폭으로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처참한 시가지 속에서 남편을 찾던 구월에게 평화란 남편 박상지 그리고 그를 데리고 돌아가 함께 꾸려갈 가정 그 자체였을 터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태주의 위풍당당한 귀환을 기다리던 해금에게 평화란 한태주가 처음으로 책을 건네던 그 순간, 그와 함께 먹었던 아이스크림, 그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 그 밤. 엄마 구월이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한 그 새벽, 해금에게 평화란 엄마와 함께 갔던 검은 모래밭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바랐지만 결코 그녀의 생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하나, 평화.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구월과 그 딸 해금 그리고 그들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검은 모래]는 그 주인공들이 간절히 바랐지만 누리지 못한 평화의 이름으로 상을 받은 작품이다(1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

 

 

모래처럼 까실하고 안개 낀 바닷물처럼 뿌연 푸른색 표지의 [검은 모래]는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동아시아를 유랑하는 한국인들의 고달픈 발자취를 담았다.

일제의 잔혹한 착취를 견디다 못한 제주의 상잠녀 구월과 남편 박상지는 자녀들의 얼굴에 핀 버짐이라도 걷어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 조선 사람이 다리 뻗고 살 곳은 땅에도 바다에도 없었다. 미군의 원폭으로 초토화된 일본 영토, 지구촌 이념 전쟁의 최전방이 된 한반도. 일본 본토에서의 차별과 탄압은 끝없이 이어지고 전쟁과 정치의 칼바람 속에서 목숨들은 속절없이 스러졌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과 한국, 북한을 부유한 재일한국인들의 삶은 남루하고 궁핍했다. [검은 모래]는 자기 영토에서 그들을 내어 쫓으려는 일본과 그들을 외면하는 한국, 솔깃한 거짓말로 치장한 북한 사이에 끼어 제대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살아온 재일한국인들의 반세기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그들의 깊은 슬픔과 절망에 동조하지도 않지만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지도 않는다. 소설은 마치 르포의 시선처럼 간결하고 가감 없이 사실과 진실만을 전한다. 사실은 사건과 사고들이요 진실은 그 속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먼지처럼 굴러다닌 사람들의 심정이다.

 

 

모두가 험하게 떠났다. 박상지는 원폭으로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고,

구월은 바다에서 넋을 빼앗겼으며, 한태주마저 한국전쟁으로 귀한 목숨을 소각해버렸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해금의 주변에는 가난하고 슬픈 삶과 처절한 죽음이 너무나 흔했다. 시대가 그랬고 전쟁이 그랬고 인생이 그랬다.

쇠털같이 많은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마냥 풀풀 날아서 고단한 육신 내려 앉힌 곳.

그곳은 곧 삶의 터전이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고통까지도.

고국산천을 떠나온 사람들의 운명은 질척했다.

p231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1세대 구월과 박상지, 2세대 해금과 한태주 그리고 해금의 아들 켄(건일)과 손녀 미유에 이르는 4대의 이야기는 단순히 이 가문만의 사연은 아니다. 이 한스런 인생들의 궤적은 전쟁 통에 묵사발이 된 인간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고발하고 이념 때문에 찢어 발겨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특히 재일한국인으로서 켄(건일)과 미유가 맞닥뜨린 일본사회의 차별과 갈등 그리고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은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를 잘 나타낸다. 지난 반세기, 한국과 일본은 쓰라린 전쟁과 반목의 시간을 거쳐 왔지만 이제는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새살이 돋게 해야 한다는 것.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적일 수 없다. 결말에 이르러 재일 한국인 4세대이자 한국과 일본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미유는 자신에게 공존하는 한국과 일본을 모두 인정하며 그 두 나라를 함께 이어가려고 한다. 저자는 미유의 모습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공존, 한국인과 재일한국인의 소통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이해와 화합까지 바라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진정한 평화에 얼마나 가까워 있을까? 누구도 지금을 평화의 시대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함과 편리함은 자꾸 평화를 잊게 한다. 이런 과도기는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더 위험하다. 이런 세상이 열리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과 인생을 희생했는지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잊는 것은 그냥 잊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시절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그 때, 참혹한 시대의 망령은 다시 살아나 언제라도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검은 모래]처럼 한스런 시대의 군상들을 그린 작품을 자주 만나야 한다. 과장된 드라마나 감정과잉의 영화로서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명징한 묘사로서 그 시간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화해와 이해의 에너지를 자꾸 캐내야 한다. [검은 모래]의 저자가 미야케지마의 황량한 폐허, 옛 잠녀들의 마을을 목도한 순간 느꼈던 에너지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미유는 해금이 남겨놓은 아리수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흔적들을 지키고 싶을 뿐, 욕심은 없다. 그래서 간절히 부탁한다.

많이 서툴겠지만, 도와줘.

p324

 

 

미유의 혼잣말은 그녀와 동일한 세대인 나의 목소리가 된다. 난폭한 시대가 남겨놓은 흔적이 희미해진 지금, 그 자취를 바라보는 우리는 마땅히 역사에 부탁해야 한다. 아버지를 나가사키 원폭에 잃고 어머니는 그 생계를 맡아주던 바다에 잃고 모든 것을 준 정인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하고 하나뿐인 동생마저 이념에 희생당해야 했던 해금과 같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야 한다. 그 시대, 원폭으로 지옥이 된 땅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질긴 쇠뜨기처럼 살아남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단한 세월을 버텨 물려준 이 유산을 잘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이 서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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