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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사이언스 클래식 15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황희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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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사회에서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으로서의 모성’은 여성의 생물학적 자질로서 당연하게 간주되고 때로는 은밀하게 강요되고 있기도 하지만,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암컷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조건적 헌신이라기보다 조건부적 헌신에 가깝다. 실제로 자연에서는 반모성적으로 여겨지는 어미의 행동들이 심심찮게 관찰되는데, 거기에는 마냥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다. 번식상의 판단에 따른 합리적인 행동인 것.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성성’에 부합하는 암컷의 행위와 그렇지 않아 보이는 행위- 양자를 아우르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암컷이 ‘전략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암컷의 번식 성공을 좌우하는 요인은 수컷의 경우처럼 단순히 수정의 횟수가 아니다. 암컷으로서는 선택한 정자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낳은 자식의 생존률 또한 중요하다.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암컷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번식이 불리한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자가 낙태를 하거나, 태어난 새끼를 섭취해버림으로써 번식을 회수하기도 하고, 주변의 수컷들에 의해 새끼가 살해당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난교 전략을 펼치기도 하며, 생존 능력이 뛰어난 새끼만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도 한다. 기운이 넘치면 다른 암컷이 낳은 새끼들을 죽여버림으로써 자식의 잠재적 방해물을 제거하고 암컷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암컷의 주도면밀한 행동들은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냉혈의 기업가적 마인드에 가까워 보인다.
 
어머니는 자애로운가. 아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무시무시하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생물학적 사례를 취합하여 떠올려보게 되는 보편적 어머니상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 나오는 어머니에 가깝다. 직장에서도 내가 느끼는 바는, 워킹맘들은 일단 '한 수 위'라는 사실이다. 생에 대한 악랄하고도 숭고한 집착, 악마 같은 수완과 천사 같은 넉살, 근성, 인내력, 초인적인 태도, 일에 임하는 절박성, 그악스러움, 유능함, 대인배 마인드 등 온갖 방면에 있어서 나로서는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한 수 위다. 숱한 위기를 뚫고 어머니의 역할과 일의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과정에서 세상 모든 어머니는 점차 정신의 스케일이 커지고 무시무시해지는 걸까. 워킹맘으로 살아가면서 나날이 티라노사우르스처럼 변모해가는 내 언니를 봐도 역시 자식은 낳아볼 만하다. 잘은 몰라도, 어떤 본능적인 생물학적 절박함 때문에 삶을 몇 도씨는 더 뜨겁게 살게 되는 것 같다.
 
일하는 어머니와 관련해서 이 책에서는 수백만 년 동안 영장류 어미들이 생산 활동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거나 대행 부모의 도움을 받는 등의 ‘타협’을 통해 생산과 재생산의 삶을 결합해 왔다고 하면서 오히려 생산과 재생산을 임의적으로 구획하고 사회적 노동을 접은 채 오로지 양육에만 매진하는 현대 사회 어머니야말로 새로운 유형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저자는 자연의 여러 사례를 통해 어미가 우수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번식 성공의 필수적 요소임을 보여주면서, 경쟁심 · 지위 추구 · 야망과 같이 고된 업무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질들이 헌신적이고 양육적일 것으로 기대되는 ‘좋은 어머니’ 되기와 양립할 수 없다는 세간의 통념을 뒤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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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6-08-16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리뷰는 책의 앞부분만 짧게 옮겨본 것인데 이후로도 결혼, 출산, 육아, 성역할 등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진화생물학적/인류학적 사례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유즙분비 호르몬의 영향으로 수유 중인 어미가 방어본능과 공격성이 강해진다든지 수컷의 과시본능과 영아살해본능, 이웃의 새끼를 맡아서 데리고 있다가 싫증나면 잔인하게 쳐내버리는 대행어미의 변덕 등등. 좋은 책이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일까. 연구의 형태로든 문학의 형태로든 현실에서 자신이 구체적으로 당면한 절실한 문제에 천착하여 그것을 모두의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보편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낸 책이 좋은 책 같다. 자기고민에서 출발한 책 그러니까 가장 일차적으로는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쓴 그런 책은 `리얼`하다. 이 책처럼.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
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 지음, 전은경 옮김, 손영숙 감수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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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론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를 규정할 수 없다. 종교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자아라는 것은 무너지기 쉬운 허상의 개념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인류가 지금껏 자기 탐구에 천착해온 결과로서 일구어낸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업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인류의 모든 성취 가운데서도 특히 문학이나 예술과 같은 분야의 경우에는 에고이즘이야말로 창조의 중요한 원천이 되어왔지 않나.

2 깨달음의 상태라는 것은 진화된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높은 수준의 인식능력일까, 아니면 그저 뇌파 이상이나 간질발작증세의 일종일까. 둘 중 하나이건 혹은 둘 다이건 간에ㅡ 유사 이래로 동서양의 수많은 현인들이 이러한 경지를 체험해왔고, 그것을 종교적으로든(우파니샤드, 불교, 禪사상) 철학적으로든(니체, 융, 하이데거 등) 끊임없이 표현해왔다는 것은 몹시 흥미로운 사실이다. 동양종교에서 궁극의 경지로 통하는 직관적 영성 체험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일까. 마약에 탐닉했던 예술가들이 도취상태에서 경험한 환각과는 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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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 개정판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김용정 외 옮김 / 범양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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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한 우주의 공간 속에 티끌처럼 떠도는 지구의 표면에서 영겁의 일순을 살다 가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원초적 질문은 우리의 생의 기반에 담겨있는 비정의 수수께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설문 속에 담겨있는 공간, 시간, 존재 등의 개념들이 현대물리학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새롭게 다루어져야 하고, 또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의 한계성이 이미 드러난 것이라면 이 설문의 내용과 방식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인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인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역자 서문 中에서    
 

상대성이론, 원자물리학, 양자론 등 현대 물리학이 발굴해낸 새로운 개념들은 고전물리학의 이상을 철저히 붕괴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종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대미문의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다. 프리조프 카프라는 현대물리학이 새롭게 인지하기 시작한 세계의 모습을 동양의 신비주의 철학 속에서 찾고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역자 서문 한 구절이 이 책 전체적인 내용을 대변하는 거나 다름없어서 그대로 옮겼다. 책을 읽고 나면 과연, 인류 역사 속에서 한때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던 과학과 종교가 이제 현대에 이르러 경이로운 대통합을 펼치려는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론 탈근대적인 새로운 개념들 앞에서 나 자신이 새삼 지극히 근대적인 인간임을 뼈저리게 체감하기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하여 막연히 신기하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것을 몸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 버거운 일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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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과학 인문학 - 유럽 지적 담론의 지형
이종흡 지음 / 지영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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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의 주된 과학사 연구가 논리실증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휘그적 역사관'에 기반해 있다고 말한다. 휘그식 관점에서 보면 과학에서 이론의 계승 과정은 항상 합리적이고 의도적인 정신에 의해 추진되어왔기 때문에 결코 비합리적일 수 없으며, 과학 이론은 언제나 경험세계를 더욱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진보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또한 이러한 진보성은 이론 선택의 주체인 과학자의 합리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 인식론은 인식의 시초 단계인 가설의 설정 과정이 대단히 비과학적이라는 자기모순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가설은 논리가 아니라 직관이다. 포퍼는 가설의 형성이 우리 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요, 거의 시적 직관의, 즉 자연법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말한다. 특정 가설을 정립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의 작용으로서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논리실증주의 인식론은 착안(가설) 자체보다 착안에서 비롯한 절차(방법)나 결과(이론)에 관심을 둔다. 말하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 지점에서 논리실증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휘그적 역사관 또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과학사에 나타나는 '단절'(패러다임의 전환)이 그것이다. 휘그식 과학사는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클리셰를 등장시킨다. 즉 과학사가 일순간 도약하는 껄끄러운 순간마다 '천재'들을 만들어 해명하는 것이다.

비학 연구자들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순간을 느닷없이 쏟아져나온 무수한 천재들의 업적으로 돌리는 휘그식 과학사를 지양한다. 그들은 과학사에 있어서 전환과 도약이 개인의 천재적 재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상황적인 담론에 의해서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서 뉴턴 같은 천재들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연마술, 점성술, 연금술, 헤르메티시즘 등 근대과학이 쓰레기로 치부했던 비학을 하나의 담론으로서 탐구한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대로의 도약을 설명하기 위해 비과학적 담론을 끌어들이려는 비학연구자들의 시도가 과연 휘그식 역사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또한 근본적으로는 논리실증주의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휘그적인 태도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들 역시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한 시기에 발견되는 인식론적 단절을 매끄럽게 봉합하기 위해, 즉 '천재론'보다 좀 더 수긍할 만한 논리적 절차와 과정과 맥락을 찾기 위해 비학이라는 담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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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3-04-0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 절판되어서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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