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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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내'는 뭐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미 결혼도 두 번이나 했으며 향후 얼마든지 더 할 가능성도 있고 조만간 자유의 여신처럼 가족들을 이끌고 폴리가미의 천국으로 떠날 것이다. '아내'는 FC바르셀로나의 팬이고 사학과 출신의 프로그래머이며 박식하고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유령이고 판타지이기 때문에, 아내는 뭐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근육질의 재벌2세 실장님 같다. 왜 우리는 실체 없는 판타지적 대상을 통해서만 다른 삶을 꿈꾸어야 하지. 하물며 소설에서조차. 꿈이라는 걸 전제하고 꾸는 꿈만큼 안전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파격의 외피만 걸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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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보급판 문고본)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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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은 자전소설이다.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들추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는 서문에서 짐작이 간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써야 하는 글이 있다. 실패에 대한 예감 없이는 쓸 수 없는 글, 자꾸만 연막을 치고 안개를 피우고 변죽을 울리고, 그러다 독백에 그치고 마는, 으레 그럴 줄 알면서도 부쩍 허약해진 소설을 끝끝내 붙잡고 있는 사람이 한 고비를 넘어가는 심정으로 감당해야 하는, 그런 글..." 이 고백이 유난히 따갑고 시린 것은, (내가 알기로) 평소 이 작가가 사변에 빠지면 빠졌지 감상에 빠지는 류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소설 속에서조차 '나'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도 되지 못하고, '그가 쓴 소설 속의 인물'로서 존재할 뿐이다. 결벽에 가까운 자기객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설정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여하튼 최대한 함부로 발설하지 않기 위해 이런 완곡한 설정을 한 것도 모자라, 작가는 끝내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소설을 완성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숨기려 하는 욕망, 펼쳐내려는 욕망과 묻어두려는 욕망이 서로 머리채를 움켜쥐고 사투를 벌이는 이 처절한 격전지를 작가는 ‘수렁’으로 비유했다. <생의 이면>은 그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작가가 토해낸, 흡사 천식환자의 기침소리 같은 소설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완성되었고, 작가는 이제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고비를 넘긴 그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또 아프다. 이 소설만큼이나 아프고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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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제10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승우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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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칼을 모은다. 칼로 뭘 어찌 해보려는 게 아니라, 그저 칼이라도 있어야 한숨 돌리고 지낼 수 있는, 그마저도 없으면 도무지 무서워 살 수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소설 <칼>은 심약한 인간의 비극적인 존재 방식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작가는 분명 간과하고 있다. 칼을 손에 쥔 사람에게서 비로소 살의가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유물론적 가능성을. 누가 알 것인가. 칼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전화하는 황금의 열쇠가 될어줄지. 하여 나는 작가가 속히 <칼>의 후속편을 구상하기를 청한다. 후속편은 당연히, 칼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는 남자가 우발적으로 누군가를(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죽여버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진정한 악인으로 거듭나는 범죄극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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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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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제 상처를 물감처럼 찍어 찬란한 그림을 그려놓기라도 했더라면 읽는 사람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이 시인, 그저 두 주먹 꼭 쥐고 슬픔이며 분노며 설움이며를 애써 덤덤하게 삼키고 있다. 즐겁게 춤추어야 할 영혼의 어깨에 누가 이리도 굳은 살을 박아 놓았을까. 물에 젖은 담요처럼,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처럼 무겁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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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감정 문학과지성 시인선 318
최정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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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유리창

 

그렇게도 부드럽게 목덜미에 그렇게도 다정하게 귓불에
그러다가 갑자기 낚아채듯 날렵하게
햇빛이 발꿈치를
햇빛이 발꿈치를 쫓아와 물어 뜯어

 

몸을 피해도 쫓아오고
캄캄한 방에 갇혔는데도
햇빛이
하백의 딸 유화의 허벅지로
어찔어찔하게

 

햇빛과 자고 하백의 딸
닷 되들이만 한 알을 낳아
그 알을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의 깃털이 덮어주어
으앙하고 한 아이가 알에서 걸어 나왔듯

 

너 깜깜절벽 꽝꽝 웅덩이
적막강산에 엎드려 만 번 절해라

 

그때처럼 잉잉거리게
햇빛이 벌떼처럼 달겨들어
혼자 있는 겨울 유리창
으앙하고 또 한 아이가 걸어 나오게

 

나도 여기 깜깜절벽 꽝꽝 웅덩이 적막강산에서 만 번을 절하면, 햇빛이 내 허벅지 사이로 어찔어찔 달려드려나. 발꿈치를 물어뜯는 햇빛이랑 슬프고도 무섭게 한 잠 자고서는 나도 알 하나 점지받을 수 있으려나.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 깃털이 덮어주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알 하나를 쑤욱. 그러나 나는 (선천적으로) 유화가 아닌데다가 (후천적으로는) 신심마저도 부족한 것 같으니 이런 애석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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