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 2 (양장본) - 고독의 나날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각종 고문서와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대표 화가들이 남긴 삶의 자취를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걸출한 재량을 가지고 사연 많은 생을 살다 간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심금을 울리는 인물은 호생관 최북이다. 까닭은 그가 제일 '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북은 왜 짠한가. 천형처럼 타고난 거침없는 광기가 짠하고, 광기와 배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라는 점이 짠하고, 작은 그릇으로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그의 신분상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점이 또 짠하다. 이 책에 도판으로 나오는 최북의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도 공산무인도나 풍설야귀인 같이 거침없는 필치로 그려낸 작품들이 그러하다. 과감하게 뭉개버린 배경이나 거센 추위와 바람을 묘사한 부분은 자못 현대적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캉으로 쇠라읽기
윤정윤 지음 / 애플트리태일즈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라캉으로 쇠라 읽기>보다는 <쇠라로 라캉 읽기>가 더 어울리는 책이다. 그렇담 쇠라로 라캉을 읽어보자. 현상학적 관점에 의거한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최초의 시각경험에서 '나'는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외부세계 역시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 단계의 시각 경험에서는 외부세계가 나를 관찰하는 주체이며, 나는 외부세계에 의해 관찰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절대적이다. 외부세계를 주체로, 나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시각경험에서 자의식의 단초 즉, 초보적이지만 근본적인 '나'를 의식하는 자의식이 생겨난다.  

현상학적 관점에 따라 라캉은 '나'의 시초를 규명하는 데 있어 '보는 나' 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나'까지도 고려한다. 결국 '나'는 '보는 나'의 행위와 '보여지는 나'의 행위 속에서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나'를 주체이면서 객체인, 즉 '반대 방식으로 작동하는 두 항'에 동시에 놓여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라캉은 '나'의 주체적인 측면인 '보는 나'를 <응시>의 개념에, '나'의 객체적인 측면인 '보여지는 나'를 <미미크리>의 개념에 연관시켜 사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책은 라캉의 미미크리 개념을 적용하여 쇠라의 그림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인데, 정작 저자의 작품 해설 보다도 미미크리라는 개념에 더 관심이 간다.     

미미크리는 생물학적 용어로 ‘한 개체가 다른 종의 개체들과 비슷하게 보임으로써 이득을 얻는 현상’이다. 말하자면 보호색 같은 위장술인데, 이 책에서는 천적에게 위험한 것으로 보여서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는 경우와 사냥감을 안심시켜 잡아먹는 경우까지도 모두 미미크리의 범주 안에 넣고 있다. 미미크리는 한마디로 속이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속성은 단지 곤충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나타난다. 변장, 위장, 치장, 분장, 포즈, 가면, 제복, 패션 소품 등 타인을 의식하는 모든 제스처와 장치들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이 책에서는 미미크리와 관련하여 '사악한 눈'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미신 이야기가 하나 등장한다. 이야기의 골자는, 악으로 상징되는 누군가의 강한 시선이 타인에게 사악한 기운을 뻗치고 궁극적으로는 타인을 파멸로 몰고 간다는 내용이다. 사악한 눈의 기능이 발휘되는 순간에 주체는 모든 동작을 중지하고 돌처럼 굳어진다. 아니면 돌처럼 굳어지기 전에, 주체는 사악한 눈에 맞서 미미크리적인 행동을 보인다. 즉, 사악한 눈의 마력에 휘말리기 전에 마치 이미 휘말려버린 것 같은 제스쳐, 움직임이 정지된 상태, 죽은 것 같은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미미크리적인 행동의 의의는 주체가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분리하고, 후자를 자의적이고 능동적으로(이것이 곤충의 미미크리와 다른점이라고) 구축해 내는 데 있다. 즉, 그러한 일련의 위장술이야말로 주체가 스스로 행하는 적극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미미크리는 시각 대상의 위치에 수동적으로 놓여있는 객체로서의 '나'의 행위가 역설적으로 적극적인 주체성을 담지하게 됨을 보여주는 자연의 단서다. 라캉은 미미크리에 주목함으로써 최초의 시각 경험과 관련하여 '보는 나' 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나' 역시 자의식이 구성되는데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을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 수록된 유럽 회화 작품들은 유명도나 역사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정서에 감응하는 작품만을 주관적으로 선정한 것이다. 저자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서 한국에 정치범으로 수용되어 있는 자신의 형들을 떠올리고,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한국의 5.18을 연상하며,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에서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묵묵히 감당해온 누이를 생각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과 상처들을 풀어놓는 매개가 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으로 읽는 미술 - 미학 강의 Α부터 Ω까지
오병남 외 지음 / 월간미술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크로체의 예술표현론에 따르면 예술은 표현이고 표현은 곧 직관이다. 직관되기 이전의 것이란 정신에 의해 파악되기 전 단계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저 혼연하고 수동적인 인상일 뿐이다. 여기에 우리의 정신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명료하게 객관화하는 것이 직관이므로, 그것을 정신의 적극적인 활동 측면에서 부를 때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표현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p.33) 

콜링우드는 크로체보다 더 과격한(?) 입장으로 나아간다. 어떤 것이든 정서유발과 같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기술이나 기능이며 따라서 오락이나 주술은 될 수 있어도 예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상상력에 의한 자발적인 내적 이미지의 생성’ 그 자체다. 크로체나 콜링우드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로지 직관적인 영상이나 기호 혹은 형상에 가까운 그림 따위만 예술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웃음을 자아내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한갓 저열한 오락물이며, 환희와 외경심을 자아내는 파르마 대성당의 둥근 천장 벽화는 열혈 신도들에게 천상의 판타지를 주입하기 위한 도구적 장치일 뿐이란 말인가? 오로지 태극 무늬나 에셔의 기하학적 그림들이나 주역 64괘의 규칙적인 배열 따위만이 예술이란 말인가? 저자는 이러한 직관론자들의 주장이 미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매우 ‘반(反)직관적인’ 결론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재치있는 결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판이 알차다. 사이즈도 큼직하고, 색채도 선명하고, 부분확대 사진도 많고.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중세 시대 그림들이다. 중세 그림은 바로크 회화처럼 순간적인 압도감을 주지는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인 미의 기준에 그리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투박한 형식이야말로 그들이 지닌 커다란 재능처럼 느껴진다. 중세의 그림에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느껴진다. 

중세가 꼭 암흑의 세월이기만 했을까. 광기가 단지 교정해야 할 장애가 아닌 예지적 영감으로 추앙받던 세상, 밤하늘에 천사가 떠다니고 괴물과 악마와 인간이 공존하던 세상은 얼마나 다이나믹했을까. 이 책을 펼쳐놓고 중세인들이 느꼈을 세계를 상상하고 있으면, 첨단 과학의 이 시대가 상대적으로 메마르게 느껴진다. 확실히 우리는 너무나 많이 파헤친 나머지 앙상해져 버린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