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규방문화
허동화 지음 / 현암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조선시대 규방공예 작품집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갖가지 진귀한 조각보와 자수 작품들이 알차게 실려있다. 책장에 꽂아놓고 두고두고 볼 만 하다. 아래는 책에서 발견한 100퍼센트의 보자기. 무심한 듯하면서도 교묘한 사선의 파격이 전체를 일순 긴장시킨다. 공손하면서도 세련된 위트! 이런 앙큼한 보자기를 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훗날 인상파의 선구로 등극하게 되는 영광과는 상관없이 정작 마네 자신은 끝내 살롱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무려 <풀밭에서의 점심>을 그려놓고 감히 그것을 살롱전에 출품했던 마네의 행동에서 짐작되는 것은 문턱을 밟고 선 인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이다. 그리고 그 망설임의 시간들을 먼 발치서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전형성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 본연의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한 평범한 인간의 초상이 뭉근한 아픔으로 전해져 온다. 마네는 자신이 혁명의 깃발을 치켜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고독하게 혁명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어라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그리는 것이 옳다고 믿었을 마네. ‘확신할 수 없음’ 속에서도 감각이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윤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마네. 마네의 진정한 위대성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 시간의 숲에서 고대 중세 근세의 문화영웅을 만나다
최정은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릭스터는 ‘트릭을 부리는 자’, ‘기쁨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칼 융의 꿈 이론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원초적 상징들 가운데 하나다. 트릭스터가 반영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심리학적 삶에 있는 반항적 에너지로서, 그는 언제나 기존상태를 부인하거나 의문시하고 잘 돌아가는 체제에 제동을 걸고 심지어는 한창 승리감에 차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비웃고 미래의 재난을 예언하길 즐긴다. 그는 아무런 분명한 도덕률도 갖고 있지 않고, 무너뜨리고 조롱하고자 하는 충동 외에는 어떠한 일관된 규약에도 매여 있지 않다.

 

라고 구글에서 만난 한국게슈탈트심리치료연구소 안진봉 씨는 말하고 있다. 트릭스터는 르네상스 시절 배타고 떠돌아다니다 17세기에 일시에 수용소에 감금되어버린 푸코의 광인들과도 일치하는 캐릭터다. 그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제의의 희생물이고, 콜린 윌슨이 말하는 아웃사이더이며,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우리의 향락을 절도해가서 불가해한 과잉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오늘날 의학적 분류에 따르면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들도 트릭스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칼 융을 비롯한 과거 학자들은 트릭스터가 인간 정신의 열등한 면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경시했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인 오디세우스와 프로메테우스까지도 트릭스터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 보다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도 트릭스터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장난꾼 트릭스터는 규칙을 깨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규칙을 정립하며 장을 확장해간다. 그는 항상 고픔에 시달리며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다. 누구나 한시적으로 주어진 규범의 한계를 넘고자 할 때는 트릭스터가 된다. (...) 웃음과 기쁨을 가져오는, 정의되기 힘든 그는 왕이자 광대이며, 모자람이자 과잉이고, 웅변가이자 은둔자이고, 현인이자 바보이며 (...) 방랑자이자 혁명가이다. (...)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이며, 항상 길을 떠나는 여행자이고 (...) 한계선에 선 유목민이다.”

 

경계인이자 주변인. 농담으로 규범을 깨버리는 자. 장난치고 웃음짓게 하는 희생양. 미숙하면서도 교활한 영웅. 그물망에 걸려들기는커녕 그물의 조직을 변형시켜버리는 불온한 미학의 창조자. ‘포획되지 않음’이 그 존재의 유일한 본질인 자. 영원한 결핍이자 영원한 잉여인 '대상 a'의 신화적 원형. 탈주하는 욕망... 이쯤되면 가히 사표로 삼을 만 한 미래적 인간의 전범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집 큰 생각 - 작고 소박한 집에 우주가 담긴다
임형남.노은주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정갈한 향이 배어나는 글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사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혁신과 전복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미술사는 철저히 좌파의 역사다. 보수적인 것들은 반드시 몰락한다. 미술사에서 가치있게 기록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전례 없는 시도를 감행한 혁명적인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이 책을 볼 때마다 가장 뭉클하게 여기는 작품은 아래 두 가지다. 이 작품들이 지닌 혁명적 요소는 아주 사소한 곳에 있다.

<전사의 작별>이라고 불리는 이 화병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것으로, 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왼쪽 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 곰브리치는 “기원전 500년 조금 전에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미술 역사상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화병이 제작되기 이전의 그리스인들은 사람의 발을 저렇게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문명의 초창기 시절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의 화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고 여겨졌던 형태”로 그렸다고 한다. 가령 물고기가 헤엄치는 연못을 그린다고 했을 때, 그들은 아마도 물고기는 아가미가 보이는 옆모습으로,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발 또한 언제나 측면에서 관찰된 형태로만 그려 넣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화병의 제작자는 최초로, “더 이상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고 여겨졌던 형태로 그림 속에 담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대신 그가 대상을 바라본 각도를 참작하여” 발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 화병을 만든 그리스의 어느 이름모를 도자기 장인은, 자신이 그동안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최초로 발견함으로써 미술사적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회화기법에서의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은 수세기를 지나 14세기 조토의 그림(아래)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은 예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화면 한 가운데를 가리고 있는 녹색 옷의 남자다. 조토 이전의 중세 화가들은 천 년의 세월 내내 공간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전히 평면적인 그림들만 그려왔다. 조토는 과감히 화면 중앙의 등장인물들을 겹쳐서 배치함으로써 천 년여간을 지속해온 평면적 화풍에 최초로 공간감과 깊이감을 불어넣었다. 조토가 벌인 초유의 실험은 이후 원근법으로 발전하여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는데 결정적으로 일조하게 된다. 

분명 조토는 기존의 방식에 답답함을 느끼고 무언가 새롭고 효과적인 회화기법을 시도하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조토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발달했던 근대적 회화기법의 개념 자체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토록 머리를 쥐어짜며 시도하려던 것이 원근법적 기술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국 해냈다. 원근법의 맹아를 보여주는 이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그는 또 한 번의 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아는 대로 그린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술사는, 특히 회화의 역사는 인류의 인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인의 화병과 조토의 프레스코 벽화가 말해주듯이, 후대의 인류에게는 너무나 쉽고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무언가'가 현재의 우리에게는 감지하기조차 불가능한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런 '무언가'들이 이미 세계 도처에 넘쳐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먼 훗날,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그토록 못 보고 있었는지, 그러나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자명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폭소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나 말도 안 되고 기가 막혀서! 바라보는 방식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런 것들은 우리 눈에 절대로 안 보일 테지만, 만약 우리에게도 기적적으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곧 인류 역사를 장식하게 될 새로운 혁명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게 된 것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당대, 2005)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적 동학에 근거하여 근대세계체제의 종말을 전망하고 있는데, 사실상 그가 예견하는 근대체제의 종말이란, 기존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갖고 있던 모든 확고한 인식의 틀이 붕괴하지 않고서는, 그리하여 이전의 세대가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줄 아는 새로운 인류가 출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미술사적 사례 가운데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위의 두 작품들이었다. 오랜만에 곰곰이, 한참을 바라봤다. 인식의 혁명을 이루어냄으로써 각각 그리스미술과 르네상스미술의 맹아가 된 저 기적같은 두 작품을.

<전사의 작별>, 기원전 510-500년경. 에우티미데스의 서명이 있는 적회식 도자기, 뮌헨 고대 미술관
<그리스도를 애도함>, 조토,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2-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