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저자 양귀자

쓰다

2013-04-01

초판출간 1998년

소설 > 한국소설




모순은 모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다.




■ 책 속 밑줄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눈물이 없었다면 그 느닷없는 부르짖음은 눈뜨고 꾸는 꿈의 잠꼬대 정도로 잊혀졌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격렬한 그 구호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저 혼자 흘러나온 혼잣말 따위 나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제 조금씩 가닥이 잡힌다. 되돌아보면 어제도 우울했고 그제도 우울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물까지 흘리며 절박하게 부르짖을 만큼 우울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예전의 나와는 달랐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인생은 늘 정답이 없다. 가족이란,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처 주는 존재다. 진실은 때때로 침묵 뒤에 숨고, 감정은 입술 끝에서 되돌아온다.



■ 끌림의 이유


안진진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어머니와 이모, 서로 대비되는 두 여자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점점 깨닫습니다.

삶은 옳고 그름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모순 속에서 방향을 잡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모순』은 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삶의 이중성과 충돌 그리고 그 사이를 건너는 법을 보여줍니다.

에피소드마다 웃음과 눈물, 이해와 분노가 교차하지만 그 끝에는 결국 한 사람의 내면이 조용히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과 사랑, 그 안에서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가는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읽히면서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소설입니다.



■ 간밤의 단상


이 책은 마음속에 작은 물결을 일으킵니다.

처음엔 가볍게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 이건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요.

모순은 대단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바로 이 하루하루 속에 숨어 있는 익숙한 감정입니다.


저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었고 사랑과 미움, 책임과 피로, 애정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꼈었습니다.

이 책은 그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나는 내 삶의 모순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계속해서 배우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균형도, 완벽도 아닌 그저 부족하지만 함께 살아내는 용기 같은 것이요.

그 감정이 이 책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오늘 새벽 이 문장을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 건넴의 대상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분

사랑하지만 자꾸 상처 주는 관계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분

내 마음이 언제부터 멀어졌는지, 조용히 돌아보고 싶은 분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남은 문장이나 순간이 있다면 공감(♥)과 댓글로 나눠주세요.

당신의 감상이 더해지면 이 공간은 조금 더 깊고 따뜻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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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의 책 DIGEST

5월 둘째 주, 책이 전한 마음의 결






■ 이번 주 〈간밤에읽은책〉 돌아보기


월요일 | 『강아지똥』 – 권정생

우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여겨졌던 존재가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되기까지, 세상 모든 작은 것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랑을 건넨 동화였습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5576206



화요일 | 『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 – 나태주

풀꽃은 말합니다. 너무 높이 보지 말라고,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아름답다고.

작고 소박한 말들이 삶을 다독여주는 에세이였습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6435163



수요일 | 『완벽주의자의 조용한 우울』 – 엘리자베트 카도슈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완벽해지려는 시도보다 훨씬 인간답습니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무너지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내면의 압박감과 자기비판 속에서 무너지는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7365941



목요일 | 『엄마를 부탁해』 – 신경숙

당신이 잃어버린 건 엄마가 아니라, 엄마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존재의 부재가 드러내는 진짜 사랑인 엄마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시간과 감정의 결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8518674



금요일 |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마음을 살피는 언어가 관계를 지켜줍니다.

보통의 말들 속에 숨어 있던 감정과 진심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 따뜻한 에세이였습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9680361





■ 이번 주 〈모든도서리뷰〉 돌아보기


화요일 | 『세상의 통찰, 철학자들의 명언 500』 – 김태현

고전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엿볼 수 있었던 500가지의 명언.

짧은 문장 속에서 삶의 좌표를 다시 그리게 만드는 고전 명언집이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7087030





■ 이번 주 〈함께읽는시집〉 돌아보기


수요일 |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특정한 집을 중심으로 공간과 존재가 겹쳐지는 깊이감을 보여주고 있는 시로 우리 안의 오래된 감정을 따뜻하게 흔들어주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857934861




이번 주, 당신의 마음을 붙잡은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책은 언제나 삶의 곁에 머물며 말을 겁니다.

다음 주에도, 한 줄의 문장이 따뜻한 하루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독서 여정은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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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저자 김이나

위즈덤하우스

2023-09-20

에세이 > 명사에세이

에세이 > 한국에세이




마음을 살피는 언어가 관계를 지켜준다.




■ 책 속 밑줄


웨이브라는 의미에는 파동이라는 뜻도 있잖아요. 

'만물이 존재하고 있는 그 형태가 쪼개어 들어가보면 물질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라는 것이 과학에 대해서 굉장히 지식이 없는 저에게 너무 흥미로웠어요. "아, 우리의 존재라는 것이 어쩌면 파동이겠구나!"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와 통한다는 것을 "쟤랑 나랑은 코드가 맞아, 주파수가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관계라는 것은 파동의 만남이고 그 파동이 서로 박자를 맞추어가는 것이, 우리가 한 사람과 긴 길을 오랫동안 걷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모양새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한 경계선이 없어 혼돈스러운 감정들이 있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다. 좋아하는 마음에 확실히 매듭이 지어져서 결단코 사랑이 아닌 경우도 많겠지만, 대개의 사랑은 '좋아함'에서 싹트므로 그렇게 방심할 만한 문제는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에 부등호를 붙일 생각은 없다. 이 둘은 맞닿아 있는 듯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빚어내는 감정이며 그저 '좋아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지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고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그러나 '기대'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늠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자 낭만이니까. 그게 없이 어찌 사랑에 빠지거나 연민을 느낄 수 있겠는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소수와의 관계는 견고한 것이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결정적으로는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그 사람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거죠. 그때 느끼는 벅참이 있잖아요. 저도 그럴 때 벅참을 느끼는 거 같아요. 함께 있기만 해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순간 비로소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또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감정이 느껴지더라고요.



선을 긋는다는 말은 내겐 '모양을 그린다'는 말과 같아. 5개의 선을 그어 만들어지는 게 별 모양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야'라고 알리는 행위가, 선을 긋는다는 의미이다. 간단하게 지도를 떠올려보자. 꼬불꼬불한 선으로 나뉘어 있는 수많은 국가들은, 선이 있다고 해서 서로 단절된 관계들은 아니다. 한 예로 유럽의 경우 각국의 법령, 풍습, 기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차이들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지키기 위한 테두리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



나의 인생을 극으로 본다면 작가는 나고 주인공도 나다. 작가가 위기에 빠진 주인공 곁에 같이 앉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하고 발을 동동 굴러선 안 되는 법이다. 걱정에 빠진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를 위해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회차로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순리에 모든 걸 맡기는 것.



생각에 갇혀 잠 못 이루는 밤, 긴 숨을 쉬어보자.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만 집중해보자.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이렇게 잘 살아 있다. 걱정에 빠진 나를 구원하기 위해, 가만히 숨을 쉬며 누워 있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된 다음, 주인공을 위한 최선의 다음 화를 써내려가는 거다. 주인공이 방치될 순 없으니까.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 버티는 막대기 같은 거라면, 자존감은 꺾이고 말고부터 자유로운 유연한 무엇이다. 자존심은 지켜지고 말고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만 자존감은 철저히 내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순간은 자존감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선행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욕망이 부록처럼 딸려온다. 어릴 때 칭찬에 길들여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내성이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점이기도 하다. 허나 선행이 누군가의 칭찬과 거래되는 순간 자존감 통장에는 쌓일 것이 없다. 나의 대견함을 '알아주는' 주체를 타인에게 넘겨버릇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 끌림의 이유


김이나 작가의 글은 무심코 지나쳤던 감정의 결을 다시 어루만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 책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지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말이란 참 무섭습니다.

가볍게 던진 한 마디에 하루가 무너지고 작은 표현 하나에 관계가 180도 달라질 수 있으니깐요.

때로는 위로가 되고 싶지만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고 싶은데 어쩐지 거칠게 밀어내게 되는 날도 있습니다.

『보통의 언어들』은 그런 마음들의 낯선 감정을 조용히 조명해줍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바라보았을까요.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조언처럼 따뜻하고 단호하게 마음을 일으켜 세워줍니다.

쉽게 쓴 글도 없었고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문장조차도 없어 단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책이었습니다.



■ 간밤의 단상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말을 내뱉고 후회할까요?

그리고 얼마나 자주 말을 아끼다 오해를 쌓아갈까요?


말은 마음의 옷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말은 곧 나 자신입니다.

즉, 말을 탓하기 전에 나의 마음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게 결국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니깐요.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말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기 위해 신중히 고르듯이, 좋은 말 또한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또한 진심도 말로 다듬지 않으면 날이 서 있을 수 있기에 조금 더 섬세하게, 더 성실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아끼던 하루였나요?

혹은 너무 많이 쏟아낸 하루였나요?

오늘은 조금 더 따뜻하고 예쁜 언어로 스스로를 그리고 누군가를 다독여보세요.



■ 건넴의 대상


말로 상처를 주고 받은 경험이 있는 분

관계 속에서 마음을 전하는 법을 고민하는 분

일상 속 언어를 더 따뜻하게 가꾸고 싶은 분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남은 문장이나 순간이 있다면 공감(♥)과 댓글로 나눠주세요.

당신의 감상이 더해지면, 이 공간은 조금 더 깊고 따뜻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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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저자 신경숙

창비

2008-10-24

소설 > 한국소설




당신이 잃어버린 건 엄마가 아니라, 엄마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 책 속 밑줄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오빠 집에 모여 있던 너의 가족들은 궁리 끝에 전단지를 만들어 엄마를 잃어버린 장소 근처에 돌리기로 했다. 일단 전단지 초안을 짜보기로 했다. 옛날 방식이다.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엄마를 잃어버렸는데, 남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엄마의 실종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상의하러 모였다가 너의 가족들은 예기치 않게 지난날 서로가 엄마에게 잘못한 행동들을 들춰내었다. 순간순간 모면하듯 봉합해온 일들이 툭툭 불거지고 결국은 소리를 지르고 담배를 피우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너는 석양빛을 받으며 너의 무릎에 얹힌 엄마의 얼굴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응시했다. 엄마가 두통을 앓았었나? 울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곧 송아지를 낳을 암소처럼 빛나고 둥글던 엄마의 검은 눈은 주름 속에 거의 감춰져 작아져 있었다. 붉은 기가 사라진 두툼한 입술은 건조한 채 부르터 있었다. 너는 이모의 죽음 앞에서도 울 수 없을 만큼 엄마가 극심한 두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너는 평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엄마의 외로운 팔을 들어 배에 얹어주었다. 일생을 노동에 찌든 엄마의 손등에 퍼진 검버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더이상 엄마를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이거나 엄마로서만 존재한다.


이젠 당신을 놔줄 테요.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누구라도 나를 생각할 때 짐작조차 못할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네. 아무도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다고 알지 못해도 당신은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 행복할 때보다 불안할 때 당신을 찾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내 인생을 건너올 수 있었다는 그 말을 하려고 왔소.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너를 도시에 데려다주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밤기차를 탔던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네 나이와 같다는 것을 너는 아프게 깨달았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끝내 '엄마'라는 존재를, 그 생의 고요한 기도와도 같은 시간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 끌림의 이유


근래 주말이면 서재 정리에 여념이 없는데 처분할 책들을 고르다 책 한 권 앞에서 잠시 손이 멈추었습니다.

『엄마를 부탁해』

어버이날이 다가오기도 했고 오랜만에 펼쳐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 똑 똑 흘리며 재독했습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놓치며 살아왔는지를 직면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특히 책에서는 자식으로서의 미안함과 아쉬움은 물론 깊은 애도의 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엄마라는 단어 그 자체로 무거운 감정이 동반되지만, 이 책은 단순한 감정의 회고가 아닌 이해받지 못했던 존재로서의 엄마를 조명하기에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 간밤의 단상


『엄마를 부탁해』는 하나의 부재를 통해 수많은 존재의 의미를 되짚게 합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엄마가 사실은 집의 중심이자 우리 내면의 지붕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사라진 후에야 사랑이 뒤늦게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은 그 사랑에 늦지 않도록 손을 내미는 법을 알려줍니다.


소설 속 자식들은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사랑이기도 하고 죄책감이기도 하며, 끝끝내 다다르지 못한 거리였습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존재의 온기를 깨닫는 아이러니라니...

그렇게 표현되었기에 읽는 내내 몰입하였고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속 방문마다 불을 켜는 느낌이었습니다.


엄마란 존재는 침묵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침묵이 오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책에서는 침묵으로 인해 알지 못했던 엄마의 삶을 바라보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돌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평소 낯간지러운 말을 좋아하지 않아 표현하지 않았다면 오늘만큼은 해야 할 날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고 꼭 표현해 보세요.



■ 건넴의 대상


바쁘게 살아오느라 가족의 얼굴을 놓쳐버린 분

가족에 대한 감정이 복잡한 분

오랜만에 엄마라는 이름을 천천히 불러보고 싶은 분


세대 간의 이해와 공감이 필요한 부모님, 자녀 모두에게 추천합니다.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남은 문장이나 순간이 있다면 공감(♥)과 댓글로 나눠주세요.

당신의 감상이 더해지면, 이 공간은 조금 더 깊고 따뜻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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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대표 시 「그 여자네 집」, 이 한 줄의 시가 오늘의 나를 붙들었습니다.

오늘은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함께 읽으려 합니다.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 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버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 안 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해설 및 주제 분석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은 하나의 공간을 통해 삶, 기억, 그리움 그리고 사랑과 죽음까지 아우르는 시입니다.

그는 특정한 집을 중심으로 유년의 감각부터 첫사랑의 정서, 공동체의 풍경을 풀어내며 공간과 존재가 겹쳐지는 깊이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복과 누적을 통해 한 편의 시가 소설처럼 느껴지는 깊이와 입체감을 선사합니다.

이 시의 핵심은 그 여자라는 존재를 둘러싼 기억의 집합입니다.

또한 시 말미에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이라는 구절은 과거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사라졌지만 내면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역설합니다.



■ 하나의 감상


읽는 내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담긴 집이 그려졌습니다.

꼭 함께 거닐고 있는 듯한 감정마저 들었습니다.


사랑과 그리움, 상실과 회한이 교차하는 그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내면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그 여자네 집을 품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되돌아갈 수 없지만,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 한 사람 나아가 그 시간, 그 장소를요.




이 시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이 글을 공유해주세요.

오늘, 당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흔들려 본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단단한 위로의 목소리를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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