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특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생각나는 영화와 책들이 있다 🎄

트와일라잇 시리즈도 그중 하나인데 마당에 소복소복 쌓인 눈을 보고 있자니 전에 읽었던 미드나잇 선이 생각나 책장에서 꺼내들었다.

트와일라잇이 벨라의 시점에서 풀어냈다면 미드나잇 선은 에드워드의 시점에서 풀어낸 이야기다.

뱀파이어로 살아오면서 인간인 벨라를 마주했던 그 순간은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큰 사건이었다.

벨라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를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밀어내고 싶어도 밀어낼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운명의 상대였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미드나잇 선을 보고선 곧장 트와일라잇을 읽었는데 역시 트와일라잇을 따라올 순 없다 ❤

로맨스소설을 쓴 계기가 트와일라잇 덕분이었는데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어서 전작만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다.

다만 미드나잇 선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당시 에드워드가 어떤 심경이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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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불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늘 까다로운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침묵은 세련된 말보다 더욱 큰 설득력은 발휘할 수 있다.


입씨름은 아무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그보다는 어떻게 애초의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논의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누가 한 짓이야?"라는 사고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태도로 옮겨가야 한다.


미국의 작가 샘 레벤슨은 '눈으로는 늘 서로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늘 서로를 보도록 노력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국 같은 결과를 바라고 있잖아"라고 말해보라. 두 사람의 목적지는 같다. 다만 도달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이 점이 확인되고 나면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공동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가 쉬워진다.


주변의 누군가가 실수를 저질렀다면, 그 실수가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돕도록 만들어라. 고통의 경험을 교사로 삼아라. 그리하여 실수를 가차 없이 처단하는 냉혹한 사람이 아닌, 실수에서 배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자.


옮은 말은 강하다. 그런 말의 효과는 정신뿐 아니라 육체에까지 미친다. -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이 말한 대로 말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문제'라는 말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상대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그러다가 결국 모두가 만나기 싫어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심술꾼을 미워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건강, 행복, 마음의 평화는 당신이 지켜야 한다. 진흙탕 속 싸움에 휘말리면 이겨봤자 진흙투성이가 된다.


적대적이기보다 인간적이기를 선택함으로써,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마음이나 영혼이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곳에 이르는 것이다.

긍정적인 기를 내보내기로 선택했다면 당신의 마음이나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 어디 있든, 누구와 있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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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18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의 피그먼트 펜은 글씨가 예쁘게 나오는데, 여러개를 가지고 계시군요.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의 책이 세 권이나 있네요.
같은 내용을 말해도 조금 더 적절하게 말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하나의책장님,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최고의 시간이면서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지만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의 신기원이 도래함과 동시에 불신의 신기원이 열렸다. 빛의 계절이면서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다가도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다. 다 함께 천국으로 향하다가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물론 그런 식이지만, 언론과 정계의 목소리 큰 거물들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 시대가 극단적으로만 보여지길 원했다.


사람이란 존재 모두가 서로에게 깊은 비밀과 수수께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일이다. 깊은 밤 도시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어둠 속 조밀하게 모여 있는 집들 안에 숨겨진 비밀들을 엄숙히 떠올려 본다.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그 별빛 아래, 학자들이 말하길, 어떤 별은 이 작은 땅과 너무 멀어서, 무엇이든 고통 받거나 죽는 우주의 한 점인 이곳에서 발견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별빛 아래, 밤 그림자는 크고 어두웠다.


분수대의 물이 흐르고, 날랜 강물이 흐르고, 하루가 흘러 저녁이 되고, 이 도시 안의 많은 인생도 규칙대로 죽음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간과 대세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고, 쥐들은 어두운 구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잠이 들고, 저녁 식사에서는 가장무도회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그렇게 제 갈길대로 흘러갔다.


수많은 밤낮 동안 그들은 모퉁이에 울려오는 발소리를 들었고, 많은 소리가 몰려오는 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이 철렁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 발소리는 민중의 발소리였고, 붉은 깃발 아래 조국이 위험에 처했음을 선언했으며, 격동하는 민중은 무시무시하고 끈덕진 어떤 주문에 의해 야생 동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옛날이야기 속 선원처럼, 바람과 물결이 그를 자석 바위의 영향이 미치는 곳으로 데려가고 자석 바위가 그를 끌어당기기 시작하니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이 그를 더욱더 빠르고 더욱더 강하게 치명적인 그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깊은 곳에 내재했던 초조함은 불의가 지배하는 불행한 조국에 대한 것이었고, 그들보다 스스로 낫다고 생각한 그가 그곳에 없어 유혈 사태를 막고 자비와 인류애를 주장할 수 없음에 대한 것이었다. 그 초조함은 반은 그를 억누르고 반은 그를 비난했다.


도시의 함성은 이제 달라졌다. 여전히 나직한 북소리였지만, 그 속에서 들려오는 건 그가 아는 이들의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일어났다. 연기는 끔찍한 침묵만 남기고, 숨이 끊긴 채 바닥에 널브러진 맹렬한 여인의 영혼처럼 공중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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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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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반복이 가득한, 마침표가 눈에 띄지 않는, 쉼표가 가득한 그의 문체는 참 단순하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욘 포세.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저자, 욘 포세는 1959년 노르웨이 헤우게순 출생으로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극작가로,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3년 프랑스에서 국가공로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07년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100명의 살아 있는 천재들 리스트 83위에 올랐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소설뿐만 아니라 시, 아동서, 에세이, 희곡 등 다양한 방면의 작품을 쓰고 있는데, 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연극은 전 세계에서 수천 번 이상 공연되는 국제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오늘날 그의 작품들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뉘노르스크 문학상, 도블로우그상, 노르웨이 예술위원회 명예상, 브라게상 명예상, 국제 입센상, 스위스 아카데미 북유럽문학상, 유럽연합 문학상, 북유럽 이사회 문학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공로 훈장에 이어 노르웨이 국왕이 내리는 세인트 올라브 노르웨이 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가족관계와 세대 간의 관계를 통해 볼 수 있는 인생, 사랑과 죽음 같은 우리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들이다. 세대 간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말로는 결코 종합적으로 고찰될 수 없는 것, 즉 죄와 실망의 원천 문제를 다룬다. 그의 작품에는 일견 너무나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삶의 그림들이 단순한 구조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는 많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며, 항상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 남자(남편), 여자(아내), 소년, 소녀. 여기에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할머니, 그리고 때때로 이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으며 특별한 고유의 성격이 부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항상 단순한, 일반적인 사람들이며, 그들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평범함과 보편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경건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이고 그 관계가 또한 철저하게 관찰되고 파악될 수 있어서 보편성의 미니멀리즘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만큼 포세가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현실의 단면은 굵은 윤곽으로 이루어진 담담한 그림으로 그려지나 그 사이의 여백에는 인간의 삶이 가진 구체적인 모습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인이 만들어내는 의사소통 부재의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며 인간 의식 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원형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포세의 언어는 배우와 연출자에게 커다란 도전이 된다. 그의 언어는 철저하게 압축되고 축약된 형태로, 문장의 조각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완벽하게 구두법 없이 쓰인 그의 텍스트는 해석과 리듬의 모든 힘을 배우와 연출자의 손에 넘겨준다. 포세는 삶의 본질적인 것이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필요한 소리들을 제거한다. 그의 언어는 끊임없이 회전하는 말의 고유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모노톤의 문장들, 부분적으로는 스타카토처럼 던져지는 문장들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구조들, 인간의 내적인 심리 구조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응축된 형태로 노출된다. 여기에 포세는 침묵의 순간들을 적절히 이용한다. 인물들의 대화 과정 중에 끊임없이 반복 사용되는 ‘사이’의 침묵, 이 행간을 인물들의 말 없는 진실이 넘나든다. 소리와 소리 없음의 독특한 리듬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통해 포세는 인간의 삶이 가진 진정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

거기 부엌문 앞에서 서성대지 말고 이 사람아, 그녀가 말한다

네네, 올라이가 말한다


아마도 그건 신의 영혼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에 내재해 무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 의미와 색을 부여하는, 그리고 그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모든 것에 신의 말씀과 영혼이 내재하는 이유다, 그래, 그렇지, 그러나 사탄의 의지 역시 작동한다는 것, 그 역시 확신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센지, 그것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고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 둘은 누가 더 강한지 겨루고 있으니까, 아마 태초부터 그랬을거야, 올라이는 생각한다, 신은 세상을 훌륭하게 창조했으며 전지전능하다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항상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굳게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신은 존재한다,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을 뿐, 신은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울고 또 울며 세상 밖으로 울려퍼지는 제 목소리를 듣는다, 울음소리는 아이가 새로이 속한, 세상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따뜻하고 검고 조금 붉고 조금 축축하고 온전한 것은 더이상 없다, 이제 저 자신의 움직임뿐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을 메우려는 듯한, 무엇인가, 그리고 아이와 아이의 목소리는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거기에는 뭔가 다른 것이 더 있는데, 뭔가, 그의 일부이면서 아니기도 한 무엇이, 아이의 목소리는 저 밖의 모든 것을 갈라놓고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더 커지고 커진다 그리고 다 잘될 거야, 올라이가 말한다



어부 올라이와 마르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요한네스.

올라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아침마다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고 먹을 것을 생각해보고 서쪽 만으로 산책을 나갈 지, 날씨가 좋다면 배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을지 등의 생각을 반복한다.

지루하지만 불평할 것도 없다.

몸 누울 집도 있고 자식들은 벌써 장성해서 손주까지 있는데다 막내 싱네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거의 매일같이 그를 보러 오니깐.

그 날은 몸이 참 가벼워 희한하기만 하다.

매일같이 아프던 뼈마디가 하나도 안 아파 희한하기만 하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오래되고 손때 묻은 것들도 모든 것이 금빛으로 반짝거리니 희한하기만 하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만으로 내려가는데, 해변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테르였다.



페테르 자네 오랜만이네,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가 돌아서서 요한네스에게 눈을 껌벅해 보인다

그럴 줄 알았지, 자네가 올 줄, 알았어, 페테르가 말한다

자네 게망을 보러 가려는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래야지, 페테르가 말한다

……

그러니까 어제, 자네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말이야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자네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그가 말한다


이상하다, 페테르는 이미 죽었는데 요한네스 눈앞에 있다는 것이.

요한네스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한 페테르가 눈앞에서 고깃배를 끌어당기고 있으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금 죽어 있는건지 살아 있는건지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눈앞에서 이리도 멀쩡하게 있으니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페테르의 머리를 반드시 잘라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곤 눈앞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싱네를 발견하게 된다.

저를 보러 오는 싱네가 반갑기만 한데 싱네는 요한네스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버린다.

싱네 또한 이상했다. 일 때문에 빨리 오지 못해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는데도 아버지 요한네스가 도무지 받질 않았다.

평소처럼 산책하지도 않으셨고 무엇보다 해질녘까지 불 한 번 켜지 않았다면 혼자 임종을 맞으신 건 아닌지.

그렇게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는 길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물체가 그녀에게 마주 오는 것을 느꼈고 그 중심을 통과하는 순간 너무나 차가웠다.



지금 서쪽 만으로 가는 건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거기서 뭘 하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이제 떠나는 거야, 자네와 내가, 페테르가 말한다

그렇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내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게 페테르,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그리고 오늘 바다는 저리도 잔잔하고 푸르게 빛나는데, 싱네는 생각한다, 요한네스,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



💭

아내가 죽고나니 집안이 조용하다.

썰렁한 집안, 요한네스는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귀찮기만 하다.

귀찮지만, 몸을 일으켜 걷던 중 해변에 서 있는 페테르를 보게 된다.

페테르와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깨닫게 된다.

페테르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요한네스의 일생을 한 권에 담아낸 이 책은 마침표가 없다.

쉼표만이 가득할 뿐인데, 이는 삶과 죽음은 곧 연결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표현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백세인생이라고 하지만 누구는 얼마나 더 짧게 혹은 길게 살지, 누구는 얼마나 더 빠르게 혹은 늦게 죽을 지는 알 수가 없다.

결국 삶과 죽음의 과정도 연결 지어진 '하나의 과정'이기에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


어제 오후에 올리려고 했는데 급 컨디션이 안 좋아지더니 비오는 오늘 하루종일 아팠었다.

잠시 닫아놓았던 노트북 켜서 얼른 올려보는데… 책장 앞에 높이 쌓여있는 책탑에 눈길이 멈춘다.

책은 참 많이 읽고 있는데, 쓰는 게 따라가지를 못 한다. 잠시 멈추었던 글도 내년에는 연재 시작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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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vs 기독교 신화


그리스 신화의 이 3대 이야기는 흡사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3대를 그대로 연상하게 합니다. 드라마 속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총수 자리를 노리는 자식들과 그 손자들,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사수하려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힘겨루기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그리고 제우스에게로 이어지는 권력의 대물림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복잡함에도 이후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가 된 로마는 과거 그리스를 동경하여 이 복잡한 신화를 그대로 승계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라노스는 카일루스로, 크로노스는 사투르누스로, 제우스는 유피테르 등의 로마식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어로는 우라누스, 새턴, 주피터가 그들입니다.



유 고 유고슬라비아


…… 게르만 민족 이동 시 이 지역은 북쪽에서 슬라브족이 내려와 자리를 잡아 오늘날과 같은 남슬라브인이 주축을 이루게 됩니다. 유고슬라비아는 그들 언어로 '남부 슬라브인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 이윽고 세계가 주목하게 된 1914년 7월의 어느 날 이곳에서의 총성을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당시엔 세르비아 왕국인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이 지역 청년에게 암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달은 1943년 그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6개국 연방인 단일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를 출범시킵니다. …… 하지만 1980년 티토 대통령 사후 유고 연방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돌아가 쪼개집니다. 이로 인해 발생한 20세기 말 유고슬라비아 전쟁 또는 내전은 지도자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국가의 운명을 크게 좌지우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가 됩니다. 분열도 분열이지만 오늘날과 가까운 밀레니엄 시대에 한 국가 국민이었던 죄 없는 사람들이 무려 13만 명 넘게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미국의 주인이 된 사람들


…… 신대륙 미국의 주인이 된 사람은 그 땅에 가장 먼저 온 사람도, 가장 힘이 센 사람도, 가장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최종 승자는 그들에게는 없는 어떤 것으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종교적인 신념으로 핍박을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 땅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쫓겨간 사람들이었지만 그 신념으로 그 땅에 먼저 온 사람들을 몰아내고 미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Peace... 우크라이나


…… 교과서에 등장했던 비옥한 흑토지대였습니다. 미국의 프레리,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와 함께 시험에 잘 나왔던 세계 3대 곡창지대라는 필수 암기 사항에 그곳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 곡물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든 그 우크라이나의 평원입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요즘 그런 경제뉴스가 나올 때마다 '유럽의 빵'으로 지칭되곤 합니다.


2023년 현재 1991년 말 소비에트연합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다시 소련의 직계 후손인 러시아에게 복속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흑해의 따뜻한 휴양지 크림반도는 2014년 주민투표로 이미 러시아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지금 세계가 주지하다시피 필사적인 항쟁으로 러시아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털 팰리스 vs 에펠 타워


크리스털 팰리스는 버킹검 궁전과 같은 왕궁의 이름이 아닙니다.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박람회의 전시장 이름입니다. 이름에서처럼 수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유리로 지어졌습니다.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는 18세에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 재임 14년 차의 대형 이벤트였습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영제국의 위용을 그 박람회를 통해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줄여서 부르는 엑스포 Expo,exposition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1851년 런던 엑스포를 보러 온 외국인들 중 그것을 가장 경이로우면서도 긴장하며 참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인들이었습니다. 바다 건너 좁은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역사적으로 서로 으르렁거리며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모든 분야에서 앙숙 관계인 두 나라니 그것은 숙명적으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4년 후인 1855년 파리에서 두 번째 엑스포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와 같은 화제성 볼거리는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이후에도 두 번 더 파리 엑스포를 거행했습니다. …… 그리고 네 번째인 1889년, 드디어 그들은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를 압도할만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파리에 준비해 놓고 전 세계의 손님을 맞습니다. 도저히 19세기의 건축물 같지 않은 거대한 철탑이 파리 시내에 등장한 것입니다.

에펠탑의 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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