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계, 봄을 노래하다 당시 사계
삼호고전연구회 옮김 / 수류화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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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약한 빗줄기가 내리고 쌀쌀하면서도 볕은 따뜻하다.

특히, 황사가 하늘을 덮은 것 보니 분명 봄이다.

꽃을 만질 때 라넌큘러스를 많이 들여올 때면 이미 봄이 왔음을 느끼는데, 이제 라넌큘러스가 가고 작약의 시기가 온 것을 보니 여름도 성큼 다가오겠구나 싶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그렇게 한 계절이 찾아오면 그 시기에 맞는 시들이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번 봄에 새롭게 읽은 시는 바로 '당시'이다.


저자, 강민우, 권민균, 김자림, 서진희, 차영익은 삼호고전연구회로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2010년부터 중국 고전을 현대인의 독법에 맞게 번역하고 그 의미를 공부하는 모임이다.




絕句 절구 _두보 杜甫


길어진 해에 강과 산은 아름답고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네.

언 땅 녹으니 제비 날아 다니고

따스한 모래밭에 원앙 잠들었네.


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

泥融飛燕子,  沙煖睡鴛鴦.



처음부터 모르는 시가 나왔으면 분명 어려움도 없지않아 있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첫 시에서 아는 시가 나와 순간적인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마 한시를 접해봤다면 두보의 절구는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는 두보는 '시성'이라고 불린다.

사회성을 반영한 그의 시는 뛰어난 문장력을 뽐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해 방랑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의 시에서 사회 현실에 관련된 감정, 인간에 대한 애정과 진심이 묻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遲日江山麗 (지일강산려), 春風花草香 (춘풍화초향).

泥融飛燕子 (니융비연자), 沙煖睡鴛鴦,(사난수원앙).


절구는 당시 두보가 온갖 곤경을 겪고서 완화계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지은 5언 절구 두 수 가운데 첫 번째 수이다.

이 때, 심리적 안정감을 찾은 두보이기에 그가 보는 자연사물에 대해 느끼는 희열감도 남다르다.

전체 시는 대구와 경물묘사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했지만 조탁한 흔적이 없어 독특한 풍격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를 읽을 때는 각각의 경물을 통해 행간에 녹아있는 작자의 감정을 읽어낸다면 읽는 맛이 두배가 될 것이라 저자는 덧붙인다.



春思 그리움 _이백 李白


연 땅 풀은 아직 연푸른데

진 땅 뽕나무는 이미 녹색가지 드리웠네.

그대 돌아올 날 생각하는 날은

첩의 애간장 끊어지는 때.

봄바람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비단 휘장으로 불어오나?


燕草如碧絲, 秦桑低綠枝

當君懷歸日, 是妾斷腸時.

春風不相識, 何事入羅幃.



이백은 당나라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시선이라 불리며 두보와 함께 '이두'라고 병칭된다.

앞서 소개했듯이, 두보의 시는 세상에 집착한 유교적 현실주의시가 주를 이루었는데 그에 반해 이백은 술을 통해 세상을 초월하는 신선의 경지를 노래했다고 한다.

또한, 두보는 수정의 수정을 거듭해 정밀한 시를 썼다고 하는데 이백은 그에 비해 자유롭게 시를 썼다고 한다.


燕草如碧絲 (연초여벽사), 秦桑低綠枝 (진상저록지).

當君懷歸日 (당군회귀일), 是妾斷腸時(시첩단장시).

春風不相識 (춘풍부상식), 何事入羅幃 (하사입나위).


이백이 악부 형식으로 지은 고시이다.

그에게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심리를 묘사한 시가 꽤 많은데 이 시도 그 중 하나이다.

봄바람 부는 어느 날, 마음 다독이며 살고 있는 여인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소식 없는 낭군 소식에 여인은 그리운 마음에 낭군이 계신 연 땅을 상상한다.

하지만 지금 있는 땅은 무성한 뽕나무 잎에 가지가 눌려 낮게 드리울 정도로 봄이 무르익었다.

그만큼 생각도 깊어지는 나날인데 봄바람은 쉼 없이 불어오니 몹쓸 봄바람이라고 할 수밖에.



아마 대부분 관심이 없지 않는 이상 고전시는 학창시절에 접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나 또한 우리나라의 대표 시인들의 시집만 자주 접할 뿐 따로 중국 한시는 접한 기억이 거의 없다.

당시는 말그대로 중국 당나라의 시를 의미한다. 당나라는 시의 나라로 불렸고 그 당시 시인들은 시를 통해 생각하고 말하고 생활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다섯 글자, 일곱 글자를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

당시를 읽다보면 자연과 매순간 함께 한 그들이기에 계절 또한 그들의 감정에 섬세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구나를 느꼈다.

봄만을 모은 당시를 쭉 읽다보면 참 신기하게 '봄'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특히나 이 책은 읽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되어 있어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내면의 봄을 느끼고 싶다면 한번쯤은 꼭 접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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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8 0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역쉬 꽃구경은 하나님 서재방에서 ! 작약 좋아하는 1人 매년 6월이면 간송 미술관 상반기 전시전 회화전 갔었는데 ㅎㅎ 코로나가 끝이 안보이네요 하나님 건강 잘 챙기세요 하나님은 북플계 플로리스트 이쉼 ^@@^

하나의책장 2021-04-19 00:46   좋아요 2 | URL
코로나는 언제쯤 끝이 날까요? 요새 마스크 안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간혹 보는데 얼른 끝나길 바랄 뿐이에요ㅠ 정말! 글에서 만난 scott님의 이미지가 작약이랑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제 작약 들여올 때면 scott님이 자연스레 떠오를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1-04-18 0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춘사 좋아하는 시예요
너무 애절해서 가슴이 저며오죠.
당시 삼백수를 꺼내보게 되네요
이밤에 잠못들듯 ^^

하나의책장 2021-04-19 00:49   좋아요 1 | URL
우와, 저도요^^ 그레이스님도 한시 좋아하시나봐요ㅎ 주말이 순식간에 흘러갔네요. 이번 한 주 행복하게 보내세요💐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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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인생의 첫 사랑과 방황과 슬픔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 헤르만 헤세.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은 지금도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는 삶의 멘토다.




정여울 작가와 함께 하는 문학여행


『헤세로 가는 길』은 마치 작가와 함께 헤세의 흔적을 찾으러 여행 간 기분을 들게한다.

첫 장부터 여행의 시작이다.

칼프 역에서 내려 도시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강을 건너야 한다.

나는 이 강이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가 낚시를 하며 행복해하던 그 강이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그렇게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하게 된다.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강에서 한스가 낚시하는 모습을,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일까? 몇 시간이면 후루룩 읽을 수 있는 게 에세이인데 이 작품만큼은 천천히 음미하며 읽곤 했다.

마음을 울리는 좋은 문장이 나오면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며 곱씹었다.

나도 그렇고 애서가들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책이란 또다른 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작품 속에서 유독 그런 문구들이 있다, 생각하게 만들게끔 자세하게 묘사된 문구 혹은 감성적으로 묘사된 문구들이.


「활짝 핀 꽃」이라는 시에서 헤세는 이렇게 노래했다.

복숭아나무 한가득 꽃이 흐드러졌지만 그 모두가 다 열매 맺지는 않는다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꽃처럼 많은 생각이 피어나지만 피는 대로 그저 두라고.

꽃처럼 제멋대로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굳이 분석하여 수익성을 따지지 말고, 생각의 꽃이 피는 대로 그저 내버려두자.

그래서인지 '생각'하게끔 만드는 문구들이 많이 들어간 에세이를 특히나 좋아하는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에 빠져 홀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당신을 본다면, 헤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보라고. 눈부신 하늘, 아름드리나무 잎사귀들, 아장아장 걸어가는 강아지들, 떼 지어 노는 아이들, 여인의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을 높치지 말라고. 인생의 아름다움은 그런 자잘한 풍경들에 깃들어 있다고.



문학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데미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데미안』을 읽었다.

타이밍이 적절해서였을까? 두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이다.

정여울 작가에게는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첫 경험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첫사랑, 방황, 슬픔의 기억과 함께.

앞서 타이밍이 적절했다고 언급했는데 힘들었던 시기에 헤세의 작품들을 접했었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힘들 때면 나도 모르게 헤세의 작품들을 떠올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나'를 비로소 이겼을 때,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의 자아 또한 같이 성숙해지는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 성숙은 '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예컨데, 나이를 먹고 백발의 노인이 되었어도 내면이 성숙하지 못한 이들은 분명 많기 때문이다.

나를 성숙시키는 것, 그것의 해답은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삶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책은 헤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에 저자의 생각을 비롯하여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들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헤세가 여행했던 수많은 장소가 그의 그림소재가 되곤했는데 만년의 헤세는 농부처럼 부지런히 살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그림그리기와 정원가꾸기는 마법의 피난처나 다름없다고 말하고있다. 그에게는 아마 그 두가지가 힐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였나보다.

일에 치이고, 공부에 치이고 혹은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치이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그런 우리에게는 꼭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꽃꽂이, 그림, 도예, 악기 연주, 독서 등의 시간을 보낼 때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가지는 게 좋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생산적인 활동만이 '힐링'은 아니다. 그 또한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당연히 안 하는 것이 맞다.

소파에 기대어 좋아하는 영화를 본다던가 그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다던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시간 등이 행복하다면 당연히 이를 택하는 게 맞다.

굳이 힐링하는 시간을 꼽아보자면, 책을 보고 꽃을 만지는 것은 거의 일상이지만 그 외에는 드문드문 하는 것을 좋아해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고 어느 날은 가야금을 뜯고 어느 날은 스크랩북을 만든다.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잡다한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는 건 역시 '피아노'밖에 없는 것 같다.

뭔가에 치여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곤 한 두시간동안 건반에 몸을 맡기고 나면 잠시나마 숨 쉬는 기분이 든다.

즉, 어떤 활동을 하건간에 자신이 가장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꼭 '선물'로 주는 것이 좋다.


누구의 시선에도 영향받지 않는 '혼자 있음'의 시간, 그 땐 발의 시점으로 보는 세상이 가장 진실함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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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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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객원교수인 진 네베바는 좁은 사무실에서 광고를 보고 지원한 세 학생과 마주하고 있다.

퍼트리샤 허스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한 지원자였던 그녀를 조수로 택했다.

퍼트리샤 허스트에 대해서 알든 모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깐.

그리고 우린 일명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통해 객원교수인 진 네베바의 입장에서, 조수인 비올렌의 입장에서, 당사자인 퍼트리샤의 입장에 빗대어 시간의 흐름을 타볼 것이다.


저자, 롤라 라퐁은 소설가이자 음악가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루마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 유년을 보냈으며 프랑스 소르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첫 번째 소설 「협상 불가능한 열벙」을 발표한 이후, 「나는 그것으로 위안받네」, 「우리는 폭풍을 예감하는 새들이다」, 「절대 웃지 않는 작은 공산주의자」, 공쿠르상 후보작 「전복시키다」 등 여러 작품을 출간했다.

그의 작품은 12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우에스트프랑스문학상, 쥘리메상, 베르시옹페미나상, 랑데르노상을 비롯한 프랑스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자네는 분노하지 않는 이 세계에 더는 머무를 수 없어.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오직 돈만이 오고 가지.

하지만 이 세계의 마음은 나뉘어 있어. _≪음모 La Conspiration≫




퍼트리샤 허스트의 납치


신원불명의 3인조에 의해 한 재벌가 딸이 납치되었다. 잡지 열 몇개, 텔레비전 방송국, 라디오 방송국 등 언론 제국을 이끌어가던 집안이었다.

함께 있던 약혼자를 내려치고 단 몇 초 만에 퍼트리샤를 납치했다.

이내 신원불명의 납치범들은 스스로를 SLA 소속이라 했으며 각 언론사에 성명서를 보냈지만 희한하게 몸값을 요구하진 않았다.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을 바라보는 진 네베바와 비올렌의 관점


교수는 비올렌과 함께 퍼트리샤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교수는 비올렌에게 사진 여러 장을 꺼내 붙이라 했고 비올렌은 하나 하나 압정으로 고정시켜가며 붙였다.

퍼트리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사진들을 보면 어린 시절의 그녀는 지극히 평범했다.

공을 들고 있는 어린 퍼트리샤의 행복한 모습이 묻어난 사진에서 부족한 점을 하나 꼽자면 그녀의 치아뿐이었다.

또 다른 사진, 사춘기에 접어든 것 같은 그녀는 긴 밤색 머리에서 수수한 아름다움과 살짝 무미건조한 부드러움이 풍겨났다.

또 다른 사진, 히피 유행은 따르되 나팔바지와 밤색 혁대, V자 모양의 옷깃 등 여느 대학생들의 유니폼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진, 드레스 입은 자매들에게 둘려싸여 찍은 그녀의 약혼식 사진이었다.

특이하다면, 콧수염이 있는 그의 약혼자는 퍼트리샤보다 나이가 많고 키가 컸으며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는 반면에 퍼트리샤는 허공을 응시하며 얌전하게 웃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찍은 사진을 보고선 비올렌은 말한다. 퍼트리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내일은 더 요약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나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 비올렌이 앞으로 읽게 될 글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를 바랐습니다. 예를 들면, 이 사진들은 틀림없이 허스트가가 고른 것이다, 퍼트리샤는 세계도 받았고 대학생이고 치어리더이고 약혼도 했다, 그러니 곧 우리의 딸이나 여동생, 혹은 그 누군가의 여자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퍼트리샤를 납치한다는 건 용서 못 할 폭력이다, 라는 식으로요.

진 네베바와 비올렌은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요약하는 것일까?




퍼트리샤인가, 타니아인가, 무엇이 진짜인 것일까


앞서, 퍼트리샤 납치 사건을 이어 말하자면 한 은행에서 강도 사건이 벌어졌는데 CCTV 분석 결과 의외의 인물을 포착한 것이었다. 바로 납치되었던 재벌가의 딸, 퍼트리샤였다.

그리고 몇 달 후, 납치범들과 퍼트리샤가 체포되었다. 퍼트리샤 또한 처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가족들과 변호사는 그녀가 세뇌당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알다시피 법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증거'와 '증인'이다.

변호인단은 퍼트리샤가 세뇌당했다는 것을 전문가에게 자문받고 싶어 알아봤지만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오히려 SLA의 여왕이었다."

결국 변호인단은 대학교수 진 네베바에게 무죄를 입증할 보고서를 청하게 되었고 교수는 비올렌과 함께 사건을 정리하고 요약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올렌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몸값 요구가 없었느냐였다.

왜 그들은 몸값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라고 했을까?

이후 듣게 되는 녹음 테이프는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게 사실이다.

퍼트리샤가 직접 말한다.

"엄마, 아빠, 전 잘 있어요. …… 절 굶기는 사람도 없고, 때리거나 겁주는 사람도 없어요. …… SLA 대원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며 굉장히 불쾌해한답니다. 전 경찰이 오클랜드 집에 일제사격을 하며 공격했다는 말을 듣고 무척 화가 났답니다. …… 이 사람들은 미치광이가 아니에요. 그들은 정직하고 제게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어요. …… 하지만 저는 잘 있어요! 저는 전쟁포로이고, 제네바협정에 따라 대우받고 있답니다. 요컨대 저는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재판을 받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제가 지금 이렇게 붙잡혀있는 건 우리 가족이 지배계급에 속해서 그런 거니 엄마, 아빠가 그 사실을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퍼트리샤는 자신을 타니아라고 지칭했으며 스스로 달라지고 성장했음을 주장했다.

비올렌은 교수에게 퍼트리샤가 퍼트리샤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다른 사건이 있었다. SLA가 한 스포츠용품점을 털기 위해 들어갔을 때 차 안에 퍼트리샤 혼자 남아 도망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가게 안에서는 몸싸움이 벌어졌고 심지어 퍼트리샤가 차 안에서 경비원에게 총을 쏘면서 대원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일조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SLA 대원들과 함께 체포될 당시에도 오히려 안도와 환희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Stockholm Syndrome, 즉,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의미를 찾아보면 가장 먼저 패트리샤 허스트라는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 1974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인데 당시 좌익 과격파인 공생 해방군(Symbionese Liberation Army, SLA)에 의해 납치되었었다.

며칠 후, SLA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지만 가족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이 습격을 당했었는데 SLA의 짓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행 CCTV에 허스트가 소총을 들고 은행 직원과 고객들을 당당한 태도로 협박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FBI가 이들의 근거지를 급습하여 조직원 일부를 사살하자 허스트는 타냐라는 이름을 걸고 부모 및 사회를 공격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왔다.

결국 FBI와의 총격전 끝에 드디어 허스트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웃긴 것은 바로 이 뒤부터다.

재판에 서게 된 허스트는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조직원들에게 세뇌당해 어쩔 수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미 드러난 것이 많았던 허스트에게 배심원들은 징역 35년형의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거대한 '부'를 지닌 부모 덕에 2년도 안 되어 가석방되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부'를 가진 자들은 모든 것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언론 제국을 거머쥐었던 부모의 빽이 없었다면 엄청난 변호인단의 변호를 받을 수도 없었을테고 무엇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그녀를 가석방시켜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공포심으로 인해 극한 상황을 유발한 대상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현상이다.

즉, 학대받은 이들이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뜻한다.

요즘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바로 '아동 학대'이다.

일부 아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도움을 구해 결국 그 가정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지극히 일부이다.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그 끈을 놓지 못한다. 왜일까?

때린다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세상과 연결지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매달리고 더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동뿐만 아니라 남편 혹은 남자친구에게 학대당하는 여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순간 학대에 스며들면서 가해자가 나쁘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라고 단정짓기 때문이다.

실제 정신적 구속이 신체적 구속보다 그 파급력이 강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아픔과 상처를 줄 지는 수치상으로 측정할 수 없다.


아, 그렇다면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가스라이팅과 스톡홀름 증후군은 동일하다고 봐야할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스스로 피해자가 의식하며 가해자에게 긍정적인 감정 이입을 통해 내뱉지만,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가스라이팅과 스톡홀름 증후군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한 배우 때문에 가스라이팅이 연일 뜨거운 감자로 오르고 있는데 기사에 나온 그 문자들이 사실이라면 가스라이팅의 적절한 예시로 볼 수 있겠다.

가스라이팅 하는 이들의 특징이 '"너를 위한 거야.", "다 너를 위해서 그런거야."'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는데 이는 당연히 교묘한 정서 학대로 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조작되어진 심리 속에서 행동을 조종당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 그리고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면 솔직히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 이를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게 좋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 '마음 거리두기'라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봤던 대목이 떠오른다. 관계에 있어서 적정선을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스스로를 타니아로 지칭했지만 막상 재판에 서고나선 자신이 자신이 아니었다고 했던 패트리샤 허스트.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대로 감옥에서 몇 십 년이고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부모가 있었으니 수감 생활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가석방되고 이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사면된 것만 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책의 줄거리를 다 담을 순 없어 대부분 알고 있는 실화 내용을 기본 삼아 짤막하게 줄거리를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 비올렌의 관점에서도 흥미롭게 읽어봤으면 좋겠다.

책을 읽을 때,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순간적으로 헷갈릴 수 있으니 끝까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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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4-15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강렬하네요! 스톡홀름 증후군과 가스라이팅의 차이점이 애매모호했는데 하나님께서 쉽고 명확히 설명해주셔서 이해가 쏙쏙 되었어요ㅎㅎ 아직 쌀쌀한 날씨 따뜻한 저녁되세요~

하나의책장 2021-04-19 00:37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께 쉽게 이해가 되었다니 기쁘네요:) 낮에 해가 쨍쨍하긴 해도 꽤 쌀쌀한 것 같아요ㅎ 미세먼지도 너무 나쁘고요ㅠ 이번 주는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온도차는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다행히 미세먼지는 살짝 걷히는 것 같아요! 파이버님, 행복한 한 주 되세요^^
 
첫 집 연대기 - 일생에 한번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찾는 경이로운 시간
박찬용 지음 / 웨일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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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오롯이 내가 꾸민 내 집에서 살기는 모두의 꿈이다.

허술하면서도 결국은 완성도있는 독립 라이프를 읽고나면 오롯한 나만의 독립을 꿈꾸게 될 것이다.


저자, 박찬용은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나 1987년부터 쭉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2009년 말부터 라이프스타일 잡지업계에서 일했다.

여행잡지, 시계잡지, 남성잡지 등에서 에디터 직무를 수행하며 2010년대 종이 기반 라이프스타일 잡지 업계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때의 경험으로 「요즘 브랜드」, 「잡지의 사생활」,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를 냈다.



자가 보유 유무에 따라 타인의 재산을 판가름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나아가, 작은 것보단 크면 클수록 좋고 소박하기보단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다.

그렇게 변해버렸다, 세상이.


어째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집 장만하는 것은 '꿈'이 되어버리고 있다. 이룰 수 있는 목표라기보단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 말이다.

이는 중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정부의 잘못도 분명 있다.

몇 년 전, 한 변호사가 자신과 가족의 명의로 123채의 오피스텔을 보유한 기사를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돈 좀 있는 사람이라면 다 그런 부류일테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현재 뜨겁게 달구고 있는 LH 투기사건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문제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미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부딪혀도 모두가 마음 한 켠에는 언젠가 내 집을 꼭 장만하리라는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제가 사실은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데요…."


저자는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대학가 원룸 수준의 보증금과 월세로 살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매물을 알아보다 그 집을 택하게 되었고 보증금 이상의 공사비와 몇 달 치의 월세를 들여 공사를 하게 된다.

잡지 마감이라는 일에 부딪히면서도 공사를 동시에 진행한 저자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에 딱 들어맞는 셈이었다.


대한민국하면 편리함과 신속함을 자랑하지 않는가!

요새는 집 구하는 어플들 또한 너무 잘 나와있어 다방, 직방 등의 앱을 통해 여러 매물들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저자 또한 마찬가지로 종로구, 동작구, 영등포구, 구로구, 마포구, 서대문구를 세심하게 살피게 되었고 책에도 나와있듯이 각 구의 특징이 현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대목이었다.

그렇게 저자의 눈에 들어온 한 집이 결국 낙점되었고 저자는 공인중개사 사장님께 이렇게 말한다.

"그냥 오늘 한번에 다 드릴게요."

보통 계약을 하면 1/10을 계약금으로 내고 입주 후에 나머지를 내는 것이 맞는데 어차피 들어와 살 것이고 무엇보다 귀찮다는 이유에서 저자는 한 번에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작 그렇게 못 할 것 같다. 어떤 변수가 생길 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생각만큼, 아니, 생각보다 낡았기에 고쳐야 했다. 그런데 이는 '허락'이 필요했다.

집을 수리하고 싶은 저자는 1층 할머니집으로 향했다. 화가 많으신 분이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그렇게 할머니의 이런 저런 이야기까지 들으며 본론을 조용히 꺼낸 저자에게 건넨 답은 실로 명료했다.

"응, 그렇게 해."

할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저자는 마루에 깔 바닥 재료부터 벽지, 화장실 그리고 전기까지 손 봐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2부의 【고치기】를 읽다보면 저자와 함께 인테리어 보러 다닌 기분이 절로 들 것이다.

나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매우 많아 내 손으로 인테리어하는 것도 위시리스트 중 하나이다.

특히나 호텔, 카페 혹은 박물관 등을 갈 때 영감을 주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사진으로 남기거나 잘 기억해 뒀다가 스케치를 한다.

꼭 그렇게 꾸미겠다는 마음보단 정말 재미있어서랄까.

그래서 외국 채널에서 나오는 인테리어 소개 영상들을 자주 보는 편이고 특히 잡지를 많이 보는 편인데 (국내 잡지인) 메종, 까사리빙 외에 영국, 미국 잡지 위주로 보고 있다.




혼자 사는 건 나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집에 들어갈 걸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았고 내 예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열심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질문은 크게 둘이었다. 나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 중 이 집에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 독립을 생각했을 때 저자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다.

변했을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한다.

동선이 바뀌니 택시를 덜 타게 되었고 무엇보다 버스를 타면서 자연스레 책 읽는 빈도수가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인테리어 세계가 얼마나 넓은 곳인지 눈을 뜨게 되었고 취향은 둘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꾸민 이 집에 대한 만족감이었던 것이었다.

삶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기쁨들이 있듯이,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집을 결정한 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최선을 다해 힘껏 꾸민 이 집에 사는 것이 그와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 집이라는 것은 온전히 우리가 마음 푹 놓고 쉴 수 있는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원한다면 자신의 취향 한 스푼을 담아) 최대한의 좋은 자재들로 꾸민 집이야말로 나에게 오롯이 주는 집이 아닌가싶다.

조그마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긴 하지만 자가는 아니다. 오래된 집이라 손 봐야 할 곳이 많다.

문득 책을 읽고나니 손봐야 하는 몇 군데들이 머릿 속에 떠올라 여름이 오기 전에 꼭 페인트를 사서 동생과 함께 칠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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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좋아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고양이의 행복 수업
제이미 셸먼 지음, 박진희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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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세상의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며 한밤이 되었을 때, 책장에 가만히 몸을 기대어 있으면 참 조용하다.

파스텔톤의 핑크빛이 가득한 머그컵에 따뜻한 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기대었던 책장에 잠시 떨어져 눈길을 준다.

그리곤 몇 십분만에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을 꺼내들어 하루를 마무리한다.

책장에 기대어 앉는 그 위치에는 생각날 때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로 선별하여 꽂아놓곤 하는데 『사랑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좋아』 또한 그 자격이 충분하다.


저자, 지은이 셸먼은 뚱뚱한 고양이와 좋은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가진 예술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회화로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거주하고 있다. 자신의 온라인 문구류와 기발하고 독특한 고양이 디자인이 특징인 'The Dancing Cat'이라는 이름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아침마다 창가에서 내가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고양이 브룩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가 또다시 들어와 나의 뮤즈로 활동하고 있다.



네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거 알지?

오늘은 유난히 신경 쓸 일 많았잖아.


이젠 쉴 때야.

널 위해서.


낮잠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그건 게으른 게 아니라 여유니까.



무조건 달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어렸었던 나의 '착각'이었다.

달리면 달릴 수록 기름이 소진된다는 것은 당연한데 기름 채울 시간없이 억지로 달렸으니 고장날 수밖에.

교수님께도 들었던 말이 '낮잠'인데, 막상 쉬려니 양심상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망설였지만 그런 생각은 일단 접고 요새는 꼭 휴식을 취하곤 한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휴식도 '꼭' 필요하다.



멋지다고? 당연한 말씀!


난, 늘 단정하지?

뭐든 준비하고 있으면

삶이 훨씬 쉬워지는 법이거든.



깔끔쟁이인 고양이들은 항상 단정하게 준비한다, 핥고 또 핥고.

어떤 면에서 보면 피곤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깔끔하게, 단정하게 준비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뒷말처럼 미리 준비하고 있으면 쉬워지는 것은 사실이니깐.



햇빛에 흠뻑 젖어봐.


충전하듯이.

저 찬란한 태양이 널 위해 떴다는 사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이따금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곤 한다.

숲이 우거진 곳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나무와 흙이 있는 곳 말이다.

항상 시골에 가면 자연 그대로의 냄새가 좋아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을 맞기 위해 몇 시간이고 동네 주변을 산책한다.

그 순간은 햇님과 바람 그리고 나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코로나때문에 꺼려져 낮에는 마당만 돌아다니고 대부분 한적한 저녁이나 밤에 나가곤 했다.

그렇게 햇빛을 못 받아서 그랬는지 비타민 수치가 또 떨어지는 바람에 작년부터 비타민D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고 있다.

충전하듯이, 햇빛에 흠뻑 젖는 것도 우리에겐 꼭 필요하다.

나아가, 살면서 힘듦과 위기의 순간에 부딪히는 것이 다반사지만 자신을 지지해주는 '편'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글에 나와있듯이, 어쩌면 찬란한 태양이 나를 위해 매일같이 떠주고 있으니깐.



친구들 많이 사귀라고 강요하지 마.

내가 꼭 그래야 해?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잖아.


차라리 혼자가 되겠어.

뭐 어때!



배구선수 쌍둥이 자매를 시작으로 요새 유명인들의 '학교폭력'과 관련된 기사가 줄을 잇고 있다.

단순히 말다툼이라면 이는 진정한 사과로 끝낼 순 있겠지만 예로서 쌍둥이 자매들의 만행을 읽고나면 그런 생각은 절로 접어진다.

본인이 뿌린 씨앗은 본인이 그대로 거두는 법이 있듯이, 뒤로 감춰뒀던 무섭고도 못된 인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을 보면 이는 사과로 끝낼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학교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들 스스로 자각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각하지 못한다.

(심리학에서 이에 대해 공부했던 내용을 빌리자면) 그들은 단순하게 '장난'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괴롭히는 내내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이후, 나이를 먹고 그 때의 일을 물으면 단순히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한다.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은, 분명 기억이 있지만 자신의 현 상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회피하는 행동 중 하나이다.)

피해자들은 그렇게 아픔과 상처를 가진 채 꼭 꼭 숨고 스스로 삼켜야 한다, 평생.

용기내어 살짝 언급하자면 나 또한 잠깐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다.

분명, 지금의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불과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였는데 친구들을 선동하며 대놓고 따돌림을 시키고 온갖 무시를 당했었다.

그 때, 엄청난 스트레스로 학교에 가기 싫었고 난생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었다.

그렇다고 거기에 내가 지고 싶진 않았다.

책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고 오히려 소수의 다른 무리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그들은 그 무리마저도 포섭하며 따돌림시키려 했었다.

다행히도 그 때가 학년이 끝날 때라 그렇게 길고도 긴 힘든 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이유가 황당했는데 (당시 반에서 회장이었는데) 선생님이 나를 너무 아껴하셔서 질투가 나서 그랬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일이 나열하면 괜스레 마음 아프고, 무엇보다 떠올리기 싫으니 언급하진 않겠지만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들은 절대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친구, 저 친구 다 사귈 필요는 없다.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면 충분하다.

그들은 내 인생에서 지나가는 한낱 먼지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 한 책을 읽고선 마음을 다잡았다고 앞서 말했는데 그 때 마음 속에서 외쳤던 말이 '차라리 혼자가 되겠어. 뭐 어때!'였다.

그 덕분에 더 진국인 친구들을 사귀었고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과외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고민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이 바로 '교우관계'였다.

물론, 삶에 있어서 인맥은 가장 중요할 수 있으나 걸러낼 줄도 알아야 한다.

더러운 흙탕물에서 손을 내미는 친구의 손을 맞잡으면 그대로 흙탕물에 같이 들어갈 수 있으니, 그럴 바엔 혼자가 낫다.



난 다시 뛰어볼까 해.


물론 그 전에 소중한 걸 잃을 염려가 없는지

확인부터 해야지. 꼭!


나의 사전에 '후회'라는 단어가

올라가는 걸 원치 않으니까.



점프하고 또 점프한다.

숙련된 집고양이들은 점프할 때 가급적 물건에 닿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나아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도달하지 못해도 언제나 뛰고, 또 뛰어야 한다.

단, 망가지지 않게, 깨지지 않게,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게 말이다.


지쳐있는 삶에서 고양이가 건네는 메시지는 참 간결하고도 분명하다.

'나'를 찾기 위해, 나다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새로운 배움으로 채워넣는 요즘이다.

그래서일까? 짤막한 문장이 마음을 울린다.

병원 가는 길에도 핸드백에 책을 넣어 가는 길에도 읽고 또 읽었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와 일 그리고 사랑, 우정, 인간관계까지, 우리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치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자격이 있는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메시지는 분명 필요하다.

이 책은 몇 권 더 구입해 힘든 이들에게 꼭 건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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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3-04 0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책장님, 꽃이 있는 사진 투명한 유리병이 깨끗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잘 봤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하나의책장 2021-03-17 16: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오늘 하루 행복하게 마무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