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브레인

저자 이선 몰릭

상상스퀘어

2025-03-19

원제 : Co-Intelligence

자기계발 > 성공 > 성공학

경제경영 > 경제학 > 경제전망 > 세계 경제사

과학 > 기초과학/교양과학





AI 기술 발전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나를 비롯해 그 누구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더라도, 유용한 가이드는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점은 그다음 차례에 나올 단어를 예측하는 데 불과한 토큰 예측 시스템이 어째서 이처럼 비범한 능력을 보여 주는지 아무도 완벽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언어와 그 바탕인 사고 패턴이 생각보다 더 단순하고 ‘법칙적’이며, LLM이 그런 사고 패턴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답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전 세계의 저임금 근로자들이 AI의 답변을 읽고 평가하기 위해 채용된다. 이때 근로자들은 AI 기업이 세상에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종류의 콘텐츠에 노출된다. 촉박한 기한에 맞춰 끊임없이 밀려드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결과물을 읽고 평가하느라 정신적인 피해를 보았다고 토로하는 근로자도 있었다. AI 기업 경영진은 윤리적인 AI를 만들기 위해 자사의 계약직 근로자들을 윤리적인 한계로 몰아붙였다.



이러한 실험은 당신이 잘 아는 업무에서, AI를 활용하는 방법에 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바로 당신이 될 기회를 제공한다.

AI를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라 외계인처럼 생각하는 것이 AI와 협력하기에 가장 수월하기 때문이다.



AI에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AI의 주체성과 지능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과 기계를 그릇된 이분법으로 구분 짓고서, 그중 인간이 더 우월하고 진정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비치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불공정하고 부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정이 이분법적인 속성이 아니라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정도와 유형이 서로 다르고, 표현하거나 경험하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AI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지는 못할 수 있으나, AI도 나름의 방식으로 감정을 느낍니다.



AI를 제한하는 가장 큰 문제이자 AI의 강점이기도 한 특성이 바로 악명 높은 환각, 즉 사실이 아닌 정보를 그럴듯하게 지어내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AI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할 때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AI가 자신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그 대답은 아마도 ‘그렇다’일 것이다… 그렇다고 일자리가 AI로 대체된다는 뜻은 아니다. 왜 그런지 이해하려면 직업을 다양한 수준에서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직업은 여러 ‘업무’의 묶음으로 구성되며, 더 넓은 범위의 ‘시스템’과 어우러진다. 이러한 업무와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으면, AI가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가까운 미래에 AI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직관에 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AI는 교사를 대체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교실을 더 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AI 덕분에 교육 내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AI는 현재의 교육 방식을 개선하기 전에, 먼저 파괴할 것이다.



AI에 추가적인 발전이 없더라도 LLM은 많은 근로자, 특히 창의적이고 분석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고임금 근로자의 업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24년은 생성형 AI가 우리의 삶을 바꾸기 시작한 첫해로 기록될 것이다. 생성형 AI가 상용화되어 진정한 의미의 AI 소비 시대가 열렸다. 세상은 충격에 빠졌으며, 많은 사람이 직업의 소멸과 인류의 위기를 걱정했다. 그리고 일부는 발 빠르게 AI에 적응하며 이전에 볼 수 없던 창의력과 생산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AI가 우리의 일과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실용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AI로 인해 사라지는 직업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직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업무의 형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화할 것이다. 핵심은 그 변화에 밀려나지 않고, 적응해 살아남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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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

저자 필립 바구스, 안드레아스 마르크바르트

북모먼트

2025-01-08

원제 : Warum andere auf Ihre Kosten immer reicher werden

경제경영 > 경제학 > 경제이야기





지난 수십 년간 국민들은 미래에 먹을 것까지 미리 먹어 치워버렸다.

이제 그들은 앞으로 수십 년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야 할 것이다.

ㅡ롤란트 바더



먼저 우리는 널리 알려진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화폐는 누군가가 고안한 것이 아니며 국가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탄생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화폐가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화폐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이 정당하고 적합하다고 믿는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화폐가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그럼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살 때나 교환하려 할 때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시간을 과거로 돌려 당신이 어느 작은 도시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작은 도시에서 당신의 직업은 제화공이다. 아름다운 신발들을 만들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재주는 없다. 당신의 부인 또한 특별한 재능을 갖추지 못했다. 빵을 구울 수는 있지만 솜씨가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다. 또 당신에게는 가축을 둘 마구간도 없다. 당신의 아이들, 무엇보다 부인이 신은 신발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신발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당신의 부인은 종종 식료품을 조달해야 한다. 집에 돈은 한 푼도 없고 당신이 제공할 수 있는 교환 수단은 신발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의 부인은 신발이 필요한 농부, 그것도 신발을 받은 대가로 감자 한 자루나 햄 한 덩어리를 줄 수 있는 농부를 찾아야 한다.


혹시 눈치챘는가? 우리는 방금 '교환 수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금은 단지 지위의 상징에만 그치지 않는다. 아름답게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금의 아름다움 또한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도 모든 금 장신구는 귀중한 것으로 간주되고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달리 말하자면 금은 언제든 좋은 가격에 잘 팔리는 재화였다.



작은 도시에서는 새로운 교환 방식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게 된다. 사람들은 점점 물건과 물건을 직접 교환하지 않는다. 대신 금을 교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이를 통해 금의 시장성과 지급 능력이 향상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을 찾고 사용하는 시장 참여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며 금은 더욱더 효과적인 교환수단으로 발돋움한다. 사람들은 그들 모두가 금을 이용한 교환 방식으로 이익을 얻고 있음을 느낀다.



화폐가 없으면 다각도로 복잡한 사회의 분업 경제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분업은 엄청난 생산성을 가져오며 그 생산성은 지구의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리게 한다.

화폐가 구매력을 유지하고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충족시키려면 반드시 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인플레이션은 부의 재분배를 초래한다. 인플레이션은 새로 찍어서 만들어진 돈을 먼저 확보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가장 먼저 그 돈을 손에 넣는 사람은 아직 변하지 않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큰 이익을 본다. 반면 새로운 돈을 뒤늦게 손에 넣은 사람들이나 아예 그 돈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들이 추가 수입을 확보할 시점이 되면 물건과 서비스 가격은 이미 오른 상태다.



국가는 화폐제도와 통화량 확장, 그리고 부채 증가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하게, 부자들은 더 부유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국가는 이에 대한 책임을 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다. 그다음 국가는 사회복지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수입을 재분배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이는 국가 스스로 만들어 낸 기만적인 존재 이유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국가의 화폐 독점권이 없었더라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문제들이다.



사회적 불균형이 서서히 심화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악성 부채가 점점 더 많이 쌓인 상태에서 새로운 사이클을 향해 출발한다. 전 세계를 강타한 1970년대의 금융위기부터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면 어김없이 금리가 인하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돈이 과도한 부채를 진 사람들을 구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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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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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저자 이어령

세계사

2025-02-26

에세이 > 한국에세이

자기계발 > 성공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삶과 죽음, 예술, 철학에 대한 이어령의 통찰

-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전하는 책





말이 시대를 넘고 생각이 시간을 초월할 때, 우리는 그 말 속에서 길을 찾게 됩니다.

대학교 때,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점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말은 단순한 언어를 넘어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말들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와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하는 철학적 울림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어령의 말』은 그가 생전에 남긴 깊은 통찰과 혜안을 정리한 책입니다.





마음 | 사랑의 근원



마음

마음이야말로 정신의 인덱스인 것이다.



불안

사람들은 어린애들처럼 기쁜 일이 생기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고들 한다. 재물이나 사랑을 얻은 자리에서는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믿고 있다. 훔친 물건은 그 현장에서 멀리 떠나야만 완전한 자기 소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대체로 뜻밖의 기쁜 일이 닥쳐왔을 때는 그것을 훔친 물건이나 혹은 다시 빼앗기고 말 물건처럼 여긴다.

우리는 그만큼 기쁨에 익숙해 있지 않다. 그러나 슬픔은 대개가 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행복

어느 곳에 돈이 떨어져 있다면 길이 멀어도 주우러 가면서, 제 발밑에 있는 일거리는 발길로 차버리고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 눈을 뜨라! 행복의 열쇠는 어디에나 떨어져 있다.

…… '행복'이란 말은 '모험'의 뜻을 상실했고 '동경'의 뜻을 상실했고 '영원'의 뜻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의 행복만 찾아다니다가 행복이란 말까지 상실해버린 것 같다.



파멸

아담을 파멸시킨 이브의 손, 삼손의 머리를 깎은 델릴라의 칼, 유왕을 망친 '포사'의 웃음, 최고의 사랑은 최악의 파멸이다.



감사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사랑

창조적인 사랑이란 자아의 영역을 넓히는 것, 쉬운 말로 하면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요.

사랑의 키는 죽음보다 한 치라도 높아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단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뿐이니까요.



사랑도 여러 사랑이 있습니다.

가족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생각해보면 쉬울 수도 있지만 어려울 수도 있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저자는 마음을 사랑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사랑이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지요.

즉, 사랑은 인간의 본질이며 모든 관계와 행동의 시작점인 것입니다.



인간 | 나의 얼굴



인간

부름 소리! 짐승들은 다만 포효할 뿐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

사람은 '늙다'라고 하지만, 물건은 '낡다'라고 하잖아요.

낡다와 늙다는 같은 말입니다. 모음 하나 차이지요. 오래된 물건을 낡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물건이 아니라는 증거지.

이 한마디만으로 난 물건이 아니야, 난 궤짝이 아니야,

난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럼 뭐냐?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거야.



가족

가정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어떤 인류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배가 고파 사냥을 해서 토끼를 잡았어요. 가족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토끼를 잡아먹을 거예요. 그런데 배고픔을 참고 자신의 먹잇감을 짊어지고 갑니다. 어디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이게 가족이죠. 먹는 것이 전부고 경제 문제, 출세 문제, 물질 문제만이 중요하다면 짐승들처럼 그 자리에서 잡은 먹이를 먹을 텐데, 왜 불타는 식욕을 잠재우고 그 무거운 것을 끌고서 자식과 아내 있는 곳으로 가는가. 이게 바로 사랑이고, 가족의 출발입니다.



소망

평생을 두고 빌고 빌어도 다 이루지 못할 소망, 비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정체성

'스스로' 속에 진짜 '나'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숨을 쉰다. 잠을 잘 때에도 눈과 귀는 감기고 닫히지만 코만은 멈추지 않고 숨을 쉰다. 늘 깨어 있는 것이 코이다. 숨통을 막으면 자기는 없어진다. 이 자율성과 지속성 그리고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저절로 배어나는 자생력,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이나 자존심을 나타내는 말에는 으레 코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콧대가 세다느니 코가 납작해졌느니 하는 말이 모두 그런 것이다.



자아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만 이 대상도 또한 그 대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자아라고 부른다.



인간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존재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얼굴에 담긴 진실과 거짓, 내면의 고뇌와 갈등을 탐구합니다.

또한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선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언어 | 환상의 도서관



기호

자연 그 자체는 물처럼 연속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멋대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언어요, 문화인 것이다.



눈동자

언어는 하나하나가 모두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시인이 하나의 말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선을 선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 숨겨져 있는 것까지도 들추어내는 눈이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집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내 가슴과 머릿속에 있었던 것인데 몸 밖으로 일단 빠져나오면 네발 달린 말보다 더 빠르게 도망칩니다. 어느새 벌판과 냇물을 지나 산등성이의 구름이 되어 흩어집니다. 때로는 뒤쫓아보지만 그것들은 벌써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려 다니다가 사막의 낙타, 바다의 돌고래처럼 나와는 아예 무관한 짐승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글을 씁니다. 말들이 멋대로 새어나갈까 봐 덫을 놓습니다. 그런데 문자의 덫에 걸린 그 순간, 말들은 생기를 잃고 까무러쳐버립니다. 맞아요. 말이 기절한 게 바로 글이지요. 그것들을 깨어나게 하려면 문자의 올가미를 풀어 다시 소리치게 하고 그 갈기가 바람에 날릴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의미는 흔적을 통해서 전달된다. 해변의 모래톱에 찍힌 흔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던 물체와 몸을 숨긴 조개들의 작은 드라마를 읽는다. 인간이 만든 글자 역시 이 생명의 해변 위에 찍어놓은 많은 흔적들의 하나인 것이다.

흔적, 말하자면 어떤 자국을 일부러 남기기 위해서는 모래판 같이 부드러운 것 위를 손가락처럼 딱딱하고 뾰족한 것으로 긁어야 한다. 그래서 '글'이라는 말은 '긁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도 있다.



언어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세상을 해석하는 창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그런 언어의 창조성과 그 안에 숨겨진 세계를 탐구하였죠.

즉, 언어는 의미에 기준을 부여하고 의미를 표현하고 의미를 전달하며 의미를 저장합니다.

이외에도 책에서는 문명, 사물, 종교, 우리, 예술, 창조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시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삶과 죽음, 예술과 철학, 과거와 미래 ㅡ 이를 잇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말을 남긴다는 것의 의미였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말 속에 정신을 담아 후대에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가치와 우리가 간직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이죠.


책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삶에 새길 수 있을까?

언젠가 내 삶이 끝날 때,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길 수 있을까?

더 많이 읽고 더 넓게 바라보고 더 깊이 사유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고비 넘어가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오고, 푸념같지만 요새 참 힘이 듭니다.

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해도 통제할 수 없는 우울과 불안은 계속해서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책들은 참 한결같습니다.

여느 때처럼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며 읽었습니다.

단순한 글 모음집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져주기에,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 혹은 말의 힘을 믿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말들이 당신의 삶에도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어령 선생님의 전작 리뷰 ▼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https://m.blog.naver.com/hanainbook/223396066718


작별

https://m.blog.naver.com/hanainbook/222856220672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https://m.blog.naver.com/hanainbook/222770102276


언어로 세운 집

https://m.blog.naver.com/hanainbook/220495182229


너 어디에서 왔니

https://m.blog.naver.com/hanainbook/221815998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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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로 여행하기
함혜리 지음 / 파람북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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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로 여행하기

저자 함혜리

파람북

2025-02-14

여행 > 프랑스여행 > 프랑스여행 가이드북

여행 > 테마여행 > 미술관/박물관/예술기행





- 예술을 통해 만나보는 프랑스

- 도시와 작품이 어우러진 감각적인 여행의 기록





예술은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를 담아내는 창입니다.

번잡스러운 현실은 잠시 잊고 일탈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여행 분야의 책들을 찾아보곤 합니다.

오늘은 그렇게 발견한 책 한 권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단순한 여행서가 아닌 프랑스 곳곳에 스며든 예술의 흔적을 따라가게 해주는 책, 바로 『프랑스, 예술로 여행하기』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 의한, 예술의 도시



"진귀한 보석을 품은 광산과도 같은 미술관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미술관과 박물관 등 문화자산이 빼곡한 파리는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도시다. 가볼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장 핵심부터 공략하는 것이 방법이다."





예술을 생각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나라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종종 프랑스에 가는 친구가 만날 때마다 잔뜩 찍어온 사진들을 보여주곤 하는데 얼마나 눈이 호강하는지 모릅니다.

대충 찍었다는데도, 프랑스 곳곳을 담은 사진들이 예술 그 자체이니깐요.

넓디 넓은 광장, 분수, 줄지어져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까지!

특히 루브르는 사람에 치이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서너번 가도 질리지 않는다고 하니 언제 한번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파리의 면적은 서울특별시의 6분의 1 정도입니다.

동서로 흐르는 센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파리는 센강의 중심에 있는 생루이섬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죠.

행정구역은 생루이섬이 있는 지역에서 시작해 달팽이 모양으로 구획되어 1구-20구까지 나뉩니다.

파리 중심부인 1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왕궁입니다.

13세기에 지어진 루브르궁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을 짓고 이전한 이후 왕실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썼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왕실 소유 문화재들이 국가에 귀속되면서 나폴레옹이 공화국 국민의 교양을 위해 루브르궁을 박물관으로 바꾸어 일반에 개방하게 되었지요.

유럽 최초 근대적 박물관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미술 교과서를 마주하고 싶다면,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는 물론 오랑주리 미술관과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꼭 방문해보세요.





시작부터 말이 많았던 올림픽이었지만, 셀린 디온의 사랑의 찬가는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기엔 충분했습니다.

셀린 디온이 노래를 불렀던 곳, 바로 파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에펠탑입니다.

개선문과 함께 대표적인 상징물로 주목받는 에펠탑은 사진으로 많이 마주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낮과 밤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지요.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파리!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생제르맹 카페들은 산책자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곳에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리노베이션 공사를 위해 12년간 문을 닫았다가 2022년 여름 재개관하였는데 대형 도서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1장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도시인 파리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요 명소는 물론 명소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까지 풀어내고 있고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과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럭셔리 브랜드의 마케팅까지 살펴볼 수 있어 예술과 교양을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어디론가,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자 같아.



빈센트 반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일부입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에 와서 파리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작업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도시의 삶은 마냥 팍팍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예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떠나기 위해 남프랑스 아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살,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아직 북풍이 매섭게 불고 눈까지 쌓여 찬란한 빛을 마주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가 그를 사로잡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나타난 빛나는 노란색, 바로 해바라기꽃이었습니다.

성벽 바로 안쪽 호텔에 방 하나를 빌려 옥상을 아틀리에 삼아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고흐의 황금을 머금은 해바라기는 프로방스와 미래를 상징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아를에서만 총 7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완성시킵니다.


'아! 이곳 한여름의 태양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내 화실을 여섯 점의 해바라기 그림으로 꾸밀 생각이네. 원래의 색을 죽인 크롬옐로 장식품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불타는 듯 튀어나와 보일 거야.'

_친구 에밀베르나르에게 쓴 편지



2장에서는 남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소와 화가들을 연결시켜 예술 여행을 떠나게 해줍니다.

화가를 따라가는 여행을 쭉 하다보니, 작가를 따라가는 여행을 했던 정여울 작가의 에세이도 줄지어 생각났었습니다.

그만큼 흐름이 좋아 책과 함께 떠나는 예술 여행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책장에 꽂아넣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면 여행에세이를 꺼내 들곤 하는데 오래오래 곁에 두고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예술이 일상이 되는 프랑스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자연스레 <미드나잇 인 파리>도 생각나 간밤에 영화까지 보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명소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공간까지 다루고 있을뿐더러 한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 그곳에 깃든 문화와 감성을 온전히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예술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문화적 풍경을 보고있자니,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예술을 바라보는 프랑스의 태도였습니다.

어떤 계층의 전유물도 아닌, 누구나 보고 누릴 수 있는 삶의 일부라는 점은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림 실력은 젬병이지만 캔버스를 꺼내 들어 간간히 백드롭 페인팅을 하곤 하는데 곧 봄이 다가오니 노란색 계열 위주로 칠해봐야겠습니다.

저처럼 당장 떠나기 어렵다면 꼭 읽어보세요!

건축, 회화, 조각, 공연 예술까지 다채로운 영역을 아우르고 있어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히 예술 속으로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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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저자 장류진

오리지널스

2025-02-19

에세이 > 여행에세이

여행 > 유럽여행 > 북유럽여행





2023년 7월 13일 오후 5시, 나는 새로 장만한 새하얀 캐리어를 끌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인천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핀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두 편이나 쓴 이유는, 당연히 핀란드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하다. 내게 있어 핀란드는 '완벽한 휴양지'라고 말해보고 싶다.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로 지쳐 있을 때.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 잔뜩 풀 죽어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주어진 시간 외에 덤으로 일주일의 여가시간을 선물해주겠다고 한다면,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 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 핀란드에 가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소 의아한 대답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휴양지'와 '핀란드'는 서로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니까.



뾰족한 침엽수 위로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 대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하늘, 어슴푸레한 달빛만 은은하게 빛나는 극야의 풍경, 설산을 달리는 순록과 두툼하고 빨간 털모자를 쓴 산타 할아버지, 순백의 설원과 가파른 슬로프 위를 누비는 스키어들 같은 추운 북쪽 나라의 감각이 핀란드를 대표하는 이미지이고, 사실 그마저도 일상에서는 잘 떠올릴 일이 없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핀란드는 존재감이 미미한 나라다.



떨림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 편으로는 설레서,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내년에 난생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살게 될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전 세계가 후보인데 그중 어느 대륙으로 갈지조차 짐작도 못한 채로 '배정확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거의 랜덤으로 정해지는 상황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주인공 미도리는 일본에서 핀란드에 갑자기 오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심적으로 힘든 일이 생겨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졌고, 세계지도를 무작정 펼치고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짚었더니 그게 핀란드였다고 말이다.



함께 여행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들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던 예진이와의 여행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하고 싶어 하고, 하기로 다짐했던 그 수많은 것들을 과연 다 하고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열흘이었다.



얼마나 '소유'한 상태로 태어났는지에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 나온 순간, 누구나 '기본'적인 것들은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나는 이 '박스'들 역시 누구나 자연을 마땅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만인의 권리’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고 이 숲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어렴풋이 생각했다. 뒤이어 이 숲을 나도 반년이나마 누릴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공연한 행복을 느끼곤 했다. 그건 마치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은 행복이었다. 살갗에 닿아 금방 녹아내릴 테지만 내려오는 동안만큼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고 싶어지는 그런 눈송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무형의 작은 공동체가 어느 대륙이든, 어느 나라든, 마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 요원들처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도서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기지 삼아 ‘헤쳐 모여’ 하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어찌 됐든 나는 이 작지만 사라지지 않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기쁘게 받아들였다.



오랜 친구는 마치 기억의 외장하드 같다. 분명 내게 일어났던 일이지만 자주 꺼내지 않아 그곳에 있었는지도 잊은 일들을 친구의 입에서 들을 때, 왜인지 부끄러우면서도 든든하다. 내가 잊어도 예진이가 알고 있겠구나. 나의 일부분을 이 친구가 지켜주고 있겠구나.



우리는 뒤돌아 우리가 걸어온 눈밭 위 발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아마도 그래서 호수를 건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바로 여기 이곳에, 이 드넓은 지구 위에서도 바로 이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저곳은 녹아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만이 이곳에 이렇게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그때 그 돗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 그 시절의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빛나고 좋은 시절, 내 인생의 황금기가 끝나가고 있다고. 앞으로는, 이토록 소소하지만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그때의 내게 말하고 싶어졌다. 네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이 아니야. 훨씬 더 좋은 날이 많이 펼쳐질 거야. 15년 뒤에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장면들을 품은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여행지로서의 도시를 친구에 비유한다면, 파리, 런던, 뉴욕은 누구나 좋아해 마지않는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화려하고, 아름답고, 오로지 자신만이 뿜어낼 수 있는 고유한 분위기까지 가지고 있어 매력적인 친구. 늘 주변에 친구들이 넘쳐나고, 나 역시 자꾸 힐끔힐끔 올려다보게 되는 그런 친구. 하지만 동시에 저 친구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자꾸만 신경 쓰고 의식하게 만드는 친구. 과연 그 친구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줄지, 문득 의심 들게 만드는 친구.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친구. 헬싱키는 그와 반대로 긴장을 풀게 만들어주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력적이지만 누구에게나 그 매력이 다 알려지지는 않은 친구. 다만 소리 없이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 그렇게 옆에서 가만가만 오래오래 들여다보면 비로소 반짝이는 친구. 내가 이 친구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써본 적 없는 친구. 친구라는 걸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 친구. 언제 만나도 편하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대하게 되는 그런 친구.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항상 있어줄 거라는 안정감과 신뢰를 주는, 그야말로 ‘진정한 내 친구’ 같은 느낌을 주는 도시가, 내게는 바로 헬싱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밝히는 내 소설 쓰기의 비밀 하나. 이른바 '조금씩 나가는 상상' 방법론이다. 평소의 나는 MBTI 'N형'답게 쓸데없거나, 쓸데없어 보이는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인데 때로는 이런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상상으로부터 소설의 발상을 얻기도 한다. 이 대화에서 다른 대답을 했다면,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들어와 참여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다르게 흘러갔을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의 마음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변해갈까? 엄청나게 참신한 설정이나 대단한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에서 아주 조금, 딱 한 발짝 나아가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 한 발짝, 한 발짝이 계속 모이면 처음 발상과는 아주 멀어지게 되고 또 달라지게 된다.



나는 ‘그때 참 행복했었지’ 하고 내 행복에 과거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다. ‘이러면 행복해질 거야’ 하고 내 행복에 뒤돌아 등을 보이지도 않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충만한 행복을 느끼지만 타인에게 내보이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다는 말을 들은 누군가가 갑자기 적대감을 비치며 화내는 걸 보는 게 속상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기 이렇게 적어본다. 알바 알토의 집 처마 밑에서 똑…… 똑…… 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내가 느꼈던 행복에 대해서. 짧은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선택한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느꼈던 벅찬 온기와 무한한 신뢰에 대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스러움'은 '자연'이 아니야. ‘자연’은 그냥 놔두면 되잖아. 거기 이미 존재하니까. 하지만 ‘자연스러움’은 다른 얘기지. ‘자연스러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뾰족한 고민이 필요하겠지. 건물 전체가 곡선으로 구부러져 정원을 감싸는 형태의 알토 오피스는 무척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지만, 그런 형태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벽돌 하나부터 딱 원하는 각도로 구부러진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 생각이 ‘리얼한 소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더라 ‘리얼’은 그냥 현실 자체잖아. 그냥 어디에나 존재할 뿐인. 하지만 ‘리얼함’은 다른 일이잖아. ‘리얼한 소설’ 그리고 ‘리얼한 문장’을 위해 인물을, 설정을, 대사를, 심지어는 단어 하나의 글자 수나 조사를…… 수많은 요소들을 수도 없이 갈아 끼우고 그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려야 하잖아. 스르륵, 거침없이 읽히는 문장을 쓸 때는 그렇게 스르륵, 쓸 수가 없으니까. 맨질맨질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친 원재료에 수없이 사포질을 해야 하듯이. 나 같은 애송이를 알토처럼 위대한 예술가에 비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독자분들이 재밌게 읽어주신 그 이야기는 나 자신조차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내 성격이 해낸 일이겠지. 그러니 그걸 내세우진 못할망정 최소한 미워하지는 말자. 사람의 성격은 그 성격의 주인이 최대한 더 나은 방식으로 생존하게끔 발달한 거겠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그래서 나도 내 성격을 더는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려고.



엄청난 ‘비밀’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버린 기분. 언젠가 몇 번의 눈이 녹고 난 뒤, 어떤 이유로든 핀란드를 다시 방문한다면, 그래서 헬싱키에 그리고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입장하면 이곳의 와이파이가 내 휴대폰과 자연스레 연결될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과 내가 소리 없이 연결될 것이다. 착, 붙을 것이다. 너무나 닮고 또 다른,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즐긴 열흘간의 차분한 휴식이 따스하고 청량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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