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으로 가는 길/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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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왠지 이 시가 눈에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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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에 들어오네요...흠.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달려라 아비>에는 '청승' 이 없다.생각난 김에 인터넷 검색란에 '청승'이란 단어를 검색했다

청승(명사): 궁기가 끼어 있어 애틋한 상태,또는 궁상스럽고 처량한 듯한 태도.

(속담)청승은 늘어가고 팔자는 오그라진다 :나이들어 살림이 구차하여지면 궁상을 떨게 되며 그렇게 되면 좋은 날은 다 산 셈이라는 말.

동명 단편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이 80년 생 작가는 수 많은 부재와 결핍 속에서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태어나면서 한 번 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놀이 공원에 나를 놔 두고 실종된 아버지,TV만 보다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아버지... 교통사고로 치마가 훌렁 뒤집혀 죽은 여고생,포스트 잇으로 의사소통하는 여자들... 작가는 '부재'와 '소통 단절'에 대해 무언가 말하지만 결코 '청승'떨지 않는다.8,90년대 작가들은 이런 심각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남의 일' 보듯 쓰지는 못햇을 것이다.하지만 아직 10대의 얼굴이 묻어 있는 김애란은 그냥 TV 베스트 극장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 인 양 스스럼 없이 결핍과 단절에 대해 말한다.아마 이 소설 <달려라 아비>가 문단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과거 소설의 '무거움'에 대한 안티테제로 '가벼움'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함'을 밀어넣기 때문일 듯 하다. 단편<사랑의 인사>의 주인공은 버림받은 아이이다.그는 네시호의 미확인 괴물이 천지에도 나왔다는 뉴스를 보고 자기에게 인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다.그는 대형 수족관에 취직한다.거기서 그는  말한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수족관 유리를 주먹으로 쳤다.그것은 물고기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 중에 하나였다.나는 아이들이 (간혹 어른들도 있었다) 왜 유리벽을 두드리는지 알고 있었다.물고기가 자기를 알은척 하지 않았어였다......나는 물고기의 무심함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내가 수조 안에서 물고기와 마주쳤을 때 난감했던 것도 그들의 시건이었다." .... 단편 <사랑의 인사> 중에서

소설집<달려라 아비>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 '정신적 외상'-즉 트라우마 를 경험한다.이 외상에 대한 자기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 '무심함'이다.내가 간혹 쓰는 말투로 하자면 '그래..그런데...그래서' 식 무심함이다.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어떤 친구가 가족 이야기던지 애인과 헤어진 이야기던지 개인적으로는 가슴 사무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뭐 이런 건 어떨까..아버지가 한 너댓명 되는 사람,자신이 입양된 아이인지를 고2때 처음 안 사람....자살 횟수가 손목에 남아 있는 사람...대충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다.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람들은 두 부류이다.하나는 '야..너무 힘들었겠구나..얼마나 가슴 아팠어.괜찮아' ..눈물까지 조금 글썽여주며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주는 사람이다.또 다른 사람은 진지하게 다 듣고 나서 '그래...살 다 보면 상상 조차 못하는 일들이 생겨나지...근데 그래서' (차마 이런 말까진 안하지만...그래 니가 죽을 고생했다 치자.그런데 그 다음은..)  후자의 경우 정나미 떨어진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하지만 그게 낫다.그건 '무심함'이지 '냉혈함'이 아니다.그리고 말하는 사람 역시 그 '무심함'에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곧 '무심'해 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던지.감정의 설사를 더해주는오버나 쥐뿔도 모르면서 이성적입네하며 정신적 위기를 탈출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말하는 것들은 그냥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게 낫다.

김애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비 부재의 트라우마'를 '무심함'으로 건너가려한다.하지만 트라우마는 트라우마.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물 밑에 반쯤 가라앉아 언제든 뛰쳐나올 수 있는 불안과 긴장이 내재해 있다.소설 속 주인공들이 때론 수면을 위한 숫자를 세며 때론 잠수복에 머리를 처박고 울며 불며 그 '부재의 강' 건너려 한다.하지만 내 생각에 이들은 그 강을 완전히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청승'속에 살지도 않을 것이다.그건 어린 시절 가슴에 입은 화상 자국과 비슷 하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프지도 않다.남들도 잘 모른다.본인  역시 일상을 살다보면 잊고 지낸다.그저 가끔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가서 옷을 벗을 때 한번씩 떠오르게 돼는 것일 뿐이다.

김애란의 소설은  개인적 경험이 깊숙히 반영된 듯 하다..신인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은 결국 자기 이야기다.그녀가 다루는 아버지의 이야기들 역시 그녀의 개인적 우화에 상상력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소설 속 공간이나 소설 속 가족 관계,일상의 영역등이 작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듯 하다.단편 <노크하는 집>같은 경우  다가구 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소통에 대한 희망과 소통의 불편함에 대한 모순된 감정.....어차피 아무런 교류도 없다.하지만 5개의 방 중 5개가 전부 차있는 저녁 시간의 심리적 불편함,일요일 낮 서너 방이 비어 있는 시간의 자유로움과 홀가분함.화장실 소리에 따라 서로의 동선을 피하는 어색한 배려,일상의 작은 불편에 대한 상호간의 불만. 단편<나는 편의점에 간다> 역시 이러한 소통의 불편함과 소통부재의 두려움을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도 집 앞 단골 편의점을 이용할 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통과 관련된 우화들이다.

책의 주제는 사무치는 것들이지만 김애란은 적당히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사무침을 희화한다.정작 가장 코믹스러운 부분은 책 뒤에 딸려온 서평이었다.어차피 텍스트에 대한 분석은 자기가 아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어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더 세부적인 것을 볼 것이다.또 어떤 이는 직관을 통해 작가의 마음과 닿을 수도 있다.평론이란 작업은 아무래도 지적인 활동은 활동인가 보다.단편 <스카이 콩콩>의 결말 부분에 대해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김애란의 우주적 상상력에는 니체적인 영원회귀와 베르그송적인 생명의 도약이 겹쳐져 있다.' 

그가 느끼는 우주적 상상력의 내용은 이렇다.아버지의 성기로 부터 퍼져나가던 불꽃들의 이미지,수족관 안에서 유리벽을 두르리던 손바닥,한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선글라스를 씌워주며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상상력..  이 모든 것들이 니체와 베르르송의 회귀와 생명도약이다.

나..원...이렇게도 말하겠다. "버스바퀴는 각진 세상을 떠받치는  둥근 원불교의 상징이며 선인장의 가시는 일상공간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선사의 계송이다."

평론가의 말 중에서 이 책의 서있는 좌표를 정확히 짚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좋은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김애란의 소설은 세계와의 소통부재나 소통단절과는 무관하다.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애매성으로 가득한 세상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삶을 번역하며 살아간다.달리 말하면 사회적인 것이 내면화될 때 생겨나는 갈등과 주관적인 의도가 사회적으로 표현될 때의 장애를 그들은 고스란히 경험한다.

이 말을 평범하게 받아 들이면 이 책<달려가 아비>는 성장소설이다.특히 20대 청춘의 성장 소설이다.주인공들도 다 그렇고 그들이 사는 공간도 그러하며 그들이 겪는 고민들도 다 술자리에서 나옴직한 이야기들이다.

결론적으로 ...난 이 책이 쉽게 읽혔으나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다.이미 그 시기를 지나서인가?  아니면 작가의 개인적 삶의 투영을 너무 의식해서인가?   "너 아빠 없니? 그래.. 그런데...뭐.. " 이게 내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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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종합병원에 갔다 왔다. 눈치 좀 봐가며 오후를 재낀 샘이다.뭐 어디가 고장난 건 아니구 6개월전 종합검진에서 신장쪽이 좀 이상한 듯 하다며 재검을 하라고 했다.

그 당시 초음파 검진 의사말이 이랬다.

"음...이게 뭐...원래 모양이 좀 그런 걸 수 도 있구..아님 암이나 그런 종양일 수 도 있는데... 에...일단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모르니 6개월 뒤에 정밀하게 검사 한 번 받아보세요"

6개월 하고 2개월이 더 지난 오늘 낮에 다시 그 병원을 찾은거다.신장이 비뇨기과 담당인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2주 전에도 병원에 갔었다.아침 부터 서둘러 회사 출근 전에 들렀다.왠걸 금요일은 의사들이 전부 오후 진료라고 안내 아줌마가 이야기했다.나의 밥 먹다 숟가락 떨어뜨린 듯 한 떨떠름한 포즈에 안내 아줌마는 위로랍시고 ..." 에구 어떻게 해요.미리 전화를 좀 주시고 오시지"

사실 전화를 했었다.교환인지 간호사인지 어떤 여자가  방글 방글 웃으며 말했다."예..전화 예약은 안돼구요.그냥 직접 오셔서 접수하시면 돼요." 종합병원과 거리가 먼 나는 그냥 그러면 돼는 구나 알고 아무 생각없이 간거였다.간호사인지 교환인지 하는 여자가 웃는 시간에 "무슨 과 가시려는데요..금요일에요..금요일은 오후만 진료하는데" 라고 이야기만 해주었다면...하는 가당치 않은 상상에 허망함은 더 커졋다.

어쟀거나 절차부심 2주일이 흐르고 다시 오늘 낮에 꼼꼼히 전화까지 하고 간거다.간호사임이 분명한 여자가 친절하게도 "오후 2시부터 진료인데 예약환자가 많으니 4시쯤 오셔서 접수하시는게 좀 덜 기다릴 겁니다."라고 말했다.간호사임이 분명한 여자의 말을 믿는 척하면서 3시 30분에 갔다.접수하고 나서 약 40분 이상을 기다렸다.그래도 기다릴 만 했다.비뇨기과 대기실 앞에 놓은 책들이 아주 재미났기 때문이다.남 '성' 클리닉, 발기부전의 원인과 증상 및 치료....그림만 건성으로 봤다.

40분의 기다림 끝에 간호사가 명백한 여자가 내 이름을 무드 없이 불렀다. 그녀의 주지주의적 호명에 반발이 생겨 나는 목소리에 물기를 묻혀 최대한 낭만적으로 '네에..'하고 대답하곤 의사 앞에 앉았다.의사는 반곱슬머리에 안경을 쓰고 살이 통통이 오른 40대 초반의 '의사'처럼 생긴 사람이었다.사실 이건 좀 과장이다.자동차 판매원이거나 식당 주인이어도 잘 어울렸을 평범한 얼굴이었다.

담당의사는 컴퓨터로 지난 종합검진 때 남긴 자료를 보더니 8개월전 초음파검진의사가 했던 것과 단어 하나 틀리지 않는 똑같은 말을 했다.대신 손이 허전했는지 신장 그림에다가 볼펜으로 그림 하나 그려주었다.하지만 내용은 똑같다.

"음..이게....그러니까....원래 그런 걸 수 도 있고 암이나 종양같은 걸 수도..."  (그래 안다니까..뚱띵아..지난 번에도 그렇게 말했다니까.) 그래서 초음파로 검사할 수도 있지만 CT가 좀 더 정확하니까..(그래..뚱띵아 그것도 지난번에 이야기 들었다니까)

진료 시간 총 3분...끝.(잘있어라 뚱띵아...)

간호사가 밖으로 나와서 향후 스케줄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2층가서 뇨검사 접수하시구요 지하 1층가서 CT 촬영 예약하시구요."

"아니 또 오라구요.." " 예...원래 CT는 그날 안돼요.아마 다음주 월요일쯤..그리고 금요일쯤 결과 나올테니까 또 한번 나오시구요."

신장 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혈압쪽이 오르고 있음을 느꼇다.아니 ..회사 다니는 사람이 월요일 아침에 반나절쓰고 또 금요일 오후에 반나절쓰고....이게 간호사맘 처럼 그렇게 쉽냐고.

내가 얼굴빛이 붉으락 해지며 꿍한 표정으로 진료영수증만 처다보고 있자 간호사는 재촉했다."어떻게 그 스케줄대로 예약할까요."  

 "...."   "....."  

 "어떻게 그렇게 하시겠어요"( 멍멍멍! 왈왈! )

..검사고 뭐고 다 때려쳐...진짜 귀찮아 죽겠네.이거 비싸긴 무지 비싸고 언제 다시 또 오냐구 2번씩이나...안해...니 맘때로 하세요...

.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냥  "하...어떻게 또 와요....에이...할 수 없죠.그냥 그렇게 하세요.에이"

결국 검진 접수하러 갔다.

오..지저스... CT촬영 및 뇨검사 비용 ...28만원.....띠바 뭐가 이렇게 비싸.아....열받아... 수중에 5만원 밖에 없어서 결국 카드로 그었다.

아....진짜 뭐 이래....

의사나 점쟁이나 자동차 정비사나 똑같은것 같다.

뭐 이상하다고 하면 안해 볼 수 없는 거니까...다들 뭐 확실하지도 않다.점쟁이는 말한다.

"올 4월에 삼재가 있네...굿한판 해야돼..."  뭐 어쪄?  모르면 몰랐지 굿해야지.

자동차 정비사도 그런다. "아래에 보니까 차축이 흔들렸는데요.평소엔 문제 없겠지만 고속으로 다닐때 좀 위험하겟는데요.어떻게 하시겠어요?" 뭐 어쪄? ..고쳐야지.

에이....뭐 의사 잘못이겠냐만..

하여간 오늘 이래저래 돈만 나가고 열만 받고 시간만 날렸다....에이 아직도 열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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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3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그래서, 병원 가면 없던 병도 생긴다고, 들. 일단 혈압이 막 오르잖아요. 정말 사람 돌게 만드는 병원 시스템. 여전히 너무나 주먹구구. 읽다 보니 화나요.

mannerist 2006-02-0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한국에서 아픈 건 '죄'로군요... 몸관리 더 잘 해야지... 불끈!
 
철학의 위안 - 에코의 즐거운 상상 2
움베르코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에코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의 익살과 풍자이다.<철학의 위안> 에 있는 에세이 도서관을 보면 가장 좋지 못한 도서관의 예 19가지를 정리한다.신청과 대출 사이가 길어야 한다.도서관에서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없어야한다.화장실이 없어야 한다.신간 안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전시돼어야 한다.이렇게 하면 아무도 도서관을 찾지 않게 될 것이다.에코식 글쓰기의 특징은 이러한 반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에코에 의해 비틀리고 돌려치기된 세상과 사물들은 고정관념의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함초롬한 모양새를 드러낸다.독자들이 에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이렇듯 세상을 한번 털어내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에코읽기' 는 지적 유머를 동반하기에 분명히 책 읽는 즐거움을 준다.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에코읽기'는 산을 올라가는 것 만큼 고역이기도 하다.물론 히말라야 준봉을 가을 소풍다니 듯 오르내리는 독자들에겐 에코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주말에 동네 뒷산 오르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같은 독자에게 '에코'라는 산은 뒷산 너머 아스라히 보이는 어느 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철학의 위안>을 읽으며 몇 번을 그냥 접고 내려갈까 망설였다.90년대 이후 불었던 에코 열풍이 과연 진짜 열풍이었나 회의하면서 말이다.에코에 열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에코식 글쓰기를 이해했을까? 또 에코의 지적 유희에 어느정도 공감하면서 손을 흔들었을까? 에코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데 왜 나는 에코를 읽으며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가? 에코로 인해 책읽기의 자괴감마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여간 이런 저런 부정적 생각을 하면서도 책장은 계속 넘어갔다.산 정상이 바로 저기 앞인데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는 심정으로말이다.

에코의 글쓰는 주제는 참으로 다양하다.매스미디어,대중문화,스포츠,희극,도서관,토마스 아퀴나스...아무래도 그의 글들이 지적인 대중지나 계간지등에 실렸던 글들이다 보니 그런 듯 하다.이 다양한 주제를 구워삶는 에코의 요리술은 화려하다.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주 재료로 수많은 도서관식 자료를 부 재료로한다.거기에 에코식 풍자와 익살이라는 양념비법이 버무려진다.우선 에코읽기에 어려움을 느낄 때는 에코가 말하는 텍스트에 대해 나의 사전 정보가 부족할 때이다.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중세 철학의 거두라는게 전부이다.에코가 아퀴나스를 가지고 이리저리 굽고 삶고 하는데 정작 독자인 나는 에코가 굽는게 돼지고기인지 쇠고지인지 모르고 있는 꼴이다.이 책 전반부에서 부터 가장 많이 언급되는 텍스트는 마샬 맥루한이라는 미디어 학자이다.마샬 맥루한....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내게 무척이나 친근한 이름이다.나의 대학 교수 중 어떤 분은 대학 4년 내내 맥루한의 <핫미디어><쿨미디어>만 이야기하고 다녔다.그는 에코식 표현을 빌자면 미디어 낙관론자인 셈이다.하지만 신문방송학이나 사회학 전공자들이 아니면 얼마나 마샬 맥루한에 대해 알 고 있을까?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계에서  전통의 어떤 흐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 뒤를 이어 어떤 학문적 계파를 이룬것도 아니다.어떻게 보면 미디어 학계에서도 혜성처럼 등장했던 사람이다.물론 그가 만든 개념들이 미디어에서 차용하기에 너무나 섹시하여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가 다른 미디어학계의 고전들을 제치고 현대 사회과학 고전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코를 읽음에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중에 하나는 역시 그가 인용하는 자료들에 대한 몰이해이다.에코를 탓이 아니라 배움이 부족한 나같은 독자의 무식이 원인이긴 하다.그럼에도 에코의 방대한 인용-자기만 알고 있는-이 면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그러한 예는 책 중간 중간 너무 너무 많다. 에코를 읽었던 무식이 배짱인 일반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그래도 서운하니 예를 들어보자.물론 이런 부분은 읽다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그렇다고 에코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훼손돼지 않는다.단지 훼손되는 것은 이 책을 버겁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고자 했던 생각 정도일 것이다.

이런 예는 어떤가?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의 라틴어 속에도 돌연 조야하고 천방비안과 빈정돼는 목소리가 난무해서 마치 마르크스가 스첼리가 씨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이다.( 도대체 스첼리가는 누구인가? 마르크스가 신성가족에서 스첼리가를 뭐라고 질책했는데?)

우리는 이처럼 뻔한 수법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오늘날 가브리오 롬바르디와 같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장난질도 이와 하등 다를 바 없다.(가브리오 롬바르디가 뭐하는 사람인데?)

무수히 등장하는 인용과 재해석과 낯선 이름들과 그들의 주장....에코의 지적 넓이가 보여지면 질 수 록 책읽는 속도는 반비례로 감속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철학의 위안>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매스미디어와 대중이다.에코는 현 시대에서 매스미디어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장치라는데 동의한다.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미디어에 의한 지배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하나는 종말론적 입장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간형의 탄생을 기대하는 낙관론적 입장이다.에코는 이 두 입장이 가진 논리적 과장과 논리 없음을 지적한다.그 칼날에 걸린 대표적인 희생양이 마샬 맥루한이다.맥루한의 그 섹시한 개념들은 에코에 의해 섹시하나 내용없음으로 규정된다.'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유명한 문구는 코기토 인터룹투스-즉 논리적 연관성 없음-라고 선언한다.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가 그냥 한가지 섹시한 개념에 중복에 중복을 더해 '나는 치마를 입고 그리고 스커트를 입었다'는 동어반복만 일삼는다고 비평한다.에코는 메시지의 내용분석 즉 약호의 해석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이러한 약호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에코의 관점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효과적 대응전략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민중이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게릴라적 대응이다.그것이 미디어에 의해 유포되고 강화된 방식이든 국가기관에의해 직접적으로 강화된 방식이든 메시지 해석의 자의성과 다양성은 개인적이고 점조직화된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제시한다.푸코가 이야기한 권력이 분화되어 있는 것 처럼 저항의 방식 역시 분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에코의 지적처럼 사실 미디어계에서도  수용자 연구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수용자 연구는 미디어 수용자가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영하는 가에 대해 촛점을 맞춘다.20세기 초반 등장했던 미디어 강효과 이론, 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미디어 약효과이론에 이어 20세기 중반 이후는 수용자 해석의 다의성을 존중하는 중효과 이론으로 대세가 바뀌었다.에코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게릴라전을 이야기 했듯이 이미 세상은 인터넷이란-에코가 글쓸 당시는 존재하지 않았던-대안 매체의 등장과 더불어 수많은 사이버 게릴라가 등장하였다.이들은 권력이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가상의 공간 속에서 다양한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인터넷이란 민주적 매체가 만든 저항의 한 양식일 것이다.

<철학의 위안>을 묵묵히 때론 짜증섞어가며 읽었다.에코식 글쓰기의 미덕은 분명하다.난삽하지 않고 날리지 않는다.한번 씩 비틀어주며 날을 세운다.'이성적 논리'에 대한 그의 존중 역시 개도 소도 포스트모던 이름 하에 숨는 세태에 회초리가 될 만하다.개인적으로 한가지 바람이 있다. 에코의 책을 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지적 능력에 대한 배고픔..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만 배고픈게 아니다.아..점심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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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2-01 12:51   좋아요 0 | URL
한마디로 섹시한 마샬 맥루한께서 백치미의 금발 여인 취급을 당한게로군요. ㅋㅋ
아, 그리고 오자 하나.. 에로사항 -> 애로사항.. 이 아닐까요? 섹시함이란 단어가 아주 예뻐서.. 정신이 팔려 제가 잘못 읽었나 했는데.. 음.. ^^

에코는 그냥 덥석 집어들어 슥슥 읽어내려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고로 지적 배고픔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은 메모하여 찾아서 알아보고.. 하며 읽는 독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방대한 에코의 지적인 유희에 독자를 조금더 수월하게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친절한 각주가 따라붙어줘야겠죠. 물론 한계야 있겠습니다만..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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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배정을 받고 어머니와 교과서를 수령하러 갔다.요즘은 전부 새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70년대에는 조금 달랐다.일부는 새책이고 일부는 선배들이 쓰던 책을 모아서 학교에서 임의분배 해주었다.내 기억에 나는 대부분 새 책을 받아던 것 같다.아무래도 엄마의 발이 빨랐나보다 아니면 강력한 항의가 한 몫을 했으리라.국민학교 저학년때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다.국어,산수..뭐 이런 기본과목에 '바른 생활'이 있었다.도덕이라고 그랬는지 '바른생활'이라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아마 국민학교 고학년쯤 교과명 변경이 있어서 기억에 혼동을 주고 있는게 분명하다.학교가 달라져 가도 바른생활-도덕-국민윤리로 이어지는 만만한 과목은 계속 돼었다.왜 만만한 과목인가 의아해하는 분.. 아마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으신 분일게다.'도덕' '국민윤리'는 공부 잘 하는 친구나 못하는 친구나 시험보면 점수가 비슷비슷하게 나오는 과목이었다.수학이나 영어의 반평균이 60점-70점 대였다면 국민윤리의 반평균은 80점 이상을 넘어섰다.개인의 성적으로 보자면 잘해도 표 안나고 못해도 그저 그정도 못하는 가장 만만한 과목이 바로 '국민윤리'였다.

'도덕'시험에서 점수 따기란 정말 쉽다.그냥 답안의 내용이 나의 신념이든 가치이든 하는 것은 상관없이 가장 그럴싸하고 또 가장 기계적 중용을 지키는 답에 동그라미치면 대개 평균이상 나온다.물론 고등학교 시간에 철학사가 조금 나오니 약간 외울 것도 있긴 했다.까짓거 그거 귀찮으면 찍고 나머지 옳은 소리에 동그라미쳐도 80점은 나온다.너무 극단적인 것들 배제하고  또 너무 이상적인 것 배제하면 사지선다 중에 대개 두개는 애시당초 답에서 배제된다.거기에 체제의 이념과 관련된 내용들은 공부안해도 그냥 답을 찾을 수 있다.그냥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쁘다에 동그라미치면 된다.물론 거기서도 기계적 중용이 적용은 된다.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내용중 잘못된 것은 ..뭐 이런 질문에 '자본주의는 완전무결한 시스템이다.'같은 것들은 정답이다.기계적 중용은 도덕 교과서의 미덕이기 때문이다.슬쩍 자본주의와 교과서 검정시스템의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는 도덕 교과서의 센스다.

김상봉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우리가 일주일에 두시간 이상씩 12년 동안 배워온 도덕과목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요구한다.도덕 교과서의 내용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가장 먼저 부정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흔히 일상에서 '인생이 도덕교과서 같은 줄 아니?" 하는 말을 듣는다.평범한 말인데 잘새겨보면 도덕교과서의 경직성과 현실부적합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또 너무 고지식하거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보면 '걸어다니는 도덕교과서네 그려" 라고 비꼬기도 한다.일상적인 언표가 지엽적이기는 하다.하지만 도덕 교육에 대한 현실적 거리감에 대한 한 우화정도는 될 것이다.사실 우리의 의식은 도덕교과서의 내용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그냥 교과서 안에서 완성된 진실정도로 여긴다.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도덕,윤리 교육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전략을 써왔지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기회를 갖진 못했다.도덕,윤리 교육이 사회에 갖는 무게와 12년동안 지속된 교과과정의 양에 비하면 우리는 도덕,윤리교욱을 졸업하자마자  너무 감상적으로 폐기처분한 것이 사실이다.

김상봉 교수가 말하는 윤리교육의 핵심은 '자유로운 인간의 자기실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과 적극적으로 자기를 실현 할 수 있는 자유의 확보가 우선 필요하다.'도덕은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표현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하지만 개인의 존재확장만 가지고는 완전할 수 없다.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존재가 실현되어야 한다.저자의 말을 빌자면 '홀로주체'가 아닌 '서로주체'속에서의 완성이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우리 윤리 교육은 능동적 인간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근대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보편적인 교육을 통해 국가 구성원들을 정신적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우리 윤리 교육은 선이라는 보편적 가치 추구에 대해서는 피상적 접근 태도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억압하며 국민통합이란는 목표를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이 과정을 저자는 '노예를 기르기 위한 도덕 교육'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윤리교육의 몇가지 특징을 말한다. 타자지향성,불의에 대한 침묵,타율적 당위성 강요,국가주의,국수주의,법과 질서에 대한 맹목적 순종 등이 그것이다.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이 불의에 대한 침묵이란 점이다.우리 도덕교과서는 개인이 사회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하지만 타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가하는 악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것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저자는 예절의 강요가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위계를 고착화하고 불의에 대해서도 침묵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우리가 배운 예절이란 것은 상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만 있지 윗사람의 예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없는 것은 잘못된 교육이란 것이다.이것은 사회적으로 확대해서 볼 수도 있다.즉 군대 내에서 폭력문제,직장 내에서의 언어폭력문제,학교에서의 선후배 간의 폭력문제등이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방적 교육의 잘못된 단편들이다.불의에 대한 침묵이 비도덕이라는 것이 교육되지 않는 상황에서 법과 질서에 대한 획일적 절대화는 당연한 수순이다.우리 교과서와 보수 언론이 가장 꺼려하는 말이 바로 '갈등'이다.노사갈등,빈부갈등,도농갈등,수도권과 지방의 갈등....등등. 도덕 교과서는 사회안정이라는 미명하에 '갈등'을 죄악시한다.그나마 조금 세련되게 말해서 "갈등도 사회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하지만.." 정도로 비켜가고 있다.그러면서 그 대안으로 말하는 것이 대화와 타협 그리고 기계적 중용이다.도덕교과서 점수 따기 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런 기계적 중용 중심 도덕 교과서를 잘 배운 사람들은 사회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대화가 돼는 사람으로 통하기쉽다.물론 그들의 성향이 온건하고 타협을 중시여기는 태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하지만 '중용'은 '기계적 중용'을 뜻하지 않는다.김수용 시인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말했다.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도 기계적 중요의 합리성 사이로 숨어버리는 중산층의 용기없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일 게다.오히려 '기계적 중용'의 보신주의로 떨어지는 것 보다는 '세계는 당파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전선을 긋는 것이 비겁은 면할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하지만 우리 도덕 교과서는 자신들이 강요하는 도덕이 기계적인 중용인지 아닌지 생각조차 하게 만들지 않는다.갈등이 사회발전의 강력한 동인이 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당파성은 조선시대 사색당파로 인한 망국을 빗대며 전부 나쁜 것이라고 매도한다.그리고 그 끝을 장식하는 멋진말은 소크라테스가 명예훼손을 걸만한 '악법도 법이다'이다.

학교가 국가주의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주입한다는 것은 이미 여기저기 수많은 책들에서 언급된 내용이라 새로울 것이 없다.도덕 가치에 있어서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국가라는 언급은 생각해볼 만 하다.특히 이념적으로 폐쇄된 나라에서 한쪽 방향만을 진리라고 강요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성찰해 봐야만 하는 질문이다.한쪽 눈만 커다랗게 툭 발달해 놓고 주변에 같은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전부 같은 모습이라고 자기들이 정상이다라고 외치는 꼴이다.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경우 국가가 선과 악을 정하는 대표적인 예이다.군대를 가면 최고 애국은 안돼도 정상적인 사람이고 신념에 의해 그걸 거부하면 매국에 비정상 빨갱이 동조자가 된다.실제적으로 대체복무가 없는 상황에서 구속되어 감방가고 빨간줄 그어진다.이 양심범들은 국가가 정한 선에 대해 부정했기 때문에 악의 한 축으로 규정되어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받는 것이다.그들에게 선과 악을 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이다.

김상봉 교수는 우리 윤리교육의 문제점 조목 조목 지적하면서 윤리교육의 중요성과 윤리교육 내의 철학교육 강화를 그 대안으로 내세운다.왜 철학 교육인가 라는 질문에 저자는 철학이야 말로 학문과 삶의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한다.전적으로 동의한다.저자가 말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과거 국민윤리시간에 배웠던 관념론중심의 서양철학사를 의미하지 않는다.저자가 말하는 철학을 쉽게 설명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다.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능동적으로 정립하고 입법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이를 통해 주체의 자기실현이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의 절대적 서로주체성 속에서 완성을 이루는 것이 윤리교육의 목표가 돼어야 한다.조금 더 쉽게 말해서 스스로 성찰하는 인간이 정의감을 바탕으로 인류애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노예 도덕을 배운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단점도 지적해야만 할 것 같다.우선 책의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흥미가 떨어져간다.이유는 읽는이의 철학적 깊이의 부재때문 이기도 하지만 윤리학의 당위론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장황하다는것도 한 몫을 한다.저자 역시 도덕을 설명하면 어쩔 수 없이 당위를 언급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뒷부분으로 갈 수 록 책읽기의 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어떻게 보면 정말 도덕교과서의 어떤 한 부분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래야 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이 책은 12년간 매주 2시간 이상 씩 받아오던 만만한 도덕 교육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회를 만들 수 밖에 없다.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못하고 불의가 정의를 타고 넘는 사회,개인의 자유는 책 안에만 존재하고 사회에선 늘 조직과 국가가 우선시 돼어야하는 사회,이런 사회는 발전불가능한 갈등만 양산하며 사회에 근저에 있는 암적인 바이러스-예를 들면 파시즘같은-만을 배양할 뿐이다.그러한 점에서 우리 사회가 뿌리부터 깊은 단단한 사회가 되려면 저자가 강조한 철학하는 사회가 돼어야 한다 저자의 말에 동의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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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31 23:05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보셨군요. ^^ 현장에 있는 이로서 3월부터 또 어찌 가르쳐야할지 막막합니다. 나의 신념과 정신에 위배되는 내용들을 또 가르치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