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예찬이와 처음으로 대중탕에 갔다.온탕의 높이가 예찬이 가슴께까지 왔다.다행히 사람이 없던 시간이었다.대 여섯명 남짓.예찬이는 물 속에서 첨벙 첨벙 잘 놀았다.샤워기와도 한참 친구먹고 놀았다.

예찬이는 목욕을 마치고 준비해간 따뜻한 두유를 쪽쪽 맛있게 빨아 먹었다.^^

일요일에 부산에 처음으로 생긴 사진전문 전시관에 다녀왔다.해운대 금수복국집 뒤쪽에 있다.<고은사진미술관>에서는 첫 전시회로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전시했다.전시장 안에서 사진은 찍지 못하게 했다.

 

대신 그 앞에 카페에서 최민식 선생님을 만났다.아내가 싸인을 받았다.그리고 예찬이에게 한 마디도...최선생님 이렇게 썻다 "예찬 훌륭한 사진가가 되렴" (쌩뚱 ^6^)











 











 

와이프랑 아기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잘 나왔는데...중부권 최고 미인이 '얼굴' 팔리는 걸 좋아할 지 몰라서 못올리겠다.^^ 초상권이라는게 있으니 ^^

예찬이 얼굴은 이상하게도 찍을 때 마다 다르다..^^  요즘은 단어 두 개를 붙여서 문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빠..저 매실차 주세요"

이런 걸 우리 아기는 이렇게 말한다. "매실..매실...예짠.. 예짠.." 매실액이 냉장고에 있으니 냉장고 앞에서 냉장고를 한 번 짚고 자기 가슴을 한번 짚고 그런다.. "매실..매실..예짠...예짠.."

예찬이는 차를 좋아한다.매실차나 모과차는 달짝 지근하니까 좋아한다.그 외에도 집에서 마시는 녹차나 발효차들도 다 좋아한다.예찬이용 찻잔이 여러개가 있는데 그중 여러 개를 깨먹기도 했다. 아내와 내가 예찬이가 생긴이후 함께 만든 취미(?)가 책방에서 차 마시는 일이다.다도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마신다.낮에도 그러다보니 예찬이가 함께 따라 하게 되었다.나는 이런 티 타임을 예찬이가 클 때까지 우리 집안의 습관으로 만들 생각이다.설령 아이가 고3 수험생이 되어도 하루에 한번 온가족이 차를 마시는 짧은 시간을 원칙처럼 갖고 싶다.(그냥 생각이다..)

예찬이의 지난 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 종지의 보이차였다.아는 다원이 있어서 그곳에서 그다지 비싸지 않은 것을 얻었다.보관 상태로 후숙해서 마시는 차라서-설명을 들었는데 좀 복잡하다- 우리는 10년 뒤 크리스마스 날 예찬이와 함께 마시려고 한다.진짜 후숙해서 마시려면 잎을 딸 때부터 선주문해야 한다고 한다.그런 차들은 오래될 수 록 좋다고 한다.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예찬이 '여자친구 데려오는 날' 뚜껑 열 차를 하나 준비해야겠다.예찬이와 예찬이의 여자친구를 위해서..^^ 물론 결혼할 여자 정도 되어야 열어줄 참이다.^^

아이 키우기가 당시에는 지난한 일 같은데 실제 아이는 죽순처럼 자란다.죽순 얼마나 잘 자라는지 본 사람 의외로 많지 않을터인데.....정말 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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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3-1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사진가가 되렴... ㅍㅎㅎㅎ 최민식씨 은근 웃기시는군요.
예찬이랑 차도 즐기시고... 좋네요.
저는 아이 어릴 때, 이렇게 적어 둔 게 없어서 아쉽습니다.
아이의 어록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재밌겠네요. 매실... 예짠... ㅎㅎ

클리오 2008-03-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크는게 정말 순식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댁 예찬이가 대중탕에 가는게 가능했다니 저희집 아가도 데려가볼까 싶네요. 아빠보고 데려가라면 깜짝 놀랄라나? ^^ 저희 예찬이는 아직 '예짠' 정도도 못하고, 예짜이 비슷하게 발음을 흐린답니다. 후후..

mong 2008-03-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시는 습관 참 좋은거 같아요
차분하기도 하고 생각도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저는 감기 때문에 이것저것 줄곧 마시는 중입니다

비로그인 2008-03-2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 갈 참인데...^^ 반갑네요.
 



현재 티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외신을 통해 대충 알고 있다.중국 정부의 강력한 보도 통제로 인해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이 그대로 전달 되진 못하고 있다.사망자 수만 해도 티벳망명 정부 발표와 중국 정부 발표가 천양지차이다.80년 5월의 광주 같은 일이 이 곳에서 벌어지지 않아야할 텐데...그런데 이미 벌어졌을 듯 하다는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나와 티벳은 인연이 이렇게 어긋나나 보다.

나는 3월 29일부터 보름 간 티벳 출장이 잡혀 있었다.그러니까 불과 열흘 앞의 일이다.그 때쯤 나는 비행기에 올라 있어야 했다.라싸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 운남성부터 옆에 나오는 책의 길을 따라서 즉 '차마고도' 길을 따라서 보름간 티벳을 돌아 라싸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출장 여행의 동선은 거의 옆에 책에 나온 것과 유사하다.이 책에도 나오지만 '차마고도'에서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신만이 아신다.

결국 티벳의 신은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나 보다.

 

며칠 전 부터 티벳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회사 내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고 현재 라인을 통해 전화도 오고 갔던 듯 하다.그리고 오늘 오전 전격 공식적으로 출장 취소가 결정되었다.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좀 그러하다.티벳에 가는 것만으로는 기대가 만빵이지만 또한 일과 관련해서 탐탁지 않은 부분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이번 출장은 무기한 연기되었다.아마 올림픽 이후나 어떻게 다시 한번 이야기가 나올 듯 하다.그때는 대상자가 내가 아닐 수도 있다.그 때 상황봐서 원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티벳의 하늘에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고 싶었다.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많은 별들이 내게 달려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을텐데....나는 브루크너 교향곡을 거기서 꼭 듣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티벳 땅에 더 이상 무고한 피가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이다.

언젠가 그 길이 나를 인연으로 여기고 품어주어야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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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 있을지도 모름..^^0

부산에서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개봉관 이제 딱 1개뿐이다.

합리화된 영화관,멀티플렉스의 맹위 덕분에 개봉 영화의 회전율은 맥도날드 좌석 회전율보다 빠르다. 이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배급사의 속도에 올라타지 않으면 힘들어진다.배급사의 기준은 결국 '수익'이다.1-2주 사이에 '자본의 기대 수익률'에 호응하지 못한다면 영화는 '다윈의 자연선택가설'에 따라 처분될 수 밖에 없다.자본이라는 '타이타닉'에 올라타지 못한 '좋은 영화'(자본의 입장에서는 '별 볼일 없는 영화')를 보고자 하는 관객들은 이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어야 만 한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겠다.그나마 이 영화에 대해 위안이라고 한다면- 비록 늦었지만 -'분리수거' 되기 직전에 극장에서 건져 내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내게는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 영화였다.하지만 먼저 밝혀야 할 것이 있다.내 왼쪽 가슴 아래 께에서 올라오는 펌프질은 이 영화의 줄거리(또는 드라마 )가 만든 것이 아니다.영화 후반 작업의 요소들(예를 들자면 감정을 고양하는 음악같은 것)에 의하지도 않는다.영화의 스피디함과 극적 긴장감에 의한 것도 아니다.(통상적인 의미의 스릴러물이 갖는 속도감이란 의미이다).오히려 '극적 긴박감'이란 측면에서는 영화<추격자>가 앞선다.그 영화의 '야수적 감성'과 '속도감'은 오랜만에 한국 영화에 '춘광사설'을 날리고 있다.<추격자>가 망원동이라는 미로같은 폐쇄공간 속에서의 공포를 유발시켰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대척점에 있다.텅빈 공간이 주는 광장의 공포와 유사하다.

나는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현재적 고민과 함께 읽었다.조금 더 한정 짓자면 좌파적 기획의 고민같은 것들 말이다.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자본의 전세계적인 변화 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사유의 전환같은 것 말이다.물론 코엔 형제가 정치적 좌파인지는 알 수 없다.그들이 지속적으로 현대 사회와 그 속의 인간 군상들에 대해 날카로운 페이소스를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영화를 '좌파영화'로 한정 짓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돈을 중심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그리고 그외에 몇 명의 쫓는 자들이 나온다.영화의 도입부는 군더더기 없다.'하드 보일드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듯 무뚝뚝한 하비 바르뎀의 안면 근육처럼 진행된다.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보안관 살해 장면은 빠르지 않은 몇 커트 안에 살인마의 이미지를 압축하는 훌륭한 장면이다.보안관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서의 부감 샷과 그 앵글 속에 비친 바르뎀의 모습은 섬뜩하다.야누스의 얼굴처럼 저항에 대응하는 힘든 표정과 웃는 표정이 동시에 어려있다.생명의 박동을 앗아가는 손의 무게감과 자신의 일차적 목표의 성취가 곧 도래한다는 이중적 감정이 살아 있다.살해 이후 옆으로 누운 바르뎀은 마치 격렬한 오르가즘 이후의 모습과 유사하다.그리고 그 간결한 동작과 병치되는 사망자의 수많은 구두발질의 흔적.일본의 하이쿠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짧고 간결하면서 회화적인 상상을 가능케 하는 '절제의 미학'말이다.

하비 바르뎀이 분한 안톤 쉬거는 '죽음의 신'이다.힌두의 죽음의 신 시바처럼 창조를 위한 무로서의 신이 아니다.그는 잔악하며 강인하고 폭력적이다.그리고 무작위적이다.전형적인 사아코 패스이다.문제는 이 영화에서 그를 '사이코 패스'라고 한정짓고 나면 다른 의미들이 숨어버린다는 것이다.결국 영화는 다른 '사이코 패스' 영화와의 비교 밖에 건질 것이 없게된다.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영화 속 '살인마' 안톤 쉬거 같이 집요하게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은 현재 세계에서 무엇일까? 이것은 최근에 본 콘스탄틴 프라비츠키의 <타라카노바의 황녀>의 주인공이 느꼇을 그런 임재해있는 '공포'와 유사하다.내게 안톤 쉬거는 '자본주의'였다.영화 속 사이코패스처럼 극악무도하며 비인간적이고 또한 무작위적인 공포는 '자본'의 공포와 유사하다.

안톤 쉬거의 동작은 살인-기계의 그것이다.그의 동작은 자연스럽지만 모든 것이 효율화되어 있다.그의 동작에는 군더더기란 없다.하드 보일드의 강한 압축은 또한 최소 동선이라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짝패를 이룬다.쉬거가 자신을 고용한 멕시코 갱들을 처단하는 장면,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 등등... 안톤 쉬거는 또한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다.그는 이것을 '원칙'이라고 말한다.마치 자본주의하에서 '법'에 대한 정치 철학자들의 견해처럼 '스스로의 완결성'으로 순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이럴 필요까지 없지 않아?'이다.살해당하는 자들이 쉬거 앞에서 하는 말이다.이 질문은 드라마적인 진실을 부과화면서 동시에 '자본'에게 되묻는 방식이다.그 대답은 '짜증'과 계획대로의 '이행'일 뿐이다.베토벤의 최고 걸작인 후기 현악사중주 14번의 부제는 이것이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했다."

자본의 야만성 앞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은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질문이다.영화에서는 실제적 폭력이지만...원래 상징적 폭력의 기본 형식은 강요된 선택이다.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을 물신화시키는 '자본'의 세계에 그런 질문을 허용되지 않는다.질문이어도 그것은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한'이라는 강요된 선택이다.

 구조조정 당하는 직장인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대학을 졸업하는 백수가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묻는다?' 2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하는 차상위 계층 조손가정의 할아비가 묻는다.'이럴 필요까지 있느냐?' 

자본은 '공포'를 근간으로 진화해왔다.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아의 공포'가 그것이었다.제국주의의 시대를 넘어 '제국'의 시대라는 현재의 공간에서 자본의 힘은 훨씬 교묘하며 은밀한 공포이다.그곳에는 탈출구가 없다.소설가 이순원이 '하루 한 걸음씩 압구정으로 다가가는 세상'에 대해 <압구정에는 비상구가 없다>라고 했던 말은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이제 유일한 비상구는 '운'일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영화에서 안톤 쉬거는 선택이라는 일종의 '허구적 탈출'방식을 제공한다.두 번이 등장한다.한번은 주유소에서 또 한번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살해라는 목적으로 찾아간 모스의 아내에게서이다.첫 번째 동전 던지기에서 쉬거는 기존의 가치들에 대해 혐오를 들어낸다.그리고 공공연히 살해의 의욕을 붇돋는다.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히치콕식 맥거핀이며 복선이다. 동전 던지기의 정치적 함의는 후반에 있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를 현대화되고 진화한 '자본'이라는 공포,즉 전세계화한 자본의 공포와 그에 따른 사유의 변화방식이라는 코드로 읽는다고 전제했다.모스의 아내는 주유소의 사장이 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쉬거의 동전던지기에 응한다.모스의 아내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

 슬라보예 지젝을 잠시 인용하자 

"우리는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도 보는 것을 통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스펙터클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인 꿈을 깨드리려 하지만 이는 허사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이 글에 이어 반유대주의에 대한 예를 적용한다.그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비이데올로기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이 부차적 합리화를 가져와 '무의식적 편견'을 확증시킨다고 말한다.그러므로 반유태주의에 대한 정답은 '유태인이 정말 그런가?-아니 실제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런 관념은 '유태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안톤 쉬거의 동전 던지기에 대해 주유소의 노인은 선택을 한다.반면 모스의 아내는 선택 자체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그것은 체제가 틀 지워준 질문에 대한 '탈영'이다.가장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의 저항은 '탈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에는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탈근대적 저항의 방식으로 '탈주'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근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적 통제 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근본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스의 아내는 탈근대적 방식으로 '공포'에 저항한 셈이다.물론 모스의 아내 역시 '이렇게 까지 해야하느냐?'는 질문을 한다.하지만 그녀의 방식은 과거 노인의 방시과 사뭇 다르다.그녀는 이미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부터 해방된 주체의 형식을 갖고 있다.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자면 공포의 '자본'앞에서 '존재의 피투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그녀는 '공포'로 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톤 쉬거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모스의 죽음장면이다.모스의 살해장면은 직접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그의 죽음은 마치 예고없이 찾아드는 정전처럼 그렇게 찾아온다.이것은 역설적으로 담담하게 비춰지지만 효과가 크다.특히 이 장면에서 시점의 교차가 흥미롭다.사건 자체를 객관화시키면서 영화의 중심인물이자 죽음의 주체를 대상화 시켜버린다.처음에는 살인 자체가 누구에 의한 것인지도 혼란스럽다.보안관이 다시 현장을 찾아간 장면에서 그림자와 거울을 이용한 미장센은 인상적이다.조금 앞에 장면에서 노인들로 대표되는 구세대들의 현실 개탄에 이어서 벌어지는 장면이다.현재의 축적된 자본의 공격양상이 마치 하늘 아래에서 떨어진 듯 개탄하는 그들은 향수로 자신들을 도덕화한다.그렇지만 결국 그들 역시 현재라는 '희생양'을 위해 재단을 쌓았던 '노인'들일 뿐이다.만약 제목에서 말하듯 '노인'이 없어져아 한다면 그것은 '세대론'적인 노인이 아니다.그것은 손에 피를 묻혔고 또한 현재를 만든'아버지', 그러므로 살해 되어야만 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코엔형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에게 동일한 장면을 연출케 한다.모스가 멕시코 국경을 넘으며 점퍼를 사던 장면,쉬거가 팔의 붕대를 위해 셔츠를 구하는 장면이다.여기서 감독은 '탈주'와 다른 방식으로 '공포'에 대항하는 방식을 말한다.그것은 '순수'와 '휴머니즘'이다.모스에게 점퍼와 맥주까지 팔던 청년들이 있었다면 쉬거에게는 다르다.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두가지의 가치를 동시에 충돌시키는데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이지는 않다.'탈주'와 '휴머니즘'에 기대지만 그것에도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탈주를 통한 저항은 폭력앞에 무력하다.또한 선의의 도덕 역시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에 포섭된다.

무표정한 자본주의는 상처와 흉터를 남기지만 다시금 길을 나선다.스스로 또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가면서 말이다.지젝을 다시 인용하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조건들을 발달시켜 영구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데,이는 바로 그것의 내재적인 모순 덕분이다...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썩어있다.그것은 균형의 내적인 결핍에 의해,치명적 모순과 불협화음에 의해 낙인찍혀있다....그 내재적 모순이 가중되면 될수록 그것은 생존을 하기 위해 자신을 더 혁명화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쉬거에게 같은 질문한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유령이 떠돌고 있다...모든 것을 잠재운 유령이다.돌아서서 멀어지는 듯 하지만 코 앞에서 숨쉬고 있는 그 유령에 대해 우리는 어떤 사유와 행동으로 맞설것인가?

이 영화를 읽는 방식은 천 개의 고원처럼 많을 것이다.내가 본 것도 내가 아는 선에서까지만 이야기하는 한가지 방식일뿐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밤과 낮처럼 갈라진다.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고 또한 인터넷에서 본 네티즌의 별 점도 그렇다.영화라는 텍스트를 읽는 방식과 작품에 대한 기대 수준,관객들의 영화적 경험의 폭에 따라 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나뉘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수 백년 전 부터 어떤 사람들에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인류 역사가 이룩한 미학적 성취'(실제로 그 악보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인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한 클래식 음악 중 유명한 한 곡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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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힘들겠는걸...나 원...입장 곤란하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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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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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문화 혁명가이다.흔히들 자주 하는 비교처럼 마르크스에게 레닌이 있었다면 예수에게는 바울이 있었다.레닌과 바울은 그들의 선지자가 세상에 던진 기획을 역사라는 지평 위에서 프로그램화 해낸다.

알랭 바디우는 서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진리를 두고 벌어지는 지난 담론들에-거칠게 말하자면 근대와 탈근대 담론들-거리를 두며 이를 관통하는 그만의 접근법을 제안한다. '보편성'을 옹호하는 그는-스스로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표현한다.-탈근대 철학의 메인스트림인,또한 우리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차이의 철학'에 대해 성찰적인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흔히 말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가진 한계를 들뢰즈가 말한 '자본의 지속적인 재영토화'작업으로 바라본다. '차이의 정치',또는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이 지닌 천편일률적인 특권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노출될 권리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성애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족제도 안으로의 가담을 인정해달라는 것에 멈춘다는 것이다.(바디우가 이들이 요구하는 동일한 권리에 대해 부정한다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는 실제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현실적 개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디우는 이제 자문한다

이 모든 것(화폐적 동질성,정체성 요구,자본의 추상적 보편성,부분 집합의 이익을 위한 특수성)과 단절하는 가운데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교의 탄압자 '사울'에서  '바울'이 된 인물을 쫓아가면서 이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고정점으로 '보편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다.

2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시작한다.여기서 참고가 되는 성경 편들은  <고린도서>,<로마서>등이다.바디우는 뒤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정전은 <4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글들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진리'에 선행하는 '사건의 철학'을 말한다.그가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절대성'이라는 지평에서 보자면 '상대성'의 철학이다.그는 '진리 공정'이라는 말로 진리가 구성되어지는 방식을 말한다. 진리는 '사건에 대한 기입'이라고 말할 정도이다.(사실 사건과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꼼꼼히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어쨋거나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바디우는 '진리'라는 것에 어떤 정체성도 어떤 법도 형성하지 않는 중심없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사건'과 '바울'의 양자 관계에서 '보편주의'를 끌어 내기 위한 '사건'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그 사건 이외에 복음서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각 종 기적,치료,예언 등등은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들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도 '사건'의 측면에서는 무관한 존재일 수도 있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보물로 간직한 바울에게 싸워야할 두 가지 담론들이 등장한다.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한-율법 중심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다른 하나는 바울을 비웃고 말았던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다.바디우는 이것을 두 가지 담론의 상징으로 설명한다.율법은 '표징'이고 현인들은 '철학'이다.이렇게 해서 바울은 '반철학적 보편주의'의 선구적 인물로 기록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2장 1-5절)

 뒤에 다시 한 번 등장하지만 바울에게 '율법'은 '죽음의 형상'이었다.실재의 삶이란 것이 죽음의 편에서 바라본 삶이 되고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영역에 바라본 형상이 되었다.이것을 원래의 자리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정초적인 '사건'이 요구된다.실제로 바울은 공의회를 통해 유대민족의 종교로 멈추게 될 그리스도교를 보편성에 입각해서 세계화시키는 이론적 지평을 만들어 낸다.

3장에서 바디우는 역사적 상황들-유대인의 봉기,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동방의 한 도시에서 제국의 중심(로마)로 이전 되는 과정을 말한다.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건설을 보편적이고 탈중심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려했던 바울의 기획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그러면서 바디우는 바울의 사회적 불평등,제국주의.노예제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는 혁명가로서 이해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를 언급한다.(영화 공부를 하다보면 꼭 거치게 되는 사람이다.) 파솔리니는 바울의 현재성에 주목을 한 사람 중에 한명이다.파솔리니는 코뮌주의와 혁명가의 문제,좀 더 쉽게 말하면 혁명의 순수성,성스러움과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을 투사해서 설명한다.그에게 바울이 제 3인터네셔널의 투쟁가로 재현되는 것이다.그는 성경속에서 바울에 대한 배반과 체포가 결국 성스러움이 갖는 필연적 내부 배반운동으로 보고 있다.파솔리니는 바울의 텍스트를 통해 현실적 지형도 아래서 생기는 혁명과 당의 관계 설정 그리고 그 존재론적 파국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4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이 맞선던 유대담론과 그리스담론을 다시 언급한다.이 둘 다가 지배의 동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그는 이것을 '아버지'의 담론들이라고 규정한다.그렇다면 바울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아들'의 담론이다.바울에게 있어 삼위일체같은 교부들의 이론과 파스칼식 논리적 종교해명은 무의미하다.그에게는 '단절'이 더 긴급하다.극단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전복적'인 아들의 '사건'에 더 큰 비중을 둔다.또한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무화하면서-바디우는 그것을 '기적의 담론'이라고 하여 유대담론,그리스담론,그리스도교담론에 이어 제 4의 담론으로 설명한다- 증거의 부재,주체의 허약함을 최상의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의 전복적인 특징은 바디우의 말로 압축된다.

"모든 진리는 파괴될 수 없는 젊음으로 특징지어진다." 바디우는 여기서 바울의 최대 공격자 중 한사람이었던 니체를 연상한다.니체가 말하던 그 단절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획이 바울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이외에도 바디우는 바울과 니체의 몇 가지 공통점을 제시한다.하지만 니체는 바울을 물고 늘어졌다.바디우는 그가 바울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적이 아닌 경쟁자로서의 질투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사건은 단절이자 또한 은총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여기서 바울은 사건을 통한 단절을 정식화해내는 문구 제시한다. "여러분은 율법하에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므로(로마서 6장 14절)" 바디우는 사간을 통한 단절이 주체를 항상 ".....이 아니라 .....임'의 분열된 형태로 구성하며 이런 형식이 보편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한다.이것은 전자가 폐쇄적인 특수성들에 대해 잠재적 해체를 가하고 후자가 사건에 의해 열린 이 과정의 주체들을 동역자로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바디우에게 주체는 자기적 주체는 없다.하지만 사분오열된 주체가 그 사분오렬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게 하지않는 것이 그의 미덕으로 보인다.그의 주체는 분열을 통해 다시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바울의 확신은 일자의 표징은 모두에 대해 있는 것,다시 말해 예외가 없음이라는 것이다...이는 하나의 말 건넴의 구조에 기반해 이해되어야한다.일자는 그 말 건네는 주체들 안에 어떤 차이도 기입하지 않는다.이것이 바로 사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편성의 준칙이다...일자에 대한 보편적이고 탈 율법적인 이해를 통해 주체에 대한 모든 특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병합 그리고 주체의 구성적 분열에 대한 모든 법적,계약론적인 접근을 해체한다.주체를 정초하는 것은 주체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 아니다.왜나햐만 주체의 정립은 하나의 근원적인 우연 속에서 선언되는 것과 연결된다. 

이제 바울의 가장 유명한 말이 등장할 차례이다."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뭐 이런 것 성경 구절 말이다.바디우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번역하는데 믿음,희망,자애. 좀더 주체론적 접근을 위해서 확신,확신성,사랑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에 선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선언하는 것과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한다.이런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참된 것에 대한 열림그리고 그에 대한 선언이다.소망(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충실성의 근간이 되는 준칙의 확고부동함이다.그리고 사랑은 이런 과정이 보편화되어 실질성을 얻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주체화를 설명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대중 노선'처럼 읽히기도 한다.

바디우는 책 말미에서 '은총의 유물론'이라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주체화 하는 과정을 몇가지로 정리한다.각 문장들이 환유적이고 또한 함의한 바가 깊기때문에 각 선언만 때어놓고 보면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높다.

1.일자는 모두에 대해 있으며 율번이 아니라 사건으로 부터 유래한다.

2.율법과는 관련이 없는 우연으로서의 사건만이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양성,즉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도래하게 할 수 있다.

3.율법은 주체를 사유의 무력함으로 구성한다.

4.구원의 문자,또는 진리 공정을 위한 문자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5.주체는 진리의 보편적 말 건넴-자신이 이러한 과정을 지탱한다-을 문자적이지 않은 법으로 삼는다.

6.어떤 진리에 힘을 주고 그에 대한 주체적 충실성을 결정하는 것은 사건에 의해 정립된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에게 말 건네는 것이지 그러한 관계 자체가 아니다.

7.진리의 주체적 과장은 그러한 진리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전투적 실재는 그와 같은 진리를 구성하는 모두에 대한 말 건넴이다.보편주의의 물질성은 모든 진리의 전투적 차원이다.

8.자체의 지속이라는 명령과 관련해 주체는 그를 구성하는 사건의 일어남이 보편적이며 따라서 그에게 실질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개별성은 보편성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벗어난 특수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는 바울을 보편주의의 혁명가로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바울의 보편성은 차별성과 논쟁하는 보편성이 아니다.오히려 바울은 전술적으로 '로마에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순응자의 모습을 보이기도한다.혁명의 대중주의 전술과도 유사하다.마오주의자들이 외쳤던 농민속으로 처럼 말이다.바디우가 말하고자하는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를 각자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차이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차이와 관습을 횡당하고 초월하는 것이다.대신 차이들을 그대로 두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대목이 바울을 종파주의적 도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했다고 한다.이것은 이 시대 진보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자성할 수 있는 질문이 된다.'울분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내 질문이기도 하다.폭발시키고 찢어버리고 분쇄시켜버리고 싶은 자본주의.천박하고 경박하며 식민적인 한국 자본주의...이런 배설형 진보가 쾌변용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다.그런 성토의 자본주의 비판으로 변비가 풀린다면 의미가 있겠으나 정말 '자본주의'에 어떤식이라도 손을 대고 싶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디우는 보편/차이의 관계 정립에 대해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바울의 시도는 보편 지향적인 평등주의가 불평등한 규범의 가역성을 통과하도록 하는데 있다....남자든 여자든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그들에게 은총처럼 도래한 보편성을 담지하는 것이다.또 거꾸로 보편성 그 자체는 차이들 안에서 그들에게 도래하는 보편성을 담지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만 자신의 현실성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피리나 거문고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14장 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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