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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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가까와지면 즐겁다. 회사 안나와도 된다는 것 때문이다.그 다음은  신문의 책소개 섹션을 접할 수 있는 날이어서 좋다.거의 모든 신문이 주말이 되면 '책'에 지면을 할애한다..주 5일제가 시행되면서 어떤 신문은 금요일에 책 섹션을 만들고 어떤 신문은 여전히 토요일을 지킨다.회사에 들어오는 주요 신문의 '책 섹션'란은 전부 내가 가져온다. 신문의 책관련 면은 대동 소이하다.어떨 때는 1면에 소개되는 책이 전부 같은 경우도 있다.특히 조중동은 정치,경제면의 색깔이 비슷하듯  소개되는 책들도 비슷하다.한겨레는 언제부터인가 조금 다른 형식의 책 섹션을 만들어서 맘에 든다.단순히 책 소개가 아니라  책을 핑계로 인문사회학적인 주제들을 이야기한다.즐거운 신문읽기다.좀 지루할 때도 있지만.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어느 신문의 책 섹션을 읽다가 기억해 두었던 책이다.실비 제르맹이라는 소설가는 낯설었고 번역가는 친숙했다.내가 아는 어떤 분은 번역가에 대한 신뢰만으로도 책을 구입한다고 한다.이 책의 번역가 김화영 교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게다.신문 책 소개에서 만난 글은 이 책 첫 장에 나오는 문장이다.정말 숨을 멎게 만드는 문장이다.이 책에 딸린 수많은 알라딘 페이퍼들도 이 글을 인용했다.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이 첫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와야만 했다.신비로우며 감각적이었다.실비 제르맹의 뛰어난 문장력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전체를 관통한다.그녀의 문장은 우선 색채적인 감각이 탁월하다.프라하 도시와 내면의 감정을 색채를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아주 매력적이다.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듯 하며 또 드뷔기의 음악을 듣는 듯 하다.하지만 그녀의 색채와 문장의 매력에 혹해서 이 책에 뛰어들면 곧 읽기가 아주 피곤해질 수도 있다. 그녀가 가진 뛰어난 문장력과 몰입을 요하는 묘사력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작가 아멜리아 노통의 책처럼 쉽게 읽히지도 줄거리가 쉽게 정리되지도 않는다.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도 없다.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전도연이라는 페이퍼-프라하의 연인을 인용한-는 나를 즐겁게 했다.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그 정도의 미모와 애교있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이 책을 읽으며 한결 마음 편했을 것이다.작가는 프라하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양파껍질 까내듯 서서히 알려준다.책 후반부에 가서야 그녀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게된다. 책 속으로 들어간 그녀,발자국 마다 잉크 맛을 내는 그녀.커다란 키에 한쪽 다리를 저는 그녀.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조차 없는 그녀...... 그녀에 대해 쓰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작가는 책 후반부에 나같이 하나 쯤 잡은 감으로 쩔쩔매는 독자를 위해 그녀에 대한 프로필을 날려준다.

다리를 쩔뚝거리고 가슴은 울고 있는 거인여자는 프라하의 돌들에서 태어났다.시간과 도시 전체가 결혼하여 태어났다..... 그 여자는 돌과 나무,쇠붙이와 물,그리고 도시 주민들의 무수한 몸들에서 태어났다.....그 여자는 도시의 기억-어두운 쪽의 기억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기억,역사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잊어버린 남자 여자들의 기억이다.그녀는 일체의 영광이 배제된 기억,글로 쓰지도 않고 그림으로 그리지도 않고 노래하지도 않으며 신화와 전설의 빛나는 금빛으로 장식하지도 않은 기억이다.....그 여자는 도시와 한 몸이고 도시의 비물질적인 심장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그려지는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프라하라는 도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며 역사이다.또한 그 인간의 역사가 갖고 있는 슬픔,고통,사랑,좌절이다.그녀가 울고 다니는 것은 그 수많은 죽음과 소외,빈곤,폭력에 대한 연민이다.그녀는 원래 무덤가를 지키는 조각상이기때문이다.김화영 교수는 번역의 말에서 번역할 수 없었던 원제에 대해 설명했다.<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직역하면 프라하거리의 우는 여자 라는 뜻이 맞다고 한다.그런데 La Pleurante ...가 무었이냐?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흔히 무덤앞에 조각하여 세우는 '상복차림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상' 이라는 것이다.(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필립헤르베헤가 연주한 포레의 레퀴엠CD 자켓이 바로 La Pleurante 와 유사한 것일게다.) 

그녀의 울음은 수많은 죽음을 위해서이다.이제는 잊혀지고 버려진 죽음이다. 그 공간안에서 이루어졌던 수많은 죽음의 역사 앞에 그녀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는 것이다.

친절한 작가와 번역가 덕분에 그녀가 우는 이유 그리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존재이다.같은 공간 속에서 오래도록 인간의 이야기를 지켜봐오며 가슴 아파한 존재이다.요즘도 가끔 시골을 지나다가 오래된 장승이나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큰 나무를 보면 잠시 상념에 젖는다. 장승이 또는 나무가 보아온 것들, 살아 온 시간들을 그려본다.할아버지의 할아버지..그 할아버지가 어린 아이일 때 부터 그것들은 마을에 있었을 것이다.그가 옆집 갑순이를 떠나보내며 가슴앓이를 토해내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또 장가를 들어 그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또 상여를 타고 그 나무 앞으로 지나가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그 아들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그가 시름시름 앓다가 또 산에 뭍히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마을 앞의 장승이나 나무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100년 정도의 인생이라는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시간이 그 장승과 나무에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프라하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초월하는 시간이며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거대한 무릎안으로 껴앉은 여성성의 시간이다.쩔뚝이는 그녀가 노을을 배경으로 주저앉아 도시를 무릎 안으로 껴앉는 장면은 참으로 거대한 상상이다.

책 말미에 가면 그녀는 사라진다.하지만 그녀는 사라진게 아닐 수도 있다.가시계와 비가시계 사이에서 절며 걸어가는 그녀였기에 세상 어느 곳에나 깃들어 있을 수 있다.작은 꽃잎 속에도 날아가는 나비의 무늬 속에도 철근 콘크리트 기둥 속에고 그녀는 살아서 두 세계를 잇고 있다.실비 제르맹은 그녀를 범신론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인간의 역사와 시간을 신의 영역과 연결하고 있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1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짧은 소설이다.실비 제르맹의 천재성은 이 짧은 소설 안에 역사와 시간,신과 인간,고통과 연민이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는데 있다.얇은 책이지만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된 소설이다.만만치 않으니 많이 팔리지는 않겠다.

이 책 누구에서 선물할때는 사람봐서 해야한다.자칫 하면 "이게 뭔 소설이 이따위야.뭔 말을 하자는 건지..."이런 힘빠지는 소리 듣을 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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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5-07 18:35   좋아요 0 | URL

필립 헤르베헤의 포레 레퀴엠이다.

1893년 판 연주로 헤르베헤의 명성을 드높였던 음반이다.

그는 몇 해전에 다시 포레의 레퀴엠을 녹음했는데.일명1903년판

녹음이라고 한다.이 연주보다 대편성된 구성을 택했다.

그 음반은 나도 아직 안들어봤다.



 


하이드 2006-05-08 11:06   좋아요 0 | URL

사진 몇개 붙여봐도 되나요.
리뷰 읽다보니 엄청 땡겨버려서 찾아봤어요.

무덤 앞에서 울어주는 여자라니, 슬프네요.






드팀전 2006-05-10 15:53   좋아요 0 | URL
제대로군요...저 옷 주름 사이에 슬픔과 고통이 나온다 이건데....

kleinsusun 2006-05-21 03:00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정말 잘 쓴다니깐....거구의 남자가 이렇게 글을 맛깔스럽게 쓰다니...ㅎㅎㅎ
저도 이 책 신문 북섹션에서 보고 찜했어요.
책 제목이 넘 맘에 들어요.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나두 가끔 서울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데...ㅎㅎㅎ
Thanks to 하고 갈께욤^^

드팀전 2006-05-21 10:25   좋아요 0 | URL
잘쓰는건 수선님이요..전 날림으로 쓰는 특징이 있어서..빨리 쓰기에 점수를 주신다면 좀 받을만하지요.ㅎㅎ 거구는 아니라니까요...내가 왜 거구야...

2006-05-23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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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이데이'-노동절이다.매일 일하는 노동자는 푹 쉬어야 되는데 회사에 나왔다.그닥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공휴일에 일해 본 회사원은 알 것이다.조용한 회사는 일하기 꽤 괜찮다.위에서 지랄 거리는 아저씨들도 없고 ,지랄 거리지 않아도 있는 것 자체로 부담되는 또 다른 아저씨들도 없고...즐거운 메이데이!!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데 보름이 걸렸다.'공사'가 '다망'하다 보니.(그렇다면 건축주는 쪽박차는 건가? 에이 썰렁) 서울 출장가는 KTX에서도 보고 피케팅 한다고 죽치고 앉아 있던 스티로폼 위에서도 보고(그 피케팅은 대개 버티기였으므로)....그나마 반쯤 넘기고 나니까 끝이 보여서 탄력 받았다.먼저 이 책은 나같은 일반인에게 약간 두려움을 준다.이거 또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하는..내지는 이 책 다 보고 나서도 기억남는 것은 단 한줄의 문장 정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같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본 이유는 '파시즘'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역사적 파시즘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고 또 일상적 파시즘에서 말하는 '대중동의'라는 부분도 늘 연구해보고 싶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또한 공부는 석박사만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같은 회사원도 책을 볼 수 있다는 쥐뿔 자존심에 읽었다...언젠가 이야기 했던 적도 있는 경험인데 .어떤 박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문득 뭣도 모르고 '푸코'...'부르디외' 뭐 이런 이야길 꺼냈더니 이거 완전 사람보는 눈이 달라졌다.그런 용어들은 자기들의 전문영역인데 하찮은 일반인이 그런 단어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쓰니까 놀랐겠지.그런데 그깟 단어 몇 개에 사람보는 눈이 달라지다니...광고에서 그렌져 타고 다니는 오래전 애인을 보고 '당신 잘사셨네요' 라고 카피 날리는 것과 똑같은 수준에서 유치했다.많이 배우신 박사님들도 유치하다.(휴..알라딘의 박사님들 계실테니 저의 편견을 용서해주삼.) 어쨋거나 평민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가끔은 졸면서 가끔은 넘어가면서 라이히의 책을 다 읽었다.라이히의  개념과 용어가 낯선 부분은 있었다.성경제학이니 오르곤이니 하는 것들은 대충 무슨 개념인 듯 하다라고 그려지긴 하지만 내 판단이 옳은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평민의 자긍심(무식에 힙입은)으로 이런것들은 대충 또 무시할 수도 있다.그렇게 '그냥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그다지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거참 내가 쓰고도 너무 말어렵게 한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평민의 도망갈 구멍 만드는 어법이라니)

라이히의 이 책에서 파시즘을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고 밝힌다.아마 일상적 파시즘 논의에서 라이히가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분이 이 문장에 담겨있을 것이다.라이히는 본인이 직접 서문에서 프로이트와 맑스의 변증법적 변화를 도모한다라고 밝힌다.특히 맑스의 경우 대중심리학의 지식이 없었으므로-이것은 일반 사회학 전체에 통용된다-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만을 제시할 분 그들이 성격차원에서 계급구분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라이히는 우선 파시즘의 이해를 위해 이러한 통속적인 맑스주의 개념을 종식시킬 것을 권한다.즉 경제 결정론과 계급론적으로 파시즘에 접근하면 파시즘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억압받다보면 이거 한번 뒤집어 없자 하고 불끈 일어나야 돼는데...파시즘의 도래를 보니까 그게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이거 불끈하고 일어서기는 커녕 '하이 히틀러' 하면서 손을 번쩍 드는데 이 상황을 맑스의 계급투쟁론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다.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80년대 우리상황과 대치시켜도 비슷해진다.변혁세력 중 일부는 '민중'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가졌다.즉 '민중'은 위대하고 '민중'은 무오류적이라는 식의 발상이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경험들이 발생한다.이때 그 일부..감상적 민중주의자들은 쉽게 도망갔다."그게 다..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인해 민중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끝." ...라이히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세력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너무 쉽게 대중의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간과했다고 말한다.그 틈새를 가장 잘 파악하고 정치적 선전을 통해 대중의 속성을 활용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결국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물론 이것이 변혁세력이 말하는 민중과는 다른 개념일지라도-객관적인 응시를 주장한다.대중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비합리적이며 책임감이없다.또한 신비주의에 자신을 의탁시켜며 권위주의에 호응한다.물론 라이히가 대중을 이렇게만 파악하면 더이상 인류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게다.그는 대중이 원래 자유를 본원적으로 생각하며 또한 억압을 걷어내고 긍정적 변혁 주체가 될 수 있음도 밝히고 있다.라이히의 대중에 대한 시각은 그러므로 부정적이라는 것보다는 입체적인 객관화에 중심을 두었다고 할 것이다.

파시즘의 발호에 가장 중심에는 당시 독일 소시민계층이있었다.파시스트세력 역시 노동자계층보다 소시민계층에 우선적인 정치작업을 펼친다.계몽된 이성의 승리 표상이던 이 시민계층이 도대체 왜 얼토당토않은 파시스트의 중심축이 되었는가? 또한 소시민층에 이어 역사발전의 중심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왜 한줌 파시스트 정치꾼들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라이히는 파시즘에 손을 들어준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악마가 숨어있었는지 탐구한다.이 부분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며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접근법의 핵심이다.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돼어 있다.상세하게 설명할 능력도 없고 이해도도 떨어지기에 그저 평민수준의 이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파시즘의 대중심리의 가장 핵심에는 가족이데올로기,그리고 유아기때부터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억압,기독교 원리에서 나오는 신비주의적 가치 등이 있다.

권위주의적 사회는 권위주의적 가족의 도움을 받게된다.이것은 개개인의 성격구조 형성에 지대하다.이를 통해 가족-국가-문명이 형성된다.라이히는 이렇게 말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모든 가족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국가의 가장 가치있는 권력도구가 된다.소시민적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은 성적 반항 위에 체념하는 태도를 발전시킨다.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와 병행하여 이후 모든 권위에 대해-아버지를 통해 습득된- 동일시,내면화 한다.

가족 내의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결국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로 발전하게 된다.사회문제에 있어서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대중은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내적인 모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한다.그리고 책임감의 부채로 부터 탈출할 수 있다.

또한 라이히가 강조하고 있는 성적 억압 역시 가족 내에서 이루어진다.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장제와 이에 바탕이 되는 가부장 권위주의는 가모장제가 사적 축적을 통해 붕괴되면서 발생한 것이다.정착을 통한 사적 축적은 일부다처의 형식을 띠게 되고 그전에 있던모계 사회의 '성적 자유'는 억압된다.'성적 자유'는 권위에 의해 박탈되고 상품화되어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다.요즘도  볼 수 있는 공익 캠페인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다. '가족보호=성적 순수성=안전한 사회'로 이어진다.이러한 도식은 이런 반대로도 적용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보호=성적 억압=도덕주의의 강화.' 파시즘 역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기대고 있기때문에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이것은 파시스트들의 볼세비즘의 성적 해방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소시민들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성의 억압을 위해 파시스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연령층은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성의 억압을 위해 또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주의'이다.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에 대한 죄의식에 바탕을 두고 존립하는 종교이다.(기독교인들은 싫어하시겠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책감 없는 긴장완화를 추구한다.가부장적 종교는 이의 완화를 위해 종교적 제의를 이용하여-파시스트들 역시 유사하게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는 대형집회를 조직한다-무력감에 빠진 인간을 조종하게된다.성의 억압은 종교적으로는 마조히즘적인 무력감으로 탈출하고 또 반대로 인종주의,순혈주의,민족의 우수성등의 조작에 의해 사디즘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이 책에서 라이히가 다루고 있는 파시시트 정체는 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파시즘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파시즘'이다.책의 후반부는 소비에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라이히는 소비이트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한다.소비에트가 파시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레닌이 주장한 국가없는 사회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삼는다.라이히는 일종의 코뮨을 주장한다.하지만 그는 이것이 정치 체계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노동민주주의라는 것이 그것이.일종의 일하는 사람들간의 공동체 같은 형태,직능간 합리적 교류와 상호발전이 가능한 코뮨이다.라이히는 노동자의 개념을 맑스 시대보다 확장한다.요즘 말로 하면 화이트칼라들도 포함하는 노동자층의 자치가 노동민주주의의 형태가 된다.

라이히는 대중들의 성적인 경직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가능하지만 실제적 민주주의는 힘들다고 말한다.이 성적 억압의 문제는 당 시대에 부여된 문제가 아니라 수 천년을 걸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내재화되온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라이히는 현 시대 사람들은 이미 성적 억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성에 대한 긍정과 성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자란 새로운 세대만이 진정한 파시즘의 위협과 결별하고 사회 자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라이히가 말한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파시즘의 이해에 중요한 요소이다.또한 독일의 전형적 파시즘이 없어지고 난 이후에도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과 이에 대한 대중 동의를 이해하는데 이 점은 여러가지 시각을 제시해준다. 유럽은 파시즘이라는 아픈 기억을 통해 파시즘을 역사의 반동으로 파악하는 광범위 대중들의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 제국 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위치에만 익숙할뿐 우리사회에서 유사 파시즘의 발호와 이데올로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지금도 군사정권이 가진 유사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이 존재한다.그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유사파시즘적 속성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것들을 이해하는데 라이히의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몇 몇 궁금한 점들도 남아있다.(아는게 별로 없어서 학문적 질문이 되긴 어렵지만..)라이히의 논지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성억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즉 유아기적 성의 억압이 무의식속에서 인간의 이후 모든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라이히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프로이트의 성학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비판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과연 '성의 억압'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인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밝혀내고 유아기의 성을 찾아낸 것은 중요한 발견이지만 유아기 성의 억압 문제를 너무 과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프로이트의 오른팔인 칼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한 것도 프로이트의 성결정론에 대한 반대때문이었다.비록 칼융이 신비주의에 빠져 나치에 이용된 감은 없지 않지만..또한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론에 대해 '괴테 시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둥 '의식 과잉의 백치의 상상'이라는 둥 프로이트를 꼬집고 있다.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1차적 비판인 '과잉성결정론'을 라이히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성 싶다.또한 학문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이 가진 가장 난맥상인 '검증가능성'의 원죄 혐의 역시 라이히가 떠안을 수 밖에 없다.무의식의 성억압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책에서 조금 유치하고 일차원적이기는 하지만 라이히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파시즘의 지도자 및 그 추종자들이 성년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 등 다른나라에 비해 독일,이탈리아에서 특별히 성적 억압이 심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즉 성적 억압이라는 것은 한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의 발호가 없거나 미약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만 국가 전체적으로 발호했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더 억압받아서?  성적으로 억압된 대중들의 전향적인 파시즘 지지에 대해서도 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기본적으로 라이히가 말한 파시즘 내에서 대중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 생활태도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하지만 라이히가 성의 억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 것에 비해 문화산업이라는 쪽에 혐의를 두었다.문화산업을 통해 관리되는 세계 속에서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인간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물론 대중문화의 혁명성과 대중들의 자발성에 대해 부정적인 아도르노의 입장을 고려하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억압'보다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라는 것도 난망하다.'노동민주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라이히가 실험실에서 흰 가운입고 있는 의사라는게 명백히 드러난다.도대체 '노동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치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막연하고 또 이상적이다.라이히의 말에 따르면 기존 정치체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 신개념이 낯설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의 자치 개념은 1차적으로 성적 억압이 없는 -아니 최소한 어느정도는 사라진-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또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자치개념이다.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기독교의 천국 개념처럼 보인다.라이히의 실험실에서는 이러한 코뮨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하지만 소규모의 대안적 코뮨이 아니라면 과연 이것이 현실 속에서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고 믿는 다면 인류 역사가 구현해 놓은-설령 빌어먹을 것이라도- 현실의 정치,경제,사회의 촘촘한 구조를 너무 쉽게 해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위대하게 거론된 것은 그의 논지가 무오류이기때문은 아니다.그가 밝혀낸 것이 이후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사회 분석에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1940년대 파시즘이 한창 발호중일 때 이런 위대한 책을 써낸 것은 참으로 놀랍다.또한 그가 가진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후속 연구를 이끌어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모를 때는 넘어가고 지겨울만 하면 쉬어가는 평민의 '까잇거' 근성만 있으면 <파시즘의 대중심리>을 책장 한 켠에 꽂아두고 두고 두고 펼쳐볼 수 있다.이런 책들을 학자들의 전유물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또 평민의 역할이고 '까잇거'정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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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2006-05-01 14:11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언젠가 읽어야 겠다 마음먹고 보관함에서 나올줄 모르고 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 어서 읽어봐라 하는 좋은 리뷰이네요.
<빌헬름 라이히>도 꼭 읽고 싶은데 계속 품절로 나오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드팀전 2006-05-01 18:49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인지는 잘 모르겠구요....ㄳ 평민이 잘 알아야 뭘 얼마나 잘알겠습니까..
파시즘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면 좋으실 듯 해요.까잇거 읽으면 되는 거죠.뭐 ㅎㅎ

글샘 2006-05-01 21:06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군요. 요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 파시즘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휑하게 보이는 것 같지 않나요? 진정한 코뮨은 극한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리뷰를 읽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뭐라고 코멘트를 달긴 달아야겠는데... 횡설수설이군요. 잘 읽고 갑니당.

드팀전 2006-05-01 23:53   좋아요 0 | URL
저도 횡설수설인데요..피차무마 .. 파시즘을 어떻게 규정하냐에 따라 다르지만..전 파시즘이란 용어를 너무 광범위 하게 쓰는데는 좀 반대합니다.그렇기때문에 파시즘의 도래같은 것은 별로...하지만 파시즘적인 속성들에 대한 각성은 있어야 겠지요.황우석같은 사건들은 전형적인 파시즘적 대중심리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또한 개인적으로 코뮌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게 근대 국가가 현실 자체인 상황에서 가능할까..에는 무지 의심이갑니다.자칫 코뮌이 배운자들의 상상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뭐 소수자 운동을 통한 코뮌의 실험이야 각종 공동체를 통해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만..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요..코뮌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은 결국 근대성의 완성 내지는 근대의 재구성을 통해서 어떻게든 살기 나아지게 해야하지 않을까요.... 댓글로 또한 횡설수설이네요.에궁!! 안녕히 주무세요.

드팀전 2006-05-01 23:56   좋아요 0 | URL
구두님>오호라..제가 거의 몇년만에 처음 밤에 알라딘하는데..다들 이 시간에 주로 활동들 하시는구만요.밤에 보니 반갑습니다.우하하...

돌바람 2006-05-02 10:57   좋아요 0 | URL
까잇거 정신으로 조만간 책을 펼쳐야겠어요. 저도 사다만 놓고 언젠가 보겠지 그러고 있었답니다. 까잇거! (이거 비밀인데요) 저는 저 책 두부 물 뺄 때 눌러놓을 때 쓰고 있답니다. 출판사 관계자들이 보면 무식한 아주마니라고 할라나요. 까잇거 읽지요 뭐. 까잇거! 리뷰는 나중에 읽을래요^^

딸기 2006-06-08 09:45   좋아요 0 | URL
흙흙 이것도 사야하는 것인가... 유혹이로군요. 일단 땡스투 해놓고~~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그 날 아침은 시가 한 편 쓰고 싶었다.흐린 날이었으며 또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그 당시 하이쿠 몇 편 읽었던 듯 하다.그 중 몇개는  오래 기억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아주 평범한 날 아침에 서푼짜리 시심을 돌게 한 것은 어느 죽음과의 대면이다.회사를 10분정도 앞둔 길이었다.길 바닥에 누런 물체 하나를 발견하고 흠짓 놀랐다.팔뚝 만한 크기의 누런 강아지가 길 한복판에 누워있었다.그리 오래전에 치인 것 같지는 않았으며 또 숨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평소에 길바닥에 누워 버린 동물의 시신을 보면 곧 바로 눈길을 돌린다.대게 그런 유해들은 곤죽이 되어 있기 마련이고 죽음의 경건함을 느끼기 전에 시각적 혐오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하지만 그날 그 강아지의 모습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속도를 줄이지는 못했지만 평소와 달리 그 강아지를 계속 눈에 담으며 지나갔다.내가 강아지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공공의 이익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면 내려서 후속 조치를 했겠지.하지만 나는 둘 다 아니다.그저 한 강아지의 죽음을 그날 따라 조금 오래 더 생각한 사람일 뿐이었다.그 때 읽던 책에 메모를 남겨 두었다.목격한 죽음을 하이쿠 처럼 여운을 주는 글로  남기고 싶었다.하지만 능력미달... 그냥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써 놓았을 뿐이다.

 비오는 차도 위에 쓰러져 죽은 어느 개를 추모함....2003년 7월 8일

 장 그르니에의 수필에 나온는 어떤 글 같다는 생각을 당시에도 했을 것이다.

하이쿠는  짧아서 좋다.또 정형화 되어 있어서 좋다.근대 시문학은 자유시의 발달을 토대로 한다.정형시는 문학에서 전근대의 상징처럼 비추어진다.그래서 요즘 시인들은 대개 자유시를 쓴다.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정형시는 형식 상의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하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 한시나 하이쿠와 같은 정형시를 읽다 보면 근대 자유시에서 느낄 수 없는 무한한 해방감을 갖게 된다. 하이쿠는 짧지만 강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하이쿠 시인들은 자연과 삶을 관통하는 혜안을 17자에 담았다.정형시가 주는 압축미는 독자에게 시를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준다. 시를 읽고 상상할 수 있는 몫을 독자의 삶에 대한 깊이에 떠넘겨준다.특히 하이쿠의 회화적 인상은 읽은 이의 마음 우물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일련의 감정을 한 순간에 끌어올려준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이사-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장마가 시작되자 이름 없는 시냇물들도 잔뜩 긴장했다- 부손

짧은 시들이지만 시각적으로 너무 강렬하다.영화의 스틸 사진 처럼 한 편 한 편이 그려진다.올 봄에도 벚꽃 길을 걸었다.이사의 하이쿠를 생각하면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의 마음이 떠오른다.초수이의 눈부처는 사면을 하얗게 채운 들판을 쪽문을 열고 내려다 보는 작가의 시선을 떠오르게 한다.마지막 부손의 하이쿠에서는 장마철의 비에 젖은 푸른 숲의 시각적 이미지 사이로 콸콸콸 돌아드는 시냇물의 청각적 이미지까지 겹쳐진다.<하이쿠와 유키요에,에도시절>에서도 다색판화 우키요에의 발전에 하이쿠 동호회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하이쿠의 시각적 이미지가 그 만큼 그림과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만나는 하이쿠와 우키요에의 연결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우키요에를 감상한다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분명있는 일이다.하지만 하이쿠의 이미지는 종이 위 그림 속에 그려지는 것 보다 읽는 이의 마음 속의 떠오르는 상이 훨씬 미적이고 훌륭하다. 

도둑이 남겨 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료칸-

텅 빈 집 밤 되니 더욱 썰렁하여/ 뜰에 내린 서리나 쓸어 보려다가

서리는 쓸겠는데 달빛 쓸기 어려워/ 그대로 달빛과 어우러지게 남겨두었네 -황경인-

아래 있는 시는 물론 하이쿠는 아니다.하지만 두 시의 정서가 왠지 어울릴 듯하여 써 보았다.청빈한 삶,아무도 없는 깊은 밤,홀로 있는 적막함을 달래 주는 것은 달빛 뿐이다.

꽃구경에 날 저무니 집으로 가는 머언 벌판 길 -부손-

붉은 꽃 푸른 산 해가 지는데/교외 들판 풀빛은 끝없이 녹색

상춘객은 가는 봄 아랑곳하지 않고/정자 앞 오가며 지는 꽃잎 밟네  -구양수-

두사람의 생애,그 가운데 피아난 벚꽃이런가 -바쇼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바람에 만점 꽃 펄펄 날리니 안타까워라

보는 이 눈앞에서 꽃 이제 다 져가니/ 술 많이 마셔서 몸 좀 상해도 저어 말지니라

강 위의 누각에 물총새 집을 짓고/궁원가 큰 무덤에 기린 석상 나뒹굴었네

세상 변하는 이치 잘 살펴 즐기며 살지니/뜬구름 같은 명리로 이 몸 묶을 게 무었이랴?   -두보-

굳이 같은 정서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하이쿠나 한시나 자연을 바라보고 인생을 넘나 들었으니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이쿠 시인들은 대개 방랑하며 가난하고 고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그래서 그들의 시에는 '가난한 마음냄새'가 난다.시인의 가난한 마음은 작은 미물에 시각을 고정한다.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은 유머러스한 표현을 통해 생의 위대함과 인간의 편협함을 비웃는다.이런 하이쿠들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다리 위의 저 거지도 아들을 위해 반딧불을 잡으려 하네-이사-

새벽에 핀 이 꽃들 나는 내가 보려고 했던 것보다 더 많이 신의 얼굴을 보았다.-바쇼-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하이쿠의 힘은 사물을 관조하는 힘이 아닌가 한다.하나의 사물은 맨눈으로 보면 그냥 있는 사물일 뿐이다.그 곳에 깊은 응시를 배제한다면.오래도록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게 달라진다.매일 쓰던 걸레도 싱크대에 쟁여 있는 빈 그릇도 .... 오래 바라 보면 그 사물들이 말을 건다.그리고 세숫대야가 호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누가 야위어 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오래 바라보면 모든게 달라져 보인다.그건 진실인것 같다.

 봄은 산을 넘어 간지 오래. 나는 두리번 거리기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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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노동 -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최장집 편집 / 후마니타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전두환 때가 훨씬 나았어.그땐 먹고 살만은 했잖아.'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커진다.'야야..무식한 소리 좀 하지마.무고한 사람 잡아다 병신 만들고..민간인에게 총질 해대는게 잘 한거냐'  술자리에서 한번 커진 목소리를 줄어들지 않는다. '야...정치는 그렇다쳐도.경제만 두고 보자고.경제만 보면 두환이가 훨씬 잘한거 아니야.지금처럼 실업자가 많았어 노숙자가 많았어.'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을 경험들이다.IMF이후 한국 경제의 불안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퇴행적인 사고를 갖게 만든다.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담론들의 인과는 술자리에서 끼어들 자리가 없다.오직 눈에 보였던 살림살이의 면만이 부각될 뿐이다.한국 경제의 몰락은 우연치 않게도 민주정부의 출범과 궤를 같이 한다.사람들은 권위주의 군부정권만 몰락 시키면 더 나은 삶이 보장 될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IMF 외환위기를 꼭짓점으로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악의 상황을 치달았다.대규모의 구조조정과 실업난,노숙자와 신용불량자,비정규직문제와 빈곤층의 확산...

왜 민주주의 정부 하에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을까?  <위기의 노동>은 그에 대한 답을 정치의 부재,민주주의의 부재라고 답을 내린다.이 책은 IMF 이후 한국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노동'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대략 16개의 논문이 노동과 관련된 현 시대의 단면들을 분석하고 있다.주로 다루어지는 대상들은 경제 위기 이후의 사회적 약자로 부각된 층에 대한 연구이다.예를 들면 신용불량자,비정규직 노동자,파견 노동자,하도급 중소기업 노동자,빈곤 여성,노동 조합의 불평등 같은 것들이다. 최장집 교수는 첫문을 여는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과 책의 마지막 논문인 <사회적 시민권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를 통해 <위기의 노동>에서 증명된 노동과 사회 안전망의 문제를 총제적으로 짚어 낸다.

먼저 <위기의 노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 지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보자.현재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숫자를 넘는다. 시간당 임금을 비교하면 정규직을 100으로 할 때 비정규직은 49에 해당한다.임금소득의 불평등 정도가 OECD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잘살지만 불평등한 나라라고 여기는 미국보다 우리의 임금소득 불평등율이 높다.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권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노동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2003년 미국의 포브스지는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이 OECD국가중 3위라고 밝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과 보수언론은 한국의 노동시장이 아직도 경직돼어 있으며 거기에 가장 큰 악역을 맡고 있는 것이 노조라고 몰아세우고 있다.<노동시장의 구조변화와 비정규직>이란 논문에서는 비정규직의 증가가 단순히 경제환경 또는 노동시장 요인에 기인하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기업의 인사관리전략변화,노조의 조직률 하락 등 행위주체의 요인에 기인한다고 밝힌다.좀 더 쉽게 말하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현재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무한경쟁의 세계화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최장집 교수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일본 고용시장의 상황은 좋은 예가 되고 있다.일본 역시 평생직장의 개념이 신자유주의와 장기 경제불황으로 무너졌다.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고용의 가치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제적 생산체제의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즉 단기적 경제성장 지표를 높이기 보다는 10년을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고용을 유지하는 저성장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노동시장에서 주변화는 여러가지 문제를 낳는다.고용의 불안정은 가족 임금에 의존하는 노동자 가족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사회적 안전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은 조그마한 외부 영향에도 추락하고 만다.생활보호 대상자가 되거나 국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차상위 계층이 돼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일부에서는 개인의 능력 부재를 문제시 삼는다.하지만 통계는 비정규직 일자리로 부터 벗어난 노동자 중 1%만 정규직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다.즉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의 덫에 빠진다는 것이다.

<위기의 노동>에서 다루어진 많은 이야기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여성 노동자 문제와 노동조합의 문제이다.여성 노동자 문제는 또한 여성의 빈곤과도 연관돼어 있다.여성 노동자들의 다수가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노동시장을 설명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중 노동시장 이론'이다.즉 분명한 경력단계와 직업의 안정성이 있는 구조화된 일차 노동시장과 불안정한 이차 노동시장이다.일차 부문에는 주로 남성 노동력이 이차 노동시장에는 주로 여성 노동력이 거래된다고 설명한다.남자 정규직 노동자를 100으로 했을 때 그 대척점에 있는 여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비율은 39 밖에 되지 않는다.여성 단독 세대주거나 가장인 경우 그 세대의 빈곤은 예상되는 일이다.그러한 면에서 국제연합개발기구는 "빈곤이 여성의 얼굴을 가졌다"라고 말한다. 세계 빈민의 70%이상이 여성이기 때문이다.여성 빈곤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임금 문제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다.<이중의 빈곤,빈곤의 여성화>의 저자는 성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의 배제를 위한 패러다임 전환,예방적 생애주이적 접근,여성빈곤집단의 차별화된 욕구 반영한 정책개발,빈곤정챙의 성주류화와 빈곤퇴치를 위한 종합적인 시스템 구축을 주장한다.

노동 조합내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노동 양극화와 운동의 연대성 위기>에서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방조하고 있다고 말한다.특히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소속 조합원들의 협애한 이해관계에 치중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밝힌다.이는 대공장의 노조들이 하청 기업과 비정규 인력의 수탈을 추구하는 소속 대기업의 수익독식 경영을 묵인한 채 그 수익의 공유를 위한 담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노동조합의 불평등 구조와 여성노동자>라는 논문에서는 00타이어의 촉탁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이중차별을 취재하여 비정규직 여성들이 회사는 물론이고 정규직 남성 중심 노조에 의해 배제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남성 중심의 정규직 노조는 촉탁직 여성을 고용할때는 회사측의 노조약화를 위한 노동통제 전략과 비정규직화의도를 비판하면서도 그 해결방법으로 촉탁직 여성노동자들을 남성조합원의 방패막이로 삼아 이들을 쫓아내고자 인식했다.한 노동조합 간부의 인터뷰는 정규직 남성 노조원들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면 이들이 임시직으로 있을 때는 이 사람들이 먼저 나갈 수 있는데 조합원들이랑 똑같은 고용형태에서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니까..조합원이 아니라면 여성노동자들이 먼저 해고될 수 있는데 이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남성조합원들이 먼저 나갈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의 분절화와 비정규직 배재 문제에 대해 저자들은 노조 조직의 탈 관료주의화,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로의 전환,연대 의식의 복원을 위한 교욱과 노동연대적 담론의 확산,전투성에서의 탈피를 통한 국민지지등의 전략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글인 <사회적 시민권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샬의 사회적 시민권 개념을 도입하여 한국의 사회안전망 부재를 지적한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물질적 지지기반으로서의 복지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다.사회적 시민권이란 사회통합이론으로서 개인의 기본권,정치참여권,사회의 경제 성장과 성과를 분배 받을 권리를 말하는 시민권이다.이는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되는 시민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개념이며 또한 경제적 성취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이다.최장집 교수는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을 끌어 올린 것을 김대중 정부의 공을 돌린다.그에 반해 현 노무현 정부는 노동-복지정책이라고 부를 만한 정책이 없어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노무현 정부는 정서적 급진주의와 보수적 경제 정책 집행이라는 기묘한 결합을 통해 무능함 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최장집 교수는 일갈한다.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유래없을 정도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는 나라이다.경제 지표와 자본의 수익률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정권은 철학의 부재로 인해 지켜야 할 것 마저 내주면서 무리한 신자유주의 받아들이기에 앞장 섰다.또한 보수언론은 신자유주의 만이 이 시대의 방향이며 뒤떨어지면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낙오한다고 선전한다.이때문에 많은 일반인-거기에는 배웠다는 사람들도 포함하여-들이 신자유주의의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믿고 뒤쳐지지 말자고 효율성을 높이자고 뛰어다닌다. 그 자본의 수익률과 효율성 뒤에 낙오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그저 능력 부재의 낙오자로 취급할 뿐이다.그들이 죽던 살던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며 나는 가끔 사회복지 공동모금에 전화 한두번 눌러주며 스스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위안하고 만다.칸트가 말했다는 자유주의의 안티테제가 '가부장적 온정주의'임을 알지 못한다.관료주의 복지 시스템의 근본정서이기도 한 '온정주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개인적으로 온정주의는 철학의 부재가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지속적일 수 없으며 파편적이기 때문이다.최장집 교수는 한국의 노동 및 복지 정책이 사후 약방문이라고 비판한다.즉 시장경재의 결과에 대해 사후적으로 열패자들을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정책에 한정되고,시장경쟁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복지정책은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사회적 시민권의 부여를 위해서는 사후 물질적 보상이라는 권위주의적 복지모델에서 탈피하여 대상자들이 시민권 부역/획득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신자유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가진 문제를 모른척 하거나 이론적인 한계에 대한 탐구를 도외시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또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마음 역시 추호도 없다.앞으로도 멕시코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을 지지할 것이며 또한 프랑스 젊은이들과 노조의 최초고용계약법 철회 쟁취에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기뻐할 것이다.최장집 교수 역시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의 각 부문,계층,수준이 치등적으로 영향받고 있는 분화된 현실이다.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의 현실로 부터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담론은 담론의 영역에서 고민할 문제이고 변화는 실천의 영역 몫이다.진실은 늘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시장'에 목숨을 걸었던, 목숨은 모르겠고 별 고민도 안해보고 그냥 '어쩔 수 없다'주의에 빠진 이들에게 칼 폴라니의 말이라도 기억하게끔 하고 싶다.

'시장이란 분산적 결정을 특징으로 하는 교환 및 자원배분 메커니즘의 한 형태라는 점과 그 때문에 이를 제도화하는 국가의 개입 없는 시장이란 존재하기도 작동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또한 중요한 것은 시장은 그보다 큰 사회영역,전체 사회 공동테의 한 하위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사족)이 책은 논문을 모았다.그래서 글쓰기 방식도 딱딱하다.도표과 수치,그래프도 중간 중간 나온다.내용이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하지만 반복을 통한 강화 효과가 있다.또한 이 시대를 살면서 눈감아서는 안돼는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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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4-16 18:30   좋아요 0 | URL

'큰 꿈을 가져라'라는 교육 모토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곁들여 주목할 만 합니다. 홍세화씨가 '귀족 사회'란 글에서 적나라하게 지적했듯,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이슈가 저런 구조의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니까요. 가끔 출신 계급은 보잘것없어도 타고난 재능으로 몇백 대 일의 바늘구멍을 뚫고 성공한 케이스가 대대적으로 홍보되는 건, 그러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너의 노력과 정성이 부족해서다."라는 압박으로 연결됩니다. 100명 중 한명만이 이를 극복하고 귀족의 성채로 진입할 수 있는 사회가 유지되는 기술 중 하나가 아닐까요. 서로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다른 100명에게 '모두의 기회는 평등하다'라는 말로 100명 모두가 '내가 그 1명이겠지'라는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것, 그 핵심 기제가 '큰 꿈을 가져 성공해라'라는 성공지향의 교육 이념이니까요.

매너네 조직에서 무료로 왠만한 학술논문은 다 긁어볼 수 있어서 저 책은 사지 않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논문으로 찾아서 읽었는데, 저 성공지향의 교육 이념이 현 노동시장 체제의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는 데 대한 글을 찾지 못한 게 조금 아쉽더군요.


글샘 2006-04-17 14:33   좋아요 0 | URL
엊그제 집회 마치고 바닥에 노무현 개%%라고 적힌 낙서가 인터넷에 올랐더군요.
그냥 욕하고 말기엔, 현실이 너무도 냉혹합니다.
철학 없는 정치에 민초는 휘둘릴 뿐이란 것이, 앞날이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왜 우린 생각있는, 철학을 가진, 비전을 보여 주는 정치를 갖지 못하는 걸까요.

후마니타스 2007-06-14 19:4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사는 동네에 봄 빛이 완연하다.출근길 차창 밖으로 하얀 벚꽃이 가루처럼 흩날린다.자동차가 지나가면 하얀 꽃 가루처럼 벚꽃 물결이 인다.강 옆에 서 있는 버드 나무도 이젠 연둣빛이 선명하다.새순이다.어느 개인 주택 담 너머에는 노란 빛과 푸른 빛이 서로 재잘 거린다.개나리 꽃잎은 아직 들어가기 싫다는 듯 노란 빛 마지막 저항을 한다.아직 작은 잎에 불과한 개나라 잎들은 이제 우리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듯 점점 짙은 빛으로 자기의 시간임을 자랑한다.

세상이 온통 그림이다.

자연은 세상을 화폭 삼아 여기 저기 툭툭 눌러 붓질을 한다.그의 혹은 그녀의 붓이 닿은 곳은  한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봄 '그 자체다.또한 그 작품은 사람들 가슴 속에도 '봄'을 만든다.역시 최고의 작가다.

새 봄에 너무 빨리 떠난 분의 책을 읽었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 나오는 그림은 익히 알고 있는 것 들이다.하지만 이 책을 접하면서 '안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여기 나오는 김정희,김홍도,윤두서 선생의 그림은 미술 교과서에도 나오는 그림들이다.그래서 친숙하다.하지만 이 책을 읽을 수 록 나는 이 그림들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만 확인하게 돼었다.아마 이 책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안다'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렸다는 것을 ..세한도에 나무 몇 그루와 집 한 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다'라고 믿고 나머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책으로 또 다른 세상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읽었다 해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그림들과 작품에 담긴 고결한 정신 세계를 전부 이해했다고 하면 어불성설이요 오만이다.마치 글을 모르는 노인이 한글을 깨우치고 난 것과 유사하다.글자를 배운 이들은 대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기뻐한다.이 처럼 옛 그림을 볼 줄만 알았지 '읽지'못했던 내게 이 책은 '읽는 법'이 있다는-즉 새로운 세계- 것을 알려 준 셈이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은 한 가지 그림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오주석 선생은 우선 작품을 그린 화가들의 이야기를 먼저 한다.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 작품에는 작가의 정신 세계가 반영된다.오주석 선생은 특히 우리 문인화에는 선비들의 사상과 실천적 삶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반영된다고 말한다.<세한도>를 바라보면서 드는 그 고적함과 '내유외강'의 힘의 모순적 두 세계는 추사의 맑은 정신 세계가 투영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경지의 것이다.이 책은 그림에 앞서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앞 세운다.그림은 그의 정신 세계와 삶의 가치의 한 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옛 그림을 보녀 그동안 이를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그리고 이 책 이후에 <세한도>에서 추사 김정희가 슬며시 보이기 시작했다.

오주석 선생은 다음으로 작품 탄생의 배경을 옛 문헌들을 꼼꼼히 따져 객관적으로 보여준다.조선의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으로 알려진 <이채>초상의 경우는 마치 탐정 수사를 해나가 듯 <이채>초상과 <이재>초상이 동일한 사람을 그린 작품임을 밝힌다.<세한도>의 경우 추사와 제자 간의 애틋한 마음이 작품 탄생의 배경이 됨을 알고 나니 겨울을 그린 그림에 갑자기 온기가 뿜어져 나온다.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또 어떠한가 그냥 비온 뒤의 인왕산을 그린 그림인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인왕제색도>에는 평생을 함께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쌓아온 한 동무의 죽음을 앞두고 쾌유와 불가항력적인 석별을 준비하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이 내용을 알고 보니 비 갠 뒤의 산 그림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보인다.인왕산 그림 안에 그 두 분이 나누었던 긴 시간이 느껴진다. 평생을 이어온 훈훈한 우정과 믿음이 그림에서 보이니 코 끝이 징해진다.

이 책이 그림 책이기 때문에 회화적인 기법들 역시 빠뜨릴 수 없다.옛 그림의 인문학적 배경 다음에는 항상 회화적 관점에서 이 그림들이 우수한 점을 살펴준다.각 작품이 가진 구도의 안정감은 어디서 발생하는지..예를 들면 <고사 관수도>같은 경우다.오주석 선생은 슬쩍 물을 바라보는 노인을 가려볼 것을 권한다.만약 물을 바라보는 노인이 빠져 있으면 어떻게 돼는지 ...실제로 손가락으로 노인을 가려봤다.정말 깜짝 놀랐다.전혀 다른 그림이 돼어 버렸다.구성의 묘미가 어떤 것인지 알게하는 대목이었다.그 외에도 <세한도> 여백의 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각 봉우리들이 어떠한 기법으로 구성돼어서 <주역>의 음양을 맞추는지...물론 이러한 회화적 기법들이 어떻게 작가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쓰여지는 지도 빼놓지 않는다.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는 주역이 일상화된 작가의 우주관의 집약판이었다.물론 주역의 내용을 모르는 나로써는 그 설명이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주석 선생은 옛 그림을 처음 대하는 초보자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각 장 마다 우리 옛 그림을 읽는 기초적인 방법들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우리 그림을 우상에서 좌하로 봐야한다는 것,여백의 미를 읽는 법,.......등등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은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인문학적 깊이에 깊이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옛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 을 예로 들자.그냥 물을 그렸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오주석 선생은 우리 선조들에게 '물'이 어떤 '인문학적' 위치를 차지했는지 중국 고전과 우리 시가등을 들어서 친절하게 설명한다.그 외에도 책 중간 중간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매화,난초 등의 의미도 다시금 새겨 볼 수 있는 장이 마련돼어 있다.

내가 이 책을 만난 것은 오주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다.이 책을 읽기 전에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다.나는 그저 너무 이른 한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보고 또한 그의 인문학적 깊이와 또 우리 문화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고자 한 그의 큰 뜻을 생각하니 그의 이른 죽음이 애통하기 그지 없다.그래서인지 그가 직접 집필했던 1권이 2권 보다 더욱 애정이 가며 살아 있는 글이란 느낌이 든다.선입관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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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05 14:28   좋아요 0 | URL
저도 오주석 선생님 글을 참 좋아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무릇 저런 글을 쓸 줄 알아야 하겠지요.
쉽고, 쌈박하면서도 친절한 글.
여느 그림책은 조그만 그림 하나 놔두고 주절대지만, 오주석 선생님 책은 부분부분 확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가르쳐 주시는지...

드팀전 2006-04-05 18:21   좋아요 0 | URL
글샘님>맞아요.확대 화면 ..좋았어요.그래도 그림 설명 보랴 그림 보랴 앞뒤로 넘기긴했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