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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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위 쪽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읽어볼래? " 피아노 선생이 물었다.

창 밖에서 비명 소리가 두 차례 들렸다.석양이 엷어지고 있었다.나의 소나티네 소리는 짧고 강한 비명 소리에 흩어졌다.

안 데바레드-나의 어머니-를 그 곳으로 이끈 것은 손톱이 부서질 듯 칠판을 긁는 강렬한 절규였다.그 비명은 천년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를 깨웠다.엉켜버린 핏덩어리 상태로 가슴 속에서 가라앉아 있던 욕망이 깊고 으슥한 숨을 쉬었다. 엉컹퀴처럼 붉은 태양과 느릿 느릿 건너온 바닷바람도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바닷가로 향한 카페에서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나의 어머니 안 데바레드를 본다. 심각함과 호기심에 달뜬 그녀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다.카페 여주인이 돌로 구획된 도로 위에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바라본다.그녀의 시선은 지갑을 주운 사람을 목격하고도 귀찮은 일에 엃히기 싫어 모른 척하는 행인을 닮았다.나는 도로로 난 창을 흘깃 거리며 저녁 놀을 벗삼는다.하지만 내 마음은 카페 안을 행하고 있다. 안 데바레드는 포도주로 점점 얼굴이 저녁 놀을 닮아간다.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이다.

그녀는 나의 피아노레슨이 끝나면 카페로 향했다.그리고 그를 만났다.그녀는 내가 새로운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모래언덕 끝에 있는 거대한 집안에 있을 때처럼 황량한 도시 속에서도 나의 어울림은 겉돌았다. 머릿속은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와 나의 어머니 안 데바레드로 가득했다.그녀의 삶ㄹ은 중대한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사실 그녀의 삶은 포름알데히드 속의 토끼 배아 같았다.부족함은 없지만 또한 열정도 없다.숨을 쉬고 있지만 무의식적 움직임에 다름아니다.마치 잘라 놓은 생선 머리가 잘려진 몸뚱이를 바라보며 아가미를 펄떡거리듯..

 충격적인 살인사건! 살인사건보다 더 날카로운 외침.목련꽃의 알싸함을 모두 앗아가버렸다.그녀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 바뀐 것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녀 속에 내재된 어떤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을까? 바다를 건너온 태양이 불은 열매가 되어 나의 얼굴을 덮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은 그 생각뿐이었다.

때는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맑은 하늘이 도시의 배경이 되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삶이 한번 돌아가서 다시 오지 않는 무엇이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그녀의 삶은 지나친 부러움과 자기 만족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처럼 지루했을 것이다.화창한 햇살과 향기로운 바람도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안개처럼 모호했을 뿐이다.그녀는 그를 만난 것이다.그는 처음부터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보아 왔으며 그녀를 기다려왔다.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그를 찾아낸 것 뿐이다.그 남자 쇼뱅은 철강노동자치고는 섬세한 사람이며 예의를 갖춘 사람이었다.나와 시선이 부딪치는 것을 어색해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 충격적인 살인 사건의 내막을 알고 싶어한다.그는 그 사건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변화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하루 하루 가까와 오는 결말에 대해서.그 둘에게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강렬한 자극은 떠나버린 버스의 뒷모습을 하고 있다.그녀는 어느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 약속을 무시했다.모래언덕을 넘어오는 길에 그녀의 눈가는 젖어있었다.쇼뱅과 그녀는 서로를 확인했던 것 같다.살인 사건의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조르듯이 그녀의 목선에 머물던 그의 시선만으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누구나 자신의 안에 있는 욕망을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모데라코 칸타빌레'의 삶은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그 부드러운 노래가락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같은 것이다.결국 강렬한 자극 역시 노래가락 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다. 그녀와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결말을 예고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쇼뱅은 그녀에게 1분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순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영원의 또다른 이름이다.그녀의 두려움은 그녀의 욕망을 다시 붙들어 맨다.그들은 서로를 죽임으로써 짧았지만 강렬했던 기억을 영원으로 돌린다.마치 살인 사건의 주인공들이 실제 죽음으로 사랑을 이루었듯이.

그녀는 더 이상 카페로 발길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나 역시 피아노 선생에게 가기 위해 그녀와 함께 하지못할 것이다.맑은 날씨가 아무리 이어진다해도..아무리 붉은 태양이 바닷바람을 산호빛에서 아마빛으로 바꾸어 놓더라도... 카페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여주인이 문득 문득 바다 건너를 그리워 할 지라도...

삶의 배경은 또 다시 모데라토 칸타빌레...그 평온한 불안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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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6-04 20:29   좋아요 0 | URL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은, 늘 이상한 무력감을 안겨주곤 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였죠...

드팀전 2006-06-05 09:10   좋아요 0 | URL
다른 소설은 안봐서 모르겠어요.ㅜㅜ 무력감도 삶의 일부일테니.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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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살면서 흑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해외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따로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물론 대학 때 영어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하지만 흑인 선생은 0%였다.그 상황은 영어 조기 교육의 광풍이 불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왜 영어학원에는 흑인이 없을까?  학원장들은 학부모들의 핑계를 대면서 이렇게 말한다.학부모들이 흑인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렇다면 학부모와 학원장들이 좋아하는 영어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대개가 미국출신 금발의 백인 미혼 여선생이다.외국인 학원 선생 중에는 특A급이 바로 이들이다.영어 선생을 뽑는 것인지 헐리우드 영화배우를 뽑는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인은 백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유색인종이다.하지만 우리의 내면 세계는 유색인종임을 거부한다.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백인의 것에 가깝다.근대화 과정에서 백인은 문명의 상징이었다.또한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백인들의 이 이미지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가진 정치,경제,사회의 독보적 영향력으로 인해 세대를 걸쳐 내면화되어왔다.미국 자본주의의 풍요로움과 미국에 대한 열등감은 그들에 대해 동일시하는 감정으로 이어진다.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미국의 중심이라는 WASP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구축했다.이에 반해 흑인은 그 대척점에 있었다.지금 당장이라도 흑인에 대해 떠오르는 단어들을 생각해보면 대개 부정적인 용어들임을 알 수 있다.그나마 몇 몇 운동선수들과 뮤지션 덕에 조금 단어의 수준이 격상되었을 뿐이다.

프란츠 파농은 흑인을 비존재의 영역에 있다고 말한다.그들에게는 단 하나만의 운명이 존재한다.그것은 백인이 되는 것이다.파농은 흑인들이 흑인존재를 인식하지 조차 못하는 상황을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하지만 그는 먼저 이것이 이중적 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먼저 경제적 절차의 소산이고 다음은 열등감의 육화 때문이다.흑인들의 열등감은 우선 언어적 태도의 변화에서 감지된다.언어는 한 문화의 총체를 나타내는 상징이다.식민지에서 프랑스로 건너간 흑인들은 우선 프랑스어 발음에 대해 열등감을 갖는다. 'R자를 들어마시는 앙띨레스 촌닭'이라는 말은 흑인들이 갖고 있는 발음 컴플렉스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불행하게도 영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발음상의 컴플렉스도 이와 유사하다. "L 과 R의 불분명한 구분,P와 F의 혼재,th발음의 곤란함"  영어발음에 대한 한국인의 컴플렉스는 항상 일본인의 발음을 걸고 넘어진다."일본놈들의 '마꾸도나루도 (맥도널드)'" 이를 통해 영어 발음의 컴플렉스를 위장한다.하지만 영어민이 보기엔 '맥도날드'나 '마꾸도나루도' 나 오십보 백보일 터이다. 파농은 웨스터만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흑인들의 열등컴플렉스는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할 흑인 지식인 계층 내부에서 오히려 보다 심각한 형태로 현상되고 있다......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 자신을 유럽인 혹은 유럽인들이 이룩해낸 성과물들과 거의 맞먹는 존재로 상승시키는 착각을 감행한다."

파농은 언어문제에 있어서 백인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들에게 말을 건내는 백인들은 하나 같이 흑인들을 아이 대하듯 한다.이죽거리고,속삭이고,달래고,어르고,속이고.어떤 특정 백인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방식으로 흑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의 수준을 하향조종해 가면서 백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이것이 그들이 흑인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 피부색이 짙은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백인들의 태도를 취한다.현재도 백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파농의 이야기는 결혼과 성의 문제로 넘어간다.파농은 <나는 마르티니크의 여자입니다>라는 책의 몰자아적 태도를 비난하며 흑인들이 가진 맹목적 백인화의 욕구를 비판한다.파농은 결론적으로 흑인에게 탈출구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백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흑인의 집착,백인의 힘에 대한 동경,보호막을 확보하기 위한 흑인의 집념,이것이 흑인의 자아 그 존재와 소유를 결정하는 구성성분이라고 결론짓는다.백인이 된다는 것은 흑인에게 진,선,미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농의 탈식민화 논의의 칼날은 정체성을 상실한 흑인만을 겨누지는 않는다.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모두 신경증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이다.<흑인과 정신병리>의 장에서 파농은 백인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흑인공포증에 대해 설명한다.그 근원에는 흑인들의 자기보다 우월한 성적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파농은 주장한다.외국에서 만든 포르노가 쉬운 예가 되겠다.이것 저것 다양한 판타지가 나오지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매저키스트적 관계이다.또는 거대한 흑인남성과 왜소한 아시아 여성의 관계....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은 본 적이 거의 없다.많이 안봐서 그런지 몰라도....백인에게 흑인의 중심은 성이다.특히 생식기이다.사실 이것은 허위의식일 뿐이다.하지만 백인들은 흑인을 동물=자연의 단계로 파악한다.그 자유분방함과 신체적 강건함등은 백인들에게 흑인들에 대한 성적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흑인의 성적 잠재력에 대한 상상이 공포로 치환되는 것이다.이 공포는 흑인을 더럽고 사악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투사된다.백인들은 이제 흑인이라는 좋은 투사 대상을 찾게 되었다.그들은 그들의 문명화 과정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욕망들을 흑인에게로 전부 투사해버린다.음험함,어둠,죄,사악함,그림자,깊은 심연....사실 그 안에는 가장 비도덕적인 충동과 부끄러운 백인들의 욕망이 들어있음에도 말이다.흑인 공포증에서 시작된 백인들의 신경증은 결국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흑인들의 대상으로 배출함으로서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책 서두에서 흑백간의 악순환을 풀 고리를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그 고리는 백인의 우월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흑인정체성과 흑인 역사의 위대성을 밝혀내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파농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항담론으로 과거의 역사,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흑백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담론의 반복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파농이 정치적으로 흑백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제시하지는 않는다.그건 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는 백인의 머리로 세상을 사는 흑인들에게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말을 던진다.

"내가 아는 한가지는 이것이다.타자에게 인간의 행동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는 것말이다.그것 뿐이다.한가지 의무도 있다.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말이다.....

...나 유색인으로서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인간,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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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5-30 11:51   좋아요 0 | URL
프란츠 파농 꼭 한번 읽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접해봐야 겠습니다. 드팀전님 요즘 건강하시죠? ^^

드팀전 2006-05-30 12:58   좋아요 0 | URL
아..예.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엔 뭔가 좀 그러하네요.어쨋거나 건강은 합니다.ㅎㅎ 약간은 의무감 같은 걸 가지고 읽었습니다.책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문체가 좀 왔다 갔다합니다.논리적 서술이다가 또 흥분된 주장이다가...거기에 잘 모르는 흑인 문학가와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번역도 예쁘다는 생각은 안들더군요.어떤 님들 처럼 원문과의 비교를 해본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걸리곤 합니다.'네그리튀드'나 '문투' 같은 낯선 단어들도 나오는데 네이버에 검색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이 책은 다른 번역본이 언젠가 나오주면 더 좋을 듯해요.

보르헤스 2006-05-30 17:5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언제나 번역이 문제군요 ^^

코코몽 2007-05-09 00:11   좋아요 0 | URL
정말로 저도 읽는 데 고생 좀 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여서요...ㅎ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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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쯤 일이다.함께 일하는 동료 여직원이 점심 시간에 무언가 열심히 보고 있었다.무슨 책을 보나 하고 물어봤다. "뭐 읽어?.... "  " 아...이거요. <아내가 결혼했다>에요. 이 책보셨어요?"  .... "아니" . 그녀는 갑자기 신입사원 만난 보험아줌마 같은 표정을 하더니 "이거 정말 재밌거든요.정말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요.진짜 최고예요 최고.."  퉁퉁한 그녀의 얼굴이 약간 흥분되어 벌게졌다.(그런데 어쩌나 ....다 읽고난 지금 그녀가 최고라고 하던 이 책에 별3개도 겨우 주었으니...용서하시길)

그녀의 흥분된 목소리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 들렸다. '이사람아...도대체 뭐하는거야.이런 재미있는 책도 아직 안보고.어서 보란 말이야...매일 제목은 그럴싸 해보이지만 뜻도 모를 이상한 책들 들고 다니지 말고...뭐하니 ...진짜 죽인다니까..어이구" .... (이런걸 '자격지심'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다 대고...지가 책을 보면 얼마나 본다고 ..최고니 뭐니 흥분해 가지고..난리부르스를 떨고 있어.'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녀의 짧은 흥분과 자랑은 내게 그렇게만 들렸다. 사르트르가 그랬다나.'베스트셀러는 모두가 보기때문에 볼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그에 반해 나의 '자격지심'은 내게 이런 명령을 내린 셈이다. "대중의 취향에 반하라.그래야 상대적으로 네 독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의 알은 체가 이 책에 정나미를 떨어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 작은 에피소드 후에 이 책은 바다 건너 대마도 땅 모래밭에 묻혔다.그러다 몇 주가 지났다.그날은 회사 자료실에 들렀다.매일 허접한 책들만 들여오는 자료실.언제나 대여 1순위는 해리포터,김진명류 소설..... 최근에는 어떤 책들이 들어와 있나 쭈욱 살펴봤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1억 당첨금을 받았다며 당당히 서고에 꽂혀 있었다.마치 자기의 몸값이 1억인양 당당하게 말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 대한 그녀의 흥분된 목소리가 갑자기 환청으로 들려오는 듯 했다.고개를 돌리고 무시하며 지나갔다.에이..그런데 미운 것에도 호기심은 생기는 법.결국 다시 방향을 돌려  이 책을 집었다. '도대체...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난리야'  몇 장을 넘겼다.그 몇 장의 책장 넘김이 결국 이 책을 다 보게 만든 이유다.소설의 이야기...주인공들의 캐릭터...  몇 장 넘기는 동안 그걸 어떻게 살펴볼 수 있겠는가.나의 시선을 잡은 것은  FC바로셀로나의 이야기였다.FC바르셀로나의 구단 모토...'클럽,그 이상이 되자'.....   다른 장을 마구 넘겼다.지네딘 지단의 이야기,유로 2004의 그리스 우승 이야기,90년대 맨체스터의 아이콘 칸토나 이야기...등등 

이 책을 읽게 만든 건 1억원 수장작이란 후광도 아니고 흥분된 직장동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그것은 단지 '축구'때문이었다.

축구가 도래하기까지 좀 심심했다.마이클 조던이 빠진 NBA는 앙꼬 빠진 단팥빵이었다.차세대 조던들의 승부도 물론 잠시 볼만은 했다.앨런 아이버슨,코비 브라이언트,빈스 카터,포지션은 다르지만 팀 던컨,케빈 가넷...그리고 가장 최근에 르브론 제임스까지...하지만 그 누구도 조던이 가진  아우라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NBA가 지겨워 질 즈음 눈을 돌린 것이 유럽축구였다.때마침 PS의 '위닝'시리즈가 인기가 있던 터라 게임과 축구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은 결국 소설의 이야기보다 축구 이야기였다.인터넷에도 나와있는 이야기들이지만 지면으로 만나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거기에 소설 속 상황을 축구와 비유하며 인생을 축구의 축소판으로 만드는 작가의 재기어림이 좋았다. 아내의 도발적 실험에 대해 결국 끌려가는 주인공.이혼서류는 만들지만 결국 접수하진 못한다.그리고 이어지는 라이언 긱스의 발언 "축구는 상호비방과 모욕으로 가득한 잔인한 경기이며 나는 분명히 그 주범 중 하나일 거예요"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을 부정선수라고 비유한다.그러면서 하는말...'이게 축구였다면 진작 부정선수 개입으로 인한 몰수 게임이 선언되었을 것이다.부정선수로 인한 몰수 게임의 공식 스코어는 3대 0." ...

... 1986년 월드컵 마라도나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하는 해이다. 어느 방송 해설자의 말이 이어진다. "축구란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겁니다.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깬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도 이어진다.'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둘의 가족이 얽히는 것이다.나는 결혼의 개념을 깬 최초의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그리하여 사는게 참 힘들다.'...심각한 상황에서 매 장 끝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축구비유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즐겁게 만드는 요소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스토리의 도발성과 축구와의 비유를 뺀다면 그다지 인상적인 것이 많지는 않다.제도권 방송의 드라마 소재가 되긴 힘들겠지만-<사랑과 전쟁>쯤은 할 수 도 있겠다-딱 60분짜리 분량의 드라마같다.재기 넘치는 문장,스피디한 사건 전개,만화적인 댓글 사용,(왜 있지 않은가? 슬램덩크를 보면 진지한 강백호가 갑자기 웃기는 강백호로 바뀌는 컷 같은 것들)...이 소설에서 빼어난 풍경의 묘사라든가 심리적 뒤트림의 표현이라든가 뭐 이런거 찾지 않는게 낫다.그러니 미니시리즈는 못되고 <사랑과 전쟁> 정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은 문장에 엽기적(?) 사건이 진행되어 가다보니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가독성이 뛰어나다.또한 빠르다. 눈도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게 만든다.이 부분에 촛점을 맞춘다면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소설이긴하다.(하지만 아무리 재미있어도 <미션 임파서블3>가 올해 아카데미에서 좋은 결과를 얻진 못할게고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수는 없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결혼제도와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일부일처제와 4인기준 가족이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읽는 이에 따라 이 견해가 충격적이거나 혁명적인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런데 내게는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물론 내가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실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학문적으로 결혼이란 제도와 일부일처제의 모순등에 대해서는 수 백권의 책이 나와있다.또한 역사적으로 가족이란 것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는 유럽에 방직기 돌던 시절부터 논의되어 왔다.그러니 일부일처제의 부당함에 대한 여자주인공 인아의 항변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여기 저기 가족제도 관련 책의 어떤 부분을  인용하는 투의 인아의 논리정연함은 작위적이기만 했다.대게 일부일처제란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집에 책이 많은 사람들이다.인아와 재경이 그렇듯이.그 책의 몇 장이 인아의 입을 통해 들린다.인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혀 입체적이지도 못하고 내면의 모습을 그려지지도 못한다.(남편의 1인칭 시점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저 축구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결혼제도에 반대하는 '자유'라는 이름을 건 마네킹같다.(대학가에 주인장이 좀 지적인 카페에 밤 늦게 가면 이런 캐릭터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만약 주인공 덕훈이 내 친구 였다면 머리통을 한대 쥐어 박았을 듯하다.도대체 축구 팬이면 축구 팬으로 머물러야지 왜 레알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뛰어드냐는 말이다.플레이는 선수가 하는 것이지 팬이 하는 것은 아니다.12번째 선수는 그라운드에 들어가면 바로 훌리건 취급당해서 끌려나오는 것이다.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별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게 두어야 한다.지구별 사람이 거기에 왜 개념없이 뛰어드는지....(어! 그런데 난 어느별에서 왔지?)...그러니 혼자 애가 끓는다.주인공 덕훈이 인아를 사랑하게 된 건 '축구'와 '섹스' 때문이다.축구는 결국 레알이 이기든 바르셀로나가 이기든 현실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덕훈도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된다.결국 인아를 선택하고 지키려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섹스'때문이다.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는 것...그것만으로도 결혼은 된다.하지만 문어가 고등어랑 섹스하고 만족도가 높았다고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연애질을 하는거야 모르겠지만.여기에 시간이 지나며 제3의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그 다음부터는 '사랑'이란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작가는 열심히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재경의 등장 이후 덕훈에게 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쟁패'이다.질투심에서 비롯된 승부근성.어떻게든 원래 내 것을 찾아오겠다는  그래서 이 승부에서 이겨야겠다는.(결국 이기지도 못한다.처음부터 이길 수 도 없었고 원래 자기의 것도 아니었다.)

이 상태가 되면 미안하지만 '사랑은 이제 끝'이다.승부만 남았다.(대게 단맛 쓴맛 못 본 남자들이 '승부'와 '사랑'을 혼동한다.그러니 스토커도 나오는거고) 주인공 덕훈에겐 사랑과 결혼에 대한 아무런 철학이 없다.반면 그것이 반사회적일 지라도 인아와 재경에게는 사랑에 대한 철학이 있다. 이런 싸움은 처음부터 하는게 아니다.내가 그의 친구였다면 싸움에 발을 들여놓치 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을 버티기며 익숙해지는게 쿨한게 아니다.돼는 것과 안돼는 것에 자기중심이 있는게 오히려 쿨한거다.접을 때 접고 펼칠때 펼치는게 병법의 기본이며 또한 축구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작가는 결혼제도와 일부일처제의 문제에 대해 알리고 싶었나 보다.하지만 내게는 주인공 덕환의 비주체적 사랑만이 보인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자신의 결혼에 대해 아무런 철학이 없다.끌려 다니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지는 다부일처제.그것마저도 그는 빌미를 두고 선택한다.일부일처든 다부일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지들 좋으면 된다(그래도 책 속에서 나오는 인아의 주장은 가족제도관련 책을 그대로 인용하는 진부함을 면할 길이 없다) 문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주체적 선택인가 아니면 비주체적 추종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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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5-28 19:09   좋아요 0 | URL
음....축구 얘기가 나와서 월드컵 두건을 주나 보네요. 왜 뜬금 없이 책 사은품으로 월드컵 두건을 주나 했어요.ㅎㅎㅎ

비유가 압권인데요! "신입사원 만난 보험 아줌마" 음하하하. 나두 신입사원 때 많이 당했는데...중앙일보 뉴스위크도 어리부리해서 구독하고(아...돈 아까버라), 보험도 들고...ㅎㅎㅎ

전 사실 <카스테라>도 단편 몇개를 제외하면 쩜 별로였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아내가 결혼했다>가 읽고 싶어 지네요.^^

드팀전 2006-05-29 08:54   좋아요 0 | URL
전 두건 없는데...이 책은 서울가는 길에 역 서점에서 샀어요.올라 갈 때 절반보고 내려올 때 절반보고...ㅎㅎ 책 값이 좀 비싼듯..서점에서 사서 그렇게 느꼈나.
 
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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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교육의 아방궁이다.아이들의 교육과 관련된 것이라면 없는게 없을 정도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포항 제철소 화덕의 불꽃 처럼 활활 타오르는게 교육시장이다. 불황을 모른다.얼마나 활활 타오르는지 늦은 밤에도 각종 학원의 불은 70년대 섬유공장처럼 전등을 밝히고 있다.밤 10시쯤 학원가가 몰려있는 곳을 가본 적이 있으신가? 대로변은 주차장이다.학원의 승합차들이  뱀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학원가 주변의 네거리는 밤 10시나 11시에 도로 정체가 생긴다.우스개 소리가 아니다.학원에서 몰려나오는 파김치 같은 아이들을 봉고차는 하나 둘 검은 입 속으로 빨아들인다.신호쯤은 미래의 동량을 위해 비웃어 버리는 학원 봉고차... 봉고차는 반쯤 감긴 눈을 한 아이들을 아파트 앞에 하나씩 퇘퇘거리며 뱉어놓는다.그리고는 다음 목에 걸린 공부 못하는 돌을 뱉어낼 심산으로 휭하니 달려간다.

이 책 은 제목을 잘 뽑았다.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바보만들기>.저자 존 테일러 개토는 뉴욕에서 30년 가까이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교육제도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주적이라고 선언한다.한나 아렌트는 말을 인용하면 조금 더 일반화 시킬 수 있다..."전체주의 교육의 목적은 신념을 키워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이라도 만들어 낼 능력을 박멸하는 데 있다"  존 테일러 개토 역시 의무교육제도에 바탕을 둔 현재의 공교육이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을 처음부터 근절시키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아이들의 창의력을 앗아 가서 그 자리에 채우는 것은 무었일까? 여러가지 다른 말로 설명가능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정부의 생각','국가의 생각'이다.표준화된 교과 과정,표준화된 교과서,표준화된 교사 자격,표준화 된 시험제도...이러한 온갖 종류의 표준화는 기존 사회가 원하는 규격화된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이렇게 규격화된 인간이 나오면 끌고 다니기 쉽다.하고픈 대로 해도 다 그런가 보다 한다.의문을 갖지 않는 인간형을 제조하기 때문에 현 사회 체제는 균열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그냥 가는 거다..쭈욱.

 저자는 미국적 공교유의 근원이 프러시아 교육제도에 있다고 밝힌다.(미국,일본이 악질적으로 이종교배된 대-한민국 교육은 울트라 슈퍼 프러시아적 교육이다).프러시아는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중앙집권화된 교육제도를 추진한다.아이들을 명령에 순응하는 민족의 기계로 만들어야 열강의 쟁패에서 나아가 싸울수 있는 자원이 되는 것이다.이것이 의무교육이란 형태로 등장한다. 1819년 프러시아의 중앙집권화 학교가 만들어 내고자 했던 인간형은 아래와 같다.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정부의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렇게 시작된 중앙집권화된 의무교육은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이성의 능력을 마비시켜 버렸다.

중앙집중화된 의무교육의 폐해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다.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왜냐고? 가장 큰 제약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국가가 학교처럼 이용하기 좋은 기관을 내놓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둘째로 교육이 '국가독점 사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미국의 교육부는 국방부 다음으로 가장 큰 계약체결 기관이다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더 쉽게 말하면 국가의 교육독점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이미 이 체제 속에 너무 많아서 손을 댈 수도 없다는 말이다.교육공무원,학교 선생,학교 교재상,급식업체,교과서 제작자...등등 만약 교육에 대해서 국가의 권력을 조금만 분산시켜도 이들의 이익은 처참하게 훼손된다.이들의 존재는 교육이 절대 국가독점에서 무너질 수 없는 경제적 필요조건이 된다.

저자가 말하는 교육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가장 큰 핵심은 교육을 학교중심에서 가정중심으로 옮기자는 것이다.물론 가정이라는 것이 각 개인의 가정만을 뜻하지는 않는다.학교 이외의 모든 것이 가정으로 상징된다.학교를 제외한 다른 대안적 교육의 길은 너무나 다양하다는 말이다.이는 '교육의 자유시장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그러나 한가지 오해하지 말기를.여기서 말하는 '자유시장화'가 학원장들이 말하는 사교육의 자유시장화는 절대 아니다.그는 현재의 학교 교육이 진정한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전제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진정한 교육과도 먼 학교 공교육이 교육을 독점하고 거기서 배운 부모세대와 그리고 자녀세대의 의식까지 점령해버렸다는 것이 그의 현실인식이다.공교육의 교육독점말고도 다른 다양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교육의 경쟁을 주장하는 것이다.그는 학교가 축소되어야 하지 확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방과 후 학교 같은 것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들을 밤새도록 학교의 감시아래 두는 몹쓸 짓일 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지역사회와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의 교육이다.역사적으로 이러한 아이디어는 미국 건국 초기의 조합교회주의에서 출발한다.마을 주민들이 자율적 연대감에 바탕을 두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여기에는 마을의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다.아이들은 이 속에서 자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지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다양한 삶의 층위에서 얻어진 지식과 노동의 경험 속에서 생긴 앎을 삶속에 투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교사자격제도' 폐지론자 임을 알아야한다.그는 자격증을 가진 교육전문가만이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장 큰 사기라는 것이다.진정한 교육은 학교라는 건물 안에서 정부가 정해준 교과서를 가지고 정부의 시험을 통과한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존 테일러 개토가 주장하는 '교육권을 학교에서 가정으로..'의 주장에.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대안교육 모델중  홈스쿨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5000가구의 홈스쿨러가 있다.이들이 받는 가장 큰 오해는 '돈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물론 경제적 토대를 무시할 수 없다.하지만 하나씩 따져 보면 그것도 일종의 신화다. 일단 홈스쿨러들은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욕심이 없다.물론 홈스쿨러들도 종류가 있다.아이가 영재라 믿고 빨리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홈스쿨링하는 부류,아이가 제도권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학교폭력에 의해 어쩔수 없이 홈스쿨러가 되는 경우,마지막으로 아이와 부모의 신념에 의해서인 경우....처음 경우는 목적을 달성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대안교육으로서의 모습은 아니다.두번째 경우는 1-2년후 홈스쿨링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대안학교를 찾는다고 한다.마지막이 그나마 성공가능성이 높은 경우다.이들의 부모들은 일단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치 않는다.' (나는 이 말 저 말 다 빼고 이게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대신 이 부모들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다. 좋은 대학에 가길 원하지 않으니 무리하게 학원 대여섯개 보내는 사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그러니 돈이 무지하게 많이들거라는 생각도 조금은 왜곡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떤 이들은 '그거 다 부모 욕심 아니야'라고 한다. 딱 등가려운대 파리 앉아주는 질문이다. 대안교육이나 홈스쿨링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들의 선택과 합의 이다.내가 개인적으로 학교교육이 질려서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을 하고 싶어도 아이의 자발적 선택이 없으면 결국 실패한다.대부분 성공하는 대안 교육은 아이의 자발적 동의와 아이의 구체적 계획이 전제된다. 결국 부모의 욕심때문에 대안교육 한다는 주장은 대안교육의 주장은 맞지만 나는 좀 걱정되고 자신없어서 못 한다고 하는게 오히려 솔직하다...내지는 내 아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이 땅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든가... 

TV나 신문에서 그런 대안교육 기사를 보다 옆에서 '그거 다 부모욕심 아니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라.

 "네가 아이들 학원 서너개 씩 보내는 것은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니 아니면 다른 비슷한 부모들도 그러니까 그러니?  내가 보기엔 다른 사람이 안하면 너도 그렇게 아이들 혹사시키면서 안할거 같은데..  그렇지? (그럼 대개 그렇다고 한다.)  ..결국 너는 다른 사람의 욕심에 맞추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구나. 그것보다는 저렇게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의 욕심에 맞추는게 훨씬 나은 거 아니니. 내 아이를 다른 부모 욕심에 맞춰서 키우다니..."

<바보만들기>가 주장하는 교육 변화는 기존 교육의 틀을 전면 부정한다.제목에서 말하듯이 '교육이 바보나 만드는데 그곳에 왜 보내야 하는가...' 존 테일러 개토의 주장은 분명히 역사적,사회적으로 공교육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하지만 그의 주장의 과격함 만큼이나 현실적합성에서 우려되는 부분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의무교육제도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접근은 존 테일러 개토의 주장이 맞다.그 반면에 의무교육 실시가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국가의 문맹률을 비롯해서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여준 공도 있다.(물론 교육수준이 높아졌다고 삶이 질이 좋아졌냐의 문제는 다르지만) 또한 그가 제시하는 공동체적 교육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근대의 시스템은 마치 공기와도 같다.내가 살아 있는 곳은 근대 시스템이 미치치 않는 곳이 없다.그만큼 촘촘하고 강고하겨 얾혀있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 이상하게 전근대적 출발을 두고 있는 것은 -이해는 가지만- '좋았던 옛날' 이란 신화에 기대는 듯하다.중국인들이 삶의 이상향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 요순시대에서 찾듯 존 테일러 개토의 대안 역시 시민 자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미국 건국 초기에서 찾고 있다.아이디어의 설명을 위해서라면 이해가 가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그러나 이는 현저하게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역사적 현재성을 무시하고 접근하는 처사이다.물론 개인적 대안으로서의 자율공동체 교육이나 홈스쿨링 등에는 동의한다.나 역시 아주 심각하게 홈스쿨링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내가 홈스쿨링을 지지하는 것과 사회적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기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나 혼자 아이 잘 키우기 위해 홈스쿨링 할 수 있다.'나는 좀 달라.나의 모습을 보고 좀 변화들 하라구' 이것도 교육 변혁의 한 길이라고 믿으며 그만이다.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내가 대안학교를 찾고 홈스쿨링을 하는 것은 개인적 실천의 영역일 뿐이다.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훨씬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현재의 왜곡된 교육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가에 생각이 이어져야 진정한 교육변혁의 출발이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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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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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공부의 덕목을  "쇄소응대"라고 했다". 비들고 청소하며 손님맞을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이다.즉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공부보다 일상에서 부터 자신의 마음을 닦아 밝은 덕을 찾는 것이 으뜸이라는 뜻이다."쇄소응대의 도'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어떻게 바른 정치를 이야기하고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남명 선생은 그래서 조선 철학사의 가장 큰 논쟁이라고하는 '이기논쟁'을 쓸데없는 관념논쟁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또한 이 논쟁에 뛰어든 최고의 유학자 퇴계를 은근히 질책하기도 했다.남명의 시각으로 보자면 부질없는  논쟁에 퇴계가 뛰어듦으로서 논쟁에 불길을 확 지펴버린 것이다.이러한 남명은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다만 이제 실천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평생을 의와 실천궁행에 힘쓴 노학자의 마지막 가르침치고 너무 단순해보인다.하지만 그 안에 그가 가르친 모든 철학이 들어 있기도 하다.

<대학>은 남명 조식의 공부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던 책이다.영남 우도 최고의 유학자라는 남명 역시 평생 <대학>공부를 하면서도 그 뜻을 전부 알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책했다.그런데 사서삼경을 이제야 겨우 다 읽어 본 내가 어찌 <대학><중용>의 깊음을 이해하겠는가...더듬 더듬 한자 따라가다 한글을 따라가다 하면서 어찌 어찌 읽기는 했다.하지만 알 수 없다.그나마 이 책의 저자가 얄팍한 한마디 응원을 해주어서 기죽지는 않는다. "반드시 대청봉을 밟아야 설악산에 들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중용>이 설악산이라면 아마 나의 이번 일독은 설악산 매표소에서 표 끊은 정도일게다.표 끊으니 멀리 산봉우리는 보인다.

<대학>의 첫구절은 대학이 말하는 도를 이야기한다. '대학의 길은 맑은 마음을 맑히고 사람들과 하나 되고 지극한 선에 머무는데 있다'  흔히 말하는 대학의 삼덕목이라는 명명덕,친민,지어선 이다.마음은 원래 맑은 것이다.하지만 마음에는 때가 끼어서 그 맑음을 유지하지 못한다.명명덕은 맑고 맑은 그 마음을 얻으라는 것이다.친민은 그렇게 맑은 마음이 나 혼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그렇게 하여 아무런 사욕이 없는 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대략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더 깊은 뜻이 있겠지만 <대학>의 내용을 전부 정리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한 고로 이쯤에서 말자.<대학>에는 유명한 말이 또 하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신문칼럼에서 정치인들이 집안 단속못하고 일가친적 비리가 터져나오면 기자들과 칼럼 교수님들이 많이 예를 드는 문장이다. 집 단속도 못하면서 무슨 국정운영이냐는 식의 감정에 호소하는 기사들로 끝을 맺기마련이다.하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일의 순서를 굳이 밝혀서 그런 것이지 반드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신영복 교수 역시 <강의>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관계론 차원에서 고전을 파악했기때문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역시 각 관계의 연쇄로 보고 있다.단계론적 완성으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훨씬 옳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물론 대학은 일의 순서를 강조한다.본과 말이 전도되어서는 지극한 하늘의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본과 말은 일머리 순서로 볼 수도 있지만 핵심과 주변으로 볼 수도 있다.주변이라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나무에 비유하여 본이되는 것은 뿌리이고 가지와 과일은 말이된다. <대학>은 이 순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뿐 어디에 무조건 본이 더 큰 비중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치우친 나는그래도 본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실제 삶의 양상에서 나타나는 일들은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섞여있다.그래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기가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대학>에서도 강조하는 '격물치지'가 필요하다.'격물'은 사물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에 가서 닿는 다는 말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깊은 관찰과 응시가 필요하다.그러면 사물의 본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써 본은 의외로 간단할 때가 많다.핵심은 심플하다는 것이다.평택 대추리... 보상이 얼마고 누가 누구를 때렸고 한미관계의 역할이 어떻고....다 말에 해당한다.사람 사는 땅에서 그 고향 사람이 농사 짓고 싶다는 것이 본이다.그 사람들에게 돈 몇 억 주고 나간다고 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음이 본이다.미국이 한반도에서 언젠가는 나가야 하는게 본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된다.하지만 이 땅은 본을 잃은지 오래.... 이민가고 싶게 만든다.

<중용>은 사실 <대학>보다 훨씬 이해가 안된다.중용을 중간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런 치우치지 않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이현주 목사의 말을 빌자면 <중용>의 중은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겉에 있어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경험되는 용과 두루 융통되는 것이라고 한다.무슨 말인지 문맥도 어색한게 아리송하다.그나마 뒤에 설명은 조금 낫다.중은 천이요 용은 인이다.즉 중용은 하늘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다.중용 일기 첫장부터 만만치가 않다.이 목사는 계속 말한다. 중과 용의 도를 이어주는 것이 성이다.'성을 모르고는 중용을 안다고 할 수 없다' ......

문제는 <중용>을 덕지 덕지 겨우 읽었는데....'성'에 대해 감이 안온다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성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그 '성'과 '경' 할 때 그 '성'이다.그 때나 지금이나 '성'은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고 중언부언하는 개념이다.유학에 여기 저기서 '성'은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걸로 안다.개 중에는 그런가 보다 하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건 이게 뭐야 하는 것도 있다...... 아....쓰면서도 <중용>에서 말한 바를 채 10%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 하다.이 <중용>이 중간 간다는 중용은 아니란 것 하나는 확실하게 안다..그 중간가는 중용에 대해 이현주 목사의 명쾌한 답은 인상적이어서 자주 써먹을 수 있을 듯하다.'집기양단'이란 말을 설명하면서 든 예이다. '집기양단'은 양쪽 끝을 잡는다는 말이다.즉 어디에 치우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의 중간-중용과 다른-즉 평등에 대한 빛나는 예가 시작된다. 대략 이런이야기다.

여기 1미터짜리 막대기 자가 있다.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눈금에서 100까지 있다.양 쪽 끝을 동시에 들어올리는 길은 50에을 잡아서 끌어올리는 것이다.무게중심이니까....만일 그 막대기가 한 쪽이 굵고 한 쪽이 가늘다면 굵은 쪽으로 치우쳐야 중심을 잡을 수 있다...(야구 방망이 생각하면 되겠다) 따라서 겉보기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실제로 중심을 바로 잡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가서 사회적 문제에 기계적 중립의 예를 들면서 어줍지 않은 객관 객관,중립 중립...이런 이야기 할 때 이 예를 써먹을 수 있다.보수언론들은 늘 한겨레나 민중언론들이 한쪽에 치우치고 자신들이 중립,객관이라고 이야기한다.또한 이에 쇄뇌된 인간들 역시 그게 중립이고 객관이라고 믿는다.야구방망이 무게중심론이 나의 중립이요 나의 객관이다.

공자 역시 중용의 가르침을 한달 이상 이어가기 힘들다고 했다.나 같은 범인은 그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다.그래도 이제 첫 술이니까 과욕 부리지 않기로 했다.

이현주 목사 이야기도 마지막으로 잠깐해야겠다.일단 범종교적으로 고전을 접근하는 방법이 마음에 든다.내가 비록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좀 부정적이긴 하지만 그 가르침이야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이 목사는 대학중용의 도를 이야기하면서 성경 구절을 예로 들어 그 가르침이 서로 소통함을 말한다.딱딱한 의고투적인 본문보다 어떨 때는 성경 내용이  의미를 명쾌하게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하지만 비기독교의 눈에 너무 자주 등장하는 성경 이야기가 원래의 의미를 간섭할 수 도 있다는 의혹이 생기기도 한다.다음 번에 <대학><중용>을 읽을 때는 다른 책을 고를 생각이다.이번은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도 훌륭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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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5-18 23:33   좋아요 0 | URL
대학의 명명덕, 친민, 지어지선과 중용과 격물치지는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증득으로 알아야 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도덕경의 '무위' 하나를 이해하는데 일생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좁쌀 하나 이해하는데 일생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조식 선생님이 퇴계 선생님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섣부른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의 치밀한 독서력으로 보건대...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논리로서는 아무리해도 닿을 수 없는 개념들이 그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기론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에 대한 평가는 한토막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을 만들었던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고전을 접할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백번 천번 읽어도 그 뜻에는 천리 만리 떨어진 결론밖에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공자는 중용의 가르침을 한달 이상 이어가기 힘들다고 했을까?
과연 공자가 마음으로 검증하는 중용은 무엇인가?
범인이라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마음으로 미리 기죽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도 하지 않으므로 길은 우리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
님께서 인생의 경험으로든 마음 속의 공부로든 언젠가 이 말들을 마음에서 체득할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분명히 새롭게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청객이 말이 길었습니다.

드팀전 2006-05-19 08:45   좋아요 0 | URL
불청객이라니요.^^ 사사삼경과 불경,내지는 성경이 논리로 접근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은 대학은 졸업해서 압니다.그 책들이 가진 경지를 알기에 단 한줄 이해하고도 이해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거지요.그리고 현실에서의 관철에 대해 부끄러운바가 있기때문에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구요.마음공부에 대해 백안시한다고 생각치는 마십시오.저 역시 전인격적 인간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불평등이 해소되면 -또 해소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그 일을 꾸리고 누리는 사람들의 순정한 마음임을 모르지도 않습니다.하지만 마음공부는 내면의 덕을 이루고 현실의 다양함에 적용해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그게 아니라면 마음공부는 자칫 개인적 안분지족의 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장일순 선생은 제가 정말 따르고 싶은 분인데요.그분이 노자를 읽고 도를 깨우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그 도를 바탕으로 함께 사는 일에 골몰하셨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선택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남명의 공부도 퇴계의 공부도 모자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듯이...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가에 대해 생각이 달랐겠지요....님의 길과 저의 길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함께 사는 세상에 더 못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언젠가 만나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