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들의 외교사 - 먼로주의에서 부시 독트린까지 미국의 외교전략
김봉중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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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들의 외교사>는 미국 대통령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펼친 외교전략을 둘러 볼 수 있는 책이다.미국 국내 문제까지 두루 다룬 미국사 책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일반적인 미국통사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지는 사건들이 여기서는 외교문제와 관련된 배경으로 간략하게 취급된다.오히려 우리에게 낯선 제 2의 독립전쟁이라고 할 만한 1812년 전쟁,제국으로의 첫발을 내디딘 스페인과의 1898년 전쟁 등이 훨씬 비중있게 다루어진다.사실 몇 권의 책을 통해 미국사에 대해 점검하면서도 이러한 전쟁이 가진 미국 외교사적 중요성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00사건 이후 미국은 이렇게 변했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그 책 안에서만 효용성을 갖는 문장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햇던 미국 외교이론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그동안 외교적 사건이 갖는 역사적의미와 세계사적 의미를 연속성 차원에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카우보이들의 세계사>는  미국의 대외관계 변화를 길지 않은 글 속에서 한 눈에 짚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책의 수준  역시 국사교과서 수준이다.나같은 일반인들이 읽는데도 전혀 부담이 없다.그러나 교과서적으로 씌여졌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미국 외교사를 전체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할 때는 장점이 된다.하지만 우리 국사 교과서가 가진 가치문제에 불만을 느낀다면 이 책이 가진 교과서적 객관시각이 아쉽기도 하다.교과서적 객관 시각이라는 것은 결국 가치문제를 배제하고 결과 중심적으로 역사를 서술해 나가게 된다. 교과서 시각에는 정책 집행 주체의 시각만이 존재할 뿐이다.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장은 한줄로 요약된다.'원주민의 반발이 있었다...' 한 권의 짧은 역사책 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임을 안다.그러나 '죽음'의 '통계' 숫자로 남는 미국의 해외파병 등의 문제에 '통계' 보다 '죽음'에 시각을 맞추는 비학자적 시각은 학자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건 지 모르겠다.이 책을 읽다보면 짧은 서술 속에 너무 많은 가치 문제들이 그냥 휙휙 지나가는 느낌을 받게된다.책이 읽기 쉽다보니 그 속도에 맞추다가 그 역사가 내포하는 가치문제마저 휙휙 빠져 나가 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경계하게 된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외교과정에 발생하는 미국 내 여론이나 세계의 여론이라는 것도 의심스러울때가 있다.예를 들어 클린턴 정부의  '경제 외교' 결과 추진된 NAFTA에 대한 멕시코와 미국내 여론을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 부시 행정부가 기본적으로 클린턴의 외교정책을 답습했던 가장 좋은 본보기는 NAFTA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와 지원이었다.NAFTA덕에 미국은 물론이고 멕시코,캐나다에서 고용이 늘었으며 특히 멕시코의 생활수준 향상은 곧 바로 정치적 안정으로 이어졌다."

멕시코 정부가 밝힌 거시경제 자료를 토대로 두고 보면 멕시코인들이 NAFTA의 수혜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한미FTA 과정에서 밝혀지는 멕시코의 실정은 저자가 밝히고 있는 입장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NAFTA 12년동안 멕시코의 실업률은 3.6%로 통계상보면 안정되어 보인다.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취업한 사람 가운데 70%가 비정규, 임시직이다.1993년을 100으로 했을때  제조업 1인당 실질임금은 73 수준이다.농민 130만명이 삶터를 잃었고 어린이 노숙자가 10만명을 넘는다.멕시코의 대표작물인 옥수수,그리고 옥수수로 만든 대표음식인 토르티아의 가격은 무려 700% 올랐다.캐나다...캐나다는 미국 다국적기업의 기업소송에 걸려 공공부문이 흔들리고 있다.북아메리카에 있지만 토리주의적 전통으로 복지에 대해 유럽식 스타일을 따라온 캐나다는 NAFTA 이후 환경,노동 분야에서 특히 미국의 압박을 받고 있다. FTA를 논하는 책은 아니지만 교과서적인 위의 저런 인용이 어떤 연구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럽다.그저 교과서적으로 간략하게 쓰기 위해서 였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카우보이들의 외교사>는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퇴임사로 부터 시작한다.이때부터 미국 외교의 주된 축이 되는 것은 "고립주의"이다.고립주의는 말처럼 미국이 여기 저기로 부터 관여받지도 않으며 관여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다.염두에 둔 것은 당연히 유럽이다.당시 미국은 신생독립국이었고 상대적으로 유럽대륙에 비해 힘이 약했다.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썩은 유럽으로 부터 미국의 정신을 보호하고자 '고립주의'를 미국 외교의 전통으로 구축하려고 애썻다. 고립주의의 전통이 가장 세련되게 구사된 것이 1823년의 먼로주의이다.먼로주의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개입을 금지한다는 선언이었다.먼로주의는 미국의 팽창을 막으려는 유럽의 외교전에 대한 현명한 대응이자 실제적으로는 국내용 전략이었다.먼로독트린은  당시 국무장관이자 뒤에 대통령이 되는  존 퀸시 애덤스의 작품이었다.먼로 독트린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되었다.외교의 매력이란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할 만하다.국제 정세와 각국의 힘의 균형,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어우러져 먼로 독트린을 만들어 낸다.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의 눈독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먼로 독트린은 미국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미국의 대륙팽창과 중남미 패권 장악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1898년 미국은 쿠바를 두고 스페인과 전쟁을 하게된다.미국 외교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늙은 호랑이 스페인은 미국에게 참패를 당한다.미국은 이어서 논쟁 속에 필리핀을 합병한다.이어서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팽창주의적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권좌에 앉게 된다.루즈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대한 보충이론>이라는 선언을 통해 중남미 지역에 대한 경찰국가로서 미국의 역할을 강조한다.루즈벨트는 불안한 중남미에 대한 유럽의 개입을 막기 위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이 지역에 경제적 군사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동아시아에서는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루즈벨트는 이의 중재를 통해 필리핀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다.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회담이 그것이다.루즈벨트는 변형된 먼로주의를 통해 힘에 의한 세계 평화의 구축을 추진한다.

20세기 초반에는 루즈벨트식 힘의 외교에 이은 또다른 외교의 큰 틀이 만들어진다.'이상주의적 국제주의'라고 통칭되는 윌슨주의가 그것이다.이 윌슨주의는 우리에게 3.1운동에 영향을 준 '민족자결주의'로 알려져 있다.윌슨주의는 아직도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외교 축으로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윌슨주의는 먼로식의 고립주의도 루즈벨트식의 팽창주의도 아니다.윌슨의 국제주의는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긍정적인 이상에 근거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윌슨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해서 도덕주의적인 미국을 세계에 전파하려는 선교사적 소망을 가졌다.윌슨은 국내적으로 대기업과 트러스트를 파괴하여 자유주의 정신을 실현했으며 질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를 대외정책의 모토로 삼았다.하지만 윌슨의 이상주의는 멕시코 문제 개입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윌슨의 이상주의가 가진 한계이면서 제국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미국의 현실과 도덕적 가치를 결합시킨 모순이 터져나온 것이다.이후 미국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 까지 루즈벨트식 선린외교,일종의 고립주의를 유지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두 편으로 나누어진다.루즈벨트의 급서로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소련의 견제를 위해 강력한 개입전략을 추진하게 된다.이른바 대소강경책을 골자로 하는 트루먼 독트린이다국내에서는 메카시 열풍과 국외적으로 중국공산화등이 대소강경책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모으기 용이했다.

이후 미국 외교사에 가장 큰 사건은 베트남 전이었다.케네디 사후 등장한 린든 존슨은 통깅만 보고를 받은후 전향적으로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다.1965년은 베트남전의 미국화가 된 시점이다.67년까지 5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남베트남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결국 베트남은 미국 역사에 치욕을 남기고 말았다.이후 미국 외교에서는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외교발언권이 높아졌다.외교분야에서 제왕적 대통령과 그에 대한 견제자로서 입법부의 권위가 동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그리고 베트남 악몽을 벗어나게 헤준 것이 조지 부시의 이라크 '사막의 폭풍작전'이었다.레이건의 힘의 외교와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무너졌다.미국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도취해 있었다.이라크는 냉전의 와해지점을 중동 재편의 시작점으로 보고 쿠웨이트를 침공한다.걸프전은 냉전 시기 개발된 전략무기들의 전시장이 되었다.전쟁의 개념을 확연히 바꾸어 놓았다.CNN은 전쟁 상황을 중계했다.미국은 지상군 투입 100시간 만에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이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제국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클린턴의 '경제외교'에 이어 미국의 새로운 전략이 나온 것은 9.11 테러이후다.부시는 나쁜 놈이니까 다 나쁜거고 더 말할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1기 부시 행정부와 2기 부시 행정부는 그 성격이 차이가 있다.뭐 다 똑깥다고 하면 ..단군 이래 대한민국도 다 똑같은 거니까 할말 없지만...9.11테러 이후 조지 W 부시의 '힘에 바탕을 둔 일방외교'는 미국 외교상에서도 극단적인 경우이다.물론 미국의 침략주의적 성격은 1898년 전쟁이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하지만 지금처럼 국민과 양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서부 개척사의 야만성과 중남미의 개입 전략등에서 미국의 폭력성은 정파에 관계없이 드러난다.하지만 모든 것을 뭉퉁그려서 보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다 똑같은 나쁜 놈이고 매파든 비둘기 파든 다 한국을 못먹어서 안달남 놈들이니까...미국은 한국을 노리는 늑대에 지나지 않아." 라고 하고 의사당의 망치두드리듯 세번 꽝꽝꽝 찍는 짓은 좀 자제되었으면 좋겠다. 친미분자들 만큼이나 잡고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감정적인 반미론자들이다.감정적 반미론은 마치 9.11 테러 이후 무차별적 테러와의 전쟁에 90%가까이 지지를 보냈던 미국민들과 별반 다를게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이 감정적 반미론은 결국 아무런 연속성도 가지지 못하고 정당한 반미운동의 반동만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미국 외교의 특징이 동적 가변성에 있다고 말한다.더 쉽게 말해서 무슨 무슨 이념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저자는 외교사를 돌아볼때 미국이라는 제국이 메커니즘에 움직이는 것이 아닌 어설픈 제국일 뿐이라고 말한다.4년마다 한번씩 이루어지는 선거는 대외 외교전략과 국내 여론의 상관관계를 높게 만든다.국민들이 대외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이다.그러나 어떤 특정 상황이나 그 상황으 피로감등은 투표에서 반영된다.미국의 외교전략은 의회,행정부,국민 여론이라는 복잡한 함수 관계 속에서 가변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저자의 결론 중에 특히 주목가는 부분이 '국내 여론의 동향'이라는 부분이다.네오콘 들이 자신들의 거점을 잡지로 잡았던 점이 이 부분과 오버랩된다.네오콘들은 외교잡지등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을 알렸고 각종 대중미디어에 네오콘 인사들을 중개했다. 여론의 동향이라는 것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다.어느 매체가 설문을 작성하느냐 질문지의 방향이 어떻느냐에 따라 결과는 급반전 될 수 도 있다.이렇게 만들어진 여론조사들이 과연 객관적으로 국민들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는지 의심이된다.이것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큰 차이가 없는 미디어 여론조사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저자는 미국민들이 외교문제에 무관심하다고 말한다.그것이 정책 결정자가 외교방향을 전환하는 주요근거가 되진 않을 성 싶다.저자는 가끔 그런 뉘앙스를 풍기긴 하지만 말이다.어느나라 국민이나 '경제'문제보다 '외교'문제에 더 관심을 갖진 않는다..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한미FTA라는 외교적이며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 일반인들은 TV뉴스속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한미 FTA에 대한 반대 국민여론을 막기 위해 정부는 TV에 캠페인도 하고 소프트한 전략을 적극사용하고 있다.진보 진영은 FTA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문제를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시간이 너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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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예외주의 -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
세이무어 마틴 립셋 지음, 문지영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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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생각하면 잘못 만져 손가락이 딱붙어버린 순간접착제의 진뜩함이 먼저 떠오른다.접착제는 자국이 조금 남더라도 씻어내려면 그럴 수 있다.하지만 미국은 떨어지지 않는다.여름철 공중화장실의 쾌쾌하면서 진득한 냄새처럼 고여 움직이지 않는다.살기 위해서 폐를 움직여 그 숨을 마셔야 하 듯 미국은 우리 사회에 전지적이다.극단적인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진다.그러나 TV에서 어깨에 별이 주렁 주렁 달린 예비군들이 '미국은 우리편'이라고 외치는 시위를 본다거나  아이들 영어 공부시키겠다고 눈 벌게서 코흘리게를 미국으로 보내는 내 또래의 엄마들을 볼 때 나의 우울은 화석처럼 가슴 한 켠에 박힌다.신장에 담석이 박힌 듯 미국때문에 속이 아프다.

미국을 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보편적 시각에서 건국 이후 미국의 잔혹사를 들어도 충분히 욕할 수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해서도 미국의 야만성과 간악함을 묘사하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거대한 문제 덩어리 국가를 향해 정의로운 말의 화살을 날리는 것은 마음도 편안하고 스스로도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자긍심을 준다.딜레마는 미국이 싫지만 그 싫음의 본질에 대해 파악해야 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힘으로 무장한 야누스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인내를 요한다.결국 미국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미국의 속살을 하나씩 읽어내는 수밖에 없다.

<미국 예외주의>를 읽기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립셋의 책에서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의 패권적 미국에 대한 일갈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오히려 저자인 립셋은 책에 한 장을 할애하여 미국 좌파의 학계 내에서의 자족적 헤게모니구축과 대학내의 좌편향이 가진 폭력성에 대해 지적한다.80년대 우리 대학의 보수우파적 성향의 교수들이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하고 싶은 말 못했다고 회고하는 듯 하다.립셋은 미국 학계의 좌편향성이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대학내에서 묵시적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미국 예외주의>를 읽기 위해선 우선 저자인 세이무어 마틴 립셋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갖는 것이 좋을 듯 하다.그는 대표적인 네오콘 1세대의 학자이다.미국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장을 동시에 거친 신보수주의의 대표적 논객이다.립셋은 이 책에서 자신이 속했던 1세대 네오콘들의 위상에 대해 언급한다.네오콘 1세대의 특징은 좌파에서의 전향,강력한 반공주의,반고립주의 외교,친유대주의,뉴딜 등 사회복지에 대한 지지,미국적 문화에 대한 보존 등을 특징으로 한다.어빙 크리스톨,네이던 글레인저,다니엘 벨 ,진 커크패트릭 등이 네오콘 1세대의 대표자들이다.네오콘은 기본적으로 민주당에 뿌리를 둔 세력이다.그러나 국내 국외 문제들에 대한 시각차이에 의해 다양한 지류가 존재한다.현재 조지 W 부시의 외교팀을 구성하는 세력들은 네오콘 1세대와 유사하면서도 또 차이를 보인다.립셋은 신보수주의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그 이유는 소련의 붕괴 이후 좌파들이 규정했던 자유주의적 반공주의자로서의 신보수주의는 엄밀하게 없어졌다는 것이다.립셋은 외부의 정치적 규정을 통해 신보수주의자들은 사상의 스펙트럼에 강제적으로 자리매김 당한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유럽식 사민주의적 정치세력이 네오콘과 사상적으로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우선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이 유럽과 다른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19세기 신생독립국 미국을 탐방한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에서 미국이 구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서 성립되었다것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예외성을 말했다.또한 1920년대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라는 사회주의자들의 논쟁 속에서 미국 예외주의가 자주 언급되었다고 한다.역사적으로 살펴본 미국의 예외성 문제는 유럽을 그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미국은 구대륙의 안티테제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국가를 건설했다.그리고 뛰어난 계몽주의자들이었던 '건국의 아버지'들은 새로운 인간성에 바탕을 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그들은 미국이 신에게 선택받은 나라라는 소명의식하에 유럽의 구습과는 완전히 다른 시민권이라는 토대 위에 새로운 정체와 이념을 만들어 냈다.미국의 예외성으로 지적되는 많은 부분은 대개 건국 초기에 이루어진 이념의 틀에 의존한다.립셋은 이때부터 미국민들에게 내재화된 이데올로기를 자유,평등주의,개인주의,포퓰리즘,자유방임주의라고 말한다.미국은 서구 선진국 중에서 가장 개인주의적이며 능력주의를 존중한다.이기적 행동과 공동선에 부정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종교적이다.빈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반면 개인들의 기부문화는 서구 선진국들중 가장 높다.미국은 상반될 수 없는 가치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하에서 공존한다.미국은 '용광로'라는 표현으로 미국이 가진 유연성을 자산으로 내세우기도 한다.미국이 가진 복합성은 립셋의 용어를 빌자면 '양날의 칼'이 되어 미국에게 쥐어져 있다고 한다.

세기 초부터 학자들은 선진 산업국으로 급성장하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발전을 기대했다.이 책의 부제이며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라는 것은 미국 예외주의의 한 예가 된다.엥겔스는 미국 노동계급의 후진성을 그 예로 들기도 했다.즉 봉건제의 계급 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계급성의 부재는 미국 사회의 복지 부재와도 연결된다고 한다.즉 유럽의 사회복지는 노동자 정당의 성장과 귀족 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선택적으로 결합해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반면 미국은 초기부터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였기 때문에 복지문제에 대한 개인적 구제만을 그 길로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회주의 정당이 약했던 이유는 몇 가지 더 있다.초기에 미국민들은 미국 사회를 평등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 사회로 파악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대용물이 필요치 않았다는 점이다.또한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종파주의와 반국가주의 성향이 집단주의로 볼 수 있는 사회주의와는 맞지 않았다는 것,교육 기화가 확대됨에 따라 계층 상승의 기회가 많았다는 점,지리적 이동의 빈번함과 안정적 공동체의 결여가 계급의식 형성에 방해가 되었다는 점,다민족, 다인종 이주 사회가 노동 계급의 파편화를 불러왔다는 점등이 지적된다.정치적 요인들도 존재한다.투표권을 얻기 위한 투재이 없이 '선물로서의 투표권'이 부여되었다는 점.강력한 양당 구도의 형성,연합적인 양당체계의 유연성,급진주의등에 대한 탄압등이 지적되었다.

저자는 미국 예외주의가 가진 가치문제를 언급하진 않는다.또한 미국 예외주의가 가진 반성이나 성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미국 예외주의>는 철학적 깊이는 많이 희석된 책이라 볼 수 있다.비교정치적이며 통계비교를 통해 미국과 미국민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수 십년간 동일한 질문을 통해 미국민의 가치가 어떻게 변해가는 지 또는 수십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있는 미국적 가치가 무언지 알 수 있게한다.립셋은 미국이 세계 유일한 강국이 되어 가며서 미국식 예외주의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분명 <미국 예외주의>는 껄끄럽다.역자들은 미국적 신조의 도덕성과 그것에 대한 교리적 열정이 미국을 예외적이게도 하지만 패권적이게도 한다고 비판한다.해방 이후 미국의 그늘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는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예외주의의 가치문제를 꼽아볼 수 밖에 없다.립셋은 '양날의 칼'에 베이지 않기 위해서 미국민 각자의 '도덕적 개인주의'를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자유주의자로서 립셋으로서는 가치일관적인 결론이다.하지만 거대한 이야기에 비하면 그 결론은 너무 평범하고 교과서적이다.그는 개인을 둘러싼 세계가 변화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유지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개인적 자율성에 대한 인정을 토대로 하는 도덕의 유연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좀 희화하여 말하자면 '너 한 사람만 잘하면 된다'라는 말이다.'너 하나만 도덕적이고 그런 개인이 모이면 사회가 다 도덕적이다'라는 것이다.상대적으로 집단적인 사회에 살아서 그런지 이런 립셋의 개인적 도덕성의 강조는 하나 마나한 말처럼 들린다.그럼에도 도덕적 개인주의의 사회적 형태로 자발적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부분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민 참여가 아직 부족한 우리에게도 새겨들어야할 말이긴 하다.

...........<미국 예외주의>를 구성하는 내용에는 유태인 문제,흑인문제,캐나다와 미국의 차이,사회문화적인 대척점으로서 일본 등을 다루고 있다.....여기서도 많은 설문조사들이 등장한다.그래서 책은 두껍지만 결코 어렵지 않다............책은 약 500페이지 가량이지만 뒤에 100페이지쯤은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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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버나드 쇼 지음, 유향란 옮김 / 이너북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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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대륙에서 나는 바그너와 반대 편 대륙에 살고 있었다. 자의적으로 구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나는 기악파다.그렇다고 성악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다. 바흐의 수난곡이나 칸타타,슈베르트,슈만등의 가곡을 즐겨듣는다.또 베르디,푸치니등의 오페라도 듣는다.그러나 음악 대륙에서 패권을 두고 기악파와 성악파가 핏빛 전쟁을 치룬다면 나는 기악파로 투항할 수 밖에 없다.바그너는 성악 쪽에서도 왼쪽 끝에 있는 극좌파다.(그런데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바그너야말로 기악과 성악은 물론 드라마까지 총체적으로 이루려한 것 아닌가?) 달콤한 멜로디와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를 가진 모차르트,푸치니,베르디 등이 오페라 우파에 서있다면 바그너는 오페라 좌파의 수장이다.바그너의 뒤를 따르는 오페라 좌파들은 드뷔시,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있을게다.(그런데 써 놓고도 이런 구분이 억지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찾아 다니는 것과 같은 말이다.결국 노선이 달랐지만 나는 바그너에까지 이를 수 밖에 없었다.이제는 잠시 미루어 두었던 그를 만나고 있다.세상은 풍요로운 음악의 보고이고 바그너도 그 중 하나이다.

 바그너는 문제적 인간이다.총체적 모순투성이다.남녀간의 사랑을 만병통치약으로 믿는 프로이트 실험실의 연구교재감이다.그의 인간성과 연애행각 대해 길게 논할 바는 아니다.짧게 내 사견을 밝히지면 '딱 내 스타일'이다.내가 별로 매력을 못느끼는 캐릭터들은 스테레오 타입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가장 나쁜 스트레오 타입화되어 있는 인간은 '남들 하는 것에 별 의구심없이 그냥 따라하는' (형편없는 의미의)일상인이다.좀 더 좋은 쪽으로 보면 그들은 안정감이 있고 타의든 인식하지 못하는 자의든 방향성이 있다고 해 두자...하여간 인간적으로 내 눈에 별로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바그너는 자기모순의 종합선물세트다.나는 종합선물 세트 같은 인간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적 경거망동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린다. 여자를 등쳐먹든 등쳐먹은 여자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든 알 바 아니다.

역사적으로 바그너 음악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사람이 히틀러이다.덕분에 바그너 음악이 오랫동안 편견의 먹물을 뒤집어?그리고 그 먹물의 흔적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다.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이 금지된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음악이 뭔 죄냐며 항의할 수도 있지만 끔찍한 집단 기억의 악령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그리고 그 충격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해 줘야 한다.

바그너 음악에 대한 일종의 편견은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과도한 애정때문이다.바그너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다.열혈 팬 하나때문에 팬 집단 전체가 욕먹고 그의 음악까지 욕먹는 결과를 낳게 했다.최강의 바그너 매니아 히틀러.그는 <로엔그린>의 백조기사처럼 자신을 인식했다.독일 제국은 물론 세계를 구원할 기사의 운명이 바그너의 신화와 음악속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믿은 것이다.히틀러가 은빛 갑옷을 입고 백조의 기사처럼 분한 그림은 유명하다.히틀러는 레니 리펜슈탈이 찍어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당 대횡서 '리엔치''로엔그린'의 서곡등을 연주해댔다.제 3제국의 각종 행사에서 바그너 음악은 빠질 수 없었다.1933년 히틀러는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바그너와 제 3제국의 혼을 엮는 행사'라고 말했다.골수 매니아 때문에 '바그너 음악=나치 선전음악' 처럼 이미지화 되어 버렸다.물론 바그너가 반유태주의와 독일 국가주의에 경도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그너를 히틀러와 동일시 해버리는 것은 잘못이다.골수 바그네리안때문에  가장 큰  편견의 감옥에 갖혀 버린게 또 바그너이다. 

버나드 쇼가 쓴 <니벨룽의 반지>는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쓰여진 또 다른 바그네리안의 바그너 해설서이다.버나스 쇼는 노벨문학상 수장자이자 대표적인 영국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이다.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짧게 말하자면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개량 사회주의자'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버나드 쇼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기대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담은 신화의 의미를 해석한다.버나드 쇼의 독설이 담긴 글쓰기는 당대에도 유명했다고 한다.이 책에서도 그는 독설과 자화자찬의 글쓰기를 보여준다.그러나 별로 미워보이지는 않는다.오히려 촌철살인의 한방을 보여줄 때가 많아서 혼자 큭큭 거리고 웃게 만든다.

책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라인의 황금><발퀴레><지크프리트><신들의 황혼>순으로 줄거리를 소개하고 신화적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근대사회에서 갖는 우의성을 설명한다.(스토리를 조금 알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일단 주인공들에 대한 버나드 쇼의 해석은 이렇다.신들의 왕으로 등장하는 보탄은 질서와 법을 상징한다.그는 이 질서와 법의 집행자이면서 또 예속자이기도 하다.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 보탄은 편법과 새로운 파괴를 구상한다.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과도 같은 존재인 알베르히는 자본가를 상징한다.버나드 쇼는 극에 등장하는 자본가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황금을 움켜쥐고 용으로 변신에 이를 수호하는데 급급한 파프너는 전통적인 농경자본가이다.반면 알베르히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부르주아 자본가이다.버나드 쇼는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던 바그너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마르크스가 예측하지 못한 알베르히들의 개량 대해 언급한다.즉 성공으로 얻은 자존심과 사회적 존경심은 알베르히가 자신의 성격을 개선해 나간다는 것이다.이 알베르히들은 결국 질서와 법을 상징하는 보탄과 이성과 계략을 상징하는 로게를 장악하게 된다.돈 지갑을 가진 자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 다고 버나드 쇼는 말하고 있다.그는 알베르히에 종속된 노예들을 근대 시민들로 읽는다.사람들은 난쟁이 알베르히를 마음 속에 품고 산다.그렇기 때문에 난쟁이들이 훌륭하고 제대로 된 존재라고 믿는다.그들이 착취를 통해 여기 저기 해악을 행하고 다녀도 그저 바라볼 뿐 의심하지 않게 된다.버나드 쇼는 알베르히를 통해 배금주의에 빠진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의 착취구조를 읽고 있다.

<니벨룽의 반지>의 히로인인 지크프리트는 그럼 어떨까? 버나드 쇼는 지크프리트를 니체의 초인,또는 바그너와 함께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으로 치환하여 생각한다.즉 현존하는 사회적 제도와 습관 등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가 지크프리트이다.보탄이 자기 모순에 빠진 신들의 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인간 존재였다.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바로 지크프리트적 존재이다.버나스 쇼는 지크프리트의 상징적 의미에다가 약간의 사회적 옷을 입힌다.바그너읽기의 사회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바그너가 이상적 사회주의자로서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한 것,그리고 그후 12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친 것에 대해 강조한다.그러면서 지크프리트를 아나키즘적 인간으로도 설명한다.버나드 쇼는 아나키즘의 발전 척도가 그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말해 준다고 할 정도로 아나키즘이 가진 인간화 세계에 대한 혁명에 매력을 느낀다.하지만 어느 것도 만병통치약이어서는 안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그는 다음 장에서 마르크스식의 혁명론에 부정하는 점진적 사회개혁자로서의 입장도 밝히고 있다.

100년전의 바그너 해석이 현재와 같을 수는 없다.음악이나 무대면에서도 그렇고 바그너 텍스트를 해석하는데고 그렇다.전통을 고집하던 바이로이트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또한 헤리 쿠퍼같은 연출가들은 바그너 무대를 미니멀하게 바꾼 현대적 해석으로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바그너의 텍스트 또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다.버나드 쇼의 사회주의적 해석 역시 그 중 하나이다.설령 그와 같은 잣대를 가지고 바그너를 읽더라도 그의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다르다.그러므로 또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총제적 인간으로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그의 음악과 텍스트가 무한대로 열려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음악에 대한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라이트 모티브에 대한 설명도 들어있다.또한 바그너 음악이 가진 모티브반복을 통한 구조완결성을 바흐나 베토벤 수준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버나드 쇼의 주장을 발전시키면 베토벤 사후 베토벤 계승 논쟁의 적자는 브람스가 아니라 바그너이다.단 브람스가 베토벤 수호자 였다면 바그너는 베토벤 개혁자였던 셈이다.베토벤이 가진 디오니스소적 성향과 음악적 개혁성에 촛점을 맞춘다면 바그너의 위상 또한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버나드 쇼가 만약 기록 매체의 발달로 집에서도 바이로이트페스트벌을 만날 수 있는 후세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의 독설로는 통조림 음악은 집어치우라고 했을 수도 있다.그래도 그 독설가는 후대 바그너입문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몇 개 남기는 예의는 잊지 않는다.

 "<니벨룽의 반지>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연주나 오락 음악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니벨룽의 반지>음악은 정말 쉽고 단순하다.고리타분한 학교에서 음악을 배운 음악가들이야말로 머릿속에 버려야할 것들로 가득하다.나는 그런 사람들이 일말의 동정심도 얻지 못한 채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둘 작정이다." .....영국의 문필가,바그네리안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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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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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한 1년 정도 살아 본 적 있다.이미 10년도 넘은 일이다.내가 살던 곳은 바다의 푸른 끄트머리가 살짝 보이던 언덕 위의 낡은  하숙집이었다.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버스에서 내려 언덕길을 10분 가까이 올라서 있었다.덕분에 집값은 동네에서 가장 샀다. 집 주인은 슬로바키아 이민자였다. 연금과 집세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한달에 한번 월세를 주기 위해 2층에 있는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그  외엔 그를 만날 이유가 많지 않았다. 가끔 그는 1층에 내려와 불편한 건 없냐고 물어보는 정도였다.

 집 뒤편에 빨래를 널 수 있는 작은 잔디 마당이 있었다. 빨래를 널며 지붕들 사이로 바라보는 바다는 하얀 종이 위에 떨어진 파란 잉크같아 보였다. 내 방 창에선 내가 널어높은 빨래며 푸른 보자기자락 같은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중고 가게에서 산 CD플레이어는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를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난 지금도 김광석의 노래중에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을 가장 좋아한다. 그 창 밖 풍경때문이다.

비록 1년 정도의 타향살이 였지만 이방인의 고립감과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  U2의 <STAY>란 곡을 이어폰에 꼽고 언덕길을 오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낯선 지붕들과 낯선 담장,다른 향기가 나는 공기,처음보는 나무들과 꽃들...보노의 무덤덤한 목소리와 흑백톤의 선율,소리를 많이 위축시킨 드럼.....내가 느낀 자유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밖에 없다.

고립감... 내가 느꼇던 고립감은 사회적 비존재로서 느끼는 감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몇 명의 외국인과 한국사람들 외엔 나의 사회적 관계는 전무했다.학교와 집,도서관...그나마 사회적 관계를 갖는 다는 것이 버스나 전철을 타며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과 그 곳 사람들이었다. 공부삼아 그곳 신문을 사서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그곳이 나의 생활터전이었음에도 그곳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마치 한국 TV에서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외신 사건 처럼 느껴졌다. 사건 사고들에도 그렇게 무심했는데 그 곳의 정치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면 '불바다론','성수대교붕괴'등 열올리며 이야기 나눌게 많았고 나의 관심도 그쪽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이게 이민자들의 정서와는 다를 것이다.이민과 단기 체류는 분명히 정체성에 큰 차이가 있다.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에는 이민자들의 향기가 묻어 있다. 작가가 인도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투명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이민자들의 이야기-그들의 정체성,그들이 느낀 고립감,그들의 고민,그들의 자긍심-를 풀어간다.이 단편집의 원제목은 <질병의 통역사>이다.한국판 표지에도 <축복받은 집>이라고 한글로 크게 써있지만 위에는 <Interpreter of maladies>라고 쓰고 있다.이 책에는 모두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각 단편은 짧지만 이민자들의 삶과 관련된 몇가지 단어들로 수렴된다.

먼저 <축복받은 집>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가족이다. 첫 단편 <잠시 동안의 일>에는 아이를 잃고 관계가 소원해진 인도인 부부가 등장한다. 부인에게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사산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남편의 부재를 이해한다.그러나 이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불편함은 남았다. 부인은 별거를 준비한다. 그리고 마침 잠시 동안의 일처럼 정전이 된다. 며칠간의 공사로 그 빛이 없는 시간은 지속된다.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그러나 모든 것은 순서대로.......며칠 간의 정전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카이오스다. 복중의 태아가 어둠 속에서 새 생명을 얻듯이 이 부부도 빛이 사라진 짧은 시간 속에 서로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최근에 인기 있었던 손예진,감우성이 나왔던 드라마. 제목은 생각이 안난다. 꾸준히 본게 아니어서. 그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파르자다 씨가 저녁식사에 왔을 때>는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 대한 안위를 걱정하는 모든 이민자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파르자다씨의 가족은 파키스탄 분리전쟁의 전장에 놓여있었다. 파르자다씨의 가족들에 대한 마음은 어린 주인공의 눈을 통해 전해진다. 매일 찾아와 저녁을 함께 하던 파르자다씨는 전쟁 소식이 들리지 발걸음이 멀어진다. 주인공의 부모는 TV뉴스를 보지 못하게 한다. 주인공은 수 천킬로 미터 떨어진 파키스탄의 파르자다씨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곳에 살고 있어도 가족을 그리워하고 가족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음음 누구에게나 똑같다. 아이는 나의 가족을 넘어서는 '위대한 가족'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가족'의 마음을 조금 더 사회적으로 확대시킨 이야기가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이다. 비비 할다르는 아마 간질 환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러 치료를 다해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결혼'을 해야 낳는다라는 말이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오빠 내외는 이러한 말을 무시하고 동생을 귀찮게 여긴다. 그리고 결국엔 아픈 동생을 버리고 도망가버린다. 비비 할다르를 보살펴 주는 것은 함께 사는 마을 사람들이다.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은 작은 벽돌 한장이라도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다. 심심해할 그녀를 위해 아이들도 보내 놀게 한다. 나의 가족에게 한정되기 쉬운 사랑이 마을 공동체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줌파 라히리의 마지막 소설<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자전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라히리는 런던에서 태어나서 지금 미국 보스톤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인도-유럽-미국이라는 세개의 대륙을 거쳐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인도의 가치를 자신의 세계 속에서 지켜가면서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린다. 소설 마지막에는 이민자들의 자긍심이 가득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 비행사는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몇 시간 밖에 머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세계에 거의 30년을 머물렀다....내가 여행한 그 모든 거리, 내가 해온 그 모든 식사,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내가 잠잤던 그 모든 방 등을 생각할 때 마나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평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때로는 그것이 내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 소설 외에도 <센 아주머니의 집><축복받은 집><섹시>의 단편에는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갈등,내적 방황들이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줌파 라히리는 남대천으로 돌아오는 은어들처럼 자심의 뿌리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소설로 표현해 냈다. 그녀의 애정은 담백하며 투명하다. 9편의 단편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며 각 단편이 하나의 짧은 단막극처럼 인상적이다.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이 책은 내가 샀는데 와이프가 먼저 읽었다. 와이프는 아이를 젖먹이며 줌파 라히리의 책을 읽었다.한쪽 품에는 아이를 ...방바닥에는 책을 놓고....하루 중 수유시간이 꽤 길기 때문에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요즘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가족이 생겨서 좋다.^^ 책읽는 엄마와  엄마 품에 있는 건강하고 예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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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6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8-18 01:50   좋아요 0 | URL
빙고! 이민자와 단기 체류자의 정체성은 분명 다르죠. 저도 항상 느끼곤 해요.
전 항상 단기체류만 했기 때문에, 외국 생활에 대한 선망(?) 을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이 책 몇년 전에 샀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 무슨 공항에선가 [Interpreter of maladies]를 샀는데,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 <축복받은 집>이란걸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장일순 지음, 이아무개 (이현주) 대담.정리 / 삼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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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의 봄이었다.<노자 도덕경>을 처음 만났다.어제 밤에 퍼부어 댔던 최루탄의 잔향을 맡으며 빈 강의실을 찾았다.햇살이 반쯤 드는 빈 강의실에서는 언제나 '학교냄새'가 났다.노자를 읽었던 건 고전에 대한 애정이자 약간의 의무감같은 것이었다.한자는 대략 운만 따라 가고고 한글로 풀이된 내용만 읽었다.알 듯 말 듯 했다.

당시 선배들과 주로 하던 사회과학 세미나에서 노자는 비판의 대상이었다.세미나는 유물론에 대한 이해를 주목적으로 했던 것들이었다.그 곳에서 노자나 석가의 가르침은 주관적 관념론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허무주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어 왜곡된 현실을 변혁하기 보단 순응하는 반동적 철학으로 읽히곤 했다.고전이 주는 아우라에 대해 비판해보지 않았던 대학 신입생이었던 내게 신선한 시각이었다.하지만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꼇을 뿐 고전 자체에 대해 내가 두고 있던 무게감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도 종교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한다.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을 보면 나는 대개 그 내용에 동의한다.하지만 종교가 가진 심리적,문화적 기능 역시 인정한다. 혐오감이 가고 미신 같아 보이던 무속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결과적으로 나는 ' 종교로서의 종교를 부정'하고 사회,문화 현상으로서 종교를 바라보는 입장에 서 있다.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 역시 <노자 이야기> 에서 인류의 큰 가르침으로써 노자,석가,예수를 이야기한다.책은 기본적으로 <노자 도덕경>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대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노자의 해석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노자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 절대적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도 기독교도 전부 인용된다.특히 이현주 목사는 전공을 살려 도덕경의 내용과 성경의 내용 중 동일한 말씀을 잘 찾아 내어 들려준다.책 전체에 수시로 등장하는 예들이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이런 비유가 있다.

도덕경 4장에 보면 유명한 '화기광하여 동기진하라'는 말씀이 있다.풀이하면 '그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가 된다' 는 것이다.먼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물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만물이 같은 뿌리를 두고 있으니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예수가 가난한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라고 한 말 역시 이와 같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여기서 예수가 말한 나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먼지이며 하늘이고 땅이며 우주이다.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천상천아 유아독존'이라고 했을 때 그 '아'에 해당하는 존재이다.물론 이 '아'라는 것 역시 우리가 말하는 self 와 다른 것이다.'아상'을 없앤 '나'이다. '자기를 넘어선 자기,천지와 하나 되어 있는 자기'인 것이다.

도덕경 16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모든 것을 품음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왕이요 왕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도요 도가 곧 영원함이니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도의 불생불멸을 이야기하고 있다.이현주 목사는 여기서 '부활'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즉 부활이라는 것이 죽었던 사람이 다시 멀쩡하게 살아서 밥먹고 여행다니고 대소변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부활이라는 것은 썩을 육신의 옷을 벗고 영원히 썩지 않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범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노자의 이야기로 수렴한다.여기에서 하나님이나 부처님은 다 하나다.모두 공이요 무다.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는 존재이다.인간의 가치로 재단할 수 없는 자연의 영역이며 도 자체이다.이러한 범신론적 유연함은 종교적 편벽함이 주를 이루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 신선함과 깊이로 큰 울림을 갖는다.

노자의 철학을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그럴 능력도 못되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몇가지 키워드로 노자의 철학을 정리하는 것 정도로 머물러야 겠다. 

無爲 ...無常...反...樸... 根 ...德 ....道

시각을 조금 현재로 끌어 올려 노자를 보게 된다.노자의 말씀은 여전히 지금 사회에도 유의미한 구석이 많다.특히 '강함'에 대한 이야기는 지구촌 유일의 패권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하다.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라는 말이 도덕경 76장에 나온다.단단하고 강한 것을 무력에 기대 힘의 외교를 추구하는 강대국에 빗댈 수 있다.노자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죽음의 무리다.노자는 정치에서도 무위를 강조했으며 큰 나라의 역할을 요구했다.61장에 보면 '큰 나라는 하류라 천하가 모이는 자리요 천하의 암컷이다....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하지만 현존하는 패권국가에게 이런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하기란 무리다.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한다는 말을 듣고 부여잡은 무기나 좀 내려놨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그나마 도덕경에서도 '도가 아니면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말로 패권국가의 몰락에 대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있어서 더운 여름에 위안이된다.

노자를 읽다가 보면 편협한 기독교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 종종 나온다.그와 함께 노자나 도에 대한 과소비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든다.노자의 철학은 근본적인 인간과 세상의 변화를 겨누고 있다.절대적 진리를 말하는 논점에서 지극히 당연하다.하지만 노자의 철학 역시 현실의 모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도덕경 후반부에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노자의 정치철학이 상당부분 담겨있다.하지만 노자나 도,선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노자의 현실 적합성은 뒤로 두는 경우가 많다.그들은 성인들의 말씀을 지극히 소아적으로 해석하여 마음의 평화만을 쫓는데 쓰고 만다.사회적 비겁함이나 무관심을 내적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려는 듯 보인다.이 책의 저자인 장일순 선생은 그 대척점에 있다.실제로 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활에서의 실천이 있었다.또 내면의 수양만큼이나 현실의 불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대응했다.장일순 선생은 그러한 현실적 정의가 무용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중요한 것은 옳바른 일을 하고 거기에 머문다거나 어떤 사심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그런데 선이나 도를 마음깊이 믿는 다는 사람들 중에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는 경우가 많다.노자가 말하는 '무위'라는 것을 철저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서 선시를 즐기고 화두를 나눈다.도에 대해 말하고 여운을 즐긴다....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행위들은 '도'를 소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서구가 zen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선문화를 상품화해낸 것 처럼 ...이현주 목사도 지적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기만'이다.한산의 시나 고승들의 게를 소비하면서 마치 '도'에 이르는 도정에 있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그냥 그런 여백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하는게 솔직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앎을 실천하는지 빈방에서 홀로 벽을 마주보고 이야기 나누어 볼 일이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힘든 날이 이어진고 있다.중동에서는  무지비한 폭격으로 무고한 아이들이 쓰러지고 있다.지난 폭우로 인한 수재민들은 제대로 정비도 못한 상태에서 폭염을 맞아 복구가 더욱 힘들다.추운 겨울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힘들지만 더운 여름도 마찬가지이다.. 노자는 말한다.

'하늘의 도는 마치 활에 시위를 얹는 것과 같구나.높은 데는 누르고 낮은 데는 들어올리고 남은 것은 덜고 모자라는 것은 채운다.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우나 사람의 도는 그와 같지 않아서 모자라는 것을 덜어 남는 것을 떠받든다.누가 능히 남는 것으로써 천하를 받들 것인가? '

모든게 같은 뿌리라면 가난하고 힘없는 자도 한 뿌리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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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8-08 22:38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만...
님께서 그 가난하고 힘없는 고통에 빠진자라면 어떻게 할까요?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내가 살아야 한다면요...
피할 수 없다는 말 자체가 패배주의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그 고통을 수용하면서도 고통에 영혼이 찌들지 않고 살찌우는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물론 제 능력으로 잘 될런지 모르겠지만요..
가끔 이라크의 비극을 보면서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들으면서 내가 드는 생각은
이스라엘을 응징하여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되찾는 것도 아니고 고통에 빠진 사람 하나 하나의 삶 속에서 보면 "그들이 그 삶의 고통을 겪으며 더욱 영혼이 정신이 성숙해지기를 기원합니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저도 몰라요..

이 책은 원래 3권으로 나뉘어서 출판되었는데...
마지막 한 권은 장일순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이현주 목사님 스스로 묻고 대답하면서 쓰셨다고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도 어색한 점 없이 아주 자연스러워요...
어느 정도 자신을 비워 무위당 선생님의 마음으로 써내려갔던 것이라 생각해요..
이현주 목사님의 책들도 대중화되어버려 읽기 싫은 책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드팀전 2006-08-09 09:09   좋아요 0 | URL
저도 좋은 책이라 생각해요.님의 말씀이 맞습니다.고통 속에서도 마음 한 자락을 잡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그와 함께 현실의 어려움을 깨기 위한 안과 밖의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자꾸 안 만 강조하다보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그렇다고 님이 현실을 외면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성에 대해서도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가 있습니다.처음에는 분노하겠지요.그리고 왜 하필이면 나야 라는 생각도 들겁니다.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왜 해고 당했나 고민하고 나의 잘못은 무언가도 생각하겠지요.시간이 지나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다른 일자리를 찾아 볼 수도 있을겁니다.하지만 이와 병행되어야 하는 일이 회사의 부당해고에 부당성에 대해 싸우는 겁니다.그 싸움을 제가 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을 지켜본 봐야 의하면 정말 외롭고 힘들고 눈물나는 싸움입니다.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에 비할 만큼 힘든 싸움입니다.노자가 말한 바도 싸움을 하지 말라는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또 마음의 평화만 찾으라는 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부당함에 대처하돼 사욕없이 옳바르게 싸우라는 거라 생각합니다.

레바논 폭격은 저도 진짜 많이 격분했습니다.님 말씀 처럼 무고한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거기서 끝일 수 밖에 없지만 .. 그나마 현실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길도 있더군요.주한 레바논 대사관에서 난민들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었지요.뭐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큰 도움이든 작은 도움이든 ..생각만 하는게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무언가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줄탁동시' 라는 말이 반드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내부의 평화를 찾는 노력과 현실의 치열함이 안과 밖에서 조우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불어주네요.댓글 감사드립니다.

2007-06-27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