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 오텔로 (DTS)
유니버설뮤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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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오페라 중 가장 먼저 접한 것이 <오텔로>이다.대개 오페라 팬들은 <라트라비아타><리골레토>등을 먼저 듣고 <오텔로>쪽으로 오게 된다.그런데 무식이 재산인지 <오텔로>가 먼저 눈에 띄었다.마리오 델 모나코의 데카판을 대본 따라가며 봤던 기억이 난다.<오텔로>에는 <라트라비아타>나 <리골레토>처럼 멜로디를 쉽게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유명한 아리아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그래서 아마 오페라팬들이 조금 나중에 듣는 음악으로 취급하는 듯하다.물론 음악사적으로는 베르디 중기 이후의 대표작으로 바그너와의 연관성까지 거론되는 대표작이지만 말이다.



오텔로는 한 시대에 몇 명 밖에 제대로 소화해낼 수 없는 어려운 역이다.일단 드라마틱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리릭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파바로티가 최고의 오텔로가 될수 없는 것도 그때문이다.또한 질투로 눈이 벌개진 무어인을 연기해내는 광기 역시 필요하다.황금의 트럼펫이란 멋진 별명을 가졌던 마리오 델 모나코는 여전히 20세기 최고의 오텔로로 기억된다.동시대 테너 중에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최고다.(물론 이제는 도밍고도 더 이상 오테로를 부르지 않는다.)그는 제임스 레바인과의 RCA 녹음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오텔로의 녹음을 남겼다.마지막 음반은 DG에서 나온 정명훈과의 협연이었다.도밍고의 녹음만 연대기적으로 따라가도 테너 가수 도밍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은 실험적인 무대 연출을 자제한다.가장 규범적인 무대 연출을 지향하는 것이다.무대도 큼직하니까 제피렐리나 모진스키 같은 감독들이 고전적 스타일로 연출을 한다.오페라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권장된다.그러나 이것도 일반론이므로 경계해야 한다.실험적 영화나 연극 연출에 익숙해 있는 요즘 사람들에게 '이게 기본이니까 이것부터 시작해야돼' 라고 한다는 것은 웃긴일이다.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펄럭이는 드레스 입고 출연하는 고전스타일 연출은 지루할 수 있다.대충 사전정보를 얻고 난 후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공연을 찾아 보면 될 뿐이다.

메트오페라단의 공연물이 관심이 가는 것은 국내 라이센스판으로 나왔기 때문이다.당연히 한국어 자막이 있다.대신 잘 보고 사야된다.물론 수입DVD가 화질면에서 조금 낫다고 한다.그러나 어차피 이 공연물이 조금 지난 시절의 것이기 때문에 화질보다 가격에 신경쓰는 편이 나을 성 싶다.한국어 자막과 저렴한 가격을 고려한다면 라이센스판이 경쟁력이 있다.

도밍고의 연기력은 오페라 가수들 중에서 최상급에 속한다.일단 비디오가 괜찮기 때문에 오텔로를 해도 스카르피아를 해도 백조의 기사를 해도 다 어울린다.3테너 시대가 막을 내린 시점에서 도밍고의 DVD가 여전히 자주 출시되는 이유는 그의 멋진 외모와 연기가 한 몫하는 것 같다.

이 오페라에서 도밍고는 젊은 시절의 패기를 보여주지는 못한다.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그렇지만 부자집이 망해도 삼대를 가는 법.전성기를 지났다 하더라도 '시대의 테너'를 누가 폄하할 수 있겠는가.데스데모나 역의 르네 플레밍은 캐스팅 당시 감짝 쇼로 여겨졌던 듯 하다.그녀를 보면 푸우 곰이 생각난다.적당히 통통하고 귀엽다.도밍고와 같이 서있을 때는 훨씬 얼굴이 커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레밍은 사랑스러우며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다.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게 제임스 모리스가 연기한 이아고 역이었던 듯 하다.제임스 모리스는 훤칠한 키에 낮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모리스가 연기한 이아고는 지적이며 냉철한 현대적인 캐릭터이다.'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모리스는 꽤나 잘 어울린다.강력한 카리스마는 없지만 대신 바닥에서 음흉하게 웃음을 띄는 지글지글함이 묻어 있는 연기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DVD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연출,한글 자막 지원,가격 경쟁력등을 고려할 때 꽤나 매력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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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 리골레토
레오 누치 바리톤 / TDK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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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골레토 공연 영상물 중에서 나름대로 인기가 높은 베로나 실황이다.

거실에 있는 dvd 플레이어로는 이 공연을 볼 수가 없다.이제 6주된 아가가 거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작은 소리에도 민감한 때여서 집안에서 걸어다닐 때도 조용 조용다닌다.하물며 오페라 감상이라니..

결국 아가가 자는 사이에 컴퓨터로 볼 수 밖에 없었다.컴퓨터로 보면 좋은게 화면 캡처가 쉽다는 것이다.특히 회사에서 몰래 몰래 보는 오페라 DVD는 훨씬 재미있다.ㅋㅋ

이 공연은 2001년 베로나 실황이다.리골레토 영상물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공연 물 중 하나이다.커다란 무대에서 공연을 진행하기 때문에 배우들이 무척 작아보인다.하지만 어차피 현장에서 보는게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보는 것이기에 dvd시청자들에겐 크게 핸디캡이 되지 않는다.오히려 실황의 자연스러움과 열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더 좋다.베로나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을 준다.

무대는 비교적 단촐하고 의상 역시 전통적인 스타일을 따른다.특출난 연출이 아니어서 무대연출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이 필요없다.사실 가장 특징은 베로나 극장 자체이다.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무대.저녁 식사하고 여유있게 앉아 있는 듯 한 이탈리아 팬들마저도 극장의 소품같다.


배우들은 조금 낯선 성악가들이 많다.

만토바 공작을 맡은 마차도는 키가 좀 작다.극 초반에 집중력이 조금 떨어진다.시선처리도 어색함이 묻어난다.바람둥이 만토바 공장의 욕망을 표현하는 연기의 표현력은 조금 낮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을 부르고 난 후 앵콜 요청에 씨-익 하고 웃는다.관객 중에 몇 명이 아주 큰 목소리로 앵콜을 외친다.

실황 공연에서 볼 수 있는 현장감이다.

미성이지만 호소력이 강하다고 할 수는 없다.만토바를 맡았던 너무 유명한 가수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질다 역을 맡은 가수는 일바 뮬라 이다.그녀의 외모는 얼핏 르네 플레밍을 닮았지만 플레밍에 비해 서민적(?)으로 생겼다.질다역 치고 왠지 산전 수전 다 겪은 주름이 눈이 띈다.그녀 역시 공연 초반에 시선 처리가 어색하고 극에 깊이 몰입되지 못한 인상을 준다.하지만 점차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다.

그녀의 가창은 훌륭하다.현재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가수 답다.리골레토에게 만토바의 용서를 구하는 2중창에서는 레오 누치와 함께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고음 처리도 비교적 깨끗하며 짜릿한 맛이 있다.



하지만 이 공연의 알파와 오메가는 레오 누치 몫이다.역시 현역 최고의 리골레토라는 평이 전혀 손색이 없다. 공연 당시 60에 이른 나이 였음에도 대단한 카리스마로 베로나 무대를 장악한다.바리톤 가수들이 테너나 소프라노 들에 비해 생명력이 길긴하다.레오 누치의 카리스마에 다른 가수들은 그 빛을 잃는다.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눈빛과 감정의 표현이 리골레토 자체다.딸을 찾기 위해 만토바 공작의 집 앞에서 으르렁거리다 결국 비굴하게 자비를 구하는 장면에서는 전율이 돋는다.대단한 표현력이다.2004년인가 조수미와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가졌다고 하는데....

레오 누치의 연기와 노래 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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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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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해 본 일이 없다.몇 년 전인가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별 쓸데 없는 생각이나 하는 이상한 놈...하여간 웃기는 놈' 이라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들은 마치 전어 사이에 끼어 있는 광어를 보듯 나를 봤던 기억이 난다. 

거슬러 올라가자.짧은 머리를 왜 '스포츠'라고 하는 지 궁금했던 중학교 시절이다. 밤을 잊는 애들을 위해서 별이 빛나는 밤에도 술자리에 가지 못한 DJ들이 궁시렁 궁시렁거리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형광등에 불빛이 깜빡깜박이 듯......문득..... '나는 나인가? 내가 나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뺑덕어멈 인당수에 빠지는 생각이 떠올랐다.당시 생각은 바나나 밟은 자전거 마냥 갈피를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나는 현재 라디오 앞에 앉아 졸음 겨워 하는 내가 어느 상위 존재가 움직이는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상위 존재는 지구로 부터 수 천 광년 떨어진 어느 별에 살고 있는 존재이다.그 생물체가 지구인보다 고등존재인지는 중요치 않다.그 별은 지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거기에는 하위 존재인 나를 규정하는 나와 똑같이 생긴 '진짜 나'가 존재한다.그 우주 먼 곳의 '진짜 나'의 행동을 나는 그대로 따라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그가 오른 팔을 뻗어 라디오 볼륨을 높이면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지구에 있는 나 역시 오른 팔을 드는 것이다.실제 500광년의 시차가 있겠지만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어쩌면 이미 '진짜 나'는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거기까지 생각하긴 싫었다.결국 나는 우주에 있는 '진짜 나'의 반대로 비춰 같은 모양이 된 거울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당시 나는 나의 존재가 좀 부질없다고 느꼇으며 이것이 짧은 백일몽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공포스럽기도 했다.

 상상력이 빈곤한 주변의 모범적인(?) 사람들만 제외하면 이런 엉뚱한 생각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그런데 왜 이렇게 주변에는 모범적인(?) 인류만 있는지 모르겠다.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그 인류들도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는 가정이다.단지 기억의 저장탱크가 현저히 낙후되어 떠올리지 못하고 있거나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그딴 강아지 풀뜯어 먹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어른스러움의 표시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어쟀거나 이런 누구나 하는 희안한 상상을 한 사람은 고금의 역사를 모래알처럼 많았다.조금 더 나이를 들어 '호접몽'의 장자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우주에 있는 '진짜 나'를 다시 한번 쯤 떠올렸다.장자는 내 엉뚱한 상상이 결코 비정상적인 정신건강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 예였다.이미 수 천년 전에도 잠결에 '나비와 나'를 혼동했던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이다'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들뢰즈가 그랬던 것 같은데...라캉이었던 것 같다.잘기억나지 않는다.그는 '자아는 자신을 오인함으로써 성립한다'라고 했던 것 같다.이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해방감을 느꼇다.'자아찾기'가 생의 과제 인 것 처럼 받아 들여지던 청년기를 넘긴 시점이었다.흙벽에 막혀 있던 물꼬가 지난 밤의 비로 무심하게 넘는 것을 본 느낌이었다.하지만 함부로 이 느낌을 함부로 전달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비교적 최근일이다.젊은 여성의 자아찾기란 문제를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여직원에게 이 말을 인용했다.'나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이다.'라고 말이다.(내게 중요한 느낌의 말이었지만..결론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한마디로 '쥐약 살짝 발라 드신 분' 취급당했다.그 친구의 말은 일목요연했다. '내가 내가 아니면 누구에요? 그럼 여기 있는 내가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요? 하여간...@@님은 이상하다니까 특이해..(약간 경멸의 목소리를 담아서) '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도 잘 모르는 말을 순간적으로 꺼낸 것을 후회하면서 또한  '나는 어쩌면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의 합이거나 조각들의 화학적 변용일지도 모르지 않나..그 조각들은 결국 타자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구...또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일 수도 있구..정말 내가 나일 수도 있지만 '혹시 내가 타인이 아닐까 ?' 생각해보는게 그렇게 치명적인 일일까' 정신병자 니체는 과감히 '주체는 허구이다'라고 약먹는 소리를 했는데.(하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정신병원에 갔겠지.)


철학에 대해 그다지 깊지 못하다.근대철학의 기점을 대개 데카르트의 '고기토'에 둔다는게 정론인 듯 싶다.부정의 부정을 통해 '생각하는 존재'라는 마지막 추출물을 얻었다,그리고 이 데카르트의 생각은 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지배적으로 작용한다.그래서 그런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자아찾기'를 그 시기의 핵심과제인양 설명한다.'자아'를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수행평가와 수능문제집만 펼쳐준다.데카르트의 문제는 '타자'에 있었다. '타자'라는 존재는 이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배제되어 있는 듯하다.타자는 자기 존재의 대척점에 서있다.타자는 결국 자기 존재를 통해서만 재인식되는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현대 철학의 어떤 분파는 타자론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복원에 공력을 쏟는다.자기 존재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 타자의 존재는 사회적으로 타자화된 소수자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도 발전하게 된다.(.(나는 철학이 전공이 아니기에 그저 상식 수준에서 기억나는 대로 말할 수 밖에 없다.더 공부 많이 한 분들이 더 공부 많이한 방식으로 이야기해주는 글들이 있으니 그게 도움이 될 듯하다)


더 복잡한 건 잘 모른다.그저 내가 찾고자 했던 '자아'가 어떻게 해도 나의 것에만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며 '자아찾기'의 덫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밖에...또는 내가 찾는 자아라는 것이 내겐  유니크한 무엇인지 모르지만 사실 별개 아니라는 생각까지...어쨋거나 지금은 '나는 나'라는 방식의 차이짓기가 별 의미가 없다는 쪽일 뿐이다.(물론 '나는 나'이며 우주라고 주장해도 별로 할 말은 없다.)

 <하얀성>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을 찾은 방랑 노인 에블리야의 말은 이렇다.

(그는)우리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 마음속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말했다.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도 이것이라고 했다.'

호자가 찾고자 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꾸어버릴 그 깊은 진실'은 찾을 수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주인공 나는 그 하얀성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자는 노예인 주인공을 알고 싶어한다.주인공이 가진 지식에 대한 전수에서 시작된 호자의 탐구는 한 인간의 존재-기억 자체에 대한 근원적 소유를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그들은 서로 대화를 하고 부끄러움을 나누고 두려움을 공유한다.이러한 탐구를 통해 호자가 얻고자 했던 것은 나를 포함한 존재의 근원적 진실이다.그러나 존재의 진실은  파디샤의 군대가 결코 넘어뜨릴 수 없었던 '하얀성'처럼 완벽한 접근을 거부한다.호자의 존재의 진실에 대한 강박은 사냥여행에서 극에 달한다.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인공을 만났을 때 처럼 질문을 한다.'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말이다.극한 탐구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진실을 요구한다.그러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존재의 근원이 기억과 습관을 바꾼다고 이루어진다고 생각되진 않는다.이 책은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며 이 글을 쓴 이가 호자인지 노예 주인공인지 모호하게 만들었다.이것에 집착하다 보면 안풀리는 퍼즐처럼 앞뒤를 맞추어보고 싶은 끝없는 욕구에 지치게 된다.그러나 나처럼 성의 없는 독자에겐 처음부터 그런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일종의 '이중성 인격 ' '도플갱어' 식 캐릭터를 도입하고 있다.지킬과 하이드 처럼 동일 인물의 이중성과는 다르게 다른 인물의 동질화과정을 그린다.결국 동질화는 또다른 형태의 분화를 낳는 형식으로 소설은 발전한다.결말 부분에서 한번의 뒤틀림을 통해 주체와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소설의 캐릭터들을 어떻게 보는냐에 따르 두가지 설정이 가능할 듯 하다.하나는 '호자'와 '나'를 비슷하게 변해 가는 다른 인물로 보는 방식이다.또 다른 하나는 소설 속 '나' 또는  '호자' 라는 인물 내부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물론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하면 어느 설정이 설득력이 있는지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내가 무슨 비평가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수고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단지 소설을 본 독자의 또다른 상상을 통해 가능한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다.작가가 불쾌하다고 내게 메일을 날리지만 않는다면-설령 날린다 하더라도-책을 읽고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호자(또는 나)의 상상이 만들어낸 즐거운 이야기라면 주체/타자는 동일 인물 안에서 서로 대화하고 갈등하는 형상이 된다.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본다면 주체 내부에서의 권력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호자와 나 사이에는 분명히 주인과 노예라는 외부적 권력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그러나 그 권력은 결코 일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노예의 자아는 지속적으로 주인의 자아를 비웃고 시비걸고 그 밑바닥을 드러내도록 독려한다.자아를 인격화한 우를 범하고 있긴 하지만 자아 내부에서 발생하는 -외부와 절연된-권력관계가 있을까 하는 또다른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오르한 파묵이 가진 지역적 특이성이 이 책을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이라는 사회적 측면으로도 읽게 한다.즉 노예로 상징되는 서양/호자로 대표되는 동양.....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것.결국에는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서로의 세계 속에 동화되어 가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자아/타아론적 관점에 더 마음이 끌렸다.물론 터키 작가가 가진 사회적 환경이 자아/타자의 문제에 더 천착할 수 있게 만든 토양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익히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야 파묵을 접했다.터키 이스탄불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언제쯤 가능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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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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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0여년 전 쯤 기억이다.몇 몇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루키를 닮았다고 했다.당시 나는 하루키를 접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래서 그 말이 칭찬인지 놀림인지 알 지 못했다.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서점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다.그 사람들이 한 말은 분명 외모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하루키와 나는 제비와 참새처럼 확연히 구분된다.

남들 보다 늦게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왜 독자들이 열광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그의 재즈에세이도 보았다.그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가 어디가 하루키랑 닮았지?'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내게 유리한 쪽으로 그 유사성을 찾아보고자 했다.나는 당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던게 두가지 이유에서가 아니었나 하고 추론해 본다.하나는 음악에 대한 '잡식성 성향'이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도 나오지만 하루키의 음악감상은 j-pop(물론 그가 열심히 듣는다고 하진 않았지만)에서 부터 락,재즈,클래식으로 넘나든다.다음으로 추론해 본 것은-이것은 자랑이라 할 수 없는데-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과 비슷한 분위기 때문이다.이런 류의 동질성에 대해서는 사실 나 역시 긴가민가하다.그러나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려운 구석이 있다.뭐라 딱히 집어서 하루키의 어느 소설 ,어느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내 젊은 날의 방황이 가진 기억 중에는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과 유사한 경험 내지는  비슷한 뉘앙스가 배여있던 것도 사실이다.내 경험에 한정 지을 수 밖에 없겠지만 -하루키적이냐 아니냐로 놓고 보면- 내가 만났던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하루키적'이었던 것 같다.

<의마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하루키가 쓴 잡식성 음악 에세이다.등장하는 인물만 보더라도 그의 잡식성 메뉴는 확인된다.재즈 피아니스트 시드월턴,비치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클래식 피아노의 거장 루돌프 제르킨과 아루투르 루빈슈타인,내가 잘 모르는 j-pop의 스가시카오...그리고 마지막은 미국 포크의 원류 우디 거스리... 중국집 메뉴 보다 다양하다는 생각도 든다.(사실 중국집에서 주문하는게 늘 거기서 거기라서 그렇지.실제는 중국집 메뉴가 더 많긴 할 것이다.)

하루키 음악 에세이의 장점-곧 단점이기도 한-은 순음악적 전문 지식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의 음악계에서의 계급은 애호가이지 전문적인 음악평론가이거나 연주가가 아니다.그러므로 하루키는 인문학적이며 감성적인 음악론을 펼친다. 결코 악보를 들이대며 '32번째 마디부터의 디크레센도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곤란하다.' 는 투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물론 분석적이고 순음악적 평론도 아주 필요하고 중요하다.그런게 없다면 음악이 칵테일바에서 등장하는 여흥을 달래주는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그리고 또한 칵테일용 음악도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여하튼 하루키의 음악론은 그저 음악가에 대해 조그만 사전 지식이 있고 그들의 음반을 몇 장 들어본 수준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하루키 에세이의 또다른 장점은 하루키의 표현력에 있다.같은 음악도 '좋다/나쁘다' 라고 말하고 마는 평범한 수준의 일반 청취자에게 하루키의 표현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가끔은 '맞아.내가 그 음악을 들으며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하는 류의 대리만족의 경험을 주기도 한다.(그와 반대로 '나는 같은 느낌을 갖고도 왜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좌절감도 동시에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윈튼 마설리스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는 내게 '어쩜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이렇게 표현하고 싶었었는데..' 하는 씁슬함을 건네주었다. 윈튼 마설리스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 중에 이런 것들이다.

(윈튼 마설리스는)'이봐요,난 이것도 할 수 있다고요,이런 것도 할 수 있고요' 라는 듯 사뭇 득의양양한 태도가 다소 거슬리게 된다... <스탠더드 타임 vol6 Mr 제리롤> 이 앨범이야말로 윈튼 마설리스의 '공부 증후군'의 좋은 예이다...' 어때? 잘하지?' 라는 메시지만이 빤히 들여다보여 그 결과 어이없을 정도로 깊이가 없는 음악이 만들어지고 만다.그의 오리지널 작품은 역시 들을 만하지만 그 이외의 스탠더드곡의 완성은 정확히 말해 비참하다.....그렇기에 감탄은 해도 감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한 잘 알여지지 않은 피아니스트 시드 월턴에 대한 이런 표현은 정말 압권이다.

(시드 월턴은) 퍼시픽 리그의 하위 팀에서 2루수를 보고 있는 6번 타자 같은 존재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이 스가시키오였으며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 사람이 시드 월턴이었다.시드 월턴의 음반은 복사판이 하나 있었는데 거의 듣지 않아서 있는지도 가물 가물했다.이 책을 보고 카피본 CD를 살펴봤다.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스티플 체이스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이다.이 음반에는 4곡이 들어있는데 그것도 마지막 곡은 곡이라고 할 수도 없는 1분 남짓한 멤버소개 테마음악이다.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이 첫번째 곡이다.테너 색소폰 밥 버그와 함께 동일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다.시드 월턴의 피아노 스타일은 하루키가 지적한것처럼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즉흥연주의 피아노 턴이 되면 중용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연주를 들여준다.하루키가 칭찬했던<달콤한 모음곡> 에서 역시 네명의 멤버가 서로를 존중하며 제각기 기량을 펼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하루키 덕분에 시드 월턴의 피아노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더 좋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의 곡들은 서핑 음악 말고도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다.퇴근길에 가끔 듣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도 비치보이스의 비-서핑음악이 간혹 선곡되었던 걸로 기억된다.<펫 사운드> 음반은 90년대에 재발매 되었다.당시 브라이언 윌슨은 이 음반에 대한 라이너 노트를 찍접 썻다.브라이언 윌슨에게 영향을 준 음반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비틀즈의 음반이었다.비틀즈의 음반을 듣고 브라이언 윌슨에게도 무언가 영감이 왔나보다.Don't talk, God only know, Caroline no 같은 곡들에서 초기 비틀즈의 실험성이 언뜻 언뜻 보인다.물론 이 음반에서 국내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민요였던 sloop john B였다 .우리말로 번안되어서 불려지기도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에서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하루키의 표현도 재미있다.

브렌델의 경우는 여느 때처럼 지적이며 음악의 논리가 분명하다.이는 물론 바람직한 현상이나 안타까운 건 설정된 논리에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다.네 악장을 통틀어 들어봐도 결국 남는 것은 품격있는 지적인 지루함뿐이다...(리히터,길레스의 연주에 대해) 어디까지나 심각하고 진지하게 농담 같은 건 처음부터 낄 자리도 없다는 듯이 보여 왠지 공산국가의 매스게임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이런 타입의 연주는 오늘날에는 역사라는 서랍장 속에 살며시 넣어두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은 하루키가 말하는 그의 '개인적인 서랍장'에 들어 있는 음악이다.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만한 그런 곡은 아니다.음반을 뒤적여 보니 다른 슈베르트 소나타들 사이에 딱 한장의 연주가 있었다.에밀 길레스의 리빙스테리오 레이블에서의 연주.다시금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스탄 게츠에 대한 하루키의 편애는 유명하다.따로 언급이 필요없을 것 같다.나같은 경우에는 스탄게츠를 하루키만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전성기 버브 시절 녹음보다 오히려 마지막 음반인 <피플 타임>음반이 마음에 남는다.스탄 게츠의 마지막 녹음이며 또한 투병 중의 연주라는 외적 이유가 더 인상적이기 때문이다.백조의 노래처럼 스탄 게츠는 케니 바론의 피아소 선율에 마지막 색소폰 소리를 얹는다.하루키도 지적했듯이 완벽한 테크닉은 결코 아니다.마치 깁스하고 연주하는 사람같기도 하다.어떨 때는 다음 프레이징을 넘길수 있을까 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기도 한다.실제로 연주를 본 사람들은 더했을 듯 하다.마지막 음반에 들어있는 찰리 헤이든의 <퍼스트 송>은 원곡보다 스탄 게츠의 덜컥이는 연주가 훨씬 마음 속 깊이 들어온다.색소폰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여서 코 끝이 찡해진다.오늘처럼 가을 비가 내리는 밤,이 곡을 듣고 있으면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 한 개피를 들고 창가로 나가고 싶어진다.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정말 뜻밖의 비교이다.스파게티 집에서 된장찌게를 떠올리는 기분이었다.대개 연주가들의 비교는 하이페츠/오이스트라흐,리히테르/길레스,칼라스/테발디,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파바로티/도밍고...뭐 이런 식이 익숙하다.그런데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이라니...독특하다.물론 비교대상을 누구로 잡냐에 따라서 비교하지 못할 연주가가 어디있겠는가? 제 각가의 특색이 있기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그럼에도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을 비교하는 글은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그래서 신선하다.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제르킨과 유사한 철학자,수도자 같은 스타일이다.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또한 연습에 충실하다.음악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갖는다.그 완벽주의가 약간의 기벽으로 보이기도 한다.오히려 음악계에서는 루빈스타인같은 스타일이 독특한 사람이다.루빈스타인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며 대중적 취향에 적당히 야합(?)하기도 했던 사람이다.워낙 한량이어서 노는 것도 좋아했으니 말썽도 많았다.하루키가 이 책에서 언급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는 루빈스타인 스타일을 보여준다.(내가 클래식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때 샀던 음반이다.)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유들 유들하다.드라마틱한 연주를 즐기는 피아니스트들이 포르테로 힘을 모으는 지점에서도 루빈스타인은 '툭 툭' 샌드백 두드리 듯 치고 지나간다.요셉 크립스의 반주 역시 그다지 용을 쓰지 않기 때문에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진 않는다.제르킨의 연주...하루키가 지적한 바와 똑같은 걸 간혹 느낀다.어떨때는 무척 좋지만 또 어떨 때는 듣기 힘들어진다.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두 장의 음반<리버>와<네브라스카> 는 락팬들이 인정하는 브루스의 최고명반이다.그릭고 풀랑의 음악은 기묘하다.독특한 소스 맛이 나는 음악이다.나는 주로 그의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을 즐겨 듣는데 하루키의 초대로 풀랑의 가곡집에도 손을 댈 듯 하다.부드러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려 주었던 제랄드 수제의 음반이 눈에 들어 온다.

하루키의 삶에서 부러운 점은 그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쓰면서 음악을 즐긴다는 것이다.런던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중해 소설을 쓰고 지치면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찻집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고 날이 저물면 윗도리를 걸치고 음악을 들으러 갔다." ... "상쾌한 일요일 아침 커다란 진공관 앰프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고 (그동안 물을 끊여 커피라도 준비하고) 천천히 턴테이블에 풀랑크의 피아노곡이나 가곡 LP를 얹는다.이런게 하나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 자신도 이런 행복이 모든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치는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종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둔다. 그냥 그 상황을 그려봤다.행복해 보인다.좋아하는 일과 자유로움과 음악이 하루안에 빼곡하게 들어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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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2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J뽀스 2007-01-04 14:46   좋아요 0 | URL
빌려 읽은 책이라 반납하려니 아쉬운데 리뷰 너무 잘 쓰셨네요. ^^: 퍼갑니다.
 
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알렉스 커쇼 지음, 윤미경 옮김 / 강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사진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사진 찍히기 싫어하는 습성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초등학교때 사진 중에는  사진찍기 싫어서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 돌린 사진이 몇 컷 된다.고등학교때 찍은 사진은 대게 어쩔수 없이 찍어야 했던 단체 사진이 전부다. 한 해 통틀어 딱 2장의 사진이 있는 셈이다.봄, 가을 단체 소풍 사진..요즘 같은 디카 시대는 나를 좀 곤혹스럽게 한다. 내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남을 찍는, 또는 자신을 찍는 사람들이 가끔 이상하게 보인다.

왜 그렇게 사진 찍히기 싫었을까? 일단  사진의 피사체가 되어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하는 그 몇 초가 싫었던 듯 하다.특히 바보같이 웃음을 지으라고 '김치,치즈' 하는 소리에 따라 웃어야 하는게 곤욕이었다.결국 남들 다 웃고 있는데 나는 삐죽거리고 있게 된다.또 하나 혐의를 둔다면- 나의 주장이지만- 사진빨이 영 안받는 다고 믿기 때문이다.몇 몇 친구들과 동료들이 내 주장에 동의를 해주면서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사진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찍은 적도 없다.대학교 시절 캐논 AE 1을 들고 몇 몇 시위 장면과 몇 몇 인물 사진을 찍은 적이 있지만 이내 관심을 잃었다.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술적 공부가 필요했는데 연애 하느라 거기까지 공부하긴 싫었나보다.

어쨋건 내게 사진은 인스턴트 음식과도 같았다.그저 대충 빨리 찍고 찍히는게 편안한.가끔 유명한 사진 작가의 사진들을 보면서 ' 잘 찍었네 ' 하는 정도의 느낌을 갖는 정도였다.미술 작품을 보면 애써 그림과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썻지만 사진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로버트 카파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카파는 나의 전공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조금 더 친숙했다는 정도다.나는 '카파이즘'이라는 저널리즘의 한 신념으로 먼저 그를 만난 셈이다. 

이 책 <로버트 카파>는 아주 잘 만들어진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책의 구성이나 적절한 인터뷰등은 이 책을 토대로 다큐멘터리 대본을 써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다.프롤로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참전 용사이야기 부터 시작한다.참전 용사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서 카파가 찍은 유명한 오마하 사진들을 보여주고 감회를 듣는 것이다.이 사진들을 본 사람들의 소감을 소개하며 카파에 대한 보편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카파의 작품을 보고난 후 폭력의 상흔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움과 슬픔만 보인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삶에거 가장 잊지 못할 순간들을 흑백의 사진으로 담아낸 이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어 했다.인간 정신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시각적 유산을 남긴 이 도박꾼은 과연 누구였단 말인가?'

이제 참전 용사들의 감회어린 시선과 함께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카파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책 속으로 들어가면 1948년 헝가리로 돌아가고 있는 카파를 만나게 된다.17년만의 고국 방문이다.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처참하게 변해 버린 부다페스트.낯익은 골목길은 유령이나 나옴직한 곳으로 바뀌었다.카파의 참담한 시선은 이제 시간을 따라 거꾸로 거슬러 올라 간다.

프롤로그부터 카파의 일대기를 끌어오기 까지 과정이  TV 다큐멘터리적이다.적절한 구성을 통해서 카파의 이야기로 독자를 조금씩 조금씩 몰아가는 방식이 즐겁다.

이 책은 저자의 발품이 그대로 느껴진다.저자는 카파의 일대기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기존의 많은 자료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그리고 적절한 시점에서 그 자료들에 묘사된 카파의 모습과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은 카파의 인상을 그대로 배치한다.TV 다큐멘터리로 지차면 나레이션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다가 필요한 시점에 적당한 컴퓨터 그래픽과 적당한 인터뷰를 넣어서 주는 것과 유사하다.이것은 영상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구성이다.영상세대들은 이러한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인용된 인터뷰나 내용들 역시 아주 세밀하고 사적인 것들이어서 흥미롭다.카파가 교류했던 사람들의 면면 역시 화려하다.그들과 카파의 관계를 그리다 보면 마치 20세기 초반으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 놓은 듯 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베르너 비쇼프,존 스타인벡,어니시트 헤밍웨이,존 휴스턴,하워드 휴즈.....

카파의 오랜 친구였던 작가 존 허시는 그를 '스스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말했다.이 표현은 카파를 한마디로 요약한 가장 유명한 말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초보 사진가 앙드레 프리드만이 만들어낸 이름 '로버트 카파' , 자기 내부에 있는 전쟁의 공포를 넘어서려 했던 사람,언제나 쾌활함을 잃지 않았지만 내면에는 황폐함과 상실감이 자리잡고 있던 사람,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 속으로 자신을 기꺼이 밀어넣고 인생을 즐긴 사람....'로버트 카파'로서 '로버트 카파'보다 더 훌륭하게 그 삶을 만들어 낸 사람.

그는 5번의 전쟁에 참가했다.그는 항상 자극을 원했던 듯하다.종군 기자들이 전장에서 느끼는 목숨을 건 흥분같은 것이다.카파는 전장을 찍었지만 언제나 전쟁을 증오해 왔다.'실직한 종군기자'가 되길 원했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발 맞추진 않았다.그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일종의 '심리적 외상'을 입었던 듯 하다.국제 분쟁이 있거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곳에서  일하는 국제 기구 요원들은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다.인간의 잔혹함과 충격적 죽음에 수시로 노출되어 일을 하다보면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고 한다.로버트 카파는 5차례에나 걸쳐 죽음이 즐비한 현장에 있었다.강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심리적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카파가 사진과 자신에 대해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 일본으로 초청을 받게 되면서 한 말은 그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보여준다.그는 조카에게 "다시 전쟁에 가야한다면 난 총으로 자살을 해버릴 거야.난 너무 많은 걸 봤어." 1951년 함께 일했던 작가 어윈 쇼 역시 카파를 이렇게 말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아침이면 카파는 비로소 자신이 통과해온 비극과 슬픔이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창백한 얼굴,불길한 꿈에 쫓겼던 나른한 눈.카메라를 통해 그토록 많은 죽음과 악을 들여다봤던 남자가 마침내 여기에 있다.절망과 고통 속에서 후회를 하고,세련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남자가 여기에 있다.카파는 거품이 이는 진한 술을 들이켜고 몸을 부르르 떨며 실험을 하듯 오후의 미소를 지어본다.괜찮다.' 카파는 슬픔과 비극을 잊기 위해 가면을 써야했다.본인 스스로도 완벽하게 속을 만한 가면이 필요했다.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이 언제나 그의 안주머니에 들어있었다.그를 얼핏 아는 사람들은 그를 '유쾌한 보헤미안'이라고 말했지만 그를 조금 더 깊이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었는지 증언한다.    

나는 이 책을 컴퓨터 앞에서 '매그넘' 홈페이지를 띄워 놓고 읽었다.이 책에는 중요한 몇 개의 사진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사진집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책에 등장하는 내용과 그 당시 카파가 찍었던 사진을 그대만 만날 수 있다.20세기를 '야만의 시대'라고 한다면 로버트 카파는 언제나 그 한복판에 서서 셔터를 눌렀다.그의 사진에서는 전쟁의 절규 소리가 들리고  얼핏 핏내음도 난다.그의 작품을 보다가 다른 매그넘 작가들의 사진을 살펴봤다.사진의 기술이나 구도라는 측면에서 로버트 카파보다 뛰어난 작품들은 수 도 없이 많다.그러나 카파의 사진에는 어떤 예술적인 사진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이 있다.그것은 외롭고 고독했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의 힘이며 또한 진실의 힘이다.로버트 카파에게 진실보다 더 뛰어난 사진 구도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파는 말했다."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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