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바그너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외 / DG (도이치 그라모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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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 중 하나이다.바그네리안들에게는 바그너 음악의 정점인 <반지><트리스탄과 이졸데><파르지팔>을 듣기 위한 선행학습쯤으로 여겨진다.대개 <방황하는 네델란드인><탄호이저><로엔그린>등이 기존의 오페라와 큰 차이를 갖지 않으면서도 후기 바그너의 전조를 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추천된다.이런 선행학습을 통한 음악듣기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음악 듣기가  마치 태권도 승급심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물론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데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모차르트가 바그너보다 덜 된 음악가이기 때문이 아니다.바그너의 음악은 -그가 말했듯이-음악,문학,철학,신화학 등의 많은 정보를 한 접시에 담아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 접시 안에 들어있는 재료들을 음미하려면 어느 정도 예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편안함을 주는 감상중심의 음악팬에게 이런 공부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그리고 공부하면서 들어야하는 음악이 꼭 훌륭한 음악감상 태도라고 생각치는 않는다.어떤 좋은 음악은 무도장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들어야 제 맛이다.또 어떤 좋은 음악은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와이퍼의 박자에 맞추어 들어야 최고다.다양한 음악과 다양한 청취 방식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공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대하며 귀찮은 음악'이다.사실 어떤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듣느냐는 질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예술'에 대한 가치관의 설정의 문제이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의 다른 음악처럼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곡이다.7년마다 한번씩 뭍에 오르는 유령선장 네덜란드인.그는 저주를 받아 바다를 헤매인다.저주의 족쇄를 풀 수 있는 길은 한 여인의 희생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길이다.바그너는 이 신화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꼇다는 것이 정설이다.바그너는 일종의 '모성컴플렉스'가 있었던 사람이다.그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바그너는 사랑에 굶주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자신과 동일시했다.그리고 바그너의 도피행각에 겪었던 항해의 경험까지 반영되었다.서곡을 필두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폭풍치는 바다'의 주제는 그래서 더욱 생생하다.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폭풍우 치는 바다의 그르렁 거림이 쟁쟁한 금관과 강력한 현악 앙상블에 의해 묘사된다.

이 DVD는 85년 바이로이트 실황으로 유명한 하리 쿠퍼의 연출이다.과거에 LD로 나왔을 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이미 20년전 연출이고 이후 새로운 프로덕션이 새로운 시대의 바그너 무대를 꾸며오고 있지만 쿠퍼의 실험적이며 설득력있는 연출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는다.85년 하리 쿠퍼 프로덕션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주인공은 단연코 젠타이다.이 공연에서는 리즈베트 발스래프가 젠타 역을 맡았다.그녀의 가창은 바그너 음악에 필요한 근기가 있으면서도 신화/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불안감을 표현하기에 적절했다.또한 촛점을 잃은 듯 한 눈빛,경계선 인격장애자가 가졌을 법한 광기가 그녀의 연기에 담겨있다.그녀의 훌륭한 가창과 연기는 하리 쿠퍼가 젠타의 분열적 성향에 연출의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젠타는 공연 내내 무대 좌측의 작은 철재 난간위에 서있다.가슴에는 신화 속 주인공인 네덜란드인의 초상화를 앉고 말이다.그녀는 단 한번도 그 초상화를 내려놓지 않는다.그녀는 무대 위에서 현실/신화 속을 오고간다.철재 난간 위에서 그녀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온 아버지 달란트를 본다.저주받은 네덜란드인과의 거래도 지켜본다.선원들의 춤도 바라본다.또한 철내 난간을 내려와 들이대는 에릭을 거부하기도하고 네덜란드인의 존재를 믿는다고 놀림하는 동료들에게 멋진 발라드를 들려주기도 한다.하리 쿠퍼가 젠타를 무대에 계속 남겨둠으로써 생기는 효과는 훌륭하다.인구에 회자되던 선원신화와 원신화가 현실에서 재현되는 과정이 2중구조로 명확하게 보여지면서 또 무엇이 신화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모호하게 만든다.젠타가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드라마의 내러티브는 다른 말로 하면 젠타의식 속에 있었던 네덜란드인 신화의 반영이기도 하다.이런 생각을 계속 발전 시키다보면 무대의 내러티브가 젠타의 무의식인지 극중 현실인지 헷갈리면선 묘한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네덜란드인과 젠타의 조우 장면은 현실과 신화의 경계에 서 있는 젠타의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아버지 달란트가 무대 뒤에서 검은 실루엣의 네덜란드인을 데리고 온다.그리고 자리를 떠난다.무대 뒤편에 다시 네덜란드인의 배(양손을 모은 모양을 한)앞에 달란트와 이야기를 나눈 네덜란드인이 나온다.(사이몬 에스테스가 이 역을 맡았다.흑인 노예같은 인상이다.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네덜란드인의 절규가 영화에서 본 흑인 노예의 절규처럼 현실감이 있다.) 결국 무대위에는  두 명의 네덜란드인이 있는 셈이다.어디가 젠타의 무의식속에서 나온 음성인지 어디가 아버지 달란트가 데려온 실루엣 네덜란드인의 목소리인지 구분이되지 않는다.또한 이것을 구분하려 하면 하리 쿠퍼의 연출이 의도한 바를 훼손하게된다.극중에서 젠타와 네덜란드인은 거의 서로를 바로보며 이야기하지 않는다.우리고 보고 있는 네덜란드인이 신화 또는 신화를 내재화한 젠타의 의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대개 여성의 희생을 통한 영원회귀라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방황하는 네덜란드인>도 그런 도식을 따른다.이 오페라에는 에릭이라는 젠타를 원하는 남자가 등장하여 일종의 삼각관계를 형성하게 된다.에릭과의 삼각관계는 결국 비극을 향한 전초가 되는 셈이다.하리 쿠퍼의 연출에서는 그런데 이 부분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쿠퍼의 연출이 의도한 바는 그런 통상적인 비극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수들의 가창도 노련하고 카메라의 화면구성 역시 볼 만하다.간혹 막과 막의 연결을 위한 진부한 디졸브 화면이 눈에 거슬리기는 한다만 그정도는 눈감아 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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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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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원은 아파트 발코니다.크고 작은 몇 몇 개의 화분이 나의 정원의 전부다.결혼 전 총각 때 키워온 화분 중에서 아직 건재한 녀석들도 있다.그러나 대개는 결혼 후 새로 들여다 놓은 녀석들이다.나의 화분 관리는 나의 인간관리만큼이나 즉흥적이다.평소에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애정이 있는 척 바라본다.게을러야 잘 키울 수 있다는 화분들이야 나의 호들갑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그러나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녀석들은 무척이나 반갑게 나를 맞이 한다.이러한 '무신경과 과대관심의 반복'은 식물들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애정표현 방식이다.가끔은 와이프가 이미 물을 준 화분에 또 물을 주어서 아이들을 시들시들 하게 만들기도 한다.이 무지몽매한 애정표현으로 몇 몇 녀석은 이미 저 세상으로 보냈다.화분에서 앙상해져 버린 식물들을 걷어 낼 때는 마음이 아프다.화분을 정리하고 나면 곧 잊게될 죄책감도 느낀다.

요즘 집에 있는 화분 중에 요주의 대상은 '벤자민'이랑 '파키라'이다.신혼 초에 화원에서 사온 녀석들인데 최근 관리불량으로 상태가 좋지 못하다.요주의 대상목록에 올라와 있던 '고무나무'는 어젯 밤 마지막 잎을 떨구었다.고무나무의 주민등록은 말소 되었다.(고무나무의 명복을 빈다.못난 주인 만나서...ㅜㅜ) 비교적 키우기 쉬운 식물을 가져오지만 아파트에서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단순히 물만 맞추어 준다고 잘 크는 것이 아니다.빛,토양,습도,환기 등등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 관리해야 될 것은 너무나 많다.결국 '식물우기'에는 아이를 돌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타샤의 정원>의 주인공 타샤 할머니는 1년 내내 아이를 돌보듯이 그녀의 정원 속 자식들을 돌본다.봄이 늦은 버몬트의 숲 속에서 겨울나기는 그녀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구근들이 눈 속에서 잘 견디는지 너무 많은 눈 때문에 뿌리가 썩어버리는 것은 아닌지...그녀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정성과 땀을 아끼지 않는다.그녀의 정원 속 자식들은 그녀의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동화 같은 풍경을 선보인다.아름다운 장미와 함박 웃음을 띤 백합,정원의 배경이 되는 옅은 붉은 빛의 돌능금나무.....모든 꽃과 나무들이 그녀의 땀을 먹고 조화롭게 자란다.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보고 있으면-비록 사진이지만-눈이 휘둥그레 해진다.자연이 만들어 놓은 멋진 색의 조합과 부드러운 붓터치에 눈이 큰 호사를 한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가꾸기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는 것은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이다.지금 타샤 할머니의 연세가 90임을 생각한다면 정말 본받고 싶은 삶의 태도이다.그녀는 동화 속 정원을 꾸리기 위해 해마다 예쁜 구근들과 씨앗들을 얻는다.그녀는 아름다운 것들을 얻기 위해 끈임없이 정보를 얻고 연구한다.그녀의 몸이 갸녈프지만 건강한 이유는 정원일의 노동때문이며 정신이 건강한 이유는 이러한 정열때문이다.그에 비하면 나의 화분가꾸기는 너무 건성이다.모든 일에는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는 법.논리적으로도 나의 화분들이 시들 시들해지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다시 한번 너무도 단순한 진리를 깨우친다.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키운다는 진리....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보면서 상상 속으로 나의 정원을 그려본다.누구나 그런 꿈을 꿀테지만 나 역시 아파트살이를 마감하고 싶다.어렸을 때 살았던 마당이 있는 집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어린 시절 우리집 화단에는 덩쿨 장미와 목련,홍매화가 아름다웠다.) 아파트는 집이 아니다.아파트는 사는 공간일 뿐 결코 집이 될 수 없다.집은 정서의 공간이며 기억의 공간이어야 한다.그런데 콘크리트 닭장 같은 아파트는 그런 향기를 머금을 수 없다.그저 포름알데히드나 시멘트 독같은 것이나 내뿜을 뿐이다.마당 있는 집에 사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타샤 할머니처럼 꽉 들어찬 정원을 꾸미고 싶진 않다.타샤 할머니의 정원은 유성페인트로 칠한 정원같다.아름답긴 하지만.그녀의 정원에는 너무 많은 꽃들과 나무들,풀들이 어우러져 있다.꽃잔치 속에 파묻히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조금 여백을 둔 정원을 만들고 싶다.우리나라의 수묵화가 그러하듯이 빈 공간이 보이는 그런 정원이 좀 더 여유로와 보일 듯 하다.마당이 조금 크다면 와이프가 좋아하는 느티나무를 심고 싶다.봄날의 반짝이는 잎새와 가을단풍이 예쁠것이다.여름철에 붉은 꽃이 예쁜 배롱나무도 여러 그루 심고 싶다.8월이 되면 뜨거운 햇살 아래서 붉은 빛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유실수도 몇 그루 심고 싶다.따먹지 않더라도 작은 나무에 몇 개의 사과,몇 개의 살구,몇 개의 감이 열리면 아이가 나무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귀여워 보일 것이다.연보랏빛 수국도 몇 그루 심어 놓고 싶으며 날렵하여 아름다 붓꽃도 가꾸고 싶다.담장 밑으로 부용꽃과 접시꽃도 심을 것이다.키작은 패랭이도 군데 군대 심어 놓으면 예쁠 것이다.

몸이 고될 것 같다.그러나 생각만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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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12-23 20: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식물 키우기에는 아이 기르는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하죠. 그런데, 화분에 식물을 기르는 일은, 아이를 가둬키우는 것 만큼이나 식물에게 잔혹한 일이라 생각해요. 흙에 심어주면 식물은 어지간해선 안 죽거든요. 화분과 흙. 그것이 고아원과 부모 정도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연말연시 잘 보내시길~~~

ghwngo 2008-01-30 08:46   좋아요 0 | URL
하하, 고무나무의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는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청중의 탄생 - 청중의 자리에서 본 클래식 신화의 탄생과 해체
와타나베 히로시 지음, 윤대석 옮김 / 강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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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예술의 장르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과 가까운 것이 음악이다. 미학자들 중에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예술 장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음악은 기호들의 내적 관계이며 그 음표들의 연관이 음악의 형식이 된다.이러한 일렬의 기호들의 관계가 인간에서 정서적 경험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그 음들이 축적된 인간정신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다.음악 자체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음악을 둘러싼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은 그것보다 수월할 지 모른다.

일본에 포스트 모던 열풍이 불었던 1980년대 중반 <청중의 탄생>이 소개되었다.책은 음악 수용자들의 변용을 중심으로 살펴본 음악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거칠게 말하자면 저자는 음악 수용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전 근대,근대,그리고 탈근대이다.와타나베 히로시는 각 시대 구분에 조응하는 예를 찾는다.먼저 전근대와 근대로의 전환기로 19세기의 예를 든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수용형태가 결정된 시기이다.다음으로 기술 혁신의 시대인 1920년대 미국.이 시기는 19세기 안착된 음악계가 기술 문명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이다.마지막으로 1980년대 일본의 음악계가 탈근대화한 수용자들의 예로 제시된다.저자는 책의 서문과 증보판 후기를 통해 이러한 시대 구분과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한 배열이 인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구 대륙과 신 대륙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구성원들의 계급적 성취단계,각 국가별 독자적 문화 수용의 부분이 무시된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한 저자의 사전 양해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비교는 클래식 음악 수용자가 클래식 음악계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이 책이 음악팬들이나 예술 애호가들에게 유의미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을 생각해보자.대개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높은 지붕,스팟 조명,조심스러운 기침소리,눈을 감고 곡에 심취한 음악팬.....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러한 클래식 청취의 스테레오타입화가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바흐나 하이든,모차르트 시대는 음악회가 지금처럼 '진지한 감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교의 장'이었다.당시 음악 소비자는 명확하다.곡을 의뢰하고 음악가의 패트런이 되어준 귀족층과 그의 친구들이다.음악가들은 도자기나 장식품을 만드는 도공처럼 음악을 작곡하고 그들을 위해 공연했다.거기에는 현재 너무나도 당연히 되는 '작품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저자는 그 예로 모차르트의 공연 팜플랫을 든다.공연 목록을 보면 교향곡이 한번에 연주되지 않는다.1악장이 연주되고 다른 타펠뮤직(식탁음악)들이 들어간다.그리고 공연 마지막쯤되서 다른 악장이 연주된다.음악 수용 태도는 '사교의 장'에 걸맞게 시끌벅적하다.물론 그 중에는 진지한 관객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차분한 음악회도 있었을 것이다.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이러한 두 종류의 공연장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러한 음악계의 풍토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고착되게 된다.우선 음악 소비층의 변화가 그 원인이다.특수제작을 요구하던 귀족층에서 일반상품을 구매하는 부르조아지가 음악계의 중심 세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흔히들 베토벤을 작가 내부적 자율성에 의해 창작하는 예술가의 첫번째 세대로 기억한다.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관련있다.또 다른 하나는 음악계내의 '예술로서 음악'에 대한 정착 노력이다.18세기 미의 원리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감성'과 '정신'의 종합이었다.예술가들은 예술이 감성과 정신이라는 모순된 영역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음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정신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음악은 '감각'의 영역이지 고도의 정신성을 담보한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18세기의 음악 소비형태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판단은 자연스럽다.그저 귀족들의 식사 시간 배경음악이 어떻게 정신성을 갖춘 '예술'로 대접받을 수 있겠는가.저자는 슈폰호이어의 주장을 인용하여 '음악'의 예술로의 편입을 위한 인정투쟁을 설명한다.슈폰호이어는 미학이 음악에 부여한 좋지 못한 평가를 불식하고 자기정당화를 도모하기 위한 전술로서 음악미학이 이러한 요구에 맞지 않는 음악을 '저급'이라고 떨쳐버리는 방식을 취했다고 본다.즉 산만한 청취,식탁음악,감각성에만의 의존등을 배제하므로써 음악이 예술로 편입되는 방식이다.이제 음악은 '진지한 음악' '정신성 있는 예술'로 바뀌었다.연주회에서 떠들거나 개를 데리고 오는 짓은 무식한 비교육층이 하는 짓이 되었다.세이퍼는 이를 '진지한 청취'라고 말한다.19세기에 정착된 이러한 '진지한 청취'는 현재까지 클래식 공연의 가장 규범적인 청취방식으로,전통으로 자리잡았다.19세기의 진지한 음악가와 음악팬들은 굳히기 작업이 필요했다.그들은 리스트류의 비르투오조에 대해 비판하며 고전 작곡가들을 신화화 해나가기 시작한다.즉 연주자의 비르투오시티는 감각적인 열광일 뿐이며 진짜 음악은 바흐,베토벤등 정신적 영역을 담보하고 있는 거장들에게 있다는 것이다.'신에 헌신하는 바흐' '불굴의 인간의지 베토벤' '가난하지만 청순한 모차르트' 등의 이미지들이 19세기에 만들어진다.이 이미지 역시 이후 역사적 검증과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유효하다.결론적으로 '저급음악의 배제,진지한 청취,고전 거장들에 대한 신화화,연주회 윤리의 확립' 등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청중'이 만들어진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19세기에 안착된 근대적 청중의 모습에 동요가 일어난다.근본적인 원인은 '기술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 광고의 '이미지화'작업 때문이다.저자는 음악관련 기술 발전의 예로 '자동피아노'를 든다.자동 피아노는 피아노롤에 펀칭을 해서 연주자 없이 피아노를 재생하는 장치이다.요즘도 아이들 장난감으로 이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손잡이를 돌리면 펀칭된 골을 따라서 예쁜 멜로디가 나오고 그 위에 인형이 빙글빙글 도는 형태인....이 책에 등장하는 자동피아노는 실제 연주자들의 연주를 피아노 롤로 저장하는 것들도 있다.고도프스키,모이세비치 같은 연주자들도 이 자동 피아노에 녹음하기도 했다.저자는 자동피아노의 발달로 청취 형태의 변화가 공연장에서 일반 가정으로 바뀌어 가는 점에 주목한다.물론 1920년대의 상업주의 광고가 만들어준 '풍요로운 가정'이미지도 주요했다.이 시점에서 기업의 상업주의와 클래식 음악계가 손을 잡게된다.음악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적 변화는 당연히 수용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우선 예술 체험의 일회성이 사라지면서 -즉 아우라의 상실-공연 공간과 일상이 뒤섞이게 된다.이 현상을 현재로 끌어올리면 거장의 연주를 CD라는 복제기술을 이용해서 아침에 이닦으면서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여기에 '음악의 정신성'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다.음악의 정신성은 다른말로 하면 음악이 가진 정신적 영역에 대한 표현성이다.이 '표현성'에 대한 공격은 현대의 '미니멀음악''환경음악'과 같은 종류의 음악을 만들어낸다.이 책에서는 1920년대 전위음악가들이 시도하던 '표현성'에 대한 소거를 에릭 사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이는 19세기에 음악전문가들에게 강제로 배제된 '음악의 감각성''음악의 사회성'에 대한 복원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와타나베 히로시의 이야기는 일본의 현재(1980년대)까지 오게 된다.저자는 이 시기를 포스트모던한 음악 수용자들의 도래기로 파악한다.일단 청중의 형태를 '분중'이라는 말로 정리한다.즉 '나누어진 청중'이라는 것이다.수용자의 분중화 현상으로 우선 '음악의 카탈로그화' 가 지적된다.과거 바흐,베토벤 등에 한정된 음악목록이 대폭 넓어진다.이 책에서는 베토벤의 연주 횟수와 말러 연주 횟수를 비교한다.이는 거장을 한축으로 햇던 클래식음악계의 변화로 받아들여진다.구심적인 음악 소비구조가 증식하여 원심적인 상황으로 바뀌는 것이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음반가게 카탈로그를 한번만 둘러 봐도 금새 알 수 있다. 바흐-베토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있는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사이에 또 얼마나 이름도 낯선 작곡가들이 있는지.현대의 음악가와 팬들은 이렇게 사이 사이에 있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비한다.이 책에서 거론했던 말러는 음악팬들 사이에서는 자주 찾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저자는 '카탈로그화'현상이 학자적 발상이 대중화된 것이라고 말한다.즉 '전국민의 음악학자화'라는 것이다.학문적 지식의 대중화는 사실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교육 수준의 확산과 정보매체의 다양화는 일반인들에게 전문가적 안목 내지는 그와 유사해지고픈 심리는 붇돋았다.그러나 저자는 음악계에서 이러한 현상이 상업주의와 결합되며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현대의 음악팬들은 상업주의와 결함된 '차이'를 소비하는 것이다.리프킨의 바흐 합창인원 논쟁이나 모차르트 교향곡 발견 같은 예들은 음반 판매 마케팅과 오버랩되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피할 수 없어보인다.저자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청취층의 변화 양상으로 '부닌현상'과 '9번교향곡열풍'을 들고 있다.부닌은 쇼팽콩쿠르 우승자로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인기가 높았다.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나보다.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19세기 배제된 '비르투오조'에 대한 -다른 의미에서는 '진지성'에 대응하는 '오락성'의-복원으로 바라본다.베토벤 9번 교향곡을 일반인들이 일본어로 음차하여 합창단에 참가하는 현상 역시 '대중의 저변확대'라 바라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결론에서 '대중의 경박화 '를 포스트 모던 사회의 긍정적인 특징으로 설명한다.'진지함'에 갇혀 버린 음악의 한 쪽 날개를 펼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말러 음악에 현대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말러 음악의 난해함과 들쭉날쭉한 비통일성은 다양한 음의 이미지를 쫓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사티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전체에서 세부로의 관심'이라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상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근대 사회는 음악 예술을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그러나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관객들은 예술과 오락에 대해 그동안 확립되어온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그들은 이것들을 다시 '일상생활'로 끌어들이고 있다.저자의 결론은 근대의 '의지''이성'에 포박된 음악을 풀어해치는 탈근대적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

저자도 증보판 후기등에서 밝혔던이 이 책 <청중의 탄생> 첫 판이 나온 것은 20년 전이다.일본의 포스트모던 열풍도 가라앉았다.물론 한국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인고 있다.저자는 증보판에서 책을 집필할 당시와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이 책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시대적 삼분법과 그에 대한 반성이 주를 이룬다.저자의 변화된 관점은 각 시대가 이후 시대의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수렴된다.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근대라는 프로젝트 역시 허구가 아닐까 의심한다.근대라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만 있어왔던 것이고 모든 문화 현상이라는 것이 굳이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 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이어진다.저자는 이런 말로 결론 짓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된 '사실'이 있을뿐이며 그러한 '사실'이 시대 속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문화를 형성해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치에 맞다.

근대의 '신화화'와 포스트 모던의 '탈신화화' 작업에 대한 저자의 절충적이며 설득력있는 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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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11-20 20:38   좋아요 0 | URL
오....이 리뷰는 음악 잡지에 칼럼으로 실려야 할 것 같아요!^^

2006-11-20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톰 2007-01-16 16:19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로테 퀸 지음, 조경수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교사 혐오자의 책>, 이 책의 독어판 제목이다.국내에서 이런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 힘들었을 듯 하다.한국 사회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 중에 하나가 '특정 직능 단체'또는 '특정 종교단체'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다.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사 혐오자의 책>이라고 출판했다면 분명 무슨 무슨 가처분 신청,무슨 무슨 변경 신청의 소를 당했음직하다.출판사는- 대외적으로만 존재하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의 정서를 알고 있기에 제목을 순화했을 것 같다.물론 짐작이다.

이 책을 읽을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다.선생님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는 공감할 지라도 한국과 독일의 교육제도와 교사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점은 미리 머릿속에 넣고 들어가야된다.저자인 로테 퀸은 독일의 자율적 교육제도에 부정적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올바른 방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말이다.저자가 바라보는 독일 자율교육제도의 문제점은 초등학생들에게 그 나이 때 맞는 학업성취를 독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2000년 피사에서 독일이 하위권에 머물렀다는 점이 그 주장의 근거다.로테 퀸은 독일의 교육제도와 교육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 독일 초등교육 수준 저하의 원인이라고 파악한다.학년에 맞는 학업 성취로 독려하지 않는 학교,그리고 그걸 악용하여 방임과 가정으로 책임전가로 일관하는 선생님들.초등학교 까지는 열린 교육을 하다가 김나지움으로 넘어가면 달라지는 교육 형편 등등...독일이나 한국이나 교육에 대한 관심은 피차 마찬가지일테니 독일 여론이 쉽게 공감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초등교육은 그동안의 주입식 교육제도에 대한 반성으로 열린 교육방식을 지향하고 있다.(물론 지향은 지향일 뿐이다만)비록 독일 수준에는 미치치 못하겠지만 교육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최소한 초등학교에서는 말이다.로테 퀸은 그와 반대 상황에 있다.독일의 자율식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며 조금 더 아이들을 책상에 붙여 놓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독일과 한국 교육의 역사적,사회적 차이에 대해 조금 이해하고 이 책을 접해야 교사 문제에 대해 좀 더 맞장구를 칠 수 있게 된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할 말들이 다들 너무 많다.좋은 기억보다는 않좋은 기억이 더 많다.지금 선생님을 하고 계신 분들도 돌이켜 보면 과거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많을 것이다.물론 현재의 교사들은 '우리 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며  교사로서 자신의 선량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거기에 더하여 요즘은 학생이 선생알기를 뭐 알 듯 하기에 선생이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모든 교사들이 마귀할멈의 세번 째 아들 같지는 않다.세상 어디에나 부처도 있고 마귀도 있듯이 선생님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그런데 왜 아이들은 천국의 기억보다 지옥같은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까? 아이들이 잘 해주는 걸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사실 학교 생활 편안하게 한 편이다.아버지가 선생님이셔서 초등학교 때 부터 그 후광을 입었다.공부도 잘하는 편이었고 모범적이었으니 선생님과 큰 갈등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다.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정말 '올 한 해가 어떻게 가나?'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볶인 적이 있다.결정적으로 선생님께 세게 대들었는데 그 여파가 한 학기 이상 갔다.1학기 성적표에는 6년동안 처음 받아 보는 성적도 기록되어 있었다.그러나 이런 일은 쉽게 잊게 된다.정작 오래 기억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저자의 말을 먼저 인용하면 이런 류의 것들이다.

교사들은 종종 학생들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자신이 재능이 없다고 믿게 하고 외모와 성격과 출신 배경을 가지고 창피를 준다.심지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기 까지 하면서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하는데 그런 압력은 교실 안에서 전염병처럼 증가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숙제로 무슨 초대장 같은 걸 써오는게 있었다.담임 선생님은 나보고 나와서 읽어보라고 했다...'몇 월 몇 일 내 생일인데...친구들와 와서 배불리 먹자..' 뭐 이런 내용이었다.마지막 문장이 문제였다.아이들 어휘에 '배불리 먹자'가 뭐 크게 이상한 건 아닌 듯 했다.그런데 선생님은 뒤로 넘어갔다.교실이 떠나갈 듯 크게 웃으며 그게 뭐냐는 식으로 빈정거렸다.가만히 있던 반 아이들도 왕개구리 따라 웃던 동네 개구리 마냥 책상을 치면서 넘어갔다.진짜 무지하게 쪽팔렸다.너무 쑥스러워서 얼굴이 완전 홍당무가 되었다.나는 그 길로 복도 끝으로 달려가 쓰레기 통에 그 숙제를 던져버렸다.....나의 돌발적인 행동은 또다른 보복을 불러왔다.흔히 말하는 싸대기 몇 대 맞으며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냐'는 날카로운 충고까지 들었다.다음 날 부모님 소환....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맞았던게 문제가 아니라 쪽팔렸던게 문제였다.왜 선생님은 '어..잘썻다.그런데 '배불리 먹자'는 좀 예쁜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허튼 소리,얕보는 제스처,무시하는 시선과 바보 같은 농담은 과거 학생들을 길들이는 수단이었던 꿀밤먹이기나 회초리질보다 고통이 덜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부당하고 만성적으로 악의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훨씬 더 큰 상처를 준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공감가는 부분은 교사들의 이상한 권리에 대한 부분이었다.저자의 말을 먼저 보자.

부모형제,친구들,교사들의 도움으로 삶의 평가 불가능한 것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지에 대한 철학을 세우는 시기인 6-10세 사이에,아이들은 자기들과 똑같이 분별없고 미숙하게 떠들어대고 자신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자각이 결여된 교사들을 만나게 된다.교사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러는 것인가?

폐쇄된 학교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노력 없이 과거에 배운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만 반복했다.신문도 안 보면서,동료교사끼리 동네 아줌마 수준링?못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했다.(책 후기에 나오는 명예 퇴직한 한국의 선생님 회고담 인용)

초등학교 때 일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중학교 때 국사 선생님은 예뻣다.27살쯤 되었는데 짖궂은 놈들은 그녀의 치마 속을 늘 궁금해 했다.하여간 예쁘고 인기 많았다.그런데 그녀는 내게 안좋은 쪽으로 기억되고 있다.국사 수업 중 생긴 일 때문이다.수업하다 말고 그녀가 니체와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다.어쨋든 젊고 예쁜 그녀가 한 말은 정확히 기억난다. "니체 알지? 유명한 철학자면서 '초인'이라는 걸 이야기 했던 사람이야.일종의 천재지.그 사람이 말이지.'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했어.이게 무슨 오만한 말이니? 천재면 뭐해.그런 천재도 자기 잘난 맛에 '신은 죽었다'는 헛소리나 하고.아마 지금쯤 지옥에서 벌벌 떨고 있겠지....또 너네들 석가모니 부처 알지? 그 사람도 오만해.갓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그러니까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낫다.다른 것들은 나 내 발 아래다.'이런 말이야.어떻게 간난아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놔두더라도 ..얼마나 오만하냐 인간인 주제에..'

예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내가 니체를 아는 것도 부처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저건 아닌 것 같은데..'신은 죽었다''천상천하유아독존'에 저런  뜻 말고 다른 깊은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아...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여쁜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그건 상관없다치자. 예쁘고 인기많은 그녀의 철학적 빈곤함과 편협함이라니.....지금 만나면 머리통을 받아 버리고 싶다.'이 무식한 선생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오래 전 기억인데 아직 생생한건 그 선생의 거지같은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햇던 상황 때문일 것이다.내가 만약 '선생님 그건 아닌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뻔하다.'니가 선생이야.니가 그렇게 잘났어.공부 좀 하다고 선생을 우습게 아네.' 그리고 싸대기...인신공격적인 모욕과 조롱,이어서 담임에게 보고...담임에게 보복....학교에서 누가 감히 선생에게 대든단 말인가? 대들 수 있다.대들면 열나 두드려 맞고 찍혀서 두고 두고 씹히고 부모님 소환당할 각오는 해야된다.선생에게 게기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이유는 단 한가지.' 내 아이가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삼전도의 굴욕인가? 청나라에 볼모 보내게.) 괜히 시끄럽게 해서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봐 보고도 못 본척하고 미워도 돈찔러주고 싫어도 오냐오냐 한다.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그러셨을 것이고 또 이 땅의 수 백 만명의 부모들이 그럴 것이다.

선생님 이야기를 하다보니..뭐가 그리 떠오르는게 많은지 좀 두서가 없어진다.기억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기 이야기를 쓰라고 머릿 속에서 쟁쟁거린다.

마지막은 좀 통쾌한 이야기로 막을 내리자.

아기가 태어나고 한 달간 도우미 아줌마를 두었다.그런데 이 아줌마 또 -좋은 의미에서 -독특하다.작지만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분이었다.이 아줌마가 애가 세명이다.그러니 초등학교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는 건 미루어 알 수 있다.

둘째 딸이 어느 날 학교에서 방석인가 뭔가를 들고 왔다.세탁해서 학교 가져오라는 것이었다.그런데 다음날 아기가 내피를 길에서 잃어 버린 것이다.선생님은 그 때 부터 아이를 채근했다.'칠칠치 못하게 그런 것도 못챙기냐'는 식이다.한 번 그러고 말면될 걸..수업 시간에 아이가 좀 버벅 거리면 또 그 이야기를 꺼내서 아이를 주눅들게 했다.아줌마가 학부모회의에 갔다.아줌마 모시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지고 가셨다.다른 학부모들이 흘깃 흘깃 아줌자를 쳐다봤다.회의가 끝나고 담임 선생이랑 면담을 했다.

아줌마)(침착하게)얘가 칠칠 맞아서 선생님이 고생하지지요. 선생)아니에요..**이 공부도 잘하고 착실해요.

아줌마)지난 번에 방석도 흘리고 다녀서 선생님 속 썩여드렸을텐데..선생)아니에요.아이들이 그맘 때는 다 그렇죠뭐,

아줌마)그 방석 어떤 걸로 원하세요.더 큰 크고 세걸로 제가 다시 사놓을께요...선생)그럴실 필요 없어요.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구요...

아줌마)..예..그래요.(싸늘하게)그럼 선생님 저랑 약속한가지해요. 선생) 예?.....       

아줌마)다시는 아이에게 그 방석 가지고 왈가왈부 하지 마세요. 선생) .....

이 아줌자의 지론은 그렇다.선생과 싸우지 않고 피해가려면 처음부터 그?해달라는데로 해라.그게 아니라 도저히 이대로는 안돼겠다 싶어 싸우기로 했으면 반드시 이겨라.

아줌마의 첫째딸 선생은 아이가 반장이어서 은근히 뭔가를 요구했다고 한다.'옆반 반장은 교감 선생이랑 해서 회식을 했다는군요.이번 달에 소풍이 있는데.... 옆반에서는...우리도 그렇게 해야하는데 등등' 그런데 아줌마가 그닥 반응하지 않았나 보다.아이에게 은근한 압박이 들어왔다.아줌마 분노하여 학교로 향했다.선생왈 '아이 서울대 보내려면 이래 저래 학부모님들이 많이 지원해주고 그러셔야해요.' 선생님 상대를 잘못만난거다. 아줌마가 그랬다. '아...고작 서울대에요.그정도 하면 우리 아이 하버드정도는 보내 주실지 알았는데..그런거 하면서까지 아이를 서울대 보내고 싶지 않네요.아이야...당장 자퇴를 시켜도 돼고 검정고시를 준비시켜도 돼요.공부 잘해봐야 다들 별것 없더군요.전 공부에만 연연해 하지 않아요....제가 아이를 자퇴시킬까요? 대신 우리 아이 자퇴시키면 선생님은 편안하게 남은 교직생활 하실꺼 같으세요? "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도우미 아줌마를 만나도 한 성질하는- 나같은- 사람을 만난다.^^

내가 아는 어떤 동료 와이프는 이렇게 말한다.'말 안듣고 속만 썩이는 지 자식들 맡아주는데 당연히 1년에 한 두번 얼굴 디밀고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이 언니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 무슨 교육 철학이 있어서 선생하는 것 같지 않다.요즘 임용고시 보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교육적 가치보다 '철밥통'때문에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생님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말 안듣는 놈들과 하루 왠종일 붙어 있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아마 마약 수사하려고 일주일씩 거지처럼 잠복하는 형사들보다 힘들꺼 같고 농사지어도 손해만 봐서 가슴이 시커먼 농부들보다 힘들것 같다.그런 선생님들께는 '사직'이라는 좋은 제도가 열려 있다....선생님들 고생하시는 것 안다....그런데 나이가 들면 세상에 쉬운 일 없다는 것 정도도 알아야 한다.

보복이 두려운 사족) 직능단체 전체를 도매급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야죠.일부 교사들 이야기고 제가 기억하는 나쁜 교사들 이야깁니다.알라딘에도 교사분들이 많으니 그 분들을 적으로 삼겠다는게 아닌 것도 밝혀야죠.전 그분들을 사랑해요.!! ......(제길 알라딘을 다시 접어야하나..이런 내면의 사전검열을 하고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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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4 16:36   좋아요 0 | URL
말없이 추천누르고 가시는 분들이 님의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잘 보았어요. 그 도우미 아주머니 한 카리스마 하십니다. 멋져요!

호랑녀 2006-11-14 22:44   좋아요 0 | URL
오늘 글들은... 댓글수보다 추천 수가 엄청 많군요 ^^
도우미 아주머니 정말 멋지네요.

드팀전 2006-11-16 09:3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안녕하세요.수능일 아침이라 춥네요.회사 나와서 점퍼를 하나 더 입었습니다.마치 눈사람 같습니다.제가 그닥 추위를 타는 편은 아닌데 11월의 이런 사르르한 추위는 좀 약합니다.몸살 올 때 느끼는 그런 차가움이에요.
호랑녀님>5개 넘으면 추천수 많은거죠.제 기분으로도 ^^ 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얍쌀한 리뷰를 써야돼는데 안타깝군요.그냥 그 때 그 때 달라요..락 가수가 트로트도 불러줘야 재미있잖아요.제 리뷰처럼 제 필체도 사실 여러가지랍니다.자판으로 치는 건 늘 똑같지만.어떨 때는 제가 다중인격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요즘은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지요. 김원장님이 다시 부를까봐 겁나서 ^^

코마개 2006-11-21 17:32   좋아요 0 | URL
속이 후련하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소리만 들으면 갑자기 속에서 뭔가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 오릅니다.

글샘 2006-11-23 10:23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교사 혐오자입니다. 그래서 교사가 된 것이고요. 저런 인간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게만 할 순 없다는 오기가 저를 사범대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저도 크게 다르지 않게 되더군요. 그것이 저의 문제, 교사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사회적 문제임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족이 없었으면 ㅋㅋ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어요.
강쥐님... 저도 고딩때 샘들 보기 싫어서 홈커밍데이같을 때 안 간답니다.
교사도 철밥통일 시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곧 계약직으로 바뀌고, 방학때 월급 없고, 맨날 평가 받고, 세빠지게 일해야 할 시절이 오겠지요. 교육 시장이 개방되고 나면 공교육은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무너질 테니까요...

별빛수 2007-02-27 19:19   좋아요 0 | URL
학교독서모임 도서로 읽기로 한 책입니다. 더러는 반성하며 더러는 분노할 것이 뻔하지만...오늘보다 나은 교육하기를 찾는 교사들이 현장에 있음을 기억해 주시길...대통령을 비판하듯 정부를 비판하듯...어쩌다 온통 비판뿐인 세상...서로 의지하며 살아도 힘든데...때론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 마음 편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를 넘어선 인정하기가 되기 위해...저도 되도록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 책을 읽어볼까 합니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내가 겪은 6.25 전쟁
김원일 외 글, 박도 사진편집 / 눈빛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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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언제나 대규모의 학살을 동반한다.<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에서 눈에 밟히는 사진들도 학살의 장면을 담은 것과 영문도 모르는 채  전쟁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사진이다.

1950년 7월 대전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는 학살 직전의 한 장의 사진.삶과 죽음이 종잇장 한 장 사이였던 아비규환의 시대를 보여 준다.사진은 사선 구도를 하고 있다.사진의 배경이 되는 위쪽에는 폭 2m 를 넘어 보이는 구덩이가 있다.그리고 그 안에는 몸의 온기도 빠져 나가지 않았을 주검들이 빼곡히 누워있다.다리가 서로 얽혀 있기도 하고 주검들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있기도 하다.그리고 불과 몇 초 후 자신의 모습이 될 그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는사람들이 구덩이 위에 있다. 배를 바닥에 대고 서로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굴비처럼 엮여있다.사진에는 4명의 사형수가 보인다.머릴를 짧게 잘라서인지 어려보인다.20살을 조금 넘었음직하다.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사형수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그는 엷은 미소를 띄고 있는 것 같다.아니면 죽음 앞에서도 끊을 수 없었던 순간적인 호기심일지도 모른다.그의 얼굴에는 살려달라는 마지막 염원이 담겨있다.그 젊은이는 그렇게 세상에 마지막 모습을 남겼다.그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50년 전의 한국전쟁에서 죽음의 사자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했다.그가 펼친 죽음의 망토는 한반도 전역을 뒤덮었다.어느 때 보다도 잔혹하게 그의 칼날은 대지를 갈랐으며 그 때 마다 이 땅에서는 수 천 수 만의 울음이 핏물처럼 터져나왔다.죽음의 사자는 여러 모습으로 다가왔다.미국의 폭격으로,국군의 소총소리로,북한군의 탱크소리로, 또는 완장을 찬 이웃 아저씨의 모습으로.... 소설가 전상국은 그의 글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던 죽음의 공포를 이렇게 표현한다 .

"무서웠다.밤은 밤대로,낮은 낮대로,낯선 사람은 낯설어서,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무서웠다."

한국 전쟁의 공포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거대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된다.이 정신적 외상은 '자기와 직계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낳게 한다.이 공포의 '원기억'은 전쟁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사회적으로는 우리 사회를 '가족 국가' 로 만들어 버려서 '시민사회'의 공간을 앗아가 버린다.또한 사람들 마음 속의 증오와 생존본능은 치환되어 '사람들 사이의 정글'을 만들어 버렸다.

1951년 4월 대구에서 찍었던 석장의 사진은 학살 장면의 슬라이드다. 북한군 부역자들에 대한 국군의 처형 장면을 담고 있다. 10명이 안되는 시골 농사꾼 같은 사람들이 서 있다.그 한쪽 옆에 책임자인 듯 한 사람이 철모를 쓰고 웃고 있다.아마 자신의 업적으로 남게될 기념 촬영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반면 옆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침울하다.자신들이 어떻게 될 까 하는 염려와 '설마' 하는 감정이 뒤섞여 있다.그 들 손에는 삽이 들려져 있다.그들은 구덩이를 팠다.그들 중 대다수는 이 구덩이가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또는 본능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음 사진은 그들이 빼곡히 구덩이에 들어가 있다.고개를 땅에 묻고 있다.뒤에는 죽음의 사신들이 준비를 끝냈다.대장인 듯 한 사람이 구덩이 쪽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손짓을 한다.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 '너희들은 빨갱이를 도와서 부역을 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판 무덤에서 죽는다.우리를 원망하지는 말아라.빨갱이들에게는 총알도 아깝지만...너희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거다."....그리고 다음 장면은 서양 회화의 가장 유명한 학살 그림의 구도와 닮았다.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나 게르니카의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 속 사람들이 서있던 반면 실제의 피학살자들은 구덩이에 처박혀 있다.그래서 더욱 처참하다.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내가 저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피학살자였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상상해봤다.뒤에서는 대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한다.내 옆에는 함께 농사짓고 밥 나누어 먹도 이웃 친구가 나와 같은 모습을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내 눈 앞에는 내가 파 놓은 구덩이의 흙더미 벽이 있다.한 30초 쯤 지나면 총탄의 괴성과 고통이 이 구덩이를 덮을 것이다.만약 내가 그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어떤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까? 비록 나는 상상이지만 이 땅에서는 50년전에 그런 기억을 담고 사라져간 영혼들이 수백만이다.아니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음의 사자가 날린 칼날에 사라져 갔을 것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학살의 장면들은 주로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 사진들이다.물론 어떤 사진들은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원래 전통적 의미의 학살은 국가 권력이나 권력에 힘입은 자들이 비전투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살해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 전쟁 당시의 학살은 나치와 같이 조직화된 유대인학살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전쟁에서의 학살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그중 가장 잔인한 것이 '보복성 학살'이다.특히 국가 권력의 부실성으로 인해 민간에서의 학살이 쉽게 자행된 한국 전쟁의 경우 그 잔인성과 피해 범위가 대단히 컸다.남한과 북한은 어찌되었건 전쟁을 통해 국가 건설은 완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념 유지에 방해가 되거나 또는 부정적 결과를 미칠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길 원했다.결국 국가 권력은 학살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물론 권력의 개입보다 양 국민들 사이의 사적 보복심에 의해 자행된 경우가 훨씬 많지만 그러한 학살 양상을 방기한 것은 국가 권력이다.

김동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시의 학살은 국가 탄생의 비밀이다.국가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하게 감추려 한다.그러나 출생은 대체로 일생을 지배한다.학살은 과거의 일이지만 학살을 저지른 국가는 그 이후의 정치 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더듬는 사진들 중에서도 나는 아기들 사진에 눈이 머문다.아빠가 되고 나서 생긴 변화중에 하나이다.길거리를 가다가 미아찾기 사진이 보이면 한번 더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신문에서 어른들의 부주의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기사를 보면 눈물이 핑돈다.좀 더 밝은 쪽으로도 마찬가지다.인터넷을 오고가며 만나는 예쁜 아기 사진도 예전보다 훨씬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태어난 지 백일 조금 지난 우리 아기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이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에서도 나는 아기들 사진을 더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인천의 어떤 판자집 건물 앞에서 울고 있는 두세살쯤 된 단발머리 여자아이.판자로된 건물의 황량함이 울음의 배경이 되고 있어 더욱 처연하다.아이는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있다.아랫도리는 어디다 잃어버렸나 보다.아이는 길 밖의 먼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다. 아이의 입을 보면 울면서도 엄마를 부르고 있는게 분명하다. 사진을 보면서 자꾸 아이의 울음소리와 환청이 들려서 사진을 오래처다보기 힘들었다.그 옆에 있는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돌을 겨우 지난 아이같아 보인다.발가벗고 길바닥에 앉아서 울고 있다.말라버린 강변에 앉아 있는 듯 하다.빈 밥그릇에 수저가 외롭다. 이 두 사진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아기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마치 연말에 받는 크리스마스 음악 카드처럼 책을 펼치면 울음소리가 진동한다.배고파서 힘이 쭉빠진 서럽고 긴 울음 소리다.그 다음 장에는 폭격을 맞아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아기의 사진과 아기를 살펴 달라고 군인들을 붙잡아 세운 아버지의 사진이 있다.나는 내 아기가 저 들것에 누워 있는 아기라면...하는 생각을 하며 몸서리 쳤다.다음 사진은 찢어질 듯 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폭격으로 엄마가 죽었다.폭격을 피해 길가의 덩쿨 속으로 피했지만 목숨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다.누나인 듯 한 아이는 엄마의 죽음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돌 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전쟁을 갈라 버릴 듯 날카롭게 울고 있다. 주검이 된 엄마의 버선 신은 발이 덩쿨 속에서 보인다.버선 위로 드러난 발목은 아직 아기들을 두고 가기 힘들다고 말하는 듯 하다.엄마는 죽기 직전까지 이 아이를 죽음의 사신들로 부터 지키기 위해 몸으로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슬프다.

 북핵문제로 한반도가 시끄럽다.조금 실마리가 풀려나가는 모습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북핵 초기에 어떤 신문들은 국민들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국민들은 오히려 관망하는 태도인데 비해 수탉이 홰치듯이 여기저시 전쟁의 불안감을 조성했다.마치 '여차 하면 한번 붙을 수 도 있는 것 아니냐?'는 투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쟁은 어쩔수 없이 죽음이 발생하는 공간일 뿐이다.어차피 누군가는 죽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에 조금 죽어나가도 할 수 없다는 식이다.모르겠다.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지하 벙커로 피할 능력도 있고 미국으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인지...나는- 그리고 나같은 많은 사람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나와 내 가족은 모든 폭력과 죽음을 우리들의 몸으로 받아 낼수 밖에 없다.50여년 전에 사진이 실렸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 그랬듯이.그래서 나는 어떤 이유로든- 크라우비츠의 말을 인용하며 정치의 연장 어쩌구 하는 것도 내겐 개소리다-전쟁에 반대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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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04 08: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 제게는 이른 아침부터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님의 마음이 너무 잘 와 닿네요. 전쟁에 대한 주제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야할 때가 많은데, 이 책을 통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

마늘빵 2006-11-04 08:45   좋아요 0 | URL
한 표 행사하고 갑니다.

마노아 2006-11-04 08:47   좋아요 0 | URL
책, 그 이상의 리뷰였어요. 잘 보았습니다. ^^

달팽이 2006-11-04 22:03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