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인가 대학 동기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곤혹스럽다.결코 말이 없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그런 자리에 가면 의외로 할 말이 별로 없어진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그래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더 할 말이 없어지는, 어떻게 보면 일반적이면서도 스스로 낯선 상황에 처한다.
문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대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 크는 거 이야기하고 과거의 추억담들을 몇 가지 꺼내고 나면 별로 나눌 말이 없다.결국 이야기는 '돈' 이 화제가 되기 십상이다.누가 돈을 벌었네 부터 어떻게 하면 돈이 되네 ..또는 돈 벌기 쉽지 않네 등등
사람 사는게 '돈'과 뗄래야 뗄 수 없다 보니 '돈'이 공통의 화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그런데 온갖 부동산과 재테크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주로 듣고) 나면 허전하다.나를 더 허전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의 모습에 오버랩되는 20대 초반 그들 얼굴이다.대개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의 모습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이런 사실은 마음을 더 허전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다른 말로 하면 나는 지금의 그의 모습에서 머리가 세어버린 미래의 친구들의 모습도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거는 지금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분명하다.그들이 순순했다기 보다는 그들이 순수의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나아보인 것 뿐이다.이제 그들의 지난 날은 돌아올 수 없는 김광석의 목소리처럼 박제된 CD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물론 대학 동기들과의 대화 소재가 한정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의식해서 일 수 도 있다.즉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 속에서 상대를 스스로 일반화 시켜 버린 것일 수 도 있다는 말이다.소통의 빈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가능성도 그렇게 크지는 않다.더 잦은 만남을 갖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 역시 마찬가지다.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 낮에는 대학 선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한때 운동을 좀 했던 선배다.나름 멋있었고 88만원 세대는 부러워 할 만한 거품 경제의 끝자락에서 대학 내내 시위만 하다가도 대략 기자가 되어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이다.그런 자리에 가면 기억나는 사람들의 근황과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의 근황을 한꺼번에 듣는다.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내 코는 오래 묵은 신문지같은 '운동의 향수와 후일담' 의 향기를 맡았으며 내 귀는 부서지기 싫어하는 자긍심과 현실의 불일치 사이에서 생기는 파열음을 들었다.
대학 다닐때 검은 양복에 갈라진 목소리,부서질 것 같지 않은 단호함으로 후배들을 독려하던 사람들.그들은 지금 청와대 어딘가에 있거나 다음 총선에서 어디 나온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있다.또 그걸 전하는 양반들 역시 나름대로 시장 군수쯤은 지독히도 괴롭힐 수 있는 자리에 있다.한 두 번 그들의 비리를 건드린 것을 마치 자신의 도덕성과 지사성이 지금도 저류에 깔려있다는 듯 행세한다.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적 특성으로 부터 개인적 혜택을 보는 바가 더 크다.
예를 들어 오늘 들었던 이야기 중에 하나는 선생님인 자기 와이프를 경남에서 부산으로 옮기기 위해 교육감과 직접 만나서 쇼부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또는 신도시로 편입되는 자기 집의 감정평가를 높게 받기 위해 자기가 일하는 언론사를 이야기하면서 함께 술 한잔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그 결과 -예를 들어- 보상되는 감나무 6그루가 16그루로 기록된다는 둥...
이런 이야기들이 부끄러움 없이 마치 자신들의 특권들을 전시하는 양 내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다.그건 그 사람이 뻔뻔해서가 아니다.이런 정도의 특권들은 '너희들도 다 보는 거 아니냐'는 내집단의 음탕함에 대해 씨익하고 서로 웃음을 나누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나는 이래 저래 비주류고 적응 못하고 있다.약간 심기도 불편하다 보니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인간적으로 따뜻한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오히려 그런 저런 너스레를 떨고 우하하 웃으며 공감하고 어깨를 두르렸던 사람들이 더 훈훈하게 기억될 것이다.
운동하던 선배들은 '저 자식 예나 지금이나 뭔가 센티멘탈한척 안 섞이네.세상 살면서 뭐 날카로운 의식이나 있는 놈인가? 지 멋대로 생각없이 살다 가것지' ..할 것이고,어울렁 더울렁 동기들은 '저거 또 잘난 척하네.뭐가 또 그렇게 까탈스럽냐?' 할 것이다.
술 판을 엎을 만큼 혈기가 왕성한 것도 아니고 대놓고 논쟁을 벌일 만큼 열이 뻗치지도 않는다.그래저래 내가 속한 공간에서 늘 비주류 인생이다.동문회에서는 동문회대로, 회사에서는 회사대로 ,알라딘은 알라딘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