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주미힌님이 퍼온  페이퍼 <나는 다섯번 잡혔다>를 보다가 어제 거리에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평화로운 집회였고 축제같은 시위여서 좋았다. 집에 있는 아기와 통화도 하고,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겠다라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했던 행진이었다. 소고기는 서울 사람이나 부산 사람이나 똑같이 먹게될 터인데 시위에도 중심과 주변성이 생긴다.하지만 어떡게 하겠는가?

축제같은 행진을 한 걸음 내딛다가 이렇게 평화로운 시위의 토대를 위해 쓰러졌던 이들을 생각했다. 허공으로 떠나버린 분노와 얼음같이 굳어버린 함성들.그리고 아스팥트 위에 떨어졌던 혈흔들.처음 나간 대규모 가투에서 지랄탄이 코 앞에 떨어져 넋을 놓아 버린 대학 동기도 생각이 났다. 최루가스는 잘생긴 그 친구를 진흙 구멍을 파는 돼지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미 닫게 버린 명동의 어느 상가 문 틈으로 머리를 디밀고 숨 쉬겠다고 '우웨 우웨'거리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이미 그 곳은 잠겨있었는데도 그 친구는 한동안 구석에서 그 철문을 밀어올리려고 했다. 눈은 감은채 '우웩 우웨' 돼지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민주주의는 탐욕스러운 야수처럼 많은 피를 요구했다.수많은 싸움과 죽음이 있었다. 그 시절이 가고 이제 최루탄이 어떤 향수를 닮았는지 알지 못하는 세대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시대는 여전히 깜깜하고 싸워야 할 적들은 훨씬 현명해졌다. 골리앗보다 상대하기 힘든 것은 안개같은 적이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우리의 적은 안개같다. 그래서 전선은 더 미분화되어야 하고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80년대의 터널을 막 기어나온 듯 한 이명박은 역설적이게도 상대하기 쉬운 적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386세대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나는 386의 끝자락으로서 그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386세대를 하나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편의상 그렇게 하자. 내가 싫어했던 386세대는 크게 두가지 부류였다. 하나는 '운동엘리트'들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국화나 정계 언저리에 있다. 나는 그들이 정계 입문했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 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이상을 현실에 조화시켜 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들이 그렇게 비판했던 기득권 체제의 막내 동생이 되어 함께 고기맛을 향유한다. 또는 운동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 고기를 얻는 대열에 낀다. 또 마땅치 않은 386세대는 '성찰하지 않는' 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운동 경험과 시대 정신을 더 이어가지 않는다. 운동에 끝은 없다. 운동은 움직이는 것인데 그들은 경험을 박제화 시켜 버리고 이젠 생활전선의 투사가 되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이익'과 '이상'을 맞트레이드한다.

나는 줄곧 386세대들에 비판적이었지만 그들이 한 시대를 겪으며 아파하고 피흘리고 이룩해 놓은 것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역사가 없었으면 지금처럼 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축제를 벌일 수는 없었다. 어느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뚝떨어진 '사회적 존재' 란 없다. 나는 이번 시위가 새로운 형태의 시위여서 누구보다 반갑고 ,또 그 끝이 누구보다 궁금하다. 그리고 축제의 밥상을 멋진 수사학으로 차려준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흙이 묻은 운동화로 차려준 이들에게 누구보다 감사한다. 수많은 죽음들에 감사하고 수많은 눈물들에 감사한다. 내겐 오늘의 흥분보다 그들에 대한 감사와 그들이 걸었던 힘든 시간이 더 많이 떠올랐다. 이게 회고적이라면 난 비난을 달게 받을 것이다.대신 나 역시 그 무시무시한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을 탈각시켜 버린 무정함을 묻겠다. 내가  암호화된 귓속말을 이용하든, 인터넷 중계를 이용하든, 내가 병 든 자리에 촛불을 올리든, 나는 그 장구한 물결 속에 하나일 뿐이다. 수 천 년동안 이루어온 그 움직임 속에 하나이다.

이번 시위는 '미국 소 수입 반대'에서 시작되었다가 '이명박 퇴진'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말 '이명박이 퇴진'할지는 모르겠지만....정작 '이명박퇴진'은 '이명박'이 어떡게 하냐에 따라 달린 것 같다. 지금처럼 더 밀어붙이기로 나가면 정말 '퇴진'당할 것은 명백하다. 임기 채우려는 욕심과 머리가 있다면 그런 짓은 안하는게 좋을 듯 한데.2MB의 용량은 이제 가름이 안된다.^^

 어쨋거나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음식은 반세계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전자 조작 거부 운동이나 종자 지적 재산권 반대 운동 같이 반세계화 운동에서 혁혁한 투쟁들은 '음식'과 관련이 있었다. 반세계화 운동의 타깃으로 '맥도날드'가 지목되는 것은 두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는 듯 하다.하나는 '미국의 상징' 또다른 하나는 '음식의 상징'. 그런면에서 대한민국에서는 '미국 소'가 그 역을 맡게 되었다.

심상정이 민노당 후보시절 정태인 수석이 '한미 FTA반대' 슬로건의로 '우리 아이의 식탁이 위태롭다' 라는 걸 기치로 내걸었을 때, 나는 파급력이 있는,미디어적으로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심상정이 결선에 떨어지면서 그 슬로건은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만.

이제 시위는 전화되어 '이명박 퇴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여론조사가 있었다.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명박의 미국 소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질문에서 40% 이상의 사람이 '이번 일이 정리되고 나면 잘 해나갈 것이다' 라고 답했다. 즉 '미국소' 문제를 단편적인 하나의 정책 실수로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철학'의 부재이지 '정책의 실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미국 소 수입'에 반대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음식'이라는 특수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별다른 대안이 없어 세계화를 인정한다고 하는 사람들 조차 '음식'문제에 있어서는 그런 흐름에 꼭 동의하지 만은 않는다.

이명박은 앞으로 걸고 넘어질게 수도 없이 많다. 다음은 아마 '대운하'가 될 듯하다. 과연 '대운하' 때도 이만큼의 파괴력을 가질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다. 이번의 '대중투쟁'의 경험이 이런 불신이 틀렸음을 입증해주길 바랄 뿐이다.부디...

라주미힌님이 퍼온 페이퍼에서 이번 시위는 '외롭지 않다'라고 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87년 6월 이후 가장 많은 자발적 대중 동원이다. 인터넷을 통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 조차 에너지를 불어 넣어 준다. 이 거대한 시위는 외롭지 않다.

그런데...외로운 곳은 없을까? 축제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것은 아니다.후미에 있다면 귀에 이어폰 꽂고도 할 수 있는 시위의 안락함과 지대한 관심의 눈길 속에 외로운 곳은 없을까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 

 기륭전자. 이랜드, 알리안츠, KTX, 코스콤.....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뭐 지금 그런 생각이냐고?  그래. 나중에 ..뒤에 뒤에 <지식e>같은데서 하면 감동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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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6-0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운 투쟁들...
저도 '밥상투쟁'에 그들을 위한 촛불도 빛이 났으면 하네요...

드팀전 2008-06-04 09:11   좋아요 0 | URL
냉정하게 말해서 그럴 일은 없을 듯 합니다.
그건 직접 맞닥드려야 느낄 수 있는 절박함입니다.저 역시 회사에서 공포감만 느끼고 또 간접경험의 분노만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사IN 기자들의 파업 후 인터뷰가 아주 솔직하고 좋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어떤 기자가 그랬더군요.
'자주 현장에서 그런 노동자들을 만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분노하고 함께 걱정해주고 해서...그 상황을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건 완전한 오산이었다. 실제 천막을 치고 거기서 밥해먹고,생계를 위해 에어콘을 뜯고 하다 보니...정말 힘들었다. 새벽에 그렇게 일찍 거리를 청소하는 할아버지가 계신지 그 빗자루 소리도 들렸고...그동안 좀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버릴 수 있었던게 큰 깨우침이었다.'

전 그 기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느낄 수 있었던 그의 진정성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가시장미 2008-06-0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지않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죠. :)

드팀전 2008-06-04 09:12   좋아요 0 | URL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문제다 보니까요..

마늘빵 2008-06-0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몸땡이 배터리 충전해서 금토일 신나게 놀 예정입니다. :) 어제 오늘은 다른 일로 바빴지만. -_- 내일은 좀 쉬고.

드팀전 2008-06-04 09:13   좋아요 0 | URL
쉬어가면서 하는 게 맞습니다...다치지도 말아야하고.

비로그인 2008-06-04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까지 촛불집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어요. 아마도 담주 6.10 때는 갈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새 자본가가 자기가 하던 방식대로 일처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요. 이명박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집회를 할 때면 사업주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는 듯한 거 같아요. 국민들이 자본가들의 노동탄압을 그대로 버려두었기에 그렇게 길들여진 자본가가 자기가 원래 하던대로 하고 있을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답니다.
노동자, 장애인, 여성, 이주노동자... 여러가지 사회적 약자들의 운동은 버려두었던 국민들이 이렇게 크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면도 있어요. 이명박이 더이상 무리수를 두지 않는 한 정권퇴진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다만 이번 일로 사람들이 집회나 결사의 자유 혹은 자기의 생존권, 인권, 자존감을 걸고 운동하는 여러 집단 및 개인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넓어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차근차근 민주주의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리고 기륭전자...^^;)

마늘빵 2008-06-04 09:09   좋아요 0 | URL
네. 지금 시위는 자신의 현실적 삶과 관련된 것이니까 이 정도겠죠. 이 여세를 몰아서 다른 일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합니다. 이제 시위문화가 나날이 진화하고 있고, 동참하는 사람들도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드팀전 2008-06-04 09:46   좋아요 0 | URL
이유님> 국민들이 그럴 수 밖에 없지요.사회적 이슈 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하루의 일상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야하기 때문입니다.그렇기때문에 직업적 운동가도 필요하고 이론가도 필요하고...각자의 위치에서 부분적인 얼개를 엮어 나가는 것이겠지요.국민들이 다른 문제에 관신을 덜 갖는 것을 뭐라고 할 수 도 없을 듯 해요.전 대중들에 대해 혁명적 낙관주의를 갖지는 않습니다.그렇다고 대중은 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존재라고 더더욱 생각치도 않구요. 현재의 축제적인 흥분을 새로운 운동주체의 탄생으로 보는 의견들이 많던데..설령 그렇다하더라고 기본적인 '대중 속성'에 대한 성찰이 빠지면 대항권력 상정의 강박에서 나온 조급증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또한 전지구적 자본주의 변화에 대한 대항권력의 창출은 운동주체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이지 과거의 개념들과의 단절을 상정할 필요도 없어보입니다.그것이야 말로 이론적 선명성을 우선시하는 아카데미즘에 가깝지요.자본이 있는 곳에 노동운동이나 피억압자들의 구체적인 저항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프님> 그런 바람은 가져봅니다. 투쟁과 승리의 경험은 그래서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위는 아프님 말씀처럼 '주제의 직접성'과 '이명박의 무식함'이 나사의 회전운동을 일으켜서 거대해진 것으로 보입니다.특히 '이명박'의 공이 커보입니다.이명박의 무식함은 앞으로도 계속 갈 터이고 진보 진영이 어떻게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듯 한 신자유주의적 주제들이 대중들에게 소고기 문제처럼 직접적 사안인지 알리는데 총력을 기울여야겠지요. 뭐 무슨 전위같은 이야기냐라고 욕먹을지 모르겟습니다만...
 

미국산 쇠고기가 저장되어 있는 감만부두는 어제 하루 긴장상태였다. 민주노총과 화물연대가 경유값인상 문제와 연계하여 미국소 운송거부 투쟁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시위는 시민 중심의 촛불집회와 다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경찰이나 언론이 주목했다.

중공업 노조나 전농 외에 가장 과격한 양상을 띠는 것이 화물연대 운전사 아저씨들이다. 감만부두는 부산사람들도 특별히 갈 일이 없는 그런 후미진 곳에 있다. 컨테이너 박스와 대형 화물차만 있는 곳에 뭐 볼께 있다고 가겠는가? .

이번주에 아무리 봐도 월요일이 그나마 시간이 날 듯 해서..퇴근 후 그 먼 감만부두로 향했다. 일단 시위의 성격이 조금 다를 것 같아서 긴장과 호기심이 널뛰기를 했다. 창 밖을 보니 비가 한 두 방울 내리고 있었다.

감만부두에서는 친절한 교통경찰이 시위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옛날 부터 바뀌지 않는 원칙인데... 경찰만큼 분업화된 관료주의가 정착된 곳이 없다. 아무리 과격 시위를 해보 절대 교통경찰은 시위대를 건드리지 않는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위대 숫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런 숫자를 파악하는데 무척 둔하다. 대개 신문쪽  추정과 시위대 쪽 추정은 편차가 크다. 나는 대략 그 중간 선이라고 믿는 습관이 생겼다. 대략 보기에 1천명 안팎인듯 햇다..잘 모르겠다. 대개는 민주노총과 화물연대 조합원들이었다.그러나 시위대 뒤쪽에는 아이들과 나온 아주머니, 스스로 만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푯말을 들고 있는 고등학생, 쇼핑가방을 들고온 젊은 여인 등등이 있었다.

화물연대 아저씨들 옆에 앉아서 구호도 외치고 촛불도 치켜들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고등학생에게 일회용 비옷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이 녀석이 주머니에서 주물럭 주물럭 동전 몇 개를 꺼내고 있는데 그 때 얼른 내 지갑을 열었어야 했다. 쑥스러움에 약간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쳤다. 주머니에 몇 백원 밖에 없어보이던데...

나는 화물연대 아저씨가 던져주는 비옷을 입었다.공짜다..^^

노래패의 공연이 있었는데...^^...노래패 소속의 한 처자가 이런 말을 했다.

'아..저희가 요즘 집회에 많이 가는데...이 곡을 꼭 부르고 싶었지만 단 한번도 부르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불러도 괜찮을 듯 하네요. '단결투쟁가' 큰 목소리로 함께 하겠습니다'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나도 힘차게 따라 불렀다.노래를 하다가 비오는 감만부두 하늘에 떠 있는 대형 크레인을 봤다. 조명을 받아서 꽤나 괜찮아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스팥트 위에서 '단결투쟁가'를 불러 본게 얼마만인가 새삼 생각이 들었다. 회사 노조발대식 같은데서야 부르지만 그거야 실내 아니던가?

"아..아 우리의 힘은 힘찬 단결투쟁뿐이다."

집회는 예상과 달리 9시쯤 끝이났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좀 싱거웠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날 집회 시작 전에 정부가 '관보 제본 중지'를 지시했기때문에 민주노총도 철야집회를 촛불문화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시위대 중 200-300여명은 가두 행진에 나섰다.감만항에서 출발해서 우암동을 거쳐 유엔공원쪽으로 나아갔다. 중간에 경찰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중간에 집에 전화를 걸어서 조금 있다 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또 걷다가 옛날 생각도 좀 하고...이렇게 계속 걸으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대략 1시간쯤 걸었다. 별다른 방해도 없이 또 별다른 공포감도 없이 이 얼마나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에 좋은 웰빙 시위인가?

시위대가 유엔 공원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쯤 드디어 전경들이 길을 막았다. 나는 시위대 중반부 쯤에 있었는데...순간 덜컥...걸음을 멈추었다. 일종의 조건반사다. 그사이 선두 대열이 토끼들이 사냥꾼 다리 사이를 빠져 나가듯 전경 대열 좌우로 마구 빠져나갔다. 전경도 쫓는 쪽에 비중을 두었던 듯 하다.약간의 몸싸움이 있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시위대 선두가 대연역 방향으로 쪼르르 뛰어가자 전경본대도 그들을 따라 또르륵 뛰어갔다. 그러니까 중반부 이후는 그냥 또 설레 설레 걸어서 대연역까지 알아서 걸어갔다. 일단 그렇게 끝이었다. 산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산은 서울보다 시위대의 규모도 집회 양상도 훨씬 얌전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후배'수포'를 떠올렸다.

90년도인가 91년도인가 물대포가 처음 나왔던 걸로 안다. 가투상황이었는데 나는 전경애들에게 뭔가 하나 던지고 돌아섰다.항상 80% 정도의 힘으로 던졌다. 어차피 누구 맞추자고 던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기는 싫었다. 던지고 몸을 돌리는 순간 오른쪽 발목 5CM앞에서 사과탄이 하나 펑 터졌다.사과탄이야 그럴리 없겠지만 당시 경찰이 최루탄 직격사격이 종종있었다. 심각한 부상자들이 나왔다.그런 연상 작용때문이었는데 발목에 허연가루를 보니까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뛰어서 본대로 돌아가는 와중에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렸다.^^  한참 뛰다가 추격 사정권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쯤 머리 위로 새찬 물줄기 하나가 지나갔다.

"어..물대포네' 나는 내 머리 위를 지나 본대쪽으로 날아가는 물대포의 궤적을 쫓다가 골목으로 방향을 급회전했다. 물대포의 궤적은 후미쪽 사람들을 향해있었다.그 사이는 물 한 방울 맞지 않았다. 나는 골목에서 물대포가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신기하기도 했고 좀 살았다 싶었는지...

"어...무지개뜨네"  했다.

시위가 끝나고 후배 하나가 물대포에 직격으로 맞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친구 등은 '수포'덩어리였다. 손톱만한 수포가 목 뒤부터 허리 부근 까지 촘촘히 돋아올랐다. 아프다는 후배가 안스럽기도 했지만 다들 처음보는 '수포' 에 시골사람 칼러TV 처음 보는 모양으로 신기해했다. 후배는 일주일 동안 배를 깔고 자야했다. 물대포 맞은 사람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가 좀 더 예민했던 듯 하다.

집에 가다가 '수포' 후배는 요즘 뭐하나 생각을 했고..또 내가 시위에 나오기 위해 집에서 아이와 씨름했을 와이프를 생각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시위참가는 아내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번 주 수요일 서면 집회에는 아내를 대신 내보낼까 싶기도 하다. 아이와 함께 가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오래있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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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에 12시 다돼서 퇴근했다. 뭔 일이 있나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파워는 들어오는데 창이 뜨지 않는다. 컴퓨터 화면이 밤 처럼 깜깜했다.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마찬가지...그러니까 주말은 컴퓨터를 아예 켜지도 못했다.

집에서는 신문도 보지 않고 TV도 거의 보지 않는다. 토요일 밤에는 와이프랑 시위 나가는 것 때문에 약간 실랑이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와이프도 나와 동일한 정치적 입장이다.하지만 육아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나보다 높기때문에 같은 환경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 토요일 밤에는 거리에서 싸우지 못하고 집에서 싸우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와이프의 주장은은 주먹 쥐고 손금보자는 것 처럼 느껴졌다...정리하자면...나가라..그런데 나가면 나는 주중 내내 아기데리고 힘들었는데 언제 쉬냐....말로는 나가라고 하면서 얼굴에 저어하는 표정이 있으니 이거야 진퇴양난이다.

살살 달래야하는 것을.. 먼저 욱 해버려서 싸움이 되고 말았다. 부부간의 싸움이 대게 그렇듯이 처음과 끝의 싸움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다가 대충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약간 싱숭생숭하다가 무마된다. 아침에 들어보니 와이프가 말한 건 그런 뜻은 아니었다는데...(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어쨋거나 토요일 밤에 성질내다가 후딱 자버리고,일요일 낮에 함께 놀던 이웃집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토요일 밤에 있었던 일을 알았다. 그리고 어제는 뉴스를 좀 자주 봤다. MBC는 시민들이 당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편집한 뉴스를 내보냈다. 이번 일에 불을 당긴 것은 두 곳의 공영방송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몫은 시민들이다. 물론 그 동안 꾸준하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미국 소 수입에 저항해온 진보 진영의 담론들이 없었다면 그 대중 역시 갑자기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싸움은 토요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성격으로 돌입했다. 알라딘에 들어와보니 급박성이 느껴진다. 미국소 반대에서 이제는 정권 퇴진운동의 성격으로 전화된 것이다. 아무런 중심이 없는 과정에서 생긴 전화라서 사회학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분명히 중앙집중적인 중심은 없다. 진보 진영은 전면에 나서는 방식 대신에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는 형태로 거리를 유지했다. 야당의 장외투쟁이 있긴 했지만 숟가락 하나 더 얹은 것 같은 양상이다.특히 민주당 의원들의 모습은 그렇다.나는 모든 정치권이 숟가락 얹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시민들이 움직임을 갖기 아주 오래전부터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 진영에서는 크고 작은 싸움과 대국민 홍보를 지속적으로 행해왔다. 그러니까....시민들의 분출되는 힘이 거대하다고 이제 와서 정치권은 빠져라..라고 싸잡아 말하는 것은 정말 싸가지 없는 짓이다.결국 거대한 힘은 어떤 대안으로 모아지지 않으면 네거티브 운동으로 끝나고 만다.나는 기본적으로 이번 시위에 대해 생태주의적 입장에 공감하고 또한 이명박에반대를 한다. 이명박은 그런 고상한(?) 가치가 아니어도 물고 늘어질게 백만 수물 두가지는 된다.그러므로  내 입장에서는 '미국 소 반대 투쟁'이 끝나고 그 투쟁이 단초가 되어 인식론적으로도 확장되길 기대한다. (이건 사실 함께 싸운 평범한 농민들과의 전선이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차후 논의할 부분이다. 지금은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해 진돗개처럼 물고 놓치 않아야 한다.

TV를 통해 시위그림을 보면 아무래도 서울과 지방의 긴박성이 확연히 다르다. 모인 사람들의 규모부터 다르고 그곳에는 '청와대'가 있지만 지방에는 없다. 그래서 넘어가야할 담장이 없어서인지 부산 쪽 시위는 훨씬 얌전하다. 오늘 감만부두에서 화물연대의 파업이 이명박 퇴진 구호와 연대하게 될 것 같다. 아무래도 좀 과격해질 듯 하다. 화물연대 아저씨들은 생존권이 달려 있는 문제여서 평균적으로 그래왔다. 무셥봥..

나는 이번 주도 무지하게 바쁘다. 바쁘면 집에 늦게 가고 늦게 가면 와이프가 시무룩하고..주말에는 꽉잡히고...ㅜㅜ  가정을 지키기가 나라지키는 것 만큼 힘들구나.이번 주에 처가에 가면 혼자 서울 좀 올라가려고 하는데..그때쯤 서울에 동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때까지 다들 다치지 마시고 무사히 투쟁해주시길...

'너 그..거시기 파란집에 잠시 세들어사는 넘...너는 나 올라가면 ..죽은 목쉼이여..' ^^;

요즘 조선일보 보면 조선일보가 얼마나 훌륭한 경영마인드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약삭빠를 정도로 기회주의적이지. 조선일보는 그 동안 평소답게 '시위배후론'을 주장하였으나 지난 금요일 사회부장의 커다란 박스 기사 이후 살짝 방향을 틀어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요런식으로 묻어가고 있다. 오늘 신문을 봐도 '과격한 배후론'과 '폭력론'대신에 '이명박정부가 귀를 열어야 된다'는 쪽으로 옮겨타고 있다. 이건 '증후'다. 다른 말로 하면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고 머리좋고 발빠른 기로 유명한 조선일보가 살짝 방향을 틀어서 '보험'드는 것 보면,이미 대세는 시민들의 승리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힘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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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2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6-03 13:04   좋아요 0 | URL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마노아 2008-06-0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의 기사에서 일말의 희망을 보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심각하게 읽다가 마지막에 피식 웃었어요. 드팀전님도 힘내셔요. 육아도 전쟁이잖아요^^

드팀전 2008-06-03 13:04   좋아요 0 | URL
전쟁은 아니지만 힘들긴합니다.

나비80 2008-06-0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자 배후를 자처하셔서들인지 알라디너들은 징후에도 밝으시군요.

드팀전 2008-06-03 18:18   좋아요 0 | URL
뭔 느낌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어떤 누가 자기들이 배후라고 하던가요?...뭔가 맘에 안드시는군요?

글샘 2008-06-0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현충일을 기해서 같이 서울구경 가실 생각 없나요? ㅎㅎ
청계광장에서 알라딘 번개도 함 하구요~

드팀전 2008-06-03 22:57   좋아요 0 | URL
원래 계획이 있었는데...와이프의 처가행이 다른 일정으로 인해 조금 조정되었습니다.제 원 계획은 처가가서 저만 서울 올라가는 것이었거든요.아무래도 처갓집에는 가족이 많으니 저 하나 잠시 없어도 덜 툴툴거릴테니까...
그런데 와이프가 어떤 일을 하나 맡아서 좀 불투명해졋습니다.
청계광장 아니더라도 언제 술이나 한잔 하시지요.^^ 다른 분들도.

나비80 2008-06-0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안들기는요. 지금 시민들, 알라디너분들 거의 대부분이 스스로 촛불시위의 주체가 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말인걸요.^^ 나름 유머로써 응원하려는 표현이 드팀전 님의 오해를 샀군요. 제가 지금 드팀전 님과 차이가 있다면 저는 총각이기 때문에 집회 참가할 때 아직 전쟁을 치룰일이 없다는 것 정도겠죠.^^
 

  "청계천 촛불, '정직한 반항' 또 '희망의 근거'"
  [인터뷰] <녹색평론> 100호 펴낸 김종철 발행인
 
  2008-05-19 오전 10:21:59
 
   

 
 

  지난 13일 발행된 2008년 5·6월호로 <녹색평론>이 100호를 기록했다. 17년 전 1991년 11월 말 창간호를 낸 이래 두 달에 한 번씩,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 겸 편집인은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는 게 우리 스스로도 약간 믿어지지 않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종철 발행인은 <녹색평론>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를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지금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프레시안>은 김종철 발행인을 지난 15일 오후 서울 필운동의 <녹색평론> 자료실에서 만나 여전히 희망의 근거를 찾는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청계천 촛불에서 '희망'을 보았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 ⓒ프레시안

  김종철 발행인은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청계천을 찾아 촛불을 든다. <녹색평론>은 어느 잡지보다도 빨리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관련 기사 : "한미 FTA, 경제 성장, 민주주의") 그는 촛불 집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촛불 집회에 자주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10대가 주도한 이번 촛불 집회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대들이 주도한 이번 촛불 집회를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번 촛불 집회의 의미는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성찰돼야 하겠지만, 즉흥적으로 몇 가지 생각이 든다. 나는 10대의 문화를 정말 잘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신문을 읽지 않는 세대일 테니까, 자연히 이른바 '조·중·동'이라 불리는 수구 언론에 의해서 정신적 오염이 덜 되었을 거라는 것이다.
  
  사실 기성세대는 조·중·동의 관점을 비판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조·중·동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래서 사회변혁에 대해서 대개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에 빠져 있다. <경향신문>, <한겨레>와 같은 매체가 조·중·동에 대한 '대안' 언론이 되지 못하고 '대항' 언론에 머물고 있는 현상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촛불 집회를 주도한 10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조·중·동의 틀에 갇히지 않은 탓에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파악을 하고, 거기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지금 10대는 '거짓'과 '불의'에 대항해서 아주 정직한 '반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로 이런 정직한 반항이야말로 4·19 혁명, 5·18 항쟁 등의 원동력 아니었나?
  
  촛불 집회를 보면서 아, 한국 사회에 아직도 진실에 대한 감각을 가진 세대가 살아 있구나, 이런 기운이 모여서 새로운 희망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청계천의 촛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자본, 성장 따위로 위기 극복할 수 없다"
  
  '희망'을 말하는 김종철 발행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 <녹색평론>은 지난 17년간 절망과 싸워왔다. 당장 <녹색평론>이 시작한 이유야말로 절망이 주는 압박 탓이었다. 그는 창간사에서 현실을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 "묵시록적 상황"이라고 쓰며 대응을 촉구했었다.
  
  - 지난 17년간 계속 오늘날 여러 가지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찾아 왔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는 위기들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자본, 성장 따위로 해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본과 국가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녹색평론>은 지난 17년간 줄곧 우리의 삶이 경제 성장과 산업주의 개발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 고발하고,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희망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탐색해 왔다.
  
  다행히도 많지는 않지만 이런 <녹색평론>의 시각에 적지 않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온 탓에 지난 17년을 버틸 수 있었다. <녹색평론>을 꼬박꼬박 챙겨 읽는 6000여 명의 농민, 노동자, 주부, 종교인, 시민운동·주민운동 활동가들과 이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전국의 '<녹색평론> 독자 모임'이야말로 이 잡지를 내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다."
  
  격월로 펴내는 <녹색평론>은 매번 1만 부를 찍는다. 그 중 6000부 정도가 정기 구독(5000부), 서점 판매(1000부) 등으로 소화되고, 나머지는 도서관 등에 기증된다. 인문·사회과학 책이 초판 2000부를 팔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녹색평론>의 이런 성적은 놀랄 만한 일이다.
  
  "농민이 천대 받는 사회, 미래 없다"
  
▲<땅의 옹호>(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녹색평론사는 <녹색평론> 100호에 맞춰 몇 권의 단행본을 펴냈다. 그 중 김종철 발행인이 펴낸 책 두 권 중 한 권의 제목은 <땅의 옹호>이다. 김 발행인과 <녹색평론>은 송기호 변호사의 말을 빌리자면 "징그럽게" 농업, 농촌, 소농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렇게 "땅을 옹호"해온 <녹색평론>을 놓고 많은 이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 <녹색평론>은 한국의 매체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농의 중요성을 말하는 잡지다.
  
  "이번에 책 두 권을 내면서 지난 쓴 글을 정리해보니 정말 '징그럽게' 농업, 농촌, 소농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더라. 글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내 글을 처음 보는 사람을 생각해서 중요한 대목을 계속 강조하다보니, 결국은 비슷한 주장이 계속 반복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결과 <녹색평론>은 끊임없이 농업, 농촌, 소농을 강조하는 유일한 잡지가 되었다.
  
  이렇게 농업, 농촌, 소농을 강조하는 걸 놓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농업, 농촌, 소농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녹색평론>의 문제의식을 잘 설명해주는 불교 게송(偈頌) 중에 '空界循環濟有情(공계순환제유정)'이라는 게 있다. '세상은 순환을 통해서 모든 생명을 구제한다.'
  
  이 세상의 질서는 근본적으로 순환을 통해서 유지된다. 예를 들어 땅으로부터 먹을거리를 얻은 생물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가서 지력을 살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땅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솟고…. 모든 생명은 바로 이런 순환 속에서 살아왔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은 바로 이걸 깨뜨렸다.
  
  파국 직전의 위기 상황도 그 근본을 따져보면 바로 이 순환을 깨뜨린 데 있다. 그런데 정작 많은 이들은 자본, 성장, 과학기술을 통해서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임시방편으로 파국을 지연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그 중 대다수는 오히려 위기를 가속화한다.
  
  결국은 다시 순환할 수 있는 구조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게 옮다. 그런데 이렇게 방향 전환을 하자고 하면 결국 농업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순환적인 패턴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란 농사 중심의 생활 방식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이러한 농사는 지금과 같은 대규모 기계와 화학물질을 투입하는 공업화된 농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소농 중심의 유기적 농사라야 한다.
  
  그런데 소농이 왜 중요하냐 하면 소농이야말로 땅의 성질을 잘 알고, 땅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농의 이러난 지혜와 능력은 모두 오래된 농촌 공동체에서 나온다. 좋은 농사는 이처럼 공동체에 뿌리를 둔 농민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떤가? 지금처럼 농민이 사회에서 열등한 존재로 소외받고, 천대받는 사회가 없다. 이렇게 농민이 천대받는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다. 농민이 제일 존경 받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한국은 정반대다. 쿠바는 농민 소득이 대학교수 월급의 3배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다."
  
  - 기업농 중심의 산업화된 농업을 대안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소농이 바탕이 된 농촌 공동체가 부재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미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다국적 농업 회사가 장악한 미국의 농업은 화학비료, 농약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농업은 지속 불가능하다. 그 땅은 언젠가는 지력을 잃고 사막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전체 표토 중 4분의 1이 유실되었다. 전 세계가 미국을 좇아가면 결국 사막화하고 만다.
  
  이런 농업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건 바로 자살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유일한 출구는 소농이 바탕이 된 농촌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이 다 농민이 될 수 없다. 또 대도시 사람들이 모두 귀농을 할 수도 없다. 다만 이런 농업, 농촌, 소농이 근간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그런 방향으로 돌리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구조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농업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건 잘못된 전략이라는 지적도 있다. 농업을 육성할 게 아니라, 실력 좋은 '곡물 딜러'를 키워야 한다는 얘기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렇다. 지금 정부나 주류 엘리트는 가능하면 농업을 폐기하자는 쪽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지금 25%까지 떨어진 식량 자급률이 20%, 10% 이렇게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은 케케묵은 20세기적 방식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전 세계 선진국은 지금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한국의 농업 자급률이 가장 낮다. 전 세계 선진국은 기본적으로 식량 자급률을 높여야 국가 유지가 가능하리라고 판단하고 있는데,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평론>의 주장은 바로 이 자급률을 조금이라도 높여보자는 얘기다.
  
  농업을 폐기하자는 생각은 결국 집단 자살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식량 자급률이 적어도 40~50%는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그렇게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농촌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변화시키자.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노력을 해보자, 바로 이런 얘기다.
  
  잘못 된 길을 한참 온 마당에 지금 당장 순환 사회로 갈 수 없다. 대신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길을 찾고자, 순환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녹색평론>의 주장을 '비현실적'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적'인 것인지 한 번 묻고 싶다."
  
  "현실과 괴리된 지식인, 관념적 논쟁으로 시간 허비"
  
▲ ⓒ프레시안

  <녹색평론>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식인을 대상으로 펴낸 잡지다. 그러나 정작 지식사회에서 이 잡지는 17년 내내 변방에 머물렀다. 바로 그 지식인들이 이 잡지 앞에 "현실과 괴리된", 이런 수식어를 붙였다. 그러나 정작 창간 때부터 이 잡지와 함께해온 오랜 독자들은 "<녹색평론>이 현실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며 불평하곤 한다.
  
  - 앞에서도 나왔지만 <녹색평론>을 놓고 많은 지식인은 "현실과 괴리된" "뜬구름 잡는 소리"를 17년째 반복한다고 힐난하곤 한다.
  
  "그렇게 얘기하는 이들치고 <녹색평론>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이들이 있을까? <녹색평론>을 읽어봤다면 그런 얘기를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쇠고기 문제도 그렇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문제를 <녹색평론>처럼 일관된 관점으로 집요하게 다뤄온 잡지가 어디 있나?
  
  지난 17년간 <녹색평론>이 다뤄온 문제들, 지구 온난화가 야기하는 기후 변화, 광우병·조류독감(AI·Avian Influenza)처럼 먹을거리 산업화가 촉발한 전 지구적 전염병 사태, 황우석 사태로 확인된 현대 과학기술의 위기, 한미 FTA로 대표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등은 지금 모든 매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를 <녹색평론>만큼 꾸준히 다뤄온 잡지가 또 있는가? 그간 <녹색평론>이 다소 "현실과 괴리돼" 보였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한국 지식사회의 나태함을 증명하는 것인지 모른다. 정작 심각한 문제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관념적 논쟁만 해온 게 바로 한국의 지식사회 아닌가?"
  
  "학술진흥재단 체제, 한국 민주주의에 큰 해약"
  
  김종철 발행인과 <녹색평론>은 대학사회, 지식사회의 위기를 오래 전부터 경고해 왔다. 김 발행인 자신이 지난 2004년 오랫동안 몸담았던 대학을 자진해서 떠나며 '교수' 칭호를 버렸다. 대학 사회가 '지식인'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무관한 '기능인'만 조장하는 공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지식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평소 한국의 지식사회, 대학사회를 비롯한 지식인의 위기를 언급해왔다.
  
  "지식인이 제 역할을 해야 그 사회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민중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의 의사결정이 지식인과 그에 의존하는 정치인, 관료, 권력 엘리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나?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녹색평론>의 중요한 역할은 그런 지식인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 오늘날 이런 지식인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큰 문제는 지식인이 풀뿌리 사회, 민중과 유리된 채 정부, 기업, 대학에 고용된 기능인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업주의로부터 지식인을 보호하는 보루로서 미약하게나마 기능했던 대학이 기업에 예속되거나, 아예 대학 자체가 기업이 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더 심화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나는 학술진흥재단 체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정말 큰 해악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학교수의 처지를 들여다보면, 임용·재임용, 승진뿐만 아니라 교수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술진흥재단이 실적으로 인정하는 논문을 쓰는 일 이외에는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대학교수들은 현실을 성찰하고 사회적 발언을 할 기회를 갖기 어렵다. <녹색평론>과 같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시간 낭비'로 규정되는 상황이니, 자발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공적 토론 공간에 기꺼이 참여하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상황이 점점 심화되다 보면 이제 대학과 사회의 연결 고리는 완전히 끊어지고, 대다수 대학교수는 단순한 고급 월급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감수성'"
  
▲<녹색평론선집 2>(김종철 엮음,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이런 사정 탓일까? <녹색평론> 목차에서 대학교수의 이름은 늘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의 인문·사회 영역 잡지 중 시민단체·주민단체 활동가, 농민, 노동자, 그리고 주부 등이 목차에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많이 싣다보니 "초창기와 비교했을 때 감동이 덜 하다"는 비판도 있다.
  
  - 지난 2006~7년 한미 FTA 문제를 <녹색평론>이 집요하게 다룰 때, 일부 독자로부터 항의를 더러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녹색평론>을 처음 창간하고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의 광풍이 몰아쳤다. 한미 FTA도 그 연장선상 중의 하나일 텐데…. 그러다보니 <녹색평론> 초창기의 좀 낭만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생태 영성이라든지, 자연 현상의 신비로움이든지, 종교적인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녹색평론>의 오랜 독자 중에는 그런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차라리 그런 쪽으로 갔으면 지금보다 장사는 잘 됐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은 그런 얘기가 우리의 다급한 현실에서는 너무 한가로운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늘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녹색평론>이 좀 더 현실 문제에 개입하면서도, 여느 시사 잡지와는 다른 근본적이고 감동이 있는 접근을 하는 게 필요할 텐데…, 그런 걸 어떻게 보완할지가 요즘의 고민 중 하나다. 다시 생각해 보면 <녹색평론>을 최초로 접하는 독자도 많이 있을 텐데, 그런 독자에게 초기 독자가 느꼈던 그런 감동을 주는 글을 발굴해서 싣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녹색평론>이 초기 짧은 시간에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논리'가 아닌 '감성'으로 위기의 본질을 전한 전략 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가끔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의 접근 방법에 나 자신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들도 위기의 징후를 포착한 것 같기는 한데, 정작 그 위기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구체적인 실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 때마다 현실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감수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럼 점에서도 앞으로 객관적인 논리와 분석으로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탐구하면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글을 <녹색평론>을 통해 많이 소개하고 싶다. 100호를 내면서, 양과 질 면에서 앞으로 <녹색평론>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런 부분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녹색평론>의 첫 1년간 실린 글 중에서 말 그대로 '정수'를 뽑아서 펴낸 책이 바로 <녹색평론 선집 1>이다. 이 <녹색평론 선집 1>은 15년 전 발간되었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녹색평론 선집 1>이 '삶의 전환점'이 됐다는 이들의 고백을 염두에 두면 '감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적당한 성장, 불가능하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올해 초 발행된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통권139호)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실명으로 거론하는 글을 기고했다('민주주의, 성장사회, 농적 순환사회'). 그 잡지의 청탁으로 이뤄진 그 글은 지식인 사이에서 적잖은 화제가 되었다. 백 교수는 곧 발행될 <창작과비평> 2008년 여름호(통권140호)에 반론을 실을 예정이다.
  
  - 이번 '녹색평론 통권 100호 기념 좌담'을 읽어보면, 앞으로 <녹색평론>이 새로운 지적 담론을 형성하는 토론에 좀 더 적극적으로 뛰어드려는 의지를 표현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이번에 100호를 내면서 지난 17년간 <녹색평론>을 내면서 좀 소극적이지 않았나, 이런 반성을 많이 했다. 지금 한국의 진보적인 지식계에 몇 개의 지배적 담론이 있지 않나? 그런 담론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녹색평론>의 관점에서 비판할 건 비판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는 그런 적극적인 노력을 앞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 극복 논의'나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의 복원 논의' 등이 떠오른다.
  
  "그렇다. 이미 백 교수의 경우에는 마침 <창작과비평>에서 청탁이 와서 한두 가지 비판적 지적을 했다. 백 교수가 반론을 한다니 나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해야 할 것 같다. 최 교수의 경우에는 그의 글을 기회가 되면 한번 찬찬히 검토하고 싶다.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가 되면, 앞으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논평을 해볼 생각이다."
  
  - 백낙청 교수의 경우에는 <녹색평론>의 논의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백 교수와 <녹색평론>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경제 성장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아예 경제 성장 자체를 재고할 것인가, 아니면 '적당한' 성장 정도로 타협할 것인가, 이런 논점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녹색평론>은 창간 때부터 줄곧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난'을 강조해왔다. 자, 생각해보자, 공생하려면 개인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사람, 또는 한 나라가 특권을 누리자고 나서면 당장은 어느 정도의 성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혼자서는 살 수가 없고, 공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공생을 생각한다면 특권적인 욕망과 권력의 추구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배타적인 경쟁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논리로는 공생의 삶을 실현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한계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은 명백히 지속 불가능하다. 당장 석유 문명의 지속성을 놓고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은 실정이다. 석유라는 게 언제 고갈되거나 경제성이 없는 것이 될지 불확실한 데다, 기후 변화를 염두에 두면 조만간 심각한 규제를 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럼, 태양 에너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 전제 조건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말은 다른 게 아니다. 한계를 알자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가능한 한 검소하게 살면서, 대신 인간으로서의 품위 있는 삶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를 일단 수긍하게 되면, 이런 식의 공생공락의 가난한 삶을 향유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일단 자본주의 경쟁에 뛰어들자마자 끊임없는 성장의 압박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 결말은 파국뿐이다."
  
  "이상적인 정당 체제, 한국에서 가능하리라 믿는 근거는 뭔가"
  
▲ ⓒ프레시안

  <녹색평론>은 창간 때부터 지속적으로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을 전제로 하는 자본의 논리로부터 벗어난 풀뿌리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해왔다. 이 풀뿌리 공동체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야말로 <녹색평론>이 추구해온 핵심 가치 중 하나다. 이런 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전제로 하는 정당 정치의 활성화를 염두에 둔 최장집 교수 등의 논의와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 최장집 교수나 정치학계의 논의는 최근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정당 정치의 부재에서 찾는다. 그간 풀뿌리 공동체 중심의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해온 <녹색평론>은 이런 논의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그 문제에 관해서 내가 조만간 본격적인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정당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입장이 깔려 있다. 즉 '민주적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기본 틀 속에서 민중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당이 집권을 하고, 그런 정부가 제대로 된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그런 국가가 가능하다는 발상….
  
  아마도 서유럽의 복지국가를 염두에 둔 발상인 듯싶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현재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관계, 즉 전 세계적인 남북문제를 염두에 둘 때, 과연 서구형 복지국가라는 게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전체 지구의 아주 일부분의 나라에서 아주 제한적인 시기에만 가능한 모델이 아닌가?
  
  대안 체제를 논의할 때는 적어도 과연 이 체제가 세계의 보편적 모델이 될 수 있는지,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 내가 지금 지향하는 체제가 유럽,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나라에서도 가능할 수 있는가? 다들 이 체제를 유지하면서 지구 안에서 공생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민주적 자본주의는 불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극히 제한적인 지역에서, 20세기 후반 수십 년 동안 지속됐던 모델, 그러면서 그 배후에는 수많은 나라, 민중의 피눈물이 전제가 됐던 모델은 결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안 체제가 아니다. 최소한 지금 논의해야 할 대안 체제는 전 지구를 염두에 두면서 구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인류 전체가 공생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지식인은 세계적인 정의(正義)라는 시각에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연 지금과 같은 대의 민주주의가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편적인 양심에 일치하는 세계관을 가진 정당과 지도자에게 권력을 줄 수 있는 구조인가? 지금은 인류의 장래를 생각할 때, 참으로 중대한 위기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힘을 가진 나라들-미국, 유럽, 일본, 한국 등-에서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소위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기꾼이거나 탐욕스러운 바보이기 쉽다. 이러한 사람들의 지도 밑에서 지구 사회가 직면한 위기 상황이 극복될 수 있겠는가?
  
  바로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결과가 바로 이런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상적인 정당 정치가 가능할 수 있을까? 아직 내가 깊이 공부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앞으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당장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실천 있다"
  
  그러나 <녹색평론>과 김종철 발행인은 진보 정당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활동가는 <녹색평론>의 단골 필자이다. 역시 이들에게 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녹색평론>만큼 주는 잡지는 드물다. 지난 3월 심상정 전 의원은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추천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종철 발행인을 고려한 적도 있다.
  
  - <녹색평론>은 항상 진보 정치, 녹색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나는 원론적으로는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가치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중앙 정치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자본과 결탁해서 움직이는 중앙 정치를 감시하고 바꿔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국민국가 틀 안에서 힘겹게 이뤄낸 최소한의 제도적 민주주의의 성과마저도 수포로 돌아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당에 투신할 수는 없더라도 새로운 흐름에 관심을 가지는 건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살길은 다양한 형태의 협업 내지 협동조합 운동을 통한 자치의 확대라고 생각한다. 원래 협동조합 운동은 산업혁명의 와중에 민중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자발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득세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하면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실체야 어쨌든 소련, 중국 등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해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협동조합 운동은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이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이 협동조합 운동 논리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도 이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한국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나 공동체주의적 이상을 가지고 있는 정치 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겠는가? 패배주의적인 얘기가 아니라 국가를 장악해서 사회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사고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새로운 억압 체제를 낳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령 협동조합 운동이나 자주적 생활 공동체 운동 등 자치 운동을 시작하면 당장 그 일을 꿈꾸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유인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같이 그 운동을 하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을 바로 느낄 수 있다. 마르크스도 얘기했듯이, 우리가 물건을 풍부하게 소유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인간됨을 풍부하게 하는 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이다. 그러한 의미의 풍요로운 삶을 협동적 생활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다.
  
  물론 국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 억압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당장 여기서 자유인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이고, 적어도 내 경험과 생각으로는 유일한 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간디가 생각했던 마을 중심의 정치 구조, 그것과 유사한 형태일 것이다. 나는 간디가 생각한 마을 중심의 정치 구조가 어떤 식으로든 부활해야 인류의 살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도시 속에서 익명적 존재가 아니라, 마을 속에서 주체적인 개인으로 이웃과 더불어 삶을 즐기면서 사는 그런 사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각성한 개인이야말로 '희망의 근거'다"
  
▲ ⓒ프레시안

  김종철 발행인은 대학을 떠난 후 지난 2004년부터 매주 '이반 일리치 읽기 모임'을 꾸려오고 있다. 이 모임은 벌써 4년째 꼬박꼬박 진행하고 있다. 그는 <땅의 옹호>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대학 생활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오늘날 원자화된 개인은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다. 그들이 과연 그런 제안을 수용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람들이 각성해야 한다. <녹색평론>은 이런 바람을 가지고 17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대기업, 소수 기득권층 등 인류 전체로 보면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단기적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면서 대다수의 인류가 노예처럼 살고 있다.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인가?
  
  한편으로는 그 특권적인 부류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는 공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성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많아지면 방향이 바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혼자만 각성한다면 외롭다. 외로운 사람은 쉽게 절망하고 무력감에 빠진다. 각성한 사람들이 연결이 돼야 하고, 동지가 돼야 한다.
  
  <녹색평론>은 바로 그런 이들의 희망의 근거가 되고자 노력했다. 앞으로도 <녹색평론> 또는 <녹색평론>과 같은 이상을 가지고 실천하는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각성하고, 연대하는 독자들이 바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지난 17년간 <녹색평론>이 바라본 세상은 결코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녹색평론>을 꼬박꼬박 찾는 6000명의 독자는 이 잡지를 통해 연결되는 수많은 '희망의 근거'를 통해서 절망의 시대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세상은 딱 그만큼 밝아졌는지 모른다. 김종철 발행인은 '100호를 내면서'에서 이렇게 썼다.
  
  "창간 초기부터 우리는 그동안 이 사회의 저변에 결코 무시 못 할 어떤 정신적 갈증이 잠재되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갈증을 느껴온 사람들은 <녹색평론>에서 불충분하게나마 위안을 얻고, <녹색평론>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적 동지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었다."
  
"장일순, 권정생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녹색평론사는 단행본을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이 출판사는 이번에도 <녹색평론> 100호를 기념해 <땅의 옹호>,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와 <녹색평론 선집 2>를 펴냈다. 앞의 두 권은 김종철 발행인의 글을 모은 것이고, <녹색평론 선집 2>는 제7호(1992년 11·12월호)부터 제26호(1996년 1·2월호)에 실린 글 중 일부를 묶은 것이다.
  
  이 출판사에서 펴낸 책들은 상업적인 고려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광고를 따로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입소문만으로 눈 밝은 독자가 찾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지음), <녹색평론 선집 1>,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최성현 옮김) 등은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 <녹색평론> 외에도 단행본을 내고 있다. 어떤 책이 첫 단행본인가?
  
  "창간호부터 제6호(1992년 9·10월호)까지 실린 글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뽑아서 엮어낸 <녹색평론 선집 1>을 1993년 3월에 펴냈다. 처음으로 낸 단행본이었는데, 독자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계속 선집을 펴낼 생각으로 '1'을 붙였던 것인데, 17년 만에 약속을 지키게 됐다. 연말까지 한 5권 분량으로 선집을 계속 펴낼 예정이다.
  
  <녹색평론 선집 1>을 제외하고는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실질적인 첫 단행본이다. 그리고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두 번째로 펴냈다. 장일순, 권정생 두 분은 일리치, 간디와 더불어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바를 말·글과 삶을 통해 몸소 실천한 이들이다.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그들의 책을 낸 것은 또 다른 큰 보람이다.
  
  - 마침 권정생의 1주기다. 고인의 생전에 깊은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 스승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대한민국에서 그가 '제일 무서운 양반'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 가지 일화를 말하자면 이런 게 있다. 어느 날 그가 툭하고 이런 얘기를 던지더라. 한창 퇴계 이황이야말로 한국의 유일무이한 대사상가라고 주목하던 때였다. "퇴계 집에 노비가 150명이나 있었다고 합디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노비는 생산에 동원되지 않으니, 그 노비까지 먹여 살리려면 퇴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소작농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이 한 마디로 퇴계 학문의 관념성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를 만나서 얘길 할 때마다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는 늘 나보고 글을 쉽게 쓰라며 번역투 문체를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문체를 바꾸는 게 어디 쉽나? 결국 아직도 그의 충고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이런저런 눈치 보지 않고 진심을 담아 해주는 사람을 앞으로는 결코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정말 큰 스승을 잃었다. 그나마 1주기에 맞춰 그의 유고를 모아 <우리들의 하느님>의 개정판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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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최루탄도 다시 나올 성 싶다.

최루탄 역시 항체 형성이 되는지 모르겠다. 경험상 최루탄은 항체형성이 되지 않는다. 대신 호흡기로 스멀 스멀 스며드는 가스를 막는 잔머리만는다.

잔머리를 이제 주식으로 돌려서 최루탄 만드는 회사나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놓으면 2MB 정권 하에서 더 더블은 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시드머니가 없다. ^^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허생전의 허생처럼 방독면을 미리 사재기를 해둘까...

 

..어제 시위에 대한 언론사별 사설/기사 타이틀을 한번 봤다.

<국민> 불법 거리시위로 변질된 촛불행사

<동아> 누구를 위해 '청와대로 쳐덜어가자'고 하는가

<세계> 과격해진 '촛불시위'방치해선 안된다

<중앙> 시험대에 오른 새 정권의 법집행 의지

<조선> 차도로 뛰어든 촛불 집회

<한겨레>연행과 처벌로는 촛불집회 막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역행할 거라고 모두들 예상했다. '설마..이렇게 까지야' 라고 생각했다면 2MB를 너무 만만히 본 '정세파악'실패자들 뿐이다. 예상대로 국민들은 이제 거리로 뛰쳐나가고 80년대 서울역광장의 무림/학림 논쟁을 귀엽게(?)  패러디한 '청와대 진공작전' 까지 나온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칠게 눈에 보듯 뻔하다.  

진보 진영은 정세적으로 딜레마에 빠져 있는 듯 보인다. 촛불시위의 정체성때문이다. 촛불시위는 그 출발부터 한계가 있다. 정의대로 '평화 문화제'가 된다면 2MB가 막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스폰서 해주면서 '평화문화제'를 지지해 줄 것이다. 그것은 '촛불 문화제'의 진정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문화제'식의 제도적 포용이 가능한 시민 불복종은 어떤 형태로든 포섭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세 변화에따라 쉽게 분열시키기 좋다는 뜻이다. 진보 진영은 현재의 정세를 전화시켜야 하는데 그럴 경우 촛불 시위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또는 지지자)의 이탈 역시 예상된다. 특히 정권의 정치적 공세에 따라 시위의 성격론이 어젠다가 되면서 분열하게 될 것 같다. 즉 '미친 소에 반대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 또는 ' 미국 소의 위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일뿐 더 나아가는 것은 반대한다.' 등으로 분할될 수 있다.예를 들어 현재 '미국 소 수입' 반대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한미,FTA' 문제까지 연동하여 반대하는 사람을 교집합으로 만들어내면 촛불 시위자(또는 지지자)의 다수가 또 이탈하게 된다.

현재 진보 진영은 더 앞서서 나아가지 않는 듯 하다. 지젝식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에게 '레닌'이 없기때문이다.

현재 2MB의 '가장 약한 고리'는 '소' 와 '대운하' 이다. 대한민국이 다리 풀린 미국소로 뼈에 구멍 숭숭나고 운하로 폐에 물 찬 땅덩어리가 되어 종합병동을 전전케하지 않으려면 진보 진영의 정확한 정세파악과 투쟁 방향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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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퇴양란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5-26 11:58 
    * 드팀전의 페이퍼에서 발췌  정의대로 '평화 문화제'가 된다면 2MB가 막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스폰서 해주면서 '평화문화제'를 지지해 줄 것이다. 그것은 '촛불 문화제'의 진정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문화제'식의 제도적 포용이 가능한 시민 불복종은 어떤 형태로든 포섭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세 변화에따라 쉽게 분열시키기 좋다는 뜻이다. -----   현재 진보 진영은 더 앞서서 나아가지 않는 듯 하다
 
 
가시장미 2008-05-2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우울합니다. -_ㅠ

드팀전 2008-05-27 09:12   좋아요 0 | URL
우울보다는 희망을...

마립간 2008-05-2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내용을 발췌 저의 페이퍼에 옮깁니다.

드팀전 2008-05-27 09:15   좋아요 0 | URL
?? ...사실 레닌이 필요없을지도 모르지요. 새로운 형태의 집회 양식 즉 중심없는 운동같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자율주의에서 말하는 일종의 '다중'같은 것일 수도 있지요.비판바들은 '다중'의 혁명을 '혁명 없는 혁명'이라고 말했지만 '혁명'까지 가지는 않아도 '다중'이 무언가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일겝니다.

marr 2008-05-2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파업 지지 집회에서도 촛불을 켭니다. 꽃병을 들어야 되는데.... 그러면 "누군 그러기 싫어서 촛불 드는줄 아나?" 그럽니다. 정치적이 될 필요가 있는데, 진보진영은 비정치적인 대중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삶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정치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드팀전 2008-05-28 16:54   좋아요 0 | URL
역사적으로 비유해볼수도 있을 듯 합니다.같지는 않겠지만...
과거 유럽의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관료주의로 곧 변질되는데 노동자 관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권력자들과 동일한 '대중의 통제 불가능' 상황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turk182s 2008-05-2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요즘 시위양상 가지고 다중의 출현이다 라고 말들하는데요, 이걸
정통좌파엄숙주의자들은 체제에대한 고민이 없으니까 비관적이다 하데요,,뭘어떻게 해야될지 솔직히 좌파진영 에서도 우왕좌왕 인듯해요.

드팀전 2008-05-3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화시대라고 했던 그 시절 모였던 대중은 누군가에 의해 사주 받았던 사람들일까 생각해봅니다....현재의 현상을 '다중'의 체현으로 보는 그 호기로움에는 좀 브레이크를 걸고 싶습니다.이론적 개념들이 현실에서 구현되고 그것을 적시한 혜안에 감동먹는 마스터로 가고 싶지는 않기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마 이번 시위가 정리되고 나면 학계에서 '시위의 정체성 논란'이 한번 붙을 듯 합니다. 또한 이것을 '계급정치적'으로 보지도 않습니다.(그런 사람이 있을까요?)한국적 상황에서 '다중'을 목도한 경험적 감격으로 인해 자율주의선수층들이 두꺼워지겠지요....예전에 이런 '대중'의 개념을 진보적 이름인 '다중'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발작적인(?) 대중들의 일시성은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자유주의적 시민론에서는 이런 열광적이되 단시간적인 불복종보다는 지속적 시민정신이 선진 사회를 만든다고 이야기하지요.전 이번 시위가 '다중'이나 '계급'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계급 이야기만 나오면 '그거 불순사상?' 이라고 할 사람많을 거고...바보같은 정권의 바보같은 대응에 대한 반2MB정서라는 현실 정치적 요소가 가장 큰 것이라는 단순하게 봅니다.물론 그것이 더 전화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그리고 그게 없는 것 아닌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봅니다.궁극적으로 다중이든 계급이든 마스터베이션용 확대해석을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물론 시간이 지나고나면 다른 의미도 부여하겠지만.

파도는 높낮이가 다르지만 바다를 만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