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강요하지 말라."

                                                                                                  - 미셀 푸코-

<내가 누구인지 말할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소설이 있었다. 내용도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리틀 이문열'이 될 뻔한 이인화가 작가였다는 것은 기억난다.

주체 문제에 있어서 나는 '탈자아론'적 입장에 있다. 김중혁이 그의 소설 뒷머리에 자기를 구성하는 문화 상품과 지식 상품들을 나열하고 그것이 모인 것이 '나'이다. 라고 했을 때 기계론적 합성이 웃기기는 했지만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맥락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분열된 자아에 그다지 큰 불만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통일된 자아' 라는 상을 만들려고 너무 애를 쓰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철학계에서 심난하게 만들었던 '상대주의'를 '총체성의 철학'으로 돌파하려는 지젝이나 바디우같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이 간다.

어떤 분이 내게 '맑스-레닌주의' 나 '트로츠키주의' 아닌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되었다. 생각해보니 또 그런 요소가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노동자' 문제와 '계급'문제를 이야기하고 구좌파의 책을 최근 주로 손을 대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요즘 흐르는 물의 흐름 중 일부분이다. 봄의 물 맛이 다르고 가을 물맛이 다르다.

나는 '촛불집회' 초기 부터 '생태주의적 가치'로 집회에 참가했다. 즉 소고기의 식품안정성을 넘어 '공장제 사육제도'와 그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적 소비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이야기했다. 물론 집회에서 구호는 똑같을 수 밖에 없다.

삶의 방식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변화는 요원하다.즉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에 의탁해 있다면 아무리 안전성 검사를 높이더라도 쇠고기의 문제는-또는 그와 유사한 방식의 문제는-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의 검역시스템이란 것은 그만큼 불충분하다. 언젠가 읽었던 글 중에서 '핵'의 안정성에 대한 글이 이에 대한 비유가 될 듯 하다. '핵은 기본적으로 무오류성에 바탕을 두고 추진된다' 는 대목이었다. 핵 시설을 설치할 때 한수원이주민들에게 절대 안전하다고 이야기하지 10000만분의 1이라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가 하는 일에 절대 안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기본적 한계를 망각한 '핵의 무오류주의'적 발상은 엄청난 모순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생태주의'를 주장하지만 '생태근본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것이 정치적 담론과 직접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저 도덕주의 운동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생태운동'을 위해 시골로 들어가는 분들의 개인적 선택을 존중한다. 그들이 하나의 거점이 되고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분들의 글이나 기사를 보면서 힘도 얻고 반성도 한다. 그렇지만 다수가 공생을 위한 대안적 방식을 찾기 위해서는 거대한 정치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서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생태주의적 실천을 함과 동시에 나는 또한 현실정치의 사회인으로서 그에 적합한 의무를 다해야한다. 나는 이것에 약간 의무감을 갖는다. 이유는 내가 잘먹고 잘살고 대학나와서 지금하는 일을 할 수 있는데는 나의 재능도 있었짐나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답답한 마음에 "아....C8 왜들 이렇게 뭘 모르고,무식하지..진짜 힘빠지네." 라고 했을 때 아내는 "자기가 얻었던 기회를 모든 사람들이 다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라고 말했다. 열받았던 마음을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나는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런 열받음은 순간 순간드는데 그 때 마다 나는 아내의 저 말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나는 생태주의와 좌파가 '자본주의'라는 공동의 대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하나가 삶의 태도와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또다른 하나는 역사와 제도의 측면에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 <자연과 타협하기>가 그런 고민에서 나온 책으로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범좌파'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어떤 사상이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 어떤 사상이든 자기 수용적 태도를 갖는다. 그것이 정규교육으로 학습받지 않은 수많은 메노키오들의 방식이다. 나는 그것을 아쉽게는 생각하지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이 있다면 그는 내게 다른 영역에서 그에 상응할 만한 것을 주었을테고 그런 역할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 받은 질문은 나에게 '범좌파'에서 '최종심급'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게 만들었다. 사실 '최종심급'이란 것 자체가 있을 만큼 대단한 내공을 쌓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찾을 만한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 '최종심급'이란 단어를 안다는 이유때문에 그 단어가 나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알튀세르는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차원'에서 '최종심급'을 이야기했다. 그는 '중층결정'의 과정 속에서도 그 '최종심급'으로 -앞의 전제를 단 채-'경제'를 말했다고 알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동물이다' 라는 것이다. 그게 알튀세르가 수용한 '최종심급'이다. 인간이 동물인지 모두 알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경제'도 아마 그에게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것처럼 말이다. 

윤건차의 <현대 한국사상의 흐름>을 다분히 도식적이긴 하지만 20세기 말의 한국 지식인의 지형도를 그린다. 스펙트럼은 구좌파 부터 시민사회론자들의 역사를 아우른다. 물론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보수적 민족주의자나 수구 보수주의자들을 이야기하지만 큰 장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2000년대 주목받은  자율주의같은 흐름은 빠져있다. 윤수종이나 조정환같은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다. 이 책의 증보판이 나온다면 '수유'같은 곳에서 활약하는 소장학자들의 이름도 거기에 등재될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학자들 역시 한가지 흐름을 갖고 있지는 않다. 물론 초지일관인 사람들도 있으나 대게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해서 이념적 차이, 사회를 분석하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나무 가지처럼 나뉘어진다. 한때는 같은 흐름이었다가 또 사상적으로,인간적으로도 갈라선 유명한 사람들도 있다.

나같은 아마추어 '범좌파'가  그다지 필요치도 않는 '최종심급'으로 윤건차의 도식을 살펴보면 나는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자  (여기에는 강내희 등의 문화연구그룸이 있다,그리고 이진경의 코뮌주의도 있다. 이 스펙트럼도 무지하게 넓다.) 좌파적 시민사회론자 (김동춘,조희연,임영일 등) 이 있는데 대략 저 둘 사이 어디가 아닐까 싶다.

특히 윤건차는 김동춘,조희연에 대해 재미있는 설명을 했는데...기억에 의존해서 쓰면 대략 이런 것이다.

김동춘과 조희연의 경우는 좌파 시민사회론자로 구분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전통을 토대로 삼는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한 '노동자'와 '계급'의 토대가 없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촛점을 맞춘 연구 작업들도 이루어왔다. 그러면서 이들은 구좌파가 비판하는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특히 임영일(나는 임영일의 책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은 그람시적인 시민사회론자이면서 노동계급이 시민계급으로 전화해 나가는 데에 대해 노동계급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작업을 한다. 특히 그가 있는 -창원인 듯 하다- 곳이 한국에서 산업의 중심적이 곳이어서 그는 실제 연구와 현장 활동에서 활약을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범좌파'라는 스스로의 자기 규정을 마음에 들어한다. 어떨 때는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구좌파식의 '개량주의'지적이 옳아보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노동자'들이 체제포섭되어 아무런 실제적 동력이 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이론이든 현실을 압도할 수 없고,또한 회색적이며,모든 이론은 중첩되어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내 편견에 때문이다. 그리고 또하나가 있다.'모든 이론은 현실과 별 상관없다.' 라는 '반이론적 정서'에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는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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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것 보다 이해하기 쉽다. 





이 친구는 예전에 부산에 있던 친구인데...

서울가서 무지하게 예뻐졌다.

덧니도 뺀 것 같구..

조명이나 세트,분장,의상 등이

아무래도 부산보다 10배쯤 나으니까 인물이 산다.

오며 가며 한 번 본 적 있었는데 키가 상당히 크고 얼굴이 작았다고 기억난다.

웃을 때 보조개도 나쁘지 않았구...

시위에 매일 이렇게 예쁜 여자들이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

(페니미즘 그룹에게 혼나는 건 아닌지..그래도 난 예쁜여자가 좋더라.)

 

 

촛불 집회가 여의도가 갔다고 한다.

문득 알라딘에 인용되는 신문이나 글 들 중에 <미디어 오늘>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 오늘>은 학교 다닐때 정기구독을 하기도 했었고, 요즘은 회사 자료실 가면 그냥 주워서 화장실에 두고 올 수 도 있다. 실제 정기구독은 좀 그렇다면 인터넷 신문 같은 것도 많이 좀 봤으면 좋겠다.

대학 들어가서 교수님이 <한국 언론사>시간인가 뭐 그런 시간에 처음으로 한 말이 그거였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 말은 50%만 믿어라." ....압축적으로 한 말이긴 하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면 된다. 아이들과 대중들에 대한 미디어 교육은 상당히 중요하다. 비판적 시각에 대한 훈련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자기가 보는 것이 자기가 믿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미디어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을 위한 미디어 교육 교부재다. 좋은 칼럼들도 많다. 내 기억에 강유원도 여기다가 글을 쓰고 있던데....클릭하면 바로 간다...

http://www.mediatoday.co.kr/

또 하나는 직종 홈페이지이긴 하지만 최근 사태와 관련해서 관심을 갖고 볼 만한 사이트다.

'한국PD연합회'에서 만드는 <PD저널>이다.

http://www.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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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팍 2008-07-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의 자유는 정말이지 언제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요?
정말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주말이 더 힘들다.

토요일 오전에는 아이와 함께 '아파트 놀이터 투어 프로젝트 3탄'을 시행했다. 와이프 맛사지 보내주고 예찬이와 3-4시간 놀아야 되는데 '놀이터'만큼 좋은 곳이 없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마다 놀이터 모양이 조금 다르다. 그래서 아이는 새로운 놀이터에 가면 정말 정신없이 신나게 논다. 그래서 시작된게 '놀이터 투어 프로젝트'. 이번 주에는 강 건너 있는 주공아파트 놀이터에 갔다. 우리동네 놀이터에 비해 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어서 예찬이 한테 딱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크고 작은 6군데의 놀이터를 다 돌아 다녔다.

토요일 오후에는 '예찬이의 촛불집회 3번째' 참가가 있었다. 나는 평일에도 틈틈히 나갔지만 와이프와 예찬이는 주말 집회만 참가한다. 물론 내가 혼자 가든 가족과 함께 가든 아주 늦은 시간까지 있을 수는 없다. 집회 가서 유모차 대기 좋은 곳을 찾다보니 전교조와 공공노조 언저리에 앉았다. 예찬이가 징징 거려서 안고 다니다가 몇 몇 아는 분들을 만났다. 지역 시민단체에 계신 분들과 눈인사를 했고..또 모유수유와 자연분만 모임의 시샵분도 만났다. 최근에 몇 달 전에 아이를 낳았는데 큰 애는 엄마가, 간난 아이는 아빠가 안고 왔다.

예찬이와 집회를 갈때 내 가방은 소풍가방이 된다. 각종 먹을 거리를 다 담아간다. 예찬이는 집회 중에 유모차에 앉아서 저녁 만찬을 했다. 전교조 쪽 분지 함께 나온 가족들인지 한 분이 떡을 주어서 또 예찬이의 저녁상이 풍족해졌다.

행진의 방향이 범내골 쪽이어서 함께 걷다가 중간에 빠져나왔다. 차를 그 쪽 어느 골목에 대놓아서 좀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회의 참가자는 아무리 '좋은 의지'로 무장해서 뻥을 쳐도 지난 6월 10일의 3분의 2수준이었다. 앞으로도 촛불은 계속 모일 것 같고...당장 쇠고기가 끝나도 5년 내내 이럴 것 같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100만이 아니라 200만도 모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모이면 뭐할 것인가?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걷고...해산하고...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문화정치적으로 분명히 의미있는 일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은 빠뀌어가고 함께 하는 의미를 깨우칠 것이다. 그런데...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말'이던가.

가끔 '직접 참여'가.. '말'의 영역인지 '행동'의 영역 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대부분 열성적인 진보적 다수는 '참여'가 거리에 나아가는 시간을 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액션을 하기 때문에 '행동'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또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이것은 혹시 '말'의 영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좀 유식하게 말하자면 '정치,사회적' 인것이 아니라 '문화적' 인 것 아닌가 하는 말이다. 물론 애초부터 '촛불은 문화정치다' 라고 생각했다면 별로 이상할게 없이 그 수순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시민들의 참여와 거대한 물결이 '정치,사회의 제도적' 변화를 이루어 내야만 '승리'를 선언할 수 있다고 -다수의 진보인사들과 생각이 다른- 무모한 생각을 했다. 우습게도 말이다.

지젝이 왜 촘스키나 하워드 진의 활동들을 긍정하면서도 그들을 비판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알라딘에서는 촘스키와 진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마 '반진보적' 인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좀 알아야 할 듯 하다. 지젝이 말하는 '유사 능동성' 만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다수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절대적 진리를 상정하지는 않고 싶다. 대신 내가 하는 것들이 '유사 능동성' 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게 그렇게 해가 될까?  

100만,200만 또 모일 수 도 있다. 그런데 질문은 100년에 가까와가는 질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일요일은 더 힘들었다.

아침 일찍 부터 금정산 산성 마을에 있는 '빅뱅 어린이 체험도서관'에 갔다 왔다. 뭐 그렇게 대단한 곳은 아니었지만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 모든 놀이 기구를 예찬이가 독점해서 가지고 노니 아이 보는 입장에서는 편안했다. 산성 마을에서 비빔밥을 먹고....예찬이의 의젓한 숟가락질은 또 주변 어른들에게 또 한번 칭찬의 대상이었다. 아이와 함께 풀밭에 누워서 잤다. 가져간 큰 수건을 이불 삼아 덮어주고 나는 하늘을 배경삼아 누워서 책을 좀 봤다.

아이가 깨어 나서는 사직동에 갔다. 이미 야구가 시작되어서 시끌시끌했다. 아내는 자전거를 빌리고 나는 전기자동차를 빌려서 아이를 앞에 앉히고 탔다. 바람을 맞아 일렁이는 아이의 머리결이 보기 좋았다. 예찬이는 신나서 '와..신난다.' '와...좋아..이쪽 ..이쪽 ' 을 연신 외쳤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고 아내도 즐거워 했다.

하루 종일 정말 빡빡하게 놀고 집에 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수고한 나를 위해 내가 준비한 '삿포로'생맥주 한 캔을 마셨다. ㄱ

..그리고...예찬이보다 먼저 자버렸다.

"예찬아...엄마랑 책읽어. 아빠는 오늘 안방에서 먼저 잘래'

쿨쿨...zzz

새벽에 수영가기 전까지-수영 배우기 시작한지 4개월째다-단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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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8-07-08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블로그엔 처음으로 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드팀전님은 맑스주의 진영내에서 자신의 성향이 다중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래도 맑스-레닌주의 혹은 트로츠키주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친구분이신 바람구두님 블로그에 남긴 아래의 글은 아무래도 <자율주의>에 오해가 조금 있으신 것 같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자율주의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전 가두시만 열 다섯 번 이상 참가했습니다.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조 못하고요. 아무래도 아래의 <다중론자>는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어떤 자율주의자가 되었더라도 드팀전님께 그런 힐난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교수가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론자 입니다. 그렇지만 전 이번 촛불 문화제를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에 묶어두는 주장들을 혐오합니다. 단적으로 전 촛불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도 혐오합니다. 이런 맥락들을 좀 알아주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님께서 비판하시는 노동운동 혐오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실제 집회에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님께서 비판하시는 사람이 자율주의자들이나 저는 아니겠지요? 물론 알라딘에서 전 피토하면서 이명박을 욕했지만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바라보시는 분들에 대해서 그런 힐난을 한 적이 없고요. 물론 맑스주의자들 중 이번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율주의나 대중 혹은 다중의 자발적 역량은 이번 사건을 이만큼이나 끌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조직화 혹은 관리하는 방식,대표하는 방식들로 나아갔을 때 발생하는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맑스주의자들 이론적 입장에서 누가 옳다, 그르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걸 주장하는 맑스주의자들 중에서 단지 사태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의 실천적 주체로 참여하려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전 이 부분에 대해선 해석자가 아니라 실천적 주체로 참여하려 했던 사람 중 한 명 입니다. 물론 전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시민사회론자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드팀전님과 제 사이엔 맑스주의의 이론적 스펙트럼(전 그런면에서 볼 때 지젝의 입장이나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장에 어느정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느정도 입니다)의 차이뿐만 아니라, 세대차이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촛불이 다 끝나기 전에 이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다만 아래 글의 표현은 지나친 오해가 있는 듯 싶어 몇자 적어봤습니다. 그 오해의 당사자가 제가 아니었음 하는 바람이고요. 혹시 촛불 문화제나 가두시위에 나가게 되시면 경찰의 폭력에 몸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계속되는 가두시위 참여에 "나도 죽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저도 "과격한 폭력 시위꾼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문제는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이외에 다른 대안으로 운동하는 것들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참가자들 내부에서 등장했던 말들이 '좌빨'이니 '프락치'니 하는 것이겠지. 나는 '다함께'에 개입되어있지도 무슨 편향이 있지도 않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운동'과 '진보적 문제'에 그들의 사상을 가지고 행동해왔어. 그런데 그들이 거리에서 왜 '순수한 시민'들이나 '다중론자'들에게 '좌빨'로 몰려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더라. "물론 실제로 '프락치'가 있었겠지만 그런 단어들이 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운동방식과 한계 이외에는 도통 관심없는 '무연대성'의 대표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해.

내 경험으로 보자면, 집회에 민주노총 대오가 합류햇을때 박수를 보내면서도 '제 들은 또 뭐야'라는 식의 반응, 노동계는 순수한 시민들의 대오에 숟가락 하나 얹어 이득을 챙기려하는 구나하는 반응을 많이 봤어. 그리고 알라딘에 피토하며 이명박을 씹는 분들 내에서도 말이지.

드팀전 2008-07-1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과나무님께 비밀댓글로 답을 올렸던 글인데...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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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댓글 잘받았습니다.

제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물론 대학 들어가서 저를 감짝놀라게 했던 '맑스'를 근본적 토대에 두고 있긴 합니다만 말입니다.요즘 맑스아닌게 어디있나 싶지요^^ 희안하게도 제가 대학 들어가서 학부에서 배운 맑스는 트로츠키나 레닌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앞과 뒤였습니다.그람시도 전 프랑크프루트의 일환으로 배웠던 것이지요.또 제겐 상당히 문화정치적 요소가 강합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했다면-한때 유학갈 생각에 외국대학 사이트도 알아본적 있지만-전 예술사회학이나 문화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모두 좌절..ㅜㅜ

문제는 제 스스로 그런 문화주의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고민했다는 겁니다. 만약 제가 트로츠키주의자나 맑스-레닌주의자로 비췄다면 그 스펙트럼안에서 상호 보완적인 요소들 또는 각각이 갖고 있는 한계들에 대한 문제의식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제가 학교다니며 가장 답답스럽게 생각한 '유아적 운동권' 선배들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너 팝송들어..야 미제국주의의 음악인데'..제가 이런 논의에 질색했다는 것을 말씀드리지요.

전 개인적으로 인간 트로츠키의 험난한 개인사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저는 그들의 완고한 경제주의와 노동자 중심성에 대해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맑스의 원전을 이야기하며서 그건 왜곡이라고 말하겠지만 말이지요. 부연하면 전 노동자 중심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트로츠키주의에서는 이 지점이 결절점 아닐까요..

그런데 왜 제가 노조 문제를 이야기하고 노동운동가처럼 비춰지느냐? 그건 첫번째, 노동자들이 고립되어 노동자/시민이 다른 존재라고 여기지는 것이 하나가 있겠지요. 노동자하면 붉은띠 두르고 검게 탄 피부를 자랑하는 마초들이고 시민들은 그렇지 않은 존재.그런데 전 사무직 노동자로서 그렇게 피부가 타지도 않았고 마초도 아닙니다. 전 노동자/시민이 왔다갔다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명태의 이름이 여럿이듯 말이지요.제가 회사에 나오면 전 노동자지만 주말에 놀이동산에 가면 전 시민이 됩니다. 이것을 노동자 대 시민 구조로 나누어 이해하는 방식-학계에서도 이런 방식이 일상적입니다-은 제 개인적 가치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두번째는 알라딘에서 만날 수 있는 가정주부나 독립사업자들과 달리 저는 저희 작업장은 산별노조에 속해있습니다. 무화과나무님은 아무런 소속이 없는 지식 노동자이기에 훨씬 더 알라딘의 대부분의 입장과 같을 수 있습니다. 전 알라딘에서 신문광고하는데 돈을 내지 않는데 제가 보기에 그 액수는 자신의 이름을 얹고 자기의 의지를 알리는 것 외에 별다른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아프락사스나 승주나무님의 활동에 박수를 보냈는데..그것은 단순히 소속없는 알라디너들에게 비빌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지요.그렇지만 전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여러개가 있어왔습니다. 노조도 그 중 하나겠지요.그외에 다른 시민단체들 역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집회에 나가면 전 혼자갈 수도 있고 시민연합과 함께 갈 수도 있고,민주노총 깃발 아래일 수도 있고, 생태주의자들이 많은 한살림 깃발 아래일 수도 있습니다. 또 진보신당의 깃발 아래일 수도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제가 이 모든 조직들에 조직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회비를 내고 있기때문입니다.

제가 '다중'을 비판한 것은 -전 '제국'과 그 논쟁을 조금 읽어본 처지지만- '다중'의 구성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유럽처럼 비물질노동자가 얼마나 될까도 궁금하지만-그거야 일종의 경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비물질노동/물질노동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노동자'라는 개념의 약화문제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중'의 성격이 아니라 그 성격이 가지고 있는 예측되는 결과의 한계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문화적으로 추수'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을 과연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회운동은 결코 독자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립적이지만 서로 연대하는 정치세력이 필요하지요. 또한 사회운동의 동력을 끌어가기 위해서 조직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며 사회운동은 안팎에서 와해와 붕괴공작을 받기때문입니다.그리고 사회운동은 태동,성장,와해의 과정을 거치고 그 끝에서 그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직이나 정당의 형태로 제도화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양날의 칼입니다. 조직을 이끌고 동원을 하고 제도를 바꿀수 있지만 또 그 조직으로 인해 운동이 붕괴되고 반동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날의 칼중 어느 하나만 집어서 '무중심'과 '탈조직'을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도 또한 현재적이지도 못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현실정치적 요소들을 탈각시키면 '이상적인 운동 과정'이 눈 앞에 목도된다는 즐거움은 큽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예견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만큼 큰 쾌감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 모든 것이 현실의 구차한 정치 영역속에서 어떻게 해소되고 어떻게 치고 나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되는 것이 제 위치입니다.

무화과나무님을 지적해서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님 역시 '다중'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알고 계실텐데요. 전 그것을 대입시켜보는 것이고 무화과나무님은 그냥 사소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물론 세대적 차이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 둘의 사회환경이 좌우하는 의식의 흐름부분도 있을겝니다. 무화과나무님은 이론을 생산하는 영역에 계시고 전 이론과 대중사이의 궤를 매꾸는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님이 상아탑에만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현장에 나가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상아탑이 그만큼 고립되어 있다는 저간의 시각에 반증이지요.또한 무화과나무님은 그에 대한 공명이었을테구요...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는 개인적 차원과 함께.

네그리의 '제국'을 저는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답답하던 때에 맥을 뚫어주는 시원함이 있었지요. 그리고 무화과나무님이 이미 올리셨던 '다중'도 제 책장에 있습니다. 곧 보겠지요.
그런데 전 어떤 사상에도 조금씩은 비판적이고 자가수용적입니다.
그게 저같은 메노키오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절 규정하면 '범좌파' 라는 말과 '통합파'라는 말 밖에 마땅한게 없습니다.
결국 전 진보신당으로 갔지만 분열단계에서는 그래도 분열시키니 말자는 '통합파'였다는..심상정을 좋아하지만 그 때 심상정의 판단은 여전히 회의적이라는...

전 혁명의 유토피아를 믿지 않지만 이 말들은 기억합니다.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아니다.혁명을 하고도 여전히 민중이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학자이신 무화과나무님이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잠수탓는데..글을 더 많이쓰는 이런 모순된..아 그리고 전 왠만해선 시위대 전위로 안나갑니다. 애아빠가 다치면 애는 누가보나요 ^^)
 

  이젠  '희망을 잃지 않는 패배주의' 글도 나오고, 유물론적 현장의 정치변혁을 미학적,문화적 운동으로 추렴하려는 분위기도 얼핏 나온다. 68혁명이 정치적으로 실패했어도 문화적으로 성공했던 것을 유비하는 듯 하다. 68의 문화혁명적 속성을 촛불에 직접 투사하는 글도 봤다. 수사학적 미학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역사를 그렇게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조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먼저 촛불의 성격과 68혁명의 성격론 차이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길게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68혁명은 기본적으로 '전세계적,반체제,반문화'성격을 같고 있었다. 또한 그것에 기대어 '하위문화' 를 중심으로 '대항문화'를 형성했다. 촛불이 그럴 여지가 있는지 답을 할 수 있다면 촛불과 68혁명의 동일 DNA구조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의 문화가 '반체제적인가?  반문화적인가? " 나는 '결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모두 체제 내적일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정권퇴진 같은 수사에 대해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운동이다. (현 상태에서 정권퇴진운동은 모험이기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 참여자 내부에서도 '정권퇴진'같은 것에 부담을 갖는 온건한 성격의 참여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저항은 부당한 폭력정권에 대한 저항의 양상을 띠지만 같은 적을 두었다고 그 운동의 성격도 같다는 식의 논리는 정말 아름다운 수사일뿐이다.

연대를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촛불 초기부터 반드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것이 해결되지 못하고 '연대하자'를 새로운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생뚱맞다. 문제는 연대를 도모할 주체가 없다는 것이고-이것은 촛불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초기부터 '리좀적' 주체들을 극찬했던 담론이 이런 연대에 방해가 된다. 설령 담론의 공간에서 '다중'주체들의 창의성이 진보진영에 새로운 성찰과 아이디어를 준다고 할 지라도 이미 '다중론'의 실천적 한계가 여러차례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 지적된 상황에서 그것을 성찰하지 않고 '다중' 에만 환호하는 것은 지극히 상아탑적이다.

  나는 처음부터 진보언론이 극찬했던 '무중심성'과 '다중운동'의 환호에 대해 약간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촛불의 주체 구성과 운동 양식의 창의성으로 인해 2008년이 '21세기 한국 사회변혁 운동'의 역사에서 'BC 촛불'과 'AD 촛불'로 나뉠 원년이 되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카니발적 흥분으로 인해 이것을 무슨 '사건'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역시나 조심스럽다. 

역사를 이야기했더니 어떤분은 다분히 빈정거리는 투로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씀 좀 해보시죠'라고 대답했다.

나같은 필남필부가 어찌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저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끼리 하는 말로 '국화뜨지마 그러다죽는다'라는 말이 있다.영화<황후화>를 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것이다. 영화에서 황후 공리는 절대 권력자 주윤발에 대항하는 역모를 꾸민다. 반란군의 상징으로 '국화'수를 놓는다. 물론 노란 옷을 입은 어마어마한 반란군은 은색옷을 입은 더 어머어마한 황제군에 의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몰살 당한다. 그리고 다음날 언제 피바람이 불었냐는 듯 깨끗이 치워진다. '황하에 돌 하나 던져도 물길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중화주의 반동적인 장면이다. 어쨋거나 나와 몇 명은 여전히 '국화'를 뜨며 서로 낄낄거리고 있다. 그 의미를 알듯 말듯 미묘하게 포장하면서 말이다.

영화 <페스트푸드네이션>이 시의적절할 때 등장했다. 2년 전에 나온 영화인데 배급사의 상업적 의도가 현재 정세를 읽었나보다. 이번 주 개봉한다.

 

 

 

..역사에 대해 나는 대답을 못하지만 그래도 나보도 천 만 배쯤은 똑똑할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아...나는 그걸 옮길 정도로...1분에 200타 정도는 칠 수 있다.

68혁명에 대한 그의 69년도 글이다.(홉스봄은 문화혁명으로서의 68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후에 후술했다.)

 68혁명의 세력은 두 단계에 걸쳐 집결되었다. 대략 5월 3일에서 11일 사이의 최초의 단계에서는 학생들이 결집했다....5.14일에서 17일까지의 두번째 단계에서는 자발적인 총파업이 확산되었다. 공식노조 지도부와 정부 사이에 체결된 협상안을 파업 세력이 거부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를 지나 5월 29일에 이르기 까지 대중운동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번째 단계만이 혁명의 가능성을 창출해 냈다는 점이다.( 홉스봄의 혁명은 요즘 처럼 광의로 해석되는 혁명이 아닌 듯 하다.) 학생운동 자체는 성가시긴 해도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드골주의의 붕괴로 생기게 될 공백을 대신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보수 정권은 마침내 혁명의 공포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의 힘과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기반은 결코 분열되거나 붕괴 되지 않았으며 단지 일시적으로 마비되고 혼란에 빠졌을 뿐이다.

드골주의를 타도할 최선의 방법은 드골주의 스스로 붕괴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드골주의로 하여금 지지세력을 다시 규합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최악의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드골은 힘을 회복했는데.이는 분명 그가 '붉은 혁명'에 맞선 '질서'의 수호자로 국면을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혁명운동의 관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일상적인 정치 상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때를 인지하여 적절한 행동에 나서는 데 있다.

5월 27일에서 29일 사이의 중대한 고비에서 당은 그저 기다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기다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나 다름없었다. 주도권을 상실하면 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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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7-0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볼만해요..마지막 노골적인 소의 도축장면이 비위를 거슬리긴 하지만요.^^
 

* 옛날에 알고 있던 전노협 진군가가 갑자기 생각나네..

새날이 밝아 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정부의 관보 게재에 맞선 민주노총 총파업 지침 1호




1. 민주노총은 “국민건강권 쟁취”를 위해 관보 게시와 동시에 총파업에 돌입한다.

2. 총파업 돌입은 긴박한 상황을 감안하여 즉각적 파업 돌입이 가능한 사업장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파업에 돌입한다.
우선, 26일(목) 화물연대의 미국산 쇠고기 수송 거부를 비롯해 건설노조, 민주연합노조가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고, 보건, 택시 등 1만명 규모의 간부상경 투쟁을 전개한다.

3. 민주노총은 26일(목) 17시, 전조합원이 참여하는 “국민건강권 쟁취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출정식”을 개최한다.
(수도권은 시청앞, 지역은 해당지역 촛불 장소)

4. 미국산 쇠고기의 냉동창고 출하를 저지하기 위해 국민감시단과 함께 26일(목) 오전 9시부터 운송저지 투쟁을 전개한다.

5. 민주노총은 총파업 돌입과 함께 27일(금) 18시, 28일(토) 17시 29일(일) 17시, 전국동시다발 민주노총 집회를 진행한 후 촛불집회에 총력 결합한다.

6. 총파업에 따른 세부 전술은 총연맹 위원장 지침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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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6-2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하나다 동지여!

라주미힌 2008-06-2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수는 나중에 하셔도...
정말 하루하루를 증오하며 살아가게 하네용.

드팀전 2008-06-26 12:07   좋아요 0 | URL
온라인에서 잠수 돌입이라는 겁니다.

제 몸뚱이는 언제나 '오프 라인' 입니다.

라주미힌 2008-06-26 14:15   좋아요 0 | URL
온라인 잠수 '건강'에 안 좋아용... ㅎㅎ
알라딘의 균형을 잡아주셔야죵.

드팀전 2008-06-26 15:50   좋아요 0 | URL
제가 있으면 더 왼쪽으로 무너져요 ^^

Jade 2008-06-26 22:34   좋아요 0 | URL
전 알라딘에서 드팀전님 글이 제일 좋아요~! 흐흐흐

Mephistopheles 2008-06-2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 뭉치자!

바람돌이 2008-06-2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만 더 있다 잠수타세요. 하고싶은 말 다 못하면 병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