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책이다. (알라딘에 들어와서 보니 지난 6월 로쟈님의 페이퍼에서도 있었다.)

서점에서 대충 넘겨봤는데, 세가지가 눈에 띄었다. 하나는 미국경제학협회 AEA 연례총회의 이야기. 두 번째는 애덤스미스,케인즈 등의 경제사상사, 그리마 마지막에는 최근 경제학의 동향이다. 우석훈도 언급했던 '폴 로머'와 그의 스승인 로버트 루커스 등 과거의 경제학이 아니라 '흐르는 학문'으로서의 현재의 경제학 이론들이다. 이 부분이 매력적이다. 저널리즘적인 글쓰기로 비교적 평이한 서술로 보였다.

최근 경제에 대한 관심이 독서계에서 경제사상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예전에 쉽게 읽는 경제사상사에 관련된 페이퍼를 올린 적도 있다. 그 이후의 책으로 읽으면 좋을 듯 하다. 저널리즘적인 글쓰기로 그다지 난해하지도 않은 듯 하다.(물론 이건 영원히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살로메>이다. 앞의 표지가 이 희곡에서 가장 유명한 죽은 요한의 얼굴에 키스하는 살로메를 그린 것이다.

 교회를 다녔던 지라 살로메의 일화는 어린 시절 부터 알고 있었다. 살로메가 춤을 추고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한다는 말을 하는... 그리고 그것 뿐. 살로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나이가 든 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살로메>때문이다.

나는 아직 <살로메>를 본 적이 없다. 음악으로만 들은 '일곱 베일의 춤' 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오페라 무대에서 <살로메>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하는 연출경향이 지배적이다.몇 몇 스틸 컷들을 엽기적 영화 이미지에 익숙한 나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지만....관현악에 비해 오페라를 조금 늦게 들었기때문에-클래식 말고 들을 것도 많구- 러시아 오페라나 슈트라우스<살로메>,베르크의 <보체크>같은 것들은 좀 미뤄두고 있다. 

 남회근의 <금강경 강의>이다.^^

사실 이런 책들은 상쾌한 공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이야 이런 책이 '진정한 진리'의 길을 말하는 것이고 그 외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아니 많이 했기 때문에 더이상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바울의 말처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가장 편리하다.

개인의 윤리적 범주에 적합한 것을-금강경이 비단 윤리문제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수용자는 수용하고 실천한다 -정치와 사회의 영역까지 확산해서 이해하려는 태도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REFRESH이다. 난해한 쉼이 되겠지만...

 

 팀 에덴서의 <대중문화와 일상.그리고 민족 정체성>이다. 제목을 하나씩 떼어 놓고 봐도 모두 큼직큼직한 주제이며 매력적인 영역이다. 대중문화....일상....민족정체성. 대중문화라는 영역은 원래 내 전공영역이기도 하고 이후에도 늘상 관심이 많다. 일상 영역도 마찬가지 아닌가. 앙리 르페브르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대해 일상의 반복성이 그것을 망각케 해준다고 했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영역도 그 일상이고 또 정치적,문화적 운동이 발생하는 곳도 일상의 영역이다. 거기에 상상의 공동체라는 민족문제가 결합된다. 내용은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사극드라마는 연개소문과 김춘추가 통일제국의 같은 꿈을 꾼다는 정말 '상상의 공동체'로 근대에 구축된 민족의식을 강화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만 생각치는 않는다.  무슨 대단한 역사관은 아니다.  최소한 한국의 '민족중심주의'에 지친 나머지 '탈민족주의'개념에 열광하고 멈추는 단계는 지나가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이 책은 현재 읽고 있는 책이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후마니타스에서 나왔다.(이 출판사는 참 대단하며 대견하다.)

총 3권으로 구성된 책인듯 한데 현재 1권밖에 나오지 않았다.이 책은 한 해를 한 달 남긴 시점에서 내가 선택한 올해의 책에 들어간다. 플라톤부터 서구정치 사상사를 다루고 있다. 1권은 칼뱅까지다.그런데 단순히 플라톤은 어떤 정치사상이구..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구 하는게 아니다. 정치사상사의 연속성이라는 전제하에서 이들의 사상을 하나로 꿰고 있는 커다란 바늘이 있다.책의 1장이자 인트로에 해당하는 '정치철학과 철학'은 역자의 말처럼 반복해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정치와 비정치가 맞짱(?)-사실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을 떳던 올해 내가 이 책을 놓치고 지나갔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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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0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뉴라이트 쪽에서 보는 아담 스미스와 진정한 자유주의자로서의 아담 스미스를 구분해보고 싶어요.뉴라이트 경제논객으로 대중들에겐 공병호,복거일이 유명하지만 교수 중에선 민경국(강원대학교)이 요즘 활발히 글도 쓰고 집회에도 나오더라구요.신자유주의가 잘못되었다는 최근의 흐름에 맞서서 아니다...하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보수색채가 진한 시대정신이나 한국논단 등에도 활발히 기고하고 있지요.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드팀전 2008-12-03 17:46   좋아요 0 | URL
한겨레인가를 보니까 뉴라이트 내부의 잔갈등들도 많더군요. 이론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와일드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작품엔 동화에도 유혈이 낭자한 묘사가 참 많아요.잔인하달까요.살로메는 아예 미성년자 관람불가를 겨냥하고 쓴 것 같기도 하구요.요한의 머리를 베어서 쟁반에 담아오는 장면은 ....글쎄요.압권이라고 해야 하나요...

드팀전 2008-12-03 17:51   좋아요 0 | URL
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봐야하는데... 컬트영화나 오컬트 무비 등에 비하면 다 장난이지요.^^
사실 진짜 공포는 '유혈'이라기 보다는 '안개'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마나타스에 대해서 대견하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참고로 말씀 드리면 저는 최장집씨가 최근에 촛불시위라든가 대의제,정당정치 등에 대해 하는 발언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요즘은 그의 80년대 논문을 두 편 택하여 정독하며 요약하고 있는 중입니다.일본의 어느 학자가 일류정치 이론가라고 평했다고 합니다.후마니타스 사장 박상훈 씨까 그의 제자더군요.경향신문에 가끔 나오는 그의 글도 주목할 만하더군요.

드팀전 2008-12-03 17:49   좋아요 0 | URL
후마니타스가 대견한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뒤늦게 출발한 출판사로서 돈 안되는 인문사회시장에서 좋은 책들을 꾸준히 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 정치로의 수렴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만 최장집 교수가 운동의 정치에 대해 혹독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봅니다.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유동적인 과정을 안고 있는 것이기때문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4 13:18   좋아요 0 | URL
소외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에 대해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면서 정치무관심을 자랑이나 하는 듯이 과시하는 풍조에 대한 최장집 씨의 염려는 새겨들을만 하지요.
 

간첩 누명 쓴 ‘송씨 일가’의 지옥 같은 25년
2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전말이 국정원 진실위를 통해 밝혀졌다. <시사IN>은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그들의 어제와 오늘을 취재했다. 그것은 피눈물로 얼룩진 한 편의
 

[7호] 2007년 10월 29일 (월) 11:54:02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시사IN 안희태송기복씨(사진)와 송기준씨는 인터뷰 내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슴속 깊이 패인 상처는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되어 줄줄 흘러내렸다. 그들은 사건 이후 수십 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안기부의 조작은 평온하던 한 일가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내가 원래 이 보랏빛 꽃을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젠 싫어··· 거기서 맞을 때 내 얼굴, 내 몸 색깔이 꼭 이랬어요. 두 팔과 다리를 묶고 자기 혁대를 풀어 나를 때리는 거야. 하염없이··· 그 수사관이 마약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릴 수 있을까요. 아! 그 보랏빛!”

기자가 선물한 보랏빛 가을 국화가 화근이었다. 꼭 ‘25년’ 만에야 진실이 밝혀진 것을 축하하고 싶어 준비한 탐스러운 가을 국화 스물다섯 송이가 가슴 깊은 곳의 상처를 들쑤시고 말았다. 갑자기 송기복씨(66)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러곤 크고 길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말리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울기만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고, 말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처음으로 ‘제3자’에게 평생을 묻어온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10월24일, 이날 오전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과거의 조작사건 중 하나로 이른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날이었다. 

전날에도 송기복씨는 전화를 걸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었고, 때로 격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는 “세월이 흘렀다 해도 당신들이 지금 우리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 믿을 수가 없다”라며 목이 메곤 했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언제든 터져버릴 것 같은 극도의 불안과 긴장. 대체 25년 전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기에 그는 그때의 아픔을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는 걸까.

1982년 9월11일 아침, 한국의 모든 일간지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실린다. 이른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북한의 대남 공작 부서인 노동당 연락부 송창섭 부부장(당시 62세)이 여덟 차례에 걸쳐 남한에 잠입, 모두 28명의 가족·친지들과 모략해 대규모 간첩 활동을 해왔다고 안기부가 발표한 것이다. 간첩단의 규모에서나 사건의 파장에서나 가히 ‘1980년대 최대의 간첩단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내용이었다. 전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은 한 달 가까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이 사건의 파장이 적지 않았던 것은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들이 전직 대학교수, 교사, 회사 중역 등 신분이 뚜렷한 인텔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노동당의 고위 간부인 송창섭씨가 형제와 가족, 심지어 대학에 다니는 자녀들까지 포섭해 조직적인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발표라서 드라마틱한 면까지 있었다. 실제로 훗날 이 사건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안기부가 연출하고 언론이 생중계한 이 ‘무시무시한 가족’의 삶은, 그러나 피눈물로 얼룩진 것이었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두 차례나 무죄 취지 파기환송했음에도 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뿔뿔이 흩어졌고, 서로를 원망하며 살아야 했다.

끝없는 고문의 후유증

송기복씨는 사건 당시 서울 신광여중 교사였다. 그는 1982년 3월2일 신학기 첫날, 학교로 찾아온 안기부 수사관에 의해 청주로 연행됐다. 그러곤 116일 동안의 불법구금과 1년5개월 간 구속 끝에 이듬해 12월25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사건 관련자 중 가장 낮은 형량이었다.

그럼에도 116일 동안 자행된 안기부의 고문으로 송기복씨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물 먹이기, 잠 안 재우기, 손톱 밑 바늘로 찌르기 따위 수십 가지 고문을 가하며 아버지 송창섭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수사관들은 한 여성의 ‘성 정체성’도 완전히 짓밟았다.


   
 
ⓒ시사IN 안희태송기준씨
 
 
“가끔 술 먹이는 고문을 받곤 했어요. 차라리 술 마시고 정신을 잃는 게 낫다 싶어 막 받아먹었죠. 그럼 그때부터 어린 수사관들이 날 능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짐승의 성기로 만든 술안주를 내게 주며 먹으라고···. 그러곤 넌 섹스할 때 어떻게 하냐, 어떻게 생겼냐··· 정말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석방된 뒤 송기복씨는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남성에 대한 공포와 저주’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동성동본임에도 결혼을 감행했을 만큼 깊이 사랑했던 남편 송영섭씨에게도 “왜 나와 이혼해주지 않느냐. 나 같은 빨갱이와 사는 당신은 위선자다”라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한 번은 남편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속으로 ‘저 인간이 내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믿지 못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세상에 그런 남편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나 죄스럽고, 한스러워요.”   

기복씨는 방송작가 김수현씨와 청주여고 동기이기도 하다. 석방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작가는 송씨에게 “기복아, 이 모든 일들을 모두 기록해둬라”라고 당부했다. 이 말을 실행에 옮기듯, 송씨는 차곡차곡 기록을 모아뒀다. 그가 기자에게 보여준 분홍색 보자기엔 남편의 면회일지, 그리고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수백 통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남편이 적은 면회일지와 편지들은 곧 송씨가 이제껏 생을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사건 이후 송씨는 직업을 잃었다.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론, 교원연금도 받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공군 중령이었던 남편 송씨마저 이 사건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생계가 막막하고, 세간의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한국에 머무를 까닭이 없었다. 남편 송씨는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카이로프랙틱’(척추교정법)을 배우러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송씨는 한국에 홀로 머물러야 했다. 안기부 측이 “송기복이 미국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려 한다”라며 여권 발급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1년 넘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미국에 갈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1987년 6월29일이었다.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은 ‘미국의 의대에서 배운 척추교정법을 한국에 전파하며 떳떳이 살고 싶다’는 남편의 뜻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 송씨는 끝내 아내의 누명이 벗겨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
부친에 이어 척추 교정의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 송준혁씨(38)는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일이 명백히 밝혀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뿐이다. 

가족·친척 모두 죽고 망가져

이튿날,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송기복씨의 사촌 오빠인 송기준씨(79)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 한참 더 들어간 곳에 외따로 살고 있다. 마흔이 넘은 아들과 둘이서 손바닥만 한 접착제 공장을 운영하는 ‘거물 간첩’은 이제 걷는 것조차 힘겨운 팔순 노인이 되었다. 
    
송기복씨의 삶도 불행했지만, 송기준씨의 삶은 ‘파탄’ 그 자체였다. 사건 당시 번듯한 화학공장을 운영하며 서울 서초동에 있는 184㎡(55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던 그는 밀입북 혐의 등으로 ‘제2의 주범’에 지목돼 1심에서 사형을 선도받은 뒤 상고 끝에 6년 실형을 살았다. 하지만 출소한 후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과 공장은 소송비용 등으로 남에게 넘어갔고, 아내와는 협의이혼했다. 큰딸은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교사였던 둘째 딸은 권고사직을 당했다. 셋째 아들은 고교를 중퇴했고, 막내는 신문팔이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자식들 앞에 얼굴조차 내밀 수 없었다. 이때 그의 나이 환갑이었다. 


   
 
ⓒ시사IN 안희태‘송씨 일가’ 사건을 조사한 국정원 진실위는 10월26일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서 설명회를 열었다.
 
 
‘자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 평소 그를 좋게 본 한 지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우사가 비었다며 아무거나 해보라고 권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환갑의 노인은 소똥 천지였던 우사를 접착제 공장으로 만들었다. 겨우 3년 전까지만 해도 공장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잘 만큼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송기준씨는 “그나마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지금은 행복해야 마땅한데도, 여전히 내 삶은 지옥 같다”라며 서럽게 울었다.

인터뷰 도중 집 전화벨이 몇 차례 울렸다. 그는 상대방과 국정원 발표 내용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를 건 김 아무개씨는 기준씨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25년 전에 내가 운영하던 회사의 직원이었어요. 그런데 법정에서 나의 밀입북 혐의를 뒤집는 증언을 해줬어요. 그래서 내가 목숨이라도 건진 거야. 하지만 그 친구는 그것 때문에 6개월 실형을 살았어요. 그 뒤 생사도 까맣게 모르다가 지난해에야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얼마나 반갑던지 껴안고 엉엉 울었어요.”   

수십 년간 생사를 모르고 살아온 게 어디 그들뿐이랴. 충북 음성군 생극면에 터를 잡고 살았던 ‘송씨 일가’는 간첩단 사건으로 완전히 붕괴됐다. 송창섭씨의 모친은 사건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객사했고, 송기복씨의 작은아버지 송오섭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었지만 ‘산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길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해 국정원 진실위가 사건 조사에 착수하면서 이들은 25년 만에야 서로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혈육’도 그저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송기복씨는 “내가 안기부에서 기준 오빠의 이름을 댄 것 때문에 오빠가 잡혀갔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에 사로잡혀 있었고, 송기준씨는 그대로 “동생이 미안해할까 봐 선뜻 연락을 하기 어려웠다”라고 털어놓았다. 다른 형제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실위의 노력으로 사건의 실체는 밝혀졌지만, 송씨 일가가 지난 세월 동안 당한 고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국가의 배상 문제다. 과거 안기부 조작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재심특별법의 제정도 필요하다. 송기복씨와 송기준씨를 비롯한 송씨 가족들은 “간첩단 사건의 실체가 안기부의 조작이었음이 드러난 만큼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당시 무책임하게 사건을 보도했던 언론들도 진실을 알리는 데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요구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 ‘빼앗긴 세월’을 되찾는 유일한 길은 돈이 아니라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기복씨와 만나던 날, 그는 쉴새없이 전화를 해대는 언론사 기자들을 향해 “왜 날 인터뷰합니까, 날 잡아가둔 사람들을 찾아서 혼내는 게 언론이 할 일 아닌가요?”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25년 전, 이 사건을 1면 톱 기사로 다루며 호들갑을 떨었던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의 기자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이들 신문에선 DJ 납치와 KAL기 폭파 등 굵직한 사건에 가려 송씨 일가 사건의 진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을 통해 진실이 알려지고 나면 동네 노인들과 어울려 소주라도 한잔 맘 편히 마시고 싶다”라는 팔순 노인의 바람이 떠올라 신문을 펼쳐든 기자는 내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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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 화제의 인물은 역시 '강마에'와 '신윤복'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음반도 재법 팔리고 있고 <바람의 화원> 덕분에 신윤복을 비롯한 옛 그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혜원 신윤복은 <바람의 화원>뿐 만이 아니라 영화 <미인도>에서도 여자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드라마적 상상력이다. 나는 역사학계가 이런 상상력을 '해도 해도 너무한 역사왜곡이다' 라고 평가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볼 수 있는 미디어 교육의 부재를 문제삼아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런 교육을 거의 못하고 또한 부모들도 잘 알지 못한다.오히려 드라마를 좋아하는 부모들은 ' 신윤복이 원래 여자아니야?" 라고 물을 지경이다. 그런면에서 역사학계의 우려가 어떤 건지는 이해가 간다.

최근에 나 역시 젊은 몇 명의 친구들에게 "신윤복 원래 여자 아니에요" 라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지 하는 ,아니면 원래 여자인데 그게 아닌가- 식의 답을 여러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드라마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그건 내가 '딴따라'이기때문이다. 행여 어떤 종류의 혁명이 발생하더라도  이런 '딴따라들을' 억압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나름대로 미학적 근거가 없진 않았지만, 이후 스탈린체제가 모든 예술을 하나의 사조로 환원시킨 것은 이미 '혁명의 의미'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주 <씨네21>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이름하여 '영화화할 만한 한국역사 속 인물 10>이다. 범역사학계(내가 이렇게 쓰는 이유는 이후 명단을 보면 안다.)에서 10명이 '제2의 신윤복'이 될만한 역사적 인물들을 추천한다. 즉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 보면 좋을 만한 사람들을 추천한 것이다. 잡지는 여기에 약간의 재미적인 요소를 가미한다. 추천자에게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감독,어떤 배우가 좋을지' 를 묻는다.(여기에는 편집자나 기자의 의견이 들어가 있긴 하다)

먼저 추천자들과 추천인물을 보자.

역사소설가 김탁환- 고운 최치원( 배우 김갑수 추천)

역사평론가 이덕일- 정난정 (<여인천하>의 정난정이다. 하지원이 추천받았다)

역사학자 이이화-허균 (드라마<홍길동>에 나온 김석훈)

역사소설가 이수광(<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의 저자)-표철주( 영정조시대 검객이다.소지섭,신하균 추천)

성균관대 안대회 -운심(18세기말 기생으로 검무에 달인. 고현정 추천)

소설가 심윤경-추사 김정희(김명민 추천)

오슬로대학 박노자-윤치호( 일대기 구성으로 유아인,설경구,이순재)

한국과학기술원 전봉관(<경성기담>작가)- 최영숙( 최초의 스웨덴유학 한인,인도인과 결혼했으며 한국에 귀국한후 콩나물장사로 27살에 생을 마감. 손예진,엄지원 추천)

성균관대 임경석(<한국사회주의의 기원>저자)- 박헌영(최민식 추천)

성공회대 한홍구- 송기복 송영섭(1982년 신광여고 간첩단 조작 사건의 주인공 부부. 배우추천은 하지 않았고 고문기술자 역할에 백윤식 추천)--> 나 역시 최근 <시사인>을 통해 안 일이라 다음 페이퍼에 그 기사 내용을 올려둔다.

추천자들은 크게 두 부류이다. 하나는 요즘 인기 있는 역사픽션이나 일상사를 대중적으로 쓴 작가들과 진보적인 역사학자들. 주로 자신들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에 매료될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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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앉아>

                     -정약용

새벽에 뜬 조각달

그 빛이 얼마나 가랴

간신히 작은 산은 올랐으나

긴 강은 건널 힘이 없구나

집집이 다들 단잠 속인데

타향 나그네는 홀로 노래를 하네

 

 압도적으로 눈이 가는 책이다. <노 로고>의 저자인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 갓 구워낸 붕어빵처럼 나왔다.

나오미 클라인은 비판적인 저널리스트이자 반세계화, 반소비주의의 유명인사로 알려져 있다. <혁명이 다가온다>에서는 그녀의 이런 진보주의 역시 브루주아 혜택을 누리는 자의 기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저널리스트로서 그녀의 행동주의가 그만큼 관심을 받았다는 반증처럼 보여진다. 

한때 <노 로고>를 구해보려고 헌책방을 뒤졌으나 결국 도서관에서 밖에 만날 수 없었다. 1주일내 반납할 자신이 없어서 대출하지도 못했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살얼음판에 금이 가고 있는 시점에 나온 책이어서 더욱 반가운 나오미 클라인의 책이다.

로쟈님의 페이퍼에도 <수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이 소개되었다. 키토의 책을 읽다 발견한 클레온과 디오도토스의 연설을 페이퍼로 옮긴적이 있다. 멋진 연설들이었다.원문은 투키티데스의 역사서 <펠로폰네소스전쟁>에 나온다.

그저 노닥거리기 위해서 그리스를 만나고 있다. 도널드 케이건, 브루노 스넬, 피에르 베르낭, 숀세이어즈 등도 등판대기 중이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이들의 원저들도 준비중이다.

<위대한 연설>을 그리스 정치의 한 단면으로 그들이 가진 정치철학의 한가지 몽타주로 보면 좋을 듯 하다. 물론 그렇게 계통적으로 엮지않고 그저 위대한 설득의 방법론으로 봐도 결코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음악책이다. 말러 시리즈를 내서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김문경이 슈베르트에 대한 책을 냈다. <천상의 방랑자>. 이 책은 서점에서 잠깐 몇 장 펼쳐봤다. 말러 시리즈와 달리 악곡분석들을 주로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얼핏 보기에 슈베르트 가곡의 가사들과 에세이로 이루어진 책처럼 보였다.

책 소개에 슈베르트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확 바꾸겠다고 했는데 약간의 홍보성 과장으로 느껴진다. 슈베르트를 연약한 청년작곡가 정도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미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추론적으로도 그런 상식을 뛰어넘을 수 있다. 당시의 '낭만주의'라는 것이 현 시대의 센티멘털식의 '낭만'과 다소 다르다는 것 말이다.어쨋든 바흐,모차르트,베토벤 등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은 슈베르트의 책이기때문에 경쟁력은 있다. 그러나 표지의 만듦새는 최악이다.

부커진 R의 2번째 책이다. 책 제목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다시 사회구성체론으로?> 이다. 부커진은 이진경을 비롯해서 대중인문학계의 스타군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수유+너머'팀이 주도한다.(사실 주요멤버들은 그다지 대중친화적이거나 현실 정치적이지도 못하다. 오히려 '대중적'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우석훈이나 강준만이 더 어울린다.) 지난 번 책의 주제가 소수성의 정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 하다. 기본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형도 내에서 대안주체와 연대의 정치성에 대해 논하고 있을 듯 하다. 사회구성체론의 이진경이 탈근대에 내놓을 사회구성체론이라 묘한 느낌을 준다. 전지구적 지형도 속에서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체를 재영토화하는 작업은 관심이 대상이 될 만하다. 한가지 문제는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그점에 천착한 나머지 마치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린 '오래된 미래'의 구성체가 아닐까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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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23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상의 방랑자..저는 슈베르트에 대한 일종의 아집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김문경씨는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지 궁금해집니다.

한 번 눈여겨 봐야겠네요~

드팀전 2008-11-26 03:45   좋아요 0 | URL
음악책은 늘 관심이 가지요. 에릭 클립튼의 자서전까지두..

승주나무 2008-11-24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연설을 보니까 페리클레스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필로폰네소스가 한 말이 아니지 싶은데..."페리클레스와 씨름을 해서 땅바닥에 매다꽂았다고 치자. 그는 연설로서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이 매다꽂힌 적이 없으며 오히려 승리해다고 믿게 할 수 있다" 이 책이 땡기네요~~ 연설할 일이 자주 있어서 그런지 ㅋㅋ

드팀전 2008-11-26 03:46   좋아요 0 | URL
필로폰네소스는 누굽니까? ...?? 지명아닌가?? 워낙 많은 그리스인들이 있어서..??

승주나무 2008-11-26 22:07   좋아요 0 | URL
투키디데스였네요. 펠로폰네소스는 지명이 맞는 것 같습니다.^^;

헤로도토스가 다소 신화스럽게 역사를 구성해 놓았다면,
투키디데스는 이에 반발해 아주 실증적인 역사를 쓰려고 노력했죠.
페리클레스의 정적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페리클레스에 의해 추방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갑자기 그리스의 역사가 땡기네요^^
 

눈은 침묵이다.

눈 오는 날은 그래서 아름답다. 세상이 동양화의 마지막 여백처럼 남아 있는 날은 읽던 책을 뒤로 물리고 눈이 완성하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내가 '차가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잘 얼린 네모난 얼음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햇빛을 머금은 민들레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아폴론의 미'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하다.  '차가움'은 일단 '단순함'을 준다. 우리가 가끔 모든 로코코적 수식을 걷어낸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정말 세련된 디자인들은 선을 줄인다. 눈은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선을 단 몇 개의 줄로 환원시킨다. 본질을 향한 질주같은 그런 선들은 아름답다. 우리는 눈이 지워지면 다시금 세상의 선들을 만나겠지만, 삶의 어떤 순간 순간에는 그런 선들을 생각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북극'을 사랑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갇혔다는 것은 침묵에 갇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폭설로 공항에 묶였던 날이 생각난다. 공항 대합실의 소란과 대비하여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은 조용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날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들이 흡음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끊겨버린 비행기에 대한 마음은 놓고 나니 하루를 거저 얻은- 남은 일이야 알아서 되라지 뭐-자의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디로 갈야할 지 결정하기 위해 나 앉은 공항 벤치에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눈이 건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해안에 어제 처음 첫 눈이 왔다. 내가 사는 부산의 겨울이 지루한 것은 이 곳에 눈이 귀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다른 지역에 눈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어느 북구의 겨울과 그 침묵을 만나러 갔다.

영화 <렛 미 인>(여기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아서들 보시오. 그것까지 배려하면서 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구리구리한 요구요.)



영화 속의 스웨덴은 계속 눈에 덮여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눈이 펄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웨덴의 겨울풍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다. 하지만 결코 공포물은 아니다. 영화는 '성장영화' 이고 '사랑'의 영화이며 '봉합'(?)의 영화다. 왕따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가 주인공이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의 금발과 햇빛이 부족한 피부빛은 스웨덴의 겨울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칼로 나무에 분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를 만난다. 그녀는 '맞받아 치라'고 오스칼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한다.('소통'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마치 이 말이 이제는 '혁명'의 모든 조건인양 쓰이는 경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가나 '소통' '소통' '소통'이다.  남발하는 '소통'의 만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서로 '외롭다'는 조건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기존 공포물의 뱀파이어와는 다른 동화적 구현의 '렛 미 인' 에서 첫 번째 깜찍한 전환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그렇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이다. 나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 장승이나 솟대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뱀파이어'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구의 감독은 '외로운'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에 '왕따' 소년의 '외로움'에 침입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으면 - 스토리라인에 온 신경만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뱀파이어 이엘리는 오스칼의 '얼터에고'인 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엘리의 존재를 알게된 오스칼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엘리는 '나는 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오스칼의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내는 얼터에고로서의 이엘리를 감독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식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야' 오스칼의 망상이야라고 스토리를 따라간다면 관객의 상상력 협착증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중요한 장치가 스웨덴의 눈오는 풍경이다. 오스칼의 내면처럼 그곳은 눈으로 흡음된 침묵의 세계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오스칼을 창 안에 있는 아이로 설정한다. 창 밖과 창 안이 모두 눈 속에 있는 셈이다. 북구의 겨울은 어둠과 묵음으로 이에 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무채색이며 이유없는 뱀파이어의 희생양이다. 감독은 여기서 음향효과를 이용한다. 어른들의 장면에는 몇 가지 시끄러운 일상의 소란을 설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는 단순한 기타멜로리로 덮어버린다. 동성애적 코드가 보이는 오스칼 아버지와 친구의 대화장면은 오스칼이 이런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된 존재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오스칼은 눈오는 밤이 세계와의 소통의 단절을 말하듯이 오스칼 역시 언어들도 부터 단절된다. 그는 '외로움'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성장통이지만 감독은 파괴나 일탈 같은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극단적인 폭발을 내재한 이 성장의 아픔은 결국 '뱀파이어'의 흡혈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흡집을 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 초반에 이엘리를 돕는 아버지 또는 애인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그는 이엘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흡혈을 하지 않도로 살인을 통해 이엘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는 유일한 제도적 안전 장치가 되는 셈이다. 뱀파이어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실패했을 때, 뱀파이어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잔인한 방식의 사랑의 완성이다.( 다분히 잔인한 것은 성장할 오스칼이 곧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는 마지막 암시 같은 것 때문이다.) 



영화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가방에 넣어서 어른들의 세계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결국 어른들의 언어는 그들을 침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오스칼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적인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런면에서 현실적이다.) 결국 오스칼은 언젠가 자신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인정함으로서만 그 여행을 마감할 수 있다. 오스칼의 셈세함은 그 선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 오스칼같은 봉합의 기억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런 섬세함의 기억을 잃고 뱀파이어를 지워버린 존재들이다. 나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뱀파이어를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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