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에 대해 열광한 적이 없다. 그건 황우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으로 미네르바의 글을 본 것도 미네르바 구속으로 허위논란이 있는 <신동아>의  기사를 읽고 나서이다. 오히려 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네르바가 아니라 <미네르바 신드롬>이었다. 사실 나는 미네르바가 얼마나 경제통이며 예측의 정확성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어떤 투로 글을 쓰는 지 조차 잘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다. 시사주간지를 통해 본 평가는 '쉽게 명쾌하게'라는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런 '쉽게 명쾌하게'는 늘 헛점을 만든다. 결국 내가 보기에 <미네르바 신드롬>은  미네르바를 불편해 하는 측의 압박과 미네르바에 열광하는 이들이 동시 합작품이었다. 책임은 전자가 훨씬 크다. 반짝 인기를 모은 한 개인이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릴 만큼 강력했다면 그 국가가 얼마나 내파되어 있는지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구멍이 숭숭 뚫려 한 조직만 무너져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말기 골다공증환자의 골밀도 조직같은 국가. 이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결국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던-자학사관을 벗어나자던- '대한민국'의 위상을 그 정도 밖에 안된다고 스스로 자임한 꼴이다. 사이버 논객 하나에 국가 신인도가 빵구가 날 정도라면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국가기밀을 국가가 나서서 인정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국가 내란을 목적으로 한 대외기밀 누설죄'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경계하는 북한이나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는 일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내가 사실 미네르바에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최근 구속사태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정신병적인 강박증이 아니라면 일어나서는 안돼는 일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반대파를 겨냥한 목소리겠지만, 전직 대법관을 지냈던 수구 우파인 이회창 총재마저 헌법질서를 운운하며 비판한다.(그가 대통령이었다면 똑같은 짓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회창의 TV 인터뷰는 '정치인'보다 '법률가'로서 날릴 때의 그와 잠시 오버랩되었다. 이회창이 김영삼과 대립날을 세웠을 때 '대쪽판사의 사법정신'으로 포장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나는 지난 대선부터 지금까지 이명박을 '쥐박이'나 '명바기새끼'라고 불러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유는 그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 대한 '분노작열'로 또는 그를 '악'으로 몰아붙이면서 작동시키고 있는 '내 안의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의 국면에서 우리는 상대를 '적'으로 또는 '악'으로 구현하고 목표의 지향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외 지점에서. 일상화된,또는 습관화된 '쥐박이' 의 사용은 내게는 반갑다기 보다는 조심스러웠다.  

아주 쉽게 말해서 나는 그 '쥐박이'가 총체적인 분할 구도 속에 차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비루함마저 묻는 기제로 이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자기를 위한 미끼같은 것. 결국 싸워야하는 또다른 큰 종류의 실체는 그 미끼를 무는 것정도에서 머물고 그 실체를 알았다고 자임하며 은폐된다는 것이다. 물론 근본주의적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미끼를 무는 행위 자체가 어리석은 짓만도 아니다. 강조하는 점은 우리가 이런  미끼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런 미끼를 물고, 그런 미끼로 부터 풀려나는 과정 속에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실은 선을 긋는 것에서 생기지도 않고 선 바깥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경향신문>에서 미네르바 구속에 따른 자발적 검열이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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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티즌 자기 검열=정부 정책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다른 사이트에서도 위축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다음 블로거 뉴스의 ‘낮은 표현’은 “미네르바 구속으로 아내가 더 이상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지 말라고 한다”고 적었다. 이어 “자기 검열뿐만 아니라 가족간 검열로 이어질 판”이라고 했다.

서울대 홈페이지의 ‘메추라기’는 댓글에서 “판사도 승진은 해야 하니까”라고 적은 뒤 “이 리플도 검찰에서 보려나?”라고 썼다.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송경재 교수는 “의사 표현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인데 이런 부분들이 사법기관·행정부 등 권위체에 의해 견제당했을 때 위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며 “이를 ‘겁주기 효과’라고 하는데 미네르바 체포 이후 인터넷에 글쓰기를 할 때 재차 자기 검열을 한다든지, 용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이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을 비하하는 은어 사용도 줄었다. 디지털카메라 동호회인 ‘SLR클럽’의 게시판에서는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쥐박’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게시글이 842건당 1회씩 있었는데 9~11일에는 1969건당 1회로 57%가량 줄었다. ‘이메가’라는 표현도 같은 기간 2197건당 1회에서 3150건당 1회로 30% 정도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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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뉴라이트 비판>에 대한 알라딘의 광고문구에는 "이 모든게 뉴라이트 때문이야"라는 문구가 있었다. jade님이 이 문구를 보고 경악했다는데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어떤 지점과 접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뉴라이트때문' 으로, 또는 '모든 것을 이명박때문' 이라고 말할 때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이명박'이 '적' 이라는 근본주의적 태도에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현실적 조건과 차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사를 건 모든 싸움들을  모두 '허무'의 깃발 아래 담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중세가 되어 버릴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태주의'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한 때 알라딘을 충천케 했던 '쥐'의 포화상태도 '소띠'해에 조금은 줄어들 듯 하다. 경향신문의 기사는 통계의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완전치 못하다. 그것이 미네르바 구속때문에 생긴 일인지 다른 이유때문인지 명확치 않다. 약간의 유의미한 사실을 가지고 작성되는 것들이 기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검열 때문일 수도 있고, 외치고 조롱해봐야 별반 반응이 없으니 지친 걸 수도 있고,황당한 사건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다 보니 줄어든 것일 수도 있고, 검찰을 욕하다 보니 이명박이란 단어가 줄어든 걸 수도 있다. 해석은 여러가지로 가능하고 각 해석 하나 하나가지고 기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쨋거나 알라딘에서는 '분기탱천' 페이퍼가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다시 '촛불'이 타오를 때까지.... 그런데 사건적인 희생이 나오기 전까지는 '촛불'이 타오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촛불'의 학습효과는 민중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집권층에도 생긴 것이다. 분열시키고 개별화 시켜서 서서히 지치게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자 내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아...졸라...쥐색이들 약먹었으면 조용히 집 구석에 가서 죽을 일이지..발악을 해버리네. 쥐구멍에에다가 기름칠하고 불을 질러,이것들을!! (ㅋㅋ 할 만큼 다했네. 아싸.. 나는 생각있는 사람으로서 할 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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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삐딱하게 보기>를 읽고 있다. 그동안 지젝의 글을 몇 편 읽고, 그의 강의도 좀 보고, 좀 익숙해져서인지 낯익은 풍경을 보듯 읽힌다. 그렇다고 '케익크 한 조각'은 아니다.단지 훨씬 마음 가볍다는 뜻이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이 거론된다. 외계인에 끌려갔다 생환하는 사람의 이이기이다.존재하지 않는 13층을 찾으러 보내졌던. 우주를 만든 우주인들은 주인공을 돌려보내 줄 때 가는 길 동안 절대 차창을 열지 말라고 말한다. 우주에 약간의 결함이 있어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금지와 관련된 상징은 아주 태곳적 이야기부터 나온다. 성경도 창조 이후 나온 이야기가 금지의 이야기 아니던가, 오르페우스의 신화도 그렇고, 천년묵은 이무기 이야기도 그렇다. 꼭 하지 말라면 해야 되는게 인간인지라-그리고 그게 있어야 신화가 이루어진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창문을 연다. 문 틈 사이로 무엇이 보일까? 

안개?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상태. 어떤 움직임도 없는 '무' 이다.  주인공은 아주 조금만 문을 열고 창으로 보이는 일상적 풍경과 창이 열린 틈으로 보이는 '무'를 동시에 경험한다. 

지젝은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무'를 라캉적 의미의 실재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부'와 '외부'사이의 불연속성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 불연속성은 불편함으로 다가오는데 일종의 보호 스크린 구실을 하던 창문이 안전거리를 확보해주다가 그것이 너무 가까이 근접했을 때 느껴지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을 인용하면서 다시 언급된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가 비참한 중국인들의 거리를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자동차씬 말이다.  

지젝은 이 경계선이 무너졌을 때, 즉 그 때까지 자신이 일정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외설적이고 잔인한 세게로 던져졌다고 깨달았을 때 생존의 문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늘상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 알라딘식 소통에 냉소가 느껴질 때가 있다. 빌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윈도우'운영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도 그런다. '실재'에 접근하면 모두 미치광이가 된다고... 

** 나는 여기서 '상징계,실재계'를 정의대로 활용하지 않았고 중의적으로 콜라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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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해할 목적의 허위사실 유포죄다. 

어뗘?  

이걸로 구속할 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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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의 관심도서> 

솔직히 내 인생에 책이 이렇게 밀려 본 게 언제인가 싶을 만큼이다. 한 해 내가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책만 읽을 수 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 관심 도서는 정말 관심 있는 것들도 있고 그 때 그 순간에 눈에 드는 것도 있다. 그래도 전자가 많다. 결국 이런 책들이 쌓이는 거다. 거기에 가끔 서점가서 눈에 드는 것들을 보면 또 몇 권이 쌓이게 된다. 거기에 또 - 쓸모없을지도 모를- 여유만만이 있어서 더 쌓이고 있다. 

요즘 내가 자주 보는 책이 그리스 관련 책들이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 관련 책을 읽게 된 이유는 플라톤의 <국가> 를 제대로 읽어보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그냥 냅다 읽으면 어떨까 하다가..뭐 급할 것도 없는데 하면서 '그리스'를 읽다보니 이제 플라톤의 <국가>는 1년 쯤 뒤에야 아니 그 뒤가 될지도 모르겠다. 더디가지만 이게 꼭 나쁜 것 만은 아니다. 의외로 그 앞길을 다지면서 풍부한 것들을 알게된다. <정치와 비전>의 셀던 월린이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피에르 아도같은 이들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브루노 스넬이나 베르낭 같은 이들은 이런 더딘 마음이 아니었다면 내 세계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옛날에 교양삼아선 본 철학사 책들도 앞부분을 다시 뒤적여 보게 된다. 그리스를 보는 것 중에는 푸코의 <성의 역사1.2.3>도 염두에 두고 있다. 푸코의 말년 작업이 '위대한 그리스로의 회귀' 아니었던가.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대충 훑어봤는데 그 안에도 고대적 개념들의 해석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그리스를 읽다보니 어렸을 때 본 <일리아드>와 <오뒷세이>,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아이네이스> 도 염두에 두게 된다. 3대 비극의 작가들은 전작을 모두 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묵직하게 제법 잘 나왔다. <플라타크 영웅전>은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이다.  

올해도 지젝의 책을 몇 권 쯤 더 볼 생각이고...고진의 책도 몇 권이 밀려 있고... 최근에 방한한 랑시에르도 관심이 간다. 연타로 나온 아리기의 책도 그냥 넘어가진 못할 것 같고...또 세익스피어도 꼼꼼히 볼 생각이다. 김정환 역을 한 번 씩 넘겨보면서 이런 문장들이 있었나 하면서 새삼 감동,감탄을 하고 있다. 왜 그 때 이런 말들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 하면서 말이다.  

회사에서 외딴 고도- 실제 외딴 고도는 아니다-로 강제 발령을 내려는 데 거기 자원할까 싶을때도 있다. 가족들에겐 엄청난 피해이고 또 가서 하는 업무가 좀 다른 거라서 거부하지만...가면 혼자 있는 시간은 늘어날 것 같다. 그건 밀린 책 처분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이소선 어머니는 대학 다닐때 집회 현장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다. 때론 연단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으로 때로는 우리들의 손을 잡으며 도닥여 주시는 모습으로 말이다. 

한국방송이 <인물현대사>를 할 때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다룬 적이 있다. 이소선은 전태일을 낳았지만 전태일은 또 다른 이소선을 낳았다. 그녀는 전태일을 열사라고 부르지 말고 '동지'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노래가 생각이 난다. "머물수 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동지여"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다. 

<놀라운 아버지>. 아들이 기획하고 아버지가 그런 그림으로 한 가족의 개인사가 유치찬란한 그림속에 그려진다. 아들은 전업 미술가이고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다.^^ 

만화로 그려진 구술사이고, 미시사이자  우리시대 어떤 아버지의 개인사이다. 나는 이런 소통방식을 통한 작업에 눈길이 간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지만 또 내가 모르는 그가 있다.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세대 유전된다 나의 아들 역시 그럴것이다. 이런 소통은 서로를 핥아주는 치유가 될 것이다.그리고 이 치유는 어떤 보편성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  

 

 올해 다윈은 한 두권쯤 읽어두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회사 자료실에서 <과학동아>를 본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지만 내가 다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번 달 <과학 동아>에서도 다윈 특집을 다루었다. 다윈의 진화론 뿐 만이 아니라 진화론이 어떤 논쟁들 속에서 진화되어 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읽을 만한 진화론 관련 서적들도 추천되었다. 내 기억에 대여섯 권 쯤 되었다. 모두 보관함에 있지만 그 중에서 <다윈의 식탁>이 가장 눈에 먼저 들어왔다. 

사실 헌책방에서 <진화>라는 두껍고 사진 많은 책-갑자기 누가 저자인지 생각이 안난다-도 좀 봤는데 들고 다니기 남사스러워서...  

 

  

<교양>이라는 두꺼운 책을 쓴 슈바니츠의 <햄릿>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으면서 함께 읽을까 하다가 여석기까지만 읽기로 했었다. 하지만 슈바니츠의 <햄릿>과 케네스 브레너의 <햄릿>은 잠시 뒤에 읽고 보기로 했다. 

여석기의 책에도 인용되는 폴란드의 얀 코트가 있다.그는 '우리시대의 햄릿'이라는 개념을 말하면서 햄릿이 읽고 다녔던 책이 당시에는 아마 몽테뉴쯤이었겠지만 지금이라면 사르트르 였을것이다 라고 말했다.  

햄릿이 뭔 책을 읽고 다녔는지 뭐가 중요하냐구?  맞다. 중요한 것은 그게 '햄릿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의 문제라면 좀 달라질 것이다.   

 

   

요즘 정치사상사는 스피노자에서 건져올린 것들이 많다. 모두가 스피노자를 사랑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스피노자를 건드리고 넘어가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뭐든 다 단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이 유명하고 중요하다고 덜컥 읽을 수는 없다. 그냥 언젠가 읽겠지 하고 생각만 해 놓는것이다.책도 얇고 포함된 함의는 커도 무지막지한 책은 아니다.  

이건 다른이야기다  회사에서 제일 웃겼던게 뭔고 하니...영상미학 대학원에 다닌 친구가 있었다. 내 장담컨데 사회학적 기본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 마르크스의 '마'자도 모른다.프로이드의 '프'자는 들어봤을 정도다. 그런데 언젠가 회사 책상 위에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 놓여 있었다. 내가 그래서 장담했다..'니가 그 책 읽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져주마' 기분 나빠했지만...1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냥 놓여 있기만 하다. 이제는 놓여있기만 한 것이 그것의 목적인 양. 안됐다. 들뢰즈.(았따..당신 이야기 아니니까..우씨우씨 하지마시길..실제로 있는 인물 바로 그 특정인이야기다. 이제 글 쓸때 이런 내용도 올려줘야한다.어찌나들 오해작렬,지레짐작,의심만발,자책낙심,댓글폭발하시는지)

  

 진중권은 MB의 '그린 뉴딜'을 보고 '군복이 녹색이니 군대도 녹색 사업이냐?' 라고 했다. 하여간,,^^ 어찌나 웃었던지. 

 이 글들 중 일부는 <씨네21>에서 본 것들이 있을게다. 회사에서 <씨네21>을 정기구독하고 있기때문에 나오면 살펴본다. 물론 매번 읽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책을 사도 별로 아깝지는 않을 듯 하다.  

영화와 미학은 많은 이들의 관심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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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회사에 나왔다.  일하러 나온 건 아니다. 

추락하는 두레박을 끌어 당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는다. 그게 역사이고 그래서 이름없는 작업들이 중요하다. 나는 아이디어만 빌려주고 사라져야 하는 위치다. 부디 소기의 목적들이 잘 이루어졌으면 바랄 뿐이다.       

그런데 만나야 하는 양반은 왜 이렇게 더디 오나?  하긴 내가 불러 낸 거니 기다릴 수 밖에..그래도 약속했으면 시간 좀 지키지...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들고 올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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