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얼굴을 오랜만에 본다.  수염을 길렀나...박상민인 줄 알았다. 

신해철의 교육관은 이반 일리치같은 '탈학교론자'였나? 그의 맹독성 발언이 그의 급진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용 조용하시지만 알라딘에 있는 00 님 같은 경우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아..유명한 글샘님은 아니다.^^ 그분은 급진적이지 않다. 반MB적일 뿐이다.) 신해철이 언젠가 자기는 그저 '상식적인 진보'라는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문제에서 정작 살펴봐야 하고 고찰해야 하는 것은 '상식의 재구성'문제이다. 신해철이 변절했네..충격적이네 같은 것은 내 관심 밖이다. 신해철의 교육관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의 답변은 그런 수준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결국 신해철의 평소 발언으로 인해 그의 교육관이 아닌 '투사된 교육관의 신해철'이 유령처럼 존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보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대개는 현재의 교육체제가 만들어 놓은 주름을 따라간다. 그 안에서 회의하고, 반성하고 ,자기모순에 껄적지근하고, 3개 보낼꺼 2개 보내놓고 노심초사하고 그런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대대수의 사람은 '사교육'의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안에는 상대적인 차이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불행히도 군비경쟁에 뒤쳐진 자들은 쳐지는 구도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진보'의 이론과 현실태에 틈이 있는데 이 틈이 발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파는 이 지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략한다. 진보의 이율배반이라는 식으로 '도덕가치'를 들고 나온다. 대개 우물쭈물하다보면 그렇게 당하고 집에 가서 끙끙 앓는다.  

사교육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없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보수든 진보든 살아가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는 '탈주'하는 방식이 가장 명징하고 도덕적이다. 잡음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갈 수 있는 것은 소수이다. 진보는 다수를 구성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대중의 상식적 욕망조차 그 물질성을 인정하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사교육 반대'를 외치는 것보다 이 길이 실제적이고 힘든 길이다. 그래서 진보도 손을 놓았다. 이 결과 우파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취약한 진보 대중을 만들고, 또 앞에서 외치고 뒤에서 학원비를 넣어주어야 하는 군비경재의 게임상태에 동원되는 것이다. 

뭐 별거 아니다. '신해철의 광고'를 욕하는 사람들은 신해철이 광고한  그 학원이 어떤 학원인지,정말 잘하는지등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신해철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광고에서는 신해철만 보인다. (실제 그랬는지 아닌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대중들은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읽는다는 것이다. 그 학원 정말 잘하나?  

상식은 여기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내가 관심이 가는 건 그것뿐이다.   

p.s) 묘하게 흥미로운 것은 오늘 부터 조선일보 1면에 '학교,공교육 이길 수 있다' 라는 특집이 나간다는 거다. 기사를 읽어보면 결국 '개인의 분발'이라는 공적문제로 사적으로 치환하는 '개인의 승리'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종의 눈가리고 아웅하고 닭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형세다. 평준화 반대와 특목고 육성에 사활을 걸듯 달려들면서도 또 한편에서 균형감을 잡는듯 모양새를 취한다. 그런데 실재 내용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반복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마치 자기들이 공교육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것처럼 선점한다. 신해철의 광고와 조선일보의 1면 타이틀을 본다면 이미지 싸움에서 이미 등이 어느쪽으로 돌지는 뻔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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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끝이다. 

네 입가에는 아기 동백꽃같은 혈흔이 묻어있다. 다시 울리지 않을 가르릉거리는 너의 성대. 네 입주면에 피어난 꽃잎도 흔들리지 않는다. 살아 고난스러웠던 너의 아가리는 끝나는 곳까지 너를 편안하게 두지 않는다. 너의 마지막 낙인인양. 고단함은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너를 따라다녔던 얼룩에 하나가 더해졌다. 

먹이를 쫓아 비좁은 담장 사이를 헤치던 너, 쓰레기통 속에 웅크려 죽은 애인을 멀찍이 바라보던 너, 아기처럼 외로왔을 너.   

...쓰레기통에서 죽어간 네 여인처럼 너 역시.

해가 뜨고 어젯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이의 욕지거리가 너를 모욕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네 운명이 마지막으로 보시할 이글거리는 붉은 아가리가  너의 육신을 탐한다. 

이번주의 관심도서는 별로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가 가장 눈에 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꽤나 노령의 사회학자이다. 비투비 시리즈물 중 바우만이 쓴 <자유>를 예전에 읽었다. 최근에 what's up시리즈의 네번째 도서로 그의 <쓰레기가 되는 삶>이 출간되었다. what's up시리즈는 모두 볼 요량이다. 바디우의 책을 즐겁게 보았고, 지젝의 책도 대략 넘겨봤다. 아감벤의 것은 벼루고 있다가 최근 무화과 나무님의 리뷰에 다시금 자극을 받았다. 

'공포' 는 상당히 흥미가 가는 주제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본원인 공포는 역시 '죽음'이다. 바우만의 첫번째 챕터가 '죽음의 공포'이기도 하다. 진화종교학에서 '종교 부산물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죽음의 불확실성'등을 감소시켜주는 요소로 종교가 발생했고 진화했다고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 같은 이들은 대중사회를 분석하면서 '죽음'의 공포로 부터 도피하는 '일상의 반복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쉽게 말하면 '반복된 일상' 이라는 것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회피시켜준다는 것이다. 예전에 본 글이라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 대한 출판사측의 요약은 이렇다. 

'유동하는 공포’란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의 특징인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다.  

'공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같다만 '근대'라는 공간의 불확실성이 그런 '공포'의 일상적 내재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책 서문에 보면 바우만은 1차적인 생물학적 공포를 떠난 2차적 공포, 즉 '파생적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생체정치'의 개념을 도출하면서 '훈육과 통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이 논의를 확장하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이라는 예외상황이 '생체정치' (삶정치)를 강제하는 방식에 대하여 논한다. 네그리의 <다중>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에도 이런 논의들의 진화가 들어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최종적 논의의 인간적 소실점 안에서 '공포'라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공포'의 원칙은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담론'의 공포를 통해 먼저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회학자들에게 자본이 공포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격언이다. 그리고 그런 공포는 현실적으로 대중들과 접촉하기에 단지 이데올로기의 허상만은 아닌 실체이기도 하다. 

'파생적 공포'란 계속적으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으로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느끼는 감각이라고 보면된다. 말하자면 불안의 감각, 취약함의 감각이랄까. 

세계 경기의 침체 속에 실업이 일상화되면서 이런 '파생적 공포'에 가장 허약하게 노출되는 것은 바로 중산층이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는 한 순간의 낙마가 장기간 회복불가능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 상류층에 편입하기란 요원하며 하류층이 된다는 것은 찰나다. 바우만의 '파생적 공포'는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촉발되는 공포상황에 정합적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항존하는 공포, 예고하지 않는 공포, 미지의 공포, 즉 '파국적인 공포'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공포'로 인해 노이로제 상태에 빠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병원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늘상 '공포 속'에서 살지 않기때문이다. 

다른 모든 인간의 공생이 그렇듯, 우리의 유동적 근대사회 역시 삶을 공포와 더불어 살만하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바우만은 공포를 '묵음화방식'하는-개인이나 구조를 통해- '지연시키기'의 방식들을 이야기한다. 리스크 부담 덜기, 신용카드와 소비주의 고찰들의 방식을 통해서말이다. 

대략 여기까지가 서론의 내용이다. 서론만 봐서는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에세이로 보인다.(피천득의 에세이와 다른 서구식 개념의 에세이말이다.) 

이번 주의 관심도서는 아니지만 <다윈의 식탁>에 언급된 책들이다. 유명한 도킨스와 굴드의 책은 제외했다. 도킨스와 굴드의 책도 몇 권이 쌓여있어서 이것들을 다 읽을리는 없지만 언제 관심이 닿으면 볼만도 하다. 나름 이 바닥에서 유명한 책들이란다. <사회생물학 논쟁>은 <다윈의 식탁>에 나오지 않는다. 부케비츠는 '절충주의'입장에서 정리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대충 넘겨봤다. 그의 최근 책이 <진화는 진화한다>이다.<빈서판>은 마립간님의 강력추천도서이다. 분량 압박이 좀 있다. 노이에자이트님과 예전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본바탕'이란 말을 했다.<빈 서판>은 '빈 서판은 없다'라는 책이다. <왜 다윈이 중요한가?>는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이 '과학을 빙자한 사기'라는 것을 말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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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론의 핵심은 세대갈등이 아니라 계급갈등"
공저자 박권일씨, "조선일보의 노이즈 마케팅에 우석훈이 낚였다"
 

2009년 01월 30일 (금) 16:48:00 이정환 기자 ( black@mediatoday.co.kr)
 
"우석훈이 변희재에게 낚였다." 20대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베스트셀러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우석훈씨가 변희재 실크로드 CEO포럼 회장의 실크세대론을 치켜세운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씨는 지난 14일 한겨레에 기고한 "20대 당사자 운동과 변희재의 실크세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변씨가 주도하고 있는 창업운동을 "우파 버전의 당사자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386의 우리끼리주의를 깨고 새로운 당사자 운동이 생겨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잘 하는 일", "건투를 빈다" 등의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변씨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일련의 칼럼에 따르면 실크세대는 "1970년대 이하 출생으로 386세대와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를 말한다. 변씨는 "88만원 세대론을 폐기처분하고 실크세대론을 이야기하자"고 주장하면서도 386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이상의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실체가 모호한 개념인 셈이다.

문제는 변씨와 우씨가 88세대론을 실크세대론으로 물타기하면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씨가 변씨의 실크세대론에 말려들면서 88만원 세대가 제기했던 20대 비정규직의 문제가 386세대와 지금의 20, 30대와의 갈등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변씨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우 박사가 당사자 운동으로서 창업 아이템을 선택한 실크세대론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켜준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변씨와 우씨의 기묘한 결합과 관련,
   
  ▲ 88만원 세대, 우석훈·박권일 공저 ⓒ레디앙.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박권일씨는 30일 레디앙에 기고한 "88만원 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씨의 글 때문에) 88만원 세대론은 이제 조선일보의 실크세대 기획의 '부록'으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조선일보가 변씨의 실크세대론을 띄우는 이유는 20대 이하의 세대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눈감아 버린 채 오직 386세대만을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서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처한 문제를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88만원 세대가 뚫어내야 하는 벽은 386세대 개개인이 아니라, 386세대가 싸우며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20대에게 굴레와 질곡이 되어버린 사회시스템"이라면서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88만원 세대론'은 단순히 세대끼리 싸움 붙이는 담론 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고 강조했다. 변씨의 실크세대론을 겨냥해서도 "'능력과 전문성도 없는 386세대'와 '무한한 잠재력과 전문성을 가진 젊은 세대'로 구별짓기하는 변희재식 세대론은 세대론이 아니라 차라리 변형된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박씨는 "고민스러운 건 '88만원 세대'를 가장 열심히 읽는 20대가 이른바 명문대생이란 점"이라면서 "정작 88만원 세대에 한없이 가까운 20대들일수록 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젊은층이 88만원 세대라면, 고령층은 50만원 세대"라거나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우파 담론에 88만원 세대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이 책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기도 했다.

박씨는 이 책이 "계급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고 지적했다. 박씨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일보와 변씨 등이 엉뚱한 실크세대론을 들고 나와 우씨를 끌어들인 것도 계급갈등을 세대갈등으로 치환하려는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인 셈이다.
최초입력 : 2009-01-30 16:48:00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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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의 관심도서....  

(이하 독백) ' 지금 내가 관심도서를 찾고 있을 때인가? 차라리 관심 요식업을 찾고, 주방장에 울며 불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야 하는 때가 아닐까?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책 읽기도 요원해지는 거다. 

어쩌겠는가? 어떤 순간 최종심급을 맞아야 될 때 오면 물적 토태를 확충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들 밥은 먹여야지. 뭘 해서든..(-사실은 여기에 약간의 탈출구가 있다.)  

결국 대부분-빈자의 철학에 확고하게 뿌리 박지 못한-사람들은 결국 적당히 배를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과 머리로 '가난의 철학'에 동의하는 것 말고 몸과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외다.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알라딘의 교류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파란여우'나 '된장'같은 분들은 '자발적 가난'을 -그리고 그를 통한 풍요의 철학을 받아들이신 거다. 나머지는 실제로 별로 원하지도 않으면서 이웃집 아이가 먹고 있는 쭈쭈바를 흘깃거리면서, 침넘기면서 감동,감화하는 거다. 이런 변형판들은 '인도,네팔' '방랑 여행객',또 각종 쓰레기같은 '여행기' '뉴에이지'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런 환상은 결코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단촐한 삶'의 욕망 또한 눈감기 전까지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거다. 그 모든 것을 자기가 기획하고 자기가 속고,자기가 속고 있다는 것 자체도 잊는다. 그러니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당신, '당신의 징후'를 즐기고, 가끔 정신병원에 병문안을 쌕쌕주스를 사들고와다오.

내가 진짜 알라딘에서 지겨운 것은 결코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자기연출하는,또는 자기상정하는 '가난의 철학'에 대한 눈물 겨운 동의들이다. (남편 보고 다음 달에 사표 쓰고 가족 모두 함께 세계 여행 가자고 권해보자.!!...아이가 조금만 크면,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구나서...함께 관뚜껑 쓰기 전까지 '다음'은 늘 불가능할껄...)     

 이것 저것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내가 '가난의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겐 어떤 종류의 '시골'생활도 불가능하다. 가난하지 않으며 시골에 사는 '전원'생활을 받아들이려면 지금 열나게 미친듯 돈을 벌든가 열나게 연금이라도 퍼부어야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족부양하고 뭐 하려면 나이 70까지는 돈을 벌어야될 것같다. 때돈이 아니라 구명을 위해서. 나이가 더 들면 써주는데도 없을테니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찾으러 다녀야겠지.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돈'을 버는게 쉬우니까 다들 '돈'으로 욕망을 '물질화'하는구나 싶다. 실재의 수동성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허구적 능동성으로의 지향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독백 끝) 

이런 책들이 나와서 관심을 끈다. 밀린 책들도 많은데...  

1.왈쩌의 책을 예전에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런 저런 유사한 책을 읽다보면 그의 이름을 만나곤 한다. 정치학 책들 몇 권 본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이름이 특이하니까...  

2. 올해가 다윈탄생 200주년이다. 그래서 몇 권 상식선에서 읽어볼까 한다. 고등학교때 생물선택도 아니었고 해서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몇 권의 유명한 도킨스,굴드 책들도 포함하겠지.. 

3.모리스 블랑쇼의 전집 출간이 시작된다고 한다. 블랑쇼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읽기로하자. 

4. 올해도 지젝을 몇 권 읽을터이다. 약간의 탄성을 정리해줄 만하지 않을까 싶다. 국내연구자가 개론으로 정리한 지젝의 책이 몇 권 있었나? 하여간 지젝 입문서로 나쁘진 않을 듯 보인다. 

5. 관심가는 소설들이 몇 권 있다. 올 해는 너무 애먹이지만 않는다면 영어로도 몇 권은 볼 생각이다. 지난 번에 서점에 가서 <The reader>,<No country for oldman>을 샀다.나는 매스마켓판 페이퍼백은 마음에 안든다. 좀 눈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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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현재 구속 중인 박 씨가 진짜이든, <신동아>에 기고한 미네르바 K씨가 말하는 7인이 진짜이든, '미네르바 사건'의 핵심은 검찰이 미네르바를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한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진짜' 미네르바는 금융계 종사자 7인 한 팀이며 현재 검찰에 구속된 박모(31) 씨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는 <신동아> 2월호 보도로 본격화된 미네르바 진위 논란도 이 맥락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지난해 12월 <신동아>에 실린 미네르바 기고문은 현재 검찰에 구속된 박 씨가 '가짜'라는 의혹의 핵심이었다. 박 씨가 변호인단과 접견 과정에서 자신은 <신동아>에 기고하지 않았다고 밝힘에 따라, 그러면 <신동아>에 기고한 그 미네르바는 누구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신동아>가 '언론'으로써 인터뷰를 '통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던 <신동아> 보도로도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미네르바가 누구인지 입증할 일차적 책임은 <신동아>가 아니라 '검찰'에 있다.

의문 1 : 미네르바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팀?

<신동아>는 19일 발매된 2월호를 통해 '미네르바 집단설'을 보도했다. 미네르바는 한 사람이 아니라 7명이며, 각자 분야를 나눠 글을 나눠썼다는 것. 미네르바라는 닉네임 뿐 아니라 IP주소도 조작을 통해 공유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힘들다. 미네르바가 누리꾼들 사이에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예측한 이후다. 다음 아고라를 넘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0월 이후다. 정부 차원에서 미네르바에 대한 수사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11월 들어서다. 하지만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을 통해 다음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 12월이다.

미네르바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동아>와 인터뷰한 K씨도 "이런 상황을 초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해서 IP주소를 똑같게 하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등 번거로운 일을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고라에는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고, 익명성도 충분히 보장된다.

또 인터넷 상의 글쓰기는 인쇄 매체와 달리 자유로운 글쓰기를 기본으로 한다. 오ㆍ탈자, 비문, 속어, 팩트의 오류 등에 대해 너그러운 동시에 신뢰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의 재기발랄함과 직설법은 강점이다. 이런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대표필진의 데스킹을 거치는 '신문식 글쓰기'를 했다는 것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이명박 정부의 '뻘짓'이 없었다면 '한 명의 네티즌'이었을 미네르바가 마치 사전에 기획된 작전세력처럼 움직였다? 믿기 어렵다.

의문 2 : 박 씨와 '미네르바팀'과의 관계는?

현재 검찰이 박 씨를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IP주소와 박 씨의 자백이다. 미네르바를 잡는 처음부터 코미디였던 이 사건에서 물증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IP 주소였다.

<신동아>의 미네르바는 이 IP주소를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7명과 검찰에 구속된 박 씨가 동일한 IP로 글을 올리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7명의 'IP 주소 공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박 씨의 'IP 공유'는 설명이 안 되는 대목이다. <신동아> 인터뷰에서 K씨는 '의견 충돌로 이탈한 1명과 박 씨의 연관성'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대목이다.

박 씨는 이들과 전혀 무관한 인물인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인물인가? 만약 박 씨가 이들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라면, 그는 왜 IP주소를 조작해 지난해 12월29일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올렸을까? 이전에 올린 모든 글을 자신이 썼다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는가? 검찰에 구속된 박 씨가 '소영웅주의'에 빠진 청년, 내지는 검찰이 박 씨에게 자백을 강요했을 것이라는 억측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 그 뒤에 또 의문이 남는다. 그가 진짜 '가짜'라면 <신동아> 기고문에 대해서는 왜 부인했을까? 진위 논란이 불거질 게 뻔한데 말이다.



▲ 박 씨에 검찰에 구속되는 장면. ⓒ뉴시스

의문 3: '미네르바팀'이 글을 올린 목적은?

<신동아> 보도처럼 미네르바가 잘 조직된 '팀'이라면 왜 아고라에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의문은 더 커진다.

미네르바가 전문적인 경제지식과 탁월한 정보력 뿐 아니라 정의감과 서민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1명이었다면 "힘없고 배고픈 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글을 올렸다"는 말로 어느 정도 글을 올린 의도에 대한 궁금함이 충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7명이 자체 데스킹 과정 뿐 아니라 IP주소를 조작하는 과정까지 거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글을 올린 목적이 "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내부 분열까지 겪으면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신동아> 보도로 '진짜 미네르바 찾기'는 사실상 끝?

<신동아> 보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기사로 '진짜 미네르바 찾기'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 됐다.

처음부터 검찰은 '제2의 미네르바'의 가능성을 차단해 놓았었다. 지난해 7월30일과 12월29일에 올린 글 두 개 만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며, 이 글을 올린 사람은 박 씨가 분명하며, 본인도 이를 시인했다는 것. 나머지 글을 누가 올렸는지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신동아> 기고문 관련된 수사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검찰의 입장은 달라진 게 없다.

검찰의 이런 태도 때문에 애당초 미네르바 진위 논란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의혹을 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미네르바가 한 팀'이라는 <신동아> 보도는 결과적으로 '쐐기'를 박은 셈이 됐다. 검찰이 잡은 박 씨가 '가짜' 미네르바일 가능성에 대해선 의문을 던졌지만, 7명으로 늘어난 '진짜' 미네르바를 찾기는 매우 힘든 일이 됐다. 박 씨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1명의 미네르바가 나타난다 해도, 그가 '진짜'임을 입증하기는 상당히 힘든 일인데, 7명이라니….

검찰, '진짜' 미네르바를 '진짜' 모르나?

그렇다면 '진짜 미네르바 찾기'는 중요한가? 현재로선 중요하다. 왜? 제기된 의혹을 풀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구속 중이기 때문이다. <신동아> 보도대로 그가 '가짜'이거나 '진짜' 미네르바들이 쓴 글을 올리는 역할에 불과했다면, 그는 지금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법의 테두리를 넘은 두 개의 글이 중요하고, 나머지 500여 개의 글은 무관하다고 하지만 이는 억지다. 박 씨가 썼다고 추정되는 두 개의 글을 나머지 글과 연관성 상에서 의미와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또 박 씨가 의도적으로 미네르바라는 닉네임과 특정 IP 주소를 도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수사해야 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검찰이 박 씨에 대해 죄를 묻고 싶다면 '진짜' 미네르바를 찾아내야 한다. 가뜩이나 박 씨의 구속이 적절한 것인지를 놓고 법적 논란이 일고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진짜' 미네르바가 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적당히 넘어가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검찰의 미네르바 수사가 충성심 경쟁의 발로이며,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희생양 만들기'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된다. 누구도 검찰 수사 결과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구속된 박모 씨의 변호인단으로 그의 구속적부심에 참여했던 박재승 전 대한변협 회장은 박 씨가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대재앙이 떠오른다"고 경고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된 8명에 대해 재판 다음날 새벽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다. 32년 만인 지난 2007년 재심을 통해 모두 정권에 의해 조작됐으며, 무죄임이 입증됐다.

검찰이 '진짜' 미네르바를 찾아낼 수 없다면, 혹은 찾아낼 능력이 없다면, 내지는 찾아내도 공개하기 어렵다면, 현재 구속된 박 씨를 풀어줘야 한다.

/전홍기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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