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은 내게 큰 어른은 아니다. 나는 그분이 과거에 훌륭한 역할을 많이 하셨다는 것을 안다. 특히 종교 외에는 다른 사회적 자율 공간이 없을 때 그분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명동성당을 마지막 피난처로 피에 굶주린 인간 사냥꾼들을 피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그들을 맞고 지켜주던 분이 바로 그분이다. 87년 당시 화면에 나오는 명동성당 농성자들의 모습은 이제 잊을 수 없는 영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상징적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추기경과 교구 신부님들 덕분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부터 성당질을 한 바람구두가 귀끄트머리 잡혀서 중부서나  남대문 경찰서에서 머리통 맞지 않은 것도 다 그분들 때문이다. 

그런 분이 이제 그의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종교인에게도 명복이란 말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적절한 말이 안떠오르니 '명복을 빕니다.'라고 쓴다. 

 선한 노인 한 분이 이제 그의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내가 그 분을 큰 어른이라 생각치 않는 것은 내가 특별히 종교적 애착이 강하지 않기도 하고, 내게 또 다른 큰 어른들이 있을 수도 있어서 왠지 그런 분들께 배신때리는 것 같고 그래서다. 물론 어른이 한 분일 필요도 없고 많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에 비해 그 분은 너무 비세속적으로 고결한 삶을 사신 것 같아서 약간 질투도 나고 그렇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투정같지만 사실 그렇다.  하기야 그 분의 전체적 삶이 존경받을 만한 것이라면 몇 가지 불만 정도야 그리 중요한 것이겠는가.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고 뭐 그렇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년의 행보들은 사실 큰 어른으로서 나의 기대에 딱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별볼일 없는 노인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조중동은 그 큰 어른의 말을 교묘하게 절합하여 철딱서니 없는 좌파 아이들을 훈계하는데 자주 이용했다. 물론 나도 안다. 조중동이 나쁜 놈들이고 그 넘들의 주구장창한 방식이란거.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나 그래도 신방과 나온 놈이야. 김혜수 버전이다.) 물론 어여쁜 건 하나 있다. 조중동으로 모든 문제를 다 밀어버리면 되는 방식. 김수환 추기경의 말년의 문제들은 일부 욜라 싸가지 없는 좌파들에게서는 '노인네 드디어 .." 뒷말은 차마 안하겠다. 나는 윗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말하는 왕싸가지는 아니다. 내 버전은 이정도였다. "이제 그만 원로와의 인터뷰같은 것들은 좀 쉬시는게 어떨까?" 정도다. 내게는 그 분이 유도심문이나 적당한 미끼에 걸려서 불필요한 말들의 홍수속에 스스로 들어가시는 것 같았다. 원하는 이 없는 지청구를 남발하시는 것보다는 허명인 원로 자리를 내놓으시고  조용히 자연인으로 계시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늘 아쉬웠다. 

 이제 그런 아쉬움마저 뒤로 하고 그를 돌보시는 분께로 갔다. 이제 그의 주인께 가까이 가서 핍박받는 이들의 한숨, 고개 숙인자들의 눈물, 내몰린 자들의 분노, 갈 곳 없는 이들의 좌절을 잘 이야기해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이 곳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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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0여년전 일이다. 당시 일상적 언론을 둘러싼 담론의 중심은 '독재/반독재' ,'민주/반민주' 였다. 하지만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이 담론 흐름이 변해갈 것이라는 예견은 강의실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자본에 의한 언론통제' 가 일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때만하더라도 일부를 제외하곤 그런 흐름을 이야기하면 신선해했었다. 당시 어떤 교수님은 '돈의 흐름을 역추적해라'라는 말로 자본에 종속될 미디어의 경향성에 대해 말했다.  

한국에서 그 동안 공중파는 '공공재'로 이해되는 '공통된 합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아..그래도 방송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돼죠.'라거나 '방송용인데..'라는 진술 속에는 단지 대중의 상식선을 고려하는 것 말고도 '공적 영역'이란 것에 대한 개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민영방송 SBS의 등장으로 조금씩 완화되어 갔다. 그렇지만 민영방송조차 '전파공영성'이라는 것에 대한 기본 합의는 마지막 버팀목으로 작동되어 왔다. MB의 언론정책이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런 그동안 방송에 적용되어 온 암묵적인 '합의'이다. '1공영 다민영체제'라는 논리로 마치 '개혁'세력인양 어젠다를 점령한다. 변화라는 것은 담론적으로 긍정적으로 이해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 개념은 정확히 양가적이다. 그것은 '개혁'일 수도 '개악'일 수도 있다. 그런면에서 MB는 악화를 구축하여 새로운 합의를 구성해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아주 장기적인 차원에서 결과적으로 한 사회의 상식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지점을 이동 시킨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더 오른쪽이고, 다수와 소수의 문제에서는 다수의 쪽이다. 자본과 노동의 문제에서는 자본의 쪽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더 많은 이들의 입장'쪽으로 담론 투쟁의 장을 이동시킨다. 그러나 해방 이후 역사를 살펴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더욱 필요한 것은 공적인 다양성의 증가이지 과도한 아드레날린의 분비만을 도모하는 쾌락의 전시 상자가 아니다.  

아래의 글은 OBS 낙하산 인사를 통해 미디어 재편의 기본 방향과 또한 언론사의 내부적 딜레마들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해결책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은 OBS의 역외 전송 즉 '제2의 SBS화'이다. 먼저 이것 결코 쉬운 일도 또한 어찌보면 큰 틀에서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1개의 민영공중파를 늘려주는 방식인 셈이다. OBS측의 입장에서야 숙원과제일 뿐이며 이는 자칫하면 현 정부의 '다민영체제' 방침에 편승하여 언론노조 내부에서 분파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하나 '광고영업'의 확대가 제시된다. 이 문제는 자본에 의해, 직종파기라는 형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경영난 속에 신규 광고영업 인력을 고용할 가능성은 낮다. 결국 내부 인력을 재활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자나 PD 등을 광고영업파트로 돌리는 것이다. 이건 개인의 직업선택의 자율성 문제도 있고 또 향후 기자-광고주의 관계에서 생기는 독립구조가 파괴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제작 인력이 줄어듦으로서 생기는 공백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그것은 지역방송의 의무제작 비율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줄여내거나, 또는 값싼 외주프로그램의 대체로 충분히 만회가 가능하다.  

'1공영 다민영체제' 에서 1공영이라도 잘지키면 어떻겠냐는 생각도 가능하다. 그런데 미국의 PBS를 누가 기억하는가?  MB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공영방송'을 싸그리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다. MB의 방식은 현재의 '공영방송'은 기를 꺽어 순치하고, 다수의 민영체제를 구축하여 '공영'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현재의 가시적 투쟁은 전자쪽이 압도적이다. 그렇지만 '순망치한'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봐야하는 것이다. KBS,MBC 등에 대한 인사문제를 통한 개입과 다수 채널의 도입을 통한 방송 민영화의 큰 배치도. 이렇게 두 개가 연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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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 낙하산'이 보여주는 한국 방송의 미래상


[김종배의 it] 민간 주도의 신종 '권언유착'


기사입력 2009-02-13 오전 10: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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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자. OBS 이사회와 주주들은 왜 차용규 전 이명박 후보 방송특보의 '낙하'를 선택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모은다. 경영난 때문이라고 한다. OBS 관계자도 "경영난을 해소하기 위해 새 경영자를 찾다가 차 씨가 사장이 된 것"이라고 한다.

궁금하다. 차 씨의 어떤 능력이 OBS의 경영난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걸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되돌아봐야 한다. OBS가 직면한 경영난의 실체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모두가 다 안다. 한 달 평균 8억 원을 밑도는 광고수입이 경영난의 실체다. 웬만한 중소신문에도 미치지 못하는 매출이 경영난을 몰고 온 원인이다.

ⓒPD저널

그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극심한 매출 부진을 해소할 수 있는 방책이 뭘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광고계의 큰손들이 앞 다퉈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홍보비를 30∼40%씩 뭉텅이로 깎아버렸다. 영업을 강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릴 상황이 전혀 아니다.

해법은 두 경로를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 하나는 OBS의 지상과제인 역외재송신을 달성하는 것이다. 방송권역을 서울로까지 넓혀 광고단가를 올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케팅 외적 부문에서 영업통로를 개설하는 것이다. 아직도 경제 외적 요인이 광고집행 여부와 규모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결국은 힘이다. 이 두 경로를 열려면 힘을 동원해야 한다. 역외재송신 허가권을 갖고 있는 방송통신위를 움직일 수 있는 힘, 생존논리에 웅크리고 있는 광고주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끌어와야 한다. 그게 바로 '정치'요 '권력'이다.

OBS 이사회와 주주들이 차용규 전 방송특보의 '낙하'를 자청 또는 수용한 연유를 여기서 헤아릴 수 있다. 방송 내용보다 방송 사업을 우선시하는 OBS 이사회와 주주들에게 힘 가까이에 있는 차용규 전 방송특보는 유혹이다. 차 씨의 후광은 파우스트가 영혼을 바쳐서라도 얻고자 했던 마법 같은 것이다.

그칠 것 같지가 않다. '파우스트의 선택'이 OBS에 한정되지 않을 것 같다. 여권이 밀어붙이는 미디어 관련법이 통과되면, 그래서 방송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 제2, 제3의 '파우스트'가 도열할 것 같다.

사정이 그렇다. 방송 광고시장은 포화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방송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 파이 조각은 작아지고, 방송사의 경영난은 구조화되고, 생존논리는 득세한다. 이 틈새를 비집고 만고의 진리가 발현한다. 포도청보다 무서운 게 목구멍이라고 했다. 영혼을 팔아 '영업 마법'을 얻으려는 행태가 순간의 유혹이 아니라 일상의 당연지사가 된다.

누가 뭐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건 개별회사 일이다. 민간회사가 경영논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선택한 일이기에 시비가 붙더라도 정치문제화 하기는 어렵다. 여권이 꿈꾸는 '1공영 다민영' 방송체제가 성립되면 이렇게 된다.

권언유착의 시대가 부활하는 것이다. 권력 주도의 과거 모습에서 민간 주도의 신종 형태로 권언유착이 부활하는 것이다.

'OBS 낙하산'은 방송 전체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예고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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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반한다."  

레온 트로츠키의 말이다. 사회주의자였던 트로츠키는 궁극적 의미의 '국가 해체' 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런 폭력 역시 종식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것은 눈 앞에서 당장 벌어질 일도, 또 누워서 기다리면 도래하는 일도 아니다. 또한 나는 트로츠키의 원대하지만 소박한 꿈에 회의적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사형제도는 국가 폭력의 사회적 합의태이다. 이는 '법과 제도'를 통해 현실화된다. 우선 우리는 두 가지 지점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하나는 '국가의 형성' 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합의'이다.  앞의 것은 다분히 인류학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분석만 가능하다. 함수로 치자면 종속 변수에 해당한다. 반면 '사회적 합의'는 유동적인 독립변수이다. 사형제를 두고 각 국 마다 다른 태도를 취하고 또 일국 내에서도 논쟁이 있는 것은 독립변수를 재구성하기 위한 대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결과에 따라 함수-여기서는 국가-의 성격도 달라진다. 이 말은 '악'의 국가가 갑자기 '선'이 된다거나  '사형제폐지'가 범죄를 늘리거나 줄인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적 논의라는 담론 투쟁의 장을 통해서 도출된 합의는 일종의 사회적 상식을 규정하고 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전체적인 신념 수준을 규정한다.( 마치 구조주의자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거대한 방법론과 상관없는 상식적인 말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이라는 제의를 통해서 인류에 묻어 있는 폭력의 흔적에 대해 말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폭력과 희생양의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원초적 폭력' 이라는 것은 카인의 호적을 받은 모든 이들의 장부에 붉은 줄이다. 만약 니체였다면 이런  '원죄모델'에 근거한 지라르식의 기독교적 죄의식 문화에 대해 통렬하게 반박했을 것이다. 인류의 계보를 쫓아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국가의 탄생에서 만나게 되는 폭력을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근대 국가 형성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해방 이후 근대국가 형성기에 빈번했던 '사법살인'들, 그리고 인혁당 사건으로 기억되는 '독재정권'의 만행들, 군부의 제노사이드라고 말해야 할 '광주'의 살인들... 이 모든 것은들 '국가 폭력'의 직접적 예이다. 우리는 이런 거대한 종류의 '국가 폭력'에 대해는 어느 정도 민감한 촉수를 세운다. 반면 '법'과 '상식'의 이름을 이루어지고 있으며, '응징'의 대상에 명백환 형사상 범죄인에 대한 '사형'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갖는다. 상식적 수준으로 말하자면 '사형'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에 대한 사회의 징벌'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 라는 통념적인 생각이 들어 있다. 나 역시 연쇄살인범이나 성폭행자같은 범죄자들을 볼 때 가끔 '저것들을 잡아다가 모두 거리에서 육실을 시켜 버려' 이런 생각이 순간 순간 든다. 그리고 나와 그가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 또한 확실히 든다. 그렇지만 '생명' 이란 이름 앞에서는 사실 머뭇거리게 된다. 그와 나는 분명히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지만 '생명'의 이름 앞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이야기를 하자.  

근대국가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 해주는 자유주의의 이념하에 성립했다. 물론 전근대시기 국가에도 지배계급에 의한 폭력은 있었다. 이것이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 통합된다. 근대국가는 '폭력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한다는 말이다. 여기는 '법'에 의한 처벌이라는 것이 합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다. 근대 국가는 주권 영역 안에서 '법'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이제 '독점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된다. 또한 근대국가는 대외적으로도 국가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 또한 확보한다. 헌법 등에 보장된 교전권같은 것들이 그런 항목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독재권력이 행사한 독점화된 국가폭력이다. 무수한 희생자들이 있었고 또 그 상흔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조봉암 선생이나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같은 경우들은 단지 정권을 위협한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두가지 문제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는 '독점화된 국가폭력'을 어떤 식으로 견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인 '법'은 어떻게 구성되어지는가? 라는 문제이다. '법대로 하자'에 대해서 '법'은 무엇이고 '법'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 를 질문하는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상식적인 질문이다.나는 그 중에 하나가 '생명'을 법의 이름으로 앗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정적을 제공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는 의미때문 만은 아니다. 또한 '존엄사' 문제와도 관련이 없다.(난 개인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한다. 의학과 법원의 엄격한 규정하에서 집행되어야 하겠지만 이것과 사법제도에 의한 사형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카톨릭같은 경우는 여기에서 '생명'에 대한 종교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사형'제도가 가지고 있는 법적인 효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형이 아무런 범죄 예방효과가 없다는 걸로 말이다. 결국 사형이 존속하는 이유는 사회심리학적으로 대중들의 공분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 에 가깝다. 이 '위령제' 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게다. 그렇지만 '위령제'라는 방식 말고도 우리는 이성의 힘에 의해 사회적 공분을 처분할 수 있다. 우리는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더욱 이성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못믿을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그 정도의 역할을 해낼 만큼의 충분한 용량은 확보되어 있다.( 물론 희생자 가족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경험을 했어봐?' 라고 무식하게 묻지마라.죽는다. ㅋㅋㅋ )  

국가폭력이 일상화되고 관대한 나라일 수록 사형제도에 대해 우호적이다. 그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 형태에 나타난 양상이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국가폭력의 형태와 사형제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현 정부는 '새로운 시대' 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군인들이 대접받던 시대로 시대를 재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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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상식적인 말이다. 노조는 상당히 남성중심적이다. 노동운동 조직원들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마초'수준인 경우도 허다하다. 노동운동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약점이다. 산업구조 내의 성비의 불균형은 노조 내의 성비 불균형을 만든다. 반드시 성립되진 않겠으나 전투적 노동조합일 수록 상대적으로 남성중심주의적 성향이 높아진다. 노동자들 역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남성다움'이란 모델에 대한 과도한 투사는 기타의 다른 사회집단들보다 훨씬 강하다. 전통적으로 탄광노조가 강력했던 영국에서의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명성이 높다. 영화< 빌리엘리어트>는 몰락한 탄광촌의 모습을 그린다. 그 지역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정서는 '남성다움'에 대한 전통적 가치의 좋은 예가 된다. 현재 한국에서 노동시장은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계층화 추세를 걷고 있다. 신자유주의하에서 자본은 그런 양극화 현상을 통해 노동세력을 파편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이이제이'의 전통적 수법에 따라 '비정규직의 원망'을 '정규직'에게로 향하는 수법을 쓴다. 이를 가장 그럴싸하게 이데올로기 포장하는 집단이 한국의 언론집단이다.  

하지만 자본의 그런 노력은 결과적으로 노동자 내부의 차별구조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내부의 차별구조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정규직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또 다른 하나는 남성 노동자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 후자는 노동기회,임금등 노동 여건과 관련된 것과 심리적인 것이 결부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약자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산업분화에 의해 차별당하고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조직 문화에 차별 당한다. 이중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내부적으로 이런 한계가 있기때문에 이 지점은 언제나 조직운동의 '약한고리'였다. '약한고리론'은 레닌이 혁명의 성공을 위한 전술로 언급한 것이지만 이것은 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둑은 거대한 큰 파도때문에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작은 균열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진보진영은 진보/보수를 구분할 수 없는 기본적 문제에서 허둥지둥하다가 '바보' 되는거다. 최대한 낮은 자세에서 사과하고 다시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여 이 '약한고리'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흔한 말로 내가 다니는 별 거지 같은 회사도 형식적으로 '성추행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성추행에 진보/보수는 없다. 거기에  여성주의는 진보의 평등주의가 가 먼저 끌어 안고-역사적으로도 그랬다.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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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불거진 ‘성폭력’…진보조직 ‘가부장 틀’ 깨야
진보 가치 지향해도 조직문화는 남성중심적
‘조직 우선’ 논리에 성폭력 불거져도 은폐 급급
자기성찰 위 성평등 조직으로 체질개선 필요

성폭력 가해자가 조직 간부인데, 가해 사실을 밝히면 아주 곤란해지는 상황인 거죠. 그러다가 그냥 넘어가버렸어요. 주변에 나를 도와주거나 지지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사회운동의 가부장적인 성격은 ‘운동사회’ 속의 썩은 부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가부장적인 남성 운동가들에게 운동의 명예를 넘기고 싶지 않았어요.”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간부의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운동사회’ 또는 진보진영의 성폭력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개인이나 단체의 도덕성을 겨냥해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단체 내부 양성평등 현실을 일궈내기 위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 “남성 중심주의 벗어야” 이번 성폭력 사건과 그에 이은 민주노총의 ‘둔감한 대응’ 배경에는 뿌리깊은 ‘남성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주변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주의가 운동사회에도 번져 있다는 것이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조직에서 주요 간부 지위를 가진 가해자가 피해자를 동등한 동료로 바라보지 않고 성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운동사회가 진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데도 조직문화나 구성원들의 시각 등은 남성 중심주의를 온전히 벗지 못했다는 비판은 요즘도 여전하다. 여성학자 전희경씨가 지난해 펴낸 <오빠는 필요없다>를 보면, 1990~2000년대 여성 운동가 21명이 전씨에게 털어놓은 경험들은 낯익으면서도 새롭다. “컵 씻고 찾아온 사람을 응대하는 일들은 주로 여성들이 했다.” “운동가로 살기 위해 여성임을 포기했다.”

노조에서 여성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는 여성 운동가는 “조직 안에서 ‘성평등’은 유독 진보적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며 “이 때문에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 등이 자주 불거진다”고 말했다. 1999년 한 산별노조에서 노조 간부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피해자가 되레 “조직에 누를 끼치느냐”는 책망을 듣는 등,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이나 성차별 문제는 ‘조직이 우선’이라는 논리에 가려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 “성 감수성 키우고 ‘진보의 가치’ 성찰해야” 이번 사건에 민주노총은 조직 전반에 걸쳐 성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을 보완하겠다는 등의 대안을 내놨다. 민주노총은 이미 2003년에 ‘성폭력·폭언·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제도·규정 마련, 교육 강화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운동사회가 추구하는 여러 진보적 가치들 가운데, ‘성평등’만큼은 시급성이 떨어지는 가치로 바라보며 뒷순위로 미루곤 하는 조직문화와 구성원들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2000년 여성 운동가들이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를 만들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유력 운동가들의 실명을 공개하고 비판을 제기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런데도 성평등이나 여성주의를 말하면 ‘시끄러운 애들’이라며 비난하거나 조직에서 배제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여성학자들의 진단이다. 권김현영 국민대 강사(여성학)는 “이번 사건에서 민주노총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피해자와 여성 조합원들에 대한 사과였다”며 “그러나 외부에서 가한 도덕성 시비만을 염두에 두고 대국민 사과부터 낸 것을 보면, 깊은 자기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운동 단체들은 10일 공동 입장을 내어 “그동안 ‘여성’은 노동운동 조직문화 속에서 변방이었다”며 “민주노총 속에서 여성운동이 이제까지와 다른 의미로 자리잡지 못하면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한 일상적인 조직의 체질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며 성폭력 방지를 비상대책위원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고 주문했다.

전희경씨는 “젠더(성) 문제 앞에선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었다”며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사회라면, 젠더 문제를 그동안 왜 소홀히 다뤄 왔는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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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해! / 큰소리치던 부장이 / 체인지됐네
우울한 日 / 애달픈 短歌 / 유행이네
도쿄=선우정 특파원 s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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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처럼 직원들에게) '체인지(change)해!'/큰소리치던 부장이/체인지됐네."

세계적 불황으로 전대미문의 해고 사태에 직면한 일본 샐러리맨의 '애달픈' 단가(短歌)가 10일 공개됐다. 일본 다이이치(第一)생명은 이날 2008년에 응모를 받은 '샐러리맨 센류(川柳) 콩쿠르' 입선작 100수를 공개했다. '센류'는 일본어로 5·7·5의 운을 가진 전통 단시(短詩)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기업의 대량 해고 관련. "오랜만에/동창회가 열렸네/구직센터에서." "코스트(비용) 절감/의욕도/함께 절감." "취직 자리/'우리집 경비(警備)'라고/말하는 자식놈"이란 작품엔 청년실업 문제가 반영됐다.

"100년 만의 위기"라며 소란을 떠는 세상을 자조적으로 풍자한 "금융위기/늘 익숙합니다/우리 집은"이란 단시도 출품됐다. "'엔고(高)'/실감하고 싶은데/'엔'이 없네"란 작품은 엔화가치 상승으로 일본인들은 해외여행 붐이라지만, 정작 자신은 돈이 없어 가지 못하는 처지를 풍자했다.



정치 리더십이 실종된 세대와 관련한 작품도 많았다.

"아이들에게/또 가르쳐 줬네/총리 이름"이란 작품은 1년도 못 돼 총리가 바뀌는 정치를 풍자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를 내팽개치는 총리를 아이들이 닮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담아, "넌 내던지지마/나라(國)와 다르단다/학업(學業)은"이란 단시도 나왔다.

이밖에 일본 사회에 부는 다이어트와 운동 열풍을 풍자해, "살이 빠진 건/함께 산책한/개뿐이라네'란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센류 콩쿠르'는 세태에 따라 경향이 달라진다. 그러나 공통 풍자 대상은 나이가 들수록 두려워지기만 하는 '아내'와 '회사'다. "쓰레기 버리는 날/버리러 나가지 않으면/(마누라에게) 버림받는다." "'지금 집에 갈게'/마누라의 대답/'괜찮아'."(2007년) "따뜻하게/날 맞는 건/좌변기뿐."(2006년)

기업은 늙은 샐러리맨을 절벽 아래로 밀어내는 판국에, 소방대가 절벽에 고립된 개를 구해냈다고 법석을 떠는 세태를 비꼬아 "개는 좋겠다/절벽에서도/구조되고"란 작품도 2006년 히트작이었다. "아직 자고 있네/돌아와 보니/이미 자고 있네" "담배보다/몸에 해로운 건/마누라의 구시렁" 등도 과거 히트작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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