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싸우겠다는 것 맞나" 노조 집행부·PD 충돌


"3월 2일부터 총파업 찬반 투표 돌입" vs "언론악법 통과된 다음 싸울 건가"


기사입력 2009-02-27 오후 3: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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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KBS) 노동조합(위원장 강동구) 집행부와 KBS PD들이 충돌했다. 한나라당이 신문법·방송법 등 언론 관계법 개정안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기습 상정한 상황에서, 양측은 'KBS 노조 집행부가 언론악법 반대 투쟁에 나설 의지가 있느냐'를 놓고 고성이 오가는 격렬한 갈등을 보였다.

KBS 노조 "3월 2일부터 총파업 찬반 투표 들어가겠다"

KBS 노동조합은 27일 서울 여의도 KBS 사옥 1층 민주광장에서 '미디어악법 날치기 상정 규탄 결의 대회'를 열었다. 점심시간에 이날 대회를 연 KBS 노조 집행부가 12시 45분께 "시간이 없다"며 행사를 마무리하자 이 자리에 모여있던 PD들이 "조합원의 이야기도 듣는 시간을 가지자"고 강하게 반발했다. KBS PD협회는 이날 집단 대휴 투쟁을 벌였으며 2일부터 전면 제작 거부 투쟁을 결의한 상태.

이날 KBS 결의 대회는 강동구 KBS 노조위원장, 김윤창 노조 중앙위원, 최재훈 부위원장의 발언으로 이어지며 간략히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강동구 위원장은 "언론 악법 저지를 위해 3월 2일 전국 조합원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이날부터 미디어악법 저지 위한 총파업 찬반 투표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KBS 내부에서는 KBS 노조 비대위가 지난 24일 '문광위 직권 상정시 총파업 찬반투표에 돌입한다'는 제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KBS노조 집행부는 실제 싸울 의지가 있느냐'는 여론이 격앙된 상태. 특히 다음날 고흥길 문방위원장이 언론 관계법을 기습 상정하고 MBC노조를 비롯한 전국언론노조가 전면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다.

"KBS 노조 탈퇴할 수도" 발언에 강동구 자리 박차

결의대회가 시작된 지 채 40분 만에 노조 집행부가 결의 대회를 마무리지으려 하자 PD들은 "조합원의 이야기를 이야기를 들으라", "3월 2일부터 총파업 찬반 투표를 벌여 언제 투쟁을 하겠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KBS 노조 집행부도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앞줄에 앉아있던 강동구 위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쳤다. 또 한 집행부원은 "강동구 위원장이 총파업 찬반투표 하자고 하잖아"라며 격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 KBS PD들이 결의 대회를 마무리하려는 KBS 노조 집행부에게 항의하고 있다. ⓒPD저널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다"는 주장을 거듭하던 노조 집행부는 이들의 반발에 "조합원들의 의견 얼마든지 듣겠다"고 마이크를 내줬다. 이에 한 교양국 PD는 "이런 자리에 나온 적도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린 적도 없지만 너무 화가 나서 나왔다"면서 KBS 노조 집행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진행되는 상황을 묵과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방송의 자존심,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다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노동조합이 힘이 되고 노조가 앞에 나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미디어법이 본회의에 통과되면, 다 끝나고 나면 그때야 파업 찬반 투표 한다는 것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토의해야 할 상황인데 너무 한가한 것이 아닌가. 조합원들이 다 나가자고 하는데 노조가 제일 앞에 서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KBS 노조가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PD협회 전원은 노조를 탈퇴할 것이다."

이에 기분이 상한듯 강동구 노조위원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KBS 사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에 KBS 조합원들은 한 번 더 반발했고 한 라디오 PD는 "아무리 자기가 싫은 소리가 있다고 해도 위원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조합원을 '개똥'으로 아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또 조합원이 말하는 도중 일어나거나 조합원이 말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면 위원장은 우리의 위원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강동구 위원장은 KBS 사내게시판이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상윤 PD는 KBS 노조 집행부에게 "우리가 공영방송법과 언론악법을 통합해서 대응한다고 하면 한나라당이 통합해서 처리해주느냐"면서 "결국 KBS 노조 말대로 하면 투쟁 못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조합원들이 의구심을 갖고 말로만 싸우고 실제는 저쪽과 야합해서 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갖게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제작 거부라도 해 거리로 뛰어나가서 MBC 노조와 연대 투쟁하고 해야한다"고 했다.


▲ 김덕재 KBS PD협회장이 "PD들의 제작 거부를 부분 파업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PD저널

"KBS PD 제작거부, 부분파업으로 인정하라"

결국 KBS PD들의 반발을 김덕재 PD협회장이 정리했다. 김덕재 협회장은 "이런 모양새까지 나와서 곤혹스럽다"면서 "KBS PD들과 노조 의 정세 판단이 다를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나서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PD협회는 노조가 진행하는 비상총회와 총파업 찬반투표에 모두 참여할 것이나 KBS PD협회는 자발적으로 2일부터 전면 제작 거부에 들어가기로 했다"면서 "노조에 정식 요청을 드리겠다. PD들이 벌이는 제작 거부를 부분 파업으로 인정해 달라"고 했다.

그는 "노동조합도 파업을 위해 투표하는 것 아니냐. 결과야 뻔하다"면서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 스피드 아니냐. KBS 전체가 부응하지 못한다면 PD부터 가겠다. 노조 비대위에서 PD들의 제작 거부를 구역별 부분파업으로 인정해달라. 그러면 속도에 부응할 수 있다"고 재차 촉구했다.

그는 PD협회가 26일부터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설문조사 결과도 밝혔다. 그는 "중간 집계 결과 전국의 KBS 피디 약 940명 가운데 618명이 응답했으며 그중 언론 관계법에 대해서는 595명, 96.3%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또 KBS가 파업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546명, 88.3%가 찬성했다"고 밝혔다.

KBS PD들의 제작 거부를 부분 파업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에 민필규 KBS 기자협회장도 동의하고 나섰다. 민필규 협회장은 "PD들이 제작 거부에 돌입한 이상 노조는 조합원을 보호하는데 최대한 앞장설 것을 요구한다"며 "지난번 징계 철회 투쟁에서 우리는 봤다. 조합원을 보호하지 않는 조합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부분 파업 인정은 다른 사업장에서도 있고 충분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라고 재차 촉구했다.

이어 그는 "4월 보궐선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언론 관계법 처리를 3월 임시국회로 넘기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처리는 다음주 월요일일 가능성이 높다"며 "집행부는 한나라당이 월요일에 언론 관계법을 통과시킬 경우의 대책도 밝혀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채은하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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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서울에 갔다. '퐁피두전','클림트전'을 보러 간 것이다.  오랜만에 매번 아이옷을 보내주는 친구도 만나기로 했단다. 예찬이가 입고 있는 옷의 90%는 아내의 친구집에서 나온 거다. 옷도 모두 괜찮은 브랜드들이고 ,아내 친구의 눈썰미도 나쁘지 않고... 가장 중요한 뭘 입혀도 태가나오는 예찬이 덕에 두루 두루 둘째 아이까지 옷값은 거의 굳었다. 그 친구에게 줄 선물 하나를 가지고 아침 9시 ktx를 타고 올라갔다. 예찬이와 부산역까지 함께 가서 배웅해 주고 왔다. 나는 피곤할테니 하루 자고 오라고 했는데 오늘 밤에 내려올 생각인 것 같다. 장인어른의 고집을 매번 뭐라하면서 본인도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내가 못이긴다.  

낮에 집 앞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에 갔다. 걸어서 5분거리에 도서관이 하나 있다. 예찬이가 그 동안 도서관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지난 주 부터 좀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낮시간에 그닥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이것 저것 책을 함께 읽고-주로 자동차 책- 세 권을 빌려서 돌아왔다.   

오늘 진짜 오랜만에 토요일 신문을 봤다. 회사에 가지 않는 토요일, 마지막으로 종이신문을 본게 언제적인지 가물가물하다.  

 목점 기세춘 선생의 <묵자>가 다시 모양새를 갖추어 나온 모양이다. 알라딘의 아프락사스님은 '묵자' 팬이다. 아마 그의 페이퍼에도 곧 오르지 않을까 싶다. 묵자를 처음 배웠던게 대학 1학년때다. 동양철학사 시간이었던것 같다. 꽤나 진지하게 묵자에 대해 들었고 또 관련 책도 읽었다. 최근의 아나키즘적인 생태주의같은 것들에서 묵자의 사상적 잔재들을 보곤 한다.최근에 묵자에 대한 바람구두의 지적에-그것은 전통적으로 유가에서 나온 지적이기도 하다- 나는 거의 전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기세춘 선생의 <노자> 역시 오래전에 읽기로 해 놓고 다시 손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도 언제나 읽게 될런지 모르겠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 30권째는 <벤야민 & 아도르노>이다. 이 책의 짧은 리뷰가 한겨레에 실렸다. 주로 대중문화를 둘러싼 관점으로 이 둘 사이를 구분한 듯 하다.이런 접근 역시 친숙하다. 대학때 '대중문화사' 시간에 이 둘을 그런 식의 비교를 통해 배웠던 적이 있다. 그 때의 기본 텍스트가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품> 당시에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 들어있던 내용이었다.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비판이론의 선구자였던 프랑크프르트학파 1세대인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에 대해 무적이나 부정적이었다. 재즈같은 것들은 음악 취급도 하지 않았다. 대신 클래식음악과 관련되서는 상당한 수준의 성취를 거두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말년의 양식>등에서 아도르노의 영향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이 책은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아도르노의 견해를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대중문화를 거의 대중의식의 몰핀정도로 취급했다. 하지만 요즘의 추세는 대중문화의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입장이 가장 지배적이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한 번 돌아봤다. 히말라야에 학교를 지은 등반가의 이야기이다. “한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이방인이다.두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손님이다.그리고 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가족이다.” 저자는 동생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히말라야에 갔다가 그들의 가족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들과의 약속-학교를 지어주겠다라는-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자신의 모든 삶을 쏟아 붇는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감상적인 짓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열정이 아름다운 것은 그 무모함 속에 어떤 기적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80개 이상의 학교를 히말라야에 세웠다. 그리고 그 운동이 자신의 삶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어떤 스포츠 회사의 광고가 생각난다.  "impossible is nothing"  내게 필요한 것도 그게 아닐까. 이 책은 그닥 어려워 보이지 않아서 영어로 읽어보고 싶다. (며칠 전 부터 <The Reder>를 영어로 읽고 있다. 지난 번에 혼자 서울갔을 때 반디엔 루니스에서 샀다. 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단 이야기를 듣고 책을 펴봤는데 좀 쉬워보였다. 나중에 이게 영문학이 아니라 독문학이라는 걸 알았다는..^^  실제로 별로 어렵지 않다...)   

<재즈문화사>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약력이 정말 간단하다. 거의 아무 약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점에서 책을 대충 열어봤다. 딱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아마추어의 열정'이었다. 저자 역시 무슨 대단한 평론가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재즈 애호가라고만 말한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깊은 밤 울려퍼지는... '식으로  감상에만 의존하는 글들은 아닌듯 했다.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은 수준의 재즈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듯 하다. 책의 표지는  아니다. 그냥  디자인이 없다면 흰 바탕에 예쁜 까만 글씨로 재즈문화사 라고 쓰는게 훨씬 나았을 정도다.  

<열려라 우리몸>, 오늘 어린이 도서관에서 예찬이화 함께 읽었던 책 중 하나다. 인체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예찬이가 보기에는 좀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지만 안의 구성이 아이들이 직접 움직여볼 수 있어서 부모의 설명만 있으면 즐겁게 놀 수 있는 책이다. 예찬이에게 뼈와 심장, 신경에 대해 설명해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혼자서 다시 책을 넘기면서 '아빠..이건 뼈지요. 이건 신경이지요' 한다. 그래 가는거다. 하버드 의대. 흐흐흐... 돈많이 벌어야겠는걸 ㅜㅜ 

 <108번의 내려놓음>이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108배에 대한 프로그램을 다룬 적이 있었나보다.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접근이었다.나는 불교신자가 아닌 고로 태어나서  단 한번도 108배를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기독교를 때려치우며 불교에 관심이 간 적도 있고, 예전에 어설프게 공부를 한 적도 있다. 그저 교양수준의 공부다. 108배가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몇 달 전 아내에게 들었다. 아내는 천주교신자다. 완전히 날라리 신자. 연애때는 나 구경시켜준다고 몇번 간 적 있고, 결혼하고 성당에 구경만갔다. 연애할 때 청주 인근에 있는 '내수성당'을 좋아했다. 크지 않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몇 년전에 다시 건물을 봉헌한 듯 한데..지금도 아름다울지는 모르겠다) 108배 이야기하다가..왠...김수환 추기경때문이려니...  하여간 108배에 최근에 급관심이 간다. 하루 15분이면 몸과 마음이 좋아진다는데...물론 처음하면 발다리가 욱신거린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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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만료로 인해 회사 노조가 새로운 위원장 선거에 들어간다. 요즘처럼 '무지 잘해도 본전인 상황'에 누가 후보로 나서겠는가? 결국 1차 추천기간을 넘기고 연장 기간을 동안 한명의 후보가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다. 물밑에서 새로운 집행부 구성이 논의되는 듯 하다. 내게도 제안이 왔다. 사무국장직이다. 노조 내 랭킹으로 보자면 넘버3다. 임단협에도 참석해야하고 위원장이 상급 노조 차원의 문제로 외유가 잦기때문에 실제적으로 역할이 많다. 장기적으로는 언젠가 위원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아마 선배들 중에서 내가 그동안 왈왈거리니까 할 만하다 싶어서 추천을 한 듯 하다. 문제는 내가 최근 회사는 물론이고 이 회사의 조직운동자체에 상당히 많이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걸 알턱이없다. 나는 가끔 후배와 이야기할 때 과장되긴 하지만 '환멸'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나는 제의를 거절하면서 솔직한 내 현재 상태를 설명해야만 했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평소 희생양에게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물론 조직 내에서 내가 최근에 갖는 일조 피해의식 같은 것 일 수도 있다. 복잡한 내용을 모두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전혀 타당성없는 일방적 오해만은 아니다.  

일단 내가 너무 완강하니까 잠시 물러서긴 했다. 그리고 한 선배는(그나마 그동안 나랑 가장 의견이 같았던 선배다.) 내게 소박한 이런 문자를 남겼다. "너의 고민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노동에 대한 긍정의 토대에서 함께 하길"  

좋은 말이다. 내게 만약 6개월전에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면 나는 수락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좀 지쳤고 누적된 실망에 몸살이 났다. (격려나 위로는 필요없다. 몸살은 그냥 쉬면 낫는 병이다.)  

 사실 내게 반MB나 촛불집회등은 기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득이 필요없는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당연스러움'의 부분은 내게 '강조점'이 아니다. 내게는 그런 다음의 '성찰'이 더나아가야 하는 지점일 뿐이다. 그런데 가끔 나를 흥겹게 만드는 것은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와서 '반MB하세요' 라고 전도하는 거다. 이건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에게 '예수 믿으세요. 주일에 교회 꼭가세요. 천당갑니다.' "라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조직운동을 하는 것은- 노조든 시민단체든 일단의 운동조직에 들어가 있는 것은 - 시위대에 끼여 있거나 틈틈히 정치후원금을 내는 것과 완전히 다른 문제다. 특히 개인의 의지/조직의 선택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할 때 무척 피곤해진다. (몇 달전인가 나는 알라딘에 한 분에게 그런 류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 이미 답을 본인이 알고 있다는 것 정도만 일깨워 줄 뿐이었다. 그 답을 스스로 명징하게만 만들면 되는 거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기때문에 이런 선택의 상황에 예술적으로 대처를 해야한다. 조직운동에 있어서 가끔은 '내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길을 지지하고 추진해야 할 때도 생긴다. 그 타협의 폭이 너무 커지면 그 조직운동 내에서 견디기 힘들어진다. 나는 아마 이런 걸 이미 예견하고 피하는 것같다. 특히 내가 별로 이 회사에 애정이 없다는 것과 구성원들의 답답한 수준같은 것들도 영향을 미쳤다.  

분명 이 지점은 정치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지점임을 나는 안다. 조직운동을 하려면 유연해야 한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타협의 길을 가야한다. 또한 구성원들의 성향이 늘 동질적이지 않다는 것, 때로는 반동적이라는 것 역시 담고 가야한다. 그 모든 '토대'를 인정하고 가야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게 바로 '믿음과 애정'이다. 문제는 최소한 내가 이 조직에 그런 '믿음'도 '애정'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에서의 전투에서 외연으로 물러나는 거다. 결국 가까운 적들과는 싸우지 않고-높은 놈들은 머리에 똥이 차고 사욕으로 더럽고 치사한 거고 가까운 놈들은 못미더우니까- 국운을 걸고 멀리 있는 MB를 몰아세우는 '촛불의 투사' 내지는 '성찰적 키보드 워리어' 가 되어주면 된다. 그게 뭐 그렇지 라고생각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 스스로 이런 부분에서 약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이성적으로 말이다. 높은 놈들이 똘보수여서 어쩔 수 없는 공간도 있다. 맞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나직히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야지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몸을 최대한 낯추고 있더라도 변명으로 낮추고 키보드의 워리어가 되는 것과 부끄러움으로 낮추고 투사가 되는 것은 다르다. 몸살이라는 변명과 부끄러움이라는 변증법 사이에서 그길로 가려고 하는 거다. 그러니 이 아니 부끄럽겠는가.  이 아니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나같은 자유주의자들-언젠가 내가 자유주의를 비판해 놓고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는게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유의 개념파악이 잘 안된거다. 내가 비판한 '자유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정치학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여러 가치 정체 중에 하나이다. 자유민주주의 내에서는 이걸 '자유주의'대 '공동체주의'로 나누어 이야기를 한다. 거기서 '자유주의'의 극단에 '상인적 자유주의'가 있다.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좌파인 척 하는 내가 '자유주의'란 말을 하니 이해가 안될 거다. 그런 논리로 따라가면 좌파는 몽땅 '집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난 이해가 잘 된다. 내가 말한 '자유주의'의 '자유'는 소극적이면서도 인간실존의 근거가 되며, 또  미학적이기도한 '자유'이다. 쉽게 말해 '리버럴 소셜리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스탈린처럼 국가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것 만이 좌파가 아니란 거다. 마르크스가 사회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누구보다 '자유'를 중요시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것이다. (알면 알고 말면 말고) 내가 학교 다닐때 아주 작살나게 싫어했던게 운동권 내의 그런 집단주의적 맹아들이었다.  

그러나 변혁운동에서 '조직'은 또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다. '조직'이란 말이 구태의 냄새가 난다면 '단체'라고 하자. 어떤 목소리들은 그런 결사의 형태를 통해 반영된다. '다중'에 대한 왜곡되고 몰지각하고 비현실적 이해는 '조직부정론'이다. 직접적으로 '다중론'이 조직부정론으로 간 적은 없다. 대신 다른 강조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좀 변화되는 경향성을 말한 것이다.그렇기때문에 너무 강조하다보면 도를 지나쳐서 나아갈 수있는 함정도 있는 법이다.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에 그런 새로운 주체양식이 나온다하더라도 노동현장에서 또 조직 내부에서 '저항 세력'으로서의 '대항 조직'의 역할은 마비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가까운 내 일상 투쟁의 거점이 된다면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내가 스스로 몸살을 핑계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무너진 집이라서 못하겠다는 꼴이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가 잘된 집안이라면 갈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쪽팔린 거다. 그런데 좀처럼 이 놈의 회사와 조직에 애정이 안생긴다. 그러니 계속 좋은 책이나 읽고 리뷰나 쓰고, 노조 뒷줄에서 가끔 손이나 들고,알라딘에서 거국적 차원의 분노에도 참여하고 할테다. 그나마 변명되는 것은 그동안의 회사 노조는 '타협적인 단체'였다는 것이다.노조 집행부역시 노조를 '이익단체'정도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늘상 초기에는 말하지만 결국 욕안먹은 노조위원장이 없다. 임협하다가 안풀리니까 그 중대한 순간에 대충 도장찍고 1주일간 휴가를 가버린 위원장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기가 잘했다고 늘상 떠벌이는 노조위원장 출신 모인사는 지난번 파업결정때(실제 아무것도 한건 없지만) '너네들 그런 식으로 해봐'라는 투로 팀원들에게 말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 노조가 내가 말하는 그런 운동의 전위로 작동한적은 단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우리 회사 노조에 삐딱하더라도 덜 미안하긴 하다. 어쨋거나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면 두 개의 층위의 싸움 중 하나로 부터의 퇴각이다. 그런데 폼 나게 이야기해도 쪽팔린 건 가시지 않는다. 편안한 싸움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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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안가본지 오래되서 어떤 말들이 오고갔는지 모르겠다. 진중권의 기사를 보고 알았다. 진보가 대중에게 몰리는 방식의 여러가지 가능태를 보여준다. 진중권의 원문을 대충봤는데 평소처럼 도발적으로 쓰긴 했다. 화용론과 시기론을 드는 것 까진 좋은데 자칫 비판 자체를 원천봉쇄하려는 식으로 달려드는 것도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어떤 종류의 김수한 추기경 비판이 발단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가진 팩트와 그에 대한 전통적인 좌파식 반응을 결합해보면 나올 비판의 맥락들이 뻔해 보인다. 그런 식의 비판이었다면 나는 진중권의 말에 일견 동의한다. 김수한 추기경은 누구보다 선한 노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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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의 몇몇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낙태반대'는 굥황청의 공식 입장입니다. 그건 추기경 개인이 선택할 견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게 답답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 때 우리 사회에서 카톨릭이 거의 유일하게 난자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요. 그 역시 교황청의 공식 입장입니다. 신부들 개개인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요. 이런 측면이 있는가 하면, 저런 측면도 있고, 원래 종교란 그런 겁니다. 그들은 인간의 생과 사를 주관하는 것은 오로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근데 그것도 문제 삼아야 하나요? 

좌파라면 종교에 반대해야 한다고요?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단히 많이 덜 떨어진 좌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무슨 칼 맑스가 살던 시대입니까? 종교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유한성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답하는 방식 중의 하나지요. 죽음 앞에서는 과학도 무력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알량한 정치의식이 그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으세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도, 심지어 과학자들까지도 BC 4년의 기술 수준으로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처녀생식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거죠. 

비판할 것은 하자구요? 비판은 심심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는 화용론적 맥락이 있어야 합니다. 추기경이 살아계셨을 뭔가 잘못된 언행을 했다면, 그때 비판을 했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의 발언이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크게 오도한다고 판단될 경우에 말이지요. 지금 돌아가신 분이 또 뭘 할 수 있다고 비판을 합니까? 93년 이후의 발언들이 맘에 안 든다구요? 비판은 그저 맘에 안 든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견해에 반대한다면, 반대하는 근거를 들고 그 견해만 반박하면 그만입니다. 그것도 그 견해가 표명된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지요. 

결국 님들이 하는 비판은 무슨 화용론적 맥락이나 사회적 유의미성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한 마디로 그냥 인물평이지요. 그 인물평일랑은 일단 장례부터 치르고나서 전기 작가들에게 맡겨두십시요. 그의 인생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신문기사 쪼가리 몇 개 들어 그의 인생을 통채로 평하겠다는 겁니까? 그러는 당신 인물은 얼마나 잘 났습니까? 굳이 인물평을 하겠다면, 천세를 누리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시면서 하셔도 안 늦겠네요. 그러는 여러분은 김 추기경만큼 살 자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분만큼 살 자신 없습니다. 

도대체 김수환 추기경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해서 추모를 해야 할 시기에 비판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까? 70년대 80년대 그 엄혹한 시절에 운동권 끌어안아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박정희한테 짓밟힐 때, 전두환한테 짖밟힐 때, 그나마 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준 것이 김 추기경과 카톨릭 교회 아니었나요? 그때 저도 카톨릭으로 개종을 해서 영세를 받았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정부 비판하는 마당극 하고 나서 신부님들이 보호해주는 가운데 두 줄로 늘어선 형사들 사이를 빠져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 대한 감사를 벌써 잊어야 하나요?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그저 자신들의 이념에 100% 드러맞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 정말 소름끼치네요. 국가보안법 존치에 찬성하는 사람의 삶이라고 가치가 없는 게 아닙니다. 설사 입에 조중동의 논리를 물고 다니는 사람이라 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가볍게 취급받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있다는 영혼저울의 한쪽에 허접한 이념 서적 몇 권 읽고 형성된 머리와 입을, 다른 한쪽에는 김추기경이 몸으로 살아온 인생을 올려놓는다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웬만큼 머리가 안 도는 사람도 알 것이라 믿습니다.

ps.

그러고 보니 제정구씨 생각나네요. 학생 시절 카톨릭 학생회 행사에 그 분이 연사로 오셨었지요. 그때 우리들은  대학3학년의 설익은 이념으로 그를 마구 질타했습니다. 변혁의 전망이나 혁명의 전략도 없이 그저 빈민을 돕는다는 알량한 휴머니즘 뒤로 숨어버린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얄팍한 개량주의자일 뿐이다....  철 들고 나서 얼마나 미안하던지. 다시 만나면 꼭 사과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만 돌아가셨지요. 내가 죽고 나서 행여 다시 뵙게 되면, 꼭 사과를 드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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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정치적이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마음은 공통된 감정이다. 5일장까지 계속 추모의 정을 이어가지 않는다고 나를 몰인정하거나 각박한 인간으로 폄하하진 않길 바란다. 그저 '김수환추기경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담론 형성의 텍스트가 현재 길거리에 마구 뿌려지고 있기 때문에 이 '즐거운 현상'을 그냥 목도할 수 없어서라는 소박한 이유때문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도 계속 추모한다. 하여간 '나와 친구들'의 의견외에 토달면 '분파주의'라고 하니까 매번 글을 쓸때마다 사족을 달아야 한다. 그건 좌파나 우파나 반MB나 친MB나 마찬가지다. 자기의 투쟁방식, 자기의 인식 수준에서의 연대방식 외에는 모르기때문이다.) 

지금의 텍스트는 '김수환추기경 1면기사'들이다.  인터넷으로 보거나 하지 말고, 직접 종이신문을 통해서 보는게 좋다. PDF도 괜찮다. 왜냐하면 인터넷 신문의 텍스트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편집의 '공간성'이고 그런 '배치'가 주는 정치성이다. 편집이라는 또하나의 권력 양식을 생각해보면 인터넷 기사는 독립적이긴 하지만 맥락적이지 못하다. 지면 신문에서 기사를 어느 위치에 어떤 제목활자체로 어떻게 쓰느냐 등등은 별거 아니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지면 신문은 텍스트의 비평과 텍스트를 배치하는 비평을 동시에 할 수 있다.(신문방송학에서는 기본적인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걸 해보면 좋을 듯 하다. 

조중동이 김수환 추기경 텍스트의 주제어를 하나로 꼽는다면 '화해'이다. 몇 장에 걸친 특집 기사들이 끊임 없이 양산되고 수많은 시민들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이런 저런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중점은 '국민통합'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죽음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중동은 김수환 추기경의 삶 중 어떤 측면을 자의적으로 절단하여 자신들의 용어'국민통합'의 이름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의 삶 중 상당부분은 현재 조중동이 지키고자 하는 '기업가주의' 가치관과 배치되는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병상이 아니셨으면 용산참사를 보고 '철거민'들을 위로하셨겠는가 아니면 강제진압하고 나몰라라 하는 정부와 경찰의 등을 두드려주셨겠는가?  조중동의 죽음으로 부터 뽑아낸 이데올로기 선점이다. 

한겨레는 사실 오늘 대충 보고 말았는데...편집도 그렇고 좀 무미건조하다. 생명존엄사이야기도 있었고...뭐 대략. (경향은 오늘 보지 못했다.) 

이래 저래 오늘 가장 눈에 띄는 신문은 중앙일보다. 전술적인 측면과 감각적인 측면에서 발군이다.(이런걸 무시하는 것이 좌파라면 좌파는 좀 더 세련되어져야 한다.) 중앙일보는 '명동'의 길게 늘어선 인파에 주목했다. 명동이 거의 마비된 수준이다.20만명이라고 했던 것 같다. 중앙일보의 1면 상단부터 해서 무려 여덟면에 걸친 머릿부분 사진에 주목하시길. 길게 늘어선 줄을 연속사진 접사처럼 계속 배치하고 있다.  

무미건조한 한겨레와 감각적인 중앙일보 사이에서 독자는 어디에 눈이 더 갈까? 그리고 이런 시선끌기는 텍스트가 만들어 놓는 주름에 따라가게 만든다. 중앙일보가 죽음에서 뽑아내는 정치적 골을 따라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추모기사는 정치적인 NIE로 쓰기에 좋은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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