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또한 시장지향의 정신을 거부하였다. 개인이 자신의 효용함수만 책임지면 된다는 논법은 사회의 실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문화에서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온갖 종류의 선택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다. 선택이라고 해봤자 진실로 중요한 선택은 결여된 채 단지 삶을 은폐하는 광란적인 골라뽑기만이 난무할 뿐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삶의 방식보다는 삶에 대한 열망의 부재, 즉 '쉼없는 발걸음이 끝없는 뒷걸음으로 나타나게 된 형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비마르크스주의자의 말이다. 좌파가 아니어도 당연히 시장일방주의는 거부할 수 있고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의 문제는 사상 시장에서 한 줌에도 미치치 않는 스펜서류의 '사회진화론'을 믿으며 스스로 당당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온갖 점잖은 말과 성찰의 노력도 궁극적으로 '사회진화론'의 세련된 포장을 위해서라면 악어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  '사회진화론'을 가지고 '현실적 접근'과  '합리적 사고' 그리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수호자인양 행세하는 것은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이다.  

 나의 '관용관'은 '불관용'을 포함하는 관용관이다.  만약 '관용'이 그런 '앙똘레랑스'를 포함하지 않는 무책임하게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말이라면 나는 스스로 '불관용주의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기준을 '적대'라고 말했다. 실제 '휴머니즘'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휴머니즘'을 말하며, 우리는 모두 하나인 척, 인류는 모두 동포인 척한다. 그리고 왜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고 나누고 하느냐는 것이다. 모두 평화롭게 살길을 찾지 않고 나누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말많으면 빨갱이라는 결론까지 간다. 그런데 평화주의자를 사칭하는 '사이비 휴머니즘'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대략 1분 미만만 생각해보면 그 말 뜻을 알 수 있다.   

내게 '불관용'의 대상 중 하나는 '사회진화론자'이다. 사회적으로 나는 어떤 성찰과 어떤 수사학을 구사하더라도 세칭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불관용'할 것이다. 물론 내가 그들을 사회에서 척결할 수는 없고 더 나은 사회가 오더라도 그들이 결단코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의 미사어구에 일일이 대꾸할 생각도 없으며, 그들과는 '적대적'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 뭘 공부하든 좋다. 뭘 성찰한든 좋다. 그 결과가 '사회진화론'을 검증받고, 세련되게 포장하고픈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인류와 역사, 그리고 지구를 위해 도움이 된다. 부디 제발 가만히 있어라. 불관용할테다...삐뚤어질테다.      

"인간 존재의 정상적인 상태는 남을 앞지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려놓은 삶의 이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앞다퉈 나가기 위해 밟아 뭉개고, 밀치고, 팔꿈치로 치고, 서로의 발뒷꿈치를 밟는 것이 사회생활의 존재양식이며 바람직한 인간의 운명은 아니다. 이는 산업이 진보할 즈음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쾌한 징후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이 필요하는 것보다 이미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부귀의 상징 외에는 아무런 쾌락도 주지 못하는 소비거리를 갑절로 늘리는 일로 추앙받아야 하는지.." 

 .... ....고전파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자유론>의 존 스튜어트 밀이 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은 올초 알라딘 블로거들이 올려주신 출간대상 도서중에서 기대했던 책 중에 하나다. 1944년에 나온 유명한 책이다. 2차 저작들이나 인용을 통해 알게된 책이다 보니 구하기 어려워진 원저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중고서점에서도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다.   

  다음 달에 <거대한변환>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듯 하다. 먼저 <한겨레 21>에서 폴라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알라딘의 블로그에 폴라니의 이름이 자주 거론될 듯 하다.   


이 책이 '대우학술총서'로 나왔던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이다. 서점에서 몇 번 찾아봤으나 실패했고 한울에서 나온 입문서 하나를 찾아낸 적이 있다. 


J R 스탠필드의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이다. 폴라니의 접근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다면 볼 만한 책이다. 책의 분량 역시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현재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폴라니의 책은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홍기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이다.  세계체계론의 친절한 입문서인 <자본주의 역사강의>에도 세계체계론의 전사로 칼폴라니의 사상을 정리하는 장이 나온다.

 

 


  

 

 

 

 예전에 정리했던 걸 잠시 찾았다... 

칼폴라니와 세계체계 분석의 전사

1.폴라니의 두가지 수용  

1)제도주의자로서의 폴라니 : 

 제도주의와 신제도주의의 차이-신제도주의는 시장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시장이 사회적 맥락속에 작동한다고 봄. 시장 형성의 차별적,제도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폴라니가 응용.그러나 이는 신고전파의 시장관과 유사, 다만 그 시장이 존속하는 방식에서 경로 의존성으로 나타나는 특이성만 찾는 것. 폴라니에게 중요한 차이점은 시장에 층위가 있다는 것.즉 서로 다른 시장의 존재성 인정.

2)근대자본주의 비판으로서의 폴라니

19세기 영국 자본주의 역사정리 

 1) 자본주의의 영역이 생산으로 확장됐고 노동에 대한 포섭이 이루어졌다 

 2)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대됐다.---->세계적 변화 속에 이에 대한 대응이 어떻게 나타났고 그것이 어떻게 전지구적 위기를 낳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관점

2.폴리니의 핵심논점

1)19세기 영국 헤게모니하의 질서하의 구성적 특징: 백년평화, 금본위제,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자유국가

; 1825년 나폴레옹 패배이후 1914년 1차세계대전까지 유럽에 전면전이 없었다.영국 헤게모니를 지탱하는 것은 영토 제국주의와 해군력 그리고 경제적 토대로서의 금본위제. 국제결제통화로서의 파운드를 지키기 위한 투쟁.

* 금본위제를 신앙으로 받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이데올로기: 보이지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며 정부 개입을 불필요하다. 더 이상 경제가 사회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상태. 이 관계가 형성되면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시장이 나타나 사회를 위협하고 사회가 다시 여기에 저항하게 되는 구도가 등장. (사회의 이중운동. 시계추 운동 개념)파편화된 개인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고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선언한 자유주의

2)시장의 층위: 국지적 시장, 전구시장, 원거리 시장 : 시장 발전의 분화론은 거짓 신화이다.시장발전의 맹아론 비판.각 시장은 개별적으로 분화하여 다른 성격으로 발전된다.

전국시장의 발생 과정에 국가 간섭-중상주의: 네덜란드의 유럽시장 대응에 비해 뒤처진 영국 프랑스의 중상주의가 전국 시장을 형성, 비로소 경쟁적 시장이 형성된다.

3)허구적 상품 : 노동력,토지,화폐

19세기 전국시장의 등장과 함께 기계제 생산방식 도입.생산의 영역이 자본주의에 의해 장악됨.투자리스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 개입이 당연시됨.

기계에 의한 상품 생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 필요.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 이전에 노동자는 토지와 분리되지 않음.19세기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전통 사회의 보호장치가 해체됨.영국의 경우 스핀햄랜드법(구지주의 공동체 복귀노력) 과 신 구빈법(빈민구제 목적,열악한 환경)이 노동력의 상품화 경향성의 예. 노동자들은 '기아의 위협' 이라는 규율에 따라 아사할 것인가 노동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임.즉 노동의 상품화는 '기아의 규율'에 의해 만들어짐. 

4)사회의 자기보호 실패

비자본주의적인 것의 자본화로 인해 발생하는 위기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생성.사회의 자기보호메커니즘은 반동적형태로 나올 수도 있음.(19세기 경우 지주들의 공동체주의와 보호무역)

보호무역: 자유무역을 유지하면서 금본위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국제 교역이 커지며 자국화폐의 안정성이 무너지기 때문.금본위제를 지키면서 자국경제를 보호하는 방식은 보호주의.그런데 각 국이 보호주의를 택할 경우 자유무역은 무너지는 딜레마.1차세계대전 촉발의 원인

5)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세가지 형태 등장: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

뉴딜의 성공-영국 헤게모니에서 미국 헤게모니로 전환의 절정 .이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자체를 통제하는 방식.금본위제 제어, 고도 금융제어, 노동 상품화 제어...

3.폴라니에 대한 평가

1)강점-노동력 상품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임을 증명.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기아의 규율이 필요햇으며 그것은 상시 국가를 매개로한 억압적인 재생산과정/

19세기의 단절점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제기. 그러나 폴라니의 "이중운동"(시계추 운동)은 모호한 지점. 폴라니의 '사회' 개념이 지나치게 광범위함.

2)한계-아래로부터의 대응이나 저항이 포착되지 않음/상품화된 노동력이 실제로 노동자가 되어 생산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변화 포착 안됨.

폴라니는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님의 딸기 사진을 보면 가슴이 콱 막힙니다. 한시 중에 그런 시가 있었는데 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요....매화를 보고 지은 시입니다. 나라는 망해도 매년 스스럼 없이 피는 매화를 보면서 읆었던 시입니다. 망국에도 불구하고 세상사에 초연한 듯 피어난 매화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법합니다. 경주 남산에 가서 오래된 마애불을 볼 때 또는 어느 시골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법수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들은 얼마나 오래 변화하는 사람들을 보아왔을까?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손자때 모습도 기억하고 있겠지... 무한성은 가끔 끔찍함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떠난 자리마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무너진 궁전의 댓돌만큼 쓸쓸한 것입니다. 

빚만 남기고 떠난 주인, 그 자리에 지난해 처럼 팔리기를 바라며 피어난 딸기꽃...무심하게 자라나 떠난자들의 그림자를 짙게합니다. 사람들은 또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갈 것이고 영문몰라 하는 딸기밭도 내년이면 갈아엎어지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겠지요. 

전 '안되면 농사짓지' 하는 말은 무책임한-좀 심하게 말하면 싸가지 없는 말-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집안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도 다시 촌에 들어가서 농사 지으려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한다고 합니다. 마지못해 등떠밀려 밭일 하던 것과 자기의 농사를 짓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요. 거기에 도시물로 노곤해진 근육을 가지고는 감당해내지 못할 일입니다. 가끔 아내와 다투는 일 중에 하나는 아내가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한다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일할 때 하고 쉴 때 쉬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럼 아내는 늘 똑같은 말을 합니다. "집 안 일이 그런 줄 알아.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하지 않으면 바로 표나고...그런거야"   농사일도 이와 비슷할 겝니다. 거기에 다른 점은 농삿일은 '자연'이라는 변수와 '정책'이라는 변수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집 안 일을 하지 않았다고 빚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농사일은 애써 1년을 품팔고도 얻는 것은 빚 뿐일 때가 있습니다. 귀농에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첫번째 절대 짧은 기간 내에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농사꾼이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되고 기회가 맞으면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요. 

전 가끔 시골을 꿈꾸지만 결코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단 한번도 제 손으로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사일을 허투로 생각치도 않습니다. 아마 시골에 간다면 그냥 나와 내 가족, 가까운 친척들에게 줄 수 있을 정도의 텃밭 정도나 꾸릴 수 있겠지 생각합니다.  

지난 해 인가 저희 손위 처남이 배를 타러 내려왔습니다. 한 몇 개월 놀다가 마지막으로 선원 모집을 보고 온거지요. 처지를 아니까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밤에 아내와 누워서 '왠만하면 막고 싶다" 고 했습니다. 다음 날 처남은 알선 업체를 다녀온후 그냥 고향으로 올라갔습니다. 만나서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나니까 호기롭던 사람도 덜컥 겁이 났던거겠지요. 바람이 조금 이는 날 고깃배 타고 1시간정도만 나가면 왠만한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간 모든 내용물들을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나 칸트 할아버지가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의 토사물을 보면 진짜 물질성이 뭔가 확 깨우치게 됩니다. 그게 물질성이지요. 느릿 느릿 카지노가 구비된 여객선에서 MP3로 낭만적인 음악과 함께 만나는 바다와는 완전히 다르지요. 돈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그냥 발을 댈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든 내리고만 싶어집니다.  처남은 나중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 '여기까지 가서는 안되겠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배를 타는 일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험한 일중에 하나가 뱃일이고 함부로 덤벼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처남은 지금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보험일을 합니다. 여건히 녹록치는 않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은 한가 봅니다. 

아내는 아이와 과일을 먹을 때, 또는 아이가 음식을 함부로 취급할 때 반드시 '이거 만든 햇빛과 물과 농부 아저씨들을 생각해봐. 그러면 되겠어?' 라고 아이를 가르침니다. 저 역시 그렇게 따라하지만 또 가끔 잊고 삽니다. 제가 한살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농사와 유통의 거리가 길어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서로 벽에 대고 이야기하지요. 생협이나 한살림같은 운동의 취지는 이런 벽을 없앰으로써 가격보전의 효과도 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거리를 없애는 것이지요. 소규모의 공동체는 그런면에서 더 윤리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아토피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은 작은 정치적 실천이기도 합니다. 식탁에서 소식지를 보곤 합니다. 가격 폭락때문에, 지난 장마로, 냉해가 일찍와서...등등의 글들을 보면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주인이 떠난 자리에 피어난 딸기를 보면서 하루 종일 마음이 심란합니다. 떠난 사람은 어떻게 생을 이어갈지, 또 그 아이들은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덩그러니 남을 딸기는 또 어떻게 외로울지.... 예전에 노숙자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저랑 별반 다르지 않은-그러니까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그런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몇번의 실패를 연달아 겪고 나면 서울역 천장을 지붕삼을 수도 있는 거지요. 자본은 늘 그런 공포를 무기로 이용하고 스스로 그런 공포에 휘말리지 않도록 심지를 굳힙니다만 가끔은 두려울때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만은 冊으로 쓰고 싶다고 했던가... 

book으로 쓰던  livre 라고 쓰던 상관없다. 

난 책을 좋아하지만 가끔 '책'을 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심풀이로, 똑똑해지려고, 여자들 한테 좀 있어 보이려고,  미적 향유를 위해, 자기인식 확장을 위해, 또는 세계의 구성을 위해, 변혁의 근거를 위해, 밥벌이를 위해, 상대를 누르기 위해, '오난'을 위해...  

이런 생각을 한다고 당장 '책'을 끊고 산으로 가지는 않는다. 산에 사는 건 쉬운지 아나보지?  

이런 글이 있는데.. 

"텍스트적 저항을 위한 글읽기가 식민주의 텍스트 내부의 모순과 양면성의 '이론적' 해명에 전적으로 매달릴 때, 전복적 주체성은 식민화된 혹은 탈식민화된 주체로부터 분리되어 서구의 제도권 문학비평가가 실시하는 텍스트 작업 속으로 함몰될 수 밖에 없다." 

최근에 보고 있는 탈식민주의 관련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글에서 '식민주의' 대신에 '이론'이나 '학문' 또는 이의 전달체이자 상징으로서 '책' 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어찌되었거나 가장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 만나는데 '텍스트 작업 속으로의 함몰'이다. 텍스트 작업으로 빠져드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선천적 능력도 필요하고 개인적인 말하지 못할 고생도 감내 해야한다. 자기치열함이 없으면 제대로 함몰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함몰은 선택적으로 마땅히 대접 받아야 하지만 또한 일반적으로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원죄처럼 '텍스트의 함몰' 은 이마에 걸고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일단의 비건강성의 증후로 제시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야 하는가? 그런 개인은 어떤 자세여야 할까? 

최근에 바람구두님도 인용한 <대학>의 첫장을 인용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남명 조식 선생은 이 구절을 학문의 요체로 여러 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선생이 직접 말하기를 "반평생이 넘도록 이 뜻을 공부 했지만 그 의미를 다 헤아리기 어렵다." 라고 말씀하셨다. 알아서 듣는 것은 후학의 몫이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나 아렌트의 말로 기억한다.(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말이 시작하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되고 말이 끝나는 곳에서 정치가 끝난다." 

미시적인 정치행위로 본다면 '의회주의'로 국한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모든 담화 행위 -제도화된 형태를 언론으로 본다면- 자체를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고 이 의미를 확장하면 지금 한국에서 현재 벌어지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YTN 전현직 노조간부들의 구속에 이어,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검찰조사와 자택 압수수색이 벌어졌다. 언론은 애써 외면하고,  또 어려워진 경제상황에서 모든 에너지를 생계구출에 힘써야 하는 대중들 역시 이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한다.  

현 정부의 파국적 행동으로 인해 받게 될 심각하게 상처입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이어지게 될 사회적 고통에 대한 우려가 높다. 현 정부의 태도는 자신들이 립서비스로 달고 다니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서도 멀어진지 오래다. 실제로 '건강한 보수주의자' 라면 이미 이 정권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단절시켜야만 한다. 이 정권과 정서적으로 결별한다고 해서 그들이 쏘아붙이듯이 '좌파'나 '반미세력'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2MB에 미련을 갖는다면 결국 스스로 '한국적 보수주의' (수구세력)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지난 대선에서 설레발이치는 진보세력과 상고 졸업한 대통령이 꼴사나와서 2MB에 투표했더라도 지난 1년이면 과감히 결별을 선언해도 '초지일관의 양심 ' 에 저촉되는 행위는 아니다. 이미 이 정권은 지난 1년간 스스로 정치를 끝장낸 경험이 여러번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앞으로도 스스로 '정치포기'를 선언할 가능성이 100% 이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YTN이나 PD 수첩 구성원들에 힘이 되는 것은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의 지원이고 가장 힘든 것은 가까이 아는 사람들의 지탄과 무관심일게다. YTN이나 MBC 내에서도 이 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척결하고픈 이들은 상하층부를 막론하고 고루 있을게다. 그런 차원에서 이 들의 고통에 대해 잠시라도 함께 고민하고 작은 지원 하나를 건네려는 선한 의도는 큰 힘이 된다. 내가 별로 해 줄게 없다는 생각은 맞는 말이지만 바른 말은 아니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MBC 앞으로 갈 수도 없고,YTN 사원들의 생계를 위해 내 생계까지 팽계칠 수도 없다. 우리는 현실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면 된다. 작은 물방울이 모이면 바위를 뚫는다. 물방울이 스스로를 작은 물방울이라고 자학하지 않고,또 물방울이 커다란 망치였다고 허장성세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내 주변에는 '한국형 보수주의자들'이 동물원 악어떼들처럼 우글우글 모여서 하품을 해대고 있다. 높은 놈들은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낮은 놈들은 요리조리 눈치와 잡아야할 줄을 바라본다. 그도 아니면 무심하거나. 내게 YTN 나 PD 수첩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낸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알고 있어도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안그래도 회사도 시끄러운데 답답한 이야기들 보다야 WBC가 나을테니... 

다른 이야기지만..말이 나온 김에...최근에 이 회사에 제일 높은 인간은 석달이나 밀린 보너스를 지급하면서 '회삿놈중에 한 명도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놈 없네' 라며 간부회의에서 싸가지 없는 직원들에 대해 말했단다.팀 회의에서 국장이란 사람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전했다.  이 말에  몇 명이 웅성거리며 또 피식거렸다. '나..원...노동의 개념조차 없는....제길...지가 보너스 준건가?...우리가 일한 몫을 그동안 못받던거 받은거지.' 하여간 이런 자들과 그들 밑에 줄서서 차기를 노리는 자들이 한 다스씩 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도 좀 세련되지려면 이딴 무식한 발상들과는 선을 그어야 하지 않겠는가? 2MB스타일이란게 위와 똑같은 방식이다. 좌파니 뭐니 하는 사람들 말고, 또 진보니 뭐니 하는 사람들 말고, 그냥 4년에 한번 투표하러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2MB에 분노해주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독재시대의 실용적 매력과 현실적 이익의 맛이 무언지 아는 자들의 욕망에 역사와 미래를 내맡기고 있다. 그 끝은 파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