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공부하자" (2020. 4. 12.)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642759 에 이어서...



  막연히 일본도 유교문화권이라 그 영향을 크게 받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가 보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는 '이상주의'라 할 만한 이념이 없다(전자책으로 보고 있는 터라 쪽수를 표시한 인용이 어려우나, 이하는 전자책 191/467에서 시작되는 "일본에 이상주의는 없다"에서 가지고 온 내용들이다).

  서양에서 『군주론』, 『전쟁론』 같은 현실주의가 가진 도덕적, 윤리적 결함을 '기독교'가 보완하였다면, 『손자병법』을 낳은 중국에서는 '유교'가 그 역할을 하고, 특히 성리학은 조선으로 와서 퇴계와 율곡에 의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그나마 그런 역할을 맡았던 '불교'가 탄압받아 침략주의를 견제할 평화주의 이념이 소멸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의 도덕관념을 마비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정작 역대 일왕들은 '국가신도'가 아니라 대부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우리는 정반대로 명분과 이상주의가 앞서는 나라이고, 지금도 현실주의, 실용주의적 사고는 많이 부족하다. 거창한 총론을 뒷받침할 각론에 약하다.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는 완비되지 않은 계획이라도 과감하게 결단하여 우선 실행에 나간 뒤에 세부를 보완해 나가는 전략이 효과적이지만, 요모조모 따지지 않고 일단 지르고 보는 전략이 평시에도 늘 유효하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반면 일본은 일반적으로 디테일에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면, (가뜩이나 만사 무덤덤한 편인)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세심함을 보이는 일본인들도 많다. 그러나 최근 여러 일로, 일본이라고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국가통계'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일본은 자국 안전 등에 관한 겉으로 보이는 대외 이미지를 중시하여 (특히 국제기구에 보고하는) 부정적 지표는 항목을 세분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표본 수를 줄여버리고, 긍정적 지표는 과장하는 전략을 취하곤 한다. 『국화와 칼』이 꿰뚫어 본 것처럼, 일본은 행동 관점의 '죄책감(guilt)' 문화가 아니라, 존재 관점의 '수치심(shame)'의 문화이고, 치욕과 치욕회피를 원동력으로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통계 '마사지' 문제는 서구에도 이미 꽤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조. “Simple statistical error puts Japan economic data in doubt”, Financial Times, 2019. 1. 17. https://www.ft.com/content/e3a28958-1a24-11e9-9e64-d150b3105d21; “Osaka polic failed to report 81,000 crimes between 2008 and 2012”, The Japan Times, 2014. 7. 13. https://www.japantimes.co.jp/news/2014/07/31/national/crime-legal/osaka-police-failed-to-report-81000-crimes-between-2008-and-2012-probe/ 등. COVID-19 사태에서도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탑승자를 통계에서 빼는 등 유사한 모습을 보였는바, 이는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유불급이라고, 국가통계에 관하여 이런 평판이 쌓이는 것은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일본은 세부까지 계획이 서지 않으면 선뜻 움직이지 않는(못하는) 사회이고, '전례'가 없는 이번 사태에 관해서도, 미리 작성된 '매뉴얼'이 없다 보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다시 윤리문제로 돌아와서,


  일본의 도덕관념은 확립된 하나의 확고한 사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불교, 유교, 기독교, 황국사상, 병학, 무사도 등으로부터 일본인들의 생활에 맞게 취사선택된 혼합된 이념이다. 그러다 보니 시대와 사회가 바뀌면 쉽게 변한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규범도 실은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편하게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집단따돌림 문화를 보면 그 규범이 어떤 윤리로부터 도출된 규범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국에, 최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응원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의료진들을 바이러스 취급하며 이지메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본 외에는 찾기 어렵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서이다. 일본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관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침략사상을 내걸고 나서서 강력하게 끌기라도 하면, 알면서 모르면서 거기에 충분히 끌려갈 소지가 있다고 한다.


  "세균 취급당하는 의료진, '코로나 이지메' 퍼지는 일본", 서울신문, 2020. 4. 13. 자 기사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414017005

  "코로나19 불안 커지는 일본… '현장대응 의료진 세균 취급'", 연합뉴스, 2020. 2. 23. 자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00223026500073


  우리를 끝없이 연구하는 일본을 역이용해 우리가 일본에 포장해 발송할 선물로 나는,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꼽고 싶다["일본을 공부하자" (2020. 4. 12.)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642759 참조].


  비록 노동권, 사회권과 같은 근대적 형태로 온전히 제도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는 '홍익인간'부터 '인내천'까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윤리규범과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이 그래서는 안 돼!"와 같은 자연법적 관습규범이 실정법의 빈틈을 채우고 있다. 그 덕분에 아시아에서는 가장 앞선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고, 서서히나마 한 걸음 한 걸음, 인권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에 대해서조차도, 전쟁을 일으켜 흡수하자는 식의 주장은 우리사회에서는 어느 때라도 그리 큰 지지를 받지 못한다. 안주하지 않는 연구자, 운동가들이 있고, 커다란 꿈과 이상(理想)을 입에 달고 살고, 내 권리를 찾는 데 적극적이며, 언제라도 분연히 떨쳐 일어날 준비가 되어있는 시민들이 있다. 이제 새로운 단계, 조금 더 똑똑한 형태를 모색하여야 할 시기가 되었지만, 법원과 헌법재판소,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큰 추세에서' 시민의 권리를 늘려오고 있다. 이들이 적어도 일본이나 중국, 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비판에 무관심하거나 대화조차 안 되는 기관들은 아니다(내부적으로도 개선과 자성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분출되어 왔고, 또 분출되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일본의 형사법제는 악명 높다. 올해 초 미국 정부가 자문하는 워싱턴 DC의 아시아법 전문가가, 중국, 일본 전문가들도 모두 앉아 있는 한 비공식 학회 석상에서, "중국에 법의 지배란 없고, 일본도 형사법에 관해서는 중국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라고 대놓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2013년에는 UN 고문방지위원회에서 한 회의 참석자가 “일본 형사사법은 중세시대 수준”이라고 발언하자 일본 대표가 (나름대로 해명하거나 정중하게 사과를 요청하면 되었을 것을) 무례하게 "Shut up! Shut up!"하며 발끈한 바람에 도리어 그 주장이 확증된 것처럼 되어버리고 비웃음만 산 일도 있었다. “‘Shut up!’ U.N. rights envoy quits over tirade in Geneva”, The Japan Times, 2013. 9. 21. https://www.japantimes.co.jp/news/2013/09/21/national/shut-up-u-n-rights-envoy-quits-over-tirade-in-geneva/ 당시 유튜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koQjIBA_3U 반면 우리는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수립한 형사절차상 (피고인) 인권보장 조치들이 이제는 일종의 '백래시'를 맞고 있는 형국이고, 그것이 거꾸로 강자나 권력형 비리를 비호하는 데 선별적으로 활용되는 규범혼란 상황에 놓여 있다. 형사절차에서 '피해자' 보호와 참여를 강화하는 등 기존 구조상 간과되었던 측면을 적극적으로 제도에 기입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중국도 국가규모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여 국제사회에서 인심을 잃고 있다. 홍콩문제, 소수민족 탄압, 비판억압과 감시사회도 그렇지만, 최근에는 중국 내 아프리카인 차별로 큰 비판에 직면해 있다. "아프리카 대사들 '코로나19 차별 중단하라'… 중국 '개선하겠다' (종합)", 연합뉴스, 2020. 4. 13. 자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00413076151083?section=search 혁명은 하였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진지하게 사고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보인다.


  물론 우리도 갈 길은 멀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난민 인정률은 OECD 국가 중 일본 등과 함께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하며, UN 사회권규약 등 국제인권규범을 '시기상조'라는 등 이유를 들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포장해서 수출할 정도의 모범이 되려면 우리부터 돌아보고 쇄신해 나가야 한다.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마련한 보편적 규범과 상식을 숙고하여야 한다.


  이번 COVID-19 사태로 맞은 위기이자 기회를 능동적으로 사고하면 좋겠다. 우리가, 대한민국(통일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도 생명과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가장 앞장서서 옹호하고 이를 위해 싸우는 존경받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유럽인권재판소(ECtHR)와 같은 아시아인권재판소를 우리나라에 유치, 설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 광주도 좋고, (아니면 오히려, 전략적으로) 대구에 세워도 좋을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지역 시민들께서도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해 충분히 양보해주실 수 있을 사안이라 생각한다.

  대구가 지금은 '보수의 성지'처럼 되어 있지만, 이는 (고작) 제3공화국 이후의 일이다.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곳은 영남지역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문천회맹'이 그 시작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처음 의병을 일으켰고("달성출신 ‘韓末 최초 의병장’ 문석봉…집터엔 그 흔한 표지판 하나도 없어", 영남일보, 2019. 6. 1. 자 기사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90601.010010715190001), 을사늑약 후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전개하였으며(김광제, 서상돈 등), 1915년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곳이고(대구 달성공원),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태극단 등 "1920년대 후반~1945년 대구 항일 학생운동", 영남일보, 2013. 12. 13. 기사 및 연결기사 참조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31213.010340757380001), 노동운동(1938년 12월 대구 직조공장 노동자 파업 등), 무장투쟁("'의열단 최초단원 10명 중 3명이 대구경북人' 의열단 100주년기념식 열려", 영남일보, 2019. 11. 11. 자 기사)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대구서 교육자·작가 역사대담 '대구는 독립운동의 성지'", 연합뉴스, 2019. 8. 22.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0822078700053). 독립 후에는 미군정하에서 '10월 민중항쟁'이 일어났고(https://ko.wikipedia.org/wiki/10%EC%9B%94_%ED%95%AD%EC%9F%81),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려 72%의 대구시민들이 진보당 조봉암에게 표를 던졌다("조봉암이 대선에서 70% 득표한 지역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19. 10. 21. 자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74404).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2. 28. 학생의거'를 일으켰고, 이는 '3. 15. 마산의거'와 '4. 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태일조영래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시아인권재판소의 대구 설립'은, 섬처럼 고립되어 그 나름으로 상처받고 소외되었다 여기는 대구시민들의 정서를 위로, 재전유하여 우리 사회에서 보다 합리적인 토론 기반을 열어 나가는 좋은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예산을 들여 신공항을 짓는 등 지역개발사업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앞에서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대당을 언급하였지만, 대구는 정몽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남 유림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고, 그 학풍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조선 초 김종직을 영수로 한 영학파, 경주 손중돈에 이은 이언적 등 동방 사현(그중 조광조의 갈래가 성혼 등 기호지방으로 전해진다), 중기 조식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이어지다가 결국 퇴계학파로 대부분 흡수, 정리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영남학파"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276].

  물론 남북의 평화적 통일 후 비무장지대 인근이나 북한 지역에 아시아인권재판소를 설치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고,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 후 전범재판 등 어떤 국제재판이 제기될지 장담할 수 없고, 인프라나 지역정서 차원에서 대구와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아시아 국제재판소가 서려면 누구보다도 일본의 동의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이는 남북통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대구는 우선 일본과 가깝다는 큰 장점이 있다(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직항노선이 있고, 상하이, 홍콩, 타이베이, 방콕, 하노이로도 연결된다). 국제재판소가 잘 운영되려면 해당 지역 주민의 전폭적 이해와 지지도 필수적이다. 대구는 현 대구고등법원의 전신이 된 '대구공소원'이 1908년 경성공소원, 평양공소원과 함께 가장 먼저 설치된 곳으로(대구 등 '지방'재판소는 1895년 고종이 반포한 법률 제1호인 '재판소구성법'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새로운 재판소를 흔쾌히 맞이할 경험과 준비가 되어 있다. 비무장지대에는 '전쟁 자체'를 기억하고 되돌아보는 평화공원, 생태공원이, 평양 등에는 통일 전 북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세계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투명성, 시민의식에 주목하는 이 시기에,

  우리 자신의 인권의식, 감수성, 타자에 대한 열린 마음과 공감·연대의식을 점검하고 키워나가는 한편, '인권 옹호자로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국민적 대화를 열어 나갔으면 좋겠다.


  아울러, 다수의 일본 시민들과도 허심탄회하게 대화함으로써, 일본 극우세력의 침략주의를 자연도태시키고, 평화주의의 상징이자 동반자, 둘도 없는 벗이 되자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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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20-04-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 일본 뿐인 줄 알았는데 인도도 있었다;;;

˝‘코로나 옮긴다‘며 돌 던졌다···의료진이 되레 구타당하는 인도˝, 중앙일보, 2020. 4. 14. 자 기사
https://mnews.joins.com/article/23754117
 



  이것도 작년 7월쯤 읽고 정리하지 못한 책... 이 책보다는 아래 『미국 헌법을 읽다』가 신선하고, 수작(秀作)이다. 다만, 지식소매업에 오래 종사하셔서 그런지, 그럴 듯하게(이야기가 되게) 썰을 풀다가 사실관계를 틀리는 경우가 보인다(번역과정의 오류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는 일이다. 자료를 꼼꼼히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검증하여 읽고 쓰는 훈련을 하지 않은 분들은, 대중서를 많이 내거나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들을 좋은 학자, 심지어 그 분야 최고 권위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학문적 역량과 대중적 글쓰기 재주는 같이 따라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매단계에서 양질의 지식이 유통될 수 있으려면, 도매업의 튼튼한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최근 들어 대중들이 소매단계 유사학자를 업고(책 한두 권 읽은 것을 가지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 분야를 10년 이상 연구한) 도매업자들을 물어뜯고 공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슬픈 일이다. 성숙한 토론이 되려면 다른 영역에 대한 존중을 깔아야 한다.


  이는 토크빌이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첨단학문과 문화, 예술적 성취, 순수(= 비실용) 지식을 귀족주의 사회만큼 추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평균적 지혜'라는 관점에서는 민주주의 사회가 귀족주의 사회보다 수준이 높다(p. 130). 토크빌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는 차이를 별로 따지지 않고, 세부를 꼼꼼하게 파고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p. 228). 미국에서 발달한 '실용'학문, 즉 응용과학과 기술은 과거 유럽 귀족사회가 만들어낸 기초과학의 순수지식에 터 잡고 있(었)다. 순수한 기초지식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기초가 무너지면 응용과 기술은 금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된다. 토크빌은 이것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 보았다(p. 225).


  지금처럼 경제가 상당히 성장, 발전한 상황에서 토크빌과 같이 일도양단의 결론을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열린 공론장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자유롭게 오류를 검증, 수정하는 분위기에서라면, 첨단의 순수학문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다양한 경로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 순수과학은 막대한 투자가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이 분(양자오)의 책들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어, 유유출판사에서 낸 다른 고전강의 시리즈에도 흥미가 간다. 어디에 중점 두고, 어떻게 지식을 체계화하는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나 방식과 달라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읽은 지가 오래된 탓에, 갈무리해 둔 대목을 주로 '밑줄긋기' 식으로만 정리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비참한 생활도 사라진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프랑스 사회에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 공존한다." (...) 민주주의 사회와 민주주의의 효과는 즐거움을 줄이고 편안을 늘리는 것이[다]. - P128

혁명의 충동, 집단적 열정이 격앙되는 와중에 사람들은 자유, 특히 고도의 개인적 자유와 유능한 정부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먼저 공공질서를 만들어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 행위를 구속함으로써 개인 행위가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합치되도록 요구합니다.

(인용자 주: 읽을 당시에는 선뜻 수긍하지 못했던 대목인데, COVID-19에 대한 각국의 관리방식, 특히 우리의 성공방식을 보며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P149

"인류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 이토록 사형이 많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 P158

토크빌이 프랑스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그토록 두려운 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프랑스에 시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토록 오래도록 대혁명이라는 동란을 겪었음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시민의 기초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인용자 주: 유보적으로 읽었던 부분이나, 시민을 ‘형성‘하는 운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곱씹어 생각할 대목이다.) - P169

느슨한 정부라야 분산되고 세세한 행정이 가능[하다]. - P173

따라서 사법권의 상대적 위계는 입법권과 행정권보다 높습니다. (...) 토크빌의 책에서는 행정권의 위계가 삼권 가운데 가장 낮아서 사법권이나 입법권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 행정권은 입법권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지 입법권에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 P187

토크빌은 프랑스에서 흔히 유행하던 ‘민주주의는 혁명에서 온다‘는 관점을 철저하게 뒤집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가 된 것은 미국에서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0

"모든 세대의 미국인은 새로운 사람이고 새운 종이다. 그들은 옛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전범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구속력을 가진 정전(正典, canon)이란 것은 사라졌다. 정전이 없으니 내면화되고 일치된 언어 규율이 없어지고, 언어와 문자를 운용하기 위한 연구도 없어지며, 과거 유럽의 정확하고 연구된 언어, 문자와 문학도 없다." (...) "미국은 문학이 없는 곳이다. 적어도 유럽인이 인정할 만한 문학은 없다. 미국에 문학이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인 정치 구조 아래에서 만들어진 사회의 필연이다."

(인용자 주: 오늘에 와서는 언어의 이런 유연성이야말로 미국 팽창의 큰 비결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똑같은 영어를 쓰지 않고, 그것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 아래 기독교에 관해서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 P232

토크빌은 기독교가 현대 사회에서 넓게 분포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상대적으로 이슬람교가 너무나 많은 일과 사소한 것까지 관여해서 신자가 지켜야 할 규약이 너무 많아졌고, 이것이 현대 생활과 강하게 충돌하여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선택하고 이슬람교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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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유익했다!


  제1장 경제학과 심리학의 만남 - 행동경제학의 탄생




  제2장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으로 행동한다 - 합리적 결정의 어려움




  제3장 휴리스틱과 바이어스 - '직감'의 기능




  제4장 프로스펙트 이론(1) - 리스크 상황 하에서의 판단




  제5장 프로스펙트 이론(2) -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구속됨




  제6장 프레이밍 효과와 선호의 성향 - 선호는 변하기 십상




  제7장 근시안적인 마음 - 시간선호




  제8장 타인을 돌아보는 마음 - 사회적 선호




  제9장 이성과 감정의 댄스 - 행동경제학의 최전선

    1. 감정의 움직임




    2. 신경경제학

    3. 진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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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모르는 미국의 두 얼굴 :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은 없다 (체험판)
정종태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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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체험판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무덤의 섬‘을 만드는 뉴욕시,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식량배급을 기다리며 늘어선 자동차 행렬, 샌프란시스코 노숙인 쉼터의 집단감염 등 지금 읽으면 더 새롭게 읽힐 것 같다. 언젠가는 전체를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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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호사카 유지 지음 / 북스코리아(북리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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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온 책이라 생생하게 읽힌다. 판단은 더 두루 읽어본 뒤에...

일본과 가장 가까이 살면서도 일본을 잘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뼈아픈 사실 같다.

이를테면, 미국 전문가들을 만났을 때 중국, 일본의 강점과 약점을 우리 이상으로 정확히 짚고 있어 놀랐던 경험이 종종 있었다.

덧. COVID-19의 세계적 대유행이 각국의 바닥과 급소를 정확히 시험하고 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실은 종잡을 수 없는 일본을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여담이나, 이번 사태가 전 세계로부터 고립된 타이완의 지위 회복에도 도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 국민들 중 50% 정도는 ‘지지 정당 없음‘이고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나머지 50% 중 절반이 혐한적인 견해를 갖고 있고, 나머지는 친한적인 사람들이다. 일본의 정치 무관심파는 여론조사에도 대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혐한적인 일본인들은 별로 많지 않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일본 내의 극우 세력들의 의견에 분개해 왔다. 이제부터는 이들을 제외한, 잠자고 있는 90%의 일본 대중들의 존재와 동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그리고 이러한 일본인들을 한국의 편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를 알아내야 한다.

한국이 자신의 입장만 주장할 뿐, 상대편을 연구하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서는 복잡한 세계정세 속에서 한일 두 나라의 바람직한 장래를 창출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남북이 평화공존으로 가는 길이야말로 일본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득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그 결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일본이 현재 남북 평화공존에서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병학적인 발상은 유교의 가르침에서 나오지 않는다. 당시 조선은 서양을 오랑캐라고 불렀는데, 짐승과 같은 오랑캐는 아예 연구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즉 당시 조선의 양이파들은 성리학이 국교로 되어 있는 국가제도를 지키려고 했지만, 서양을 따라잡고 서양을 이기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이 서양을 목표로 개혁을 추진한 것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본은 먼저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서 서양의 대포술이라든가 해군의 전술을 연구했다.

한국에서는 그간 일본 연구를 소홀히 해왔다. 일본연구가 소외되었던 이유는, 어쩌면 침략 국가였던 일본은 짐승만도 못하다는 양이적인 심리에서 기인되었는지도 모른다.

(...)

어쨌든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상대국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철저히 연구를 해나가야 한다. (...)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연구를 깊이 해야 한다.

(...)

그렇다면 반대로 한국을 연구하고 알아내려는 일본인들을 다시 역이용하는 방법은 어떨까. 어차피 정보를 캐내고자 하는 쪽을 막을 수 없다면, 아예 훔쳐가고 싶은 물건을 미리 간파하여 잘 가져갈 수 있도록 물건을 깨끗이 포장해 주라는 것이다.

보여줄 것을 준비하다 보면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할 것인지 모든 걸 펼쳐놓고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게 될 것이고 정리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의 나라에 비추어 내 자신과 내 나라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국, 한국인은 무엇이 옳지 않은가도 스스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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