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같은 명절 연휴 둘쨋날 풍경:1. 어젯밤 과음한 1인과 며칠 전부터 음식 준비와 집안 청소로 과로한 1인은 낮잠의 세계로ㅡ2. 명절에 더 바쁜 직업을 가진 1인은 출근(자영업이니까 명절인데 문 좀 닫고 같이 지내도 좋으련만 가차없이 출근해버리는 조카에게 섭섭함을 느낀다. 이모 조카 사이에도 이런데 부모 자식 간에는 그 섭섭함의 농도가 얼마나 짙을 것인가. 섭섭함을 넘어 노여움, 노여움을 넘어 허탈함에 이르지 않으려면 엄마한테 전화라도 자주 해야겄어.)ㅡ3. 키즈카페로 탈출한 2인ㅡ4. 울산에서 용인 올라와 분당 쉐이크쉑 버거맛이 궁금했던 1인, 즉 나는 케첩에 감자튀김 찍어 먹으며 《편집 만세》 읽다 말고 알라딘을 켰다.5. 이거는 번외인데.. 이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이것으로 보자면 뭐 예년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지만 나의 내면 사정을 보면 매우 다르다. 이번에야말로 비로소 내가 나로서, 나자신의 시선으로 명절 풍경을 그리고 있다. 벽을 무너뜨리는 전략 대신 벽에 뛰어들어 벽과 일체가 되어보는 방법을 구사하는 중인데 이러다 정말 벽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상당한 긴장감이 맴돈다. 일단 뭔가 흐믈거리는 느낌이 나는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벽이여 다 녹아버려라. 나를 집어삼키지 말고. (그래봤자 너만 손해야)ㅡ《편집 만세》29쪽F. 스콧 피츠제럴드는 ˝작가는 엄밀히 말하면 한 사람이 아니다. 괜찮은 작가라면 그는 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수많은 사람일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 그 ‘한 사람‘은 작가가 보여주기로 선택한 것을 통해서만 우리를 찾아온다. 그를 찾을 단서란 작가가 사용한 모든 단어와 그 단어의 탄생에 얽힌 뒷이야기뿐이다.ㅡ이 부분을 읽을 때 곧장 한 사람이 떠올랐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다. 이를 근거로 나는 즉시 그를 ‘괜찮은 작가‘, 참 괜찮은 사람으로 분류해 두었다. 괜찮다면 서너명쯤 더 괜찮은 작가를 만나고 싶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은 덕분에 나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공개할 수는 없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꽤 여러 번(최소 스무 번 이상)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을 읽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다거나 그가 쓴 글들을 찾아 읽겠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소설을 읽고 나서 3주가 지났는데도 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 자꾸 나를 찾아보게 만든다는 점과, 바로 이런 게 소설을 읽는 이유라면 이유겠거니 하는 심사를 밝혀두고 싶어서 리뷰(라기 보다는 짧은 소감을)를 쓴다.책은 '나'로 시작하고 나로 끝난다. 등장인물은 열 명 남짓인데 그 중 다섯 명은 끝끝내 이름을 알 수 없다. 나, 너, 문지기, 이름이 없는 그냥 커피숍 직원 그녀, 옐로 서브마린 소년, 이렇게 다섯 명이다.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듯 나는 이 사람들 모두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일 거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이름을 몰라서 불편한 건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나나 내 주변 인물들을 대입해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건지도 모른다. 올해 유난히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았다. 아직 9월인데 생각나는 것만 해도 10번이 넘는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처음엔 '벽'이 죽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벽도 어디 그냥 벽인가. 움직이는 벽, '그 불확실한 벽' 아닌가 말이다. 누구나 죽는 건 알아도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니 얼마나 직관적인 비유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가! 벽은 죽음을 상징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도 아니다. 벽은 경계다. 말 그대로 벽.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도구. 높이 나는 새에게는 의미가 없는.. 새들에겐 없겠지만 나에게는 강력한 의미가 있는 벽.틀림없다. 나는 벽 안쪽에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나 새들의 날개짓이 부러운 걸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말이다. 벽같은 명절이 코앞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이어 『벽 타는 아이』를 주문했다. 어제 항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800미터 계영 경기를 본 뒤라 나는 벽으로 릴레이 주문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벽에서 최민지 그림책의 벽으로 이어지는 주문이라니 모처럼 재밌는 일을 만들어 낸 기분이다. 벽 타는 아이 다음으로는 어떤 벽을 주문해야 할까. 아 맞다. 일단 한가위 명절이라는 벽부터 어떻게 좀 해봐야지. 아아 진짜 벽같은 명절이다. 이눔의 벽을 어떻게 넘어뜨리나. 벽을 인정하고 나 하나만 왔다갔다 하자는 식으로 지내자니 눈치 없고 양심 없는 그 벽이 해가 갈수록 기고만장 높아만 간다. 힘에 부친다. 벽은 높아가고 나는 희미해져간다. 내가 정말 벽을 무너뜨리고 싶기는 한 건가? 그것이 문제로다. 안되겠다. 명절은 길다. 책을 더 사자. 책 속에 든 도끼를 꺼내 벽을 두드려 드리지. 202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