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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
김대식 외 지음 / 김영사 / 2020년 12월
평점 :
(278p.)
광화문 교보빌딩(1984년 준공) 옆, 돌에 새겨놓은 글귀를 본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말은 윈스턴 처칠의 말(1943년 10월) '우리가 건축을 만들고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에서 '건축'을 '책'으로 바꾼 것이다.
사람이 만든 사물이 다시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새로운 상태로 이르게 하다니 이 얼마나 대견한가. 그런데 수많은 책과 건물이 넘쳐나는 이 세상, 우리 사는 이 시절은 왜 이 모양으로 어수선하고 수상한가. 필시 책과 건축이 사람을 잘못 만들고 있음 아니랴. 그 서로 만듦의 상관을 저어하는 무엇이 있지 않고서야.
책을 읽는(었)다고 사람마다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지혜도 얻(을 수도 있)지만 교활함도 배우고, 사유의 깊이를 더하기도 하지만 오독하여 사고를 망치기도 한다. 책을 통한 꺠달음도 천차만별, 그러나 어쨌든 책은 선택의 문제다. 책 없이 살 수도 있고 살기도 한다.
그러나 건축은 책과 많이 다르다. 언뜻 건축도 선택의 문제일 듯 보이지만 건축은 의식하면 할수록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하며 피할 수 없는 대상(상황, 조건, 일상)임을 알게 된다. 일상의 아침에서 저녁, 집에서 일터, 휴식과 만남의 시간, 별난 일과 기호적 소비의 특별한 여가, 그 어디 어느 시간에 건물 없는 곳이 있는가.
(279p.)
건축(집: 건축물의 유형과 용도가 달라도 근본적으로 모두 집이다)을 보려면 의(옷), 식(밥)과 함께 봐야 한다. 옷ㆍ밥ㆍ집(의식주)은 본래 모두 행위의 주체가 확실하게 스스로 짓는 것이었다. 옛날엔 모두 개인ㆍ가정ㆍ동네에서 직접 지었지만 요즘엔 짓는 것(생산ㆍ판매ㆍ공급)은 '먹는 방송'이 인기를 끌고, 집에 없는 '집밥'은 식당에 있다. 기성복을 고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맞출 수가 없다. 집도 미리 만드는 것이 대세다. 아파트ㆍ빌라ㆍ오피스텔ㆍ상가ㆍ업무시설ㆍ창고ㆍ콘도 등, 말하자면 많이 빨리 팔기 위해 미리 만들어놓은 패스트푸드 같은 패스트하우징이다. 도구가 결과를 지배하듯 사용(소비) 방식이 의식을 지배한다. 옷ㆍ밥ㆍ집의 생산과 소비의 톱니바퀴가 같이 물려서 돈다. 그 바퀴를 세우기는 불가하니 무서운 일이다. 아니, 그 무서움을 잊(잃)은 것이 더 무섭다.
(283p.)
책 이야기 하나 더. 동물의 집 짓기를 다룬 책이 많다. 새들이 만든 둥지 형태는 각기 독특하고 짜임새가 튼실하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거기까지면 좋은데 집 짓는 새를 '동물 건축가'라 칭하고, 동물의 집(형태)에서 디자인을 배우자는 주장을 보면 난감하다. 동물의 짓기는 본능이고, 사람은 본능이 아니라 도구를 이용하고 재료를 가공하며 기술적 지능으로 집을 짓는다. 동물의 본능 발현은 건축이 아니기에 집 짓는다고 동물이 건축가는 아닌 것이다. 혹 둥지를 본뜬 건물이 있다 해도 그건 새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형태만 모방ㆍ차용하고 사람의 기술을 적용한 것이다.
혹 동물의 집 짓기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형태의 특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짓기, 소유, 사용의 방식일 것이다. 동물들은 어떤 경우도 직접 짓고, 필요한 크기만 확보하고, 재료는 모두 가까운 주변에서 찾고 멀리서 운반해오지 않는다. 쓰임이 다한 둥지는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니 폐기물을 남기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필요하지 않으면 절대 짓지도 갖기도 않고 여러 채를 갖는 경우는 아예 없다는 점이다.
(285p.)학습의 타성을 벗지 못하는, 경험의 우월을 앞세우는, 틈틈이 욕망을 전이하려 표현의 기회를 엿보는, 건축의 공급자 입장에서만 사고하는, 맥락 없는 추상적 개념의 유혹에 빠지는, 하나보다 둘이 무조건 크다고만 생각하는, 실감 없는 찬사에 귀와 눈을 내주려는, 아집ㆍ고집을 개성으로 여기려는, 탈각하지 못하는 나!
(289p)필자는 생업인 건축을 신성하며 성스럽게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음을 벌써 안다. 반면에 건축은 짓기 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것이고, 삶의 방식을 성찰ㆍ실천하는 것이라고 믿고 쓰는 이들도 있음도 안다. 그 둘을 다 품는 것이 건축이리라. 무너지고 부셔져도 죽지 않을 건축은 보다 나은 우리의 삶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해서 나는 내가 만든 건축에 '나'가 드러나지 않아도 안타깝지 않다. '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뭐가 대수랴.
그렇다. 바로 우리가 다 같이 하는 말. 무심코 의식을 드러내며 무의식을 확인하게 하는 말. 사람은 언어적 존재이고 말은 유전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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