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안녕을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1 탐정 링컨 페리 시리즈 1
마이클 코리타 지음, 김하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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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에서 깊이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은,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그 놈의 깊이었기 때문에 결국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작가가 스물 한 살에 내어놓은 데뷔작이라고 한다. 평생 이런 데뷔작을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며, 평생 추리 소설 작가로 살아도 이런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뭐, 이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다만, 문제는 이 사람이 어린 나이에 쓸만한 추리 소설 한 권을 내어놓았다는 뒷담화가 작품을 더 좋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긴 아마추어의 세계가 아니란 것이다. 완성작품을 내어놓았다는 것만으로 박수를 받는 장소는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프로의 세계에서 작가가 해야 하는 가장 최고의 것은 기막히게 잘 쓴 작품을 내어놓는다는 것이고, 그건 그가 어떤 연령대에 있는가와는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이 세상 모든 책들은 결국 작품성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위치에 있건 아니건 간에...


해서, 이 책에 대한 기대를 잔뜩하고 봤음에도 나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분명 핸드폰도 갖고 다니고, 비행기도 타고 하는걸 보면 요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틀림없는데, 이 책은 묘하게도 30년대나 40년대의 미국 추리 소설 풍경을 그대로 담아왔다. 추리 소설의 아버지라는 데밋 해실이나 하드보일드계의 거장 레이몬드 첸들러의 분위기를 그대로 따왔으니 말이다. 표지 사진이 고전적인 뉘앙스를 풍기는데, 말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단지 표지만이 아니다. 내용도 그랬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한번 확인을 해봐야 했다. 이게 정말 요즘 쓴 책인가 하면서.아마도 작가가 어지간히 해실이나 레이몬드를 좋아하긴 한 모양인데, 오마쥬라고 해야 하나? 존경을 담아서 분위기를 그대로 따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보다는 아직은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지 않아서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완성도 괜찮은 모방작이라고나 할까. 뭐, 내용 자체는 본인의 창작력으로 만든 것이니 모방작이라는 말이 모욕일 수도 있겠지만서도, 하여간 닮아도 너무 닮았다.  링컨 페리라는 탐정이나 그의 동업자가 하는 행동이나 분위기가 말이다. 너무 30년대스러워서, 진짜 요즘도 이런 탐정이 있다고? 조금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는 뜻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전직 경찰인 링컨 페리가 동료 경찰 조와 차린 탐정 사무소에 사건 의뢰가 들어온다. 아들이 자살하고 며느리와 손녀가 실종중인 사건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경찰에서는 아들이 며느리와 딸을 죽이고 자살한 걸로 보고 있었지만, 문제는 두 여자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 자살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은 절대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서 며느리와 손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경찰들이 수사하는 마당에 자신들이 끼어들만한 것이 있겠나 머뭇대던 링컨과 동료는 살 날이 얼만 남지 않았다는 의뢰인의 간절한 눈빛에 지고 만다. 사건을 파고 들어가던 링컨은 자살한 웨인에게 모종의 비밀이 있었으며, 어쩌면 두 여자가 살아있을 거란 생각을 갖게 되는데...


마지막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들에 흡입력이 있긴 하지만, 장면 장면들이 이어진다기 보단 끊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장면을 연결하는 법을 아직 작가가 체득하지 못한 모양으로 이런 장면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나아가는지 하는 것들에서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는게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 얼개는 대충 괜찮으나, 그렇게 사소하고 소소한 점에서 점수를 잃는다는 것이 별로다.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내어놓을지 기대가 되긴 하지만서도, 무엇보다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 것을 먼저 해야 할 듯... 글발은 이미 충분해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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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3 - 고양이 할멈 샤바케 3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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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의 시리즈중 3편이다. <차행주 달걀>에서는 갑자기 건강해진 이치타로 때문에 다들 난리가 난다. 건강해진 것만이 아니다, 황금까지 따라 붙었다. 다들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가운데, 이치타로는 그것이 망해가는 김 상회집에서 주어온 긴지라는 사내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삐쩍마르고 볼품이 없는 그 사내는 그런 사실을 부인하고, 그 증거로 그 상회가 망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김 상회의 딸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것, 이치타로는 이번에도 그 살인범을 잡기 위해 요괴들과 머리를 굴리는데...<꽃비녀>는 길에서 주은 다섯살 난 여자아이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을 <고양이 할멈>은 절에서 벌어진 괴상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고,< 고향>은 이누가미 신인 사스케가 집도 절도 없이 떠돌게 된 사연을<방울이요 방울>은 이치타로의 친구인 에이키치의 동생의 혼사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요괴들이 등장하고, 믿겨지지 않은 이야기들로 꾸며진 단편집이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이런 책이라면 잠이 안 오는 밤에 끼고 앉아 읽기에 적당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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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2 - 사모하는 행수님께 샤바케 2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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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1이 약재상 연쇄 살인을 다룬 장편물이라면 이 책은 단편을 묶은 것이다. 자잘자잘한 이야기들이 주르르 나열되어 있는데, 1편만큼이나 재밌다는 것이 특징, 단편이라는 것을 알고는 짧막짧막하니 조금 덜 재밌지 않을까 실망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집중이 되는 만큼의 길이로 짤라 주기에 읽기엔 더 편하지 않았는가 한다.


내용은 역시 이치타로의 주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써, <사모하는 행수님께>이치타로를 수행하는 두 요괴중 하나인 니키치에게 연애 편지가 배달된다. 글씨가 얼마나 개발새발인지 읽어볼 수도 없는 편지라는 점에 모두들 놀라고 있는 가운데, 그 편지를 보낸 당사자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자 더 놀라게 된다. 과연 그녀를 죽인 자는 누구일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나러 간다고 한 사람이 니키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행수를 범인으로 지목하는데...<에이키치의 과자>는 이치타로의 유일한친구인 에이키치의 과자를 먹고 할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과자점의 후계자이면서도 아무리 배워도 솜씨가 늘지 않는다는 에이키치는 자신의 과자를 먹고 죽었다는 말에 절망한다. 그렇게 맛이 없었던가 모두들 뒤에서 수근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노인의 죽음은 과자와는 상관없는 독살이었고, 이제 누가 살인을 한 것인지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는데...<하늘빛 유리>는 이치타로의 이복 형에 관한 단편으로, 짠한 구석이 있는 단편이었다.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조그만 상점에서 일하던 이치타로의 형은 자신을 이용만 하는 주인에게 화가 난다, 그들을 독살시킬까 독을 품던 그는 손안에 들어온 하늘빛 유리를 보고선 마음을 고쳐 먹는데... 과연 그 유리는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일까? 그 밖엔 <니키치의 연인>은 이치타로의 할머니 이야기로, 이치타로가 어떻게 요괴를 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와 인간과 요괴 사이의 낭만적인 사랑을 들려주고 있었고, <무지개를 보다>에서는 갑자기 요괴들이 이치타로를 왕따하자 그는 서운하기 그지 없다. 그 이유를 알아보던 이치타로는 자신의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게 되는데...


이야기들이 다 재밌다는 것이 특징, 한가롭게 재밌는 책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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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 에도시대 약재상연속살인사건 샤바케 1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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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대형 운수상회 나가사키야의 유일한 후계자인 이치타로는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잘 했다고 칭찬을 받는 병약한 소년이다. 이치타로의 엄마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여겨지던 차에 생긴 아이라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난 소년은 그럼에도 여전히 몸이 약하다. 그런 이치타로를 물신양면으로 지켜주는 두 명의 행수가 있었으니, 그들의 이름은 이누가미와 히쿠타쿠, 바로 요괴들이다. 다섯살 무렵 병으로 누워 있던 이치타로에게 할아버지가 붙여준 수행 비서겸 보디가드로,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요괴다 보니 왠만한 일에는 끄떡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막강한 호위에도 불구하고 이치타로의 병치례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고, 그러다보니 열 일곱이나 먹은 청년이지만 이치타로는 아이같이 연약하기만 하다. 그런 이치타로에게도 신비한 능력이 있으니 바로 요괴가 그의 친구라는 것, 그 자신도 왜 어떻게 요괴를 보는지 알지 못하지만서도, 그 주변에는 늘상 요괴가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픈 덕분에 인간과는 교분을 맺을 수 없었지만 늘 요괴와 알콩달콩 지내면서 시간을 보내던 이치타로는 어느날밤 몰래 출타를 했다가 그만 살인범과 마주치게 된다. 살인까지 목격한 그는 한달음에 도망가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된 요괴 호위들은 난리를 친다. 그가 살해될 수도 있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살인범이 쫓아오진 않을까 걱정하던 이치타로는 한동안 집에서만 갇혀 있기로 약조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도 살인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살해된 사람들은 다 약재상들, 살인범 역시 살해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다들 놀라워 한다. 살인을 하면서, 약을 찾고 있었다는 소문에 이치타로는 곰곰히 자신과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 살인범이 찾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한 이치타로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만 알 수가 없다. 두 요괴 역시 무언가 아는 것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대 요괴 중이 그를 찾아 오는데...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병약한 소년이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소설이었다. 계속 궁금하게끔 이야기를 잘 풀어나간다는 것이 마음이 들었다. 다 읽어 버리지 않고서는 책을 내려 놓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요괴들의 이야기인데도, 아귀가 딱딱 맞고, 그들의 사연이 그럴듯 하다는 점이 좋았다.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무리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도 좋고, 병약해서 늘 다른 사람들의 걱정과 호위를 받지만 마음만큼은 올바른 청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역시 배울만했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소설로 잘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한다. 미미 여사의 에도물도 꽤나 재밌었는데, 이 작가의 책도 그에 못지 않은 듯...앞으로 이 작가의 에도시대물은 다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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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여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멜론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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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내내 이 책이 몇 년도에 쓰여진 것인지가 궁금했다. 왠지 한참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우연한 여행자> 보다는 먼저 쓰여진게 아닐까 싶었는데, 맞는가는 모르겠다. 하여간< 우연한...>보다 세련된 된 점이나 유머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을 보면 분명 

그 전 작품이 맞지 싶다. 우연한 이후 작품에서 보여주는 낙관성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앤 타일러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작품마다 드러나는 요소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을 거슬리는 것은 구원신드롬이었다. 왜 앤 타일러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에 이다지도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아버지가 목사 였다고 들은것 같은데, 아마도 어린 시절 목사관에서 자란 영향일까? 그녀의 주인공들은 다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아니면 구원 당하는 사람들이다. 어렸을 적엔 그녀의 이런 작품관에 열광했었다.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면 하고 바랐었고,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밝아진다는 컨셉이 마음에 들었으며, 혼자 살수 없는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이끌어줄 존재를 간절히 갈망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 앤 타일러의 작품에 내가 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아마도 그건 앤 타일러 역시 마찬가지였는가 보다. 최근작< 노아의 나침반>을 보면 과감하게 자신을 구원해주겠다고 다가오는 젊은 여자를 뿌리치는 육순의 아저씨가 주인공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책이 작가의 초기작이 아닐까 짐작하는 것이다. 그녀가 아직 젊을때,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만적인 시선은 버리지 않았던 그런 시절의 글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젊은 시절 읽었다면 이 책도 반색을 하며 보았겠지만, 지금 보니 한심하단 생각밖엔 들지 않으니 말이다. 왜 작가는 이렇게 구원 신드롬에 잡혀 살았던 것일까?가 궁금했고, 왜 그렇게 착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것이 시대의 산물인지, 아니면 그녀가 이 글을 쓸때 젊었기에 가지는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분히 감상적으로 보였다. 왜냐고? 우리는 누구를 구원해줄 수 없으니까, 결국에는 말이다. 모든 관계를 냉정하고 냉혹하게 바라보는게 아니라, 그저 구원의 관점에서 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것이 주인공이다라는 설정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관점일까? 우리는 정신 병자들을 늘 그렇게 구원해줘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행복으로 끝나는 것이 가능할까? 맞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과연 그런 구원이 과연 마지막까지도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앤 타일러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이야기처럼 그저 그들이 헤어지지 않고 다시 살게 되는 것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이제 더 이상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던데, 과연 그렇게 될까? 문제가 많은 인간들을 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것이 단지 구원을 하겠다고 나선 당사자의 희생정신만으로 한방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것일까? 목소리는 작지만 비교적 패미니스트적인 톤으로 이야기하시던 작가라서 좀 의아했다. 이제와서 보니 그녀의 책은 모두 비슷하게 구원 스토리나 신델렐라 스토리라는걸 깨달아서 말이다. 그녀는 여자의 희생이 모든 것을 평정하게 하리라 믿었던것 같다. 그녀는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구원해줄 자만 나타난다면 모든게 다 정상이 될 거라고 믿은 것 같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정상이 아닐지라도 그래도 파국에는 이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흠...과연 그럴까? 거의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여지껏 그녀의 작품속에 들어있던 구원 스토리에 내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분했다. 나는 어디까지 어린아이였던 것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신델렐라를 믿는 그런 어린아이에 불과했던게 아니었는지 반성하면서 본 책이 되겠다.


이야기는 이렇다. 평생 부자로만 살아서 부족함 없이, 그리고 우아하게 평생을 살아온 에머슨 부인은 남편의 죽음으로 평정을 잃는다. 결국 평생을 보아오다 시피한 정원사를 해고한 뒤 우연히 만난 엘리자베스를 채용한다. 목사인 부모집을 떠나, 대학을 휴학하고 여기저기 떠돌던 엘리자베스는 의외로 집안 잡부일에 소질을 보인다. 남편이 죽은 뒤 허전해 하던 에머슨 부인은 그제서야 서서히 일상을 찾아 나가고, 엘리자베스는 그녀대로 잡부로써의 자긍심을 갖게 된다. 에머슨 부인이 낳은 일곱 자녀들은 다들 조금은 괴짜에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 중 의대생이던 티모시와 데이트를 하던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그의 형인 매튜와 친해지게 된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는걸 알게 된 티모시는 엘리자베스 앞에서 자살을 하고,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집으로 달아난다. 그런 사연을 알지 못했던 매튜는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애원을 해보지만, 돌아가지 않겠다는 엘리자베스의 결심을 확고하다. 결국 한없이 멀어진 두 사람은 몇 년이 흐른 뒤 에머슨 부인이 쓰어짐에 따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우선, 형제 둘과 같이 만난다는 설정이 기가 막힌다. 엘리자베스는 꼭 그래야만 했을까? 티모시가 자살한 것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형제 둘을 갖고 놀 꼴밖엔 안 되는 엘리자베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왜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수가 있나? 60년대의 모럴이 그랬었나? 형제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당사자에게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나? 난 남동생이 둘 있어서 그런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싸우다 , 동생이 자살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절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물론 자살이 그녀의 탓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상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만큼은 자신을 책해도 좋지 않을까? 더군다나 형제 사이에 양다리란... 그냥 양다리도 기분 나쁜 것이구만서도 말이다. 하여간 여러모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소설이었다. 마지막 역시 찜찜함으 남긴 채 끝이났고.물론 책에선 해피엔딩이었만서도, 그게 영 믿겨지지 않더란 말이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의문 부호가 여전히 남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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