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미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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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적으면서 " 대단한 " 이 어디에 걸리는 형용사일지 궁금해졌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이 대단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호주가 대단하다는 것일까. 실은 어디에 붙는다고 해도 그럴듯 하다.  호주 전역을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며 그 넓은 땅덩어리를 몸소 체험한 빌 브라이슨도 대단하고, 호주라는 대륙 자체도 그러하니 말이다. 호주, 간단히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는 않는 나라다. 정보가 많으면 파악하기가 쉽겠다 싶지만서도, 이상하게 호주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듣고, 영상을 보고, 체류자들의 경험담을 들어 보아도, 들으면 들을수록 헷갈리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 아마도 그곳이 다른 어느 곳보다 별스런 것들의 총집합이여서 그런게 아닐까? 모든 기괴한 것들이 위화감없이 어우러져 돌아가는 곳, 예외가 정상인 곳, 극단이 흔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곳, 천혜와 극한의 자연이 공존하는 곳, 분명 지구라는 별에 존재하는 나라임에도 어딘지 뚝 따로 떨여져 있는 듯한 고립감이 느껴지는 곳, 섬이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환경이 펼쳐지기에 당신이 어디에 떨어지느냐 따라 다른 버전의 설명이 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호주다. 그렇기에 우리가 호주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국인조차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하게 느낀다고 하니 말이다. 자,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빌 브라이슨이 있다. 다행히도 그는 오래전부터 호주라는 곳에 흥미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바리바리 싸들고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눈에 비친 호주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우리에게 호주의 참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일단 피상적이 아닌 호주, 신격화도 비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호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받아도 좋지 싶다. 더군다나 그가 누군가. 빌 브라이슨 아닌가. 현존 여행 작가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만큼 통찰력 있고 유머스럽게 여행기를 쓰는 사람도 드물다.--없다.라고 쓰고 싶었지만 내가 모든 여행 작가를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하여간 신나게 읽고 나면 적어도 어슴프레하게 호주라는 나라가 손에 잡히는 듯 느껴진다. 흥미로웠던 점은  빌 브라이슨이 말한 것이, 즉 이방인으로써 그가 고찰한 것들이 자국인인 피터 케리가 쓴 " 휴가지의 진실" 에서 호주를 설명하고 있는 것과 대충 비슷했다는 것이다. 자국인이건 이방인이건 --물론 한 사람은 부커상 수상 작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빌 브라이슨이지만서도, --둘이 공통된 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공통분모를 잘 들여다 보면 아마도 호주라는 나라의 실체에 어느정도 근접하게 되지 않을런지. 그렇다면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여행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 맛뵈기로 대강 살펴 보면 이렇다.


 빌 브라이슨이 호주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오래전 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관심을 갖게 되면 될수록 놀라운 정보들을 속속 접하게 된다. 수상이 바닷가 산책을 하다 실종이 되어도 조용한 나라, 우연히 점심을 먹으려 앉은 곳에서 수억만전의 개미의 시조를 만나게 되는 나라, 어느 섹션에 분류를 해야 할지를 두고 동물학자들이 치고받게 만드는 동물들이 지천에 널린 나라, 지나가다 우연히 금덩어리를 주을 수도 있는 나라, 원주민인 애버리버니를 개 취급하면서 학살했던 나라. 백호주의가 나쁘단건 알지만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선 그다지 미안해 하지 않는 나라, 악어나 해파리 독뱀 독거미등 해로운 동물들이 너무 많아서 오늘 하루 죽지 않고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를 해야 하는 나라, 그럼에도 그런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나라, 천국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못할 거라는 천혜의 경치와 더불어, 인간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극악의 자연환경도 함께 지니고 있는 나라. 세상에 이런 일이!  라며 입을 다물지 못할 만한 정보들 아닌가.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호주를 깡그리 잊고 살아간다는 점에 있다. 빌 브라이슨이 남반구의 그을린 대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호주에 신경을 쓰지 않더라는 점! 그것이 바로 잊혀진 대륙 호주로 빌 브라이슨이 날라간 이유다.


 하긴 호주와 빌 브라이슨 궁합이 맞긴 하다. 호기심많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며, 색다른 것에 궁극적으로 관심이 많은 그이니 말이다. 그런 그가 호주를 쏘삭대면서 발로 뛰어 다녀 만들어낸 결과이니, 뭐...재밌지 않다면 이상할 것이다. 어찌나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녔던지 자국인들 조차 어디라고요? 라고 말할 정도란다. 감히 이젠 호주인들이 그에게 여행 정보를 얻어야 할 참이다. 여행 작가로써 빌 브라이슨을 좋아하게 하는건 그렇게 발로 뛰어서 정보를 만들어내는 성실함도 그렇지만, 그외에도 자신의 시선에 독자를 동조하게 만드는 재능에도 있다. 무엇이건 간에, 그가 바라보고, 들르고, 만나고, 겪게 되는 일에 힘들이지 않고 독자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예를 들자면 , 그가 만족할 만한 호텔에 묵건, 아니면 형편없는 호텔에 묵건 내가 마치 그 호텔에 묵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고, 그가 감사하면 나도 감사하며, 그가 흥미진진해 하면 나 역시도 흥미진진해졌다. 체감 온도차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여행 작가로써 빌 브라이슨의 능력은 단연 최고라고 할 만하다. 하여간 호주를 전반적으로 알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이보다 심오할 수는 없게, 그리고 이보다 흥미진진할 수는 없게 호주를 풀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개인적으론 재미면에서 <발칙한 유럽 산책>이나 <나를 부르는 숲>에 미치지 못한게 아닐까 한다. 일단 덜 웃긴다. 빌 브라이슨의 괴짜 친구 카츠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못말리는 사고뭉탱이 친구가 아쉬운 이유다. 거기에 호주라는 나라 자체의 매력 역시 좀 떨어진다. 아무리 빌 브라이슨이라고 해도 없는 매력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 않는가. 최선보다 극악을 기억하고 환호하는 나라라니 인간성을 기대할 수도 없다. 휴가지로써는 최고일지 모르나, 그저 그게 다였다. 호주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가면 알수록 헷갈린다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더라. 신비감이 있는 호주가 훨씬 더 멋져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왜 아무도 호주에 관심을 안 갖는 거냐는 의문에서 시작된 여행은 어쩌면 그럴만 할지 모른다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조금 허무하다. 멋진 풍광이 넘쳐 나는 곳이었다고 하는데도 이런 결론이 내려져서 말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호주에 가게 된다면 이 책을 떠올리면서 아는 척을 하련다. 빌 브라이슨이 그러던데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날을 기대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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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6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사 2012-06-1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좋아할지 어떨지는 저도 읽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일단 찜~~!
 
박사가 사랑한 수식
코이즈미 타카시 감독, 후카츠 에리 (Eri Fukatsu)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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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길어지는 관계로 인상만 적기로 하겠다. 영화는 수학선생인 내가 아이들에게 내 별명인 루트를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미혼모였던 쿄코는 가정부만 9명을 갈아치운 수학박사님 댁으로 일하러 가게 된다.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듣는 박사님이었지만 교통 사고 후 기억이 거기에서 멈춰 버린, 무엇보다 일상의 기억이라곤 80분밖엔 저장 못하는 박사님을 위해 일하게 된 엄마는 우려와는 달리 박사님과 잘 지내게 된다. 같은 말을 만날때마다 물어보는 성가심에도 일일히 처음 대답하는 질문처럼 대꾸하던 엄마는 점차 박사님의 수제자가 되어 간다. 그녀에게 9살난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박사는 집으로 데려 오게 하고, 처음 나를 본 박사는 머리가 평평하다면서 나에게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결국 나에게 수학과 야구를 좋아하는 인생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데...


기억이 80분밖엔 지속되지 않은 박사님과 아들을 키우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미혼모, 그녀의 배려 깊은 아들이 펼쳐 나가던 이야기를 풀어내던 영화다. 정적인 일본 영화에 익숙하신 분이라도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속도감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으로, 그걸 감안하고 영화의 주제를 생각하면서 본다면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되실 수도 있겠다 싶다. 수학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도 좋았고, 상반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대비하게 해준 것도 흥미로웠지 싶다. 남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미혼모로써 살아가는 루트의 엄마와 우아하고 세련된 아우라를 지녔지만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낙태를 할 수밖엔 없었던 박사의 형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말이다. 여자로써, 과연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는데, 아마도 그건 본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일지도. 그래서인가, 쿄코의 아들을 보면서 쓸쓸히 뒷모습을 보이면서 걸어가던 형수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게 아마도 그녀의 결론이고 후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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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히 탐정이긴 하지만 사무소 장만할 돈을 마련하지 못한 나는 단골 술집 " 칼러 오하타"에 죽치고 앉아 고객들의 전화를 기다린다. 왜 영화 제목이 저 모양일까 궁금하셨던 분들을 위해 미리 언질을 준 것인데, 탐정 사무소를 술집으로 삼을 정도라면 이 사람이 대충 어떤 캐릭터인지 설명이 될 거 같아서 적기도 했다. 그렇다, 그는 미래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충대충 그날그날 되는데로 살아가는 인간의 표본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탐정으로써 꽤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자신이 탐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여자에게 관대하다는 점 정도. 한마디로 돈을 받은만큼은 떼먹지 않는 신사 탐정이라는 것이다. 해서 그가 해결하게 된 이 사건을 들여다 보자면, 삿뽀르 유흥가 스스키노 거리를 무대로 탐정 사업을 하고 있던 나는 어느날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 긴장하게 된다. 자신을 곤도 쿄쿄라고 밝힌 이 여성이 다짜고짜 자신이 시킨 일을 해달라고 부탁해 온 것이다. 왠지 불길하다고  속삭이는 탐정의 직감을 무시한 채, 쿄쿄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한 그는 그녀의 청에 응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젠 그 결과가 바로 다음날 그가 눈 속에  파묻히는 사건으로 연결이 되었다는 점.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쿄쿄에게 격렬하게 항의를 해보지만 의외로 그녀는 담담하다. 이에 본격적으로 분기탱천한 나는 그녀를 찾아 나서게 되고 놀랍게도 그녀가 1년전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놀라는 마음을 진정하고 사건을 캐던 나는 그녀가 살해 되었으며, 살해범 역시 살해되었고, 그녀의 죽음의 진실을 쫓던 쿄쿄의 아버지 역시 의문의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걸 알게 된다. 게다가 그가 사건을 파헤치면 파헤치려 할수록 그를 죽이려 하는 자들의 악랄함도 도를 넘어선다. 이쯤 되면 딱히 탐정이 아니라도 이 사건이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터, 다만 이제부터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해결해내야만 하는 일인가를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이에 다른건 몰라도 탐정으로써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나는 사건의 배후를 본격적으로 파보기로 하는데...


일명 뽀글이 파마라 불리는 요요이즈미 요와 그닥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미인으로 소문이 난 코유키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탐정물로, 그닥 기대를 하지 않고 본다면 의외로 재밌게 보실수 있을지도.별로 탐정다운 듬직한 자세는 하나도 구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임기응변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허허실실 탐정을 지켜 보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탐정의 조수로 나오는 타카타가 마츠다 류헤이 라는걸 보면서도 몰랐으니, 역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신들을 깜쪽같이 속이는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가 보다. 연작으로 나와줘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원작이 12부작으로 이미 나와 있다고 하니 기대해볼만한 일이지 싶다. 적어도 소재 면에서는 달릴 일이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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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는 고양이다 (1disc)
이누도 잇신 감독, 우에노 주리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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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순정 만화가 아사코는 13년째 키워온 고양이 사바가 조용히 눈을 감자 실의에 빠진다. 그녀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일만 하면서 살아왔음에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사바 덕분이었다. 새끼 고양이였던 사바를 우연히 거두게 된 아사코는 당시만해도 사바가 자신에게 그렇게 커다란 기쁨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사바가 자신에게 준 사랑과 추억을 되새기면서 우울에 빠진 아사코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 기력마저 잃고 만다. 그런 아사코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어시스턴드들, 하지만 그녀들에게 딱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용기를 낸 아사코는 동네의 팻 샵에서 딱 맘에 드는 새끼 고양이를 데려온다. 이름을 구구라고 짓고 다시 한번 고양이 엄마에 도전한 아사코는 점차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간다. 왜 이름이 구구냐는 어시스턴드들의 질문에 한번 맞혀봐~~! 라고 미소 짓던 아사코는 구구가 어느날 집을 나가자 얼굴이 사색이 된다. 구구를 찾아 공원으로 간 아사코는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대는 연하의 세이지를 만나게 된다. 세이지 덕분에 구구를 찾게 된 아사코는 오랜만에 자신이 설렌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런 아사코를 지켜보던 어시스턴드들은 이참에 " 아사코 미혼 탈출 작전" 에 나서기로 한다. 세이지와 아사코를 이어 주려는 어시스턴드들의  어설픈 노력이 얼추 결실을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되던 어느날, 새로운 작품을 위해 사전 조사를 하던 아사코 일행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는데...


 도쿄의 작은 마을 키치조지를 배경으로 천재 만화가와 그녀의 정많은 어시스턴드들, 그리고 고양이들이 만들어 내는 한가로운 일상들을 그림같은 화면으로 그려낸 영화다. 일본영화다운 정적인 프레임에 익숙하지 않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지도, 하지만  매 장면이 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은 인상적이었다.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기대 사는 모습이나, 능력있는 어른에 중년의 나이가 되어감에도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소녀처럼 서툴기만 한 만화가, 그런 그녀를 다사롭게 바라보던 연하남, 천방지축 어시스턴드들의 사연들이 극적이지 않은 연출로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순정만화가 원작이라고 하던데, 딱 순정 만화를 영상으로 옮긴 듯한 영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집에 남자를 들여온 아사코를 구구가 꼬리를 탁탁 치면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장면을 생각해내고 찍었을지 신기했다. 고양이를 자세히 옆에서 관찰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장면이지 않을까 한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 보심도. 나오는 배우들이 다들 깜찍하지만, 그래도 제일 압권은 역시 고양이 구구다. 아사코가 그 아이의 이름을 구구로 지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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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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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없는 사회라는 제목에서 내가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신 없이도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내진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그다지 믿을 필요가 없다는 논증을 나는 기대한 것일까? 몇년전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책인 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 진 신>과 같은 맥락에서,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며, 신을 믿지 않은 인간은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명제에 맞서 통쾌하게 종교인들을 까발리는 그런 책이길 바라는 것이었을까? 솔직히 <만들어진 신>의 기본 골자에 대해선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어조가 꽤나 거만하다고 느껴진 관계로 나는 너보다 똑똑하다는 전제에서 말하는 사람 아닌, 차분한 어조로 거부감없이 무신론을 설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길 기대한 듯하다. 적어도 난 그걸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용을 알고 보니...


그저 광신없이 살아가는 사회도 멀쩡하다는, 오히려 열렬히 종교를 지향하는 사회보다 건전하더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 교수가 1년간 살았던 덴마크와 스웨덴이 행복한 나라고, 종교를 그다지 신봉하지 않음에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시민 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회라는건 알겠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단지" 종교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거 좀 비약 아니야?  전체를 설명하면서 조그만 일부분으로 전체를 다 조망한 것인양 부풀린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모략모략 머리에서 피어 올랐다.


일단 스웨덴과 덴마크가 다른 나라들보다 행복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게 단지 무신론의 영향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본다. 일단 그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잘 산다. 교육 수준이 높을 수도 있고, 비이성적인 논리를 배격하는 감각이 다른 나라보다 발달한 나라일 수도 있다. 인구밀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낮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자아존중감이 특별하게 높은 나라일 수도 있고, 각자가 중요하다는 관념을 어린 시절부터 뼈에 새기면서 성장시키는 그런 나라여서 그럴 수도 있다. 불행이 들불처럼 번지는 곳에 종교가 성하다는걸 감안해보면, 어쩌면 원인과 결과가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어서 행복한게 아니고 말이다.


인간에게 신이 왜 필요한지 그걸 알아낸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그보단 복잡하다고 하는게 맞는 말이겠지. 인간의 심리나 역사, 근본, 문화에 위치한 것이라서, 단지 필요하다 아니다란 논리론 설명이 불충분할 거란 뜻이다. 나야 물론 종교를 필요악이나 귀찮은 것 정도로 여겨, 때론 그것의 성가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싶을때가 많지만서도, 적어도 난 종교를 근절시킬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만약 내가 종교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모든 이들에게 종교를 믿지 못하게 말리고 다닌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독재이자 강압일 것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마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길거리에서 나를 붙잡고 설교를 늘어놓는 기독교 인들처럼 말이다.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남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바보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는 다를바가 없다. 그래서 내가 종교인들을 붙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일랑은 믿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생각과 감정이란게 있고, 그게 옳다 그르다 할 권리는 내게 없다. 남들이 내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어떤 심리학 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선교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면 수긍이 되더라. 자신이 너무우울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에겐 동지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보다 더 우울하고 불행하며 행복할 기미가 없는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 그래, 나보다 더 정신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그들이 내 소매를 붙들고, 왜 하나님을 믿지 않냐고 따지는 것에 대해 조금 아량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종교를 믿으라는게 아니라, 왜 너만 행복하냐는 것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붙잡아서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게 어쩌면 그들의 숨은 의도일지도...  그렇게, 종교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많은 다른 양상들을 지녔다. 종교가 생겨난 것도, 그리고 그렇게 많은 비리와 위선의 온상이 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도, 실은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종교가 인간 사회의 다른 반영이라는 점에 있는게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종교는 인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은 어떤 거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습을 비스듬하게 투영하고 있는...


모르겠다. 사회가 지금보다 보다 진일보하고 이성적이 되며,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화 된다면 우리에겐 신이 필요없게 될지도. 그러나, 인간이 그렇지 못하다는걸 아는 지금, 단지 신이 없는 사회가 신이 있는 사회보다 더 낫다는 말은 단순한 비약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통찰력에서 내린 결론이 아닌. 해서 역시 심도 있는 분석이었어, 내진 그래, 바로 그거야를 외치면서 동조하고 팠던 이 책은, 뭐야 시시하게...를 외치면서 덮을 수밖엔 없었다.  그래, 우리 나라도 이렇게 건전하고 올바르며 윤리적이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게 신이 없음을 전제로 해서 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을 열심이 믿는다고 해서 그렇게 될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고. 우리가 열렬히 바란다면, 그런 사회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쓴다면 언젠가는 미래에 어느날에 우리 후손에게 그런 사회를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그건 신이 있다 없다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신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일지도. 우리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는,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종교가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 어쩌면 신에게 매달리는 사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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