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의 문제
하워드 제이콥슨 지음, 윤정숙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부커상 수상작이 아니라면 결코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부커상인데...' 를  되뇌이면서 내려놓고 싶어하는 나를 얼러가며 읽어낸 책이니 말이다. 그렇게 갖고 있는 인내심을 몽땅 내걸고 끝까지 읽어낸 소감은? 앞으론 부커상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 정도? 아무리 부커상 수상작이라고 해도 모든 책이 다 살만 루시디의 < 한 밤의 아이들>이나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아이리스 머독이 <바다여 바다여>로 상을 타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작으로 손꼽을만한 작품은 아니다. 상이 작품성까지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말씀. 물론 대개의 경우엔 그렇기도 하기에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이겠지만서도... 하여간 이 책은 한국인인 나에겐 별로였다. 내가 영국인이었다면 달랐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유대인이었다면 더욱 더 다르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줄기차게 유대인과 비유대인인에 대한 지루한 넋두리를 늘어놓는 책이니 말이다. 언젠가 일본 작가가 자신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 자민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거의 취미로 삼고 ' 일본인론'을 다룬 책이 언제나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는 자의식의 왕국 " 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여~~~ 기뻐하시라. 당신들에게 감히 대적할만한 상대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이다. 어찌나 자신들에게 관심이 많고, 수많은 사람들의 엇갈린 평가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던지...끝내 질리고 말았다. 유대인이라는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고, 그렇게 관심을 많이 받아야 하고, 왜 그렇게 갖가지 분석의 틀을 들이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만약 내가 유대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서도, 전혀 나와 상관도 없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끝도 한도 없이 읽으려니, 그만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딱히 켕기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어쩌란 말이냐. 난 유대인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데...진짜 부커상만 아니었다면 그쯤해서 포기하고 말았을 거다. 다 그 놈의 왠수같은 부커상 때문에...


언제나 말이지.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호감을 주기란 어렵다. 그래, 정 내게 그렇게 네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이란 생각으로 약간의 아량과 드넓은 인내심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상대가 그걸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생각한거지. 결국 그 이야기는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진다. 어디서 끊어줘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그러다 보면 한 두 문장 정도는 괜찮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착한 마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데, 결정적으로 이건 어째 이야기 자체도 재미가 없는거다. 그러게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을 물렁하게 보면 큰일난다. 그들이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경우는 드무니 말이다. 어쩜 없는지도 모른다. 가끔 가다 쓸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재밌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것들을 알려 주는 지표니 말이다.


하여간 결론만 말하면 이 책 지루했다. 그나마 교훈이라도 얻을까 해서 끝까지 읽어봤지만 그냥 지루했을 뿐이다. 여자를 밝히는 세 남자가 등장한다. 90평생 한 여자만 사랑한 전직 언론인 리보르, 성공한 대중 철학자이자 유대인 바람둥이인 샘 핑클러,미남임에도 여자와 관련된 문제엔 늘 마가 끼는 줄리언, 그렇게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리보르의 제자로 동창생인 샘과 줄리언은 친구지만 각기 다른 인생 역정을 거치면서 점차 서로에게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거침없이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공허밖엔 남은게 없는 샘, 그런 샘을 사사건건 질투하다 그의 아내와 바람이 난 줄리언, 연예인 기자를 하면서 수많은 여자들을 거쳤지만 일평생 아내만을 진심으로 사랑한 리보르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자 상실감에 어쩔 줄 몰라한다. 결국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여자 없는 공백기를 맞게 된 셋은 자신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자신들이 삶을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잘못 됐다면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게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그런 기회와 용기는 어디서 찾아지게 되는 것일까? 다만 문제는 그들이 인생을 되돌리기엔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는 것. 어디에서도 위안거릴 찾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의 방황은 계속되는데...


중년을 넘어선 세 남자의 일상이 넋두리와 함께 끊임없이 늘어지던 소설이다. 주인공 세 남자가 다들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는데서 일단 소설이 재미없다. 뭐, 어떻게 보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도 가감하지 않은 실제적인 영국 남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서도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놈의 삶은 얼마나 재미없는 것이냐.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로 끔찍하진 않던데... 그렇게들 무책임하지도 않았고, 이렇게 지루하게 주절대지도 않았으며,여자들에게 줄기차게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그래도 나름 재미를 추구하면서 살더라.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재밌었다. 이렇게 끔찍하게 지루하지 않았단 뜻이다.


어떻게 소설속 주인공들이 내 주변 평범한 사람들보다 흥미가 없을 수가 있을까? 그게 우선 제일 의아하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거기에 성공한 샘을 둘러싼 줄리언의 질투가 늘어지면서, 그가 유대인이여서 행복한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줄리언의 끊임없는 헛소리를 듣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도무지 그게 행복이랑 무슨 관계가 있느냐 싶어서다. 그냥 인간이면 되잖아. 네가 불행한건 네가 유대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즉 좀 특이한 민족의 구성원이 못되서가 아니라--그저 네가 쭉정이 같은 찌질한 인간이여서 그렇다는걸 인정한다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유대인을 동경하면서, 유대인들이 정작 자신의 민족을 갈구는 것을 경악스런 눈으로 바라보면서, 유대인이 되면 어떻게 행복해지지 않을까 궁리를 하는 것보단 훨씬 더 생산적일 것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결국 이 책은 영국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영국인이자 유대인이자, 그리고 왠지 늘 자신은 소외받고 피해를 당하는 주변인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같은 국적을 가지고 같은 언어를 쓰고는 있지만 늘 어딘지 소속되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에게. 다시 말해 이 책의 제목은 전적으로 틀린게 아니다. 영국 남자들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니까. 이를 뒤집어 해석해보면 한국 여자에겐 별로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 된다. 그래도 영국 남자들의 문제들을 들여다 보면 남자들에 대한 보편적인 어떤 통찰력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서도, 아쉽게도 그런건 없더라. 그저 주구장천 영국 남자들의 문제만 있었다고 보심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의문을 표하심 안 된다. 그럭저럭 잘 쓴 책이긴 했다. 무리없이 유려하게 잘 써내려간 책이긴 하다. 다만 불만이라면 치명적이게도 매력이 없다는 것이지. 잘 쓴 책이라면 매력 정도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들어도 되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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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8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사 2012-06-28 18:09   좋아요 0 | URL
진짜로 더 멋있는 영국 남자들도 많은데 가장 먼저 생각나는건 휴 그랜트긴 하네요.
워낙 유명하셨잖아요. 매력적이기도 하고...언젠가 오프라 쇼에 나온걸 본 적이 있는데, 의외였어요.
그런 비주얼에 꽤나 냉소적이고 삐딱한 유머를 거침없이 날려 대서요. 생각지 못한 매력을 가진 배우더군요. 그렇다고 사귀라면 손을 내저을 테지만서도요. 아무리 매력이 넘쳐도 바람둥인 별로더라구요.

바다는...뭐,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것보단 "그물을 헤치고" 를 더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도 만만찮은 책이긴 하죠. 제 블러그를 찾아보심 두 권의 리뷰가 있을 거여요. 머독이 진짜 글을 잘 쓰긴 하지만 그래도 뭐랄까. 사랑스러움은 별로 없죠. ㅋㅋㅋ 이런 말을 하다니. 머독이 들었다면 경을 치시겠네요.
하여간 전 머독보단 살만 루시디를 더 좋아해요. 물론 그것도 과거의 루시디를 말하는 것이지만서도요.
루시디도 예전만 못하더라구요. 뭐, 아직 돌아가신건 아니니 앞으로도 희망은 버리고 있진 않치만서도, 어쨌거나 실망스러워요. 좋은 작품 쓰시길 바랐는데. 본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가 꽤나 트라우마가 되긴 한 모양...
 

약혼자 이네즈와 함께 파리에 놀러온 길. 소설가인 길은 파리의 모든 것에 흠뻑 빠지고 만다. 여기서 글을 쓰면 잘 써질 것 같다면서 아예 이사 오자고 조르는 길, 하지만 파리가 그저 예쁜 관광지일뿐인 이네즈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자신이 너무 늦게 태어 났다면서 파리의 20년대를 동경해 마지 않는 길, 아부도 할 줄 모르고 미래도 불투명한데다 이단아 분위기를 팍팍 풍겨대는 길을 이네즈의 부모는 탐탁치 않아 한다.우연히 이네즈의 친구인 폴 부부와 조우하게 된 길은 자신이 박학다식하다는걸 기회가 있을때마다 선전하는 폴이 못마땅하다. 거기에 더 맘에 안 드는 것은 밉살맞은 폴의 말을 교주의 그것처럼 떠받드는 자신의 약혼녀. 결국 일행과 떨어져 홀로 파리의 밤 거리를 산책하게 된 그는 길을 잃고 헤매기에 이른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그 앞에 멋진 푸조차가 서더니 타라고 손짓을 한다. 얼떨결에 차에 오르게 된 길은 자신을 태운 부부가 본인들을 피츠제랄드 라고 소개하자 어안이 벙벙해진다. 하지만 그 피츠제랄드가 까페에 죽치고 있던 헤밍웨이마저 소개하자 그는 흥분에 몸을 부르르 떠는데...


존경하는 헤밍웨이를 만난 길은 그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고 평가해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단호하고 박력있게 거절하는 헤밍웨이. 자신은 남의 책을 제대로 평가할만큼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면서 거트루드 스타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이에 뛸 듯이 기뻐진 길은 원고를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까페를 나온다. 나오고서야 약속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까페로 들어가려한 한 길은 자신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그는 헤밍웨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다음 날 비정상적으로 들뜬 길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네즈를 남겨두고, 그는 다시 20년대의 파리에 도착한다. 드디어 그 위대한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나게 된 길은 그녀가 자신의 원고를 봐준다는 말에 신이 난다. 거기에 그녀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내가 피카소라니...피카소의 그림을 둘러싸고 비평을 해대던 거트루드는 길에게 피카소의 애인인 아드리아나를 소개한다. 그녀의 신비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왜 많은 화가들이 그녀를 그리고 싶어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아드리아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길은 자신이 그녀에게 끌린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데...


 밤이 되면 20년대로 가는 차를 탈 수 있는 파리라. 환상적인 발상이다.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일지 이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단지 우리가 파리의 20년대를 동경해 보거나, 그 시대를 재현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시대를 방문해 그들을 만나본다는 설정이니 말이다. 단지 설정 하나만으로 그 시대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해서 밤이면 밤마다 새앙쥐가 창고에 숨겨둔 치즈 먹으러 달려가 듯,  그렇게 길이 파리 밤 거리로 나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거부하기 힘든 유혹 아니겠는가. 아니, 거부하면 안 되는 유혹이던가. 하여간 20년대, 당시는 몰랐겠지만 지금은 전설로 남은 사람들이 다 파리에 모여 있었다. 피츠제랄드 부부, 헤밍웨이,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 달리, 맨 레이, T.S. 엘리어트 ...이름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이다. 그때 파리는 그들이 막 자신들의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을때 서로를 지탱해주던 장소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서도, 당시 파리엔 그런 에너지가 충만했었다. 그리고 후에 그 에너지가 사방팔방으로 싹을 튀워 나가 거대한 문학과 예술의 사조가 되었지만서도. 그런 면에서 소설가를 지망하는 길이 그 시대를 갈망하고, 동경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파리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국적도 쓰는 언어도 달랐던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 그리고 전설로만 남은 그들의 애정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기타등등...  가장 흥미로운 시대, 파고 또 파도 여전히 호기심이 가시지 않은 시대, 해서 길은 기꺼이 그 시대로 낭만적인 밤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과연 거기서 그는 무엇을 얻게 될까?


파리의 까페, 비오는 거리, 낙조, 매혹적인 밤 거리 등을 아무말 없이 보여주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이렇게 파리가 아름답구나, 라는걸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이 말이다. 하지만 파리에 대한 예찬이 거기서 멈출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오히려 전희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그 이후로도 감독은 주구장천 파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낭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보여주니 말이다. 일단 감독은 모네와 베르사이유 궁전과 예술품들을 보여주면서 파리의 예술성에 감탄하게 하더니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파리가 가장 화려했다고 여겨지는 20년대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정도되면 파리를 사랑하고 경외하지 않게 되기라 어렵다. 아니, 그보단 왜 사람들이 파리 파리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 해서 파리의 모든 매력들을 영화 하나를 보면서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장점이다. 거기에 배우들의 매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는데, 미래의 장인을 앞에 두고 공화당 우익(장인의 정치성향)들을 치매 광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길 역의 오웬 윌슨은 삐딱하지만 사랑스러운 소설가의 모습을 깜찍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거기에 정말 그럴 듯하게 헤밍웨이를 연기하던  코리 스톨은 설득력에 부족함이 없었다. 늙은 헤밍웨이만 봐서 진짜 젊은 시절의 헤밍웨이가 그랬을까는 모르겠지만서도, 진짜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 말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을 연기한 캐시 베이츠야 뭐, 말해봤자 입만 아픈 배우고, 달리는 연기한 애드리언 브로디나 아드리아나를 연기한 마리옹 꼬티아르 역시 제 역활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다들 모이니 매혹적인 20년대를 그려내기에 부족함이 없더라. 한없이 낭만적이여 보이는 그 시대를 말이다. 덤이라면  감독이 그 시대를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한다는 것이겠지. 우린 그 당시를 낭만적이고, 좋았던 시대로 여기지만서도, 실은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아마도 그게 세상사인 것 같다고 우디는 넌지시 일러준다.

감독이 우디 앨런이다. 그런데 그도 늙으셨는지, 누가 미리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디의 작품인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여겨지는 날카로움이 사라져서 말이다. 다른 감독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었지 싶다. 그렇게 별로 우디의 색깔이 진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서도, 그래도 잘 만든 영화긴 했다. 단지 중반을 넘어서 살짝 힘을 잃어간다는 것과 파리의 낭만을 지나치게 미화한 점, 전설적인 소설가와 화가들을  주마등 스치듯 보여주기만 한다는 점이 별로였다. 하긴 그 모든 사람이 한편의 영화에 출연하는데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다는건 무리겠지. 그런 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이끌어 내고 상황을 이어나갔다는 자체가 앨런이 대단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는게 아닐까 한다.

우디 앨런. 아마 그도 죽고 나면 헤밍웨이나 달리처럼 전설로 남게 될 것이다. 후대인들은 전설이 된 그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말 대단한 감독이었다고.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 라고. 그를 더 잘 알지 못해서 안타깝다고...이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우디는 말한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지나고 나서 전설이 될지 모르지만서도, 당시 그들은 그걸 몰랐다고. 그저 삶을 살아내고 있었을 뿐.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만의 삶을 살아내고, 전설을 만들어 내라고, 전설과 낭만은 결코 멈추지 않은 시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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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을 따라 훗카이도 츠카우라로 내려온 리에는 도야코 호수 근처에 까페를 연다. 까페 이름을 <마니 까페>라 지은 부부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일상을 묵묵히 일궈 나간다.  그런 그들에게 까페에 온 손님들은 소중한 이웃이 되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욕심없어 보이는 부부와 손님들 사이의 소통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주면서 삶의 평온함을 일깨워 주고 있던 영화다.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남편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빵을 만드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하고 싶다는 부부의 바람은 일단 시작부터가 순조롭다. 2층에 손님이 묵을 방까지 마련한 그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미리 척척 만들어 주는 눈치의 달인 유리 공예가 요코씨, 리에를 볼때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를 연발하는 우체부 총각, 매일같이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아베씨, 그외 세상에서 가장 먹음직스런 야채를 길러내는 농부 부부등 리에와 미즈시마 부부의 일상은 친숙한 사람들이 늘어남과 함께 풍성함으로 채워진다. 한적한 시골 호수 옆,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있는지조차 알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그럼에도 부부의 까페 손님은 끊이질 않는다.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수다스럽지 않은 부부는 그럼에도 자신의 까페를 찾아온 손님들의 사연에 예기치 않게 끼여들게 된다. 남자에게 차인 뒤 까페에 놀러와서는 땡깡을 부리는 도시 아가씨,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 하는 소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살하기 위해 신혼여행지로 찾아온 노부부등 손님들의 사연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불행하다는 것과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다는 공통점을 가진 그들은 "마니 까페" 의 부부가 내놓은 빵과 음식을 먹으면서 점차 안식을 찾아간다. 늘 남을 배려하는 착한 성품에 부족할게 없어 보이는  삶임에도 종종 까닭없이 우울함에 젖던 리에는 드디어 자신의 행복의 열쇠를 찾아내게 되는데...


맨처음 일본 문화를 접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착한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일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 진짜 착하다. 착한걸 좋아한다. 심지어는 착한 것에 맹목적이다. 그게 나쁘냐고? 그럴리가. 착한게 싫을리는 없지 않는가. 오히려 착함에 극한에 가까운 신 경지를 개척하는 그들을 볼때면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게 종종 지나쳐서 진심이라기 보단 가식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좋은 인간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메뉴얼에 따라서 말이다. 자신의 본 마음을 표현하기 보단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고, 또 그렇게 착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어쩜 일본 사회의 아킬레스 건이 되는게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경증적인 사회의 전형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폭발하면 어떻게 될거라 생각되시는가? 집단 광기로 이어진다. 아마 기회만 주어진다면 착한 것의 정반대로 순식간에 달려갈 것이다.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건강하지 않은 사회, 비밀이 많은 사회. 언제 위선의 가면이 벗겨질지 모르는 사회, 이 영화는 그러한 일본사회의 단면을 살짝 들여다 보게 하고 있었다.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물론 나로 하여금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한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잘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게 꼼수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영화를 만들다니, 그건 그만큼 이 영화에 머리를 쓰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감성에는 충실했을지 모르나, 지적으로는 어찌나 게으르던지, 온갖 클리쉐들이 부끄러운줄 모르고 뻔뻔하게 총출동하더라. 오죽하면 나중엔 화면을 향해 팝콘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작작들 좀 하라고. 이 정도면 말이지, 배경으로 나온 자연에 미안한거다. 안구가 절로 정화되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면서 역겹다는 생각을 하는게 쉬운건 아니니 말이다. 하여간 인간이 문제라니까. 그렇게 간만에 맘에 안 든 영화를 보면서 그 이유를 대충 적어 보자면 이렇다.


일단 클리쉐 투성이다. 동경에서 놀러온 도시 여자는 오자마자 자신이 남자에게 차였다면서 동네방네 떠들어 댄다. 그렇게 시건방을 떠는 여자와 시골 총각은 하루만에 사랑에 빠진다. 귀가 밝다고만 이유를 밝힌 유리 공예가는 사람들이 무언가 필요하다고 말할때마다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준다. 초능력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은 능력이다. 아이들을 줄줄이 낳는 농부 부부는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농부는 아마도 얼굴을 찌프리고 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커다란 트렁크를 가지고 다니던 미스테리 아저씨는 결정적인 순간 트렁크를 열고는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이보다 뜨악할 수 없겠다 싶은데도, 뉘앙스를 보니 다들 자랑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정말 함께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떠나버린 엄마를 그리워 하는 소녀는 리에가 만들어준 호박 수프를 안 먹겠다고 선언한다. 어찌나 연기가 서툴던지, 목석이 연기하는 듯하다. 그래도 뭐, 죽음을 목전에 앞둔 노부인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찌그러져 있던 할머니가 빵을 먹자마자 맛있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어찌나 유치하던지 소름이 돋았다. 내 말하는데 할머니의 소름돋는 연기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잔상이 남을까 싶어 머리까지 흔들었다니까. 트라우마가 되면 곤란하니 말이다. 거기에 왜 할머니가 소녀처럼 행동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복하는게 더 보기 좋은게 아닐까? 왜 할머니가 소녀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스테리 중 하나였다.


아마도 영화를 그렇게 찍을 수밖엔 없었던 것은 감독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예쁘장하고 눈살 찌프릴 일 없으며 마냥 행복해 보이는 유토피아 같은 삶 말이다.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영화가 주장하는 대로 행복하기만 할 것인지,내진 과연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이 정상적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비약을 하자면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에 버금가는 인공적인 사회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별게 아닌 것을 대단히 소중한 것인양 말하는 일본인들의 호들갑 역시 점수를 깍아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들 그렇게 난리를 펴대던지, 역시 난 무뚝뚝해 보여도 대소사 구분은 할 줄 아는 한국인이 더 맘에 든다.


하여간 이 영화는 영화라기 보다는 한편의 긴 관광지 홍보용 광고나 뮤직 비디오 같았다. 맛있어서 오이씨를 외치는게 아니라, 오이씨를 멋지게 외치기 위해 먹는 듯한 장면들에선 과장된 연기에 짜증이 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바삭 소리가 나게 찢는 장면들도 자꾸 반복되니 싫증이 나더라.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하게 셋팅되어 나온 요리들은 화보집으로 직행해야 할 듯하고, 부부는 하루종일 노동을 하는데도 아무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다, 까페는 늘 깔끔을 넘어 정갈하고, 머리를 자르는데도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무엇을 주문하건" 네, 분부대로 합지요" 라고 대답하는 남편에, 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친절한 이웃들, 멋진 풍경에 맛있는 음식,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폼만 잔뜩 잡고 있는 영화였지 않는가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막 대하고, 그럼에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한결같이 잘 한다는 설정을 보아하니, 분명 감독이 여자이지 싶다. 나도 여성이지만 말이지, 언제나 남자들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살아도 된다고 믿는 여자들을 보면 당혹스럽다니까. 좀 성숙해도 되지 않나? 알고보면 그게 보기도 좋고 마음도 편한데 말이다. 하여간 이래저래 마음이 들지 않던 영화, 오랜만에 입 맛을 버리게 해준 영화였다. 보실지 마실지는 알아서들 챙기시길. 그런데 나 왜 이 리뷰를 이렇게 길게 쓴거야? 꽤나 열받긴 한 모양이구만...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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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사 2012-06-27 13:59   좋아요 0 | URL
음.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은 저도 읽었어요. 저도 꽤 좋게 본 기억이 있네요. 나중에 에릭 오르세나의 작품들을 다 찾아 읽었을 정도로요. 그런데 이 작품때문인지, 다른 작품때문이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나네요. 하여간 본지 오래되서 내용은 가물가물 하지만서도 말여요. 그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지해서 말해보자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보심 되요.
비슷하지도 않다는...특이한 군상도 없고, 새로운 이야기도 없어요. 섬 사람들 이야기도 아니고, 아마 섬이 아닐걸요? 훗카이도가 섬인가요? 하하하...그건 저도 일본은 잘 몰라서리... 하여간 닮은 점 없다는...그렇게 믿으심 될 거여요.

이네사 2012-06-27 14:03   좋아요 0 | URL
책을 찾아보니 <식민지 전시회>였네요. 이 작품을 보고 에릭 오르세나에게 반했었어요.
거기에선가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책이 800페이지 정도 넘어가야 이건 좀 읽을만하겠군, 이라고 콘라드가 말했다고 한 거였을거여요. 대충 그 비슷한 말이었는데,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요.
 
오늘의 네코무라 씨 넷
호시 요리코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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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고양이 가정부 네코무라를 만났을 때, 비록 내가 인간이긴 하지만 그녀가 부러웠다. 물론 실제로 그런 고양이 가정부가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왜냐면 난 여자지만 대체로 가사에 재능이 없다. 재능만 없나. 관심도 흥미도 그닥 없다. 빨래 하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청소를 하는 것도, 그저 마지 못해서 하는 정도지 마음이 내켜서 한다는건 상상도 못한다. 그러니까, 내게 가사일이란 그저 마지못해 해야 하는 지겹고 짜증나는 지루한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 무라씨를 보소.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도련님을 만나기 위해 일을 하고는 있다지만서도, 일을 해도 너무 잘 한다. 진짜 자기 가족보다 더 공을 들여서 집을 돌보고, 음식을 하고, 가족들을 챙기고, 그걸 전혀 힘들어 하지도, 귀찮아 하지도 하지 않는 고양이 무라씨를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 내가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네코무라씨를 직접 우리 집에 영입하고 싶었을까. 그녀 같은 가정부만 있다면 세상 살 맛 날 것 같았다. 그녀가 가사일을 그렇게도 좋아하니, 시켜 먹는 입장에서도 미안할 거 없고 . 오히려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데도 알아주지 않는 현재 이누가미 가족들 보다, 그녀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주인이 될터이니 네코양에게도 윈윈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다. 부질없음을 안다고 해도 잠시 흐믓해 지는 기분 억누를 수 없어 헤헤거리면서 말이다.


물론 고양이가 아닌 진짜 그녀 같은 가정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만약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면 그는 로봇이거나, 정상이 아닌 사람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뭐, 만화를 보면서 정상 운운 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서도, 아니, 고양이 가정부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이야기 하면서 정상 운운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한다. 하여간, 그런 가정부는 없다. 실제로 인간으로써 그녀 같은 가정부가 있다는게 바람직한 것인지도 의문이긴 하다. 자신이 노예인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노예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런 사람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은, 그녀가 가진 순진한 매력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영악함이 없는 그녀는 묘하게 통찰력이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순진무구하달 정도로 천진하다. 그녀의 천진함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걸 지켜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고 있었는데...문제는 그게 4편으로 이어지면서 이젠 슬슬 지겨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같은 이야기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누가미 가족은 여전히 콩가루 가족을 표방하고 있고, 네코무라씨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도련님은 어디고 사라졌는지 여전히 알길이 없다. 주변으로 이야기가 뻗어가나 싶은 순간에도 작가가 말하는 것은 1편에서, 2편에서, 그리고 3편에서 줄곧 되풀이하고 있는 이야기의 변주거나 그 자체일 뿐이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순진한 캐릭터의 힘에 기대 3편까지는 그럭저럭 버텼다고 보지만서도, 4편 정도 되니 이젠 한계다. 식상하다. 이야기가 재미 없어지다보니 그림 마저도 형편없이 느껴진다. 예전에도 이렇게 설렁설렁 성의없이 그렸던가? 못 그려도 너무 못 그렸다. 라는 반발심까지 생긴다. 여지껏은 그래도 그림이 나쁘다는 말은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네코무라씨, 어쩌다가 이 지경에 까지 오게 된 것인가요? 당신은 정녕 이누가미 집안에 너무 오래 있었던게 아닐까요. 다들 제 정신 차리고 살 생각이 없는 집안에 말입니다.보다 흥미롭고, 재치있으며, 정상적인 캐릭터가 많은 집안으로 이직을 하는건 어떨까요? 권유하고 싶구만요. 지금의 집에 오래 있으면 있을 수록 어째, 그닥 재밌는 이야기가 더 나오긴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네코무라씨, 인간 사회에선 줄을 잘 서야 한답니다. 어쩜 당신은 줄곧 줄을 잘못 서고 있는지도 모르겟어요. 이 참에 작가를 졸라서 보다 나은 집으로 이직을 시켜 달라고 졸라 보시길. 그렇담 제가 다시 한번 희망을 갖고 당신을 찾아 볼테니 말여요. 이상, 당신의 가사일 재능이 그렇게 썩여 가는 것이 몹시 안타까운 독자였습니다.정 갈 곳이 없으시다면 우리집으로 오심도 환영합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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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을 감은 인간 - 상대의 양면성을 꿰뚫어 보는 힘
리사 맥클라우드 지음, 조연수 옮김 / 토네이도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은 간사하다.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때조차 인간은 그렇다. 단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뿐. 아니면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그렇단 증거를 대보라고 ? 뭐, 멀리 갈것 까지도 없다. 그냥 우리들이 인간관계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에게 잘 하는 사람들은 다 착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불친절하고 무시하며 경멸하는 사람은 못되고, 인간성이 글러 먹었으며, 앞으로 인생에서 좋을게 없을 거라고 미리 단정짓는다. 만약 그들이 그런 불친절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기 시작하면 , 그가 인간 말종이 되는건 시간 문제다. 마음 먹기 달린 것이 아니고. 만약 이런 평가가 한 인간에게 쭉 몰려 있다고 한다면 뭐, 일관성 있는 판단이니 그럴 수 있다고 하겠다. 문젠 종종 우리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관계 속에 내던져진다는 것에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철천지원수가 될 수도 있고, 어젠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어제 우린 그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그런 관계를 맺지조차 않았을테니 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를 가리켜 성격이 삐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곧장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걸어보려 해도 소용없이 말이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건 이미 그들에게 데일 대로 데여서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기소하고, 선고가 내려 버린다. 선고가 내려진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다시 한번 그 사건을 캐보는게 아니라, 선고 결과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다. 시간은 그렇게 미래로 흘러 가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재심을 신청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기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고 우리는 속으로 결심하게 된다.


 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그에 상응한 책임을 지는건 좋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인간관계가 기소될 수 있는 사항에 걸려 버린다는 점에 있다. 사소한에서 중대한 사건까지, 인간 사회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인간관계는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가 날마다 그렇게 극단으로 달려 가는데는 잘못이 없는 것일까? 작가는 여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고로, 극단으로 가는 성향을 조금 조정하기만 하면 모든관계를 그렇게 파국으로만 끝내지 않아도 된다고, 그걸 설명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것이다. 어떤가? 한번 들어봄직하지 않는가?


작가는 우리에게 한가지 질문을 한다. 왜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는지에 대해.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펄쩍 뛰시는 분들이 혹 있으실지 모르는데, 생각컨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우물안에 앉아 있기 때문에 우물 밖에 나가서 모든 것을 조망해볼 수는 없다. 전적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게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가 자신에게 객관적이 된다면 과연 누가 타인을 필요로 하겠는가. 모든 문제를 자신이 풀면 그뿐일테니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남이 필요한 것이다. 타인이야 말로 본인보다는 객관적일 수 있는 객체이니 말이다.  원래 대체적으로 주관적으로 살게 디자인 된 인간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문제에 대해선 한층 더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게 어느 정도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성향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걸 뭐라 하긴 그렇다. 나쁘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그런 면이 있다는 뜻이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이건, 사태에서 쉽게 벗어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이건 간에 우리는 상황을 간단하게 분류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일명 <나쁜 파일> <좋은 파일> 분류다. 좋은 친구는 일단 좋은 파일에 저장된다. 그러다 그나 그녀가 우리에게 잘못하는 일들이 넘쳐 나게 되면 어느순간 나쁜 파일 쪽으로 분류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가 아무리 우리에게 잘 한다고 해도 나쁜 파일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 진다. 좋은 면들이 우리에게 안 보이기 때문이다. 좋은 면들이 보인다고 해도 의미를 축소하거나 못 본척 하면 그만이다. 일단 나쁜 파일에 넣어진것을 다시 생각하는 자체가 싫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간단한 평가를 통해 한 사람을 좋은 사람에서 나쁜 사람으로 한순간에 보내 버린다. 그리고 그 결정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바람에 그 사람에 대해 더이상 열린 마음을 갖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게 이 저자의 주장이다.


타당하지 않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매도할때 그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좋은 면도 있는가 하며 나쁜 면도 분명 존재한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한 간호사도 알고보면 나르시즘이 심한 불륜녀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중독에 강박이 그녀를 그렇게 몰아가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녀가 천사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당신의 가족이라고 가정해 보라. 이유없이 불만이 쌓여갈 것이다. 답답할 노릇인 것은 그 이유를 딱히 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당신 친구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정의를 생각한다면 그녀는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사람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이 세상엔 친구를 할 만한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녀가 사회에서 일정한 몫을 하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만약 그런 사람조차 없다면 과연 누가 나서서 자원봉사를 하겠는가 말이다. 결국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결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가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모두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과연 보다 나은 사회가 될수 있을까? 가능의 문제를 넘어서, 그렇지는 않을 거라 본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울려져 돌아가는 것이 어쩜 인간 사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도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하니, 모두를 용서하고 이해하는게 어때 라고?  우리 모두는 언제나 성공할 수 있는건 아니고, 실패했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소소한 배신에 치를 떤다면 그 누구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니, 감정에 절은 왜곡된 시야가 아닌 공정한 진실을 바라보라고 말이다. 왜냐면 나 자신 역시 남을 배신하고, 속이며, 불신하고, 이용해 먹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곰곰히 들여다 보면 남 탓만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해서 저자는 우리가 애써 감고 보지 않은 한쪽 눈을 뜨고 보라고 말한다. 그게 인간관계를 넓히고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면서... 참고할 만한 일리있는 조언이지 않는가 한다. 만약 당신이 매일 매일을 낙담한 인간관계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한번쯤 이런 책을 드심도 좋지 않을까 한다. 내가 감고 있는 한쪽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될 수 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단 한쪽 눈을 뜨게 되면,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편해질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말이지, 인간은 남을 미워하게끔 태어나지는 않은 듯하다. 일부러 우리가 타인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가장 기쁜 사람은 바로 자신일지도 ...마음이 가벼워 지니 말이다. 한번 경험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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