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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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미안하다. 그다지 감명 받지 못했다. 재밌지도 않았던건 말할 것도 없고. 나름 있는 용기를 다 내어서, 자부심까지 느껴가면서--내가 아니면 이런 글 못 쓴다네 라는--쓴 책인데, 고작 이런 평밖엔 내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하지만 , 이 책은 최신이 아니다. 한 물 간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고리타분하고, 중독에 대해 중독자 자신도 별로 아는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고백록으로도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마약 중독에 대해 꺼릴게 없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있던데, 물론 중독의 해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끊거나 줄여야 겠다는 생각과 노력은 하는것 같았지만서도,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네가 하면 불륜이다.

내가 하면 가벼운 음주요, 네가 하면 알콜 중독이다.

내가 하면 기분 전환용 마약 사용이요, 네가 하면 마약 중독자일 뿐이다.는...


아마도 그게 중독자들의 특성인가보다. 이 책이 나온 뒤로 중독의 메카니즘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중독자 자신조차 이해 못하는 중독에 대해 이해하게 해주니 말이다. 아무리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댄다고 한들, 과학적인 메카니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잘못된 오해로 빠지기 쉽상이다. 인간이란 얼마든지 변명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성을 지닌 존재이며, 굳이 변명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라도 그럴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철저한 오만이요, 무지인 것이다. 아직까지 그렇게까지 똑똑한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드 퀸시가 마약을 상용하게 된 것은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이해 가는 대목이다. 지금이라면 진통제로 통증을 조절할 수 있었을테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엔 고통이란 참을 수 밖에 없는 삶의 과정에 불과했을테니 말이다. 고통이나 중독에 대해 무지한 시절이었다는 뜻이다. 아마 그가 지금을 살고 있다면 진통제 중독에 시달렸을지도 모르지만서도, 적어도 고통에 대해 무심하지 않다는 점에선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원래 고통에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동물이 아니니 말이다. 해서 그가 고통때문에 마약에 중독되었단 것에는 비난을 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중독이 괜찮은 것이었다고 강변하는데는 조금 반발이 일었다. 어쩔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게 좋은건 아니니 말이다. 안타까운 사실이고, 안스러운 일이지, 아무 일도 아닌건 아니란 뜻이다. 그래도 칠 십이 넘게 사신걸 보면 마약이 생명을 단축시키진 않은 모양인데,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그가 마약 때문에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내진 그의 마약 중독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지는 이 책에 나와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의아하게 여기고, 반발하게 된 것도, 그가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일 것이다.


과연 그의 가족들은 그의 중독에 대해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도 과연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전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사람이 마약에 절어 멍때리고 사는 모습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에 대해 별반 언급이 없다는 점이 아마도 이 고백록의 치명적인 단점일 것이다. 더불어 반쪽짜리에, 솔직하지 못한, 한 물간 고백록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그때문이다.


어쩌면 중독자는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기주의자란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마약이 악몽을 선사해준 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고, 오히려 좋았기에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고 말하는걸 보면 말이다. 그의 경우만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서서히 파괴해 간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사강이 주장했듯이,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막을 방법은 없다. 다만 문제는 그에게 가족이 있을 시, 그런 주장을 하는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라면, 단지 내가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괜찮다고 한들, 먹힐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그게 상관없는 일일까?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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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2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2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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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어떤 사람이 의사한테서 아무래도 앞으로 일 년밖에 못 살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그 사람은 그 끔찍한 소식을 듣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의사한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가 말했단다.

“사회학자와 결혼해서 노스다코타로 가세요.”

“그럼 낫나요?”

“아니요 일 년이 아주 길게 느껴질 겁니다.>>


위의 농담이 농담이나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던 책이다. 진짜로 기일~~~게 느껴지게 해 줄거라는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사회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못한 나로써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 책을 설명하면서 종종 언급되는 " 유쾌하면서 유머러스한" 혹은" 발랄한 문장들 " 을 기대했건만, 그것 역시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것만 기대하면서 읽어내려 간 사람이 나이니, 내가 못 찾았다면 아마 없는게 맞을 것이다. 지루하지 않게 세상을 설명하는 법! 이라고 이 책을 설명하고 있던데, 세상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서도, 절대 절대 절대!  지루했다. 오히려 지루하게 세상을 사회학을 설명하는 법이라고 했다면 정직한 발언이었다고 아낌없이 칭찬을 해줬을 것이다. 정직함에 토를 달게 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양반의 강연은 진짜로 한없이 지루하겠다 싶은데, 과연 누가 이 양반의 강연을 듣고 좋아한다는 것인지 살짝 의문이 든다. 혹시 그건 그만의 착각이 아닐까?  아니면 내가 대학을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서 강의가 얼마나 지루한 지를 기억 못하는 것일지도.  하여간 법학보다 더 지루한 학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진짜 놀랐다. 이 책을 보면서 순진한 생각으로 사회학을 전공하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에 얼마나 감사드렸던지...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감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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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돌아가신뒤 올리버는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 I 'm gay " 라는, 그것도 그의 나이 75세에...  44년의 결혼생활 내내 그랬었다면서, 고치려 노력을 했지만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버지 할, 그의 말을 들은 올리버는 그제서야 부모님의 냉랭한 결혼생활이 이해가 된다. 서로를 좋아하고 정중했지만 어딘지 연인같지 않았던 둘, 올리버는 불행했던 엄마를 위해 아버지를 미워해야 하는건지 ,아니면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찾겠다는 아버지를 응원해 줘야 하는건지 당혹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게이 선언을 한 뒤의 아버지의 태도였다. 그가 놀라 자빠지게도 아버지는 점잖은 전직 박물관장의 허물을 벗어던지곤 너무도 신나게 게이 생활에 돌입하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아오셨을까 싶게 활기차게 게이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올리버는 생소함과 동시에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게이 커뮤니티에 가입하면서 활발하게 친구를 심지어는 애인도 사귀던 아버지의 말년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커밍 아웃 4년만에 폐암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여전히 기운차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던 아버지는 결국 암에 져서 돌아가시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가 키우던 개 아서와 함께 쓸쓸하게 살아가던 올리버는 슬픔이라는 주제에 천작해 더 이상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그런 그를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그를 파티에 끌고 가보지만서도 그의 우울함은 감춰지지 않는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프랑스 배우인 안나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일 때문에 호텔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자유스러움과 사람을 잘 이해하는 통찰력을 가진 여자였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닮은 꼴인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 빠지고 만다.  38살에 사랑에 빠진 것이 다행스럽다긴 보단 당황스러운 올리버는 그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엄마와의 가혹한 관계를 쭉 지켜봐왔던 관객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버지가 말년에 보여준 애인과의 열정적이고 우아했던 애정생활을 기억하던 그는 어떻게 아버지가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아버지가 보여준 용감함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그는 안나와의 동거를 감행하지만, 결국 그녀의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별을 선언한다. 이별의 고통에 절절매던 그는 드디어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되는데...



      

< 아서가 올리버에게 안나와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 장면. 아서는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종종대며 걸어간다.>




" 이제 어쩌지? "  " 나도 모르지."  "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 영화의 제목이 참으로 적절하다는걸 알게 해주는 마지막 장면>


관계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도 잘 아는 남자가 있다. 부모의 고통스런 관계를 보면서 자라온 탓에 사랑은 그저 고통의 시작일뿐이라고 그는 믿는다. 부모 모두 착한 사람이었다는걸 잘 아는 그로써는 그들의 불행을 사랑탓으로 밖에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딱히 불행하고자 작정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게이 선언 후, 그 둘이 맞지 않았던 것이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란 걸 안 다음에도, 그의 믿음은 쉽사리 깨지질 않는다. 고통스러운 관계를 어쩔 수 없어 지속하느니 홀로 있는게 낫다고 생각하던 그는 안나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흔들린다는 것이 기쁘기보단 당혹스러운 올리버,  그가 관계에 대해 여전히 견고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안 좋게 될 거라는 그의 믿음은 안나의 찌프린 표정 하나에도 전전긍긍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사랑한다면 불안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결국 사랑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오래도록 고통 받느니, 희망을 버리고 그만 두는게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였을수도 있지만서도... 그렇게 연인을 떠나 보낸 그는 아버지의 말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교훈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과연 그건 무엇일까?


아무 생각없이 보게 된 영화인데 의외로 괜찮았다. 우선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눈빛을 바꾸는 것만으로 슬픔을 표현해내던 이완 맥그리거는 그동안 그에 대한 나의 편견을 일거에 불식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말년에 커밍 아웃을 선언한 뒤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역을 멋들어지게 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나이가 드셨어도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트랩 대령의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더라.  어린 시절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열혈 팬이었던 나로써는 그의 출연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외 안나 역의 멜라니 로랑은 몇 년전 본 <바스터즈>에서 낯을 익힌 여배우인데, 여전히 아름답고 연기도 안정적이여서 좋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로 강아지 아서가 있다. 주인공인 올리버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둘의 대화가 정말로 웃긴다. 보면서 아서와 올리버와의 대화가 조카와 내가 나누는 대화랑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놀랐는데, 어쩌면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유가  아이 대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다. 


심각하거나 아니면 한없이 추하고 경박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소재였음에도, 깔끔하고 유머스럽게 풀어간 점도 맘에 든다. 원작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구성이 참신한 소설을 보는 듯 신선했다. 억지로 짜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 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동성애와 죽음을 우아하게 다뤄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했다. 두 주제에 대해 두려움이나 편견을 더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히나 아버지가 게이라는걸을 알게 된 후 주인공이 게이문화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 하는 과정은 감동적이더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러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하긴 75세의 나이에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은... 용감한 아버지와 이해심 넓은 아들 모두에게 박수를. 그리고 그들의 서툰 시작에도. 무엇보다 끝만 생각하지 말라고, 일단 시작해 보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을 보낸다. 가보지 않는다면 그 끝이 어떨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모른다 해도 괜찮다고, 이 영화는 그걸 말하려 했던게 아닐까 한다. 그러니 지레 포기하지 말라고 말이다. 초심자들이라면 새겨 들어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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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이런!  알고보니 우리가 5대양 6대륙에서 살게 된 것도 다 요 다람쥐 스크랫의 허락되지 않은 도토리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의하면 말이다. 어찌나 간단해주시고 황당무계하던지, 이해가 되자마자 빵~ 웃고 말았다. 허풍선이 남작이 왔다한들 명함도 내밀지 못할 대단한 뻥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럭저럭 먹힌다는 거다. 왜냐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단 설명이 무척이나 명확해서 그런게 아닐까 ? 인간은 늘 단순함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여간 영화는 오늘도 불철주야 도토리 쫓기에 여념이 없던 스크랫이 그토록 바라바지 않던 도토리를 손에 넣고 땅에 꽂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곤 으드드득~~~~땅이 갈리고, 스크랫은 지구의 핵안으로 떨어진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그저 도토리를 위해 달렸을 뿐인 스크랫은 그리하여... 지구의 판게아(Pangaea)를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어 놓기에 이른다. 만약 지구 과학 시간에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면 절대 헷갈리지도 졸지도 않았을텐데 ,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하여간 박진감 넘치는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성 제로를 지향하는" 다람쥐 대륙 이동설" 은 거창하게 영화의 초반을 장식하면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온다. 그렇다면 스크랫의 도토리 사랑에서 촉발된 대륙 이동은 과연 아이스 에이지 군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제 그 나비 효과 분석에 들어가보기로 하자.



오, 매니 매니 매니...한때 못 말리는 아내 사랑으로 영화 한 편을 날로 찍으셨던 맘모스 매니는 이제 10대 딸의 아빠가 되었다. " 십대" " 딸 " 두 단어 만으로도 그가 날마다 노심초사 안절부절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훤히 보이실 것이다. 문제는 한창 호기심이 많은 딸 피치에게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 해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고픈 딸과 딸을 제외한 모든 청소년을 불량하게 보는 매니 사이에 갈등이 싹튼다. 아빠 몰래 친구들을 만나러 갔던 피치는 그만 딱 걸려 버리고, 둘은 대판 싸우기에 이른다. 서로에게 못할 말을 주고 받던 와중, 하필 그때 대지가 무너지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 엄청난 혼란속에서 매니와 검치 호랑이 디에고, 나무 늘보인 시드는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빙하 한자락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된다. 바다가 이리도 넓었더냐...를 외치면서 끝없이 표류하던 그들은 드디어 육지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데 그 육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캐리비안 해적단'의 빙하시대 버전격인 거트 선장의 해적선이었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거트는 세 주인공에게 해적단에 합류할 것을 종용하나, 매니는 그저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뿐이다. 우여곡절끝에 해적선을 파괴하고 무인도에 도착하게 된 아이스 에이지 일행은 그 섬에 자신들만 있는게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거트 일행이 새로운 해적선을 만드는 중이라는걸 알게 된 매니 일행은 그 배를 탈취해  가족들을 찾아가기로 계획을 세우는데... 과연 그들의 프로젝트는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 오합지졸 같아 보이지만 나름 해적으로써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해적단원들>



       < 의외로 큰 웃음을 선사해 주시는 이 영화의 히든 카드, 시드의 할머니. 조카 말에 의하면 그녀가 제일 웃겼다고 하니, 할머니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주목해서 보시길.>



    < 얼라리 꼴라리~~디에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대요~~~! 적이 친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걸 증명하고 있던 한 쌍. 아마도 5편엔 이들의 아들이 조연으로 출연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디에고를 닮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무척이나 어리버리할 듯...>


시리즈의 4편인데, 과연 재밌을까? 라는 궁금증에 보게 된 영화다.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일단  무난하게 이름값은 했지 싶다. 매니나 시드, 디에고등 전편에서 캐릭터 구축에 성공한 주인공들이 그 성격 그대로 새로운 환경에서 모험을 하게 된다는 설정도 좋았고,  다양한 새 캐릭터들이 제 몫을 해낸다는 점도 괜찮았으니 말이다. 새 등장인물중 매니의 딸인 피치는 사랑스러움을 더해 왜 매니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는지 이해하게  했고, 정신이 나간듯 보이지만서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건씩 해주던 의뭉함의 대명사 시드의 할머니는 의외의 복병이었다. 악당 역의 원숭이(혹은 오랑우탄?)  거트 선장 역시 냉정하고 무자비한 역활을 잘 해내고 있었으며 , 팜프파탈의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암호랑이 쉬리는 왜 디에고가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고도 남게 만들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한번쯤은 주장할만한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거기에 긴장감이 감도는 극박한 순간마다 터지는 유머는 왜 사람들이 아이스 에이지를 사랑하는지 생각나게 했는데, 특히 지루할만하면 나타나 주어서 우리에게 강력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는 스크랫은 여전히 도토리에 대한 무한 애정을 과시해 보는 사람들을 짠하게 만들었다. 스크랫을 고생시키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법칙도 무시하던 제작진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존경스럽더라. 이젠 스크랫이 도토리를 차지할건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고생으로 우리를 즐겁게 할 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걸 보면 나도 이 시리즈에 꽤나 적응이 된 모양이다. 설정이라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허하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3D 영화임에도 그 효과가 미미했다. 배경이 날 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이 3D엔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한 듯했다. 폭풍이 치는 바다를 생동감있게 그려낸 점에는 박수를 받을만했지만, 그것이 3D 영상과는 연결되지 못한듯했다. 2D로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 아쉽던데, 그걸 보면 3D로 만든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지 싶다. 거기에 이야기 자체도 조금 산만했다. 정리 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정신없이 흘러 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감에도 종종 지루해질 타이밍이 생긴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스크랫이 나올때마다 안도감이 들었을까. 여기서 지루함을 끊어주겠지 싶어서 말이다.


하여간 재밌는 만화 영화를 보신다면 적어도 후회는 안 하시겠지만서도, 강력하게 기대하고 가신다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실지도...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서도, 그럼에도 오랜만에 매니와 디에고, 시드를 보는 감상은 괜찮았다. 오래된 친구에게서 발견하는 신선함이랄까.  다음편도 나와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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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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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끝으로 올 상반기에 꼭 읽으려 했던 책 세 권을 드디어 다 읽어 치웠다. 2011년 플리처상 수상작인 <깡패단의 방문>, 2011년 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2010년 부커상 수상작인 <영국인 남자의 문제>까지. 순서대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서도, 어쨌거나 다 읽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뭐랄까. 내게 부과된 숙제를 다 해치운 그런 기분이었랄까. 적어도 권위있는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 더군다나 그것들이 최신작이라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로써 최소한 읽어 줘야 한다고 난 생각했다. 그래서 맘에 들건 안 들건 간에 결국 몇 달 간에 걸쳐 다 읽었다는 것에 대해 일단 홀가분하다. 더이상 이 책들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 거기에 다른 리뷰어들이 이 책들에 대해 뭐라뭐라 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일도 이젠 없을 테니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들을 읽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저 호기심이 충족되었다는 것뿐. 그나마<깡패단의 방문>은 조금 재밌있게 보았지만서도, 나머지 두 부커상 수상작들은 그다지 재밌게 읽지도 못했다.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예감은...> 짧기라도 하다지만서도, 짧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그 짧은 소설속안에서도 앞에 떡밥으로 주어진 주인공의 청소년 시절이 어찌나 지루하던지. 다른 작가의 책이라면 일단 집어던지고 봤을 것이다. 그걸 그래도 줄리언 반슨데, 부커상 수상작인데...라면서 무언가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었다. 다행히도, 초반의 지루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다소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보심 되겠다. 그렇다면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작가 줄리언 반스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청소년 시절 토니는 차원이 다른 천재성을 가진 에이드리언 핀과 친구가 된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에이드리언에게 경외감과 함께 열등감을 느끼던 토니는 다른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점차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기,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에--정확히 말하면 그녀들과 자는 것에--인생의 모든 관심사가 집중되는 시기에 그는 절망적인 연애를 하게 된다. 왜 그와 사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여자가 여친이었으니 말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다소 거만한 태도, 그리고 섹스에 대한 감질나는 자세로 토니를 애태우게 하던 그녀 , 베로니카는 토니가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할만한 최초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 시절을 보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그리고 애처로울만큼 필사적인 구애에 매달리던 토니는 어느날 그 연애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들이 이별을 하고 난뒤 얼마후 그는 에이드리안에게서 편지를 받게 된다. 베로니카와 사귀려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정중하게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임에도 일순간 격한 감정에 휩쓸린 그는 분노가 담긴 답장을 쓰지만 부치진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난 후 몇 달 뒤 에이드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살 이유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토니는 그가 자살한 이유가 그가 세상과 타협하기엔 너무 고결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토니는 이제 노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 자식을 낳고, 이혼을 하고, 할아버지가 되고, 은퇴자가 된 지금 그는 드디어 "살아남은 자"가 된 것이다. 성공한 자도, 승리한 자도, 명성이 있는 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한 자도 아니지만, 그렇기에 살아남아 역사를 회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자 말이다. 그럭저럭 자신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저 추한 노년이 아니기만을 바라고 있던 그에게 편지 한통이 배달된다. 베로니카의 엄마가 보낸 편지엔 40년전 그의 기억속에서 지워진 에이드리언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일기를 그에게 남기겠다는 베로니카 엄마의 말에 도무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난감한 그는 베로니카에게 연락을 취한다. 간신히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토니를 냉랭하게 대하면서 넌 언제나 제대로 이해하는게 없었다고 일갈을 한다. 왜 베로니카의 엄마가 자신에게 일기를 맡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에이드리안의 일기를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엄마가 가지고 있는지, 베로니카는 또 왜 그렇게 자신에게 불친절한지 이해할 길이 없는 토니는 자신이 이해될때까지 이 일을 캐내 보기로 하는데...


젊은 시절들엔 치기와 유치함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때가 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들이 그렇게나 진지함에도 대응책 없는 벌거숭이로 세상에 나섰다는걸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안스러운 일이다. 그게 삶을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비록 안타까울 정도로 무지하다고는 해도, 그 무지때문에 또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지때문인지,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아직은 쓰여지지 않은 미래덕분에 생긴 여유때문인지,아니면 단순히 젊음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서도 말이다.


그에 비교해 노년은 쓸쓸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난 작가가 상을 탈만큼 좋은 책을 썼다는 것에 반색하기 보다는 줄리언 반스도 드디어 늙으시는구나, 늙어가는 작가의 책에선 쓸쓸함을 숨킬래도 숨킬 수 없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그 젊은 시절의 호기, 냉소, 세상에 반발하는 태도, 인간을 마구잡이로 비꼬고 경멸하던 태도, 인생을 만만하게 보던 건방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인간과 삶에 대한 풍성한 기대로 반짝이던 문장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남은 것은 말년의 쓸쓸함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건만 살아남아보니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걸 드디어 발견한 사람의 허망함이랄까. 일찍 죽어간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면서 살아남았다는 것에 그렇게 안도했건만, 결국 삶도 죽음도 짐일 뿐이라는걸 발견한 사람의 당혹스러움과 고독 말이다.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이 책 행간에 쓰여진 것들이 그런 것이라는걸 알게 되는 순간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다. 얼마전 읽은 앤 타일러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비슷한 것을 느꼈었는데, 어쩌면 작가에게 늙는다는건 생각보다 좋은게 아니지 싶다. 작가가 될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지 못할리 없으니 말이다. 지혜가 생길 거라 추측했던 나로써는 당황스런 전개였다. 아마도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아니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기 위해 난 절대 그렇지 않아, 난 죽지 않을거야 라고 발악을 해대는 사람들이 <은교>같은걸 쓰는게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옳은 분석이건 아니건 간에, 노년이 쓸쓸하다는 것만큼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그들이 정직하다면, 그걸 부인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 한숨이 나오려 한다. 삶은 왜 이다지도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들 뿐일까.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은 나름의 고통을 겪도록 디자인된 존재들인 것일까.


그렇게 쓸쓸함이 짙게 배인것 외엔 이 책에 대해 그다지 인상적으로 봤던 점은 없었다. 뭐,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등장인물들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정상적이고 매력적이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주인공인 토니에겐 독립심 외엔 배울만한 점이 없었고, 베로니카에겐 왜 그녀를 남자들이 사랑하는지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가 보기엔 딱 밥맛인 여자던데 말이다. 남자들 입장에선 그녀가 조금은 매력적으로 생각되는 것일까? 거기에 우리의 히어로로 등장하는 에이드리안, 너무 똑똑한 나머지 일찍 삶을 마감해주신 용기를 보여주신 그가 실은 보기완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려 주는 데, 솔직히 그가 똑똑하다는 토니의 진술이 우습기만 하더라. 진실한 그 누군가를 그린게 아니라 가공의 천재를 만들어 낸 듯한 기분이랄까. 그는 <데미안>이 아니었다. 아무리 토니가 그를 우러러 봐도 천재라고 생각될만한 깜량이 못되었다. 그래서 토니와 함께 같이 경외를 하기보단 짜증이 났다. 이런 폼만 잔뜩 잡고 있는 어설픈 가짜 천재에게 왜 내가  눈길을 돌려야 하지라는 생각에. 이 소설의 초반이 짜증이 났던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물론 베로니카와 토니의 그 엉성하기 짝이 없는 사랑도 짜증이 나긴 마찬가지였지만서도. 


그렇게 짜증이 나는 세 주인공들의 40여년에 걸친 인연이라. 아무리 봐도 좀 억지스럽단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불행과 자살이, 어느 정도 토니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던데, 그것부터가 그렇다. 겨우 분노한 편지 한 장 때문에 삶이 그렇게 무너진다고 보는게 과연 그럴듯한 분석일까? 토니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과거를 벌어지지 않았고, 에이드리언은 자살하지 않았을까? 그럴거라 생각하기에 베로니카는 40년이 지난 뒤에도 토니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진짜 그게 다 토니때문일까? 그럴듯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자아집중적인 20대의 사람들이 과연 친구의 분노에 찬 편지 하나로 자신의 삶을 망치게 둔다는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너지는 계기는 자신의 내면때문이다.외부의 사정이 아닌. 그것이 자연스럽고 설득력있다. 원래 그런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가 조금은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토니와 에이드리안의 엮기 위해 일부러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 처럼 말이다. 오십보 양보해 만약 실제로 에이드리언에게 일어난 일이 토니의 편지로 촉발된 것이라 해도, 과연 토니가 자신의 행동에 반성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도 의문이다.  그는 단지 분노와 질투에 찬 20대 청년이었다. 완벽하지도, 이성적이지도, 또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시기. 그때 누군가에게 잔인하고 배려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그가 나쁜 인간이라는 뜻일까? 그래서 에이드리안의 불행에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전 애인을 빼앗아간 친구에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즉각적인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앞 날에 축복을 빌어줘야 하는 것일까? 그게 과연 가능해? 아니, 꼭 그게 가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화를 낼 권리조차 없는 것일까?


그래서 조금은 불편한 심정으로 책을 내려 놓았다. 의문이 종결되는게 아니라 많은 의문을 남긴 채로. 기쁘지도, 즐겁지도, 반갑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그저 작가가 늙는다는 것은 심하게 쓸쓸한 일이로구나만 마음에 남았다. 작가들마저 이럴진대, 과연 어떻게 늙어가야 좋은 것일지 두려워진다.  과연 늙는다는건 이다지도 좋은게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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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 0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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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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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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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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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7 0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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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8 1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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