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비밀 구름동동 그림책 54
대미언 하비 글, 코키 폴 그림, 김규태 옮김 / 삐아제어린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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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보니 그림이 낯익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싶었더니 역시나, 마녀 위니의 저자인 코키 폴이 그린 그림이란다. 그래, 어쩐지 익숙하더라 라면서 반가워했다. 폴 코키라면 일단 이름이 있는 작가이니 내용도 괜찮겠지 싶어서 고른 책, 아이고나, 이 책을 조카에게 읽어주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다. 조카가 표지만 보고 퇴짜를 놓은 것에 지극히 안도하고 있다. 왜냐고? 내용이 가히 엽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조카에게 읽어 주었더라면 마지막 부분에서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지 심히 곤란해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은 마음이 심약한 고모에 불과하니 말이다. 어쩌겠는가. 내 정체성이 그러한 것을... 어쩌면 아이는 이런 내용들을 무난하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서도,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이런 정도의 책을 읽어주려면 아마도 조카가 10살은 되어야 할 듯 싶다. 그 정도는 되야지나 내가 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조카에게 나쁜 것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감당 말이다.


내용은 ...그림체만큼이나 엽기적이다. 마녀 위니를 위시해서 코키 폴의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난 아무리 좋아하려고 해도 별로다. 유머 감각이 있다는 점에서는 만족할만 하지만 종종 내용이 이상한 쪽으로 튄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뭐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아마도 내가 유난하게 예민하게 구는 것일지도. 하여간 그 유난한 예민에 불을 지피고 그럼 그렇지! 하고 내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져 주게 만든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이다. 내용은 이렇다. 친한 친구 사이였던 개구리와 달팽이에게 왕궁의 요리사가 찾아온다. 요리사 왈, 곧 왕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특별한 요리를 위해 도와줄 친구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왕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개구리와 달팽이는 흥분을 하게 된다. 왕을 도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리사가 필요한 친구는 하나뿐인데, 경쟁자는 둘, 해서 개구리와 달팽이는 달리기 시합을 벌이기로 한다. 문제는 한때 개구리도 잘 달리기는 했지만 이젠 늙어서 예전만 못하다는 것, 하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한 개구리는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고 큰소리 땅땅 친다. 결국 벌어진 시합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그리고 이긴 자가 왕에게 도아줄 일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심 책을 보시길...


내가 이 책이 호러라고 생각한 것은 왕을 돕기 위해 자진해서 나선 두 동물의 마음이 결국엔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진심으로 왕을 돕길 원했고,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시합에 임한 것이었다. 결국 우정을 위해 양보를 한 달팽이가 지긴 했지만서도, 그 시합 자체의 순수함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설마 진짜 이런 내용인거야?라고 비명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동화책인데 굳이 이렇게 썼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늑대의 배를 가르는 장면이 나오는 돼지 세마리 책을 생각해 보면 동화책이라고 해서 현실을 왜곡한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르겠다 .과연 이 책을 읽어주었다면 조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그 아이는 나만큼 식겁하지 않았을지도. 왜냐면 나는 어른이라서 이 책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지만, 세상 물정이 아직은 어두운 조카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 면이 없진 않지만서도, 그럼에도 난 이책을 조카에게 읽히지 않으련다. 아직까진 반전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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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슬퍼? 코끼리와 꿀꿀이 2
모 윌렘스 지음, 김혜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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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일곱 살 난 조카가 주말에 자고 간다는 말에 부랴부랴 도서관에 다녀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젠 더더군다나 더 몸으로 놀아주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나는 늙었고 , 조카는 젊어지니 어쩌겠는가.-- 비는 시간에 책을 읽어줄 요량으로 말이다. 해서 빌려온 9권중 하나.결론만 말하자면 결국 읽어주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조카가 원치 않아서다. 책을 쌓아 놓은 것을 힐끗 보더니만, 내가 기꺼이 읽어주겠다는 선심어린 말에도 뒤적뒤적 책을 휘젔기만 하더니,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책은 하루에 한 권만 읽는 거라고. 더군다나 이 많은 책들 중에서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다고 말이다. 해서, 결국 조카에게 읽어주기 위해 빌려온 책을 고모가 읽게 되는 불상사를 맞게 되고 만 것이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 토끼 신세가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그래도 심혈을 기울여 빌려온 책이기에, 리뷰를 남겨 보려 한다. 비록 조카에게는 퇴짜를 맞았지만서도 누군가 이 책에 대해 궁금해할 사람들이 있을 거란 확신을 하면서...


친구야 슬퍼는 두 친구간의 우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코끼리인 코보가 슬픈 것을 보게 된 돼지 피기는 친구를 기쁘게 위해 이런 저런 이벤트를 벌인다. 그런데 문제는 피기가 무엇을 하건 간에 코보의 우울이 가시지 않는 다는 것, 결국 친구를 슬픔에서 구제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피기는 포기하기에 이른다 . 그런데 피기를 본 코보가 너무도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닌가. 코보 왈, 조금전 카우보이랑 어릿광대랑 로봇이 다녀갔는데 피기가 없어서 너무 슬펐다는 것.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인 피기가 옆에 있어서 기쁘다고 말하는 코보를 보면서 피기는 할 말을 잃는다. 어이가 없음에도 코보가 기쁘다니 다시금 기분이 좋아지는 피기, 코보에게 한마디 한다. 아무래도 너 안경을 바꿔야 겠다고 말이다.


과장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될때가 있다. 어떤 재밌는 영화나 책, 드라마나 멋진 배우, 근사한 장소나 맛있는 음식도 내가 사랑하는 인간만큼 기쁨을 줄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런 말을 단순하게 그림으로 그려 낸 것이 아닐까 했다. 해서 어느정도는 코보의 말에 공감을 하게 됐다. 친구야 네가 있어 정말 좋구나 라는 말을 할 수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런 행운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동화책이 아닐까 한다. 부디 내 조카에겐 그런 행운이 함께 하길...고모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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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
마이런 얼버그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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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손이라니...특이하네 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다면 일단 책을 펼쳐들고 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왜 제목이 저랬는지 라는 것을...이유는 바로 저자 마이런 얼버그의 부모는 청각장애인이라는데 있다. 해서 저자는 태어났을때부터 부모가  손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하니, 저자가 70년대 말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보다 손을 더 기억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보통의 부모 자식들이 하는 대화를 그들은 늘 손으로 했을 테니 말이다. 허공을 가르면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고, 질문을 하고, 자랑스럽다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던 것이 다 손이었으니, 저자가 아버지의 손에 대해 애착을 느끼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 그렇다면 저자가 아버지의 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가 보기로 하자.


저자는 30년대 대공황 이후에 청각장애인의 부부의 첫 아이로 태어난다. 지금도 청각 장애인들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자신을 갖기로 한 부모의 결정이 얼마나 낙관적인 것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양쪽 부모들이 결혼은 해도 아이만은 갖지 말라고 다짐을 했음에도 아이를 낳기로 한 마이런의 엄마 아빠는 그들의 결정에 저의기 만족한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그들 역시 자신의 자식을 낳자마자 사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모든 행복을 다 가진 듯 그렇게 행복했었다는 부부는 30년대 청각 장애인이 아이를 키우는 고난이도의 미션에 도전하게 된다. 일단 아이가 부모를 닮아서 귀가 들리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마이런의 부모는 아이가 정상이라는 것에 안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아가 더 쉬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를 키우고 말을 가르치고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잘 키워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를 이제 늙은 마이런이 회상한다. 결코 쉽지않은 않았을 그 길을 단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걸어나간 아버지와 엄마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30년대 청각 장애인들이 겪었어야 하는 고난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병신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에서고 거리에서도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그들, 놀라운 것은 당시에도 수화가 저능아의 대화법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마이런의 아버지는 청각 장애인 학교에서도 몰래 몰래 수화를 배웠어야만 했다고 하던데,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왜 본인들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정상인들이 나서서 금지하고 못하게 하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들이 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수화가 필요하다고 하면 된거 아니겠는가. 장애인들도 본인들이 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데--말하자면 머리를 다친 것은 아니라는 뜻--꼭 참견쟁이들이 자신들이 더 잘 안다는 듯 나서서 훼방을 놓는 것을 보면 짜증이 난다. 정 그렇게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일단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게 먼저일 것 같은데, 참견쟁이들이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건 또 못 봤단 말이지. 그저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옳다는 것만 주장할뿐. 더군다나 자신이 아닌 남의 인생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참견쟁이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아버지는 머리가 있는 분이라, 수화를 배우고, 직장을 얻고, 그리고 아리따운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자랑스런 아들을 낳아서 자신만의 부자 관계를 만들어 간다. 아마도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아들 입장에서는 남들과 다른 환경에 산다는 것에 저으기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 입장에선 들리지도 않는데 아들을 잘 키워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회상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모든 수모와 수난들을 감내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아버지였다. 자신이 밖에서 어떤 말을 듣고 ,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아마 저자의 어린 시절의 불만이 어느정도는 희석되지 않을까 한다. 불만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기란 누구에게도 어려운 법이다. 다만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회상하는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린 것이겠지.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를 회상하던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조금 심심했던 전개는 별로였다. 잔잔한 서술 방식과 어른 아이로 키워져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비교적 뚜렷하게 적어내려 했던 것만은 박수를 받아도 좋지 싶지만서도 말이다.


아,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하나.

지금 보고 있지는 않은데 요즘 하는 일본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곱 살 난 딸과 살아가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는데, 그 수발을 그 어린 딸이 한다는 그런 내용. 사람들은 내용을 보기도 전에 그런 효녀가 있나, 라면서 감탄을 하는가 보던데, 난 솔직히 욕지기가 났다. 그런 비극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어른이라도 말이다.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일단 비명부터 지른다. 그런 일들을 어린 아이에게 시키면서 그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은 어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아이는 인간이 아니야?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면 안 돼? 아이는 어른들의 도구야? 어른들이 회피하는 모든 책임을 다 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존재들이냐고? 왜 어른들은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아이들에게 떠맡기면서 그렇게 좋아들 하는 것일까? 단지 그들이 멍청해서일까. 아니면 감정적인 변태들이여서? 제발 부탁인데, 무엇이건가에 아이들에게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일단 자신에게 자문해 보길 바란다. 어른이 나에게 이런 일을 기대한다면 나는 어떤 심정일까라는. 적어도 어른이라면 그 정도의 자아성찰 정도는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저자가 부모를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의 통역사 노릇을 하면서 어른들과 상대해야 했던 것이 적잖이 부담이 되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자의 부모는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자신들과 세상을 소통하게 해줄 존재가 생겼다는 것이 마냥 좋았을 지도. 하지만 그건 아이에게 앵벌이를 시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저자가 착하고 어려서,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엇나가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지만서도, 만약 그랬다고 해도 그에게 뭐라할 수는  없었을 듯 싶다. 아이 시절엔 모두 커야 하기 때문이다. 어른 흉내를 내면서 어른들을 돌보는 것이 아닌...아, 혼자 자신을 추스리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낳아, 그들을 볼보기는 커녕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보게 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아침에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지...그리고 그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효라는 이름으로 혼동하고 있는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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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감정이 문제야 - 자꾸만 꼬이는 직장, 가족, 연애, 인간관계
마르코 폰 뮌히하우젠 지음, 김해생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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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감정의 늪에서 익사하지 말고 빠져 나오라는 충고를 담고 있는 책이다. 살다보면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면 사는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나름이라서 때론 그 감정 때문에 만사가 되틀리는 경험을 하게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 저자는 이런 함정에 빠진 사람들에게 셀프로 기어 나오는 방법을 이 책에서 제시한다. 자신이 빠진 늪에서 어떻게 해서든 빠져 나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조언이 될 수 있을 지도...다소 건조해 보이지만, 써 보면 그런대로 유용하지 않을까 싶은 조언들이 이어진다. 일단 감정 휘둘려서는 인생이 꼬이기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인데, 종종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도 눈에 뜨였다. 아마도 지금 깊은 늪에 빠져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시는 분들에게는 조금은 안심이 되는 조언이 될지도 모르겠다. 해보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느낌은 이런 것이다. 과연 이게 내 삶에 도움이 될까 싶은...자기계발서들이 그렇듯이 읽을때만 아하~~~하고 뒤로 돌아서면 평소의 생활로 돌아가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를 보라. 이 책을 읽으면서는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 이거 쓸만한 조언인데? 했지만서도, 읽고 나니 무엇에 쓸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래서 자기 계발서는 읽을게 못 된다고 하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지네...계발서 읽고서 인생에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는. 이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분명 있긴 하겠지. 단지 내가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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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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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집안의 외동 아들 레오를 봐주고 있던 소피는 자고 일어나보니 아이가 살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초지종을 알아볼 사이도 없이 그 길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그녀는 도무지 왜 자신의 주변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지 영문을 몰라한다. 도망길에 우연히 만난 여인은 친절하게도 그녀를 집으로 초대를 한다. 하지만 깨어보니 친절한 여자는 이미 살해된 채 피 범벅속에 누워있고, 이를 발견한 소피는 다시금 도피길에 접어든다. 소피가 여섯살난 아이를 살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거리에서 만난 여자를 살해했다는걸 알게 된 경찰은 곧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장담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소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그간 도망자의 처지에 적응이 된 소피는 그럭저럭 변두리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임시에 불과하다는걸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돌파구를 찾기로 한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데는 역시 결혼이 최고, 조건이 맞는 남자만 만나면 곧장 결혼 할 생각으로 만남 주선 회사의 데이트에가본 그녀는 비교적 적절한 조건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못생긴데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 남자에게 유일한 장점이 있었으니 바로 직장이 군대라는 점, 더군다나 조만간 해외로 전출되어 갈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소피는 일단 그에게 올인하기로 한다. 하긴 도망자 신세 주제에 무슨 찬밥 더운 밥을 가리겠는가. 경찰을 피하기 위해 별 기대없이 한 결혼이라지만서도, 지극히 허술하게 결혼이 성사되자 그녀 자신도 어리둥절해 한다. 그럼에도 착하기 짝이 없는 남편에게 그녀가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죽은 사람들의 악령들이 그녀를 따라 다니는가운데, 소피는 과연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인지 알길이 없다. 과연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과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되찾을 길이 있는 것일까?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꽤나 끔찍한 사람들과 장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긴 추리 소설의 특성상 그러지 않기가 오히려 곤란하지 않겠는가. 누군가 살해되고, 실종되고, 훔쳐가고, 뭐, 그런 사건들로 소설의 전제가 형성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기본이 그렇다고 해서 잔인하고 역겨운 장면들을 보기 위해 추리 소설을 본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그보단 범인을 잡는 과정들을 즐기기 위해 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쁜 놈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활개를 쳐도 걱정할 것 없다. 조만간 착한 놈이 그를 잡을테니 말이다. 라는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기대들이 충족되어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추리 소설의 묘미라고 ,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전혀 잘 쓴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머리를 쓴다기 보다는 잔인한 인간 성정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책이니 말이다. 지적이지 않은 추리 소설이라, 더군다나 인간미도 없어, 역겨운 걸로 치면 내 인생 봐왔던 책 목록들 중에서 탑 5 안에 당당하게 들어가... 결론적으로 호감을 갖고 진지하게 읽혀지진 못했던 책이라고 보심 되겠다.  


무엇보다 이야기 전개나 인물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시작하자마자 아무 잘못 없는 여섯살 난 아이를 죽이는 것부터가 그랬다. 그것부터가 식겁할 일이었는데, 아무도 그 죄의 무게를 감당할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는 것은 또 얼마나 놀랍던지. 여자 주인공인 소피가 아이가 살해되었다는걸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도망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여자에 그럴듯한 전개 아닌가.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봐도 여자 주인공에게 동정을 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기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에게 친절하게 해준 여자가 살해되어 있는 데도, 이 여자가 하는 일은 또다시 도망치는 일이다. 하지만 소피가 도망치는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꿈대로 계단에서 떨어져 죽은 시어머니,  자동차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되더니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결국 사고로 죽어 버린 남편, 그 외에도 그녀를 따라다니는 묘한 사건 사고들, 그녀는 그런 과거들을 뭉텅어리로 몰고 다니면서 자신의 주변에 파란을 일을킨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소피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보통 이 정도의 사건 사고면 당연히 자신에게 의문을 품어야 정상인데 말이다.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여졌던 것은 아닐까. 왜 내 주변에는 유독 이런 사건들이 넘쳐나는 것일까? 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보통 사람들에겐 한번의 인생에 벌어질까 말까 하는 일들이 왜 내겐 이렇게 연달아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일까. 왠만한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닐까?


라는...내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하는데, 그것이 비단 내가 한 일이라는 기억이 없다고 해서 없어지는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전혀 그런 점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과연 그게 정상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녀는 계속해서 도망만 칠 수 있는 것일까.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엮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 나가는데도 말이다. 그들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걸 생각해 보면, 적어도, 자신이 죽인게 아니라고 해도 죄책감 정도는 느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도망의 길을 선택하는 그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도 모자라 아예 탈출의 기회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더라니, 그것도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해도, 어쩐지 그녀에게 동정을 표하기 어려운 행보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 구역질 유발 인자가 단지 여자 주인공뿐일거라 생각하심 오산이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이 바로 남자 주인공의 행태였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책엔 여자 주인공 외에 남자 주인공도 존재한다. 그의 행동을 읽고 있노라면, 절로 토악질이 났다. 과연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도 의문이지만서도, 어찌나 주인공을 극악스럽게 만들어 놨던지, 나중엔 이런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의심스럽더라.  왜 작가는 이토록이나 관음증에 스토커 똘끼로 충만한 주인공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일까? 라는.. 것도 굳이? 소아 성애자나 연쇄 살인범이 오히려 다정해 보일 정도로 경악스런 행태만 골라서 하는 남자 주인공을 지켜 보다 보니, 어떻게 작가는 이런 주인공을 만들어 낸 것일까 불똥이 그에게 튄다. 분명 작가 자신의 정신세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왜냐면 범인의 치밀함과 치졸함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해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 주인공의 치밀함에 공포심보다는 짜증이 일었고 치졸한 짓을 일삼는 그의 한가함에 넌더리가 나더라. 이런 경지를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작가가 보통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작가가 사드의 나라 출신이라 그런지 가학의 경지에 대해 타고난 일가견이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작가가 상상해 내는 가학의 정도가 보통의 인내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 인간에게 이런 일들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그를 이루기 위해 범인이 하는 수법이나 태도가 너무 불량하고 품격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가학적이기만 하고, 쓸데없이 잔인하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가 주인공이라니... 차라리 묻지마 살인이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졌다면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괜히 먹었다고 후회되는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은 그런 기분이었다.


진짜 책을 읽을땐 몰랐는데, 프랑스 남자들은 왜 여성들에게 이렇게 가학적인걸까? 아니, 왜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것이 그 나라의 전통인가? 여자들도 기꺼이 동의하는? 사랑의 나라라는, 다른 말로는 나르시스트들의 나라라는 그곳에서, 그 아름다운 곳에서 가학의 전통이 스물스물 살아있다는 것은 뜻밖이다. 아마도 나르시스트와 가학간에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하여간 초반부터 끝까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 진다고 하는데, 정말로 가관이지 싶다. 과연 이런 내용의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배우라고...여자를 괴롭히는 특별하고 색다른 방법? 내진 이렇게 해도 여자들은 미치지도 죽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충고? 아마도 인간에 대한 진정한 통찰이 있었다면 이런 소설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아주 아주 연약한 존재다. 하니, 제발, 인간을 적어도 인간답게는 대우해 주시길. 아무리 추리 소설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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