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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 시즈코상 - 가장 미워하고 가장 사랑했던 이름
사노 요코 지음, 윤성원 옮김 / 이레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엄마 시즈코 상>은 치매에 걸려 구십의 나이에 돌아가신 엄마를 회고하는 수필집이다. 알고 보니 이 책의 저자가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저자라고 한다. 전혀 연결되지 않은 이미지라 깜짝 놀랐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유능한 일러스트레이트 작가인 저자를 엄마인 시즈코씨가 한번도 자랑스러워 하거나 응원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저자의 이야길 종합해 보니 시즈코씨란 분은 이런 사람이 아니셨을까 싶다. 자신만 중요한 나머지 자식이 어떤 일을 하고 성공을 하건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식을 하소연이나 분풀이의 도구 정도로만 여기던 사람 말이다. 흠... 누구든 자식의 이런 고백을 듣게 되면 일단 좀 불편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는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도 불편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자신만 아는 엄마도 처지 곤란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사실 그런 엄마가 존재한다는 것마저 별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것도 드물지 않게 말이다.
자식이 어렸을 적엔 손찌검에 모진 정신적 학대를 하고, 그 자식이 커선 잘 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식이 잘 되가는 꼴을 눈꼴시어 하고, 늙어서는 자식집에 얹혀 살면서도 오히려 주변에 자식 사위 욕을 하고 다니며, 딸이 남편에게 맞고 산다는 하소연에 그럼 맞고 살라고 조언해준 사람, 딸이 이혼하자 네가 잘못해서 그렇게 됐다고 비수를 꽂던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저자의 엄마다. 엄마가 그렇다보니, 저자는 늘 엄마와의 관계에 있어 긴장과 불화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가장 사이가 좋을때가 멀리 떨어져 살아서 별 볼 일이 없었을때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평생 그렇게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살았다면 좋았으련만, 엄마에게 노년은 찾아오자 , 저자는 엄마와 원치 않는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남의 집에 얹혀 살면 성질이라도 죽일 것이지, 늙었어도 괄괄한 성질머리는 버리지 못한 엄마는 딸의 집에서도 편지풍파를 일으킨다. 하는수 없이 엄마를 요양시설에 모시게 된 저자는 자신과 엄마의 관계가 왜 그렇게 일그러졌을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엄마라면 피부가 닿는 것조차 끔찍했다던 저자는 엄마가 치매에 걸려 본래의 성질을 모두 잃고 나서야 비로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치매에 걸린 엄마가 다른 보통의 엄마처럼 온순하고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려 정신줄을 놓고 나서야 엄마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다니, 작가는 자신의 아이러니가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그 반대여야 정상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학대한 엄마를 용서하고, 그런 엄마에게 잔인했던 자신을 용서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안타까웠던 것은 그렇게 극악스럽던 엄마를 미워하는 자신을 저자가 몹시 부끄러워했다는 점이다. 만약 그녀가 요즘 사람이었다면 다른 각도에서 엄마를 조명하고 이해했을텐데...그녀 역시 봉건적 시대의 산물이라서 그런가 부모가 어떤 대접을 한다해도 자식은 온당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사대 정신에 잠겨 있는 듯했다. 부모란 무엇일까? 나는 부모란 자식이 사회로 나가 한 사람으로써 살아나갈 때까지 성장하도록 보호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부모의 핵심 의무라 할 것이다. 만약 자식이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다면,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이용하는 관계였다거나, 학대의 대상이었을 시엔 아무리 피로 맺어진 혈육이라 해도 관계가 일그러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식을 학대했거나 성장을 방해한 부모는 자신이 그 역활을 제대로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 부모를 둔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서 알길 없는 분노와 우울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뿐인가? 그것도 억울한데 그들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배은망덕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과연 그들에게 탈출구는 가능할 것인가? 웬만큼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이라면 탈출을 꿈꾸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의지의 문제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엄마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오히려 그 친구를 부러워 한다. 왜냐고? 그녀 자신은 엄마의 몸에 손도 대기 싫기 때문에 목 졸라 죽이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이런, 하...정말 안스러웠다. 부모와의 관계가 좋은 자식들이라면 상상하지 못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서도, 어린 시절 학대를 견디면 자랐던 자식들이라면 아마 공감하기 어렵지 않은 대목일 듯하다. 아니, 당연하다. 자신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이용만 해 먹는 사람에게 누가 가까이 다다가고 싶겠는가? 부모와 자식 간이 아니라면 한 공간에 있고 싶은 마음조차 없을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부모 자식 간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경우라도 그 연을 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리타분한 사고라니...
그래서, 나르시스트적이고 제멋대로인 엄마와의 갈등에 고민하던 저자가 치매에 걸려 얌전해진 엄마와 화해를 하는 과정은 감동스럽다기 보다는 안스러웠다. 일반 가정이라면 치매에 걸려 점차 희미해져 가는 엄마의 모습에 절망할텐데, 이 저자는 엄마가 치매에 걸려 본인이 생각하는 상냥한 엄마에 가까운 사람이 되자 한없이 기뻐한다. 그래서, 본인은 감사해 마지 않는 모녀 화해의 모습에 난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그건 사실 정상이 아니니 말이다. 하여간 인간이란, 이렇게도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인가 보다. 특히나 부모의 경우는,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인정하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이 쉬운게 결코 아니다. 그런면에서 이 작가의 용기에는 박수를 보낸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고백을 내 뱉은 것만으로도 본인으로썬 무척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매맞는 아내들이 수치심에 맞는 사실을 숨기는 것처럼, 맞고 자란 자식들이 오히려 엄마를 두둔하는 것은 수치심과 관련이 있는게 아닐까. 어떤 경우이건 간에 엄마를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식이 잔인하고 못된 사람이라는 것처럼 들리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은 전적으로 동양적인 사고에서 나온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똑같은 일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구 사람들이 겪었다면 이 저자가 고통스러워했던 죄책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해 명쾌하게 해명해 줬을 것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엄마가 엄마 노릇을 하지 못했을 시에, 자식이 그녀를 엄마라고 느끼지 못하는건 오히려 당연한 거라고... 이 책의 저자는 결국 자신의 문제를 명쾌하게 분석하지 못한 채 엄마에 대한 회한을 묻어 버렸다. 이 책을 쓰셨을 당시 암 투병 중이셨다고 하니, 이미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싶은데, 만약 아직 살아계시다면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던져 버리시라고. 그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