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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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긴급히 만나 의논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형 세르게의 호출에 파울은 마지못해 아내 끌레르를 데리고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석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세르게라면, 현재 네델란드에서 가장 핫한 남자중 하나인 그라면 당일치기의 예약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형을 멍청하고 섬세하지 못하며 지적으로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파울은 그가 그렇게 성공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 무대위에서의 세르게의 카리스마만큼은 파울 자신도 인정하는 바, 질투와 아니꼬움과 냉소로 무장한 채 그는 형 내외를 기다린다. 그가 그 저녁 식사에 그렇게 꼬여 있었던 것은 비단 성공한 형을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그의 외아들인 미헬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파울은 아내 모르게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 거린다. 가뜩이나 심사가 사나운 가운데, 마침내 세르게와 그의 아내인 바베테가 나타난다. 드디어 한 자리에 앉게 된 두 쌍의 로만 부부는 고급 레스토랑 특유의 섬세하기 짝이 없는 시중을 받으면서 식사를 시작한다. 아페리티프에서 시작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 그리고 입가심용 에스프레소까지, 풀 코스의 디너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모여야 했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충돌에 이르게 되는데...


신경질적이고 무척이나 지적이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주인공 파울은 그만의 목소리로 현재를 중계한다. 속물인 정치가 형을 미워하고,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면 식사를 못하는 형의 허영을 비웃으며, 아프리카 흑인 아이를 입양하고는 생색을 내는 형 내외의 위선을 비아냥대는 파울에게 독자들은 곧 동화가 된다. 우리는 곧장 파울의 입장에 서서 인공 미소를 띄워대며 가짜 공약을 남발하던 정치가에 대한 혐오를 가공의 매력을 지닌 세르게에게 퍼붓게 된다. 그래, 속물인 정치가가 언제나 문제지, 그들이 아무런 노력없이 성공을 하고, 아무런 노고 없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바라본다는건 얼마나 좌절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박에 파울의 편이 되어 버린 독자들은 그를 괴롭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것이 비단 형만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그의 외아들이 사촌인 세르게의 아들과 사고를 쳤다. 열 다섯에 불과한 녀석들이 술에 취해 노숙자를 태워 죽인 것이다. CCTV에 잡힌 그들의 영상은 네델란드 전역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경찰에선 그들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문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몰라봐도, 자기 자식을 몰라 볼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알아본다. 흐릿한 영상속에서 노숙자를 비웃고 때리고 불을 붙이는 아이들이 자기 자식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형과 정신적인 문제로 교사직을 그만 둔 동생은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앙금을 뒤로하고 모였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처음 이 책의 인상은 단단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톤이나 묘사하는 어조가 단단하기 이를데 없다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논리 자체에 헛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리곤 중반을 넘어가면서 알게 된다. 저자의 그 단단하고 헛점이 보이지 않는 논리가 바로 함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조금씩 드러나는 파울의 과거와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된 독자들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과연 그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라는...그가 우리와 똑같은 루저에 보통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동질감 내진 공감을 해도 되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그리곤 좀더 읽고 나니 그에게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뜨악한 심정으로 말이다. 내가 당신을 알았던가요 라고 질문하고 싶어진다.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착하고 지적이며 정직한 사람이라는 뉘앙스에 반박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인공에 대해 마지막 믿음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사고를 친 아들 때문에 고민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적어도 자신의 아들이 커다란 잘못을 했다는 것을 자각한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아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그런 그의 양심에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도 논리 정연하게, 그 희망이 어떻게 배반되어 가는 지를 독자들에게 보여 주는데...


탄탄한 논리 전개, 개연성 있게 전개되어 가는 사건들, 두 쌍의 부부간의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 각자의 이익을 두고 벌어지는 살벌한 종횡연합, 우아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단 하루 저녁의 식사 시간 동안 누구보다 지적이고 고상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위선의 가면이 벗겨져 나간다. 결국 독자들은 추악한 그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책을 덮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도무지 헛점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헛점을 찾고 있을 여지도 없이 스피드하게 사건이 전개되어 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각자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따른 행동 하나 하나가 섬뜩할만큼 논리적이라는 점에서도 반박거릴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덧붙일만한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심리 묘사, 압권이었다. 흡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책을 일단 들기 시작하면 결론을 알기 전엔 내려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부들의 이야기가 하도 수상해서 말이다. 그들이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냈을때 우리는 비로서 깨닫게 된다. 논리나 이성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유대인 학살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2급 인종들은 말살해도 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었으며, 카톨릭 이하 독일 국민들이 그에 동조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논리의 씨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설, 어떤 추리 소설보다 섬뜩했던 책이 되겠다. 근래 읽었던 소설중에서 가장 완벽했던 소설,  품격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지적이고 냉정하며 이기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과 옹졸함이 연결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지적이고 논리적이면서 포용력이 있을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그것은 가능한 조합이 아닐려나? 만약 우리가 한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걸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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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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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데드걸 - 할인행사
카렌 몬크리프 감독, 마샤 게이 하든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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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되 죽은 여자를 중심으로 stranger, sister, wife, mother,그리고 dead girl 본인의 이야기 다섯편을 옴니버스형식으로 묶은 영화이다.

 

 

<stranger : 죽은 여자를 모르던 여자, 산책 나왔다 죽은 여자를 발견한다. 그 이후 비루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 온다.>

 

 

<sister : 죽은 여자가 자신의 언니이길 간절히 바라는 여자,검시관인 그녀는 15년전 실종된 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나 그녀의 엄마는 그럴리 없다고 철썩같이 믿는다.시체를 못찾았기에 살아 있을거란 희망을 포기 못하는 실종자 가족의 아픔을 뒤로 하고 그녀는 과연 새출발을 할 수 있을까. >

 

 

<wife : 바깥으로만 나도는 남편에게 질렸다고 바가지를 긁어대면서도 떠나지 못하던 아내는 우연히 남편의 비밀을 알게된다. 과연 그녀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mother : 딸이 살해된 후에야 딸의 가출이 계부의 강간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된 엄마. 자신은 몰랐다면서 울부짖어 보지만, 딸을 보호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 그녀를 괴롭힌다. 딸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그녀는 손녀를 데려 오는데...>
 
 
< And dead gir : 죽은 여자,회복할 길 없이 망가져버린 자신의 인생에서 한줄기 빛인 딸의 생일을 챙겨주려 애를 쓰던 창녀.자신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모른다며 아이를 위해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과연 그녀의 희망대로 인생이 풀려 나갈 것인지...>
 죽은 여자를 중심으로 그녀와 관련 있는 여성들의 험난한 인생사가 주르르 펼쳐지던 영화였다. 배우들의 호연, 줄거리의 설득력과 탄탄함은 돋보였지만, 어둡다는 것이 내내 마음을 짓누른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에 버금가는 수작이라는 말도 있던데, 아무리 봐도 전작이 더 낫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유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가 의문이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배우들의 연기 변신에 찬사를 보내게 되며,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것이 반가웠음에도 선뜻 추천하기가 꺼려지던 것도 그때문...우울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서 말이다. 각자 개인의 취향에 맞춰 알아서 판단 하시길...


그건 그렇고, 그러고보니 이 영화에  dead gir로 나오는 브리트니 머피가 2009에 죽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쉽고 안타깝고...그렇게 눈부시던 여자가 고작 32의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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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블레이크 모리슨 지음, 황보석 옮김 / 포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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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년 만년은 아니라도 백년은 넉근하게 사실줄 알았던 아버지가 일흔 다섯 나이에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자, 저자는 자신이 슬프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나이를 마흔 한 살이나 먹었으니, 한 집안의 가장이 되고, 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잘 나가는 작가로 상도 받고...그렇게 어른이 되었으니 이젠 자신이 대처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영생을 살 수는 없으니 자신이 먼저 죽지 않는 한 부모의 죽음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온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격렬한 슬픔에 저자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슬픔을 다스려 보려는 생각해서 시작된 것이, 나중엔 자신을 치유하는 글쓰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다.

아버지를 보내면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세월을 회고하고 있던 자전적 소설이다. 아버지라는 분이 얼마나 특이하신 분이었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자식 사랑을 드러내셨었는지,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와 왜 마지막까지 그렇게 서먹할 수밖엔 없었는지라는 것에 대해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가감하는 것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첫장부터 작가는 범상치 않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 교통 체증에 막혀 누구도 꼼짝 하지 않은 도로를 청진기를 휘둘러서 빠져 나오는 아버지 아서, 가족들은 다들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지만서도 그는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에 마냥 의기양양해 한다. 그렇다. 이 아버지는 고지식과는 거리가 먼, 지름길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길로 가려고 하는, 없다면 만들어서라고 가려고 할 그런 사람이었다. 외아들의 직업이 작가건만 유일하게 읽은 책이 <조스>라는 아이러니는 차지하고서라도, 막 부임한 신임 목사에게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던 사람, 내연녀를 이모라는 이름으로 가족들 근처에 얼쩡 거리게 두면서도 그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 그런 비밀을 입 밖에 내지 않는 한 아내에게 상처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 마흔이 넘는 아들 주변을 완벽하게 보호하면서 그것이 아들에게 부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 남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걸 체면 손상이라고 여겼을 사람, 누구에게나 직설적이고, 참을성이 없으며, 임기 응변과 순발력의 달인이었던 사람...그는 과연 나쁜 사람이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은인이라고 여기던 그가? 하지만 가족으로써 아버지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저자는 아버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해 본다. 그리곤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대한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고 있던 소설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보니, 치부라고 할 만한 사실도 솔직하게 써내려 간 것이 특징. 지금이야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서도,  20여년전에 나온 책이니 당시로써는 좀 외설스럽다는 말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의사였던 아버지와 엄마 덕분에 죽음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작가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는 사실에 어찌나 당황하고 놀라던지, 내가 다 심장이 내려 앉을 정도였다. 하긴 평생 자신 옆에 있었던 사람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관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 십분 이해가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서도, 심하다 싶긴 했다. 진실에서 빗겨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작가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칭찬받아야 마땅할 것이나, 다만, 이렇게 자세하게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까 , 꼼꼼해도 너무 꼼꼼하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별로였다. 작가도 그런 자신을 의식했는지 이런 말을 한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본다면 이런 말을 했을 거란 것이다.

  "이 한심한 얼간이 녀석아,
염병할 칠십 오 년중에서 사십 년이 넘는동안
너도 네 삶을 살았는데
하는 짓이라는 게 고작 다 죽어가는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라니.
이 어리석은 놈아, 너는 죽어간다는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도 된다고,
그게 무슨 이야깃거리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죽음에 뭐 그리 대단한 게 있어?
그러지 말고 내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우리가 누렸던 모든 즐거움과 이룬 일들이 어땠는지
내가 너와 네 동생과 네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내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남기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나 얘기해라.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하지?"

정말로 옳은 말이다. 죽는다는 것에 호듭갑을 떨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누군가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과정인 것을. 해서 죽음에 대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적어 내려가는 저자가 심하다 싶긴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정할 수 밖엔 없었다. 그가 그것을 꽤나 잘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우아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솔직함과 우아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서도 용케 균형을 잃지 않는 그를 보려니, 저자가 어떻게 이런 저런 큰 상을 수상하게 되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만큼 필력이 출중했단 말씀.

제목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 제목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 작가는 아버지가 암을 판정받은 순간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거기에 입관하는 장면까지 함께 한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 못할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아버지의 시신은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던 간에, 영혼이건, 삶의 정수건 ,생명이건 간에, 그것이 떠난 아버지의 몸은 더이상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걸 직접 체험한 저자는 생각한다. 과연 그 사람을 본인이라고 여기게 만드는건 무엇일까 라고.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충분히 그의 말을 이해할 듯...해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하고.

" 관뚜껑이 덮이기 전이었습니까?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일어나 앉아 무슨 말인가를 했을 때였습니까?
당신을 마지막으로 알아보았을 때였습니까?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을 때였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은 저자가 자신에게 한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겠지. 누구에게나, 그 사람과의 마지막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장면이 있을테니 말이다. 내 단언컨대, 그건 절대 관뚜껑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살아있음을 우리가 추앙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살아있음만 기억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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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벽돌공 테드는 5살때 이래로 집 앞 정원을 파며 고고학자로써의 꿈을 키워온 청년이다. 언젠가는 자신이 대단한 것을 찾아낼 것이라는 집념 하나만은 그대로인 테드는 그 열정때문에 올해만도 7번째 해고를 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럼에도 마냥 낙천적인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주어 진다. 친하게 지내던 고고학 교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황금의 도시인 파이티티를 찾아가는 페루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것, 파이티티를 열 수 있는 비밀의 열쇠라는 반쪽짜리 석판을 가지고 떠난 테드는 공항에서 나머지 반쪽을 가지고 있는 사라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고 만다.

                                            < 석판을 맞춰 보고 있는 테드와 사라>


하지만 석판을 쫓는 것이 둘 만이 아니라서, 테드는 페루에 도착하자마자 악당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다.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테드는 사라의 아버지가 같은 일당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사라와 테드는 사라의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마추피추로 가게 된다. 마추피추에 도착한 일행은 사라의 아버지를 찾기도 전에 악당들에게 다시 잡히고 만다. 악당들 손에 잡혀 있던 아버지와 만나게 된 사라 일행은 협박에 못 이겨 석판을 넘겨 주게 된다. 드디어 파이티티가 어디에 있는 지 알게 된 악당들은 사라의 아버지를 데리고 떠나고, 남겨진 사라와 테드 일행은 석판의 열쇠 뒤에 위치해 있던 진짜 파이티티의 지도를 발견하게 된다. 악당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는걸 알게 된 테드 일행은 진짜 파이티티를 향해 탈출을 시도 하는데...과연 그들은 파이티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황금의 도시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전설상으로만 내려오는 뜬구름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별로 재밌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 탓에 별 기대 없이 보러 갔는데, 의외로 그럭저럭 괜찮았다. 혹시나 작년에 본 <아더의 크리스마스> 같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적어도 그 수준은 아니더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아더의 크리스마스>가 진짜로 끔찍하긴 했나보다. 그 트라우마가 본 지 1년이 다 되가는데도 여전히 상기되는걸 보면 말이다. 하여간 영화도 잘 골라야지 잘못 골랐다간 이렇게 잔상이 남아서 악몽을 꾸게 된다. 해서 굉장히 좋다고는 말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영화, <테드>는 딱히 굉장하다는 점은 없었지만 소소한 재미로 점수를 따는 그런 영화였다. 말하자면 강한 한방은 없지만 계속해서 작은 잽들을 날려대는 그런 영화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보자면, 강한 캐릭터는 없지만 깨알같은 웃음을 주는 등장인물들로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특히나 분노한 새로 나오던 앵무새는 벨조니가 압권이었는데, 말을 못하는, 새라고 불리는걸 싫어하는, 건방지고, 삐닥하며, 한 성깔하는 인물로써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이 등장하면 왠지 분위기가 살면서 무언가 재밌을 거란 기대를 갖게 했다는 점에서 이 애니에서 가장 성공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한다. 그외 쿠키라면 불물을 못 가리는, 덕분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고만 치고 다니지만, 그 사고 덕분에 우연히 테드 일행을 구해주기도 하는 강아지 제프나, 걸어다니는 만물상으로 모든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시는 프레디는 그 탁월한 장사꾼 기질로 관객들을 웃기고, 나머지 시간에는 테드 일행들이 모험을 무사히 마치게 하는데 일조함으로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더 무섭게 생겼구만 테드를 보곤 벌벌 떨던 파이티티의 수호신 미라도 눈길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별 의미없는 캐릭터인줄 알았는데, 알보고니 나름 존재감이 있는 등장인물이더라. 특이하게 생겨서인가 아이들에겐 그 캐릭터가 더 인상이 깊게 보여지는 듯했다. (아, 이때의 아이들이란 내 조카를 일컫는 것임. 내가 아는 아이가 조카밖엔 없어서리...단수를 복수로 확대 해석함엔 주의 요망~~~!)


< 주연들 외의 등장 인물들을 모아놓은 포스터, 이 영화에선 오히려 주연보다 조연들의 활약이 더 돋보인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과연 민주적인 애니라고 할 만했음.>


더빙판으로 봤는데, 최고의 더빙이었다고는 못하지만 괜찮았지 싶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엔 하하를 좋아해서인지 테드의 목소리에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다만 아쉽게도 3D 효과가 워낙 미미해서 2D로 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아마 차이가 없지 않나 싶다. 3D 효과라고 할만한게 없었으니 말이다, 딱히 3D의 강렬한 효과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서 불평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서도, 이렇게 별 차이 없는 3D라면 굳이 3D로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지 싶다. 스토리도 그냥 저냥 무난하고, 유머도 간간히 터져 나오고, 앵그리 버드는 귀여운데다, 결론도 화끈해서 적어도 애니로써의 이름값은 하지 않았는가 한다. 처음 만난 스페인 산 애니인데, 자국에서 유독 히트를 쳤다고 한다. 그걸 보면 아마도 스페인 사람들은 여전히 잉카 제국의 황금에 대해 미련 내진 향수가 남아 있는가 보다. 영화 줄거리 속에 투우 장면이 뜬금없이 나와서 수상타 했는데, 아마도 그것이 뜬금없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스페인의 정서가 배여 있어 스페인 사람들이 열광한게 아닐런지...그런데 여기서 의문!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면서 왜 굳이 주인공을 미국인 벽돌공으로 한 것일까? 그게 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애니의 주인공이 늘 미국인이여야 한다는 법은 없을텐데 말이다. 갑자기 이유가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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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이 넘어서도 아버지 정육점에서 배달일을 데이비드 우즈냑은 걸어다니는 사고 뭉치다. 일을 시켜도 제대로 해낸 적이 별로 없는 그를 가족들 이하 주변 사람들은 갈구기 바쁘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의 페이스로 일을 해나가는 그에게 남 모르는 걱정 거리가 있으니 바로 오래전 진 빚 때문에 깡패들이 쫓아 다닌 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이모 저모 노력을 하긴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돈을 꾸어줄 멍청이가 세상 천지에 있을리 없다는게 문제다. 혹시 돈벌이가 되지 않을까 싶어 대마초의 수경재배까지 시작했건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잘 자랄 생각이 없는 녀석들때문에 그는 애가 탄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어디서 돈을 구해오나 걱정하고 있을 즈음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 두가지가 전해진다. 한가지는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20여년전 정자 은행에 팔았던 씨(?)들이 모두 장성을 해서 그를 찾는다는 것. 자식이 한 명 생길 거라는 소식에도 가슴이 폭삭 내려앉았던 데이비드는 자신의 자식이 이미 533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 중 142명이 자신을 알고 싶다며 소송을 걸었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곧바로 동네 변호사 친구를 찾아간 데이비드는 절대 자식들을 만나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한다. 데이비드를 변호하게 된 폴은 그의 자식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서류를 건네주고, 아무 생각없이 그 중 하나를 뽑아든 데이비드는 깜짝 놀라고 마는데...





부모님을 이태리 여행에 보내 드리느라 빚을 진 한 청년이 있다. 그에겐 돈이 간절히 필요했지만 배운게 없는 그에게 호락호락 돈을 빌려준 사람은 없었다. 결국 정자은행에 가서 스타벅이란 가명으로 자신의 정자를 팔게 된 청년은 그 이후로 그 일을 까맣게 잊어 버린다. 그 자식들이 그를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해서 하루아침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중년의 사내가 이 황당한 상황에 당황하는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이것이 그에겐 불행일까 , 아니면 행운일까. 처음엔 기 막혀 하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던 사내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부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뜬금없이 자식이라고 나타났다. 과연 그 아이들에게 부성을 느낄 수 있을까? 라는게 의문이었는데, 주인공이 하도 정이 많은 사람으로 나와서 그런가, 그 점을 설득하는데 무리가 없더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해가 가도록한 것이 이 영화의 장점. 예를 들어보자면 자신의 아이들 중 하나가 축구 유망주라는걸 알게 된 데이비드는 당장 축구장에 달려간다. 그리곤 경기 내내 안절부절 못하면서 경기를 주시한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전혀 상관없는 아이었는데도, 자신의 아이라는걸 알게 된 후에 그렇게 달라진 것이다. 우습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너무 그럴 듯 했다. 실제로 자신이 아는 사람이 경기장을 누비고 다니면 경기를 보는 눈이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그걸 시작으로 해서 자신의 아이들을 차례로 찾아 다니면서 조금씩 도움을 주는 데이비드. 딱히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건 아니지만,  그보단 수호천사격의 착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들이 감동적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선행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리요. 그에게 진한 부성이 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 주다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특했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비로서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아이들이 아니였다면 그가 철딱서니 없는 민폐형 띨띨이에서 벗어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돌보려면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그걸 자연스럽게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관람 포인트, 주고 받는 대화들이 재치있고 유머스러워서 남세스러운 소재임에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감동적인 가족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마음에 드실지도. 물론 적어도 15살은 넘어야 하겠지만서도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만약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생각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과 네 자식의 그 현격한 거리가 이 영화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동서양 공통이라는것을 깨닫게 해준 영화. 아이를 싫어하시는분들은 한번 보심도... 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그렇게 내 자식 내 자식 하는지, 그 마법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 내 아이들이 소중하다는걸 알게 되자 남의 아이들의 안전에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데이비드>




< 자식들 중 하나를 따라 얼떨결에 들어간 호텔에서 데이비드는 그곳이 자신을 찾는 자식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동받아 울컥하는 데이비드. 그가 얼마나 마음이 약한 사람인지 보여주던 장면으로 , 아마도 이런 장면 때문에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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