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땀 - 여섯 살 소년의 인생 스케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스몰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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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리뷰를 쓰기 어려운 책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이 그렇다. 무언가 한마디라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까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다. 또다시 부모를 고발하는 책이다.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다. 고발을 당해야 하는 부모 입장에서건, 부모를 고발해야 하는 아이 입장에서건 썩 내키지 않는다. 보는 사람이 이렇게 불편한진대, 글을 쓰는 입장에선 오죽했으랴 싶다. 냉정하고 건조한 톤으로 그려내서 그렇지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그럼에도 동서 고금을 통해 왜 이런 책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쉴새없이 생산되는지,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지 분통이 터진다.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적어도 아이를 가지려면 20세 이상은 지나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식과의 연령차는 대충 20살에서 30이 될 것이다.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대충 알 것 아닌가.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몰라서 그랬어요 라는 말을 예전에는 믿었는데, 요즘은 반신반의다. 과연 아이를 부모는 무어라 생각하는 것일까?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적어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만 있다해도 이런 파국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 것들을 주장하는 내가 현실성이 없는 것일까? 과연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어야 하는 것일까? 복잡한 기분이다.


5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 여섯살 난 저자 데이비드 스몰에게 엄마란 공포의 존재다. 하루종일 기분 나쁜 표정과 거친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 엄마는 여섯살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자신이 아이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이리 저리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엄마를 피해 다니던 저자, 하지만 여섯살난 아이가 세상을 이해해봤자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엄마에게 사로잡혀 따귀를 맞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이는 그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억울할 뿐이고. 그건 그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어서, 외할머니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서 미쳤냐고 물었다가 된통 당한 데이비드는 자신의 목에 혹이 난 것을 이웃이 발견하자 깜짝 놀란다. 그 이웃이 부모에게 하는 말, " 설마 이걸 못 본 건 아니지?"  라는 말에도 묵묵 부답이었던 엄마와 아빠--그들은 정말로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하지만 아버지가 의사임에도 , 마침 아버지가 승진을 했음에도, 데이비드가 수술하기까진 3년 반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부모의 사치 광풍속에 수술에 쓸 돈을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아마도 돈 보다는 아이에게 무관심하기로 작정한 듯 보였지만서도... 집보다 자신에게 더 친절한 병원 사람들에게 감동한 데이비드는 하지만 간단하다는 수술이 몇 차례 더 이어지고, 종국엔 성대 한 쪽을 잃어버린 채 병원을 나서게 되자 의아해진다. 나중에 그가 암에 걸렸던 것이며, 거의 죽을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 사실을 숨긴 부모에게 앙심을 품는다. 청소년이 되자 마냥 엇나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는 " 너에게 쏟아 부은 돈이 얼만데 이 모양이냐," 를 외치면서 질타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보내던 그에게 기적처럼 희망이 찾아온다. 분노와 고통으로 삐딱해진 그를 감당하지 못한 부모가 정신과 의사에게 그를 보냈는데, 그 의사가 분노속에 일그러진 그의 본모습을 보아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데이비드에게 꼭 필요했던 한마디를 들려 준다. "네 어머니는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알고는 있었지만 직시하지 못했던 한마디를 듣게 된 데이비드는 비로서 자신의 해방을 꿈꾸게 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의 억압에서의 자유를 말이다. 그때부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데...


피부를 바늘로 땀 뜨는 것 같은 고통스런 책이었다. 저자의 고백이, 그의 어린 시절의 지옥같은 광경들이 치욕스럽게 나열 되는데, 아이의 상처입기 쉬운 연약한 감수성으로 어른들의 폭력적인 몰이해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심난했다. 왜 아이에게  부모는 이런 모습밖에 보이지 못한 것일까? 데이비드의 엄마와 아빠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 아이가 아무것도 느끼지도 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아들인 데이비드는 인간이기나 했던 것일까?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인간으로써의 존중만이라도 해줬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데이비드가 그려낸 엄마가 시중 괴팍하고 모났으며 험상궂은 아줌마라는 점이었다. 평생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듯한, 성마르고 불쾌한 표정의 언제라도 싸움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의 아줌마 말이다. 해서 뒷편이 실물 사진을 보곤 깜짝 놀랐다. 실제 데이비드의 엄마는 연약해 보이는 야리야리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오죽 아이를 다그쳐 키우댔으면,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란 존재가 악마의 쌍둥이 자매처럼 각인되어 있겠는가. 아마도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엄마의 영혼이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닌한 알지 못하는...  어쩜 그 엄마는 밖에서 보기엔  친절하고 연약하며 선량한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가면을 집에서는 쓰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겠지.  나중에 어른이 된 데이비드는 그래도 엄마를 이해하려 애를 쓰는 듯 보인다. 레즈비언이었던 엄마가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불행으로 자신을 그렇게 학대한 것이 아닐까 라는...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불행이 있었다니 안 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가지 의문은 남는다.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내 자식까지 불행하게 만들어도 괜찮은 것일까?  부모에게 과연 그런 권리가 있나? 내 불행이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그게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건 아니지 않나?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무리 삶이 복잡하고 피곤하다고 해도, 아이의 삶은 아이 몫이다. 우리의 불행으로 그늘 지우게 하면 안 되는 그들의 몫 이란 뜻이다.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짓은 그만 둬야 하는게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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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치킨 - 까칠한 아티스트의 황당 자살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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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 (이란등 중앙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류트족 발현 악기) 아티스트인 나세르 알리는 새로운 타르를 장만하려 거리에 나왔다가 옛 애인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불러보는 나세르와 달리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쓸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악기점에 들른 나세르를 맘에 드는 타르가 없자 속이 탄다. 이것 저것 명품이라는 것을 모조리 타보지만,  그때마다 알게 되는 것은 세상 어디를 돌아다녀도 그의 스승이 물려준 그의 타르만한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귀한 것인지 모르는 아내는 남편이 애지중지 한다는 이유로 부부싸움 끝에 타르를 부셔 버렸고, 그런 연유로 그가 지금 악기상을 돌아다니면서 타르를 구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마음에 든 타르를 구하지 못한 나세르를 자신이 어쩌다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한없이 울적해진다.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하려 했던 그는 딴따라라는 이유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다. 오매불망 그녀를 잊지 못하던 그에게 그를 짝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났고, 초등학교 교사라는 이유로, 그리고 결혼은 얼굴보단 성격이 좋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제 네 아이의 아빠가 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이 이렇게 풀려나간 것에 대해 불만이 크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 못하는 아내와 맨날 타르만 타는 남편이 지겨운 아내, 둘의 충돌은 어쩜 불가피했을 것이다. 곰곰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던 나세르를 이제 그만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과연 그는 자살에 성공할 것인가? 그의 자살을 막아줄 것은 정녕 없을 것인가?


50년대 이란의 사회를 배경으로, 민감한 예술성을 지닌 남자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만화다. <페르세폴리스>의 작가인 마르잔 사트라피 답게 냉소적이고 건조한 톤으로, 현실에서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한 남자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에 이르는 과정들이 설득력있게 펼쳐지고 있었다. 사랑보단 생존이, 예술성보단 보편성이 덕목인 사회에선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살아 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 했다. 개인주의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적어도 그가 주장하는 바나 재능이 그렇게 천대를 받지는 않았으련만,  이란이란 사회에선 그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반향도 불러내지 못하는걸 보면서 말이다. 해서 민감함과 감수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이방인에 게으름뱅이 취급을 받아아 했던 나세르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전체주의라는 사회에선 그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극단적인 선택이긴 하지만 그가 속상한 마음에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 사실 알고 보면 그는 조금의 인정과 조금의 이해를 바란 것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아마도 마르잔 사트라피는 과거의 답답한 이란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했던 한 인간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개방된 사회,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나와 다름을 이해하는 사회의 장점을 설파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한 사회였다면 나세르가 자살을 결심할 이유가 없었을테니 말이다. 결론은,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인간에게 덜 고통스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고민을 해야 하는게 아닐까 한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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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1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착수 미생 1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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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추천으로 보게 된 만화인데, 직장인들의 바이블이라고 불릴만한 책이었다. 제목이 우선 의미심장하다. 미생...아직 살아있지 못함. 바둑에선 두 개 이상의 집이 있어야 살아있다고 하는데, 그전까지는 살아있지 못함으로 처리한다고 한다. 그 작은 두 집을 확보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해야만 비로서 살아있음으로 봐준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비단 바둑뿐이랴. 직장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갖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살아있다고 말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겠지.  이 만화는 어릴적 바둑의 신동 소리를 듣던 장 그래가 입단에 실패한 뒤 회사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록 바둑에는 실패했지만 이제 새로운 분야에서 자신의 집 두개를 마련하기 위해 도전하는 길, 그는 그저 저 많은 불 빛들 중에서 자신만의 빛 하나를 갖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고졸 출신에 평생 해온 것이라곤 바둑밖엔 없는 신입이,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본인만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이겠지. 처음엔 회사에 취직이 된 줄 알았던 장 그래는 자신이 2개월짜리 인턴으로 온 것이며, 다른 쟁쟁한 인턴들과 경쟁을 해서 뽑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연히 주눅이 들어 어쩡쩡한 그에게 하지만 회사란 사회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운 좋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살아있는 영업 3팀에 배정이 된 그는 점차 주변을 익혀 나가게 된다. 상사인 오 과장과 김 동식 대리의 적절한 가르침 덕분에 간신히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던 그는 인턴들과의 P.T 면접에서 한 석률이라는 현장주의자와 팀을 이룸으로써 핵폭탄 처리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자신이 힘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직장 초짜들이 무모한 열정 하나만으로 아득 바득 버티는 곳에서 과연 이 전직 바둑연습생은 어떻게 살아 나가게 될 것인가? 그의 파란만장한 직장 적응기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만화의 관전 포인트로, 무엇보다 디테일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것이 장점이다. 마치 내가 장 그래가 되서 직장 초년생이 된 듯 공감하기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그런 점은 정말 힘들겠구나, 내진,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답이 없긴 하겠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하지만 답이 없다고 해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해서, 부당하다고 해서,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이 인생 살이 아니겠는가. 해서 장 그래는 열심히 생각하고 답을 내며, 자신만의 인생의 바둑을 두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곤 깨닫는다. 인생의 바둑 역시 좁은 바둑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별다른 재능이나 프리미엄이 없다고 생각했던 장그래는 바둑판에서 배운 통찰력이야말로 회사생활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바둑판에 대입해서 직장 생활의 수를 가르쳐 주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만화책이었다.


장점들이야 차고 넘치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일단 대입이 쉽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당신이 누군건 간에 장 그래란 사람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래, 초년생땐 이랬지. 직장 생활 처음 할땐 이런 기분이었고, 상사들의 이런 점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라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말이다. 거기에 뭐랄까. 장그래가 직장에 적응하게 되어 가는 과정들에서 보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볼품은 없지만 열정만큼은 짱짱한 만년 과장 오과장을 비롯해서, 이기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김 대리와 함께 영업 3팀의 팀원으로써 일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들에서 보는 쾌감 말이다. 그들이 기합에 들어가 있건, 안 되는 일을 밀어 붙이느라 고민을 하건, 밀어붙였음에도 통과되지 못해 좌절중이건 간에 그들이 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 무척 뿌듯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직장 생활이 고되다고 느끼면서도 다들 아침이면 꾸역꾸역 전철을 향해 가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취감때문이 아닐런지...직장 생활에서의 힘듦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도움을 주고 받는 점까지 그려 주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초년생으로써는 절대 무시 못하는 직장 고수들의 한 수를 보게 되는 점도 무시 못하는 장점. 새삼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이런 일들을 하면서 다들 애쓰고 있구나 싶은 짠함이 물씬 배어나오게 했다.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 장 그래가 성장하는 모습이나, 그전엔 몰랐던 자신의 장점을 찾는 모습도 뿌듯하긴 마찬가지로,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별 볼일 없는 영업3팀을 말이다.


흥미진진한 전개를 가진 스토리가 있는 만화고, 등장하는 캐릭터들 역시 개성 만점인데다, 사회 초년생들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조만간 드라마를 통해 보게 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도 방영된다면 누가 주인공으로 나오건 간에 인기를 끌게 되지 않을까 한다. 직장 생활의 애완을 알고 싶다시는 분들은 들어보심도 좋을 듯...과거를 추억하건, 현재를 반영하건, 미래를 그려보건 간에, 아마도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기 마련인 직장 생활의 축소판을 보게 되는건 기본이요, 깨알같은 잔재미는 덤에다, 세상을 보는 지혜를 보게 되는 것은 덤에 덤이니 말이다. 통찰력있는 만화를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 다음 웹툰에서 현재 연재중이란 점도 알아 두심 유용하실 듯. 아니, 이미 다들 알고 계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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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증언 1
존 카첸바크 지음, 김진석 옮김 / 뿔(웅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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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던 기자 코워트는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한 사형수의 편지를 받고는 호기심이 동한다. 허실삼아 교도소에 들른 그는 한 소녀의 강간  살해범으로 복역중인 로버트 얼 퍼거슨을 만나게 된다. 그마나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형수로 교도관들에게 나름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코워트에게 자신이 죄수가 된 것은 형사들의 고문에 의한 것이었으며, 전적으로 인종차별에 의한 편견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신빙성 있다고 생각한 코워트는 퍼거슨을 취조한 두 형사를 만나보고, 그의 무고에 대한 심증을 굳힌다. 더군다나 우연인지 기적인지 그의 말을 뒷받침 해주는 이가 나타났으니, 바로 교도소 내에서 미쳤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형수 블레어 설리반이었다. 그는 모호한 말투로 자신이 그 소녀를 강간 살해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며 형편없는 사법기관을 비웃는다. 어렵사리 시작된 재심은 결국 퍼거슨의 무죄 방면으로 끝이 나고, 그 일을 계기로 코워트는 플리쳐 상을 수상하게 된다. 설리반의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자 모두들 그 사건은 이제 그것으로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한다. 설리반이 코워트를 불러내 새로운 사실을 말하기 전까진 말이다. 설리반의 지시대로 그가 설명한 장소에 간 코워트는 노부부 두 사람이 살해당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설리반이 어렸을 때에 학대를 일삼던 계부와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코워트는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들을 누구보다 죽이고 싶어했던 설리반이 감옥에 갇혀 있는 판국이니, 그가 그들을 살해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그들은 누가 살해한 것이며, 설리반은 어떻게 그 둘이 살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코워트는 그것이 퍼거슨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데...


꼼꼼하게 완성도 높게 쓰려 애쓴 티가 나는 소설이긴 했다. 다만 문제는 지나치게 떡밥을 여기 저기 뿌려 대느라 본문에 들어가기 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는 점, 해서 예기치 않게 독자로 하여금 치명적인 지루함을 불러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아마 작가로썬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이었을 듯... 이 책을 정말 재밌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2권이 아니라 한 권 분량 정도로 압축했어야 했지 않았나 싶다.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많고, 별로 개성적이지 않은 그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역사와 성격을 만들어 주느라 페이지를 할해하다보니, 산만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살리는 문장을 썼었어야 했는데, 줄창 설명만 하는 문장들만 나열하다 보니, 산만하다 못해 지루해져 버렸다.  어떻게 전개 되는 것일까? 내진 과연 그 사형수는 무고한 녀석일까? 아니면 진짜로 못된 놈일까 라는궁금증에 끝까지 보긴 했지만 심각하게 집중해서 보게 되진 않더라. 흡인력 한 20% 정도? 읽다 말다 하기에 딱 좋은 그런 문장들, 그나마 호기심이 아니라면 끝까지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굳이 이렇게도 많은 등장인물들이 필요했고, 그들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래 이 작가, 속도감 하나는 괜찮았는데 말이다. 하여간 처음으로 이 작가에게 실망한 그런 책이 되겠다. 그외에도 참신함이 부족하다는 점도 별로였다.  이 책 저책에서 짜집기를 해서 만들어 낸 그런 책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짜집기를 하면 참신해 보일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글쎄...무고하게 잡혀간 흑인 범인, 그는 무죄를 주장하면서 인종 차별을 주장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정의감 넘치는 기자의 출현, 처음엔 반신반의하다 결국 정의를 확신하며 사건에 뛰어 드는 사명감 넘쳐주는 기자는  자신이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 치도 하지 못한다. 거기에 범인을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흑인 경찰관이 등장하고, 기자는 그를 백인이 되고 싶어 환장한 흑인으로 여기고, 그 형사 역시 딱히 그런 기자의 편견에 딴지를 걸지 않는다.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음직 하지 않으신지?  데자뷰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그래도 하나로 묶어서 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대단하다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누구도 작가에게  여기 저기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다고  말 해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아마도 반전이 특이해서 그나마 이야깃 거리가 될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물론 그것이 흥미롭긴 했지만서도, 그걸로 지루함과 식상함을 메우기는 부족해 보인다. 반전으로 먹여 살리기엔 너무 길게 늘어져서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작가는 왜 인종 차별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것일까? 이름을 들어보면 유대인이 아닐까 싶던데, 왜 흑인의 차별에 그렇게 민감하게 촉각을 세우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진짜 인종차별주의자라서?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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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44년, 아직은 아니지만 30년 후의 미래엔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과거로의 여행이 가능하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아직은 불법이라 범죄 조직들만 몰래 이용하고 있다는 것, 그들은 주로 미래의 사회에선 가능하지 않은 청부살인을 과거로 보내 시행하고 있었다. 즉, 타겟을 과거로 보내 전문 킬러 조직인 " 루퍼 "들로 하여금 죽이게 한다는 것, 루퍼 입장에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고, 미래에선 타겟을 죽인 자가 없으니 그야말로 완전범죄였다. 엄마에게 버림 받은 후 거리를 떠돌다 루퍼 조직에 들어온 조는 냉철한 킬러이다. 낮에는 미래에서 온 자를 제거하고 , 밤에는 마약에 절어 살던 그는 친구 세스의 방문에 깜짝 놀란다. 그의 말을 들어본 즉슨, 미래에서 온 자를 죽이려 가보니 바로 30년후 미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루퍼들의 계약해지 통보 방식으로, 미래의 자신을 없애는 특이한 조건으로 그후 30년과 막대한 돈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세스가 차마 미래의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총을 거두었다는 것, 미래에서 온 세스는 새로운 보스인 레인 메이커라는 자가 악질이며, 모든 루퍼를 죽이고 있다는 말은 남긴 채 도망간다. 조직에게 쫓겨 벌벌 떨며 찾아온 세스를 조는 은궤를 지키기 위해 팔아넘기고, 결국 세스는 처형되고 만다. 세스의 죽음으로 미래의 세스 역시 사라지고, 그렇게 그 일은 일단락 지어지는 듯했다. 다만...


새로운 일을 맡아 현장에 나간 조는 미래에서 온 자가 30년후의 자신임을 알아본다. 어버버하는 사이 미래의 조는 도망쳐 버리고, 어렵사리 둘은 조가 아는 식당에서 조우를 하게 된다. 미래에서 온 조가 하는 말이, 원래 조는 은퇴식을 무사히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 갔었다고 한다. 돈이 떨어지자 다시 킬러의 세계로 돌아간 조는 아름다운 중국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에 힘입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문제는 암살당한 지 딱 30년이 되는 날 그를 잡아가기 위해 루퍼 조직에서 왔고, 그 와중에 조의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의 눈 앞에서 죽는 광경을 목격한 조는 이대로 순순히 죽어주지 않겠노라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어긋나 버리게 된 과거, 미래에서 온 조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새로운 과거를 만들 생각이다. 어린 레인 메이커를 잡아 제거해 미래의 골치덩어리를 해결할 생각인 그, 문제는 30년후 레인 메이커가 될 아이가 누군지 등록번호밖엔 모른 다는 점. 검색으로 그 번호를 가진 아이가 3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미래의 조는 아이들을 살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이에 현재의 조는 그를 막기 위해 그 아이들 중 한 명 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조는 젊은 엄마 사라와 함께 살고 있는 귀여운 소년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모자인줄 알았던 조는 아들 시드로부터 사라는 진짜 엄마가 아니며 진짜 엄마는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수상쩍은 기운이 흘러 넘치는 이 모자, 과연 이들이 숨기고 있던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미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30년 후의 조와 현재의 조, 현재의 조는 미래에서 온 자신을 죽이려 하나, 문제는 미래의 조가 그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것, 해서 그의 제거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30년이나 잘 살았으니 죽어달라고 애원하는 조에게 , 미래의 조는 그럴 수 없다고 도리질을 한다. 아내를 살려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임무가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엄마 사라와 아들 시드, 평범해 보이는 이 모자가 실은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사자로 나온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멍할 수 밖엔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기 때문이다. 와,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감탄하게 해주던 장면으로, 아마도 마지막 장면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수작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영화는 일단 차분차분 미래의 세계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조가 루퍼로써의 삶을 살 수밖엔 없었던 이유와 충분히 계약조건을 이해할만큼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포함해서. 예기치 않게 일이 어긋나게 된 것은 그가 사랑에 빠졌고 , 그 사랑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데 있다. 해서 그는 살해된 아내를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다. 미래의 악당으로 자랄 아이를 미리 처단할 생각으로 말이다. 미래의 조가 하는 말에 어처구니 없어 하던 현재의 조는 시드를 만나면서 비로서 그의 말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된다. 과연 시드의 비밀은 무엇일까?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한 모자의 분위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참기 힘든 궁금증을 자아내고, 결국 그 전말을 알게 되자 소름이 끼칠 수밖엔 없었다. 후반부를 보여주기 전반부를 달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후반부의 스토리가 탁월하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 이야기가 흘러 가길래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의아했었는데, 알고보니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던 것이더라. 영화를 보기 전엔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죽인다는 설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는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그보단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 미래는 결국 현재의 선택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걸 보여주고 있었다. 근래 본 SF 영화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미에, 30년 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묘한 설득력, 그리고 감동까지, 잘 만든 작품이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좋다. 아귀가 좀 안 맞는다고 해도 용서가 될만큼 스토리 자체가 압권이다. 조셉 고든 레빗이나 브르스 윌리스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꼬마 시드를 연기한 피어스 가뇽이었다. 이 꼬마, 정말 연기 잘한다. 선과 악, 천진과 천재성을 동시에 갖춘 모호한 캐릭터를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던데, 도대체 이렇게 연기하는건 어디서 배웠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탁월하더라. 특히 마지막 홀로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앙심을 품는 듯한 그 표정은 왜 조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엔 없었을지 절로 수긍하게 하던 장면이었다. 아마도 이 말은 영화를 보시면 이해하시게 되실 듯...선과 악 어디로도 튈 수 있는 싹을 길러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라는걸 설득력있게 보여줘서 고마웠다. 하여간 그 꼬마 덕분에 영화가 한층 더 재밌었다. 아마도 그 꼬마는 나이 탓에 이 영화를 볼 수 없겠지만서도, 미래가 기대되는 재능 넘치는 어린 배우를 한 명 발견한 것 같아서 흐믓하기 짝이 없었다. 그 꼬마가 얼마나 귀여운가는 영화관에서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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