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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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신 분들이 재밌다고 하길래 기대를 잔뜩 하며 읽게 된 책이다. 흐믓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 가는데 왠 데자부? 분명 언젠가 읽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에 책을 다시 들쳐 보니 얼마전에 읽었던 <흑백>의 후속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흑백>이 다소 비극적인 괴담을 담은 것이라면 이 책은 그보단 밝은 쪽을 담았다고 한다. 읽어보니, 썩 밝다고는 못하겠으나 연작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조금은 실망스런 기분이었다. 왜냐면 나는 그간  이 책이 <하루살이>의 연작이지 않을까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염원이랄지, 기대랄지... 하여간 무사 헤이시로와 그의 천재 미소년 조카인 유미노스케가 나오는 작품이 어서 나와주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탓에 이 작품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알고보니 혼자 헛물 켜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 보니 첫 페이지를 읽는 그 순간부터 김이 샜다. 그럼에도 미미 여사시니 기본은 해주시지 않겠나는 심정으로 읽게 된 <안주>, 결론은 다른 작품에 비해선 그다지 잘 된 작품으로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전작인 <흑백>에도 미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적어도 전작만 같았더라도 괜찮은 괴담이라는 소릴 들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열심히 만들었다고 해서 이야기가 저절로 재밌어 지는 것은 아니니, 이야기가 재밌지 못한 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미 여사에게 달렸다고 할 것이다. 하긴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양산해 내시는데 모든 작품들에 다 신선하고 재치 있으며 감동적이여야 한다고 못을 박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도 어쨌거나 인간 아니겠는가. 하여간 미미 여사가 때론 졸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던 책, <안주>에 대해 말해 보기로 한다면...


약혼자가 집의 하인에게 살해 당하는 광경을 눈 앞에서 보게 된 오치카는 충격에 마음을 닫고 살게 된다. 그런 그녀가 못내 걱정이 된 가족들은 그녀를 삼촌 집으로 보내게 된다. 삼촌인 이헤에는 미시야마라는 장신구와 주머니를 파는 가게를 하고 있었다. 주인 내외의 성실함 덕분으로 날로 번창하는 주머니 가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우연한 기회를 계기로 이헤에는 특이한 괴담을 알고 있는 손님들에게 <흑백의 방>이란 곳에서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게 된다. 다만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조카딸인 오치카, 어린 나이지만 깊은 상처와 어두움으로 그늘져 있던 그녀는 사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말로 진심으로 들어주게 된다. 곧 미시야마는 괴담을 모으는 가게라는 소문이 돌게 되고, 정말로 털어놓고 싶어도 말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르게 된다. 말하자면 오늘 날의 정신과 상담방이 된 것이다. 처음엔 어두운 이야기들로 우울해 하던 오치카는 점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면서 자신의 처지를  되새겨 보게 된다. 그리곤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에 대한 이해를 다른 각도에서 하게 된다. 상처를 치유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흑백>의 기본 줄거리 였다면 <안주>는 그 이후의 일을 다루고 있었다.


이제 어느덧 자신의 상처에 덜 민감해진 오치카는 여전히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 찾아온 사람들의 명단은 바로 이렇다. 산속의 소년은 우연히 만난 뱀신 덕분에 주변의 물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신공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생활을 해야 하는 곳에서 그런 그가 환영받을 리 만무, 해서 가엾은 소년은 곧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민폐 1호의 기피 대상이 되고 만다. 오치카는 황당한 상황에 처한 소년을 도와 그의 처지를 바로 잡아 준다.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친 할머니에게 저주를 받아 평생 괴롭힘을 당하는 자매의 이야기가 그 다음이고, 빈 저택이 인간을 그리워 하는 외로움때문에 요물이 되어 버린 구로스케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이 들게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벌을 받게 된 산골 청년이 결국 마을 하나를 멸망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작품에 비해 재미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설명이 지리하게 구구절절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특별하게 신선하다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이야기 자체가 그저 괴담이라는 것일뿐, 그것에서 어떤 흥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그냥 그저 그런 이야기 정도였다고나 할까. 듣고 나면 금방 잊어버릴 만한 심드렁하고 껄쩍지근한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 보니, 가장 재밌게 읽을 수 있을만한 소재인 구로스케의 이야기조차 그다지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잘 요리했다면 귀엽게 볼 수도 있었을 그런 이야기였음에도, 그조차도 귀엽게 느껴지지 않더라는건 실패했다는 뜻일게다. 미미 여사의 필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소재로는 빵 터줘야 정상이니 말이다. 하여간 그녀의 필력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떨어진다 싶었던 책이었다. 아무리 내 미미 여사의 열성 팬이라고 해도 실망스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뭐, 하는 수 없지.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 수밖엔...그리고 내 미미 여사의 작품은 아무리 페이지가 두꺼워도 상관하지 않는데 말이다. 두꺼운 것은 좋다 이거다. 제발 거기에 내용까지 알차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러면 더 바랄 나위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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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그림자를 읽다 - 어느 자살생존자의 고백
질 비알로스키 지음, 김명진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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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동생 킴, 저자는 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엔 없었을까 궁금해한다.  동생을 갑자기 잃었다는 상실감에 동생과의 추억을 봉인하고 살았던 저자는 외아들이 청소년기가 되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가족안의 저주가 되풀이 되지 않을까 라는... 더이상 동생의 자살에 대한 의문을 서랍속에 가둬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저자는 그간 외면하고 살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시작된 동생 따라잡기...제목 그대로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동생의 그림자를 읽고 있던 책이다. 질문을 하는 주체는 있지만 대꾸를 해 줄 당사자가 없다 보니, 자신의 추측에 의하거나 주변 탐문에 의해서 동생을 그려낼 수 밖엔 없는 저자의 아픔이 제목에 잘 나타나 있지 않는가 한다. 저자가 읽어낸 것은 결국 동생의 그림자에 불과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동생의 실체는 이미 오래전에 무덤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제 저자에게 남은 것은 동생이 남긴 희미한 그림자뿐... 과연 언니는 동생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책을 보면서 가족안에서의 불행이라는 것은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서서히 익숙해 지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그걸 모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딱 자살할만한 상황이었구만서도, 언니는 별별 책들과 심리 상담사를 찾아 다니면서도 여전히 알아내지 못하는걸 보면서 말이다. 그녀는 끝까지 동생이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그것이 진심이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단지 충동이 아니었을까. 진지하지 않은 장난같은 시도였는데, 그것이 나쁘게 악화되어서 일이 그렇게 커져버린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이다. 왜냐면, 그 아이가 그렇게 불행하다는 것을 언니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생이 불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살할 정도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그것은 그녀가 실제로 자살을 한 이후에도, 자살을 한 뒤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해서, 이 책 안에서도 저자는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겐 왜 자살을 택했지? 내가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그앤 정말로 죽고 싶어했던 것일까? 이건 모두 장난이 아니었을까 라는...


저자가 동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쭉 들어보니.... 네, 그랬다. 저자의 동생은 정말로 자살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건 동생이 유언장에 쓴 것처럼 그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걸 볼때마다 눈물짓는다고 하지만, 아마 저자의 동생 킴은 가족들이 유언장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홀가분해지길 원해서 그런 글을 남긴 것일게다. 자신의 죽음은 당사자의 선택이며, 거기에 남은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길 원하지 않아서 말이다. 아마 그것이 그녀가 바란 진실이었을 게야. 그녀는 누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위해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지쳐서,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불행에 지쳐서 더이상은 버틸 수 없었던 것일 뿐이지 않을까 한다. 살아온 20년 내내 쭉 불행했고,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쭉 이렇게 불행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과연 어떤 선택이 내리겠는가. 누구라도, 이젠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이젠 더이상 불행하고 싶지 않다는,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더이상 혹사당하게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불행하지 않았던 저자는 그런 동생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 아인 착하고 행복했다고...단지 조금 사람들과 문제가 있었을뿐...이라고 드러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믿고 있는데, 우습지 않는가.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겐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일까? 동생이 불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면 거기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두 가지 다 해당이 될 것이다. 거기에 이 저자 역시 자신의 가족이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유일한 가정이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지에 대해 모르는 듯했다. 어쩜 거기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핸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보면 본인 역시 같은 피해자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동생을 자살로 몬 것일까? 그녀의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딸을 신발에 붙은 껌 취급하는 아버지와 나이만 먹었지 어린 아이처럼 미숙 해서, 10대 막내 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사는 엄마...그 둘이 딸의 기를 얼마나 꺽어 놓았고, 그녀의 인생 플랜을 완전히 망쳐 놓았을지 뻔히 보이는데도, 언니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더라. 실은 동생이 이미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모가 꺽어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 언니는 동생에게 창창한 미래가 남아 있었다면서 그걸 버린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이봐, 언니야. 동생에겐 그런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어. 그건 너만의 착각이지. 어쩌면 동생이 오히려 현실적이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자신의 문제기 때문에 마냥 환상속에 살 수만은 없었던 것일지도. 그래, 엄마는 착한 분이셨어. 무능하고 자기 생각만 해서 그렇지. 그래, 아빠는 나쁜 남자였어. 하지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잖아?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사람. 그런 자가 아빠면 그저 익숙해지는 것밖엔 없다는 것을 동생은 어째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왜 그런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것일까? 라고 저자는 말하던데.... 아마 저자가 동생에게 정말로 미안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동생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아이가 아이였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를 보호해줘야 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었다는 것, 그것이 아이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어 보였다. 물론 저자 역시 홀로 살아남기  바빠서 동생을 챙길 여력이 없었겠지만서도, 여력이 없다고 해서 이해를 못하는건 아닐텐데 말이다. 그렇게 불행한 동생의 현실을 직시하는게 어려운 것일까 싶었다. 하긴 뭐 저자 역시 동생의 엄마는 아니니 말이다. 엄마가 하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 그녀가 나서서 하겠는가. 그녀 역시 할 수 없었다고 보는게 옳다. 그런면에서 그 누구도 킴의 자살을 막기는 어려웠다고 보는게 맞지 싶다. 이 가족 안에서는 그걸 막을만한 사람이 없었고, 동생 역시 모든걸 이겨낼만한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우린 누구나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결국 크게 보면 엄마의 무능이 딸의 자살을 불러온 것이라고 봐도 좋지 싶었다. 그럼에도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도 그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이 좀 그랬다. 만약 그렇게 딸이 귀중했다면 그 전에 잘 키우려 노력했음 됐었을거 아닌가. 딸이 불행하다 못해 자살을 택할 정도로 집안 환경을 엉망으로 만든 주제에 딸의 죽음에 슬퍼한다는 것은 뻔뻔해 보인다. 결국 죽은 자만 안 된것인 것일까? 그녀로썬, 그것밖엔 탈출구가 없었다는 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킴의 자살은 그저 비겁한 자의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이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에게 자신의 이기심이 보일리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사실 그녀를 오래전부터 서서히 죽이고 있었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걸 지금 자신들이 슬퍼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자살한 킴을 가해자로 생각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게 아닐까 싶다. 그래, 네 동생이 자살한 이유가 궁금해? 그건 너희들 모두의 공모였어. 하니, 이젠 그만 동생이 조용히 잠들 수 있도록 놔두길 바래.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테니 말이야. 조용히 쉬는 것, 더 이상 불행에 햄 볶이듯 볶이지 않는 것을 말이다. 킴의 평온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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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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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무지개 곳의 찻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다. 왠만한 사람들은 찾아오기 힘들다는,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무지개 곶 찻집에 이런 저런 손님이 찾아온다. 아내를 갑작스런 병마로 잃은 뒤 어린 딸과 함께 살아나갈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 가장, 생존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작가의 길이 아니라 구직활동중인 청년, 빚때문에 가족 모두 뿔뿔히 흩어진 전직 칼갈이, 그리고 은퇴를 앞두고 찾집 할머니에게 구애를 하려 하는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인생의 고민을 가지고 찻집에 들렀다가 그 고민을 해결하고 간다는 지극히 일본 다운 소설이었다. 착한 사람들이 나오고, 대체로 착한 소설이다.지나치게 착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단점이나, 일본 사람들은 이런 류의 미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듯...일본만의 환상 소설이라고나 할까.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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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가고 있는 시인이 있다. 아내가 죽은 뒤 그의 인생은 빛을 잃었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아내의 원망을 사면서까지  집착했던 책과 글자에의 열정이 자신의 인생에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죽은 천재 시인의 미완성 시를 완성시킨다면서  "흩어진 시어"를 모으던 그는 그것으로써 자신이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과연 그런 거짓과 거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간앞에선 그저 힘을 잃게 마련 아니겠는가.


환상처럼, 마치 꿈을 꾸듯,  죽은 아내가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라고 말했던 과거의 그 날로 걸어 들어가게 된 그는 비로서 그날이 자신에게도 최고의 날이었음을 알게 된다. 앎에의 동경, 책에의 집착, 정신 세계에 몰두하느라 외면했던 아내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는 인생에서 남는 것은 사랑뿐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곤 평생토록 그가 그렇게 간절히 찾아 헤매던 시어들이 실은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속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그를 보는 아내는 환희에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 라고... 그렇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바보 미련 곰탱이 같은 고집스런 남편이 언젠가는 진실을 직시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 날은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을 만나게 된 아내는  " 내일이 뭐지?" 라고 묻는 남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 내일은 영원과 하루 " 라고.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영원이며 내일은 그에 더해진 하루일뿐이다. 평생 찾고 갈구하던 시어를 마침내 얻게 된 시인은 이제 자신이 홀가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그렇게도 원하던 깨달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철학적이고, 다분히 몽환적이며, 그리스다운--어쩌면 감독 자신만의 정서일지도 모르지만서도,---정서가 듬쁙 담겨 있던 영화였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저런 세상도 있겠구나 싶은, 상상속이지만 너무도 실재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영상들이었다. 그 영상속을 묵묵히 걸어다니는 배우들의 아우라는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그런 분위기며, 느낌들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전혀 이물감없이 연기해 내는 걸 보곤 넋을 잃고 바라봤다.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기다린 시간들은 진실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시인의 말에 동감한다. 우리가 거만을 떨면서 아는 척 하며 내뱉는 그 지식이란 것들은 사실 얼마나 하찮은 것들이냐.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진실에 비하면 말이다. 그것들이 아무리 비루한 것이라 해도, 실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보다 값진 것이 아니던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겪고, 그리고 인생의 끝에 다다라서야, 평생 자신이 찾고 있었던 것이 실은 아내가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 고독한 노 시인을 어쩌면 좋을까 싶었다. 보다 나은 영광이, 영감과 깨달음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채근하며 살아왔지만 실은 그런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건 얼마나 허무한 일이겠는가. 하긴 자신의 인생의 빛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것을 , 자신은 그저 그 추억속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도 깨달음은 깨달음이겠으나... 아마도 이 시인에겐 그것이 위안은 될 지언정,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어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손 안에 있을땐 전혀 알아채지 못하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뒤에야 비로서 그 가치를 알게 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영화는 한없이 느리게 흐르고, 직설적이지 못한 감독의 완곡 어법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갑갑함을 느낄만큼 미묘하다. 거기에 그리스란 나라의 문학적 특성이려나? 형이 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어렵게 풀어 나가려 한 흔적이 뚜렷하다. 한마디로 전혀 친절하지 못한 영화다.

늙은 시인을 둘러싼 짙은 고독과 외로움, 그에 대비해 그의 젊은 시절, 아름다운 아내가 등장할 때의 따스함을 보여주면서 인생의 가장 좋은 때는 사랑할 때라고, 그것을 놓치지 말라고 말을 하는 듯 보였지만서도, 글쎄... 과연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인간들이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알고보면 다들 그 시인같은 실수를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게 아니겠는가. 사랑을 외치면서도 실은 자신만 생각하면서 보내는 인생 말이다.

그래, 우린 언제나 너무도 쉽게 사랑을 놓치고, 사랑하며 살라는 말을 흘려 듣곤 하지. 마치 언제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실현될 수 있다는 듯이 줄창 내일만을 기약한다. 그리곤 그런 날은 오지않는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닫곤 말지. 어리석은가? 맞다. 어리석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다. 


영화속의 시인은 말한다. "난 그때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 라고. 그건 아마 그만의 회한은 아닐 것이다. 죽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우리 모두의 뒤늦은 후회이 아니닐런지...안타깝지만, 우린 그렇게  뒤늦게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만년 늦깍이 사랑꾼들에 불과하니 말이다.


<추신> 집에서 누워서 볼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를 하며 본 영화다. 영화관에서 봤다면 평이 이보단 험악해졌을 것이 분명한 영화여서...다시 말해 조금 지루하다. 아니 굉장히 지루하던가? 그래도 영상미가 아름다워서 보긴 했지만서도, 요즘의 속도감에 비하면 아주 아주 느린다는걸 감안하시고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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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2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도전 미생 2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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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생의 추천으로 보게 된 만화인데, 직장인들의 바이블이라고 불릴만한 책이었다. 제목이 우선 의미심장하다. 미생...아직 살아있지 못함. 바둑에선 두 개 이상의 집이 있어야 살아있다고 하는데, 그전까지는 살아있지 못함으로 처리한다고 한다. 그 작은 두 집을 확보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해야만 비로서 살아있음으로 봐준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비단 바둑뿐이랴. 직장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갖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살아있다고 말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겠지.  이 만화는 어릴적 바둑의 신동 소리를 듣던 장 그래가 입단에 실패한 뒤 회사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록 바둑에는 실패했지만 이제 새로운 분야에서 자신의 집 두개를 마련하기 위해 도전하는 길, 그는 그저 저 많은 불 빛들 중에서 자신만의 빛 하나를 갖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고졸 출신에 평생 해온 것이라곤 바둑밖엔 없는 신입이,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본인만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이겠지. 처음엔 회사에 취직이 된 줄 알았던 장 그래는 자신이 2개월짜리 인턴으로 온 것이며, 다른 쟁쟁한 인턴들과 경쟁을 해서 뽑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연히 주눅이 들어 어쩡쩡한 그에게 하지만 회사란 사회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운 좋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살아있는 영업 3팀에 배정이 된 그는 점차 주변을 익혀 나가게 된다. 상사인 오 과장과 김 동식 대리의 적절한 가르침 덕분에 간신히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던 그는 인턴들과의 P.T 면접에서 한 석률이라는 현장주의자와 팀을 이룸으로써 핵폭탄 처리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자신이 힘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직장 초짜들이 무모한 열정 하나만으로 아득 바득 버티는 곳에서 과연 이 전직 바둑연습생은 어떻게 살아 나가게 될 것인가? 그의 파란만장한 직장 적응기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만화의 관전 포인트로, 무엇보다 디테일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것이 장점이다. 마치 내가 장 그래가 되서 직장 초년생이 된 듯 공감하기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그런 점은 정말 힘들겠구나, 내진,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답이 없긴 하겠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하지만 답이 없다고 해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해서, 부당하다고 해서,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이 인생 살이 아니겠는가. 해서 장 그래는 열심히 생각하고 답을 내며, 자신만의 인생의 바둑을 두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곤 깨닫는다. 인생의 바둑 역시 좁은 바둑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별다른 재능이나 프리미엄이 없다고 생각했던 장그래는 바둑판에서 배운 통찰력이야말로 회사생활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바둑판에 대입해서 직장 생활의 수를 가르쳐 주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만화책이었다.


장점들이야 차고 넘치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일단 대입이 쉽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당신이 누군건 간에 장 그래란 사람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래, 초년생땐 이랬지. 직장 생활 처음 할땐 이런 기분이었고, 상사들의 이런 점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라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말이다. 거기에 뭐랄까. 장그래가 직장에 적응하게 되어 가는 과정들에서 보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볼품은 없지만 열정만큼은 짱짱한 만년 과장 오과장을 비롯해서, 이기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김 대리와 함께 영업 3팀의 팀원으로써 일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들에서 보는 쾌감 말이다. 그들이 기합에 들어가 있건, 안 되는 일을 밀어 붙이느라 고민을 하건, 밀어붙였음에도 통과되지 못해 좌절중이건 간에 그들이 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 무척 뿌듯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직장 생활이 고되다고 느끼면서도 다들 아침이면 꾸역꾸역 전철을 향해 가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취감때문이 아닐런지...직장 생활에서의 힘듦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도움을 주고 받는 점까지 그려 주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초년생으로써는 절대 무시 못하는 직장 고수들의 한 수를 보게 되는 점도 무시 못하는 장점. 새삼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이런 일들을 하면서 다들 애쓰고 있구나 싶은 짠함이 물씬 배어나오게 했다.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 장 그래가 성장하는 모습이나, 그전엔 몰랐던 자신의 장점을 찾는 모습도 뿌듯하긴 마찬가지로,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별 볼일 없는 영업3팀을 말이다.


흥미진진한 전개를 가진 스토리가 있는 만화고, 등장하는 캐릭터들 역시 개성 만점인데다, 사회 초년생들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조만간 드라마를 통해 보게 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도 방영된다면 누가 주인공으로 나오건 간에 인기를 끌게 되지 않을까 한다. 직장 생활의 애완을 알고 싶다시는 분들은 들어보심도 좋을 듯...과거를 추억하건, 현재를 반영하건, 미래를 그려보건 간에, 아마도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기 마련인 직장 생활의 축소판을 보게 되는건 기본이요, 깨알같은 잔재미는 덤에다, 세상을 보는 지혜를 보게 되는 것은 덤에 덤이니 말이다. 통찰력있는 만화를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 다음 웹툰에서 현재 연재중이란 점도 알아 두심 유용하실 듯. 아니, 이미 다들 알고 계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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