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청소법 - 걸레 한 장으로 삶을 닦는
마스노 슌묘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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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겐코지의 주지 스님이시자 정원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인 마스노 슌묘 스님이 자신의 청소법을 들려 주시고 있던 책이다.


당신이 이 책을 손에 쥐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깔끔하게 정리된 집에서 살고 싶다.'' 어질러진 방에서벗어나고 싶다.'와 같은 이유겠지요?--184


라는 문장이 책 중반쯤 쓰여져 있길래 빙그레 미소를 짓고 말았다. ' 아니, 이건 뭐, 내 마음을 어찌 아시고..틀켜 버렸네 ' 싶어서... 그렇다. 나는 청소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이 못된다. 그래서 늘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된 집이나, 정리 정돈이 완벽한 방을 보면 넋이 나간 표정으로 훔쳐 보곤 한다. 부러워서 말이다. 그렇다고 항상 남의 집만 부러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 해서 이참에 청소하는 법을 배워서 우리 집도 좀 깔끔하게 청소해볼까 싶어 읽게 된 책이다. 다른 분도 아니고 스님이 알려 주시는 청소법이니, 왠지 내게도 잘 먹힐 것 같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노하우를 알려 주시지 않을까 싶었다. 그 정도의 충격이라면, 아니 도움이라면 나도 나의 집을 조금은 더 깨끗하게 해놓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읽기전에 희망에 부풀어 있었더랬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돼지우리같은 곳에서 살고 있나보다라고 생각하심 오해다. 그저 난 내가 살고 자고 먹고 쉬고 하는 공간이자 친지들이 놀러오고 조카가 가끔 방방 뛰어 노는 공간이 지금보단 더 깨끗했음 하고 바란다는 것 뿐이다. 딱 절 수준 정도로 정갈하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서도,  아무래도 거기까지 바란다는건 무리일 것 같고, 또 사실 그럴 필요가 있는가도 의문이긴 하다. 집은 절과 달리 그저 살아가는 공간이지 명상하는 장소는 아니니 말이다. 어쨌거나 절 정도는 아니라도 그 비슷한 수준 정도로 한번 깨끗해 보자라는 심정에서 읽게 된 이 책, 역시나 읽고보니... 기본을 지키란다. 즉, 힘써 노동해서 집을 청소하고, 다른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었다. 즉, 쉽게 쉽게 꾀를 부려서 하는 것들은 결국 청소를 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빗자루, 걸레, 먼지떨이, 양동이 이 넷만 가지고도 충분히 청소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스님, 실제로 절에서는 그것 외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 그때 그때 알맞는 것을 만들어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서도--예를 들어 대나무 걸레등--그것 역시 단순한 것들이고 거금을 들여서 완벽한 청소를 대행해주는 그런 물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 스님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결국 청소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좋은 청소 도구나 세척력 왕성한 세제를 가지고 하는건 아니라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청소를 열심히 해야 하고, 또 그런 마음이 없다면 청소 같은 단순 노동 역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념 무상, 단지 깨끗히 하자는 일념으로 스님들이 매일 매일을 쓸고 닦기에 절이 그렇게 정갈하게 늘 유지될 수 있는거란 스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역시 인간의 힘 말고는 그런 정갈함이 나올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싶어서다. 한편으론 그럼 그렇지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대단한 청소 비법을 알려 주시는 줄 알았기에 말이다. 하긴 그런걸 바라고 있어서 어쩜 우리 집이 그렇게 정갈하지 못한지도...


거기에 스님이라서 그러신지, 청소하는 것의 장점을 이렇게 설파하신다. 주변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마음도 깨끗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싶으면 , 일단 당신의 주변부터 치우라고 말이다. 쓸데없는 물건을 쌓아두고, 집착에 매달리고, 청소 같은 것이 쓰잘데기 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게을리 한다면 결국 당신의 마음도 그렇게 지저분해 질 것이라는 조언을 담아서...당신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 정말로 공감했다. 아마도 내가 청소를 잘 하고 싶은 마음 역시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니 말이다. 더 좋은 환경, 더 괘적한 환경에서 살기를 원한다는건 나쁜게 아니니까. 


청소하는 법을 배우려 책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저자가 스님이시다 보니, 마음을 다스리고 정화하고, 수행하는 법도 함께 들려 주시고 있었다. 청소와 마음 수행이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사항이 실제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실제로 절에서는 스님들이 제일 먼저 들어와서 배우는 것이 청소하는 법이라고... 청소라는 기본부터 잘 해야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행 역시 힘들이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가르침이라는데, 일리가 있지 싶다.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해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한 과연 무엇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점들이 좀 걱정이 되긴 했다. 과연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정신을 배우려 수고하는 젊은이들이 있을까 싶어서다. 이러다 보면 절에 더이상 스님들이 남아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닐까 그런 노파심이 잠깐 들었다. 


하여간 골자는 이렇다. 청소를 열심히 하자. 요령 피우지 말고, 잔꾀 부리지 말고. 그날 그날 미루지 말고. 가장 간단한 레시피 같아 보이지만, 어찌보면 가장 어려운 레시피가 아닐런지...어쨌거나 나는 오늘부터 스님의 조언대로 청소를 좀 빡시게 해 볼 생각이다. 며칠이나 갈지 모르겠지만서도,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한 100일만 계속 해보면 그다음엔 만사형통일 거라 하신다. 뭐.일단 일주일만 해보고...나는 절에 사는 스님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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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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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가장 원대한 로망중 하나-- 만약 내가 편집자라면...그런데 어느날 프르스트를 만난다면? 


나는 일단 그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한번 힘껏 껴안을 것이다. 듣기로는 프르스트는 스킨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게 싫다고 하시면 큰 절을 해도 무방하겠지만서도, 다정한 분이셨으니 한번쯤은 이해해주실 거란 가정하에 일단은 허그를 하는 걸로...그리곤 말하리라.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남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이미 많이 들으셨겠지만, 아마 당신같은 천재는 문학사에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고. 당신의 희생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리라. 


그리고 나선?


빨간색 볼펜 두 자루를, 한 자루는 그에게 한 자루는 내가 나눠 갖고서는 " 자, 그럼, 인사는 했으니 이제 시작해 볼까요?" 라면서 편집에 들어가기로 하겠다. " 아~~! 손 볼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니더라구요. 며칠은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겠죠?" 라고. 그리곤 " 짐작하셨겠지만, 이 단락은 문장이 너무 길어요. 한 세줄로 줄이기로 하죠. 뭐야, 그 불만스런 표정? 그것도 많이 봐준 거라구요! 그리고 여긴 주어가 뭐여요? 당최 찾을 수가 없네요. 이 문장에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었나요? 이렇게 쓰면 독자들이 못 알아 먹을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좀 더 명확하게 고치셔야 할 거여요. 그리고 이건 좀 지루한데, 빼면 안 될까요? 문장을 꼭 이렇게 써야 겠어요?  조금 정리를 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 훨씬 보기 좋을 것 같은데...이렇게 하죠. 지금 있는 문장들을 정리해서 한 1/3 만 남기는 거여요. 골자만 골라서 말이죠. 그래도 독자들은 선생님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거여요. 아니, 어쩜 더 좋아할지도 모르죠. 실제로 선생님의 글을 정말로 읽고 싶어하는 독자분들 중에선, 문장속에서 길을 잃고는 헤매다가 끝내 좌절하시는 분들이 많다고들 하시거든요. 그 분들이 주장하시는 바는 바로 이런 것이죠. 도무지 이 양반 무슨 말을 하는거야? 라고요. 뭐, 평생 낸 책들 중에서 대표작이라고 하면 이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뿐이지만, 그래도 명색히 프로페셔널한 작가신데, 독자들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여요. 줄이고, 정리하고, 다듬고, 빼고, 간략한 문장으로 압축하고! 어때요? 근사하지 않나요? 제 생각엔 13권 짜리를 5권 정도로 만들면 딱 적당할 것 같아요. 자, 이제 신나게 우리 시작해 봅시다" 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프루스트의 책을 읽다보면 늘 로망에 잠긴다. 진짜로 그를 만난다면 이래보고 싶은데 말이다. 안타깝단 말이지. 하긴, 실제로 그랬다면 문학사에 길히 남을 만한 수작을 그냥 사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을테지만서도... 하지만 그래도 그래 보고 싶다. 왜냐고? 프루스트에게 한번 투정을 부리고 싶어서 그런다. 당신이 온 인생을 걸어 쓴 작품이 후대 사람들에게 숙제처럼 남겨진 것을 아느냐고, 그래서 당신의 책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고, 비아냥대고, 비난하고, 별별 혐의를 갖다 붙이는 것을 아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그의 길고 긴 문체, 독자들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문장에 있다는 것을 아는 나로써는 그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좀 친절하면 안 되었나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접근성 곤란하게 당신을 올려다 놓을 필요는 없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아마도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겠지. 이해 못해도 괜찮다고. 그냥 나는 나니까. 그걸 고칠 수는 없는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한치의 틀림도 없이. 그의 문장은 그만의 트레이드마크고, 그가 평생을 걸려 완성해낸 것이니 말이다. 만약 문장에도 얼굴이 있다면, 프루스트의 문장에는 확실히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리고 하는, 할 인간 누구라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특징으로 말이다.


2. 그의 글을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은 그가 죽기전까지 만났던 모든 사건들의 인상을 몇 개의 문장만으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명사 격이 되어버린 그 유명한 마들렌 과자건, 스완네 집의 도입부로 유명한 그의 어린 시절의 초상으로 잠자기 전 엄마를 기다리느라 초조한 아이의 심정이건, 멋진 성당의 당당한 모습을 바라본 풍경이건, 한 인간이 남긴 찰라적인 인상이건 간에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완벽하게 글로써 재현해 내려 했다.  마치 사방트 화가가 자신이 스쳐 가면서 본 거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는 그림이 아니라 묘사로 해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건 간에, 그의 글을 읽는순간 그가 느낀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완벽함을 그는 추구했던 것이다. 실제로 프루스트의 동생은 그가 사망한 뒤, 책에서 나오는 성당을 찾아본 후, 책에서 묘사한 그대로라고 외쳤다고 한다. 무려 30여년전에 그가 단지 슬쩍 지나친 곳이었음에도 말이다. 이제 왜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칭하는지 조금 감이 오실 거라 본다. 그리고 실은 그런 그의 천재성이 나에겐 그를 매우 애처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런 감수성에 민감성에 예민함이라니...도무지 그런 상태로 어떻게 50여년의 삶을 견뎌 냈을지가 아득하기만 하다.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아니 말 할수 없겠다. 그게 바로 내가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그리고 가장 존경하는 작가라고 말하고 다니게 만드는 이유기도 하다. 나에겐 그의 삶이 , 문학에 온전히 바쳐진 그의 삶이 너무 끔찍해서 말이다.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도라는걸 확신하지 않았던들, 그는 그런 희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걸 낭비하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건 간에 말이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그런 그의 통찰력에서 말이다.


3. 1편에서 밑줄 그은 말들.


그러나 , 삶의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적인 모습은 대부분 그 사람에 대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43


어느 날 갑자기 나에 대해 다정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해서 불쑥 과일 바구니를 보내오는 친구가 아니라, 우정의 의무와 요구 사이에서 상상력과 감수성의 충동적인 움직임으로 올바른 저울을 내 쪽으로 기울일 수 없다고 해서 내게 해로운 쪽으로 왜곡하지 않는 그런 친구를 더 원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잘못이 의무를 쉽게 면제해 주지는 못했다.--168


그녀가 그렇게도 잘 알고 또 신문을 읽으면서 자주 품게 된 동정과 연민의 선한 감정이나 그와 비슷한 기쁨도, 부엌 하녀를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야만 하자 그만 귀찮고 짜증이 나서 전혀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 의학 서적에서 읽었을 때는 그렇게도 슬퍼했던 내용과 똑같은 고통을 목격하면서도 부엌 하녀에게는 불쾌한 불평만 늘어놓으며 무서운 야유까지 해 대는 것이었다.--218


물론 이 말은 그르랑댕 씨가 고함을 지르며 속물들을 공격했을 때 진지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열정만을 알며, 우리가 자신의 열정을 알게 되는 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 열정은 우리에게 이차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즉 첫 번째 동기를 보다 품위 있는 동기로 바꾸는 상상력을 통해서만 작용한다. 르그랑댕의 스노비즘이 공작 부인을 자주 만나러 가라고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그의 상상력에 명령하여, 공작 부인을 온갖 우아함으로 치장된 여인으로 꾸미게 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르랑댕은 비열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정신과 미덕의 매력에 끌려 공작 부인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스스로 평하는 것이었다. 다만 다른 속물들은 그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르그랑댕에게 일어나는 상상력의 중개 작업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사교 활동과 최초의 원인을 나란히 놓고 보았던 것이다.--229



아주머니에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은 --단지 보통 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것뿐이지만--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을 번데기로 감싸는 노년의 커다란 체념이었는데, 이런 체념은 오래 끌어온 인생 말년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가장 단단한 정신적 유대로 맺어진 친구들 사이에서, 또는 열렬히 사랑했던 옛 연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어느 해 부터인가 서로 만나는 데 필요한 여행이나 외출을 중단하고, 편지 쓰는 일은 그만두고,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결코 스완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결코 집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고통스럽게만 여겨지는 이 결정적인 칩거가, 같은 이유로 오히려 아주머니에게는 견디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주머니가 나날이 확인할 수 있었던 소진한 기력탓에 어쩔 수 없이 부과된 칩거였는데도, 아주머니는 행동이나 움직임 각각을 피로나 고통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무위나 고립, 침묵에 기력을 되찾아 주는 축복받은 휴식의 부드러움을 부여했기 때문이다.--253


사실이란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하며, 사실은 믿음을 낳게 한 적이 없지만 파괴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믿음을 약화하지는 못한다. 불행이나 질병이 눈사태처럼 연이어 한 가정에 들이닥쳐도 가족들은 신의 자비나 의사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런데 아무리 진실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위선적인 면이 있기 마련인데, 남과 얘기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를 삼가지만 그 사람이 자리에 없으면 금세 말하는 것처럼 , 우리 부모님께서도 뱅퇴유 씨와 함께 있을 때는 원칙과 예절의 이름으로 스완의 결혼을 개탄하면서도 몽주뱅에서는  그런 것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은연 중에 비추셨다.--262


프랑스와주가 만일 " 그분은 그래도 치인척입니다. 치인척에게는 항상 존경심을 표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나는 "이런 단어도 모르는 무식쟁이와 말싸움을 하다니, 나도 사람이 지나치게 좋군," 이처럼 나는 프랑수아즈를 평가하는데 있어 편협한 인간의 관점을 택했는데, 공정한 성찰을 통해서라면 그런 편협한 인간을 가장 경멸했을 사람들조차도, 평범한 삶의 장면에서는 그 역활을 더 잘 해내는 법이다.--270

------2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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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건강 브리태니커 -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저자 제이콥스의 760일 죽기 살기 몸 개조 프로젝트!
A. J. 제이콥스 지음, 이수정 옮김 / 살림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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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저자 A.J. 제이콥스는 마흔이 넘자 슬슬 자신의 건강에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적어도 아이들의 성장 사진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던 그는 이참에 자신이 잘 하는 일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이른바 건강 챙기기 프로젝트에 나선 것이다. 지적이면 지적으로--브리태니커 통채로 읽기를 의미-- 영적이면 영적--성경대로 살아보기 1년을 의미--으로 한번 무언가를 시작했다 하면 불독처럼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이 사내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에 나섰다. 기대 되지 않는가?  일단, 그가 다른 것도 아니고 건강을 챙기기로 했다는 점에는 응원의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 계기란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가 성장할때 까지는 옆에 있어 주고 싶은 부성애때문이라니...흐믓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리고 공감도 갔다. 나도 조카가 태어 난다고 하니 가장 걱정 되는 것이 내가 건강해야 할텐데 라는 걱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야 조카가 클때까지 잘 놀아줄 수 있을 테니까. ( 저자와 나는 사서 미리 걱정하는 타입이라는 점에서 진짜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내가 제이콥스를 좋아하는 듯...) 그래서 그의 이번 프로젝트가 그가 전 프로젝트 못지 않게 의미있고 흥미로웠다. 과연 그는 20대의 건강을 되찾았을 수 있을까? 이미 긴장이 빠져 버린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나 역시도 그 못지 않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실험엔 어떤 소득이 있으려나? 제이콥스의 죽기 아니면 살기로 건강해보기 프로젝트 760일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일단 이 양반이 꼼꼼하고 체계적이라는 점은 건강 챙기기에도 여전했다. 해서 그는 분야별로 나누어서 조목조목 따져 보기로 한다. 위에서부터 심장, 귀, 엉덩이 , 면역체계, 생식기, 신경계,대장, 뇌, 내분기계, 치아, 발 , 폐, 피부, 눈등등...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이 조그만 몸 안에 참 많은 기관이 있구나 싶다. 평소엔 의식을 못하고 살지만서도, 몸의 어떤 것 하나의 기능 없이는 건강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분야를 꼼꼼하게 점검하는 그의 태도가 옳다고는 본다. 물론 만약 내가 그의 아내라면 어느 선에서부터는 분명 짜증을 냈었을 것 같지만서도...하여간 그는 내놓라 하는 다이어트 전문가, 다양한 헬스 강사, 하버드 대학 교수들, 존 홉킨스 대학교 연구원들, 명상가 등등을 일일히 찾아 다니면서 조언을 구한다. 특히나 그의 건강 챙기기 프로젝트를 누구보다 반겼다는 그의 고모 마티 여사도 그의 조언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휴대폰의 위험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는 일화에서 보듯 그녀는 조금은 극단적인 자연식주의자이다. 유기농과 채식 분야의 전문가인 그녀는 까칠한 캘리포니언식 건강식에 대한 아낌없는 충고를 퍼부어준다.  거기에 마음 먹고 일어서지 않으면 12시간도 거뜬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자랑처럼, 그는 책상에 앉아 광범위한 건강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읽기만 하면 어디 제이콥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읽은대로 그는 실천에 나서기로 한다. 다양한 건강 관련 조언들을 시도해 본 결과 그는 드디어 모종의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잘 아시겠지만 건강에 대한 것만큼 우리의 공통된 관심사가 드물다. 그래서 매일 뉴스 레터를 읽다 보면 건강에 관련한 이야기가 늘 연재 되는걸 볼 수 있는 것일 게다. 문제는 이 저자도 곧 깨달았듯이, 건강에 관련한 상충된 정보들은 넘쳐 나는 바람에 종래에는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난감해 진다는 것이다. 일예를 들자면 이렇다. 야채를 먹어라. 감자는 먹지 않는게 좋다. 그래도 채식을 하라. 살을 빼려면 육식만 하는게 좋다. 다이어트를 해라, 지나친 운동은 건강에 특히 관절에 좋지 않다. 세균을 멀리하라. 너무 깨끗한 환경은 면역체계에 좋지 않다. 뇌가 건강해 지려면 언쟁을 해라. 타인과 불화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해 부신에 좋지 않다. 건강한 마실 것들은 맛이 좋지 않다. 맛이 나쁜 음식은 몸에 좋다. (진짜?) 맛이 나쁜 음식은 스트레스를 유발해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손잡기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아내의 손을 너무 많이 잡았더니 아내가 째려 본다...기타등등...이 저자가 어떤 딜레마에 처했는지 아마 한눈에 보이실 것이다. 과연, 이렇게 건강 정보들이 넘쳐 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의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 모든 과정들을 거친 후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극단적인 방법이 아닌--주스 단식이나 커피 관장 같은 것 말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건강을 챙기는게 몸에도 맞는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상식적이지도 않고 극성맞아 보이는 방법들은 사용하지도 권장하지도 않는것이 종국에는 이롭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그다운 균형잡힌 결론이다. 이런 합리적인 태도 때문에 그가 어떤 극단적이고 황당한 도전을 한다해도 믿고 그의 책을 읽게 되는 것일게다. 아무리 방황을 한다해도 삼천포로 빠지는 일은 없다는건 작가로써 얼마나 다행스런 재능인지...그가 존경스런 이유중 하나다.


그의 다른 저서들 보다 쉽게 읽힌다. 복잡할게 없어서도 그렇고, 몸에 관련된 것이니 모르는게 없어서도 그럴게다. 유머 감각이야 물론 여전히 수준급이시고, 본인을 몰모트 삼아서 열심히 실험에 임해 주시는 자세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하면 건강을 챙길까? 건강하게 사는 특별한 비법이 혹시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보게는 됐는데, 보고 나니 뭐, 건강에 대한 색다른 정보를 얻게 된 것은 없지 싶다. 어찌보면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정보일지도...그저 꾸준히 관리하는 수밖엔 없다는 것 말이다. 거기에 의외의 반전이 마지막에 들어 있었는데, 솔직히 살짝 놀랐다. 열혈 건강 전도사였던 마티 고모가 급성백혈병으로 64세의 나이로 타계하신 것 말이다. 하도 까탈스럽게 건강을 챙기시길래 이 책에 나오는 다른 누구보다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책이 완성되기도 전에 돌아가시다니, 진짜 의외였다.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쓴 저자의 용기에도 놀랐다. 아마 저자 자신도 남몰래 의문을 품었던 것이 아니었을런지...건강이건 수명이건 간에, 내가 잘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건강이나 수명을 잘 산 것에 대한 상처럼 생각하지만서도, 실은 때론 그렇지도 못하다는 것이 어쩜 인생사 아니겠는가. 모든 만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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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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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읽어본 리뷰어들이 재밌다고 하길래 기대 많이 하고 본 작품. 역시나 기대를 많이 해서인가, 기대만큼 재밌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이 작가하고는 연대가 맞지 않는가 보다. 그에게 에도가와 란포상의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13계단>도 읽긴 했는데, 작가 이름을 기억할만큼 임팩트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레이브 디거>는 초반 몇 페이지를 읽고는 집어 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말을 들었을때 글쎄,  내 마음에 들려나 반신반의했는데, 역시나...마음이 들지 않는다. " 왜 이런 걸까요? " 라고 누군가를 붙들고 묻고 싶어질 정도다. 다들 좋다는데 말이다. 가을을 타나? 그래서 모든 책들에 이렇게 심드렁한가? 확실히 요즘 슬럼프다. 마음에 드는 책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 보니 살짝 우울해지려고도 한다. 괜찮은 책을 빨리 찾지 않아내지 않으면 정신상태마저 위태로워 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여간 내 정신 상태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던 책 < 제노사이드>의 간단한 분석에 들어가 본다면...


이야기는 대충 두가지 갈래로 이어진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황망해진다. 그것보다 더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은 장례식후 날라온 아버지의 비밀스런 메일, 아버지가 생전에 그에게 남긴 지령(?)을 마지못해 따라가던 겐토는 아버지가 비밀 장소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곤 자신이 연구를 끝내지 못할 시를 대비해 아들인 겐토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사이도 없이, 그 연구가 한달 안에 끝내줘야 하는 것이며, 경찰마저 그를 쫓자 그는 어찌 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그만 둬도 좋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까도 싶었지만서도, 아버지가 하던 연구가 불치병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불굴의 사명감이 불끈 솟는다. 하지만 과연 며칠전만 해도 듣도 보도 못했던 생소한 연구를 단지 사명감 하나 만으로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기대 보기로 하는데...


한편 불치병에 걸린 아들이 죽어간다는 말에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을 연장해 보려는 조너선 예거는 위험한 용병 임무에 사인을 하게 된다. 아들을 살리는데 엄청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윗선에서 알려 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잠입지인 콩고에 도착해서야 그는 4명으로 구성된  소수 정예 팀을 가지고 피그미족 마을을 몰살하라는 지령을 받게 된다. 그들이 모종의 바이러스에 걸렸는데, 그것이 전세계로 확산되는걸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들을 몰살해야 한다는 것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콩고 4인방은 거기에 미지의 생물을 만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말에  궁금증이 더해진다. 과연 그들이 무조건 사살하라고 말하는 미지의 생물이란 무얼 뜻하는 것일까? 거기에 왜 워싱톤은 그 미지의 생물이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조너선 예거는 석연치 않은 명령에 찜찜하기 짝이 없지만,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 내기로 결심하는데...


신종 인류의 발생을 둘러싸고 그를 보호하려는 세력과 없애려는 세력들 사이의 전쟁을 스릴러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거기에 그 신종 인류가 자신의 뛰어난 --인간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지적 통찰력으로--지능으로 불치병에 듣는 신약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그런 이야기도 담고 있었다. 단점이라면 신종 인류와 불치병 신약 사이의 연개가 어딘지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는 점과 ET의 새로운 버전처럼 보이는 신종 인류라는 것에 대한 신빙성 부족,그리고 미국 대통령등 워싱톤을 둘러싼 설명의 애매함등을 들겠다. 즉, 이야기 자체로는 그다지 매끄럽고 설득력 있게 써내려간 작품은 아니었다. 짜임새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다만 탄복했던 것은 이 책 하나를 쓰기 위해 작가가 수고했을 노력들이 대단해 보인다는 것 정도. 자신이 알기 어려운 분야일텐데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이런 저런 사전 작업을 한 것이 두드러져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고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아프리카와 생화학을 다룬 책을 상상력 만으로 써내려 갈 수 없었을 거란 점에서 작가의 치밀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적어도 일본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좋아는 보이더라. 그게 잘 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서도,  하지만 그럼에도, 다분히 일본적인 소설이었고, 일본에서 벗어나진 못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세계적으로 먹히는 책을 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인가 보다. 어쩜 가장 세계적인 것은 무대를 넓히는 것에 있는게 아니라, 얼마나 공감대를 사는 문장을 써내는 것인가에 달린게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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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과 교수이자 소설가인 마이클의 아버지 찰스, 그는 지성은 높을지 모르나 좋은 가장이자 남편은 못되었다. 아들에겐 교양과 정직을 외치면서도, 그는 정작 아내와 자식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는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힘든 성장기를 보낸 마이클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여정이 불편하다. 인기있는 소설가가 되었지만 아버지에겐 여전히 반푼이일 뿐인 그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새록새록 떠오르는 비참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괴롭다. 하지만 그 날은 어머니의 대학 졸업식날, 아버지와 대립할때마다 그를 감싸주던 엄마 덕에 여지껏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로써는 못마땅해도 돌아와야만 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기억속에 생생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아 <반딧불이 정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려 한다. 그 속엔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는 유년기가 그대로 그려지고 있었고, 그가 아무리 픽션이라고 우긴다 해도 그것이 그의 자서전이라는걸 눈치챌 수 있게 쓰여져 있었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니 그들의 말을 일단 들어보려 하는 마이클, 물론 찰스가 쓰고 다니는 가면이 벗겨지는 충격도 만만찮을 것이겠지만, 유년 시절의 상처를 헤집어야 했던 마이클로써도 그것이 그리 속편한 것은 아니다. 아내와 별거중이라 가뜪이나 마음이 안좋은 그는 공항에 내려 집으로 가는 도중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나마 아버지와의 사이를 중재해주던 존재가 사라지자, 마이클과 찰스의 갈등은 폭발 일보 직전이다. 과연 이 두 부자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화해를 할 수 있을까? 아들과 아버지는 오늘도 여전히 상대가 못마땅하기만 한데...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과 마주할 수밖엔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다감하게 만들어 주던 엄마의 존재,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이던 엄마와 살면서도 늘 불만투성이던 아버지,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들의 존재가 못마땅하기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아들을 자랑스러워 하기는 커녕 늘 미심쩍게 생각하는 찰스는 다 큰 아들을 반푼이 취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아내의 장례식을 앞두고서도 말이다. 다사로운 엄마의 부재로 인한 부자의 갈등이 심하게 부각되면서 그 갈등이 도대체 어떻게 풀려나갈 수 있을까를 궁금하게 만들던 영화였다. 영화는 왜 마이클이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며, 아버지란 사내는 왜 그다지도 가정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내였는가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해한다. 더이상 그가 괜찮은사람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렇게 고통받던 유년기가 지나고, 성장한 아들은 이제 그 고매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를 고발하려 한다. 하지만 아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아버지가 이젠 늙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그를 지켜주던 아내 마저 떠나 버리고 없자 그는 빈강정처럼 텅 비어 버린다. 아버지는 이제서야 자신이 못난 아버지 였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 듯 보이는데...

시종 잔잔하게 흘러가던 영화였다. 심각한 갈등마저도, 파국에 이르기 전까지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다지 극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들의 평생의 업인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 듯 한데, 출중한 배우진들에 비해 극본이 아무래도 조금 달리지 않는가 한다. 종종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나오고, 이야기의 맥이 난데없이 끊어지는데다, 그마저도 자연스럽게 나중과 연결이 되지 않아서 어리둥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 뜬금없는 들어간 몇몇 장면들은 왜 그런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오랜만에 만난 이십대 이모가 십대 조카에게 속옷 바람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나, 아들 내외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굳이 섹스를 하는 씬같은거 말이다. 그런 장면들이 꼭 필요했을까? 진짜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서도. 나는 조카건 동생이건 간에 옷 정도는 제대로 차려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왠만한 보통 사람들에겐 그 정도의 상식은 있지 않나? 거기에 엄마 장례식에서 아버지가 추도사는 하는데 섹스라니... 적어도 슬픔에 정신이 나가서 섹스 정도는 생각이 안 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엄마를 몹시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아들의 말에 동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어이없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라는 문제에 대해 반면교사로 이런 것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 라는걸 보여주던 영화. 하지만 솔직히 좀 무언가 부족하지 않았는가 한다.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아버지와 화해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난데없었고 말이다. 영화를 끝내야 하기에 억지로 화해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보다 설득력 있는, 짜임새 있는 극본이었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적어도 배우들의 연기력만큼은 안정되어 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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