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자 로저는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른 어디론가 출장 스케줄을 잡아야 하는 바쁜 사내다. 그런 그를 살뜰하게 보살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사람은 60년동안 집 안의 가정부로 일해온 아타오, 미국으로 유학갔던 10년을 제외한 로저의 모든 인생에 언제나 함께 있던 아타오의 존재는 로저로써는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돌아온 로저는 쓰려져 있는 아타오를 발견하게 된다. 아타오가 중풍에 걸린 것이다. 그제서야 아타오가 70이 넘은지 이미 오래며 평생 일해온 고장 난 몸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재활 치료를 받을 것을 권하는 로저에게 아타오는 단호하게 요양병원으로 갈 것을 고집한다. 이것이 나을 병도 아니고, 늘 출장을 다니느라 바쁜 로저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태어날때부터 자라는 것을 지켜봐왔다 해도 로저가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는 점은 달라질 수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아타오로써는 착한 로저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타오의 단호함에 집에서 가깝고 좋은 요양원을 찾던 로저는 우연히 친구가 운영하는 요양원에 발이 닿게 된다. 병원에 나선 부터 요양원 신세가 된 아타오는 처음엔 깔끔한 성격때문에 애를 먹지만서도, 조금씩 주변 사람들에게 낯을 익히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된다. 이상한 사람만 있는 것 같던 요양원도 알고 보니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익숙해진 아타오는 이제 로저가 오는 날을 기다린다. 여전히 출장을 다니느라 바쁜 와중에도 집에 오게 되면 늘 들리는 로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타오가 양모라고 소개해서 아타오를 기쁘게 한다. 가족이 없다는 것이, 그리고 평생을 가정부로 살아왔다는 것이 남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이야기는 못되니 말이다. 다른 원생들의 친자식들보다 더 자주 찾아와 누구보다 살갑게 아타로를 대하는 로저, 그간 바쁘단 핑계로 있어 주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대화는 별로 하지 못했던 둘은 이제서야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게 된다. 좋은 가정부를 구해주려 했지만 아타오의 까다로운 기준에 알맞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로저를 결국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싱글인 로저가 걱정인 아타오는 로저에게 왜 좋은 여자랑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렇게 묻는 아타오는 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셨느냐는 물음에 슬쩍 대답을 회피하는 아타오, 그녀 역시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타오는 자신이 모아온 것들 중에서 버릴 것을 추리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채 추억만 되새기게 된다. 아타오의 추억속에 자신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로저는 주체못하는 감동에 젖는다.


한편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로저의 엄마는 아타오가 쓰러졌다는 말에 문병을 온다. 아타오에게 자상하게 대하던 로저의 엄마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해준 일들을 잊을 수 없어 한다. 남는 집을 한 채 수리해서 아타오가 쓰도록 하자 했던 계획은 아타오가 다시 쓰려지면서 흐지부지 되는데... 점점 약해져만 가는 아타오를 바라보면서 로저는 자신이 언젠가는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는 다만 그 날이 빨리 오지 않기만을 바라지만서도, 아타오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만 가는데...


평생을 욕심없이 살았던 여인네에 대한 넘치지 않는 추도사다. 가정부이지만 실은 생모대신 엄마 노릇을 했던 한 여인의 소박한 일생과 그녀의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할 줄 아는 착한 청년의 애가이니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 지구상에 살아가기 위해선 그누군가 엄마처럼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존재가 그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것이 엄마나 아빠겠지만, 이 영화속 로저에겐 그것이 가정부 아타오였다. 자신이 낳긴 했지만 실제로 기르지 않았던 로저의 엄마는 로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진 함께 있는 순간을 견뎌내지도 못한다. 그건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만큼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타오에겐 그런 것이 없다. 그에겐 로저가 하는 모든 일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니 말이다. 그런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던 로저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던지... 아마도 그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키우고 지켜준 것은 8할이 아타오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보답하는 그가 누구보다 듬직해보였고, 또 늘 선량한 아타오라는 인물에 공감해서 보게 된 영화가 되겠다. 드라마틱한 전개라곤 없는 잔잔한 영화였지만 감동만큼은 진했지 싶다. 제목 그대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연출하고 연기한 점이 돋보이지 않았는가 한다. 느린 호흡인데도 지루하지 않다는 점은 아마도 연기자들이 워낙 연기를 잘해서도 그렇고, 차분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연출 덕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면서 과연 사랑이란 혈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잘 살면 잘 죽는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서도, 과연 그럴까 싶을때가 있다. 나의 죽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서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아타오가 쓸쓸하지 않게 죽음을 받게 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그녀에게 그것이 최고의 보답이 아니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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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한  나무꾼 카츠는 삼년 전 아내를 여윈 뒤 속 썩이는 아들 녀석 하나와 살고 있는 예순살의 사내다. 나무만 보고 살았던 그의 단조로운 일상에 예기치 못했던 소동이 벌어진다. 영화를 찍는 팀 하나가 마을로 굴러들어 온 것인데,  촬영지를 찾는다면 산 속을 헤메는 그들이 안스러워 도와주던 카츠는 그들의 요구가 한도 끝도 없자 짜증이 난다. 그 중 압권은 엑스트라가 모자라니 단역으로 출연해 달라는 것으로,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니 끝까지 해보자 싶어 좀비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 카츠는 동료들이 의외로 신기하게 받아들이자 으쓱해진다. 자신이 출연한 장면을 보곤 더 기분이 좋아진 카츠는 촬영장에서 도통 쓸모없는 녀석처럼 겉돌던 코이치를 목욕탕에서 만난다. 난생처음 큰 화면으로 본 자신의 연기에 신이난 카츠와는 달리 침울하기 짝이 없는 코이치, 촬영이 재밌다는 카츠의 말에 코이치는 도통 믿을 수 없어 한다. 잔뜩 풀이 죽어 자신을 역으로 데려 달라고 한 코이치는 그 보답으로 카츠에게 자신의 대본 노트를 건네준다. 그 밤에 도쿄로 도망칠 생각이었던 코이치는 탈출 직전 조감독들에게 붙들려 잡혀 오고, 그제서야 코이치가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카츠는 그 재밌는 촬영을 코이치가 마뜩해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어느새 촬영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의 직업은 나몰라라 하고 촬영장에서 자리를 잡게 된 카츠, 그는 엑스트라 섭외에서 장소 물색, 그리고 목소리가 작은데다 카리스마마저 없는 감독을 대신해 아예 촬영장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한다. 그의 열성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영화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덕분에 코이치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데... 

 

 

감독 의자에 앉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맨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는 감독 코이치와 감독 의자인줄도 모르고 덜썩 앉아버린 카츠. 카츠는 코이치가 스물 다섯이라는 말에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이 스물 다섯 먹은 녀석이라고 알려준다. 그 옆에 있는건 예순살, 딱 내 나이라고 하면서...둘의 차이를 모르겠다고 하는 코이치에게 카츠는 말한다. 맞다고. " 나무가 제몫을 하려면 100년은 지나야 하거든" 이라면서.  코이치 뒤에 서 있는 나무가 150년임을 알려주면서, 카츠는 젊음이 마냥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도, 연륜이 대단한 것이라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된 것이 기쁜게 아니라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공황 상태인 코이치에게 카츠는 그저 말해준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스물 다섯이나 예순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고...>

 

 

<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나오던 노배우 역의 야먀자키 츠토무상,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치질로 고생중이시다. 현재 엉덩이의 압박을 참으시면서 촬영을 하시는 중으로, 배우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그 근사한 이미지가 실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너무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서 오히려 심하게 웃기던 이 노배우의 등장은 배우에 대한 환상을 깨알같은 웃음으로 부셔주고 있었다. 예술은 무슨 얼어죽을 예술, 노 배우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단지 돈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잠시 안스럽단 생각이 들게 하던데, 별로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비중있는 배우가 출연해서 의외다 싶었는데 역시나 반전이 있었다. 치질 때문에 몸서리를 치면서 영화를 찍으면서도, 영화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은 유지하고 계시던 것,  보통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으면 짜증을 내고 화를 내야 정상인 것 같은데 말이다. 몸은 비록 늙고 고장이 나서 진상을 부리지만서도, 그것이 정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모습이 어찌나 신선하고 의연해 보이던지... 종종 늙었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짜증을 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을 본다. 늙었으니 대접해 줘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노인을 공경하게 되는건 그들이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을 보여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런지... 하여간 인간적으로 멋지게 늙는다는 것이 실은 별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던데, 감동이었다.>

 

 

< 백수로 정신 못차리고 사는 자신의 아들과는 달리 조금씩 사회인으로써 발을 내딛는 코이치가 무엇보다 부러운 카츠 아저씨. 처음 단역 엑스트라에서 시작된 일은 점점 다방면으로 커지기 시작, 이젠 촬영장에 그가 없으면 이상할 지경이 되버린다. 아내의 기일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촬영에 몰두하던 카츠는 같은 나이 또래의 코이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히려 아들에 대한 이해가 커져간다. 젊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냐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아들이 못내 못마땅했던 카츠는 코이치를 보면서 젊은 시절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된다. 재밌지 않나. 타인의 고통과 아픔은 그렇게 잘 보이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아들의 고민은 몰랐다는게 말이다. 그런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난생처음 아들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백수로 사느니 아버지 일이나 도우라는 동네 아저씨들의 말에 그건 아들 마음이지 라면서 아들을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는 카츠, 아들은 그만 놀라고 만다.> 

 

잔잔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말을 하고 있던 일본 영화였다. 별 기대없이 봤는데, 2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가더라. 잔잔하다 못해 종종 지루해지는 일본 영화를 생각하면 기적같은 연출이지 싶다. 별 이야기가 없는데도 오히려 그것이 이야기가 되던, 극적인 드라마 없이도 얼마나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지 생각하게 하던 영화였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솔솔 자아내던 매력적인 극본도 좋았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명불허전이었다. 원래는 오구리 슌이 출연한다고 해서 보게 된 영화였는데, 영화 시작하자마자 카츠 역의 아쿠쇼 코지상이 분위기를 압도하더니 끝까지 그러시더라.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연기,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연기하시는 듯한데도 자유자재로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것을 보면서 역시 명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오구리 슌마저도 그에게 밀리는 듯했는데, 그렇다고 슌이 연기를 못한 것이 절대 아니었으니 코지상이 얼마나 연기를 잘 하시는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미모도 당해내지 못하는 재능을 목격하는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지...하여간  코지상, 생긴건 늑대 비스드름 하신데, 연기 하나 만큼은 여우처럼 잘 하신다. 그 감칠맛 나는 연기에 영화가 한층 더 재밌었다. 그 외에도 많은 연기자들이 자신이 맡은 역을 자연스럽게 해낸 것도 좋았다. 영화의 분위기랄까, 톤이라고 할까. 그런걸 흐트리는 연기자가 없다는 것은 보는 입장에선 굉장히 안심이 되는 일이니 말이다.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튀지 않은 연기로 영화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출을 잘 하지 않았는가 한다. 종종 웃기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다, 인공적이지 않고, 교훈을 강요하지 않으며, 등장인물들 각자가 천연덕스러울만치 자연스럽다는 점도 좋았다. 주변에서 일어날만한 이야기를 흔연스럽게 전달하던 것이나, 각자의 고민을 무겁지 않게,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하지 않는 자세로 보여주던 것도 마음에 든다. 각자가 자신만 생각 하는게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바뀌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인간은 원래 잘 변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타인에게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겠는가 회의적이었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설득력 있었지 싶다. 영화 뒷판에서 벌어지는 사정도 흥미진진했고 말이다. 잘 만든 영화다.  이 정도 퀼리티라면 문학작품에 비견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보고 나면 적어도 기분 만큼은 흐믓하실 듯...어떤 장면을 좋아하실지는 각자 다르겠지만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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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고르세요
켄트 그린필드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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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것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건, 친구를 왕따 시키건, 결혼을 하건, 결혼을 하지 않건, 멍청하고 제멋대로인 상사에게 대들건, 회사를 때려 치우건, 집을 사건, 하루종일 홈쇼핑을 들어다 보면서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들여 모으건, 외도를 하건, 외도를 하지 않건, 종교를 믿건 종교를 믿지 않건 , 폭력을 쓰건 살인을 하건 간에...그것이 적어도 본인의 선택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즉 자유의지에 따른--추측은 결국 그 행동에 대한 결과 역시 그가 지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어진다. 즉, 선택은 곧 책임을 낳는다. 일면 당연한 명제다. 또 우리 사회의 근간을 떠받치고 있는 사고이기도 하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고가 확산된다면 그야말로 이 사회는 아비규환이 될터이니 말이다.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명제에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가 선택을 하는데 있어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현실을 꼼꼼히 분석해본 저자는, 알고보면 우리에겐 그다지 많은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유 의지에 의한 행동인 것 같아 보이는 이면을 뒤집어 보면 오히려 타인의 권위에 생각없이 복종했다거나, 현란한 광고 수법에 꼼짝없이 당했다거나, 뇌의 손상에 의해 광기의 지배를 받은 것이라거나, 피곤에 절어 형편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거나, 상황에 밀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엔 없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선택은 강요된 것이며, 조작되었고 강제로 진행될 수 있음을 저자는 강변하고 있었다. 인간은 철두철미하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오히려 자신에게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모른 채 행동할 수 있단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라는 말씀도 있듯이,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다는 것이 가혹할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흠...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예를 들어보자. 동성애에 관해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동성애가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저자의 의문을 제기한다. 이성애자로 태어난 사람들이 이성애를 선택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 역시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선택이라는 이름하에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 비난이라는 어감은 좀 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심 되겠다. ) 군사 독재시절, 독재자의 지시에 따라 시민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군인이나, 싸이코패스인 지도자의 끝없는 욕심을 채워줘야만 하는 부하의 경우는 어떤가? 머리에 종양이 생겨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전직 해군이 대학 시계탑에 올라가 총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쏴죽여 버렸다. 과학자들은 종양이 공감을 당담하는 뇌부분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렇담 우리는 그를 연쇄 살인마로 비난할 수 없는 것인가? 카지노의 특수한 분위기는 우리가 돈을 잃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해주는 역활을 한다. 중독자가 생겨나는 이유다.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조명과 특수하게 심리학적으로 고안된 진열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열게 하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의해서 떠밀려 행동한 것 뿐이다. 이런 상황들을 감안하면 과연 모든 결과에 대해 일말의 동정이나 이해 없이 단지 비난만 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저자는 묻고 있었다.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이라는 전제에서 저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우리 자신도 같은 환경에 처했을때 다르게 행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려는 것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은 무의식적이고 반자동적이며 깨여있지 못한 이성의 소유자들인 일반 개인들에게 너무 많은 비난의 짐을 지워선 안 된다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쁜 선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올바르고 탁월한 선택을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 장에 나오는 네 가지 방법이다.' 상황의 위력을 인식하라.' '자신의 비이성적인 성향을 인정하라.'' 습관에 유념하라.' '문화의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을 개발하라.'로 정리되는데, 그것들이 보다 능숙한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저자는 이미 비난받을만한 행동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아량을,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선택을 위한 행동 제고를 요청하고 있었다.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믿어서도, 주어진 환경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을 산물이고,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거기에 적절한 통제를 가하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줄 것이라면서 말이다.


일단 모조건 타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엔 동감한다. 저자의 주장 자체가 보다 너그럽고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도 이해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을 확대해 생각해 보자면 과연 누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야 할까 의문이었다. 심지어는 연쇄 살인을 저지른 싸이코패스 살인마조차 동정해줘야 할 구석이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그가 태어날때부터 그런 성향이었다던지, 두뇌의 이상때문에 그런 행동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줘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FBI 프로파일러가 들으면 자다가도 웃을 나이브하기 짝이없는 사고다. 그들에겐 범죄자들의 극단적인 성향은 그자체로 심각한 현실이고 주의해야할 경고등일테니 말이다. 왜냐고?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남아있는 범죄의 추억이 프로파일러에겐 지워지지 않는 실제일테니, 안 그렇겠는가.


그렇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에 마냥 자유로운 선택만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의 결과에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건 간에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전적이건 전적이 아니건 간에...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좋은 선택을 한 사람에겐 칭찬이 주어지고, 나쁜 선택을 한 사람에겐 비난이 주어져야 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언제나 환경 탓만을 할 수는 없는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감경 사유는 될지언정, 모든 범죄자들의 면제 사유는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랜만에 들어본 법학자의 책, 흥미롭기는 했다. 저자가 똑똑하긴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린 사고를 갖자고 주장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상아탑에 갇혀 사는 교수이시다 보니, 조금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나이브하지 않는가 싶다는 것이었다. 뭐, 그것 역시 작가의 선택에 의한 것일테니,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하는 수밖엔...마음대로 고르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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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침스키 - 인간이 될 뻔했던 침팬지
엘리자베스 헤스 지음, 장호연 옮김 / 백년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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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전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가 오래된 영화 <혹성탈출>을 보게 됐다. 어렸을 적 주말의 명화 시간에 봤을때야 그저 흥미롭고 기발한 소재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우리에 갇힌 주인공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원숭이와 인간만 바뀌었을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그 영화속에서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어째서 인간은 피해자가 되면 그것이 끔찍한 일이라는걸 단박에 알아채면서도, 가해자가 되면  무시하거나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서글펐다. 하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님으로, 그저 나는 그 뻔뻔한 위선에 대해 모르는척 하고 넘어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리곤 우연히 읽게 된 이 책, 내가 무엇을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읽고 나니 한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인간이 참으로 고약한 존재라는 것. 하긴 같은 종에게도 학살이니 살인을 벌이는 존재들이니, 다른 모든 종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서도...그럼에도 이런 책을 읽다보면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참 몰라서도 잔인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욕심때문에도 잔인해지고, 버거운 일을 만나서도 잔인해지며, 거만함 때문에도 잔인해지고, 나쁜 성질때문에도 잔인해지지만, 가장 해로운 것은 무지하기 때문에 잔인해지는 경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님 침스키라는 프로젝트가 인간이 조금 유식해 보고자 시작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인간 외에 언어를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한 언어학자 침스키의 견해에 반박하기 위해 일단의 과학자들은 침팬지를 상대로 언어 훈련에 돌입하게 된다. 그 최전선에 있었고, 또 가장 영리하고 유명한 침팬치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님 침스키다. 침스키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이름까지 따왔을 때만 해도, 그의 운명이 그 이름때문에 불행해지고 지워진 짐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지금와 생각해보면 의아해진다.  침팬치로 태어난 녀석을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시도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말이다. 아니 아마도 그들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을 것이다. 실험을 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로인해 님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침팬치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태어난 직후부터 인간에게만 사육되어, 같은 종과는 떨어진 상태에서 수화를 통해 언어를 배우게 된 님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침대에서 자며, 배변 훈련을 받고, 아침이면 커피를 마시며, 생일이 되면 떠들썩하게 파티를 여는 존재로 길러지게 된다. 영리한 탓에 수화를 곧잘 따라하게 된 님은 곧 전국적인 스타가 되고, 그때만 해도 그의 빛나는 운명이 잘못 되어 질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걱정은 했겠지만서도, 다른 누군가가 이 영리한 침팬치를 잘 돌봐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떠넘겨 버리고 만다. 결국 연구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받들여져 키워진 님은 연구에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게 된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꾸준히 버림을 받는 동안 그를 둘러싼 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진다. 결국 최종적으로 생체 의학 연구 실험실에 팔려가게 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인간처럼 길러진 침팬치가 그런 운명에 처했다는 것에 남다른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이때 그를 구해내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덕분에 님은 무사히 실험실에서 빠져 나와 동물 보호소로 향해지게 되는데... 

 

인간이 동물들에게 얼마나 잔인한가를 보여주던 <블랙 뷰티>를 생각나게 하던 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님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 바로 블랙 뷰티 목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님이 폭력적인 학대를 심하게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서도, 행동 연구의 과학 실험 대상이 되면서 인간처럼 사육되고, 인간에게 애정을 갖도록 길러진 뒤 버림을 받는 정서적 학대를 꾸준히 받았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블랙뷰티 못지 않은 학대를 받았다고 보여진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가 더이상 연구 대상이 아닌 채로 보호소로 보내진 뒤 침팬치로써의 삶을 살아가던 마지막 장이었다. 그는 더이상 수화를 나눌 상대가 없음에도 수화를 나누는 것을 반겼으며, 자신이 나온 책을 즐겨 보고, 아침에 커피를 달라고 난동을 부리고, 종종 우리를 탈출해서는 주인집의 습격해 냉장고를 털었다고 한다. 어떤가? 사람들은 아무리 그를 인간처럼 키우려 해도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침팬치이지만, 자신이 인간인줄로만 알았을지 모르는 님이 과연 계속되는 학습과 버림,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 먹먹해진다. 님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과학자들은 님이 언어를 배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에게 수화로 말을 걸고, 동료 침팬치들에게 수화를 가르치던 것을 말이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너무도 냉정하게 그를 판단했었던 것이 아닐런지...바라건대 님의 운명을 이어받는 동물들이 더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건 아마도 불가능한 바람일 것이고, 적어도 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는 최소한의 환경에서 살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가 님 침스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객관적이면서 감정적이지 않은 접근 방식을 쓴 것이 돋보인다. 아마도 작가 입장에선 님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비극적인 요소를 띄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감정을 자제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또 그 덕분에 책이 지루해진다는 것이 단점으로 책 중반까지 님 프로젝트에 관련된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님에게만 촛점이 맞춰지는게 아니라, 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촛점을 맞추다보니, 그 수 많은 인간들의 거취에서 자녀, 이혼 문제까지 알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감도 들었다. 덕분에 두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동물 과학자들이 굉장히 냉정한 사람들이라는 점과--난 그들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라 짐작했었다.--내가 과학자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점이다. 읽다보니 제 정신이 아닌 듯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여서, 윤리적인 견지에서 과학자를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 왜 종종 나오는지 이해가 되더라. 그러다보니 재밌어 지는 부분은 님이 모든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침팬치로써의 삶을 시작하는 보호소 부분부터였는데, 조금 늦은 감이 있어 아쉬웠다. 하니 혹시나 중반에 지루함때문에 더이상 읽기를 포기하시는 분은 끝까지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님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니 그가 침팬치로써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결론은? 님이 가엾다는 정도? 우리가 동물을 도무지 어느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암담하다는 정도? 인간은 정말 어리석고 이기적이구나 하는 것? 아마도 님을 동정하면서 내가 동물 학대를 중지하라고 말한다면 그건 그저 싸구려 동정심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나 역시도 님을 그렇게 만든 인간들과 다를바 없으니 말이다. 다만 동물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넓혀 주었으면, 그들이 말을 못한다고 해서 감정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단지 그런 바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건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니 말이다. 아니 , 그것조차 어려운 것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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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주인공이 되다! 날마다 그림책 (물고기 그림책) 8
멜라니 와트 글.그림, 김호정 옮김 / 책속물고기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작가인 멜라니 와트의 고양이인 체스터는 멜라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 달라고 해요. 하지만 작가인 멜라니는 생쥐의 이야기가 더 하고 싶어요. 그래서 그녀는 생쥐의 집과 생쥐의 이야기를 그려요. 체스터는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생쥐 이야기만 하는 멜라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결국 생쥐의 이야기를 끝낸 곳에 자신의 지면을 만들어요. 줄을 쫙 긋고는 , 여기부턴 자신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해요. 이제 체스터는 느긋하게 멜라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줄 것을 요구해요. 뭐, 지금까지 체스터를 놀렸으니 멜라니도 책임을 조금은 져야 해요. 과연 그녀는 체스터의 이야기로 무엇을 들려줄까요? 이상 생쥐와 체스터와 멜라니의 애정어린 앙숙 관계 생활을 들어봤습니다.


익살맞은 만화적 구상이 신선한 동화여요. 다만 문제라면 그 유머가 그다지 재밌지 않아요. 구성은 산만하고 복잡한데다 별 의미도 없어요. 생쥐는 고양이 체스터를 갈구고, 멜라니 역시 체스터를 갈궈요. 고양이 역시 둘을 갈궈요. 셋은 그렇게 사이좋게 살았습니다...를 말하려 했던 동화 같아요. 아마도 그런 내용일 걸요? 엣? 그게 다냐구요? 맞아요. 이 동화책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죠. 그게 다여요. 다른 이야기가 없어요. 서로를 갈구고 , 비난하고, 골탕 먹이고 하는게 전부여요. 다만 그게 애정이 있는 골탕이라는 점이 작가는 귀여울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작가에게만 귀여울 수도 있어요. 독자들에겐 그게 별로 굉장하게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고양이 체스터 그림은 귀여워요. 이렇게 귀여운 그림체로 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면 좋겠어요. 작가에게 그럴만한 상상력이 있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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