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유혹 - 한 지식인의 중국 깊이 읽기 글항아리 인문에세이 4
쉬즈위안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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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식인의 중국 깊이 읽기>라는 표제에 눈이 간다. 틀린 말이 아니다. 중국만을 그야말로 깊이있게 읽어내려가는 책이었으니 말이다. 어찌나 중국 중국 중국 하던지...만약 중국이 한 나라가 아니라 일개 개인이었다면 나르시스트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세세하고 깊게, 따져묻고, 토로하고 , 걱정하고, 자신을 더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그 격정이나 열정이 부럽기도 했지만서도, 어찌나 중국, 중국 하던지 , 그 끝없는 중국사랑에 종국엔 그만 지치고 말았다. 분명 자랑하는 투가 아니라 '중국 너무 너무 문제 많아해!' 라는 투였음에도 말이다. 중국 사람이 자기 나라에 대해 관심이 많은거야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표출이 되었건 간에 애국심의 발로라는 점에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것임에도 묘하게도 반발심이 드는건 어떤 조화속인지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류의 내용이었던 < 나는 가끔 속물일때가 있다>와 비교해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속물...>에서는 다른 나라(독일) 임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감을 느꼈던 반면에 이 책은 질린다는 생각만 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초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ㄱ그때만해도 깊이있는 작가  한 명을 만났구나 싶어 반가웠었다. 실은 난 중국 작가들을 무척 존경한다. (물론 어떤 작가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서도. ) 땅 덩어리가 워낙 넓고, 인간 수가 많아서 그런가 종종 글의 깊이나 통찰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작가가 기적처럼 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뜬금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 작가라면 일단 주의를 하고 본다. 어떤 글을 쓸지 들여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저자 역시 대륙적인 깊이가 있군 싶어 처음엔 반색을 했었는데, 중반을 넘어서가면서부터는 질리고 말았다. 매 챕터마다 다른 분야를 다루고 있긴 했지만 실은 비슷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념만 조금씩 달랐지만 하고자 하는 기본은 같았다. 추려 보면 아마도 그것이 저자 개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인 듯했다. 중국을 분석하는 그만의 틀이라고나 할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중국은 망한 나라라는 것, 그걸 타지인들은 모른다는 것, 해서 그 갭에 절망한 저자는 어떻게 이 사태를 바로 잡아야 할지 난감하다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일단 저자는 중국에 왜 망한 나라인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리곤 이런 현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들이나 외신 기자들의 분석, 정치가들의 견해에 대해 태클을 건다. 중국에는 그런 장미빛 현실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런 분석이 힘을 얻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 중국이 처한 현실을 바로 보고 있지 못하냐면서 한숨을 쉰다. 

 

음...맞는 말이긴 하다. 중국 , 어쩌다 외신으로 들어오는 뉴스를 듣다보면 한심하게 생각되는 것이 오늘 어제의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회적이로건 문화적이로건 정치적이로건 인권면에서건 문제가 많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문제들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함으로써 외면되어지는 면이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다만 문제는, 이 작가가 어려서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즉, 너무 이상주의적이라서, 그럼에도 중국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어쩌면 지금의 중국은 지금의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낸 최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게 저자의 마음에 들건 아니건 간에, 지금의 중국으로써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변화하는 것조차 대단한 것이란 생각은 안 드나? 북한은 여전히 그러고 있는데 말이다.  비유가 적당하지 않다면 적어도 지금은 문혁 시대의 무지막지한 무지와 혼돈은 적어도 없지 않는가. 그것이 과거에도 가능했다면 지금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랴. 내 보기엔 중국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라인데 말이다. 한마디로 한 나라가 굴러가는데는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주관적인 면에서 보자면, 즉 그 나라의 국민입장에서는 그런 현실이 너무도 부조리하고 분통 터지겠지만서도, 알고보면 사실 어떤 나라도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다들 각자 자신의 문제를 떠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산다.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를 저울질 하면서...그러다가 운이 좋아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 조금은 인간답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내어놓을 수도 있겠지만서도, 알다시피, 지도자 하나의 힘으로 역사가 바뀌지는 못한다. 나라를 움직여 가는 것은 국민의 거대한 힘이니 말이다. 그 국민이 깨인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그것이 중국처럼 거대한데다 다민족간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나라라면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즉,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의 진보가 더디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일 거라는 것이다.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무척이나 역동적이고 혼란스런 과정이니 말이다. 거거에 역사란 원래 더디게 전진하는 느림보 게으름뱅이다.그런 앞에서 왜 이렇게 무지하고 비이성적이며 부패투성이냐고 울분을 터뜨려봐야 소용이 없다. 간단한 문제가 원래 아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들이 다들 다른 터인데, 거기에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 자체가 그러하질 않겠는가. 하니, 생존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된 마당이니 인간다운 삶,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마 그들에겐 가장 후순위 관심사일지 모른다. 일단 살아 남아야 꿈을 꾸건 말건 할테니 말이다. 

 

그렇다. 중국은 현재 독재의 유혹에 빠져 있단다. 다들 잘 사는데 혈안이 되어서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고, 인간적이고, 인권적인 나라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그저 황금만이 대세라는 식으로 쫓아가는 중이란다. 저자는 그것이 고민이란다. 음...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는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물론 정도나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었겠지만서도, 기본 우려는 같았다. 저자는 현재 중국이 잘 산다고 외국들이 부러워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중국 사람 전체를 두고 봤을때는 오히려 더 비참해졌다고 말을 하고 있던데... 하지만 아무리 대충 본다해도 그건 아니지 싶었다. 확실히 중국은 과거보다 잘 사니 말이다. 빈부격차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만서도, 그래도 모두가 비참하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질 않나. 우리가 독재자 박정희를 미워 하면서도 그의 경제 실적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게 왜 이겠는가. 잘 산다는게 그만큼 중요해서가 아니겠는가. 쫄쫄 굶고, 병들어도 의사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며, 비를 가릴 지붕이 없는 곳에서 살기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인권?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말이다. 우선 살아있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역시 지금 독재나 인권이 문제라곤 하지만서도,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사람들이 어느정도 산다 싶으면 그쪽으로 관심이 돌려지는건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면에서, 이 작가의 끊임없는 중국 망국 타령이 조금 심하다 싶었다. 중국 현실이 끔찍하다는건 알겠는데, 실은 그가 이런 책을 낼 수 있다는 것조차 중국이 과거보단 나아졌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하니, 쉬즈위안이여. 조금 인내심을 가지시길... 중국, 그다지 나쁘지 않다. 다들 그런 과정과 혼란을 거쳐 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없이 좋은 일만 생기는 성장을 바랐다면 그게 나이브한 사고인 것이다. 인간 사회가 그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그렇게 못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지 않나. 그러게 인간을 너무 좋게만 봐도 문제다.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다. 부패하고 부정의하며 이기적이고 타락한 족속들이다. 잘 사는 나라에서도 그렇다. 그러니 못사는 나라에서 조금 잘 사는 나라로 가고 있는 중국의 혼란을 일정 부분은 이해해 줘야 할 것이다. 원래 그렇다는걸 이해한다면 아마도 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한결같이 비분강개만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미화를 하면서 미담으로 만들어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는 것일 뿐이다. 

 

어쨌거나 이 책을 보면서 난 내가 난 중국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말이다.  다시 말해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냉정할 수 있었다. 하니, 중국에 굉장한 애정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시길...하지만 중국이 뭐라고? 라면서 별 관심이 없으셨던 분들은 아마 지루한 독서여정이 되지 않을까 한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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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선택 돈 버리는 선택 - 살면서 부딪히는 44가지 딜레마
잭 오터 지음, 이건 옮김, 홍춘욱 감수 / 부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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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촌스럽다 하여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책이다. 일단 돈 버는 선택이니 버리는 선택이니 하는 문장들이 확 와닿지 않았다. 돈 버는 선택이 뭐 한 두가지 겠는가. 집에 있으면 종종 받게 되는 < 좋은 부동산이 있는데요,...> 라는 전화조차 그들 주장에 따르면 세상에 다시 없을 절호의 돈 버는 기회이니 말이다. 과연 무엇이 돈 버는 선택일까? 돈 버리는 선택은 또 뭐고 말이다. 돈이라면 일단 골치가 아프고 보는 내 입장에선 제목만으로 허무맹랑하거나, 내진 들어봤자 별 소용이 없는 내용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제목 하나만 가지고 단 0.00001초만에 그런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서도, 어쩌라. 넘쳐나는 정보들을 적절하게 골라내기 위해서는 때론 그런 성급함도 필요하니 말이다. 하여간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이 책에 대한 내 첫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지 않을까 싶어서다. 작은 책 하나가 돈 버는 선택을 알려줄리 없으니 읽어봤자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선입견 말이다. 당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그렇담 아마도 당신은 나보단 경제적인 면에서 감각이 있는 사람인지도... 나로 말하자면 이런 문제에 관한한 일단 사고를 정지시켜놓고 마는 처지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첫 인상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끝에 첫 페이지를 읽게 되었는데, 오매나~~ 이건 딱 내가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니질 뭔가. 첫 페이지에 쓰여진 <들어가며>를 읽는데, 쏴악~~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 내 이야긴데 싶어서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는 늘 돈 문제에 관한한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이 우리를 방해한다. 나쁜 소식을 전해서 유감이지만, 첫 번째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감정이다.--중략---돈 문제와 씨름하다 보면 감정이 개입되기 쉽다. 실제로 과학자들이 두뇌의 활동을 촬영해 본 결과 사람들이 돈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부위는 수학 문제를 풀거나 세면대를 수리할때 사용하는 부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마약에 취했을때나 사자가 허기를 느낄 때 활동하는 부위였다. 심지어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활동할 때에도 우리는 잘못된 길로 빠져들곤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최근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경험은 미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p.6

 

아. 이 말이 내 가심을 꽝꽝꽝 두들겨댔더란 것이다. 어쩜 이리도 옳은 말만 구구절절 해대시는지, 더이상 안 읽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면 쭈욱 계속해서 읽게 된 결과, 이 책이야말로 돈 버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생각하지 않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 저자는 명쾌하게 이거다 아니다라고 결정을 내려주고 있으셨으니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결정들이냐고? 일단 소제목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신용 카드를 쓸까? 체크카드를 쓸까? 대출을 받아 대학을 다닐까? 아니면 대학을 건너뛰고 취업에 나설까? 쥐꼬리 월급, 원없이 써볼까 저축을 할까? 노후 준비 지금할까 아니면 나중에 해도 될까? 내 집을 살까 아니면 전세를 들까? 산다면 새 집을 살까, 오래된 집을 살까? 후진 동네의 좋은 집을 살까? 비싼 동네의 싸구려 집을 살까? 새차를 살까 중고차를 살까? 가장 쉽고 합리적인 포트폴리오는? 직접 투자를할까? 펀드에 가입할까? 자녀 학비 마련이 먼저일까? 은퇴 자금 마련이 먼저일까? 은퇴하면 어디에 살까등등...살다 보면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게 되는 44가지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저자는 깔끔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도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말이다. 오죽하면 이 책, 소란스런 퇴근길 전철안에서 음악을 들어가며 읽어지만서도, 전철에 들어서자마자 읽기 시작한 책을 내리기도 전에 다 읽었다. 그만큼 가독성이 좋았단 말씀, 아무리 좋은 말씀도 알아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재밌었던 것은 이 저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스무 살이나 서른 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할때였다. 왜냐면 나도 그랬음 하는 백일몽을 종종 꾸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미래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는 제약하에--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고 싶다면 로또 번호만 알려주면 되니까.--물건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최대한 저축을 해서 그 돈을 저비용 주식및 채권 인덱스 펀드에 투자한 다음, 시장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눈 딱감고 계속 보유하라고 말이다. 아, 그건 정말 나도 과거의 내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데,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이순간에도 인덱스 펀드에는 가입하지 못했지만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무엇을 했을까나 라는...그 시절을 현명하게 보냈더라면 지금의 후회는 적을텐데 싶어서 말이다. 후회는 앞서지 않는다고 한다. 하니 보다 적은 후회를 안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 책 정도는 읽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읽기도 쉽고, 얇아서 지루하지 않은데다, 알아두면 좋은 경제적인 조언들이 많았다. 44가지라고 하지만 깊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 허수룩하지 않은건 물론이고. 다 따라하는 것도 쉽진 않을 것이란 말이다. 간략하고 얇은 두께임에도 내용은 알찼지 싶다. 어쩜 내가 워낙 문외한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인가는 모르겠지만서도...

 

어떠신가? 위의 소제목의 결론들이 궁금하지 않으신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남에게 듣는거랑 내가 읽어서 이해하는 것이랑은 느낌이 다르니, 어떤 결론인지 직접 확인하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 많아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을 읽게 되시진 않을지... 돈이라면 일단 골치부터 아픈 경제치거나 투자 상담사나 은행원의 말에 설렁설렁 쉽게도 속아 넘어가는 나 같은 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는데는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다소의 불안감 정도는 해소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경제적인 후회 역시 일정 부분은 무식의 소산일 가능성이 큰 것이니 말이다. 알고 나면 별게 아닌데 모를때는 한없이 어려워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이럴때 쓰는 말이 있다. 배워서 남주냐고. 그렇다. 배워서 내가 쓰기 위해서라도 이런 책 정도는 독파하는 것이 좋지 싶다. 물론 경제적인 것에는 자신이 있다시는 분들이나, 경제적인 것에는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필요없는 책이겠지만서도... 하여간 다들 각자 자신을 알아서 필요한 것을 채우시면 되시겠다. 원제가 Worth it...Not Worth it 이다. 책의 제목으로는 한국 것보단 적절하지 싶다. 참, 이 책은 한국의 실정에 맞춰 구체적인 상황과 정보들을 대체했단다. 역자분의 역량을 생각해본다면 반갑기 짝이 없는 편집이다.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 사정을 들여다보고 활용 가능한 유용한 정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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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개념 - 서문과 세 개의 계론을 수록한 1932년 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 외 옮김 / 살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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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주의의 창시자인 카를 슈미트가 정치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를 두고 논증하고 있는 책이다. 확실히 말해둘 것은 그가 말하는 "정치적"이라 함은 다분이 법학적인 견지에서 투영해 본 개념이라는 것이다. 정치학적인 견지에서 본 개념이었다면 오히려 이해하기 쉬웠을지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되니 말이다. 가장 그럴듯하게 떠오르는 것은 " 정치란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행위? " 라고 것 정도? 하지만 법학적인 입장에선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행위가 비단 국가라는 단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니 말이다. 국가라는 단위에서, 적어도 한 나라의 정치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결단을 내리는 주체로써의 정치적 세력이란 무엇인가? 를 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슈미트가 말하려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다른 어떤 분야하고도 겹치지 않는, 이것이 아니면 법학적인 면에서 정치라고 하기 곤란하다고 이를 정도의 핵만 남기게 되는데, 슈미트가 주장하는 그런 경지의 "정치"라는 개념은 의외로 "적"과 연관이 지어진다. 적어도 "적"을 설정할 수 있을 정도라야 정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이야기다. 우리나라엔 수많은 시민단체가 있고, 정당이 있으며 , 노조가 있지만서도, 그들이 나라의 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나라의 적이라고 결단 내리고 동의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하고 광범위하며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정도가 되야지나, 그 권력을 정치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적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학적인 의미의 적은 아니다. 그야말로, 언젠가는 전쟁도 불사할 수 있는 그런 상대로써의 적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  말하자면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정치적이라는 개념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전쟁으로 논리가 뛰는 것을 보면서 어쩜 슈미트가 이런 논쟁을 하게 된 것은 다분히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가 바로 전쟁이 횡횡하던 유럽의 화약고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독일 태생인 그는 1888년에 태어나 거반 100년 가까이 사신 분이다. 전쟁이 언제 발발할 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서 살았었기 때문일까, 그는 주로 정치적인 개념의 핵을 전쟁과 연관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전쟁이라는 행위가 인간 이성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행위라는 의미도 있고, 사람에게 살해를 지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통의 힘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일상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살해나 군 복무를 지시했을 시에 우리는 저항하거나 반발할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그런 명령에 대한 불복은 곧바로 명령 불복종이나 적대 행위로 간주되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러니를 아이러니 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말하자면 이성의 전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이성의 전복을 받아들이게 되는 메카니즘이야말로 정치적인 행위에서 우리가 특별하게 취급해야 하는 점이라고 슈미트는 설파하고 있었다. 보통의 상황에서라면 분명 범죄가 되는 행위가 전쟁에서는 영웅이 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려면,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은 32년에 쓴 것을 63년에 저자가 다시 손 본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30년의 시기동안 격란의 시대를 보낸 탓에 자신의 견해라도 일정 부분 수정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유럽의 30년대에서 60년대를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이라...나찌가 발생하고 힘을 키워 나가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하다 망하는 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입장에서 권력을 어떻게 생각하고 분석했을지 궁금하긴 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던 간에--어찌보면 그는 그저 솔직하게 말한 죄밖엔 없을지 모르는데--, 그의 결단주의가 나찌의 독재에 논리적인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내용이건 간에 국가가 일정한 정치적인 결단을 내렸다면 국민은 그에 저항없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라의 결단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국민이길 포기하는 선언이라고, 즉 국민이 자신을 국가의 적이며 적과 동일한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좀 위화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상당히 논리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밖엔 없다는 흑백논리, 선명하고 투명하며 알기는 쉽다. 다만, 그것이 휴머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정의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이미  그것이 지난 역사속에서 증명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독재나 쿠데타로 만들어진 정부라도, 물론 국가의 정치적인 행위를 할 만한 권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만큼은 이의가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국민 모두를 위한 결단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만은 의문을 버릴 수 없는게 아니겠는가. 독재자의 결단이 국민 모두가 긍정해서 따를만한 합의라고 할만한 것이냐에 이르면 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니 말이다. 즉, 정치자의 결단이 국민의 마음일 수는 없는 것이고, 항상 옳은 수는 없다는 점에서 논란이 여지가 있다 하겠다. 물론 슈미트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라 하겠지만서도... 슈미트에게 중요한 것은 결단일뿐, 결단의 내용이 아니니 말이다.


결국 슈미트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스멘트의 통합론이 왜 나왔어야 했는가 이해하게 된다. 알맹이는 필요없다, 어떤 내용이건간에 국가의 권력 주체가 내린 결론만이 중요한 뿐이라라는 결단주의에 맞서, 중요한 것은 국민의 합의가 아니겠는가. 라는걸 주장하는 학파가 통합주의니 말이다. 정치적인 것이 언제나 옳을 수만은 없다는 소극적인 의문에서보다,  만약 그 정치적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틀릴 시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통합주의가 옳다고 본다. 정치적인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모든 국민의 보이지 않는 함의니 말이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슈미트의 책을 따로 읽어본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학부를 졸업한지 오래 되서 그런지 이 책 역시 읽기가 만만치는 않더라. 전공한 사람이 이럴진대, 보통 사람이 읽는다면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해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30년대에 주장한 한물간 이야기를 이제 와 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말이다. 혹시나 내가 놓친 주옥같은 문장이 있지 않을까 해서 눈을 뒤집고 두 번이나 읽어보았지만서도, 잠만 하염없이 온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솔직히 이 책이 지금 이 시대에 유용한 것인가는 의문이다. 우리가 독재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주적이라고 말하는 북한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서도, 전쟁을 염두에 둔 정치라는 개념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현대가 1930년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훨씬 더 복잡한 이해관계와 패러다임으로 돌아간다는걸 생각해보면, 적이라는 개념이 어딘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현대에선 이보단 훨씬 중요하고 시급히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니 말이다. 다만 한가지 유용했던 점은 법학의 논리 전개 과정을 심플하게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논증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건 몰라도 슈미트를 왜 천재라고 하는지는 감은 오더라. 악마적인, 또는 파우스트적인 명석함의 대명사가 되지 않을련지... 하여간 슈미트란 이름만으로 간만에 학부시절의 추억을 되살아 나긴 했지만서도,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하니, 법학 전공이 아니신 분들은 들기 전에 한번 주의 깊게 들여다 보시길...도전한다고 해서 의미가 이해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도전해도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책도 간혹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좌절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 ,이 책은 대학원 전공자 정도나 되야 흥미를 느끼면서 읽을만하지 않을까 한다. 나, 헌법 좋아했고, 법철학 싫어하지 않았지만 이 책 읽는 것이 썩 반갑지 않았다. 밑바탕에 어느정도 지식이 깔리지 않는 한 무슨 말인지 모를 가능성이 크고, 유용한가는 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의문이 들고 말이다.  하니, 덥썩 잡기 전에 일단 미리 간을 보시라고 권한다. 이 저자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해도 당신 잘못이 아닐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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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3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기풍 미생 3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열심히 살았지만 뭘 했는지 모를 하루. 다들 잘 보내셨습니까? "

라는 뒷표지의 문구가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그렇다. 열심히 산다고 살긴 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왜 사는지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 듯한 나날들. 그런 나날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것들을 느끼고 어떻게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즉 미생들의 활약상을 담아내고 있다. 청소년 시기를 이미 지나 겉보기엔 멀쩡한 어른 같아 보이지만서도, 사회에선 아직도 미숙하기 짝이 없는 신참들,  이젠 어리다고 마냥 어리광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20대의 이야기다. 아마도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막막하고 가장 실수도 많이 하며 또 가장 많이 배우는 시기일 신입 시절, 과연 미생의 주인공들은 그런 과정들을 통해 어떻게 성장해 나갈까? 그 첫 단추가 끼여진다는 점에서 어느때보다 흥미진진해지는 시기라 할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길고 긴 시험 기간이 끝이 나고 드디어 장그래씨의 입사가 확정된다. 일단은  계약직이지만 그래도 정식 직원으로 출근하는 길, 그의 마음은 희망와 설렘으로 부푼다. 늘 보던 상사들도 어딘가 달라 보이고, 어제까진 경쟁자였지만 이젠 동료가 되어 버린 입사 동기들은 새삼스레 친근하게 느껴진다. 장그래씨를 비롯, 장백기나 한석율 , 그리고 우리의 능력자 안영이등 신입사원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장그래씨는 바둑을 배우면서 몸에 배인 조심성과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서 나오는 추진력으로 점차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반면, 장백기는 바쁜 상사가 자신을 걸리적거려 하자 이내 풀이 죽는다. 한석률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장을 들썩거려 놓고, 안영이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선배와 갈등을 빚게 된다. 어떤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깐깐함이 재무팀 부장과 맞짱을 뜨는 사태로 붉어지게 된 것이다. 뭣도 모르는 초짜가 상사에게 대들었다면서 화를 내도 좋았을 상황이었지만 연륜에 있어 선배인 재무부 부장은 너그럽게 그녀의 실수를 넘어가준다. 오히려 그것이 안영이의 능력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봐준 것이다. 그간 배울 것이 없다면서 툴툴대던 안영이는 드디어 통찰력있는 선배를 만나 눈이 반짝한다. 이렇게 서서히 자신의 직업에 적응해 가는 신입들, 과연 그들의 앞날에는 어떤 일들이 펼쳐지게 될까? 궁금해지게 만들던 3편이었다. 


  입단에 실패한 뒤 방황하던 장그래가 드디어 입사를 했다.  비록 바둑에는 실패했지만 이제 새로운 분야에서 자신의 집 두개를 마련하기 위해 도전하는 길, 앞 날이 녹록치는 않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일단 그가 취직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몰려 든다. 진짜로 현실속에 실재하는 사람이었다면 축하문자라도 건네고 싶을 정도다.  하긴 그가 취직이 되지 않았다면 이 만화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작가 자신이 방황을 시작했야 할 것이기에, 입사가 안 될리 없었겠지만서도,  알고 찍는 고스톱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왜 조마조마하면서 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 영화나 만화나 소설이나,세상의  모든 흥미진진한 스토리들이 가진 특징일지도...알면서도 당한다는 것 말이다. 하여간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이 자신만의 인생의 바둑을 두어 나가는 첫 발을 내딧었다. 다행히도 그에겐 개성 넘치는 동료들이 있다. 그리고 좋은 선배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나가고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소소한 영웅들의 이야기. 우리가 하루 하루 분투하는 모습이나 사회를 보는 넓은 시야, 그리고 조금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볼만하지 않았는가 한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어떤 신입이었고, 나는 어떤 상사인가 돌아보게 만든다고 하던데, 틀린 말이 아니지 싶다. 우리 모두의 모습들이 조금씩 투영되어 있는 만화, 아직도 " 미생이 뭐라고? " 라고 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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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연못 속에서 깨어난 잭은 자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걸 알게 된다.  단지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잭 프로스트라는 것, 그것조차 달님이 알려 줘서 그런가보다 할 뿐, 진짜 이름인지도 알길이 없다. 얼음이 언 연못에서 지팡이 하나를 주운 잭은 그것으로 세상 모든 것을 얼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얼음과 눈을 만들어 내는 자, 잭 프로스트가 된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감탄한 잭은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도,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의 몸을 그냥 통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놀라는 한편으로 실망하는 잭, 그는 자신이 어쩌다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막막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해서 잭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보이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 세월이 300년 흐른 뒤,  잭은 겨울이 되면 여전히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아무도 그걸 몰라주자 화가 난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면 그가 얼음처럼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십분 이해가 되실 것이다. 딱히 나쁜 사람이여서가 아니라도 소외와 좌절이 반복되면 성격이 변하는게 당연한 것일터이니 말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보이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 온 잭에게 어느날 황당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부활절 토끼와 산타의 설인 둘이 찾아와 그를 자루에 넣어 북극으로 데려온 것이다. 영문을 몰라하는 그에게 산타는 기뻐하라며, 달님이 그를 새로운 가디언즈로 임명했다고 선언한다. 가디언즈란 아이들을 지키는 자라는 의미로 지금까지는 오로지 네명의 가디언만이 존재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할만한 산타와 부활절 토끼, 이빨요정, 그리고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는 샌디맨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만으로도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충분했던 세계는 그간 자신이 소외되어 간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던 부기맨의 등장으로 조금씩 무너지게 된다. 아이들의 꿈을 악몽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부기맨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면서 , 가디언즈를 믿는 아이들의 존재 역시 점점 줄어들어가고, 아이들의 믿음으로 힘을 얻던 가디언즈들 역시 조금씩 힘을 잃게 된다. 처음엔 가디언즈가 되는 것을 거절한 잭은 부기맨이 훔쳐간 자신의 이빨이 과거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부기맨 퇴치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힘을 써보기도 전에 부기맨의 함정에 빠져 그의 마음과는 달리 기존 가디언들의 신임을 잃게 되고 만다. 과연 잭은 부기맨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달님은 이제서야 잭에게 가디언즈가 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일까? 잭의 생각과는 달리 잭에게도 아이들의 가디언즈가 될만한 어떤 재능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달님의 저의를 도무지 알길이 없는 잭은 혼란스럽기만 한데... 

 

 

< 가디언즈 다섯이 처음으로 모였다. 아이들을 지킨다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왼편에서부터 샌디맨, 부활절 토끼, 산타, 그리고 이빨요정과 잭 프로스트 ,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꼬깔 모자 쓴 녀석들은 산타들의 요정들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모여 달님의 의중을 토의하고 있는 중. 잭은 자신이 가디언즈가 되라는 말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 가디언즈를 진심으로 믿는 마지막 아이, 제이미는 우연히 잠에서 깨었다가 모두가 함께 자신의 방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제이미 역시도 잭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에 무척 실망하는 잭.>

 

 

< 악몽을 몰고 다니는 자 부기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자신의 존재가 잊혀져 가는 것에 분노하던 부기맨은 오랜 세월동안 절차부심한 결과 가디언즈를 모두 없앨 계획에 돌입하게 된다. 아이들의 꿈와 희망을 두려움이라는 악몽으로 대치하려는 그의 계획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산타가 나온다는 말에 혹시나 작년의 <아더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재현되는건 아닐까 우려했었다. 물론 어제 보신 분들이 다들 수작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쳐드시는 것에 다소 안심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서도, 뭐, <아더 크리스마스>때는 안 그랬나? 다들 재밌다고 하길래 안심하고 갔다가 기함을 하고 나왔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설마 또다시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되풀이 하진 않겠지, 적어도 기본만 해달라는 심정으로 시사회장에 갔는데, 이거...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데다, 압도적인 영상미에 현란한 색채감, 그리고 풍부하고 섬세한 표현력은 가히 탁월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순발력 넘치는 개그감은 보는 내내 폭소를 터뜨리게해주고 있었다.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이 끝나는데 감격해서 조금 울컥해지는 기분이었다. 훌륭한 피날레였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교향악이 장엄하게 끝났을때의 여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아이를 위해 만든 만화 영화가 이렇게 다 큰 어른들의 심금을 울릴 수가 있다니...역시나 <드래곤 길들이기>를 만든 드림웍스다웠다.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자신들의 전작과는 다른 감동과 재미로 2시간여 가까운 상영시간을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하더라. 상영시간 내내 눈이 호사하는 기분으로 휘둥그레져서 봤는데, 일단 이야기가 유치하지 않게 탄탄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지 싶다. 아무리 그림이 아름다워도, 3D가 출중해도 이야기가 진부하거나 유치할 시 구제할 길이 없는데, 적어도 그것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 이야기도 신선했고, 모순 없이 시종일관 흘러간데다, 종종 격한 감정을 느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던 반면에, 억지로 감동이건 재미를 짜내려 질질 끄는 장면들이 없다는 것은 이 애니가 얼마나 탁월한 스토리텔러인지 짐작하게 했다. 이야기가 빠르고 신속하게 전개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할 새가 없다는 뜻으로, 그것으로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어느정도로 자신만만해 하는지가 읽혀졌다. 이야기가 재밌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단 한 장면이라도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채워넣지 않아도 될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이 관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풍성했지만, 보여주는 것들 역시 대단했다. 캐릭터의 열전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이 넘쳐났는데, 그림만으로 주인공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끔 단순하고 명확하게 설명한다는 것이 좋았다. 특히 이 애니에선 말이 없는 등장인물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샌디맨>을 눈여겨 보시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장 핫하게 팔릴 듯한 샌디맨은--만약 인형이 만들었졌다면--아이들의 꿈을 관장하는 요정이라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가장 풍부한 표현력과 상상력을 보여주는 녀석이었다. 아마 그 누구도 샌디맨의 매력엔 저항하긴 힘들지 싶다. 그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니 말이다. 그외에도 아이들의 이빨을 모으는 아름다운 이빨 요정이나, 다소 빙퉁맞은 성격이긴 하나 아이들에게 있어서만큼은 다정하기 짝이없는 부활절 토끼, 그리고 우리의 대장 산타와 산타를 보필하는 요정과 설인들, 그리고 해리포터의 아즈카반의 간수들의 새로운 버전같던 부기맨등은 1초를 등장하건 10분을 등장하건 간에 본인들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하여간 그들의 활약 덕분에 시종일관 정신없이 빠져들어 보다 끝이 난 영화였다. 솔직히 영화가 좀 더 길었음 했다. 마지막 장면이 올라가는데 조금 서운하더라. 뭐, 할 이야기를 다 했으니 끝이 나야 하는건 당연했지만서도 말이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며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 속에서도 가장 기억해야 할 자는 잭 프로스트다. 잭이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군지 모른 채 떠돌아 다니다, 결국 자신이 왜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정체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중 하나였는데...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흘릴뻔했다. 내 주변에 그런 사연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이 될 터이니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고, 하여간 잭에게 그런 과거를 만들어준 작가에게 감사하고픈 마음이었다. 누군가 잭과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에도 자신이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없는 한 자신을 괜찮다고 생각하기 힘들다는걸 잭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런걸 보면 선량함을 지켜주는 힘은 나 자신의 강함도 있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몫도 있는게 아닐까 싶다. 우리를 괜찮다고 여겨주는 사람들이 없는 한, 그런 생각 자체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바로 가디언즈가 되기를 거부했던 잭이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런지...종합해보면, 믿음과 꿈과 희망과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던, 그리고 가디언즈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들을 지켜주겠다고 앞장 선 가디언즈들에게 부기맨은 이렇게 되묻는다. " 그렇담, 너희들은 누가 지켜주는데? " 라고...그에 대한 대답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는데, 진짜로 멋진 대답이었다. 대답이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관에서 확인하시길...더불어 보실 생각이라면 3D로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장면 장면이 화려하기 그지 없다는 것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지만, 3D 효과 역시 탁월했으니 말이다. 하긴 누가 하늘을 나는 썰매의 매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산타 말대로 다들 썰매라면 사죽을 못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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