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멜론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었음에도 도무지 제목이 입에 붙지 않아서 원제가 뭘까 살펴보니 <Begginer's Goodbye>다. 초심자의 이별이라...확실히 이 책에 어울리는 제목이다. 갑작스럽게 아내와 사별하게 된 남자가 그 이별을 감당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내용이니 말이다. 어감상으로도 그렇고 내용상으로도 원제가 훨씬 더 실감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리뷰를 쓰려고 검색을 하는데 내가 그때까지도 이 책의 제목을 <원치 않은 이별> 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까지 읽고 나면 왠만하면 제목 정도는 기억이 되는데 말이다. 어제 책을 다 읽고 났는데도 여전히 책 제목을 헷갈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책 제목이 잘못 지어졌다는 뜻이 아닐런지...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은 이렇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은 한쌍이었던 아론과 도로시 부부, 키에서나 (아론은 190, 도로시는 152) 나이 차에서나(여덟살 차이, 도로시가 연상임), 인종면에서나 (아론은 백인, 도로시는 중남미계 이민자의 후손), 직업면에서나(아론은 영세한 출판사 편집자, 도로시는 암 전문의), 성격면에서나 (아론은 유유부단, 도로시는 주장이 분명하고 독립적임) 어느것 하나 공통점이라고는 없던 두 사람은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어릴때부터 오른팔과 다리에 장애가 있던 아론은 자신을 돌봐주려 하지 않는 도로시의 무심함이 좋았다. 확연하게 차이나는 둘의 결혼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신혼 기간을 넘긴 두 사람은 그럭저럭 순탄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감기에 걸려 일찍 집에 돌아온 아론은 퇴근하고 돌아온 도로시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말다툼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집 옆 나무가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해 도로시가 죽고 만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아내를 보내야 했던 아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이웃과 주변 사람들이 써주는 끊임없는 관심조차 성가시기만 한 아론은 결국 자신의 집에서 나와 누나 난디나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 이후였다. 죽은 도로시가 종종 나타나게 된 것이 말이다. 아론으로썬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에 대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을 건네지도 못한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질까봐 두려워서이다. 가끔씩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 그를 긴장시키는 도로시, 과연 그녀는 왜 다시 나타난 것일까? 아론은 그녀를 다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그녀가 언제고 다시 사라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과연 도로시가 다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는 가운데, 아론은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 보게 되는데...


전형적인 앤 타일러표 소설이라고 할만한 작품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쓸쓸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사랑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히나 요 몇 년간, 주로 어두운 내용과 결론으로 독자들을 암담하게 하시더니만, 이 책을 통해 전성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따뜻한 결론으로 끝을 맺는 것을 보곤 한없이 반가웠다. 다른건 몰라도 앤 타일러 여사와 비극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소시민의 쓸쓸한 삶과 희망에 대해 그녀보다 더 잘 아는 작가가 드물어서 그런 것일까? 그녀가 주인공들을 불행한 채 놔두고는 책을 끝마치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다. 세상 사는게 다 우울하고 심드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참 나..통속적인 로맨스 소설 작가도 아니고, 미국에서는 내놓라 하는 풀리처 상을 타신 작가인데, 어떤 결론을 내시던지 간에 그녀 맘이겠구만서도, 그럼에도 앤 타일러의 우울하고 암울한 세계관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창조해낸 주인공들에게 워낙 동질감을 많이 느끼다보니, 그들이 좌절한 채로 회색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런게 아닐까 싶다. 그들이 너무 친숙한 나머지 그들이 불행하거나 사랑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앤 타일러 만큼은 행복하셨음 하고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행복은 곧바로 작품의 행복으로 연결되어지니 말이다.


하여간 다시금, 앤 타일러식 사랑이 돌아와서 반가웠던 책이 되겠다. 앤 타일러의 책 중에서 그 중 최고라고 한 리뷰어가 말했다던데, 그 정도는 아니라도 충분히 그녀의 특성을 만끽할 수 있던 소설이었지 싶다. 사랑에 서툰 사람들이 사랑을 하게되면서 우왕좌왕 하는 모습들이 귀여웠고, 절대 사랑이 불가능할 것 같던 사람들이 사랑을 찾아가게 되는 모습들도 마냥 흐믓했으니 말이다. 좌절이나 불안, 두려움, 사별의 아픔들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주인공이 조용히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은 물론 감동이었고 말이다. 삶은 어쩜 대단한게 아니라고 그런 말을 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싶었지만서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실은 그 대단하지 않은 그 삶이야말로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고 말이다. 평범한 삶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종종 있으시던데, 내 생각엔 그렇다. 평범한 삶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워낙 내가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해서 그런 로망이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평범함 속에서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찾아낼 줄 알던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게 느껴졌던 소설, 한가롭게 읽을만한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딱히 드라마틱한 전개가 없다고 해도 소설이 얼마나 재밌어 질 수 있는지 발견하게 되실지도...

덤으로, 이와 비슷한 류의 앤 타일러의 소설을 추천드리자면 이렇다.

1. <우연한 여행자>

2.<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3.<바너비 스토리>

4.<종이 시계>

5<홈시크 레스토랑>

6.<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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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해맑은 천사같은 표정의 주인공 네드는 오늘 하루가 힘들었다는 정복 입은 경찰의 푸념에 대마초를 건네고 맒으로써, 곧바로 저능아 내지는 멍청이로 낙인 찍혀진다. 대마초 판매 혐의로 잡혀간 그는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8개월만에 모범 수형수로 나오게 된다. 설상가상이라고, 오랜만에 집이란 곳에 와보니, 3년동안 동거를 했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고, 거두절미하고 네드를 내쫓는다. 내쫓기는 건 상관없지만 키우던 개 윌리 넬슨만은 데리고 가게 해달라는 네드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전 동거녀, 머물 곳이 없어진 네드를 하는 수 없이 가족을 찾아간다. 큰 누나 리즈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전업 주부로 인권 다큐를 찍는 감독 남편과 보이지 않는 거리감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는 처지다. 둘째 누나 미란다는 기자로 대성하고 싶은 야망은 넘치지만 아직까지 큰 건을 물지 못한 커리어 우먼으로 왜 자신에게 남자복이 없는 것일까 한탄중이다. 막내 동생 나탈리는 공식적으로는 레즈비언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섹스 상대를 고르지 않는 박애주의자다. 처음엔 다들 네드의 불운에 걱정과 관심을 보이던 여자 형제들은 그가 그녀들의 삶에 개입하자 점차 분노하게 한다. 전혀 뜻밖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네드의 바보같은 행동에 펄펄 뛰던 가족들은 어쩌면 문제는 그가 아니라 그녀들에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 네드, 누나 리즈의 집으로 쳐들어 오다. 그냥 사진으로만 봤을때는 이 장면이 그다지 우습지 않을지 모르지만, 영화속에선 엄청나게 웃긴다. 저 멍청한 녀석이 진짜로 우리 집으로 오네? 라는 리즈의 아연 실색이 네드의 씩씩하고 천연덕스러운 발걸음속에서 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둘째 누나 미란다의 이웃 제레미, 섹스를 하던 와중에도 미란다의 호출이라면 당장 와줄 정도로 절친. 누가 봐도 그가 미란다를 사랑하는 것이 명백해 보이지만, 문제는 미란다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 며칠 미란다의 집에 머문 네드는 서로를 사랑하는게 그렇게 뻔한 둘이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개입은 둘 사이의 불화를 낳게 되는데...>




<행복한 레즈비언 커플, 나탈리와 신디. 그녀들의 특별한 관계 역시 나탈리의 임신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오~~~ 폴 러드! 이렇게 깜찍하게 영화를 찍다니...드디어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싶어서 무척 반가웠던 영화였다. 폴 러드는 미드 <프렌즈>에서 피비의 애인으로 나올때부터 눈여겨 봐왔던 배우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비중있는 역을 맡게 된는걸 보니 팬으로써 흐믓할 뿐이다. 물론 이 영화외에도 주연을 맡은 영화가 몇 편 있긴 했지만서도, 그만의 매력이 이렇게 온전히 살아있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한다. 네드의 여자 형제로 나오는 여배우들 모두 요즘 한가닥들 하시는 연기자였음에도, 확실히 이 영화는 네드를 위한, 그러니까 폴 러드를 위한 원맨쇼 같은 영화였다. 사람들을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키는 지극히 해맑은 표정으로, 자유 자재로 사람들을 웃기는데 어찌나 흔연스럽던지...작위적으로 웃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코미디 영화로써 합격점을 받아도 좋지 싶다. 어찌보면 과장이라고 할만한 캐릭터지만, 실은 주변에 있을 법한 눈치 없고 순진무구한 네드를 그 자체로 연기하는 폴 러드는 특히나 압권이었는데, 만나는 사람 마다 경계하지 않고 무조건 믿고 종알종알 털어놓는 그가 황당한 한편으로는 동질감이 느껴지는건 그가 그만큼 연기를 잘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식간에 무장해제를 시키고 마는 영화속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관객들도 그의 매력에 순식간에 무너지시지 않을런지...거기에 다른 여배우들의 매력 역시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특히 이 영화를 보면서 주디 디샤넬이 무척 아름다운 배우라는걸 처음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여자임에도 레즈비언 커플로 나오는 다른 여배우와 비주얼이 너무 차이나서 말이다. 레즈비언 커플로 나오면 그게 안 좋구나 싶다. 표나게 비교가 되니 말이다. 하여간 줄거리도 억지스럽지 않아서 좋았고, 우스운 장면에선 박장대소를 할만큼 웃긴다는 점도 좋았다. 삽입된 음악 역시 상황에 적절하게 어울려 웃음을 주던데, 네드가 출소하는 장면에서 흘러 나오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는 그 뒤의 상황을 감안하면 참으로 기발했지 싶다. 상황을 비꼴 수만 있다면 노래만으로도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하여간 경찰에게 대마초를 파는 장면이건, 매형의 불륜 장면을 보고도 속는 장면이건, 보호관찰사에게 대마초 흡연을 털어놓는 장면이건 간에 그 웃음이 전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웃긴다는 점이 탁월했지 싶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 네드 같은 인물이 꼭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건 말이다. 처음엔 바보 같은 네드가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결국엔 그의 진심에 지고 마는걸 보면,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단 마음이라는 것에 약하지 않는가 한다. 아무리 이성적인 것을 따진다고 해도, 감성적인 부분을 없앨 수는 없는 법인 듯... 우울하신 분들에게 특히 강추~~~ 좀 속상한 일이 있어 기분전환 삼아 보았는데, 90분 내내 웃다 보니 기분이 확실이 풀어지더라. 그래서, 폴 러드...당신을 사랑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지. 사랑할 수밖엔 없었던 매력 만점의 영화, 러드씨,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영화 기대하고 있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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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처럼 연애하지 마라 - 세상의 모든 딸에게 권하는 연애심리바이블
엘런 페인 & 셰리 슈나이더 지음, 최송아 옮김 / 명진출판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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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딸들에게 권하는 연애 바이블이자 20년동안 전세계 여성들이 열독하며 공감해온 연애 비기라는 말에 솔깃해서 보게 된 책. 한마디로 싸게 굴지 말라아...라는 말을 하고 있던 책이었다. 별게 아닌 거 같다고? 하지만 그걸 지키는 여성조차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연애 비기라는 말이 틀리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긴 했다. 뭐, 제대로 연애조차 못해본 나는 이 책에 대해 뭐라 하긴 그렇고...단지 이 책을 보면서 든 감상을 간단하게 말해본다면, 적어도, 몇가지 점에서는 이 두 저자분들에게 공감했다. 그 중 하나는 내게 마음이 없는 남자에게 매달린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 주변에 보면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남자에게 잘 해주기만 하면 잘 될 것이라고 믿는 여자들을 종종 봐왔는데 그건 미련한 짓이라고 한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는데 서툴기만 했는데. 이렇게 정곡으로 그건 미련해, 왜 쓸데없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니 라고 말하는데 속이 다 시원했다. 역시나, 연애 고수들의 충고는 하수들과는 다르지 싶다. 핵심을 찌르고 냉정하기 이를데 없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지 않는가. 가차없이 해대는 충고들은 참으로 들으만 하다니까.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을시에 충고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런 친구때문에 고민인 분들은 이 책을 선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섹스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충고를 해주는 점이 좋았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원 나잇 스탠드를 통해 사랑을 키워 나가는 장면들을 곧잘 보게 되는데, 난 그게 정말 의문이었단 말이지. 내가 남자건 여자건 간에 원나잇 스탠드로 만난 사람을 계속해서 사귈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다. 뭐랄까.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연애를 한단 말이냐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있어서 말이다.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전하는 드라마에 비해 이 양반들은 단호하게 그건 아니라고 못을 박아 주신다. 뭐, 실제로 원 나잇 스탠드로 결혼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도 없진 않겠지. 하지만 그것이 보통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질까 하는 것은 의문이라 하겠다. 아니, 이것 저것을 따져볼 필요도 없이,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섹스를 하는 여자를 좋게 볼리 없지 싶다. 그게 대세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지... 하여간 다소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고, 요즘 세태에 이 양반들의 견해가 옳을까 싶기도 했지만서도, 그들의 보수적인 견해가 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적어도 상처받지 않는 연애를 위해서라면, 그런 정도의 조심을 해야 한다고 보니 말이다. 하여간 연애가 힘들다시는 분들은 보시면 좋을 듯...읽기도 쉬워서 금방 읽힌다. 어렵지 않고 흥미진진하다는 것도 좋고 말이다. 연애가 당장 필요하신 분들에겐 어쩜 안성맞춤인 책이 될지도...물론 이 책이 성공까지 장담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서도, 적어도 최악의 실패는 막아주지 않을려나 생각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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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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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 선고를 받고 죽은 엄마, 저자인 셰릴은 그만 무너져 버린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그녀가 여섯살때 가족을 버려 버렸고, 그녀와 그녀 남매들에겐 엄마가 그들을 지탱하는 전부였다. 그런 엄마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셰릴은 충격에 자신도 이해가 안 가는 충동적인 행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끊임없이 불륜을 해댄 것, 결국 남편 폴에게 자신의 불륜을 고백한 셰릴은 고통스런 이혼 과정이 들어가게 된다. 상대를 가리지 않던 남성 편력, 마약 중독에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것까지 겪게 된 셰릴은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참에 우연히 들게 된 여행 정보 책자는 그녀를 솔깃하게 만든다. 바로 미 서부의 산맥을 따라 트래킹을 한다는 것으로, 셰릴은 마치 누군가 부르기라도 하는 듯 그 여정을 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돈은 부족하지, 산에 대한 정보는 빈약하지, 산을 걸어본 적이 없는 몸은 적응이 안 되지, 지고 다니는 짐은 산더미 같지...각오는 했지만 실제로 산을 걷는다는 일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걷는 동안 서서히 자신의 고통이 치유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친절에 그녀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찾아가게 되는데...


일찍 죽은 엄마를 그리워 하면서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던 저자가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하는 스물 일곱의 석달을 그린 책이다. 걸으면서 비로서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고 자기 자신을 치유했다고나 할까. 그런 과정이 아니었다면 정말 못말릴 정도로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대견하기 그지 없었다. 바닥이 어딘지 모르고 추락하는 배에서 내려 자신을 추스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사랑과 미쳐 하지 못했던 말들,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 한번도 자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자신만의 성인으로써의 삶을 살아가던 저자가 무척이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렇다. 언젠가 성인이 된 우리는 일정 시점에서 부모를 용서해야 할때가 오는 것 같다. 상처받은 여자라는 , 내진 사랑받지 못했던 아이라는 분노때문에 자신을 파괴하던 그녀가 그녀만의 고유한 장점들을 찾아가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해 보이던지...그런 과정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처럼 행복하지 못했을 거라는 점에서 그녀의 영특함에 찬사를 보낸다. 그녀의 행복에 , 그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빨리 쉽게 읽히는 점이 장점이다. 두꺼워서 한참 읽겠다 싶으실지 모르겠는데, 가독성이 워낙 좋아서 두껍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작가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지만서도, 어쩌면 별다른 내용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시면 좋을 듯...일찍 죽은 엄마에 대한 고뇌와 갈등이 그녀 머릿속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별로긴 했다. 아, 그 얘긴 좀 그만 하지 싶을때가 있어서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저자로써는 자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주제였기에 쉽게 놓아버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객관적으로 쓰여진 소설이었다면 그런 문제들은 깔끔하게 몇 문장으로 해결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서도, 저자 자신의 문제이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외에 이십대 시절의 저자의 방황이 극한을 이룬다는 것과 그럼에도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발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긴 했다. 앞의 것엔 학을 떼다가도, 그럼에도 제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엔 짠했다고나 할까. 하여간 설렁 설렁 읽을만한 거리를 찾는 분들에겐 괜찮을 듯. 하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무언가를 찾는 분들에겐 조금은 부족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나는 그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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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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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학의 신기원이라 일컬어지는 <파타고니아>의 저자 브루스 채트윈이 쓴 두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서이다.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고 하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브루스 채트윈, 특히나 <송라인>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읽고 싶어했음에도 여태껏 읽지 못한 채 보관함에 넣어져 있던 것이었다. 원서로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호주 여행기라는 정보에 다소 뜨악해져서 매번 망서리고 있었는데, 기대하지 않고 있던 번역서가 나왔다는 소식에 어찌나 반갑던지... 냉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파타고니아> 한 권만 달랑 읽은 작가임에도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흥분하는 이유는 그가 단 한권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할 만큼 매력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호들갑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다. <파타고니아>를 처음 출간할 당시 원고를 검토하던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원고와의 만남은] 내가 출판 편집 일을 하면서 경험한 가장 짜릿한 열 가지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지금껏 내가 검토해온 다른 저자들의 원고들과는 전혀 달랐다.” 고 말이다. 난 그의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란 것을 안다. 나 역시도 " 그와의 만남은 나의 독서 생활에서 경험한 가장 충격적인 열 가지 '사건' 중 하나였으며, 지금껏 보아 온 다른 작가들의 책과 전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기행문이라는 장르에 독특하고도 색다른 문법으로 여행기를 적어 내려가던 브루스 채트윈의 등장은 그만큼 신선했었다. 오죽하면 기행문계의 <콜럼부스의 달걀>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아무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쓰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자연스럽고도 재치있는 입담으로, 기행문의 새로운 어법을 제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하지만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브루스 채트윈, 그 자신이였다.  그 어떤 여행지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영혼을 그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어디를 가건 간에 당신을 가지고 가는 것엔 변함이 없을 거란 말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틀리지 않아, 기행문에서 우리가 종국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영혼이니 말이다. 어디를 갔건, 어떤 사람을 만났건 간에 결론은 그렇다. 그런걸 감안해보면 내가 왜 이 작가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하게 되실 것이다. 내가 열광하는 상대는 바로 다름아닌 브루스 채트윈이란 것을 말이다.

 

그 브루스 채트윈이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송라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지... 송라인은 보이지 않은 길이다. 일명 <꿈의 자취>라고 일컬어지는 그 길은 호주 애보리진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나타내주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말로 하자면 노래로 된 토지 문서라고나 할까. 태어나면서부터 애보리진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송 라인은 그가 가질 수 있는 땅이며 보호하는 토템, 그리고 혈연관계등을 나타내 준다고 한다. 호주의 그 드넓은 땅에 대해 아무도 권리가 없다고 백인들은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애버리진은 자신의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줄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백인들은 문서화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애매하기 짝이 없는 노래로 구전되어 온다는 이유로 무시했다는 것이다. 척박한 호주 서부 사막에 백인들이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그나마 갈등이 덜했으나, 그 땅이 금 기타 광물의 보고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래서 기찻길이 놓여야 하는 이유가 생긴 뒤부터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지만 자신의 땅에 누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백인과 애보리진, 강자와 약자, 문서와 구전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브루스 채트윈이 송라인에 관심을 갖고 호주로 여행을 가게 된 것이 바로 그 즈음이라고 한다. 그는 백인들에게 배타적인 애보리진을 설득해가면서 송 라인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것을 절대 애보리진에게 나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특유의 친화성도 한 몫 했었겠지만, 그를 믿고 중간자 역활을 한 러시아계 이민자의 후예인 '아카디'의 도움이 컸다. 채트윈 혼자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 내진 가보지 못했을 곳까지 그가 안내했으니 말이다. 그의 도움과 호주 체류 기간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채트윈은 애보리진들의 송라인에 대해 점차 감을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정 중간 중간 그는 자신이 그간 적어온 유목민에 대한 단상에 대해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유목민의 자손, 즉 노마드의 후예이며, 지치지 않는 방랑벽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끊임없이 땅을 배회하는 애보리진이야말로 자신과 같은 노마드임을, 그래서 자신이 송라인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리뷰가 길어지는 관계로 골자만 적어보기로 한다. 역시나 채트윈의 명성이 아깝지 않는 여행서였다. 어제 쓴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현대적인 목소리는 나온지 25년이 지난 책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고, 비록 그가 죽었음에도 우리와 같은 시대 사람임을 자각하게 해줬다. 문장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야로 세상을 보게 만드는 능력은 대단히 드문 것인데, 능수능란한 이 작가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더라. 이제 내가 왜 채트윈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이다. 그는 매같은 영혼을 가진 노마드 였는데,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이 매의 등에 타고 올라가 호주를 여행하고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눈을 통해 바라본 호주는 내가 여지껏 읽어본 어떤 호주보다 더 친근하고 이질감이 없어서 놀랐다. 그건 어디에서건 이질감보단 동질감을 찾아내는 그의 친화력 덕분이 아닐까 싶었는데, 빌 브라이슨조차 괴이함과 낯설음을 숨길 수 없어 하던 호주를 마치 자기 모국처럼 편하게 대하는데 두손 두발 들고 말았다. 애보리진에 대한 것은 또 어떤가? 애보리진을 진화 과정상 원숭이와 인간 그 중간 단계에 끼인 원시인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는 아무런 편견없이 그들을 대한다. 아예 편견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 살다보면 종종 이런 사람을 만난다. 아주 아주 드물게...본질 그대로를 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때면 부끄러워 진다. 세상에 색안경을 쓰고 사는 내 자신을 보게 되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능력으로 독자들을 가르치거나 모욕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었으니, 그것이 대단히 드문 자질이라는 것을 아마도 모르는 듯했다. 직접 그를 만났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놀랍지도 않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단박에 짐작이 되는 사항이니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내려 가다 정말로 나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장을 읽어본 느낌으로 나는 그가 꽤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 고찰해 왔으며, 어떻게 죽는가에 대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왔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반응은 이랬다. 왜? 고작 마흔 다섯의 나이에 왜 이런 생각들을 하고 다닌 것이지? 라는...<파타고니아>에서 그가 중국을 여행중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그가 예기치 않게 비명횡사한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걸 짐작하고 있더란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어떻게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이라는걸 알 수 있었지? 라는 의문이 머리속에 떠나지 않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역자의 말을 읽고 나니 이해가 갔다. 양성애자였던 브루스 채트윈은 80년대 초에 AIDS걸려 1989년 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멍한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의 병명을 알면서도,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껴안고 이 여정을 강행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80년대라면 AIDS에 대한 편견과 치욕과 두려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다. 과연 그는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 책 안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던데 말이다. 그나마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었더라면 나는 결코 그가 죽음의 망령을 껴안고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서도 자신이 아닌 미지의 것에 눈길을 돌리는 그의 천진난만함이 애처로워지던 순간이었다. 아마도 신은 그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매력적인 성품을 주시고, 그가 그것을 다 쓰기도 전에 서둘러 데리고 가신 모양이다.  그는 만족 했을까? 자신의 정체성 혹은 영혼이라 말할 수 있는 방랑벽에 대해 사람들에게 토로할 수 있어서 말이다. 그의 넘치지 않는 유머 감각이, 그의 다정한 성품이,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그의 멈추지 않는 입담이, 그리고 과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리고 그의 영혼이, 아스라히 그리워 지는 밤이다. 그가 한때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그가 이 지구에서 겪었을 고통이 끝나버린 것에도 감사를...비록 오래전 일이지만서도 말이다. 내가 그때 그걸 알았다해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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