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처음 호빗을 영화화 한다는 말에 글쎄..과연 그게 책만큼 재밌을까? 라는게 나의 반응이었다. 충분히 상상력만으로도 재밌는 줄거리를 영화적인 시각으로 구현해 낸다는 것이 아무래도 회의스러웠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머리속에서 즐겁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재미없을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상상력으로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를 실제로 눈 앞에 그려내는 것이 오히려 상상력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이번만큼은 그 우려가 전혀 기우가 아니여서, 초반 빌보 배긴스가 나오는 장면부터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상상하던 호빗과는 거리가 멀어서 말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익히 봤듯,  인간이 호빗족으로 출연했을 시, 상상력과는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푹신한 토끼발을 한, 통통하며 게으르고 느긋하며 귀여운 동화속에서나 튀어 나올듯한 호빗족을 그대로 재현해낼만한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영화 CG가 발전을 했다고 해도, 인간 자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해서 어느정도는 예상을 했지만 일단 호빗으로 나오는 빌보에서부터 그다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망스런 마음을 애써 모른 척 하고 , 전개되는 이야기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 보니, 그때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감독이 어떤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몇 부작으로 만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였다. 왜냐면 읽은 지 오래된 호빗의 줄거리가 영화를 보면서 서서히 생각이 났으니 말이다. 그것을 깨닫게 된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조금씩 영화에 호감이 가게 됐다. 엉터리로 만들려는게 아니라, 충실히 원작을 재현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 눈에 들어왔다고나 할까.  그래서 영화가 재밌냐고? 아마도 1편만 본 분들은 지루하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원작을 읽어 보시지 않는 분들에겐... 호빗족인 빌보가 어떻게 간달프에게 얽혀 모험에 나서게 됐는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던 그가 13명의 난쟁이 족 전사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우정을 쌓아가게 되는지, 그리고 반지의 제왕의 모태가 된 절대 반지를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하는 과정들이 한없이 지루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어본 사람으로써, 감독의 이런 꼼꼼한 전개가 앞으로 후반부를 재밌게 끌로 나가기 위한 토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한마디로 공들여서 책의 내용을 재현해보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졌다. 절대 조급해하지 말고 지켜 보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하여간 기대를 워낙 하지 않아서 그런가 기대보단 나았다는 느낌이지만, 확실히 원작보단 덜 재밌다. 최종 완성작이 나오면 아마도 이 평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서도, 그럼에도 이런 대작을 만들겠다고, 그렇게 유명한 책을 영상화 시켜 보겠다고 나섰다는 자체가 대단하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 같으니 말이다. 감독과 배우들의 험난할 여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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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교사 헨리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세상과 어느정도 거리를 둔채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는 기간제 임시 교사다. 새로 발령받아 가게 된 학교에서 그는 꺼리낌없는 태도로 아이들의 주목을 받지만, 그것에서 그들의 신뢰감을 얻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엉망이 되어 버린 아이들을 바로 잡아 교육을 시킨다는건 이미 불가능이 된지 오래라는걸 잘 알기 때문이다. 참담한 현실을 부여잡고, 더이상 나빠지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안간힘을 쓰는 동료 교사를 보면서 헨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자문하게 된다.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르치는 아이들이건 그 누구건 간에  마음을 열 생각이 없던 그이지만 세상의 비참함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울려댄다. 견딜 수 없이 비참한 인생들에 비통함에 젖어 살던 그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늙은 남자에게 섹스를 해주는 어린 매춘부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돈도 받지 못한 채 맞고 거리에 내 팽개친 것을 본 헨리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던 초연함을 벗어 던지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어른으로써, 그녀의 나이와 처지, 그리고 미래를 생각한 동정 어린 조치였지만, 받아들이는 아이는 그걸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집보다 거리가 낫기 때문에 거리로 나서게 됐다는 에리카는 동정 말고 빵을 달라고 한다. 이에 자신의 집으로 에리카를 데리고 간 헨리는 그녀와 어설픈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거리에서 배회하지 말라고 자신의 집을 내어 준 헨리는 그녀가 자신이 학교에 간 사이에 집에서 매춘을 하자 분노한다. 그는 자신이 어렵사리 내어 준 동정심으로도 아이들이 망가져 가는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음에 절망하고 마는데...

미국의 교육 현실이 참으로 처참하구나 라는걸 느끼게 해줬던 영화다. 이 영화속에선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교사도 아이들도 나오지 않는다. 교사가 무엇을 하건 그걸 삐딱하게 보는 아이들과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나오고, 그런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현실에 붙들여 보려 애를 쓰는 교사들이 나올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각을 하는 교사들에 한해서 말이다. 제목이 <디태치먼트-초연함>인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대부분의 교사들은 형편없는 아이들과 현실에 질려서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월급을 받아갈 뿐이니 말이다. 그들에겐 아이들을 교화를 하겠다는 의지나 바꾸어 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이 어떻게 일그러 지는지 경험을 통해 충분히 봐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명한 것이라는걸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하지만 현실은 너무 암담해서 결국 그들의 마음의 봉인이 해제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헨리가 마음이 약해져서 에리카를 집안으로 들이게 된 경우처럼 말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이었던 것일까? 인간으로써의 연민때문에 이런 저런 금기를 깨게 되지만, 과연 그들의 진심을 알아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하는 것은 굳이 영화의 결말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과거의 감동적인 교육 영화에서라면 , 헨리의 진심에 감화된 에리카가 개과 천선해서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게 교복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장면으로 끝이 났겠지만서도, 요즘의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었다. 암담한 교육 현실, 그것을 부추기는 엇나가는 아이들, 그들이 왜 그렇게 자랐는지 짐작하게 하는 무식하고 무심한 부모들, 그나마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생각에 안간힘을 쓰던 교사들마저, 점점 현실의 벽에 의지가 꺽이고 만다. 과연 요즘의 교육 현실에 대안이나 탈출구는 없는 것일까? 영혼이 사라진 교육 현장에 과연 미래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암담한 현실을 교사들에게 다 일임해 버리고, 밖에서 훈수만 두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정말로 몰지각하고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던 영화다. 영화는 내내 우울하고 비극적인 톤이라, 솔직히 보는 것이 그다지 편하진 않았다. 거기에 보고 나서도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이런 현실을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나 역시도 오리무중이긴 마찬가지니 말이다. 다만 안도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그래도 미국 아이들 처럼 막나가지는 않는다는 것.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하니 부디, 그들이 행복했으면 하고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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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시간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오픈하우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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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불명예 제대한 뒤,  한군데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방랑자 잭 리처, 그가 가는 곳이면 언제나 사건 사고가 생기는 것은 아마도 스릴러 탐정으로써의 운명 같은 것일 것이다. 뻔하게도,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그는 이번에 또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도 문제가 있을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말이다. 어떻게 그가 그런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어떻게 61시간만에 사건을 해결하게 되었는지를 풀어가고 있는 소설의 내용이다.


이리저리 떠돌던 리처는 우연히 노인들을 태운 관광버스에 승차하게 된다. 목적지까지만 타고갈 생각이었던 그는 버스가 진창에 박히는 사고를 당하면서 눈을 뜨게 된다. 그가 잠을 청하는 사이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가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사상자는 없었지만, 버스는 진창에 박혀 옴싹달싹 못하고, 부상당한 노인들에 봉쇄된 도로사정까지...관광버스에 탄 사람들은 별다른 하는 수 없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외딴 마을에서 묵어 가게 된다. 모텔 사정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마을 사람들 집에 흩어지게 된 관광객들, 리처에게는 마을 경찰서 부서장인 피터슨의 집으로 가게 된다. 부서장이라고는 사건 사고가 비교적 드문 시골 경찰인 탓에 경찰으로써의 능력은 미미한 피터슨은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인 리처의 탁월한 눈썰미에 곧 감탄하고 만다. 마을에 생긴 살인 사건으로 골머리르 앓고 있던 피터슨은 리처의 조언으로 사건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가게 되고, 곧 그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에게 임무를 사사받기에 이른다. 경찰 서장인 홀랜드의 미적지근한 지휘력이 심히 마음이 들지 않는 리처는 그곳이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 버린 채 사건 해결에 앞장서 나서게 된다.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는 그가 그렇게 나서게 된 것은 첫째는 그 경찰들이 너무 무능력하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점에도 있었지만, 마약상을 잡기 위한 증인으로 나서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숨어 있는 재닛이란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전직 사서이자 대학교 교수인 그녀를 만난 리처는 그녀의 강단있는 성품과 우아함에 그녀를 보호해 주기로 한다.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킬러가 마음에 도착한 가운데, 리처는 어떻게해서든 그녀를 살려야 하는 과제에 도전하게 된다. 절대 지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재닛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은 이래저래 틀어지게 된다. 과연 그는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피터슨마저 살해되자 리처는 분노로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데...


잭 리처의 개성이 여전하던 소설이다. 마치 신같이 모든 것을 알고 대응할 줄 아는 리처, 처음엔 그런 그의 능력에 반감을 가지게 되다가도, 어느새 그의 능력에 반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영웅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심성때문이지 않는가 한다. 스파이더 맨이나, 슈퍼맨처럼, 믿겨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인물을 결국엔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때문 아니겠는가. 정의를 수호한다는, 그리고 누군가 간절히 필요할때 앞장서서 보호해준다는 그런 설정에 다들 껌뻑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닐런지, 하여간 초능력이 아니지만, 초능력에 가까운 신기한 통찰력을 늘 보여주는 리처, 때론 그런 그의 능력과 애국심에 눈살을 찌프리게 되던데, 이번만큼은 그 정도는 아니라서 재밌게 읽었다. 테러리스트를 처단한다는 극단의 애국적인 , 그리고 감상적인 발로만 아니라면 리 차일드의 책이 그럭저럭 재밌다는걸 증명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다만 시간을 꺼꾸로 카운트 하는 것이 읽다 보면 거슬린다는 점에 별로...그렇게 문장을 끝낼때마다 써줄 필요는 없었는데 싶었다. 오히려 자꾸 반복되니까, 긴장감이 생기는게 아니라 읽는데 짜증이 나더라. 뭐, 그런것 정도는야 작가의 마음이니, 독자들이 알아서 헤아려 읽으면 될 듯 싶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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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작별 - 자살 유가족, 그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칼라 파인 지음, 김운하 옮김 / 궁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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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 이른 작별>이지만, 원제는 No time to say goodbye 즉, 작별의 인사를 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자살자의 유가족들 이야기.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그녀 역시 그 유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내과의의 아내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개선해갈 생각이던 칼라 파인은 남편이 마흔 네번째 생일을 한달 앞두고 자살을 해버리자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20여년의 결혼 생활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가 버렸다. 뒤에 남은 그녀에게 혼란과 고통, 죄책감과 무기력, 분노, 외로움을 남겨둔 채 말이다. 이 책은 그런 고통속에 홀로 남겨진 그녀가 어떻게 다시 자신의 삶을 되찾게 되었는지 그 지난하고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의 자살이라...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냥 평범하게 사별하는 것도 굉장한 충격인데,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자살을 했다면 어떤 이유로건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칼라 파인 역시 그랬다. 비교적 성공한 내과의였던 남편은 연달아 부모를 잃은 뒤 우울증이 시달리다, 그만 자신의 사무실에서 약물 투여로 자살하게 된다.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자 사무실로 달려간 칼라는 남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이후로 전혀 원치 않던 ,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을 세계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남편이 자살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경찰은 남편이 자살한게 맞는지, 혹시 그녀가 살해한 것은 아닌지 라는 의혹을 맨먼저 품었다고 하니,  세상이 험한 관계로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겠으나, 자살한 가족을 둔 사람에게는 그런 의심을 받는다는 자체가 기가 막히고 기분이 나쁘겠지 싶다. 거기에 본인들 역시 그런 의심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것이 자살자 유가족들의 공통된 마음이라고 한다. 무언가 그에게 자살을 하도록 내몰지 않았을까, 내진 왜 그가 자살하려는 것도 몰랐을까 등등 자살한 사람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을 본인들 역시 가지게 된다고 하니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가 죽은 자의 속을 어찌 알리요 마는, 그들은 끊임없이 묻게 된다는 것이다. 왜 자살을 하려 한 것일까 라고... 그 이유가 가장 궁금한 사람이야말로 자살자의 가족들일터인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소문들을 퍼뜨리면서 유가족들의 고통을 배가시킨다고 하니, 그들의 심정이 어떨지 안 봐도 훤하다. 때론 모른다는 자체가, 무식하고 배려없는 사람들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고통이라는 것을, 절망속에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그래서 무식은 절대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에게 예기치 않는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남편의 자살로 인해 유가족이 겪어가는 고통의 최전선에 서게 된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잃어 버린다. 그때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이 바로 <자살자 유가족 모임>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그녀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같은 길을 걸어봤기에 누구보다 더 잘 상대를 이해하는 그들 속에서 칼라 파인은 비로서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한결같이 따뜻한 눈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여서부터 였을 것이다. 그녀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그런 희망과 믿음이 없었다면 그녀 역시 남편과 동일하게 자살을 했거나, 살아있다고 해도 심한 고통에서 헤어날 길을 찾지 못했을 걸 잘 아는 그녀로썬,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살자의 유가족들의 심정이 어떤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자살자의 유가족이 갖게 되는 심적 고통과 그 고통의 근원,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무지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것이 가뜩이나 고통스런 유가족들을 더 벼랑으로 밀고 있다는걸 몸소 겪어봐서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회에 만연한 편견에 주눅들지 말고 치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녀도 잘 알다시피 그것은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다. 왜냐고? 그건 아마도 살아있는 누구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자살자에 대한 추문이 가족들에게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 가족은 나와 연결된 것이기에, 절대 절대 남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층 더 남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것이 설사 절대적으로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자신에게 감정적일 수 밖엔 없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에이즈나 말기암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환자가 자살을 했다고 치자. 만약 그나 그녀가 내 가족이 아니라면 나는 잘 됐다고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나 그녀가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고통스럽게 하루를 더 연장하느니,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 내겐 더 축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아마 난 그나 그녀를 위해,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그들을 위해 안도할지도 모른다. 나는 고통을 싫어하는 겁장이고, 단지 고통만을 위해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기에 나는 남들도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그런 이유로 자살을 한 가족들 역시 충격을 받더라. 그걸 보곤 깜짝 놀랐다. 적어도 그건 이해할만한 여지가 있는 자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지경에 왔을시,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더군다나 고통이 연장되지 않는걸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들은 그저 그것을 자살이라고만 생각하더라.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아닌... 그걸 보면서 가족들에 대한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충격을 남긴다는걸 알게 됐다. 그런 경우다 보니, 자살이라면 더군다나 가족들에게 핵폭탄급 충격을 가져오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 어떤 경우로도 그렇게 가족과 작별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사회 역시 그런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해 우리는 자살자 유가족들에게 이런 저런 메스를 들이댄다. 아직도 그들의 고통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은 더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그런 족속인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의 저자의 가장 억울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남편이 자살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사회는 그런 그녀에게 왜 막지 못했냐고, 왜 자살할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냐고, 어떻게 했길래 남편이 자살을 했느냐고, 당신을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게 아니냐고 질문을 해대니 말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자살자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그들의 유가족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살한 사람 자신이 아니고 말이다. 자살한 사람이야,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죽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서도, 그 뒤에 남은 사람들은 그가 남긴 모든 쓰기레들을 처리해야 하는 처지이니 말이다.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건 경제적인 것이건,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고통이 어찌나 크던지,  난 유가족들이 자살자에게 분노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자살자를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이 자살을 할때 유가족들이 그렇게 힘들어 할 것이라는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란걸 짐작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거두워 간 것일뿐,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크나큰 고통이 될 것이라는걸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진심으로 그걸 알았더라면,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은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그 누구도 가족들이 상처를 받는걸 원하진 않았을테니 말이다.


자살자의 유가족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었던 책이다. 그들에겐 구세주나 다름없는 내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유가족들에겐 그들만의 특이한 공감대와 세계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마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의도가 선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원래 산다는 것이 그런 법이니 말이다. 유가족들에겐 특히 유익한 책이겠지만, 그외에도 그들을 대해야 하는 사람이라던지, 아니면 이해의 지평을 넓혀 보려는 분들은 보심 좋을 듯..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무식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아주 아주 나쁜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유용한 정보가 있는 것은 좋았지만, 다만,  솔직히 줄줄히 자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는 질리고 말았다. 세상에나...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놀랐다. 그런 사람들이 음지에서 홀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굉장히 미안한 기분이었다. 이런 책들을 통해,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짐을 통해, 유가족들이 더이상의 불필요한 고통이 없기를 바라본다. 그것이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보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우리 유식해 집시다. 무식하단 이유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전혀 자랑스럽지도, 쉽게 면제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니 말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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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즌우드 바이블
바버라 킹솔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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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무지 몽매한 아프리카 인들의 영혼을 구제하겠다는 이상으로 가득찬 목사 네이선은 아내와 딸 넷을 데리고 아프리카 콩고로 향한다. 아름답지만 연약한 아내 올리애너와 미스 아메리카다운 자태와 허영끼를 지닌 열 다섯의 첫째 레이첼, 일란성 쌍동이지만 정상으로 태어난 리아와 반신불수 장애아로 태어난 에이다, 그리고 천둥벌개숭이 다섯살 막내 루스 메이까지,  다섯 여자들은 아버지의 열정에 희생양이 되어 자신이 살던 곳과는 전혀 거리가 먼 땅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곤 그곳이 자신이 생각하던 곳과 다르며, 실제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걸 알게 된다. 힘들게 바리 바리 싸들고 간 간 짐들마저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 서서히 판명되는 가운데, 엄마 올리애너는 그저 아이들을 먹이고 죽지 않게 하는것에 온 신경을 쏟는 것으로도 하루 해가 모자람을 알게 된다. 독선적이고 무모하리만치 외골수인 네이선의 전도 방식은 원주민과의 끊이지 않는 갈등의 원천이 되지만, 정작 네이선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이 무지하고 영혼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여기 와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때문이다. 그런 오만함의 상대는 비단 원주민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아내와 딸들 ,다섯 여자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지만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 그는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명감에, 군소리 없이 남편을 따르던 올리애너는 콩고의 사정이 백인들이 살아가기엔 점차 험악해지자 떠날 것을 남편에게 종용한다. 하지만 모든 백인들이 공포에 질려 짐을 싸는 사이에도 오히려 네이선은 자신의 신심을 하느님께 증명할 기회라면서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걸 막지 못하던 무능하고 무기력한 엄마였던 올리애너는 높아져 가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탈진하게 된다. 그녀는 왠지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을 끝장 낼 비극이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것이라곤 넋놓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과연 이 다섯 여자들의 운명은? 

 

한 남자의 선도 열정에 휩쓸려 인생을 아프리카에 저당잡히게 된 다섯 여자들의 운명이 30여년에 걸쳐 중개되고 있던 소설이다. 다섯 여자들의 목소리로 돌아가며 자분자분 진행되는 이 책은 그 다섯의 이야기를 조합해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막연하게만 들어오던 아프리카 선교의 실상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구제한다는 사명감에 고난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는 목사 네이선이란 캐릭터는 특히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답답한 기독교 인들의 전형처럼 보여져서 나름 통쾌했다. 시종일관 독나무 성경( 사랑이 아니라 독을 퍼트리는 말씀이라는 의미) 을 쓰면서 자신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며 행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보며 비겁자에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이라 생각하는 남자,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일부 다처를 고발하면서 정작 자신의 딸들과 아내에게 자신이 가하는 학대와 독재의 죄에 대해선 무심한  남자, 언제나 자신이 옳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주실 것이라 믿었던 남자, 성경에 쓰인 모든 고난을 몸소 겪으므로써, 비로서 자신의 신심이 증명되었다고 믿었을 남자... 그가 바로 아프리카인의 영혼을 구제하겠다고 나선 목사 네이선의 정체다. 처음엔 그런 그의 대의에 아버지고 남편이기에 따라 나섰던 다섯 여자들은 점차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막막한 타지에 홀로 남겨진 다섯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더군다나 당시 1960년대의 시대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과연 그 다섯 여자들이 어떻게 그 난제에서 벗어나게 될지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던 그런 소설이 되겠다.


아프리카 선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슈바이처 박사다. 이 책을 보면서 슈바이처 박사가 그렇게 유명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디에서고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밝혀지기 전까진 끝까지 사람을 믿고 보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기독교 인이건 아니건 간에, 아니 배웠던 안 배웠건 간에...그는 단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상대에게 주입하게 위해 이유 불문하고 독단적인 방법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의술을 배운 것도 그때문 아니었는가. 선교가 아니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이 그의 휴머니티를 칭송하게 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 나오는 네이선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 광신도가 되었을때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 구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지만, 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자신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가족과 자신의 주변에 고통을 가져 오는 이유가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그에게 그건 무시해도 좋은 일일 뿐이다. 주변에서 종종 이런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을 보게 된다. 벽창호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과 사는 고통은 이겨내기엔 믿음은 너무도 얄팍한 것이고, 그렇다고 계속하기엔 그 고통이 너무 크다.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고, 결국 믿음에 가려워졌던 위선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나 하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과 고민을 종종 들어왔기에, 난 이 책이 나오는 주인공들이 가공의 소설속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현실속에서 얼마든지 실재할 수 있는 것이라서 말이다. 아마 그래서  더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그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저으기 궁금했던 것이다.

 

하여간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교 이야기라고 해서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내진 선교를 찬양하는 그런 책이 아닐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생생하게 들려오던 아프리카의 목소리에 다양한 시선으로 상황을 보게 하던 넒은 시야, 그리고 아프리카 정치 상황에 대한 꼼꼼한 사전 조사까지...꽤나 공들여 쓴 책이라는 인상을 갖기에 충분한 소설이었다. 거기에 페미니스트적인 주장에 현대적으로 아프리카를 해부하는 목소리까지, 정치적으로도 들어줄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소설이 아니었는가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주변에서 네이선과 같은 사이비 목자를 직접 봐왔던 관계로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결말에 나 역시도 공감을 하는 바이며, 그들이 결국 그런 파국을 몰고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길인가 보다 라는 생각도 든다. 그 누구도 그런 파국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무리 막아보려 한들, 정작 당사자가 마이동풍이면 백약이 소용 없으니 말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던 소설이었다. 강렬하고 빠른 전개에, 일관성 있는 인물들의 개성, 영화로 만들어 진다면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출중한 서사성이 몰입도를 높인다. 다만 마지막에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이 옥의 티. 완벽하게 끝을 맺으려다보니 마지막에 가서 쓸데없이 장황하게 횡설수설하는 느낌이었는데,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안타깝더라. 본인이 하던대로 직설적이고 깔끔하게 끝을 맺었더라면 오히려 더 나았을텐데 싶어서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다 떨어졌을때나, 절실하게 하고픈 말이 아닐땐 입을 다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는 전략임을, 작가들은 아는 것도 좋지 싶다. 중언부언으로 말을 늘인다고만 해서 다 좋은 글이 되는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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