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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집어든 책마다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 집중력도 인내심도 바닥이고, 독해력도 예전만 못 하네. 나이가 들어서 그런걸까? 라면서 목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을 단숨에 날려준 책이 되겠다. 게걸스럽게 읽었다. 단 하루밤만에...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왜 늘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나는 왜 이럴까를 되뇌면서 좌절하고 있었을 것이다. 해서 이런 상황에 읽게 되서 특히나 고마웠던, 더불어 이렇게 잘 쓴 책이 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던 작품이다. 이렇게 괜찮은 책이라면 어디서 누군가가 거품을 물어도 진작에 물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하여간 간만에 좋은 책을 건져서 무척이나 기분 좋았던--여기서 말하는 간만이라는 건, 최소한 일주일 최대한 이주일 되는 기간이 되겠슴다.--<무게>의 본격 리뷰에 들어가기로 하겠다.
188센티에 230킬로 그램에 육박하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아서는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옛 제자 샬롯이 전화를 걸어오자 설레기 시작한다. 십대 시절부터 강박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이 어언 40년, 그래도 한때는 대학 교수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긴 했으나 이젠 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집에서만 살아온지 거반 20년으로,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생활한지 10년째라는 것이다. 뚱뚱한 자신의 몸매에 놀라고 부끄럽고 당황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다 못해 다른 삶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단념하고 살았던 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58세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심한 그는 샬롯이 왜 전화를 했는지와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올 것인가를 저울질 하면서 고민한다. 만나자는 그녀의 요청에 펄쩍 뛰게 당황한 아서는 고민끝에 자신이 예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며, 그럼에도 현재의 그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연락을 하라고 편지를 보낸다. 한참 뒤에 보내온 그녀의 편지속엔 십대 소년의 사진 한 장이 달랑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아서는 도대체 18년전을 마지막으로 자신을 만난 샬럿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진을 보내 왔으며, 결혼했다는 말도 흘린 적이 없던 그녀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궁금증을 못 이긴 그는 샬럿을 만날 생각에 20년간 치우지 않는 집을 치우기로 결심하고, 욜란다란 헬퍼를 집으로 부른다. 한편 기다리던 샬롯의 전화를 받게 된 아서는 술에 취한듯 발음을 흐리는 그녀의 억양에 한층 그녀가 걱정이 되는데... 과연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 이 잔잔한 소동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샬롯은 왜 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고작 반학기 동한 스승이었던 아서에게 전화를 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도대체 그 세월동안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강박적으로 먹어댄 탓에 집에 은둔하게 된 외톨이 아서, 그의 오래 전 제자 샬롯, 그녀의 재능 넘치는 아들 켈, 그리고 고작 스무살에 불과하지만 아서보다 현실적인 마인드를 지닌 욜란다. 이렇게 네 명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던 소설이다.
일단 이 책의 장점을 들라면 높은 가독성에 있다. 그냥 술술 읽힌다. 막힘없이...이 책의 저자가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단언컨데 학생들을 가르칠만한 능력이다. 이런 선생님에게 배우는 제자들은 얼마나 행운아들인지...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선생님 자신이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잘 쓴다. 유려하고, 거침없고, 흥미진진하고, 화자에 따라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데도 주저함이 없으며, 실제로 화자가 쓴 것인양 내면의 이야기가 설득력있다. 어떻게 병적으로 비만인 전직 교수와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이렇게 공감가도록 풀어놓던지 말이다,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작가가 남자인가 싶을 정도로 남성의 심리를 그럴듯하게 풀어놓는데, 가공할만한 대입능력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딱 맞아서가 아니라, 글을 워낙 잘 쓰다보니 그럴것도 같다면서 설득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녀가 설명하면 콩을 팥이라고 해도 팥인줄 믿어주겠다. 대체 이 작가는 어디서 튀어 나온 것인지, 감탄하고 말았다니까.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이처럼 산뜻한 이야기로 탈바꿈시켜 놓다니...존경스러운 필력이다. 사실 이 책은 소재가--230킬로그램이 주는 무게?-- 너무 무거워 보이는 지라 선뜻 읽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작품이었는데, 읽어보니 왜 그랬는가 싶다. 책은 경쾌하고, 감동적이고, 도와주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연민이 모략모략 솟아나게 하는 그런 작품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선입견이란건 조심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그런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이야말로 짜릿한 것이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무척 재밌게 읽었다. 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은둔자를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을 과연 작가가 해낼 수 있을까. 라는 궁금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책이었는데, 거기에 감동까지 있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에게 공감을 하거나 연민을 보내거나 함께 고민하거나 하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다. 얼핏 생각에 230 킬로 그램이나 나가는 주인공이 그 자체로 혐오스럽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다. 왜냐면 그는 그럴만한 대접을 받아도 좋은 사람이니까... 착한 소설, 재밌는 소설, 읽고 나면 행복한 소설이었다. 뭐랄까. 이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인 것처럼 생각되더라. 아마도 주인공들의 선한 성품에 동화가 되서 그런 모양이다. 이런 사람들의 행복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빌어주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달까. 굳이 꼭 단점을 꼽으라면 잔인한 십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과, 병적으로 비만인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 것이겠지만서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을 사랑하는 독자로써는 그 단점마저도 다행스러웠다. 왜냐면 삶의 무게에 이미 충분히 눌려있는 주인공들이 더 이상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읽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이 결국엔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랐음으로...
보라. 책속 등장인물들의 행복을 바랄 정도이니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잘 쓴 작품인지 짐작이 되실테지. 하니 특별한 책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 이 책을 보니 앤 타일러의 <우연한 여행자>가 떠오르던데, 이 작가의 앞 날이 기대되는 이유다. 아마도 앤 타일러 못지 않는, 좋은 작품들을 내주지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