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올해가 다 가진 않았지만 가장 강력한 <올해의 깜찍상> 우승후보 되시겠다. 깜찍한 시나리오, 깜찍한 나레이션, 깜찍한 자막, 깜찍한 여주인공등, 보는 내내 도대체 저런 깜찍함은 어떻게 구해 질 수 있는 건가요? 라고 자못 진지하게 (제작진에게) 묻고 싶어지던 작품이었다. 혹시라도< 미앤 얼 앤 더 다잉 걸 > 이란 제목에서 별 감흥을 받지 못하신다면, 내진 저런 제목으로 괜찮은 내용이 나와줄라나? 나와 줄 건덕지가 있을까? 라고 회의가 드시는 분들이 있다면, 주목하시길...이 영화가 무려 2015년 선댄스 대상(그랜드 주리)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심드렁한 제목에 어울리지 않은 거창한 수상 목록이 하도 수상해서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심정으로 봤더니만...이 영화 정말 대박이다. 올해 유난히 감동적으로 본 영화가 많았음에도 탑 파이브에는 무난히 들어갈만한 수작으로, 무엇보다 깜찍한 시나리오가 영화 전반을 좌지우지하고 있는데 눈을 뗼 수 없을만큼 매력적이다. 빈틈이 없고, 기발하고, 재치 넘치는데다, 청소년들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설득력까지 들어가 있던데, 오래전 보았던 <길버트 그레이프>나 <철목련>처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닌 영화였다. 셋이 비록 전혀 다른 작품들이긴 해도 한 영화속에 개성적인 캐릭터에 흔치 않은 이야기, 거기에 인간미에 감동까지 우겨 넣을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 않는가 한다. 미국이 나라가 개판이 되어 간다고 해서 인간성마저 그렇게 되는게 아닐까 했었는데, 여전히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하게 썪어가는건 아닌 듯 하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정도의 감성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건 오히려 우리가 경배하고 존경해 마지 않아도 좋을만한 자질이니 말이다. 하여간 서두부터 좀 장황해 졌는데, 그건 혹시나 이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서 노파심에 그렇게 된 것이고. 내용에 들어가보면...
내용은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라면 본능적으로 피해다니는 고등학교 졸업반 그렉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넋두리가 너스레가 아니라 진심인 이 청년이 들려주는 것은 어떻게 그 해 그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려버렸는가에 대한 연대기적인 이야기. 괴짜 사회학 교수인 아버지 덕분에 천부적인 냉소 탑재에 진지한 것이라면 질색하는 성품으로 자라난 그렉은 아무 문제 없이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꿈의 전부인 평범한(?) 청년이다. 어디에도 속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다고, 그것이 자신의 생존 전략이라고 본인을 설명하는 그는 모두와 친해 보이지만 실은 그저 모든 관계가 겉핦기일 뿐인, 누구보다 자폐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다. 그렇게 일명 " 이 세상 모든 일에 상관없어요," 청년에게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지니, 같은 동네 친구인 동급생 레이첼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안 됐긴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그렉에게 그의 엄마는 폭풍같은 잔소리를 퍼부어대고, 결국 엄마의 잔소리 폭격을 못 이긴 그는 하는 수 없이 레이첼의 집으로 병문안을 가게 된다. 그것이 바로 평생 그가 그토록이나 꺼려하던 우정의 첫 날이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한채 말이다. 그렇게 그는 유치원 시절부터 쭉 보아왔지만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레이첼,< 지루한 유대인 소녀 그룹 B> 섹션에 속해있었을 뿐인 이름만 알던 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자, 이제 진지한 것이라면 전염병 보듯 하는 청년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그가 상대하는 대상이 바로 진지하지 않을 시간이 별로 주어지지 않는 소녀라는 것이다. 우정이니 사랑이니 교훈이니 진심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사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그렉은 그럼 과연 사기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 얼 조차 "친구" 라는 말대신 < 동업자>라는 말을 쓰던 그렉은 병마와 싸우면서, 그리고 죽음을 목전에 두면서 진실과 맞닥뜨리려 용기를 내는 레이첼을 보면서 점차 자신의 틀을 깨나가기 시작한다 . 그것이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우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까맣게 인지하지 못한 채... 과연 이들의 운명은 , 어떻게 될까요? 보면 볼수록 그렉이 왜 마음이 흔들리는지 너무 이해가 되던 깜찍하고 매력적인 레이첼은 병마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보고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훈훈해지는 작품이다. 제목에 미앤 얼 그리고 다잉 걸...이라고 주인공 외에 두 사람의 이름을 더 올린 것에서 짐작이 되듯, 주인공 외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버려지는 것 없이 다 알차게 활용이 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버릴 없이 없다. 지나가는 듯 한마디 했던 것이 나중에 큰 복선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시나리오가 정말 이렇게나 빈틈이 없기는 힘들지 싶다. 영화속 내내 그렉은 자신을 보고 착한 아이라고 하는 어른들에게 경기를 일으킨다. 나는 절대 착하지 않다고, 몰라서 하는 소리인데, 나를 길들일 생각 하지 말라고...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그렉, 그런데 마지막을 보면서 ' 넌 정말 착한 아이였군, 어른들이 잘못 본게 아니었어, ' 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더라. 등장인물들 모두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그걸 보는 나 역시도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던 괜찮은 영화. 몇몇 장면은 보면서 울컥 울컥 했었는데, 특히나 레이첼의 엄마가 레이첼을 위한 동영상을 찍으면서 그렉에게 하던 조언이 인상에 남는다. 아가들은 무조건 예뻐해야 한다고, 그것이 아가의 권리이자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하던 나는 레이첼의 엄마가, 아이의 엄마를 평생 사랑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 한 아기를 가지지 말라고 그렉에게 부탁하는 장면에서, 레이첼의 상황과 맞물려 묘하게 가슴이 아팠다. 어린 시절부터 동업자 얼과 장난겸 취미삼아 고전 영화 패러디를 만들던 그렉이 평생 처음으로 진지한 영화를 만들고 그걸 상영하는 장면도 인상적...하지만 무엇보다 레이첼의 방을 들여다 보면서 그간 무수히 그곳을 드나들었음에도 발견하지 못했던 다람쥐를 찾아내던 그렉의 표정이 감동적이었다. 사랑이건 우정이건, 우리가 그것에 무엇이라 이름을 붙이건 간에...상대에 대한 애정은 그간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들었음에도 듣지못했던 것을 듣게 하는 기적을 행하게 하나니...어른들의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건 충고건 교훈이건 간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청년이 어쩌다 보니, 어른들도 늘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은 아니더라, 오히려 다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 안에서 진실을 말하려 애를 쓰는 존재더라, 라는걸 알아가게 되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라마지 않았으나,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심하게 망해진 한 해를 보내고 있더라는 청년의 반강제(?)성장기. 참을 수 없는 깜찍함의 퍼레이드에 조연 배우들의 호연, 신선한 줄거리에 설득력 있는 대화들의 항연을 보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 감동은 덤이니 알아서 챙겨 가시길...아마도 어리버리하고 소심한 이 청년에게 당신들도 마음이 움직여지실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