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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ㅣ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평점 :
제목만 봤을땐 식겁했다. 무슨 죽는데 '800만 가지 방법' 이 있단 말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날로 복잡하고 험악해져 가는 뉴욕엔 800만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죽는 방법도 800만 가지라는 단순한 뜻이라는걸 내 어찌 알 수 있었겠느뇨. 알고보니 그 말은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의 AAA를 이 잡듯 헤매고 다니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자주 하는 말이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엔 800만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죽는 방법도 800만 가지나 된다고, 하니 오늘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 아니겠느나고. 하긴 나 역시 이젠 어떻게 죽을까 하는 것이 슬슬 걱정이 되는 나이가 되었다. 삶도 물론 중요하지만, 편안하고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죽음, 무엇보다 끔직하게 죽지 않는 것도 꽤나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신문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사연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연을 심심찮게 접하게 마련이니, 잘 죽기 위해서란 한가지 이유 만으로도 평소에 선업을 쌓고 싶은 심정이다.
제목 이야기 하다 옆길로 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줄거리를 들여다 보자면 한 무허가 사설 탐정 매튜 스커더의 이야기다. 전직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그 앞에 창녀일을 그만 두고 싶어하는 킴이 찾아온다. 포주 챈스에게 자신이 일을 그만 두려 한다는 것을 알려 달라는 의뢰에 한푼이 아쉬운 매튜는 승낙한다. 어렵사리 포주 챈스를 만난 매튜는 그가 선선히 킴을 놓아주겠다는 말에 한껏 들뜨지만 다음날 그녀가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하자 경악하고 만다. 챈스의 짓이라고 단정한 매튜는 경찰에게 그의 존재를 알려 주지만 , 챈스의 알리바이는 너무 완벽해 경찰로서도 어쩌지 못한다. 분노와 무기력으로 술에 빠진 그는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병원에서 나온 그에게 챈스가 연락을 해온다. 자신은 절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서 킴의 살인범을 잡아달라고 의뢰하는 챈스, 매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챈스의 말을 믿어 보기로 한다. 새 인생을 시작할거라면서 좋아하던 킴, 잔인하게 살해했다는것 외엔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도주한 살인범, 한낱 창녀의 우발적인 죽음일뿐이라며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마당에 경찰도 아닌 그가 살인범을 잡는다는건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데...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끊임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사립탐정이라... 나약하지만, 또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주인공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던 소설이었다. 비록 추리 소설이란 장르에 어울리는 소설임에도, 살인범을 잡아가는 과정 못지 않게, 알콜중독자의 진지한 넋두리나 다양한 창녀들의 생활, 나름 멋진 인생을 산다고 자부하는 깔끔한 포주등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금주한 날들을 세면서, 시간 날때마다 AAA 를 돌아다니고, 자신이 만취되었을때의 행동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던 그. 자신은 알콜 중독자가 아니라고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고 자신하던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알콜중독자입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거나, 알콜 중독자들이 왜, 어떻게 알콜 중독자가 되는지, 그리고 그들이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보셔도 좋을 듯... 실감나고, 진지하며, 통찰력있고, 현실을 군더더기 없이 직시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얻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인간의 골치아픈 악들을--창녀나 마약,알콜 중독등---위선적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던 것도 마음에 들고....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희망이 싹 튼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은 그 누가 되던지 간에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던 매튜, 산전수전 다 겪은 포주 챈스가 그를 믿을 수밖에는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