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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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은 잘 안 읽는 편이다. 얇다는 것이 이유긴 하지만 그보다 각 편마다 완성도가 제 각각이라는 점이 마음에 안 들어서다. 좋은 작품 하나 건지려고 쭉정이 몇 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내 성미에 안 찼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책을 보면서 그 생각이 편견이라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인 이 책은 각 작품마다 완성도가 비교적 골랐는데, 그러고 보니 작가마다 작품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장편이나 단편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단지 장편은 곧바로 비교가 어려운 반면, 단편은 한 권에 몰려 있으니 그 차이가 금방 눈에 들어온 것일 뿐, 크게 보면 똑같다는걸 몰랐던 것이다.

 

 이 단편집을 집어 들면서 제일 걱정되던 것은 1. 이 책이 정말로 괜찮은 걸까? 와  2 . 각 단편마다 완성도에는 얼마큼 차이가 나려나 하는 것이었다. 일단 첫번 째 수록편인 <길들지 않는 땅>을 읽으면서 단편 치고는 괜찮다는 것에 안심이 됐다.--난 이 작가의 전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 책에 대해서도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다.-- 두번 째 고민이던 완성도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보니 판가름이 났다. 9개의 단편이  뚜렷하게 눈에 뜨이는 수작도 없지만 그렇다고 처지는 작품도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줌파 라히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꾸준히 전교 1등을 하는 사람을 연상 하시면 된다. 기분 나는대로 성적이 올라갔다 내려 갔다 하는 보통 학생과 달리 성적이 일정하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금보다 더 내려갈 일은 없다는 걸 뜻한다. 대단하다 싶었다. 단지 인도출신작가라는 희소성에 기대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거기가 탄탄한 글발, 그녀가 잘 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여성으로써 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가 우리만의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들려주기 위해서는 여성 작가들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건 아니건 간에, 그리고 그녀들이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건 아니건 간에, 무엇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늘 뿌듯하다. 이런 시도들중에서 가끔 히트작이 나온다는걸 ,그리고 이런 시도들이 전통이 된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가 전작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구나 라는걸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내가 그녀에 대해 감탄한 것이었다. 만약 다른 작가였다면 이 정도의 수확만으로도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발전되어갈 지 기대된다면서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고른 완성도를 내어 놓는 것만도 무척 드문 일이기 때문에, 기대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사상이 알토란같이 성숙했을때 어떤 글을 쓰게 되려나 흥분이 되야 마땅했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서 오히려 난 이제 그녀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이 남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분명 문장이나 글을 쓰는 솜씨 면에서는 이미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지만 발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그녀가 다른 작품을 쓴다면 여기서 들려준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줄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걸 파악해 내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이 책안에서도 벌써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완성도만 비슷한게 아니라 이야기 마저 비슷했으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각 단편마다 다른 소재인데도 톤이나 상황을 다루는 태도가 한결 같다든지( 나약하고 외로운 주인공들),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여자를 주인공으로 할 때와 톤이 별반 다르지 않고 ( 그러다보니 분명 이름은 주인공이 남자였는데 여자처럼 생각하고 말을 한다), 주인공들의 배경들이 놀랍도록 닮은 꼴인데다 ( 인도에서 이민을 온 부모를 둔 명문대 출신), 그들이 운명이라고 생각 되는 것에 끌려 다니는 모습마저 비슷했다. 분명 9개의 단편이었음에도 마치 쌍동이를 보듯 구별이 쉽지 않았다. 아무리 잘 차려진 밥상이라도, 그 밥에 그 나물이라면 지루하지 않겠는가? 질릴 것이다. 질리기 이전에 이미 흥미를 잃겠지만서도...

 

소설은 문장만으로 판가름이 나는 세계가 아니다. 상상력, 개성, 세상을 해석하는 통찰력,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는 휴머니즘, 인간의 불행을 다독이는 페이소스, 그리고 아주 사소한 하나일지라도 우리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비전에 개방성과 성숙성...그런 것들이야말로 소설을 빛나게 해주는 양념들이다. 하지만 줌파 라히리는 자신의 세계를 뛰어 넘기엔 너무 범생이었다. 세심한 관찰력에 멋진 글발과 문장을 이어가는 지성은 있었지만, 인상적인 작품에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독창성이나 기발함과 통쾌함, 인간의 애환을 볼 줄 아는 인간애, 빛나는 우연성, 기타등등 창조적인 면이 부족했던 것이다. 단지 그녀에게 줄기차게 많던 것은 과거, 과거, 과거뿐이었다. 불평을 하면서도 부모의 나라인 인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벗어나려 저항 해보지만 성공한 적이 없던데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불행했다. 그렇다보니 이 책에 가장 많은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자의식이였다. 그것만은 이 책에 차고 넘쳤다. 마치 우리가 바라는 것은 타인의 불행이라는걸 안다는 듯이.

 

거기다 눈살을 찌프리게 하는 순종주의... 인도 작가인 아룬다티 로이와 즉각적으로 비교가 됐다. 인도에서 자라났음에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인상을 빼어나게 그려내던 로이와 달리 그녀가 서구의 페미니즘 세례속에서 자라났음에도 여전히 순종적인 여인을 그려낸다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불평등에 대한 인식도 있고 반항도 해보지만, 과거의 틀을 깨 부수기엔 그녀는 너무 착했다. 희생적이 되기엔 너무 이기적이었고. 하여 의사나 변호사나 박사가 되지 못하면 세상 결단나는 줄 아는 안정 지향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불행하다고 난리를 치는데, 놀랍지도 않았다. 어찌보면 우리와 다를게 없다는 점이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나, 비판적으로 보자면 왜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거요? 묻고 싶었다. (구시대의 틀을) 벗어 던져도 세상이 결단나지 않더라는걸 보여준, 아니 그걸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 하얀 이빨> 을 쓴 제이디 스미스, 똑같은 이민 2세대지만 세상을 통찰하는 면에서는 오히려 어린 스미스가 더 어른스럽고 당차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이디 스미스를 좋아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 최근에 읽은 다른 여류작가 유디트 헤르만과도 비교가 되던데,  비록 완성도적인 면에서는 줌파 라히리가 우세하겠지만, 기대된다는 점에서는 헤르만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런걸 보면 좋은 작품을 쓴다는 것은 학력이나 배경, 연륜과 지식과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지 싶다. 그저 인간으로써 인간의 조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이해한 사람인가와 타고난 재능의 문제일 뿐... 하여, 그녀가 범생이인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목격하게 된 이 책 < 그저 좋은 사람 > 완성도가 높아 실망은 하지 않겠지만 잔상 역시 남지 않는 그저 그런 책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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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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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책은 나와 함께 읽던 엄마가 요즘은 책을 멀리하신다.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진 나는 어느날 엄마에게 왜냐고 물어 보았다.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요즘 책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아쉽다는 듯 한마디 보태신다. " 너희들 키울때 읽은 책들이 참 재있었는데, 요즘 책은 그만 못 한 것 같아..." 습관적으로 변명할 말을 찾던 나는 순간 멈칫 했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서다. 학교 졸업 후 그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그 시절 책들이 더 좋다는 말에는 나 역시 동감이었다. 왜일까? 의문이 들었다. 왜 그때 읽은 책들에 더 정감이 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쩜 그땐 재밌는 것들이 드물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지금처럼 냉소적인 어른이 되기 전이라서거나, 구슬 굴러가는 소리에도 웃음을 터트린다는 감성 넘친 시절이라서도 그랬을 수도 있다. 혹은 어쩜 그 기억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과대 포장된 그리움 말이다. 오히려 지금 그 책들을 읽는다면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었으니까. 진짜 그럴지가 궁금해졌다. 눈치 채셨을지 모르는데,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그 궁금증을 이 책을 통해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문의 답은' 그렇진 않더라.' 였다.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내심 흐믓했다.


 

실은 이 책의 작가 팔리 모왓은 어릴적 나의 우상이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그의 책인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를 읽지 못하게 숨겨둘 정도였다.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라치면 다가오는 끔찍한 상실감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밌는 책을 찾을 수 없다는 허무함에 이어지는 우울, 책을 다 읽어 버렸다는데 대한 자책감--실은 하도 읽어서 외울 정도였지만서도--무기력감에 비탄...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내가 그 시련을 견뎌 냈는지 모르겠다. 이겨낸 내가 기특할 뿐이다. 어쨌거나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망각 속으로 보내 버려야 했던 그를 어른이 되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아무 생각 없이 집어든 이 책의 저자가 팔리 모왓이라는걸 알고는 펄쩍 뛰었다. 오호,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책을 한 권만 쓰신게 아니었군. 반가운 마음에 허겁지겁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아직도 난 그의 책을 좋아할까? 조금은 의심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

 

다시 한번 내가 왜 그를 그토록이나 좋아했는지 알게 됐다. 그에겐 내가 좋아하는 모든 자질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정함, 유머, 유년 시절의 천진함을 그대로 간직한 행동거지, 동물을 이해하려는 따스한 마음, 주어진 지식이 아닌 자신이 목격한대로 이해하려는 정직성, 편견에서 벗어날 줄 아는 개방성, 아무도 살지 않는 툰트라에서 1년동안 늑대를 연구할 만큼 무식한 저돌성,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이건 에스키모 원주민이건 간에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허한 균형감각...전생처럼 느껴질 정도로 흐릿해진 시절이지만 그 어릴때도 내 눈은 틀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엄마의 말도 맞았다. 예전의 책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재밌었다.

 

사설이 길었는데,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호구지책으로 캐나다의 산림 연구원이 된 저자는 늑대를 연구하라는 발령을 받고 마지못해 툰드라로 떠나게 된다. 남들은 말도 안 된다며 기겁한 프로젝트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시켰겠지 라는 단순 무식한 생각으로 받아들였다는 저자는 하여 삼림이 우거진 허허벌판 속에 달랑 혼자 남게 된다. 외로움은 뒷전이고, 우선 연구감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하던 그는 우연히 늑대 가족을 만나곤 엄청 기뻐한다. 다행히도 그가 어설프게 지었던 아지트가 늑대가 지나가는 길 위에 있었던 것이다. 늑대를 만난 김에 허둥지둥 연구를 시작한 그는 그날부터 그가 늑대를 관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다소 멍청한 이 직립 보행 괴짜를 관찰하는 것인 지가 애매한 관찰 일지를 적어내려 가게 된다. 그리고 그 1년 간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냈을 때가 거반 40년 전이니, 과거엔 늑대에 대해 편견이 심했다는 사실을 모르실 것이다. 그런데 40년 전에는 늑대는 그야말로 인간과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파렴치한 놈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순록 숫자가 감소하는 것이 다 늑대 탓이라고 판단한 정부가 마구잡이로 늑대 사냥을 허가해 주었고, 그 덕에 늑대의 수는 급감해 가던 중이었다. 저자는 이에 의문을 품는다. 늑대 개체 수가 그렇게 줄었음에도 순록 수 역시 줄어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1년간의 연구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늑대의 주식이 순록이 아니고 쥐라는 사실을 밝혀내다. 그간 순록이 줄어든 것은 늑대가 아닌 백인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명확하고 논리적인 설명에도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핑거 포인팅... 죄를 가리키는 방향에 오류가 있었음에도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 명백한 사실이 그 당시엔 이권 다툼에 정치권까지 끼여들어 모왓을 거짓말장이로 몰고갔다니 참 어이가 없다.

 

그렇게 그가 당시론 파격적으로 늑대에 대한 진실만을 적어 내려갔다는 점이 마음을 울린다. 오만과 이권이란 색안경에서 자유로운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니 말이다. 얼마든지 인간의 입맛에 맞춰 늑대는 정말로 못된 놈들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 우상이었던 그는 차라리 인간의 오해를 살 망정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역시 내가 존경할 만한 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지 진실해서 이 책이 맘에 든건  아니다. 그보단 재밌었기 때문이다. 처음 늑대를 연구 하겠다면서 오도방정을 떨때부터 그는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군다나 그가 관찰하는 늑대 가족들은 인간에게도 보기 드문 개성과 인간미를 갖추고 있었는데, 듬직한 가장 늑대와 새침한 엄마 늑대, 그리고 삼촌 늑대 역활을 톡톡히 하던 늑대 알버트와 통통 튀던 아기 늑대들등, 읽는 동안 그 만큼이나 나도 그들에게 애정을 가질 수 밖엔 없었다. 모왓이 늑대를 따라한다면서 소변으로 경계를 표시 하는 장면이나, 늑대를 관찰하기 위해 위장 관찰 중인 그를 보곤 " 쟤 뭐니? 좀 바본건 같지 않니? " 라는 표정으로 쳐다 봤다는 늑대들, 소변을 보는 모왓을 향해 응큼한 눈길을 보냈다는 엄마 늑대, 그리고 늑대 말을 해석해 주던 에스키모 주술사의 이야기등, 얇은 책임에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어찌나 재밌던지 그가 철수한다고 하니까 내가 다 섭섭하더라. 이미 그가 40년전에 그만 둔 일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1년만에 늑대 연구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그는 그 뒤 늑대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 덕에 지금은 늑대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밌다. 얇다. 너무 우스워 내내 낄낄거렸다. 재밌는 동물기를 넘어 좋은 책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울지 않는 늑대라는 칙칙한 제목은 부디 잊어 주시길. 기발하게 재밌는 책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거 혹 아시는지. 늑대를 이해하는 길이 인간을 이해하는 길도 된다는 것 말이다. 존 던이 말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결국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위한 이해이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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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2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읽었답니다. 하하


이네사 2010-01-25 18:47   좋아요 0 | URL
읽으셨다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세 이해 하시겠군요.
정말 재밌죠. 너무 얇아서 좀 아쉽더군요. 이것에 세배 정도는 되도 좋았으련만 말여요.^^
 
언더그라운드 맨
믹 잭슨 지음, 강미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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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드라운드 맨이라는 제목이 지하인간을 떠올렸다. 지하인간을 둘러 싼 SF물인갑다 했는데. 기괴하다는 점에서는 공통되긴 했지만 SF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하인간을 둘러싼 이야기도 아니었고... 초반 하도 지루하길래 안 읽으려 했는데, 그럼에도 뭔가 잡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이어지는 지루한 전개, 6개월이란 기간 동안의 괴짜 공작의 일지임에도 커다란 사건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없음으로 인해 이야기는 참 더디게 이어졌다. 보통 같았으면 초반 1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던져야 함이 정상. 그럼에도 이 책은 그러지 못했다. 색다른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일까? 책을 읽는 내내 궁싯거려 봤지만 뭔지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인내심을 가지도 읽다보면 읽힌다는 것 외에는... 그러니 이 책을 어쩌다 집어드신 분들은 천천히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찬찬히 문장을 씹어 가는 동안 재미를 느낄 수 도 있으니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1800년대, 괴짜 공작으로 유명했다는 제 5대 포틀랜드 공장 윌리엄 캐번시디 -스콧-벤딩크 공작이 죽기 전 6개월의 일기를 적어 내려간 것이다. 많은 돈과 지위를 타고 태어났지만 평생 홀로 고독하게 살았던 공작은 인간과의 접촉을 두려워 한 나머지 지하로 터널을 파고 그 길을 지나다녔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천제 자폐아가 아니었을까, 의심되는 그의 기행은 지도에 대한 집착이나 뼈에 대한 관심으로도 표출이 된다.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하는 기행을 해대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형아니, 정상이 아니니 괴물이니 라는 말로 그를 이해했다고 한다. 과연 그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바로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바깥 세상엔 괴물로 비쳐진 그가 실은 지극히 섬세한 사람이었고, 남에게 두려움을 주기보단 남을 두려워 한 사람이었으며, 너무도 민감한 나머지 세상과의 절연을 하게된 심약한 사람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추하게 늙어가는 자신을 추스리는 것도 힘들어 하던 그는 나날이 약해지는 자신의 몸때문에도 고민이 많다. 그런 그를 너무도 자상하게 돌봐주는 시종 클레멘트, 그는 노인을 마치 한 돌이 된 아기처럼 돌봐준다. 자신의 주인이 공작을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고, 또한 둘 사이에 계약 관계를 넘어선 우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공작의 내면이 드러난 일지와 그를 바라보는 이웃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공작은 어떤 모습일까? 심약하고 섬세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유머를 구사할 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인간 다운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귀족이라는 신분에 얽매여 다른 사람들을 천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열린 마음과--열린 마음이라서라기 보단 신체가 워낙 부실한 것에 원인이 있는 것 같지만---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끝장을 보는 열정과 오래전 거절된 사랑을 잊지 못하는 로맨티스트였다. 말하자면 이웃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보듬고 감싸 줘야 하는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결국 완전히 미쳐서--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미친게 아니지만-- 파국으로 끌려 가는 모습은 참담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시대를 앞서 나간 사람이었을까? 그가 현대에 태어 났다면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천히 읽어내려가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소설이다. 어디에도 존재할 것 같지 않는 괴짜 공작을 내세워, 과연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또 우리가 선입견을 버리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지 생각하게 했다. 실상을 알게 되면 그나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영국에 실존했다는 괴짜 공작의 생활이 궁금하신 분들은 집어 드셔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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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평안은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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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세상사 라는 것이 " 네가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다. " 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는게 아닌가 한다. 어리고 순진하며 세상에 물들지 않았을 때야, 아니 그보다 정확히 말하면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을 때야 인간이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성토를 해대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오히려 그가 비난했던 사람보다 더 부패해 있을 경우를 보게 되니 말이다. 솔직히 그건 전혀 우습지 않다. 허탈하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인간이란게 결국 거기서 거기구나 싶어 회의가 생긴다. 인간이란 눈 앞에 욕망이란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물리칠 정도의 인내심도 없고, 지성도 없으며, 그저 똑같은 공장에 들어가면 똑같은 모습으로 나오는 메카니즘의 노예일뿐인가 싶어 한심해진다. 과연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그 운명에서 벗어날 길 없은 연약한 존재들일 뿐일까? 아니라고 강력하게 저항하고 싶다시는 분들은 이 책을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왜 그들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질 못하는지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전통과 백인 기독교 간의 세력 갈등을 그려낸 치누아 아체베는 이 책에서 그 자신의 조국인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한 엘리트의 몰락을 그려내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타성과 관습과 야만 사이에서 아귀다툼의 부패상을 재현함으로써, " 아프리카인들은 어쩔 수 없다" 는 백인들의 경멸을 사고 있는 불쌍한 나라 나이지리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총명한 덕에 선교사들에게 뽑혀 장학생이 된 오비 오콩고는 영국에서 3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고국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해 줄거라 기대를 하고, 그 역시 새로운 나이지리아를 위해 일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고급 공무원이 된 그는 하지만, 많은 돈을 벌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늘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 씀씀이가 지나치게 커 버린 탓이다. 지위가 상승했으니 그에 걸맞게 차도 사야 하고, 고향에선 장남인 그가 돈 보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다, 그에게 유학 자금을 빌려준 단체에서도 돈을 갚으라고 성화다. 자신의 처지가 당신들 생각하는 것만큼 멋지지 않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한 오콩고는 결국 가불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군다나 서구식 교육을 받은 클라라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 그는 결혼을 하려 하나 클라라의 집은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 천민, 기독교 선교사인 아버지조차 관습을 깰 수는 없다면서 반대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은 허락되지 않고, 돈은 갈수록 쪼들리며, 클라라마저 원망 속에 떠나가 버리자, 결국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는 그동안 금기시해왔던 일들을 하게 된다. 뇌물을 받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에 능숙해지는 것은 일도 아닌 법, 나중엔 돈이 없는 여자들에게 섹스를 요구할 정도로 철면피가 되버린다. 자신이 그런 일들을 하게 된 것은 절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시대가 그것을 요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뿐이라 생각하고 있던 오콩고는 결국 형사들에게 덜미가 잡히면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  

 

법정에서 히죽대며 서 있는 그를 향해 판사는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인 그가 그렇게 빠른 시간내에 부패한 점을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한다. 나라를 위해 재능을 써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피고 오콩고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고국? 그것이 내게 해준 것이 뭔 데? 이 나라가 이렇게 엉망진창인게 어디 내 잘못인가? 나보고 그걸 어떻게 바로 잡으란 말이야.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니까? 라면서 말이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 어찌 내게만 청정하게 살 것을 요구하냐고 오히려 그는 큰소리 친다. 그동안 어디선가 줄기차게 들어 온 변명들과 비슷하지 않는가. 그런걸 보면 인간이란 시대와 나라를 뛰어 넘어 똑같은 면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책의 묘미를 들라치면 엘리트의 부패 과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 유학생이자 엘리트라는 휘광에 갇혀 허우적대다 결국 무기력하게 몰락하는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마치 사실을 보는 듯 생생했다. 왜 치누아 아체베를 아프리카의 대표적 내진 유일한 토속 작가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동리님과 비슷하지 않는가 싶던데, <무녀도>를 생각나게 하던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진다.>도 그렇고,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극한 심리를 민족적인 언어로 잘 포착하는데 있어 두 분 다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이 <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의 연작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에서 기독교를 받아 들임으로써 아버지에게 쫓겨 났던 그 첫째 아들이 오콩고의 아버지라니,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나로써는 그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그렇게 몇 대를 걸쳐 대대로 이어진 가족의 비극사, 나이지리아의 가혹한 운명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집어 드셔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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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 메두사 컬렉션 2
제프리 디버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미국 위스콘신 주 한적한 호숫가 마을 별장에 놀러온 변호사 부부가 살해된다. 죽기전 911에 "여기..."라는 메시지를 남긴 남편의 신고에 따라 여경관 브린이 파견이 된다. 별 일 아니겠지 라는 마음으로 별장에 다다간 그녀는 별장안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범인 두명과 맞닥뜨리게 된다. 헐레벌떡 간신히 도망치던 와중에 그녀는 별장에 놀러왔다 마찬가지로 범인들에게 쫓기고 있던 미셀을 만나게 된다. 미모의 배우 지망생이라는 그녀는 하이힐에 얇은 옷만 입고 덜덜 떤 채 숨어 있었다. 쫓아오는 범인들을 피해 그 둘은 숲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깜깜한 밤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 돌로 짓찧은 쇠로 간이식 자석을 만든 둘은 더듬 더듬 야간 초소를 향해 움직인다. 하지만 곧 그들을 쫓는 범인들의 소리가 들려 오는데... 

그러니까, 이 책의 줄거리를 압축해보면 이렇다. 딱 7줄 되겠다. 이 책이 장장 528페이지나 되는 것에 비하면 뒤 배경 묘사가 얼마나 장황한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상황 묘사가 장황해야 했을까? 꾸며낸 이야기기 때문에 그렇지 않는가 한다. 억지로 반전에 반전을 담은 소설을 만들려다보니 무리하게 설명이 길어질 수밖엔 없었단 말이다. 그렇다보니 중반 정도를 지나는데 새롭게 상황이 반전될떄마다 스릴을 느끼는게 아니라 짜증이 확 밀려 올라오더라. 다행인건, 반전 이후에 이어지는 글들이 그나마 읽을만한 것들이었다는 것이여서 짜증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짜증 확~~~ 가라앉히고, 짜증 확~~~ 가라 앉히고, 짜증 확 가라 앉히고 대강 3번 정도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끝장이 보이던데, 어찌나 반갑던지... 

다시 말하면 글발은 그래도 부족하지 않은 작가였지만 심하게 만든 티가 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동안 생각해서 잘 짜여진 얼개로 썼더라면 독자들이 덜 고생을 했을 것을 싶다. 작가가 책 한 권을 쓰려면 적어도 1년을 걸리고, 이 책의 저자처럼 독자들이 넘쳐나는 사람은 독자들의 열화같은 성화에도 책을 내야 한다니...그렇다보니 이런 무리수를 두는 책을 내게 되기도 하나보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읽을만한 책이긴 했다. 바쁘게 쓴 책이 이 정도라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다는 책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분명 이 책보다는 흥미롭고 재밌는 독서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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