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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저스틴 ㅣ 펭귄클래식 65
로렌스 더럴 지음, 권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연작의 첫 번째 편이다. 네 편에 걸쳐 이어지는 이야기의 얼개를 화자인 내 입장에서 회고하고 있는 책으로, 후편을 읽기 위한 초석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화자인 나 달리는 한적한 섬에서 죽은 애인인 맬리사의 아이를 키우면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다. 위대한 작가가 되기엔 재능이 부족하단걸 알고 있는 나는 내 자신을 위해 --발표하긴 위함이 아닌--과거를 회상하는 글을 써 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집트의 북부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시기로 돌아간다. 거기서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 정부 저스틴, 그녀의 부자 남편인 네심, 희생적으로 그를 사랑했던 애인 맬라니, 그리고 인습을 우습게 여기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의사 발타자르, 순수한 영혼이었던 화가 클레어, 승진에 목숨거는 외교관, 저스틴에게 버림 받은 후 상처를 소설로 승화시킨 전남편등...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묘하게 섞여들던 매혹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그곳에서 저스틴과 사랑에 빠진 그는 곧 손에 쥐어지지 않는 사랑과 배신, 불륜과 질투, 순정과 열정, 이기심과 저항하기 힘든 유혹의 감정에 대해 알아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핵심 인물인 저스틴은 어떤 인물일까?
명문가 출신의 거부인 네심 아내 저스틴은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남편을 잘 만나 귀부인이 된 여인이다. 어린 시절의 비참한 가난과 친척의 강간, 가출에 이은 첫 번째 남편과의 만남, 한때는 행복했으나 당사자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 채 끝난 결혼, 딸의 출산과 유괴에 따른 딸의 죽음... 가진 것이라곤 상처와 비루한 과거뿐인 그녀 앞에 네심이라는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모두 그 둘에게 의구심과 걱정을 보내지만 예상과 달리 저스틴은 명문가의 아내 역활에 조용히 안착되어 간다. 사람들은 사교계에 완벽한 한 쌍이 등장한 것에 환영하면서 저스틴의 불운이 이제 끝났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속사정도 그러했을까?
알렉산드리아를 떠도는 소문의 주요 등장인물인 저스틴을 만난 그는 명문가의 아내인 그녀가 가난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에 우쭐해진다. 자연스럽게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된 달리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곧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스틴에겐 남편이, 그에겐 동거녀인 맬라니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내의 친구라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신사 네심, 그만을 오매불망 쳐다 보고 사는 댄서 멜라니의 존재는 열정의 크기만큼 둘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더군다나 그는 점차 저스틴이 섹스 중독자이며 그 외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걸 알게 된다. 저스틴도 그것을 자인하는 가운에 과연 사랑과 정사가 분리되어 질 수 있는 것인지 그는 자문하게 된다. 그 둘의 친구인 동성애자 의사 발타자르와 한때 저스틴을 사랑했던 클레어는 그 둘의 관계가 좋은 결말을 내지 못할 것이라면서 걱정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금지하면 할수록 불이 붙는 법, 남편 몰래 밀회가 늘어나면서 둘의 대담함은 뻔뻔한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 점차 둘의 관계가 비밀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저스틴은 남편의 질투에 몸서리치게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 자명해 보이는 가운데, 제발 저린 그는 네심이 복수를 할 거라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네심은 그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때문에 비참해하는 남편을 연기할 뿐이다. 네심에게 연민을 느끼는 나, 그렇다면 과연 네심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저스틴이 떠나게 된 그 날의 사건을 배경으로 나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따져보게 되는데...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드디어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에 우선 흥분을 했다. 로렌스 더럴의 명성은 그의 막내 동생인 제럴드 더렐에 의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아마도 내 평생 읽지 못할거라 포기한 책을 이렇게 빨리 한글로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그가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는지, 내진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도 모른채 그의 책을 기다린 것에는 무엇보다 제럴드 더럴의 힘이 크다. 제럴드가 그의 깜찍하고 매력적인 책< 나의 특별한 동물 이야기>에서 묘사한 형의 모습은 잊기엔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언젠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거라고 호언 장담하고, 동생이 몰고온 온갖 사고뭉치와 소란을 "예술을 하는데 방해한다며" 엄마에게 불평하며, 자유로운 정신에 기발한 유머감각의 소유자인데다, 본인이 괴짜인 만큼이나 괴짜 친구들을 몰고 다니던 , 하루종일 타자기를 두들겨 댔다는 첫째 형이 바로 그였는데, 당시 얼뜨기 예술 추종가쯤으로 여겼던 그가 실제로 영국 대표 작가가 되었다는걸 알고는 무척 놀랐었다. 한 집안에서 뛰어난 문인이 둘씩이나 나오기란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형 로렌스의 작품이 궁금해 지는 것은 당연했다. 특별한 형제의 특별한 책임이 확실해 보였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그의 책은 내가 그렇게도 오매불망 기다린 보람이 있었을까? 한 편만 읽은 지금엔 ---실은 2권의 중간 정도 읽었지만--대충 만족스럽다. 첫 번째 권이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저스틴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랑 타령이 주라 좀 불안했는데, 2권째인 발타자르를 읽어보니 그게 다 작가의 전략이었다. 1권에서의 진실이 2권에서는 전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양상이 180도 달라지는데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노련하게도 작가는 1권에선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사건을 전개 시켜 나가던데, 역시 영리한 작가의 탁월한 전개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하긴 명성이 괜히 생긴 것이겠는가. 주목할만한 무엇인가가 있으니 생긴 것이지...
결론적으로 2차대전 이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이국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본성과 인간관계에의 복잡한 이야기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필체로 그려내고 있던 소설로 보심 되겠다. 읽으면서 내내 과연 지금 이런 소설을 쓸만한 작가가 과연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없지 싶다. 스케일적인 면에서나, 인간 본성을 따지고 들어가는 집중력에서나 ,인물 개개인을 무리없이 설명해내는 이입능력면에서나, 현대 작가들은 이렇게 힘들게 쓰지 못한다. 읽어 보시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하실 것이다. 소설적인 재미를 본격적으로 느껴보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강추! 첫 번째 권이라 추천작에 넣지만, 연작을 다 읽고 나선 어디로 배치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인상으론 거장의 손에 잘 짜여진 페르시아 융단같은 이야기란 느낌이라 강추천작에 넣어지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하니, 주의하실 것은 첫 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실망하시진 마시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연작 소설이다. 네 권을 다 읽어야 그림이 비로서 완성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