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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세계의 강박이 되다시피하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과연 당신은 빌을 단죄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소설이다. 때는 1990년대 전립선 암을 앓은 뒤 숲 속 오두막에 은거하고 있던 소설가 주커만은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온 노교수 콜먼과 친해지게 된다. 평생을 봉직한 대학 교단에서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나다시피 한 콜먼은 2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흑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고발당한 그는 평생 자신은 언어를 잘못 사용해 본적이 없다며 항변을 하나 소용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무력하게 쫓겨난 것은 단지 인종차별적인 발언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그간 무자비하게 대학을 혁신한 데 따른 반발도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너무 유능했던 나머지 적이 생겼다고나 할까. 유능함을 질투하는 무능한 집단은 어디나 있는 법이니 말이다. 자신이 무고하게 밀려났다 생각 한 그는 그 와중에 충격으로 아내마저 사망하자 분노에 떤다. 대학이 어떻게 썩었고 부패했으며 타락하고 있는지 보여 주겠다면서 <검둥이>란 제목의 회고전을 쓰고 있던 그는 어느날 자신이 그것을 끝내지 않을 것임을 주커먼에게 고한다. 더불어 일흔이 넘은 자신에게 딸보다 어린 애인이 생겼다는 것을...
콜먼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밝힌 포니아 팔리는 대학에서 청소부 일을 하는 서른 넷의 여자다. 계부의 성적 학대와 자신만 알던 엄마를 피해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한 그녀는 거리를 전전하면서 별별 일을 다 겪었다. 멍청하니 만만할거란 이유로 목장주와 결혼을 한 그녀는 곧 그것이 실수였음을 알게 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남편은 외상성 증후군을 앓고 있었고, 그것은 곧 그녀를 시도 때도 없이 패는 것으로 발휘된다. 살기 위해 이혼을 선택할 수 밖엔 없었던 포니아는 이혼 후에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전남편이 두렵다. 어느날 집에 불이 나 아이 둘이 사망하자 남편의 분노를 극에 달하고, 아이 둘을 한꺼번에 잃은 포니아의 슬픔 역시 한도를 넘어선다. 두 번의 자살 시도끝에,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살고 있던 포니아는 분노에 눈이 먼 콜먼을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정신 연령이나 겪은 일들로 따지자면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이가 먹었다고 말하는 포니아에게 콜먼은 홀딱 반한다. 다른 사람들에겐 단지 치욕스런 애욕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적어도 그 둘에겐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둘은 서로에게 딱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포니아에겐 콜먼의 친절이, 콜먼에겐 포니아의 세상 모든 것을 다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념이... 그 둘의 사이에 흐르는 진정성을 알게 된 주커먼은 그 둘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그건 주커먼의 이야기고, 대학 구내엔 그 둘에 대한 험악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콜먼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던 프랑스 태생의 델핀 루 교수는 콜먼에게 익명의 협박 편지를 보내고, 자식들은 그와 대화하기를 꺼리게 된다. 자신이 추문의 한가운데 서 있는 걸 알게 된 콜먼은 자신이 살아 온 한 평생을 되집어 본다. 그들이 자신을 추한 노인네로 보는 것에 한심해 하던 그는 어쩌면 그들의 오해가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제나 그를 떠난 적이 없던 자신의 비밀이 떠오른 콜먼은 문맹에, 청소부인, 너무도 자존감이 낮아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는 어린애 같은 포니아가, 미국에서 가장 밑바닥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가 실은 자신과 똑같다는걸 깨닫는다. 그 둘이 연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찾은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도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기로 한다. 교통사고로 끝장이 나기 전까지...
둘의 비극적인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주커먼은 사인이 의심스럽다. 둘의 죽음이 포니아의 전 남편의 짓이라는걸 밝혀 내려 하던 그는 우연히 콜먼의 비밀을 알게 된다. 과연 콜먼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분노의 콜먼을 잠재웠으며, 포니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주커만은 비로서 왜 콜먼이 회고전을 끝맺지 못했는지 이해하게 되는데...
아, 수다스런 로스 아저씨. 라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 많은 소설이었다. 어찌나 말을 청산 유수로 쏟아 내던지, 읽다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 좀 가끔 가다 쉬어주기도 하고 그래야지 말이야, 무슨 말을 그리 쉴새 없이 풀어놓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집중력을 읽어버리기 쉽상이었을텐데, 헉헉 대기는 해도 길을 잃어버리진 않을만큼 흥미진진했다. 잊지 마시라. 필립 로스는 다른건 몰라도 자신의 글에 자신만만한 작가라는 사실을. 또 그럴만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마냥 사랑스러웠다는건 아니다. 사실 그의 글을 여자들이 보기엔 눈살이 찌프려지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는 왜 빌 클린턴이 스캔들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이 책을 쓴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 느낌은 이랬다. 과연 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그 누가 있겠는가 라는 말을 그는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라고. 물론 그건 저자가 빌을 좋아하거나 옹호해서는 아니다. 그보단 빌 클린턴 만큼이나 성에 대해선 오지랖이 넓었던 자신을 옹호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말하자면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 세상에 타인을 마음껏 비난할만큼 순결한 자가 있다고 보시는가? 그가 내세운 순결하지 않는 자의 표상이 바로 콜먼이다.
콜먼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고결남이다. 고전 문학 교수이자 학장으로,결혼 한 이후로 아내만 바라보고 산 사람이자 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 유능과 능률을 중시한 실리주의자인 그는 한마디로 존경받는 노년을 보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는 이유로 한 순간에 몰락해 버리다니... 겉으로 보기엔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콜먼의 분노는 당연했다. 미국 사회는 미친게 분명했고, 인간이란 믿을 게 못되는 배은망덕한 종자들이며, 삶에서 합리성을 찾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한참 콜먼의 분노에 동참하던 독자들은 마침내 콜먼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건 모두 콜먼이 자초한 일이었다는 것을. 콜먼은 보이는 것처럼 순결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애인 포니아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포니아의 타락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콜먼의 타락은 자신의 의지였으니 말이다. 이제 필립 로스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타인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할 만큼 윤리적으로 깨끗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좀 캥겼다. 내가 마치 편협한 마녀가 된 것처럼.
글쎄, 과연 없을까? 물론 빌 클린턴의 스캔들이 적어도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란 건 안다. 그건 그의 아내의 몫이니까. 그렇다고 과연 그의 행동이 옳은 것이라고 우린 말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우린 빌을 비난해선 안 되냐 이 말이다. 어떤 이유로건 완벽하게 깨끗한 사람은 없는 것이니까, 도덕군자인척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린 그저 그 누구도 비난하지 말고 입 다물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김 길태도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린 그를 비난 할 수 없는 것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윤리를 들먹이는 우리 자신을 창피해 해야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제도 모르고 남을 쉽게 판단했으니 말이다.
작가의 결론은? 애매해 보인다. 아마 자신도 차마 그렇다고 밀고 나가긴 그랬었나 보다. 한 100년쯤 후에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진 그런 결론이 위험해 보인다. 내가 보기엔 ? 그는 꼬리 잘린 여우 같아 보였다. 자신의 꼬리가 잘렸으므로 남들에게 다 꼬리를 자르라고 연설을 하는... 그렇담 우린 우리의 꼬리를 잘라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 빌 클린턴이 오프라 쇼에 나온 적이 있었다. 다른 모든 질문에 --심지어는 모니카에 대한 질문까지도, 미리 준비를 단단히 해 온 듯 했다.--청산유수로 거칠것 없이 대답을 하던 그가 딱 한번 얼굴을 붉히며 머뭇 거리는걸 봤다. 노련한 정치인인 그를 당황하게 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연애를 하게 될 당신의 딸 첼시에게 남자에 대해 뭐라고 조언하고 싶은가?
그의 답은 단 한마디였다. " Nothing." 난 그 말이 그날 그의 입에서 나온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지금까지도 믿는다.